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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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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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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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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뢰국: 리보니아 왕국(1570-1578), 쿠를란트-젬갈렌 공국(1918) }}}}}}}}}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1569~1791)
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
Lenkijos Karalystė ir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

두 민족의 공화국(1791~1795)[1]
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
Abiejų Tautų Respubl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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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 국장[2]
Si Deus Nobiscum quis contra nos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는가[3]
(1791~1795)
Pro Fide, Lege et Rege
믿음, 법률, 국왕을 위하여
(18세기 ~ 멸망)
파일:폴란드-리투아니아 최대 판도(1635).svg
163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최대 판도[4]
1569년 ~ 1795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폴란드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러시아 제국
수도 크라쿠프(1569 ~ 1596[5])
바르샤바(1596 ~ 1795[6])
정치 체제 군주제[7](귀족공화제)
국가 원수 (폴란드 국왕)
대공 (리투아니아 대공)
주요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1569~1572)[8]
스테판 바토리, 안나 야기엘론카(1575~1587)
지그문트 3세 바사(1587~1632)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1632~1648)
얀 3세 소비에스키(1674~1696)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1764~1795)[9]
인구 11,000,000명 (1771년)[10]
민족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루테니아인(루스인), 벨라루스인, 독일인, 아슈케나짐
언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루테니아어[11]
독일어[12]
라틴어
이디시어
종교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유대교[13]
통화 즈워티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569년 연방 설립
1618년 데울리노 조약
1648년 대홍수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72년 1차 분할
1793년 2차 분할
1795년 3차 분할(멸망)
국가 어머니 폴란드여, 기뻐하라
영토내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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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틀:국기|]][[틀:국기|]]

[[리투아니아|]][[틀:국기|]][[틀:국기|]]

[[라트비아|]][[틀:국기|]][[틀:국기|]]

[[에스토니아|]][[틀:국기|]][[틀:국기|]]

[[러시아|]][[틀:국기|]][[틀:국기|]]

[[벨라루스|]][[틀:국기|]][[틀:국기|]]

[[우크라이나|]][[틀:국기|]][[틀:국기|]]

[[헝가리|]][[틀:국기|]][[틀:국기|]]

[[몰도바|]][[틀:국기|]][[틀:국기|]]

[[루마니아|]][[틀:국기|]][[틀:국기|]]
언어별 명칭
폴란드어 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
/ 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
리투아니아어 Lenkijos Karalystė ir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
/ Abiejų Tautų Respublika
라틴어 Regnum Poloniae Magnusque Ducatus Lithuaniae
/ Res Publica Utriusque Nationis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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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어 Королівство Польське та Вели́ке князі́вство Лито́вське
/ Річ Посполита
벨라루스어 Каралеўства Польскае і Вялікае Княства Літоўскае
/ Рэч Паспалітая
러시아어 Речь Посполитая
스웨덴어 Polsk-litauiska samväldet
독일어 Polen-Litauen
프랑스어 République des Deux Nations }}}
1. 개요2. 성립 배경3. 정체성 및 영향4. 역사
4.1. 동군연합야기에우워 왕조의 성립4.2.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성립과 야기에우워 왕조의 단절4.3. 전성기4.4. 대홍수와 쇠퇴4.5. 폴란드 분할4.6. 쇠퇴와 멸망의 원인
5. 행정구역6. 종교
6.1. 브레스트 연합과 동방 교회
7. 정치8. 군대9. 외교
9.1. 봉신국
10. 경제
10.1. 폴란드 농노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
11. 지방
11.1. 리투아니아 대공국11.2. 왕령 프로이센
12. 문화13. 사회계층
13.1. 농민13.2. 도시민13.3. 코사크13.4. 귀족
13.4.1. 마그나트
14. 의의
14.1. 러시아에 미친 영향
15. 식민지1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중세 동유럽, 중부유럽에서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연합하여 1569년에서 1795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연합의 명칭. 지금의 폴란드리투아니아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지배하며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두 나라 역사의 전성기였다. 다만 애초에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보다 체급이 훨씬 컸기 때문에 통합 후에도 연합의 무게 중심은 폴란드에 쏠려 있었고, 사실상 폴란드에 리투아니아가 병합되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14]

정식 명칭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두 민족의 공화국(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Abiejų Tautų Respublika),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Lenkijos Karalystė ir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이다. 보통은 간단하게 커먼웰스(Commonwealth)나 제치포스폴리타(Rzeczpospolita)라고 칭한다.[15]

국가원수는 폴란드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이다. 폴란드에서는 이 시절을 제1공화국(I RP)으로 부르고 있다. 제2공화국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존재했고 제3공화국이 지금 현재의 체제다. 수도가 총 세 군데로 크라쿠프(Kraków), 바르샤바(Warszawa), 리투아니아의 빌뉴스(Vilnius)였다.

2. 성립 배경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루블린 협정을 통해 연합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385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호전적인 튜튼 기사단의 위협을 받았고 요가일라 대공은 폴란드 왕국과 크레보 동맹을 맺어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해 폴란드의 공동 국왕이 됨으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한 통치자 밑으로 연합시키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요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그 후 리투아니아에서는 폴란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으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엄연히 별개의 국가로 단지 동군연합 관계이었을 뿐이다.

1447년에 브와디스와프 2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3세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하자 차남인 19세의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에시가 카지미에시 4세로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16]된 후 두 나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보장해주기 위해, 1447년 자신을 대공으로 추대한 리투아니아의 보야르(대귀족)들에게 특허장을 내려 귀족들의 권리와 특권을 인준하고 소작농에 대한 광범위한 지배권을 부여함으로써 귀족의 정치적 권한을 강화했다. 그 뒤 대공의 권위는 떨어졌고 리투아니아는 사실상 귀족 연합체 국가가 되어 남부 타타르족의 침입과 몽골-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 시간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능력을 상실했다.

16세기에 들어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전신 루스 차르국에 맞서 리보니아 전쟁을 치루다가 거의 멸망 직전에 내몰렸다. 폴란드 또한 리투아니아에 막대한 원조를 했으나[17]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원조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러시아를 막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즉 리투아니아가 방어하고 폴란드가 원조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아예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18], 러시아의 위협에 공동대응하는 과정에서 양국 엘리트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감은 이런 여론을 부채질했다.

양국의 엘리트들은 1569년 1월 루블린 근교에서 처음으로 양국의 통합을 안건으로 놓고 회담했다. 그러나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회담은 결렬되었고, 3월 1일 리투아니아 대표단이 루블린을 떠나자 6월 6일 폴란드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부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병합했다.[19][20] 사실상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의 절반이 날아갔지만 러시아를 더 큰 위협으로 여기던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협상을 계속했다. 폴란드측은 완전히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리투아니아측은 이에 반대하고 국가연합을 주장했다. 결국 리투아니아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569년 7월 4일 지그문트 2세가 루블린 조약안에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파일:Poland_and_Lithuania_in_1526.png
루블린 조약전의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폴란드보다 훨씬 크다. 빗금 표시된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의 봉신국, 검은색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주축이 된 리보니아 연맹으로 1558년부터 1583년까지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루스 차르국, 덴마크리보니아를 놓고 리보니아 전쟁을 벌였다.

파일:Irp1569.jpg
루블린 합병의정서 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의 관할 지역[21]이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빗금 표시된 프로이센 공국과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연방의 봉신국이다.

루블린 조약에 따라서 양국은 이전대로 동일한 인물을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하고, 폴란드 크라쿠프의 세임(Sejm)에서 왕을 선출하며, 빌뉴스의 의회 및 리투아니아 대공 선출 제도는 폐지하였다. 행정과 재정 그리고 군대와 사법권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지만 폴란드보다 영토가 더 넓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 체제가 더 정교하고 판례가 많다는 점 덕분에, 폴란드의 법 체계는 리투아니아 대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재작성되었다. 이로써 루블린 협정 전까지 단순한 동군연합 관계였던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완전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22]

3. 정체성 및 영향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중 어느 국가가 더 위대했느냐고 논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어느 쪽이 더 위대했냐고 논쟁하는 것은 현대인이 벌이는 키배에 불과하고 당대의 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은 서로를 구별하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23] 어리석은 질문이기도 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치, 사회사를 관통한 큰 주제가 리투아니아 대공국 쪽에서 혼수품으로 가져온 정교회를 믿는 동슬라브인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정립할 것이냐였으니 재미있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의문이기도 하다. 이런 양국간 정체성의 미묘함은 현대 민족주의의 시대 들어와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음 한 20세기 폴란드의 빌뉴스 병합 문제를 두고 둘러싼 논쟁 중 나온 한 폴란드측 지식인의 주장을 들어보자.
야기에우워, 호드키에비치, 미츠키에비치, 피우수트스키와 나 같은 사람은 리투아니아'인(Litwini)'들이고, 당신들 (독립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지도층) 같은 사람들은 리투아니아'족(lietuvisy)' 일 뿐이오.
미하우 유츠크니에비치 (Michał Juckniewicz)

원문에서 전자는 폴란드어리투아니아인을 뜻하는 'Litwini'란 단어를 사용했고, 후자는 리투아니아어 자체로 리투아니아인을 뜻한 'lietuvisy'란 단어를 썻는데, 문화나 정치의 지배어로서 역사가 짧았던 리투아니아어에 기반한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단절된 정체성을 고집하는 쪽은 편협하고 맹목적인 지엽적 민족주의자들인 뿐이고, 리투아니아계 정체성도 분명 가지고 있지만 보다 더 문화적으로 역사가 깊고 영향력이 큰 폴란드쪽 정치적 정체성을 주장한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자랑스러워할만한 '문화인'으로서 리투아니아인이란 뉘앙스이다.
내 조국? 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최후의 시민이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코브노요.[24] 리투아니아 땅 한복판이 고향이니 적어도 우리들의 대선배[25], 미츠키에비치보단 '리투아니아인'이라 주장할 권리가 있지.
우리 집안은 16세기부터 폴란드어를 모어로 썼소. 현대 핀란드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스웨덴어를 썼고, 아일랜드에 살던 사람들이 영어를 썼듯이 말이오.
1980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은 소설가 체스와프 미워시. 대외적으론 '폴란드 문학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본인 말대로 실제로 나고 자란 고향은 현대 리투아니아 일대였고, 본인도 그 출신과 이런저런 시사적 견해가 폴란드와 주변국 정치, 역사 문제에 맞물려서 종종 생겼던 소위 '소속'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곤 했다.
그대가 사라진 다음에야 그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느니,
내 조국 리투아니아여, 너는 마치 건강과도 같도다.
아담 미츠키에비치, 기사 타데우스 서문
이런 현대적 민족주의의 틀로선 설명이 불가능한 근세적 폴란드-리투아니아적 정체성을 그 자체로서 보지 못하면 언어는 폴란드어로 쓰여져 있는데 첫 문장은 "내 조국 리투아니아여"로 시작한 서사시를 쓴 시인이 왜 현대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삼국에서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는지 이해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양국이 동군연합을 넘어 국가연합으로 거듭나면서 대격변이 생긴 건 현대 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모태가 되는 정교회권의 루스인들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속한 루스인들의 땅, 루테니아에서 기존의 폴란드 왕국이 중세에 걸쳐 남진하면서 정복, 개발한 포돌리아, 갈리치아 같은 폴란드령 루테니아는[26] 그나마 폴란드화가 많이 진행되고, 르비우[27], 카미야네치포딜스키[28], 이바노프란키우스크[29] 같은 도시들은 확고히 폴란드계가 주도하고 있었으니[30] 어느 정도 자국의 문화와 지도층 내부에 포용을 할 수 있었으나, 리투아니아령 루테니아인 백러시아나 동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리투아니아는 기독교 왕국으로 자리 잡은 역사가 짧았고, 워낙 오리지널 '순수' 리투아니아인들의 수가 적었기에[31] 리투아니아 쪽에서 혼수품으로 데리고 온 체르니고프, 키예프, 브라츨라프 같은 지방들은 여전히 정교회의 영향력도 강했고,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폴란드 문화에 대한 반발도 컸으며, 나름 키예프 공국의 후손이란 의식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신들 이익에 맞추어 크림 칸국과 그 물주, 오스만 제국과의 변경 지대에서 코사크[32]들이 살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귀족 공화정의 평등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고, 실제로 한때는 세임의 30% 정도가 그단스크를 필두로 한 서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포교된 개신교와 흡수된 우크라이나 지방의 정교회였을 정도로 그럭저럭 잘 시행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을 넘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유럽 가톨릭 세계가 본격적으로 이교도와 이단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격에 들어가고, 많은 수의 귀족 자제들이 예수회 교육을 받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애초에 현지 정교회의 상황 자체가 몽골의 침략 이후로 리투아니아, 크림 칸국의 분쟁 지역에 놓이면서 제대로 재건 되지도 못했고, 그나마 교회 활동을 비호하던 인근 지주 정교회권 귀족들이 하나 둘씩 몰락하거나 개종하면서 근본적인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 것이다. 르부프를 중심으로 이 일대의 가톨릭 영향력을 더 공고히 하려고 했던 예수회 측과 그 계통의 귀족들은 결국 1596년, 키예프 총대주교좌를 상대로 전례는 정교회식을 유지하되 나머지 정교회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바티칸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가톨릭 교회 내부의 동방 가톨릭 교회로 전환한 브레스트 연맹을 체결했다. 더 큰 문제는 우크라이나 지방이 폴란드 왕국에 통합되면서 현지의 루스 귀족들이 점진적으로 가톨릭에 개종하고 폴란드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현지 정교도들의 위기의식을 초래했으며 또한 개종한 루스 귀족들과 루스 농민들 사이의 유착 관계가 사라지는 결과를 만들었다.[33] 가톨릭과 정교도 간에 쌓여만 가던 긴장 상태는 결국 17세기 중반 대홍수라는 엄청난 피바람과 대혼란을 불러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를 터뜨린다.

전체군주정의 특징만 뺀 복합군주제 국가이며 정치 시스템에 현대적인 요소인 민주주의, 입헌군주제, 연방제가 섞여있으며 공화정 말기 때 삼권분립을 제창하는 헌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완벽한 민주주의는 아니고 엄연한 귀족 공화정이었다.

최대 영역은 지금의 중부유럽에 해당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34]동유럽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대부분에 걸쳐 있었다. 초반에 깡패였다가 막판에 호구로 전락한 역사와 100년 이상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전설적인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로 유명하다.

4. 역사

역대 깃발. 왕조에 따라 왕실 깃발(Royal Banner)이 달라졌다.
파일: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기.png
1587년 ~ 1668년(바사 왕조)
파일: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기(비시니오비에츠키).png
1669년 ~ 1673년(비시니오비에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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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 ~ 1697년(얀 3세 소비에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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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년 ~ 1704년(베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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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 ~ 1709년(레슈친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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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 1763년(베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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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 1795년(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4.1. 동군연합야기에우워 왕조의 성립

연방이 성립하게 된 시초는 1386년 튜튼기사단을 막기 위해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일라가 결혼해 야기에우워 왕조가 성립되었을 때다.

당시 폴란드 왕국은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남계인 카지미에시 3세의 외조카였던 헝가리 왕국러요시 1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슬하에 딸 둘만 있는데다가 대왕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정력적으로 임했던 헝가리 통치와 달리 폴란드 통치에는 별 관심 없이 딸에게 폴란드를 상속하는 문제에만 골몰했다. 결국 러요시 1세는 귀족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허락하는 대신 생전에 장녀 마리어에게는 헝가리를, 차녀 야드비가에게는 폴란드를 물려준다는 허락을 받아냈고, 1381년에 러요시 1세가 사망하자 양국은 러요시 1세 생전에 체결된 협약에 따라 서로 갈라졌다. 그러나 9살의 야드비가는 폴란드를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러요시 1세의 왕비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는 역시 나이가 어렸던 야드비가의 언니 마리어의 섭정을 위해 헝가리에 남으면서 섭정을 맡아줄 사람도 없었다. 외부에서는 튜튼 기사단의 폴란드 진출도 문제였던터라 폴란드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배우자를 찾을 겸 약소국으로 전락한 폴란드와 영구 동맹을 맺을 대상을 찾아야 했다.

당시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약혼자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35]을 싫어했고, 결국 폴란드를 침공했던 다신교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요가일라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리고 요가일라 또한 폴란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튜튼 기사단의 팽창을 경계하는 상태였다. 이에 크레바 성에서 이른바 크레보 조약을 맺게 된다. 이때 폴란드 귀족들은 당시 요가일라가 빼앗은 영토를 돌려줄 것, 요가일라를 포함한 전 리투아니아인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폴란드에 합병한다'라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요가일라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고 대신 야드비가와의 공동통치를 보장받게 된다. 1386년 2월 2일 요가일라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고, 15일에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때 요가일라의 나이 35세였고 야드비가의 나이는 고작 13살 이였다. 귀족들에겐 정략결혼이 기본이던 당시 기준에는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후 야드비가가 일찍 승하하자 요가일라의 통치는 잠시 위험에 직면하지만[36] 1401년 빌뉴스 조약을 체결해 외교적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영구적 통합을 결의하였고,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37]에게 승리해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엔을 포함한 튜튼 기사단의 고위 간부들을 상당수 전사시켰다. 그 후 여세를 몰아 기사단의 본부인 마리엔부르크(Marienburg)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퇴각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비록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지만, 요가일라의 둘째 아들 카지미에시 4세는 1466년 숙적 튜튼 기사단을 13년 전쟁에서 대파하여 독일 기사단국을 봉신국으로 만들었으며 장남 브와디스와프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보헤미아 왕국의 왕으로 만들어 야기에우워 왕조의 영지를 더욱 확장해 나갔고[38] 지그문트 1세 대에는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세속화 조치로 프로이센 공국이 설립되어 공국의 종주국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주의할 것은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국가연합이 성립되기 전에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엄연히 별개의 국가로 단지 동군연합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야기에우워 왕조의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4.2.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성립과 야기에우워 왕조의 단절

1569년에 당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혈육이라곤 누이 안나 야기엘론카 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세 번이나 결혼은 했지만 그때마다 부인들이 먼저 세상을 떴다. 리보니아 전쟁에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러시아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통합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1569년 루블린 합동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기존 동군연합 관계에서 벗어나 국가연합으로 발전했다. 지그문트 2세의 계획은 앞으로 귀족들이 왕을 선출하는 선거제를 막고 누이 안나의 배우자가 왕위를 공고하게 만들도록 할 셈이었다.

하지만 1572년에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의 남계 자손들은 다 끊어졌다.[39] 결국 정국은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4.3. 전성기

지그문트 2세의 사후 신분제 의회인 세임[40]은 서둘러 군주를 선출하였고 그 결과 두 명의 인물이 물망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인도 아닌 외국인인 프랑스 왕국발루아 왕조[41]의 국왕 샤를 9세의 동생 앙주 공작 앙리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오스트리아대공막시밀리안 2세의 4남이었던 에른스트 대공이었다. 이들은 각각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부친 막시밀리안 2세의 후원을 등에 업어 폴란드 왕위를 두고 경쟁했고, 그 결과 카트린이 슐라흐타들에게 강하게 유세하면서 앙리 드 발루아가 세임에 의해 헨리크 발레지로서 왕위에 선출되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헨리크 발레지가 지그문트 2세의 누이동생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밀어주었다. 그러나 2년이 채 안되어 형 샤를 9세가 죽자 도망치듯이 크라쿠프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 샤를 9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로 즉위했다. 그는 폴란드로 돌아오라는 귀족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연방의 왕위에서 사실상 물러났다. 계획대로 안나와 결혼했으면 프랑스-폴란드 동군연합을 이루었겠지만 절대군주정인 프랑스에서 자란 헨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진절머리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헨리크 조약은 폴란드 왕위 세습도 금지했으니 그가 죽으면 어차피 동군연합은 자동으로 해체됐을 것이다.

그의 폴란드식 이름을 따 헨리크 조약이라 명명된 이 조약은 다섯 조항으로 되어 있다. 첫째, 국왕은 세임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에 의해 계승되지 않는다. 둘째, 국왕은 입법부인 세임을 2년에 한번 6주간 열게 한다. 셋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 없이 조세와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 넷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총동원을 할 수 없다. 다섯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선전포고와 정전을 선언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세임에 의해 권력이 매우 제한된 완전한 꼭두각시 국왕이었다.[42] 이런 정치적인 차이 뿐만 아니라, 헨리크 입장에서는 폴란드의 상대적으로 추운 기후, 음식, 그리고 나름 바르샤바, 르부프, 크라쿠프 같은 곳은 발달했지만 파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던 낙후된 도시 문화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도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앙리 3세에게 보낸 귀국 요청이 거절당하자 이전에 아들을 내세웠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왕위 후보자로 직접 나섰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일부 폴란드 귀족들은 에르데이 공국스테판 바토리[43]에게 즉위를 제안하였다. 폴란드 왕위를 두고 경쟁한 끝에 국왕 선거에서는 막시밀리안 2세가 승리했으나 폴란드 내 신교도 귀족들이 그가 가톨릭 교도라는 점을 들고 반대했다.[44] 결국 스테판 바토리가 신교도 귀족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재빨리 움직여 두 사람이 공동 군주로 선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공위 시대를 거치며 폴란드 귀족인 슐라흐타들의 세력의 권력이 강해지는 입헌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국왕이 아닌 슐라흐타들이 세력을 잡은 세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또한 그 슐라흐타들 위에 극소수의 대귀족들인 마그나트들이 지배권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리베룸 베토와 공통의 정치 목적을 위한 단체를 만드는 권리인 콘페데라치아를 이용해 국왕과 소귀족들인 슐라흐타들을 통제했다.

안나 야기엘론카가 수도 크라쿠프에서 내치에 집중하는 동안 스테판 바토리는 풍부한 왕실 재산을 미끼로 일부 귀족들을 끌어들여 군사개혁을 실시해 병사와 기술자로써 훈련을 받는 농민병인 피에호타 비브라니에츠카(Piechota wybraniecka)라 불리는 준상비군형 보병부대를 창설했고, 또한 코사크들을 등록 코사크군이라 하여 대거 비정규군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후사르를 중무장해 후일 윙드 후사르라 불리게 된 정예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이탈하려던 단치히를 무력으로 복속시켜 국제무역 중심지의 이탈을 막았다. 1577년 스테판 바토리는 리보니아를 계속 침탈하는 러시아에 대한 대공세를 벌여 러시아 내지로 진격했고 급기야 중심도시인 프스코프까지 포위공격하기에 이른다. 비록 현지 수비병과 시민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함락만큼은 막았지만 전쟁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매우 유리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결국 러시아는 협상을 제의해 1582년 얌 자폴스키 조약을 맺어 폴란드의 리보니아 영유건을 인정했다. 말년의 이반 4세는 일생의 목표였던 발트해 진출의 좌절과 타타르의 내습 및 귀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아들마저 때려죽이는 반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

1586년 스테판 사후 안나가 단독군주가 되었으나 이미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못해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바로 선거를 치루도록 지시하였다. 1년간의 공백 끝에 선출된 스웨덴의 왕세자 시기스문드스웨덴 국왕 요한 3세의 아들이자 지그문트 1세의 외손자로, 안나 여왕의 조카이기도 했다. 지그문트 왕자는 이모 안나 여왕의 지지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2세의 동생 막시밀리안 대공과 왕위를 경쟁한 끝에 이모부인 스테판 바토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의 치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짧은 전성기인 동시에 긴 쇠퇴기의 시작이었다. 1592년 지그문트 3세는 아버지가 승하하자 곧바로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두 국가의 군주가 되었지만 지그문트 본인은 폴란드에 남았다.[45] 게다가 종교적으로 스웨덴은 신교 국가였으나 지그문트 3세 본인은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의 영향으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한 터라, 스웨덴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결국 재위 6년만에 섭정이었던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이를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스토녜브로 전투에서 패한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로 도망친 사이에 칼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스웨덴 의회를 가득 채워 지그문트 3세를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시켰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1605년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Jan Karol Chodkiewicz)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침공했으나 다 이긴 전쟁에 입법부인 세임이 리베룸 베토를 내세우면서 정전을 선언해 결국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러시아의 혼란 시대를 틈타 등장한 가짜 드미트리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신나게 털어버리고 1610년부터 1612년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여 러시아를 사실상 병합했고, 당시 차르였던 바실리 4세를 바르샤바로 압송해 지그문트 3세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지그문트의 아들을 러시아의 차르로 옹립하는 등 러시아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 2년만에 쫒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이후로도 스웨덴칼 12세, 프랑스 제1제국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까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한, 역사상 마지막으로 모스크바가 외세에게 점령당했던 경험이다.[46] 그러나 남부 국경에서 오스만을 상대로 각각 코사크와 크림 타타르를 대리인으로 하여 벌인 전쟁, 결정적으로 몰다비아 공국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1620~1621년 전쟁에서는 군사적 결과와는 별개로 폴란드가 종주권을 포기하는 식으로 강화를 맺어 사실상 오스만의 우위를 인정했다. 더군다나 노원수인 리투아니아 대원수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전쟁 중 병사했고 그나마 첫 전투였던 체초라 전투에서 패배해 폴란드 대원수였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Stanislaw Zolkiewski)가 전사했다. 그래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세임의 결정으로 30년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사태를 주시해 국력을 크게 낭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쫓겨난 스웨덴 왕위에 계속 미련을 가져 몇 차례에 걸쳐 스웨덴 왕위를 요구하고 스웨덴은 리보니아 지역을 노리면서 몇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나 당시 스웨덴의 국왕은 지그문트 3세의 사촌, 북방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로 그의 치세 동안 강력해진 스웨덴군의 공세에 밀려 무적의 기병대 윙드 후사르가 야전에서 여러 번 패하는 등 국제적 위신이 떨어졌다. 결국 리슐리외 추기경의 중재로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이 체결되어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스웨덴의 실질적인 리보니아 점유를 인정하고 말았다.

4.4. 대홍수와 쇠퇴

이후 1632년 지그문트 3세가 승하하고 장남이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로 군주에 선출되었다.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달리 유능했던 그는 러시아의 4만 대군이 스몰렌스크를 포위하자 과감하게 자신이 직접 개혁한 군대를 직접 지휘해 지휘관까지 사로잡았다. 이후 폴랴놉카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해 20만 루블을 지불하면서 전에 획득한 지역의 영유권을 확실히 인정받았고, 또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해 서로에게 귀속되었던 코사크와 크림 칸국의 지배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해 쇠퇴 중인 스웨덴마저 압박해서 휴전 협정을 맺고, 1629년에 빼앗겼던 영토 중 일부를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크리스티나 여왕을 지지한 스웨덴 귀족들로 인해 스웨덴 왕위는 되찾지 못했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형 사고가 거하게 터졌다. 당시 중요한 군사세력 중 하나였던 코사크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준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지만, 귀족들인 슐라흐타들은 지나치게 코사크들을 착취하고 차별대우했다. 여기에 코사크 헤트만이던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야심까지 겹쳐 1648년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이들은 숙적이던 크림 칸국의 타타르들을 끌어들여 반폴란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브와디스와프 4세는 어린 아들의 죽음에 상심이 컸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사크들이 타타르와 손잡고 반폴란드 봉기를 일으키자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코사크 대봉기는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전에도 종종 코사크들이 봉기를 일으킨 적은 있었으나 그때마다 연방의 정예 병력에 대패하여 계속 복속되었다. 그러나 주테 보디(Zolte Wody) 전투를 시작으로 흐멜니츠키는 승승장구하여 코르순(Korsum)[47]과 피와브체(Pilawce)에서 계속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격파했고, 결국 1649년 7월부터 8월 후반까지 계속된 즈바라즈(Zbaraz) 공성전에서 수비대의 10배가 넘는 코사크-타타르 공성군이 끝내 점령하지 못하고 즈보루프(Zborow)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와 휴전 협정에 조인한 이후에야 봉기가 겨우 끝났다.

그러나 이후 휴전 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흐멜니츠키와 코사크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1651년 6월 베레스테츠코(Beresteczko)에서 뼛속까지 탈탈 털려서 완전 시망 수준으로까지 몰린다. 그러나 이후 바토흐(Batoh)에서 연방의 정예군을 쌈싸먹어 전멸시켰고[48]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주춤한 사이 흐멜니츠키는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브와디스와프의 왕위를 이어받은 이복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이 난장판을 해결해야 했으나 이미 코사크 반란으로 100만여 명이 죽은 상황에서 러시아는 흐멜니츠키의 요청을 받아들여 코자키들과 연합해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를 휩쓸었고, 얀 2세의 6촌인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도 폴란드 왕위를 내놓으라는 명목으로 참전하여 간신히 버티던 폴란드 일대도 휩쓸었다. 그리고 프로이센 공작이기도 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동군연합 중인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위해 역시 봉기에 가담했다. 사방으로 포위된 연방에겐 동맹인 덴마크와 합스부르크 제국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슐라흐타들은 집단으로 스웨덴에 항복하거나 아예 스웨덴과 결탁해 리투아니아 독립을 시도하는 등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이 스웨덴의 침공을 훗날 대홍수라고 부른다.

스웨덴군에게 바르샤바까지 함락당해 얀 2세가 슐레지엔으로 망명하며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의 약탈과 학살에 진절머리를 낸 농민과 귀족들이 각지에서 저항군으로 들고 일어나 외국군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이를 보고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편을 갈아탄 브란덴부르크와 타타르의 도움에 힘입어 1660년 스웨덴을 몰아냈으며 7년 후에는 러시아와도 안드루소보 협정을 맺었다. 허나 신나게 털린 후유증으로 인해 스웨덴과는 올리바 조약으로 리보니아와 영유권과 스웨덴 왕위 주장을 최종적으로 포기했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벨라우 조약을 맺어 봉신국이던 프로이센 공국은 독립해 버렸으며, 러시아와는 하디아치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공동관리권를 포함해 러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한 스몰렌스크키예프를 포함한 드니프로강 동쪽의 좌안 우크라이나 전역을 내주었다. 또한 이 대재앙으로 인해 인구의 3분의 1을 상실하였고[49] 더군다나 대홍수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 오면서 포돌리아와 우안 우크라이나를 할양하는 등 동유럽의 패권국에서 동유럽의 환자로 추락하기 시작하여 거의 2류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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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이 1657년부터 1686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상실한 영토이다.[50]

계속되는 악재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얀 2세가 자진 퇴위하여 프랑스로 물러난 후,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왕으로 선출됐으나 3년 만에 죽자 1674년 얀 3세 소비에스키[51]가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얀 3세는 대홍수로 인해 국제적 위신이 떨어진 연방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브란덴부르크로 이탈한 프로이센 공국이나 스웨덴으로 이탈한 리보니아를 되찾으려는 등 별별 노력을 다했으나 허사로 끝났다. 얀 3세는 친프랑스 노선이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가까운 오스트리아 손을 잡았다. 이 동맹은 곧 오스트리아와와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유리한 결과를 주었다. 우선 남쪽 국경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반란을 일으킨 상헝가리 신교도의 지도자 퇴쾨이 임레의 지원요청을 받고 출병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14만 대군을 상대할 동맹군을 얻었다.

얀 3세는 제2차 빈 공방전에 친정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독일의 8만 구원군을 이끌었다. 이 함락당하기 직전 얀 3세가 이끄는 8만의 병력이 오스만군을 급습했고 그 결과 오스만군이 패배하며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외에도 얀 3세는 프로이센 공국을 다시 복속시키려 했지만 국내외의 여러 문제로 흐지부지됐고 오스만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686년에 루스 차르국이 점령한 동부 영토의 영유권을 인정했다.

이후 1697년도에 얀 3세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고 이후 작센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아우구스트 2세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신교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자신의 영지민들이 멀리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부인이 별거를 선언하는 막장 사태가 벌어졌고 그 결과 독일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작센의 베틴 가문은 신교도 신민들 위에 군림하는 가톨릭 왕실이 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아직까지 진행 중이던 대튀르크 전쟁의 종전을 선언했고 이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어 포돌리아 지방을 수복했으며 국왕 선출 당시 약속했던 리보니아 탈환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때마다 세임은 리베룸 베토를 앞세워 왕의 칙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세임의 거부권을 무시하고 러시아의 표트르 1세와 동맹을 맺어 대북방전쟁을 일으켰고, 끔찍한 군사적 무능을 보여주고 스웨덴 최후의 별이던 칼 12세에게 박살났다. 역으로 쳐들어와 수도 바르샤바까지 털어버린 칼 12세는 강화 조건으로 아우구스트 2세의 폐위를 요구했다.

결국 세임에 의해 아우구스트 2세는 폐위되어 작센으로 물러났고 친스웨덴 슐라흐타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왕위에 선출되면서 한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 측에 가담해서 싸웠다. 하지만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이 대패하고 칼 12세가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치는 등 상황이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아우구스트 2세는 표트르 1세의 지원으로 스타니스와프 1세를 몰아내고 다시 권좌에 올랐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보호국 신세가 되었다.

1733년에 아우구스트 2세가 승하하자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타니스와프 1세가 사위 루이 15세의 후원을 받고 비밀리에 바르샤바로 돌아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다시 국왕이 되었고, 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프랑스-스웨덴 동맹에 가담할 것을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은 아우구스트 2세의 장남 아우구스트 3세를 앞세워 전쟁을 선포했고, 그 결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연방은 일방적으로 유린당했고 러시아-작센의 연합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결과 스타니스와프 1세의 당선은 무효가 되었고 그는 프랑스로 추방되었다.[52] 새 국왕으로 아우구스트 3세가 즉위했다. 이 전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것이 폴란드 분할이라는 사건의 서막이 되고 말았다.

4.5. 폴란드 분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772년부터 1795년까지 총 3번 분할되었고, 결국에는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해 분할되어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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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에 걸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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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완전 분할 후 유럽 지도. 여담으로 서쪽에서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프랑스의 라인강 유역으로의 두드러진 확장을 볼 수 있다.

몇 년 후 나폴레옹은 유럽을 평정하며 자신에게 반하는 프로이센을 물리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땅을 일부 할양받아 바르샤바 공국을 이미 사라진 폴란드의 강역에 설치하면서 폴란드를 잠시나마 부활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전하고 나서 바르샤바 공국도 재분할(4차 분할이라고도 한다.)되면서 사라졌다. 한편 바르샤바 공국 존속 기간 전후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영유하던 폴란드 일부(주로 중부 지역)이 빈 회의로 국경이 새롭게 복원되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6. 쇠퇴와 멸망의 원인

우리 선조들은 제치포스폴리타 시대에 자유를 잃을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나라 내에 과도한 무활동을 조성했고, 세습 왕위를 자유 선거로 대체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꾸미는 혼란과 음모, 폭력에 나라를 활짝 열어주었다. 실제로 지그문트 아우구스트가 사망한 직후 외국 대사들이 모든 주와 군을 돌며 집집마다 방문하여 폴란드인들의 의지와 용기를 돈과 약속으로 매수하고 유혹했다. 헨리크를 선택한 선거 의회는, 얀 자모이스키가 기사 계급이 의원 모두와 같이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광기 어린 사람들과의 긴 논쟁을 마친 후, 거의 전투로 끝날 뻔했다. 스테판 바토리의 선출은 내전을 촉발시켰고, 지그문트 3세를 선출한 세임은 난투극으로 변했으며, 인민들 사이에 장기적인 분쟁을 촉발시키고, 오스트리아 황제와의 전쟁을 일으키며, 이 리보니아를 황폐화시키도록 부추겼다. 세임은 스웨덴인들과의 모든 불운한 전쟁의 씨앗을 뿌렸으며, 이를 통해 가혹한 북부의 민족은 다른 이들에게 제치포스폴리타를 갈가리 찢는 수단과 방법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치
이 일이 이렇게까지 간 것은 국왕과 입법부인 세임의 대립 때문이었다. 지그문트 3세의 무리한 스웨덴 왕위 탈환시도에서 비롯된 대립은 바사 왕조의 3대 국왕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전쟁의회반란에 질색해 스스로 퇴위해 프랑스로 건너가는 사태를 낳았다. 얀 2세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어쨌든 승리하고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꽤 유능한 국왕이었건만...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혼란의 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나마 얀 3세 같은 국왕이 나타나 중앙집권제, 왕위세습권의 공식화같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세임이 무제한 거부권인 리베룸 베토를 앞세워 모든 법안을 폐기시키며 국왕과 충돌하였다. 국왕이 토호들간의 연합체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중앙집권제를 도입하려 시도하면서 세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임의 행동에 정당성이 없는건 아니었으나, 당시로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도 남을 짓이었다. 그나마 국왕들이 대부분 외국 출신들이었고 그들을 선출한 것이 바로 세임이었으며, 특히 1, 2차 분할에 세임이 동의하면서 사실상 연방 자체가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격이었다. 그리고 이 사형선고가 이후 있을 개혁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침체기를 맞이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럽 최대의 곡물수출국이었으며, 그 돈으로 서방의 산업국가에서 각종 공산품을 수입했다. 귀족들에 의해 장악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도시 상인들과 시민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억제했으며, 그러는 한편 슐라흐타의 제조업과 무역에 대해서는 면세조처를 내렸다. 관세는 18세기 후반에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관세 정책을 실행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는 독자적인 공업이 발달할 길을 막아버렸다. 이로 인해 이러한 후진국형 무역체제가 연방에 정착되었고, '유럽의 주막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까지 붙을 정도로 나라가 부실하고 가난해졌다.

주변에 적대국가들로 포위된 상태에서 특히 스웨덴, 오스만 제국, 러시아 같은 열강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험악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했다. 또한 귀족들의 탐욕은 코사크 같은 주요 군사세력이 이탈하게 했다. 그리고 그 슐라흐타는 근대적인 상비군과 그 강화을 위한 세금을 지불하는 것을 거절하고 마그나트는 여러 나라와 손을 잡으면서 공화국의 정치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등 내부의 이반도 한몫 했다. 아직 연방이 강대하던 16세기 초중반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유능한 계몽전제군주 하에 발전해 가던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이 연방에 칼을 들이대던 18세기 무렵부터다.

어쨌든 긴 시간 동안 발생한 국내외의 문제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갔다.

5.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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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1648년 전성기 시절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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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1768년 안드루소보 협정 후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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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1793년 1차 분할 후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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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1795년 2차 분할 후의 행정구역

6.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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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린 조약 직후 1573년 폴란드의 종교지도
노란색은 가톨릭, 녹색은 정교회, 파란색은 루터교회, 보라색은 칼뱅교회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자체로만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독실한 가톨릭 민족들로 유명하지만, 이 시절엔 다스리는 땅이 넓었던 만큼 종교적 다양성은 전유럽, 아니 전 세계에서 봐도 끝내주게 다양한 나라였다. 당장 폴란드인은 이미 10세기 경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다수가 그렇게 남았고, 유럽 최후의 비기독교 다신교 국가였던 리투아니아도 북방 십자군을 대대로 겪은 이후 오히려 늦게 배운 사람이 더 열심히 한다고 독실한 가톨릭으로 남았다. 그러나 중세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확장하면서 흡수하게 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은 저마다 종교가 다양했다. 당장 봉신국이며 역설적으로 훗날 옛 상전이었던 폴란드를 잡아먹게 될 프로이센 공국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처음으로 정식으로 루터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였고, 프로이센 공국, 쿠를란트-젬갈렌 같이 봉신국이 아니라 연방이 직접 다스리는 단치히 일대 서부 프로이센의 독일계 주류 지방들도 16세기에 대부분 루터교로 갈아탔다.

연방 결성 당시 리투아니아 쪽에서 가지고 온 옛 키예프 루스 시절의 동슬라브계 주류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는 정교회가 현지에선 오히려 다수 종교였고, 리투아니아 자체도 개종이 늦어 딱히 다른 종파를 적극적으로 개종시킬만한 종교적 인프라가 없었던 만큼 비단 정치적 엘리트 대귀족들도 여전히 정교회 신앙을 사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연방이 성장하며 오스만 제국이 다스리는 중동권과 대립하면서도 중개무역이 커지자 유대인들과 경쟁하며 주요 도시나 국경 지방에서 이민자 커뮤니티로 아르메니아인들까지 정착하면서 무려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뿐만 아니라 비칼케돈 소위 '단성론'[53] 오리엔트 정교회 까지 기독교 메이저 종파가 다 살던 나라였다. 여기에 나중에 루블린 시 중심으로 폴란드 자체적으로 발생한 파우스토 소치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니테리언 계열 폴란드 형제회, 독일 쪽에서 도망쳐온 재침례파 메노나이트 등까지 포함하면 당시 기준으론 온갖 소규모 '이단'까지 다 공존하고 있었다.

기독교 종파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데 중세 폴란드가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배풀었던 만큼 연방 형성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보적으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나라가 됐고, 이들이 주로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면서 바르샤바, 크라쿠프, 빌뉴스, 리비우, 흐라드나, 카우나스 등 연방의 중요 도시들의 인구는 적어도 10-20%, 비텝스크나바흐루다크 같은 경우 한때는 거의 반수까지 유대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아슈케나짐이었으나 일부 카라임 유대인들도 빌뉴스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크림 한국 접경 지대에는 당장 세임과 국왕의 허락을 받아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며 정착을 허가 받은 립카 타타르를 비롯한 무슬림들도 많이 살았다. 정리하자면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기독교 5대 종파[54], 아브라함교 3대 가 모두 공존하는 나라였던 셈이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종교가 다양하고, 나머지 유럽은 종교 분열과 갈등이 극에 달해 하루가 멀다고 종교전쟁이 터지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큰 종교적 분쟁 없이 전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며 각 종파가 자유롭게 공존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다른 유럽 열국에선 16-17세기 강력한 중앙 왕실 권력이 등장하고 신학 체계와 교회 조직을 정비한 루터교, 칼뱅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와 손을 잡으며 강력한 종교적 단일화와 중앙집권화를 동시에 밀어 붙였던 반면[55],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애초에 수평적인 귀족 연합체로 시작했던 국체를 루블린 연합과 귀족민주정을 통해 성문화 하면서 이렇게 특정 종교를 전국적으로 강제할 만한 강력한 중앙 권력의 출현 자체를 법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상술한 귀족공화정 특유의 중앙 왕실이 특정 종교를 강제하는건 막아도 군소 귀족 여럿이 자기네 동네에서 다른 종교 믿는 가신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내부 구조적 문제와, 여기에 딸려 들어온 정교회권의 러시아, 개신교권의 스웨덴 등과의 전쟁으로 인해 나라 자체가 박살났던 만큼 크게보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보여준 다원주의적 관용 정책도 근세 유럽의 종교적 분열이란 난국에서 전적으로 나라를 지켜주었다곤 할 수 없다. 아무리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도 폴란드 또한 나머지 유럽역사 전체에 영향을 끼친 종교적 분열이란 세기의 현상 자체에선 자유로울 순 없는지라 17세기 들어가면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완전하게 사상무장을 다시한 가톨릭 교회와 이를 상징하는 바로크 종교 건축물, 예술들과 함께 예수회 교육을 받은 귀족들, 가톨릭 교회, 도시민들 중심으로 종교가 더 강력하게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법적으론 여전히 보장된 권리를 사수하려던 비가톨릭계 귀족, 도시들과 충돌이 더 잦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 왕실 권력과 상관 없이 자체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종교적 배타성은 17세기 후반 비가톨릭 외세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치루며 한층 더 강력해져 결국 현대까지 이어지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사회의 강력한 종교성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역사 전체를 보면 끼친 데미지가 워낙 파멸적이긴 해도 결국 종교 문제 자체가 발단이 되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반란은 중요성은 크지만 여전히 예외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스웨덴 침공기 침략군이 종교적 동질성에 바탕해 방어하는 폴란드 도시민이나 귀족들에게 전향을 권유함에도 오히려 현지인들이 종교적 정체성보다 폴란드-리투아니아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우고 거절하며 국가적 통합에 더 기여한 사례도 있었다. 여러가지 난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런 연방 귀족 민주정의 종교적 관용은 연방이 망하는 순간까지 뿐만 아니라 그 부활을 위해 들고 일어났던 19세기 폴란드 민족주의 혁명운동에도 비가톨릭 신자들이나 비폴란드계 민족 출신 혁명가들이 동참하는 강력한 국가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대 유럽인들도 30년 전쟁 발발 초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뒤엎고 혁명정부를 세운 보헤미아 왕국의 개신교 귀족들이 모델로 삼은 게 폴란드-리투아니아식 귀족민주정이었을만큼 상술한 교파화 과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던 지식인들에게 폴란드식 정치적 귀족과두정에 기반한 종교적 관용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6.1. 브레스트 연합과 동방 교회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을 포함한 지배층은 가톨릭 신도였고 동유럽권에서 세를 넓히려는 로마 교황청 및 예수회와 연대했다. 또한 여기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를 가진 오스만,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가진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이 와중에 친가톨릭적 성향을 가진 예레미야스 2세[56]가 세계총대주교좌에 착좌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방문해 지그문트 3세와 만나 르비우와 빌뉴스 교회의 독립(Stauropegion)을 승인함으로서 가속화되었다.

동방 정교회 내부의 우니야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로마 교황과 폴란드 국왕의 비호 안에 들어가겠다는 현실적인 이익과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이교도들에게 정복당한 '그리스 신앙'에 대한 회의감이라는 종교적이 이유도 있었다.

1596년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가톨릭 교회 내부의 동방 가톨릭 교회로 전환한 브레스트 연맹을 체결했다. 문제는 이게 국가 내의 정교회의 지지 없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공식적으로 정교회는 불법이 되었고 연합을 거부한 주교들은 파문당했다. 정교도들은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교회 건물과 토지는 몰수당해 동방 가톨릭 계열 신자들에게 넘겨졌다. 리비우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의 정교회 및 기타 동방 교회의 고위 사제들의 직함과 재산은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인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는 17세기에 들어서서 정교도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1603년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57]의 연합 면제, 1607년 정교도들의 예배 자유 허용, 1607년 정교회의 재산 보장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정교회 보호를 구실로 러시아가 개입할 여지가 보이자 폴란드 중앙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정교도들의 권리 증진에 힘쓰기 시작함으로서 완화되어갔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중앙정부가 정교회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과 별개로 전통적인 동방 교회(분리주의자)와 전향한 동방 가톨릭 교회(통합파) 간의 상호적대감과 불신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요사팟 쿤체빅(Йосафат Кунцевич / Язафат Кунцэвіч, 벨라루스어 표기) 통합파의 거두였던 루테니아 연합 교회의 대주교로서 분리주의자들을 탄압한 인물이다.[58]그는 1618년 모힐레프(현 벨라루스 마힐료우)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무장한 주민들이 그를 배교자라고 비난하고 당장 떠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서 머무를 수 없었다. 결국 바르샤바로 가서 지기문트 3세에게 이를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여 주동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 주민들에게 벌금형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의 최후 역시 정교회와 연관이 깊었는데, 1623년에 비텝스크(현 벨라루스 비쳅스크)에서 비밀리에 정교회 예배를 거행하던 성직자를 체포하려 했으나 분노한 정교회 현지 신도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다우가바강에 던져졌다. 결국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요청을 받은 지기문트 3세는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어 폴란드, 우크라이나, 미국, 캐나다 몇몇 교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는데, 해당 인물이 정교도들을 탄압하던 인물이라 시성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

결국 디주니치(Dyzunici)라는 연합에 반대하는 반체제적 정교도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심지어 이들 중에서는 마그나트도 있었다. 또한 카자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당국에 대항한 투쟁에서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칭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고, 같은 내용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와 러시아가 폴란드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59] 결과적으로 연합은 의도와는 정 반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종교 충돌을 심화시키고, 이에 대한 러시아 및 외세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역효과를 낸 셈이다.

한편 동방 가톨릭 계열 교회 중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은 아르메이나 가톨릭 교회였다. 미코와이 토로소비치(Mikołaj Torosowicz)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르비우 주교로 서품을 받은 동방 교회의 일원이었지만 지그문트 3세의 후원 아래서 당시 르비우 가톨릭 대주교인 얀 안제이 프루흐니츠키(Jan Andrzej Próchnicki)와 교류하면서 르비우의 가톨릭 교회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동방과 서방 교회의 연합을 주장하였고 1630년 최초의 아르메니아 가톨릭 르비우 대주교로 착좌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아르메니아 가톨릭 공동체의 첫 시작이었고 비잔티움 멸망 이후 오스만의 손에 들어간 지역들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합류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다른 동방 교회, 동방 가톨릭 교회 종파들 관계와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와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 간의 종교 분쟁이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60]

또한 브레스트 연합으로 인해 촉발된 정교도들의 저항이 훗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민족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루테니아 정체성의 형성을 촉진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물론 민족주의 논쟁이 다 그렇듯이 정답을 내릴 수 없는데다가, 점점 민족주의적 사관을 경계하는 풍조라서 큰 지지는 못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역사학자인 세르히 플로히(Сергі́й Микола́йович Пло́хій)는 브레스트 연합이 광범위한 루테니아 정체성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일시적으로 승리한 것은 맞지만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정체성의 직접적인 전신이 아니며 단지 훗날 둘에 의해 대체(superseded)되었다고 지적했다.[61]

7. 정치

1572년에 발생한 루블린 합병이 있을 때까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정치는 별개였다. 요가일라가 폴란드 국왕이 되자 리투아니아 대공은 그의 경쟁자이자 사촌인 비타우타스에게 넘어갔다. 이후 요가일라의 동생인 스비트리가일라가 차지했지만 비타우타스의 동생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그를 몰아내고 대공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결국 스비트리가일라의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후 대공위는 요가일라의 아들인 카지미에시 3세가 대공이 되었지만 형인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함[62]에 따라 폴란드 국왕까지 겸해 완벽한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상징인 세임(의회)은 1182년에 그 기틀을 다졌고 이후 1493년 얀 1세 올브라흐트가 추밀원 회의를 개최하면서 비로소 세임이라 불리게 되어 확대된 입법권을 받는다. 이후 세임은 중앙집권화한 행정기관이 없는 폴란드에서 사실상 최고 행정 기관이 되기까지 한다. 이후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야기에우워 왕조가 절멸하자 귀족들의 공동체이자 입법부인 세임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될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국왕들은 세임에 의해 휘둘러지거나 아니면 세임과 대립해 국론을 둘로 나누는 우를 범하게 된다.

세임의 권한은 초대 선거왕이었던 헨리크 발레지의 이름을 딴 헨리크 조항을 통해 명명백백해졌다. 그리고 이 조항을 기초로 '황금의 자유'라는 귀족정치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국왕을 비롯한 도시민, 부르주아, 법조인 같은 사람이나 계층들의 정치참여를 철저하게 배제했지만 참정권자만 10%로 1867년도 참정권자가 3%인 영국보다 많았다. 허나 국왕과 부르주아를 배제시킨 결과, 주변국가들에 비해 절대왕정을 경험하지 못해 강력한 리더쉽이 없었고 귀족들만이 정치를 했기에 근시안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다만 세임도 지방의회격인 세이미크(sejmik)의 결의를 충실히 반영하는 기관에 불과했다. 세이미크는 중앙의회인 세임에 보낼 의원을 선출하고 세임의 보고서 및 결의를 심사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며 자신들 지역의 재정과 교역, 세금, 군사적 봉사 등의 제반적 문제를 총괄하고 국왕 선출에도 관여하기까지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체제 성격은 크게 3가지다.

첫번째, 과두제로 슐라흐타들이 참정권을 갖고 있더라도 그들의 계층은 인구의 약 10%만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에 의한 지배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모든 슐라흐타들은 대등한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국민주권과 약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비록 그 권리의 대상이 귀족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지만, 일단 성문화된 단일 규칙에 따라 한 계층의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정치 참여권을 보장받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고 수호할 저항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거군주제로 슐라흐타에 의해 선출된 국왕, 말하자면 세습군주가 아닌 국왕이 국가의 수장이라는 점이다. 이는 최소한 세습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능한 군주의 즉위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외국 출신의 왕족이나 군주를 끌여들어 외세의 입김만 세지는 꼴이 나고 말았다.

세번째로 입헌군주제로 말하자면 군주가 파크타 콘벤타 및 기타 법률에 의해 계약되어, 슐라흐타는 국왕이 법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한 경우 따를 의무가 없었다. 이는 무능한 군주의 어리석은 정책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국왕과 의회간의 충돌을 낳을 수 있었다.

황금의 자유의 세부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자유 선거: 국왕선출은 투표를 희망하는 모든 슐라흐타에 의해 자유선거로 치러진다.
  • 세임: 국왕에 의해 2년에 한번 소집되는 공화국의 대의제의회.
  • 팍타 콘벤타: 즉위 시 국왕이 공화국 정부 사이에 맺어진 통치계약. 여러 권리의 청원도 이루어진다. 국왕의 정치행동을 속박하는 이 조항은 초기 헨리크 조항에서 유래되었다.
  • 로코시: 귀족에게 보장된 여러 권리가 왕에게 위협을 받을 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권리
  • 리베룸 베토: 세임의 결의에서 다수파의 결정을 대의원 1명의 반대에 의해 부결될 수 있는 권리. 세임의 회기 중 모든 법안을 폐기시키는 "무제한의 거부권"으로 악명이 높다. 17세기 후반의 위기시대에 들어서 리베룸베토는 지방의회에도 적용되었다. 이 리베룸베토는 왕권을 심각하게 제한하여, 후에 연방이 주변 절대 군주제 국가들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일을 가져오게 되기도 한다.
  • 콘페데라치아: 공통의 정치목적을 위해 단체를 결성할 권리.

이와 같은 요소를 갖춘 세임은 국왕과 부르주아를 누르며 독자적으로 정치를 했고 심지어 대원수는 세임의 동의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허나 초기에는 30년 전쟁 당시 어느 한쪽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수수방관 지켜보며 군사력을 유지한 좋은 면이 있었다. 또한 세임의 기반인 슐라흐타는 저항권, 사회계약론, 자유권적 기본권, 합의에 기초한 정치운영, 독립심의 존중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근현대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자유주의 민주정치의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너무 앞선 정치 시스템이었기에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가 지배한 주변 국가들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무너졌다. 너무나도 앞선 정치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와, 월권에 가까운 행위를 한 입법부 덕분에 이미 막장 테크의 플래그는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오늘날 3권 분립, 즉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간의 상호 견제가 없이 귀족의 입법부가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이었고, 여기에 국익에 관심이 없었던 귀족층이 1652년부터 리베룸 베토를 남용하면서 행정부와 사법부마저 무력화했다. 국정의 원칙은 근대 민주주의를 예고했다고 볼 만큼 자유주의적이고 자발성을 보장한 반면, 실제로는 귀족층만 견제받지 않는 무한한 권리를 향유하여 어느 순간 타 계층의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코사크의 대봉기는 이 중 가장 치명적인 사례였을 뿐이다.

어쨌든 이러한 정치 시스템에 혜택을 받은 것은 소수의 귀족층인 슐라흐타로 이들은 농민을 무자비하게 수탈했으며 도시의 성장조차 심각할 정도로 정체되기도 했다. 당대 귀족층의 영향력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웠던 곳은 주요 곡물수출기지 그단스크였으며, 그단스크는 당대 중세적 도시특권을 받은 유일한 폴란드 도시였다. 슐라흐타 또한 자신들보다 고위 귀족층인 마그나트에게 종속되어가고 있었고 마그나트는 콘페데라치아를 이용, 자신들 밑에 종속된 슐라흐타를 끌어모아 당쟁에 이용하면서 이상적으로 보였던 공화국은 점차 쇠락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나마 1791년 스타니스와프 2세의 개혁을 통해서 귀족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부르주아들에게 참정권을 주려는 시도가 있었다. 1788년부터 시작된 4년 의회(또는 위대한 의회)는 귀족과 성직자에 각각 10%와 20%의 재산세를 물리는 등 조국의 회생을 위한 수많은 법령을 통과시켰다. 귀족과 러시아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연방의 개혁파는 꾸준히 개혁을 밀어붙였고, 결국 1791년 5월 3일에 헌법을 통과시킨다. 아래의 조항들은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이 헌법은 세계에서는 2번째, 유럽에서는 최초의 성문헌법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헌법의 사상적 기반, 급진성은 더도 덜도 말고 동시대 미국, 프랑스 혁명기 쏟아져 나온 각종 천부인권 관련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된 국제 인권사의 금자탑과 같은 발표문들에 비해 꿀릴게 없다. 당시 귀족 공화정의 정치 체제는 단순히 동네 왕초들끼리 서로 우리가 남이가 하는 수준이 아니라 깊이 있는 평등과 민권에 대한 사상적 기반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이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1791년 5월 헌법도 기존에 귀족들에게만 적용되는 권리를 비교적 간단하게 확장시키만 하면 되니 외부적으로는 바로 무너질 듯한 나라였어도 이런 과감한 내부적 개혁 시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소작농의 권리 향상[63]
  • 리베룸 베토의 폐지
  • 슐라흐타의 연맹[64] 결성 금지
  • 종교적 관용 보장
  • 국민 주권 창출
  • 귀족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에게도 참정권 확장
  •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3권 분립을 도입[65]
  • 국왕 세습제의 확립

이 항목들의 진정한 목적은 입법부인 세임을 장악한 귀족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나아가 일반 시민의 특권을 만들고 보장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결속시키고자 한 방안이었다. 일단 소작농에 대한 권리 향상은 소작농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소작농들을 지배하는 지주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안 중 하나였고 리베룸 베토의 폐지와 슐라흐타들의 연맹 결성 금지는 더 이상 세임과 세임을 장악한 귀족 세력들이 국가의 중대한 정책을 방해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국왕 세습제의 확립 또한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귀족들이 각자의 사심에서 벗어나 국가에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구실이 붙었다.

그리고 종교적 관용 보장과 국민주권 창출은 비가톨릭 국민의 종교 자유를 보장해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서 대홍수 이후 붕괴된 종교의 자유를 회복시키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민 주권의 경우 국가에 대한 백성의 충성심을 고취하면서 귀족세력을 더 약화시키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에게도 참정권을 확장하겠다는 것은 더 이상 정치가 귀족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였고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의 분립은 세임의 과도한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다. 폴란드 민족의 구약성 또는 돌아가신 조국의 마지막 유언, (외세와 귀족의 반대에 맞선) 폴란드인의 우아한 쿠데타라는 평을 받은 이 헌법은 기존의 토착귀족세력인 슐라흐타와 신흥 부르주아 세력 간의 권력 분점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비록 프랑스 혁명에 비해서는 보수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인민주권론을 담지하고 있었다. 뒤이은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인해 박살이 났지만 5월 3일 헌법은 충분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일대 대사건이었다.

조국 폴란드, 신생 미국, 혁명기 프랑스에서 혁명가 트리플 플레이를 날리며 계몽시대의 체 게바라 마냥 아이콘이 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마찬가지로 미국 혁명에 의용군으로 자원해 사바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도 미국 기병대의 아버지가 된 카지미에시 푸와스키[66],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지휘하며 지금도 폴란드-헝가리 양국 간 우호 관계의 상징적 인물인 유제프 벰, 폴란드 뿐만 아니라 19세기 모든 중부유럽 민족주의자들의 우상이었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 나폴레옹과 함께 종군하며 지금까지도 폴란드 국가에서 추앙 받는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 너무나도 유명한 바르샤바 대공이자 프랑스 대육군의 기병대장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같은 유수의 폴란드 민족주의 혁명가들의 사상적 기반엔 외세의 외부적 강압내부적 낙후성 모두를 한꺼번에 타파하려 했던 이런 5월 헌법의 정신이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 잡았기에 폴란드는 19-20세기 중동부 유럽 민족주의 열풍에서 주도적 선봉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근대국가로 들어서려는 노력은 불만을 품은 귀족층의 반란과 공화국 내에서 영향권이 사라질까 우려한 러시아군의 침공, 뒤이은 2차 분할, 이후 발생한 코시치우슈코의 민족봉기 실패와 3차 분할을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8. 군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대의 명목상의 수장은 당연히 국왕이었다. 1505년 창설된 4명의 헤트만(Hetman, 원수)의 지휘 아래 전쟁을 수행했다. 각각 폴란드 원수와 리투아니아 원수가 있었으며 밑에 육군원수를, 그 위로 대원수가 있었다. 폴란드 왕국에는 국왕 대원수와 국왕 육군원수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는 리투아니아 대원수와 리투아니아 육군원수가 있었다. 이들은 본래 중요한 전역이 없을 때 비상직이었지만 연방 공화국으로 이행되면서 상시 존재하게 되었으며 1585년 이후, 원수직은 반역행위을 하지 않는 한 삭탈하는 일 없이 평생 직위를 잇는 종신제였다. 그리고 국왕 다음의 군통수권을 장악한 자들이었으며, 왕 자신은 사실상 얼굴마담이었기에 이들이 실질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이들이었다. 이 때문에 1621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병상에 누워있던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계속 지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외 국왕이 폐위권을 갖고 있지 않는 상황은 원수들이 국왕에게서 분립되는 경향이 생기게 만들었고, 실제 원수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정책 등을 추진하고 심지어는 세금도 징수했다.

게다가 이 외에도 두 국가의 동군연합으로 형성된 국가여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시스템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전체 국방을 책임지는 일원화된 지휘체계와 군대가 존재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15세기 말에 타타르인, 튀르크인, 왈라키아인, 몰도바인 등의 약탈로부터 남쪽 국경을 방위하는 상비부대(Obrona potoczna)가 창설되었으나 이를 다른 전선에 투입시키려는 시도는 귀족들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물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폴란드의 귀족들 입장에서도 괜히 자기 영지가 타타르인들에게 털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건 당연했지만 지그문트 3세 당시 동란시대로 체제가 붕괴되고 친폴란드 귀족 파벌이 득세한 러시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이 시스템은 국왕이 무능하고 원수들이 매우 유능한 상황에서는 유효한 체제를 쌓을 수 있었으나 1648년 대홍수 당시 무능한 사람이 대원수로 있는 상태에서 개털린 원인이 된다. 또한 이 원수들이 외국에 의해 조종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원수들은 연방의 개혁적이고 부국강병적인 법안들을 모두 파기하고 전횡을 저질러 연방의 국력과 군사력을 약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1776년 개혁에 의해 그 권한이 줄어들었고 3차 분할 때 조국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대홍수 이전까지 연방의 중요한 군사세력이던 코사크 또한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등록 코사크로 편성되면서 자신들만의 원수를 가지게 되었고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연방에 소속된 등록 코사크의 원수로 활동했다. 이후 대봉기 이후 연방에서 떨어지면서 등록 코사크의 원수는 코사크 국가의 국가원수 명칭이 되었다. 국가수반으로서의 이들의 임기는 약 4년이었다.

실질적 용병의 영역에서도 지정학적 여건도 그렇지만 상술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구조도 이렇게 철저히 귀족 기병 중심 군사 사회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전쟁의 패러다임이 나머지 유럽에선 슬슬 기병에서 보병으로 전환함에도 연방은 철저히 기병 중심 군대를 유지했고, 놀랍게도 대홍수와 스웨덴 침공 당시 고전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야전에선 충분히 경쟁력 있고 주변 열강들에게도 위협적인 군사력을 달성했다. 기병 운용이란 분야 하나만 보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히려 쇠락해가던 중갑 창기병을 본질은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만큼 경량화 시키는데 성공한 윙드 후사르란 병종으로 중세식 중기병의 한계를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식 경무장 비정규전 특화 기마궁사, 필요에 따라 서방식 총기병 리터까지 굴리며 당대 최강의 전력을 유지했다. 특히 그 폴란드에게 허구한날 털리는 신세였던 루스 차르국에서 폴란드 기병대를 고평가했는데, 이는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모델로 하는 서구화 개혁 시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67]

반면 보병은 뒤에서 대포나 만지거나 고기 방패 역할이나 하는 철저한 쩌리 신세라는 인식과 달리 보병 전술도 그 시대 기준 매우 정교했던 편이었다. 최근 연구들은 폴란드 군사력의 강점이 기병대가 아니라 그 기병대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보병대와의 제병합동전술에 있으며 훗날 군사력의 쇠퇴도 기병이라는 병종의 한계나 쇠퇴가 아니라 그걸 뒷받침해주는 보병대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여긴다. 즉 보조적인 역할이었을지언정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사력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보병대에 있었다.

일반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야전군은 윙드 후사르를 주축으로 이들이 적절한 기병 돌격 각을 잴 때까지 고기방패 역할로 버틸 영주들의 사병 보병들이나 전투마차 끌고 온 등록 코자키 보병, 그리고 상황과 자금 여유에 따라 주로 네덜란드, 독일어권, 브리튼 섬 등지에서 모집한 용병 포병대로 구성되었다.

아래 목록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의 병종과 그 장비들이다.
  • 윙드 후사르: 해당 항목 참조
  • 코사크 기병대: 비정규전에 능숙했으나 정규전에서는 맥주병 그 자체였다. 주로 우크라이나 지방의 코자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총, 칼, 창, 활과 화살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
  • 리소브치치(Lisowczycy): 스웨덴군이 리보니아를 침공할 당시 세임에서 전비 지원에 상당히 인색했기 때문에 부족한 군사비로 전력을 보완할 목적으로 봉급 대신 민간인들을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약탈권”을 받는[68] 조건으로 편재된 기병들이었다. 코자키 기병대와 마찬가지로 칼, 창, 총, 화살 등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했으며 비정규전에 능숙했다. 리소브치치라는 이름은 폴란드의 유명한 군사귀족이자 군지휘관 리소브스키(1580~1616)에서 나온 것이다. 리소브치치는 약탈, 강간, 방화, 살육을 일삼은 학살자들로 이들의 악명은 루스 차르국의 혼란 시대 당시 이들의 약탈 및 30년 전쟁 당시 가톨릭 측으로 참전한 소수의 용병대로 인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타고난 잔인함 덕분에 '묵시록의 기사'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라이터 기병대(Rajtaria): 라이터 기병대는 그 수가 적었다. 이들의 무기는 주로 총이었다. 서유럽에서는 라이터 기병대가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크우쉰(Kluszyn) 전투때 윙드 후사르가 라이터 기병대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유명유실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육군의 보병은 기병의 빛에 가려 그 효과를 별로 내지 못했다. 일단 폴란드군은 주로 야전용 기병대를 양성했으며, 공성전에 필요한 강력한 보병이나 포병은 별로 육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역 점령에 지진부진한 적도 있거나 공성전에도 실패할 때도 있었다.
  • 보이스코 크바르치아네(Wojsko kwarciane), 보이스코 콤푸토베(Wojsko komputowe): 각각 국가 세금에 의한 상비군과, 전시에 창설되는 반상비군. 1652년 이후 개혁으로 두 군대를 혼성하게 되었다.
  • 피에호타 비브라니에츠카(Piechota wybraniecka):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개혁으로 창설된 반상비군으로, 왕실 직속 농지에서 먹고 사는 농민의 신병을 기반으로 한 군대였다. 근데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 체제가 상술된대로 애초에 선거제 왕실이었고, 왕권 자체가 워낙 유명무실해서 서류상으론 왕실 직속인 농지들도 현실적으론 마그나트 대귀족들이 다스리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중세도 아니고 16-17세기에 왕실 직영지에 귀족들이 부동산 말뚝박기라니 다른 나라 같으면 뒤집어졌겠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의 주권은 귀족 의회에 있고, 왕은 선거로 꿔다 놓은 수준인 연방에서는 이게 통했다. 게다가 귀족 의회가 정신나갔다고 국왕 직속 상비군에 덜컥 동의할 리 없는 건 비단 귀족 공화제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동시대 다른 유럽 나라들도 마찬가지인지라 이런 군사조직은 결국 왕의 사비로 운영해야 되는데 연방은 선거제 왕국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한 왕조가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 연방에서 역대 왕들은 딱히 자체적인 왕실 비자금을 조성할 이유도 여건도 안됐고, 그렇다 보니 왕 개인이 군사적 능력과 관심이 지대해서 이런 조직 창설에 직접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했던 스테판 바토리, 얀 3세 소비에스키 시절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항상 징병도 똑바로 안되고, 유지비도 없어서 겨우 2천명 정도의 규모가 전부였다.
  • 등록 코사크: 역시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 개혁으로 생긴 군대. 등록 코사크의 최고 수장은 코사크 대원수였다. 코사크는 대부분 보병이었으며, 기병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은 대포, 화살, 총, 칼 등 각종 무기들을 사용했으며, 비정규전에서 특히 뛰어난 능력을 구사했다. 흔히 경기병으로 이미지가 강한 코사크지만 실제 주력은 전투 마차 타보르를 중심으로 야전 임시 요새를 축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싸우는데 능했던 경보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코사크 보병들은 개개인의 무장은 가벼웠지만 동유럽 전장에서 최고의 미덕인 장시간 험지에서 종군하며 추위, 배고픔을 견디는데 워낙 뛰어났다 보니 오히려 아래 영주들의 사병이나 비싼 외국 용병대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 포스폴리테 루셰니에(Pospolite ruszenie): 마그나트의 사병들을 모두 끌어모은 병력으로, 평상시에는 마그나트 한 명 당 수백 명 단위의 연대로 육성했다. 하지만 전시에는 마그나트가 병력을 모두 합하여 그 규모가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16세기 초중반 이후 이웃 라이벌 세력들은 서방은 테르시오 전술을 사용하는 대규모 전문 용병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러시아의 스트렐치, 일련의 군제 개혁을 겪은 스웨덴 보병 같이 대대적인 화약무기 중심 전문화된 보병을 운영하는데 이런 마그나트의 사병들은 징집 기준, 훈련 수준이 중세의 농민병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대부분 머릿수만 채우는 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이는 대지주 군사 귀족 연합체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기반과도 직결되어 있어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한 사안도 아닌지라, 연방군은 대체로 이들보다 등록 코사크나 서방에서 고용해온 용병 보병대를 사용하는 걸 선호했다. 따라서 신뢰할만한 전문 보병대의 주축이었던 코사크들이 흐멜니츠키와 함께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땐 단순한 지역 반란을 넘어 아예 국가적 군사 체계의 중대한 일부가 반란 일으킨거와 마찬가지라서 전술적 붕괴가 전략적, 나아가 국가적 위기로 직결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용병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돈을 주고 전투에 투입시킨 외국 군대. 신성 로마 제국[69],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등 유럽 각지에서 채용했다. 상술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치사회적 구조와도 연결된 구조적 문제들로 인해 양질의 대규모 보병대를 자체적으로 양성하는게 힘들었기 때문에 중요한 대규모 야전에서 중보병대의 주축은 독일어권, 브리튼 섬아일랜드, 스페인이탈리아 반도, 발칸 반도에서 고용해와 서방식으로 훈련 받은 외국인 용병단들이었다. 사실 상술한 농민 경제 사회에서 귀족권과 왕실이 대표하는 중앙 권력의 문제들은 사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성문화된 국가 기반부터 계층 집단적 귀족 공화정이라서 부각된 것이지, 그 자체는 근세 유럽의 보편적인 현상인만큼 근본적인 상비군의 문제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군사 기술적으론 근대의 문을 연 16-17세기가 인적구조상으론 모순적으로 용병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것이다. 이를 감안해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 정도가 상당히 지나치긴 했지만.
  • 왕립 근위대: 국왕과 그 가족을 호위하는것을 주목적으로 한 소부대

해군의 역할과 위상은 미미했다. 이는 주로 동부와 남부의 내륙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당연히 군비도 그 쪽으로 우선 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27년 스웨덴의 해상봉쇄를 격파한 올리바(Oliwa) 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후 비스와 기습전에서 스웨덴 해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주력은 갈레온이어야 했지만 연방의 국고 사정과 신생 함대였다는 것이 겹쳐, 개조한 무장 상선들이 많이 있었다.

대홍수 이전까지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의 해군은 거의 코사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수백명이 분승하는 차이카라는 이름의 소형선인 차이카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쓰면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과 대적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교외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는 간이 배밖으로 나온 짓까지 벌인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는 기존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 군사력 증진과 군 지휘체계의 일원화를 목표로 하는 일련의 개혁들을 단행하면서 군대는 대격변을 겪는다. 17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의 무기체계와 복장은 서유럽의 그것과 많이 달랐으나, 18세기에 이르면 서유럽식 제복과 전열보병 전술을 도입하는등 매우 유사해진다. 또한 1776년에 이르러 대원수직은 사실상의 명예직으로 전락하고 군의 통제는 상임의회(Rada Nieustająca) 소속 군사부서와 왕권으로 관할이 옮겨갔다.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의 발목을 항상 잡았던 문제는 의회의 비협조였다. 대외 정복을 시도하거나 심지어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방위를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고 해도 군에 자신들의 노동력과 물자가 소모되는 것을 꺼린 귀족들의 반발로 불충분한 군대를 동원,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 문제는 연방이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는 18세기에 정점을 찍었는데, 1717년 폴란드 귀족 의회에서 규정한 중앙정부 소속의 상비군 규모는 폴란드 소속 18,000명, 리투아니아 소속 6,000명으로 그 광대한 영토에 불과 24,000명 만의 상비군이 허용되었다. 이는 당시 의회가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좌지우지되기 시작할 시점이라 폴란드군의 규모 확대를 원치않는 러시아의 입김에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벌어진 참사로, 같은 시기 러시아군은 30만에 달했으며, 심지어 영토와 인구로 연방의 상대조차 못 되었던 프로이센조차 15만의 상비군을 가졌던 것을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수치였다. 이 문제는 18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져, 폴란드 분할 당시 삼국의 침략에 연방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삼켜진 주된 이유가 된다.

9. 외교

자세한 내용은 틀:폴란드의 대외관계, 틀:리투아니아의 대외관계의 근세, 문화 교류 부분 참조.
러시아 제국-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관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존재하던 기간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여러 소국들로 쪼개져 있었고 이러한 소규모 공국들과 폴란드 사이의 외교 관계는 시대가 지나면서 꾸준히 변화하였다. 폴란드의 이웃 국가들이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당시에는 주변 국가들이 폴란드 세력에 눌려 지냈으나,[70]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며 팽창하면서 외려 폴란드가 눌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주변국들과 적절히 동맹관계를 맺지 못한 것도 화근이었다. 스웨덴의 경우 스웨덴 출신인 바사 왕조가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자주 전쟁을 벌였고, 전쟁 초반에는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군대가 스웨덴군을 박살내곤 했으나, 스웨덴군은 실패를 교훈삼아 개혁을 거듭하던 사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과거 성공에 안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필 세계사에 이름이 남을 업적을 남긴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등장 이후 상황이 역전되어 급기야 대홍수 당시 북방전쟁리보니아를 완전히 상실했다. 러시아와의 관계 변화는 더 극적이다. 한 때 모스크바까지 장악했지만 대홍수 당시 러시아의 개입으로 무력하게 드니프로강 동쪽을 완전히 뜯어먹혔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을 선언한 이후에는 세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때 가장 많은 영토를 빼앗아 이득을 챙겼다. 또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는 빼앗지도 못할 몰다비아 공국을 두고 경쟁해 스스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경우 공국 시절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제후국이다가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았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대홍수 당시 연방을 공격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이 연방의 속령에서 떨어져나갔다. 이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왕국으로 격상된 후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다. 그나마 폴란드계 바사 왕조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과 통혼하고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도움을 베푸는 등 든든한 우군같아 보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조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해 연방을 배신한 것은 연방이 급변하는 국제관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녔음을 보여준다.

서유럽과의 무역 및 교류는 주로 비스와강 하류의 그단스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당대 그단스크는 독일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상당수 거주하던 국제 도시로 기능하였다. 빌뉴스흑해를 잇는 무역에서는 특수한 종파를 믿는 유대인의 일파인 카라임들이, 르비우흑해를 잇는 무역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활약하였다. 흑해의 크림 칸국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주적이었기 때문에 크림 타타르 무슬림들이 직접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시들을 평화적으로 방문하기는 어려웠고, 폴란드 국민(가톨릭교도 혹은 정교회 신도)와 크림 타타르 사이의 제3자에 해당하는 카라임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틈새에서 활약했던 것이다.

9.1. 봉신국

폴란드 리투아니아에 종속된 신하국들.

10. 경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농노제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 농업에 의존했다. 농노제가 지속되는 동안 귀족들이 소유한 폴바르크(folwark)라고 불리는 대규모 농장에서 국내유통, 국외수출을 위해 농작물이 농노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 경제 체제는 곡물 생산이 가장 호조를 보였던 시기에 해당하는 초기에는 지배계급에게 좋은 방향으로 기능했다. 물론 농노제 지속 기간 동안에도 농민의 소수는 농노와 같은 인신의 구속을 당하지 않는 자영농이었다. 자영농 중에는 농촌에 정착한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유대인 농민들은 농촌에서도 자신들만의 마을을 이루어 뭉쳐 살았다.[71]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내의 경제상황은 악화일로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에 귀족계급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노동을 강요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어째든 러시아를 제외하면 동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에 비옥한 옥토는 아니지만 밭을 개간한 초원이 많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럽 최대의 곡물생산국이었지만, 이 곡물들은 대부분 생산 지역에서 소비되었다.

제조업은 동시대의 서유럽에 비해 발전이 늦었다. 이것은 서유럽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무역관계가 고착화된데다 기술 혁신을 주도할 도시 및 부르주아가 약했기 때문이다. 폴란드 내에서도 제조업이 존재하긴 했지만 대개 국내 수요를 충족하는데 그쳤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인구의 4~8%가 도시에 거주했는데, 이는 동시대 네덜란드는 34~39%, 이탈리아 반도는 22~23%에 비해 월등히 낮은 수치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외무역은 루블린에 대규모 시장 및 발트해 연안을 종점으로 하는 비스와강, 필리차강, 서 부크강 등의 연안 항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 연안 항구를 중심으로 연방 전역의 하천을 이용한 거미줄 같은 운송로가 짜여 곡물 수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72] 이러한 시장과 항구의 운영에도 유대인들이 관여했음은 물론이었다. 폴바르크의 소유주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단치히의 상인들과 계약해 1590년부터 1620년대까지 서유럽이 흉작에 괴로워하고, 남부 유럽국가가 체제 안정을 위해 경쟁하여 곡물 수입을 벌이던 시기에 6%의 곡물을 팔아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 외 해상교역에서의 수출품은 목재 및 목재로 만든 타르 등이 있었다.

그리고 육상교역의 수출품은 피혁, 모피, 삼베, 비단, 리넨 등의 물품들로 이것들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 수출되었고 그 외 향신료, 사치품, 값비싼 의복같은 것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흘러갔다. 일부는 서유럽으로 재수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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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1799년 동안 그단스크 항구를 통한 곡물 수출 지표

10.1. 폴란드 농노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

21세기 이전의 많은 학자들은 엘베강을 '사회경제적 경계선'으로 설정하고 '자유롭고 자본주의적인 서유럽'과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동유럽'을 대비했다. 서유럽은 일찍이 자본주의가 발전했으나 반대로 동유럽은 재판 농노제가 형성되어 오히려 퇴보 혹은 정체했다는 것이다. 당장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재판 농노제'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독일의 구츠헤르샤프트(Gutsherrschaft), 러시아 농노제(Крепостничество)는 각각 프로이센 절대주의, 군국주의와 러시아 전제정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 인식되었다.[73] 독일 경제학자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나프는 엘바강 이동(Ostelbien)에서는 중세가 끝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귀족들이 발악한 결과 귀족권이 강력해졌으며 일반 농촌 및 마을 주민들이 지방 영주들의 직접적인 권력 하에 놓이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서유럽과 동유럽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농업 이원론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폴란드는 바로 그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존재하던 시대에 이미 프로이센인, 러시아인을 비롯한 당대 동유럽인들 사이에서 농노제의 선구자(?)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중요하게 여겨졌다. 실제로 농업 이원론과 폴란드 농노제의 후진성과 억압성에 대한 관점은 마리안 마워비스트(Marian Małowist), 비톨트 쿨라(Witold Kula) 등의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자들과 자본주의, 이윤극대화, 진보를 중시하는 고전주의 및 신고전주의적 성향의 서방 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권과 냉전이 종식되기 훨씬 전부터 그 마르크스주의적 학자들 사이에서도 회의론이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동유럽 농민들의 상황이 현실성이 없을 정도로 암울하다(...)는 것이다. 독일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적 학파의 본진이었던 소련에부터 이 문제가 지적되었다. 알렉산드르 샤피로는 소련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한다면 러시아 농민의 생활수준이 수 세기 동안 내내 하락만 했다는 비현실적인 결론이 나온다고 비판하며 더 '진지한 연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90년대에 많은 소련-러시아 학자들은 혁명 이전 농민에 대한 지식이 한정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러시아 농민들이 농민공동체를 중심으로 살았기에 집단주의적이었고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으며, 시장진출을 꺼렸다는 둥의 인식들은 오히려 19세기에 인민주의자들을 중심으로[74] 정치적,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농민 신화'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같은 흐름은 러시아,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중부유럽 전반에 해당된다. 전근대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같은 거대한 국가에서 군주에 의한 것이든, 귀족에 의한 것이든 '농노제'라고 규정할 수 있는 법적, 제도의 실질적인 강제력과 그것에 대한 당대인들의 이해력에는 지역적,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당대의 많은 폴란드인들, 심지어 외국인들도 폴란드의 '노예제'와 농민에 대한 영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학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만 이는 당시의 엘리트들의 제한적인 시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국가와 귀족은 농촌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며, 이들이 파악하고 착취할 수 있는 농민은 전체의 소수에 불과했다. 즉 농노제란 실제로 당시 농민이 어땠느냐가 아니라 엘리트들이 어떻게 농민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반영하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 제한된 시각을 가진 지식인들의 기록[75], 지배국가인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의 프로파간다[76], 공산주의적 혹은 반공주의적 성향의 학자들의 활동 등으로 지나치게 농민 신화가 고착된 면이 있다.

마워비스트나 쿨라 등의 전통적인 견해의 학자들이 근거로 삼은 폴란드 농촌 경제에 대해 대부분의 자료들은 왕실, 교회, 마그나트 라디푼디아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 역시 지역적, 시기적 차이가 크긴 하지만 나머지와 비교해서 대체로 곡물 수출에 의존했으며 1563년 이후 정기적인 조사를 통해 아직까지 남아있는 자료가 많다. 그러나 이는 전근대 수치조사의 부정확성을 제외하더라도 지주 및 농민들이 의도적으로 생산성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과, 일반 귀족의 소규모 영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폴란드 전체에 일반화할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1950년대 초에 폴란드 국가 기록보관소에서 일반 귀족 영지 기록들을 체계화, 전산화했고 학자들이 폴란드 전역의 중소규모 영지에 관련된 자료들을 검색할 수 있게 됨으로서 폴란드 농노제가 획일적인 실체가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러한 결론들을 두고 안제이 비찬스키(Andrzej Wyczański)는 1960년에 출판한 '1500-1580년 폴란드 귀족 농장에 대한 연구(Studia nad folwarkiem szlacheckim w Polsce w latach 1500–1580)'에서 폴란드 농노제에 대해 결국 학자들도 아는게 별로 없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당시 기준 과감한 주장을 제시했다.[77] 이를 시작으로 폴란드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나빴다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많은 농민들이 사유재산권 등의 권리와 능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농민 농업이 슐라흐타들의 억압의 희생자가 아니라 활발한 경제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후 70~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동유럽 전반의 농노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인식이 자리잡았고 현재는 동유럽 영주-농민의 상호 동의 및 호혜적인 관계, 농민의 단순한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주체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편이다. 물론 이러한 수정주의적 인식이 오히려 동유럽 농민들의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과대평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서의 '재판 농노제'의 개념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물론 전근대 하층민인 폴란드 농민들이 풍요롭고 자유롭게 산 것은 아니었겠지만 기존 전통주의적 주장이 크게 과장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

폴란드-리투아니아 농민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은 안제이 비찬스키의 저작들을 참고할 것.[78] 전통주의에서 수정주의까지 전체적인 인식 변화와 각 주장들의 요약된 내용은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옥스포드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사(The Oxford History of Poland–Lithuania)'의 농민 파트를 참고할 것.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 전반의 농민에 대해서는 마르쿠스 체르만(Markus Cerman)의 '1300-1800년 동유럽의 촌민과 영주 (Villagers and Lords in Eastern Europe, 1300-1800)'를 추천한다.

11. 지방

11.1. 리투아니아 대공국

과거 폴란드의[79] 저명한 역사학자인 헨리크 워브미안스키(Henryk Łowmiański)는 통합이 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전적으로 이득이었으며, 폴란드가 땅만 크지 소프트웨어는 빈약한 후진적인 리투아니아 문명을 발전시켜주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과거 폴란드 역사학계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또한 일부는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편입되면서 그곳의 대귀족들에 의해 왕권의 약화 흔히 잘 알려진 폴란드의 귀족정적 요소가 강력해졌다고 여겼다.

반대측은 리투아니아가 '국가 주권의 상실'을 포함한 많은 손해를 보았으며 루블린 연합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양측이 평등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루테니아에서 우크라이나의 기원을 찾으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역시 통합에 부정적이고, 설령 통합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이후의 가톨릭화, 브레스트 연합, 농노제 확산 등으로 인해 큰 해악을 미쳤다고 여긴다.

이러한 논쟁은 시간이 갈수록 상호 이익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옮겨갔지만 어쨌든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은 루블린 연합이 비록 대외적으로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단일의 정치적 실체로 통합했을지는 몰라도 내정 면에서는 경제, 사회, 법률 등의 측면에서 구분되는 별개의 실체였다는 것이다.

11.2. 왕령 프로이센

원래 폴란드 왕국의 영토였으나 튜튼 기사단이 차지한다. 그러나 사실상 북방 십자군 운동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지 오래였고, 기사단은 온갖 악재를 맞으면서 그룬발트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에 기사단 지도부는 특히 도시 상인들의 부담을 늘릴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흑사병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던 도시들에게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게다가 부족해진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해외에서 주로 신성로마제국 출신 엘리트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기존 원주민 프로이센인 유력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게다가 폴란드와의 크고 작은 전투들은 프로이센 땅을 황폐화시켰고 결국 기사단 엘리트들도 의무 소집에 불응하거나 꺼리게 되었다.

이에 1397년에 튜튼 기사단에 대항하는 도마뱀 연맹이 형성되었고 1440년에는 한자 동맹의 일원인 그단스크, 엘블롱크, 토룬 등을 주축으로 프로이센 연맹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전쟁 중 노골적인 친폴란드 행위는 물론이고 신성로마제국에서 로비 활동을 하기도 했다. 1452년 프로이센 연맹은 신성로마제국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튜튼 기사단에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결국 1454년 폴란드 왕국에 보호를 요청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이를 수락했고 곧바로 연맹은 튜튼 기사단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였으며, 폴란드 역시 '튜튼 기사단의 폭정'으로부터 프로이센인들을 구원하겠다는 명문으로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13년 전쟁이 시작된다. 결국 전쟁 끝에 1466년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 왕국 사이의 2차 토룬 조약으로 기존 기사단의 서프로이센과 포메렐리아가 폴란드 왕국의 땅이 되면서 왕령 프로이센이 형성된다. 반면 남은 튜튼 기사단령은 1525년 단장인 알브레히트가 폴란드 왕국의 봉신으로써 충성을 맹세하여 공령 프로이센이 된다.

카지미에시 4세는 왕령 프로이센과 폴란드 왕국 신민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공유할 것임을 확언했다. 물론 왕령이라는 이름에 맞게 이 지방에서 관리를 임명하고 수입을 처분하는 사람은 폴란드 왕이었다. 그러나 토착권(Ius indigenatus)이 인정되어 프로이센 원주민만이 해당 지역의 관료가 될 수 있었고, 초창기에는 공령 프로이센의 귀족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또한 원래 튜튼 기사단이 단치히 항구를 통과하는 물품에 부과하던 관세(Pfundzoll)가 폐지되었고, 마그데부르크 및 쿨룸 법에 따라 교역의 자유가 인정되었다.1560년대에는 지그문트 2세가 프로이센 도시들에 루터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다.[80]

그러나 프로이센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도시에 대한 지배력이었다. 왕령 프로이센은 농업보다 상업이 발달하였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프로이센 지주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만큼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도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던 도시 내 귀족 영역(Jurydikt)이 왕령 프로이센에서는 금지되었으며,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과 교회에 많은 특권을 부여한 피오트르쿠프 법령(Statuty piotrkowskie)이 왕령 프로이센은 제외되었다.

도시는 자신들의 자치권을 방어하기 위해 부유한 부르주아들이나 중간층 귀족들과 연합했고, 이는 마그데부르크를 비롯한 독일 법과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왕령 프로이센에서는 폴란드 황금의 자유와 함께 발전한 귀족 자유 의식과 독일 법에 기반한 자유 도시 의식이 공존했으며, 이 둘이 서로 견제하거나 협력하면서 왕령 프로이센에서는 폴란드 본토는 물론이거와 프로이센 공국과도 구분되는 독특하고 이원적인 엘리트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 어쨌든 폴란드 본토의 도시에서는 귀족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면서, 타 유럽 국가들에서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치기관들이 폐지되면서 도시가 침체기에 놓이고 있던 시기에 이는 전유럽적으로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였다.

특히 다른 프로이센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이 극명하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공국이 30년 전쟁에서 스웨덴군에게 초토화당하면서[81], 이 트라우마로 인해 유력자들의 자유를 억제할 수 있는 강력한 군주제 국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부터 신분제 의회를 비롯한 각 자치기관들과 이를 용인해 주는 독일법들을 철폐하면서 오늘날 대중적 이미지에서 잘 보이는 군국주의적 국가가 되었다.

반면 왕령 프로이센은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강대국과 자유주의적 체제 하에서 도시 자치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자신들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이것이 인정받는 한 귀족과 도시 엘리트들은 폴란드 왕에게 높은 충성심을 보였다. 이런 경향은 굳이 왕령 프로이센이 아니더라도 폴란드-프로이센 사이에서 주인이 여러 번 바뀌던 많은 도시에서 나타나며, 심지어 과거 튜튼 기사단에 대항하기 위해 폴란드 왕의 도움을 구한 것을 연상되는 행동들이 나타났다. 이는 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1657년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공국에 대한 군주권을 획득했을 때, 그의 영지, 특히 쾨니히스베르그에 대한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게 되었다. 시의원 히에로니무스 로스는 166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을 지원해 줄 것을 폴란드 왕에게 호소했다. 그는 공작의 군주권이 '우리 조상들이 자유에 기반해 누렸던 고대의 행복의 그림자만을 남겼다'고 불평했다. 동시에 쾨니히스베르그의 시민들은 '과거에 그랬던 것 처럼 다시 한 번 폴란드의 신민이 되고 싶다'는 큰 열망을 표현하는 편지를 바르샤바에 보냈다. 선제후의 가장 가까운 장관 중 한 명인 오토 폰 슈베린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로스는 법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권위, 시민과 신민에 대한 긴밀한 통제에 대한 불신을 표현했다. '선제후의 통치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는 우리는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Karin Friedrich, The Other Prussia– Royal Prussia, Poland and Liberty, 1569-177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49-50.
이러한 인식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반대쪽 끝에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반란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흐멜니츠키 봉기를 비롯한 코사크들의 반란은 왕령 프로이센의 지식인들에게 높은 화제성을 가졌다.

17세기 당시 왕령 프로이센의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폴란드인들의 무능함과 이기심이 코사크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거나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편입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내비쳤지만 어쨌든 반란에 있어서 코사크들의 폭력성, 야만성, 아시아성 등을 강조하면서 비난했고, 그들이 책임감 있는 시민의식을 가지기에는 거칠고 배운게 없으며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요소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토룬 시의 폴란드어 공동체의 루터교 목사인 아론 블리페르니츠(Aaron Blivernitz)는 코사크에 관한 법률-정치 논문(Dissertatio Juridico-Politica de Cosacis)을 썼다. 그는 코사크들을 약탈꾼들로 묘사하고 흐멜니츠키를 스파르타쿠스, 세르기우 카틸리나[82]에 비유하면서 이들의 '야만성'이 조국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비난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자유와 헌법 체계를 준수하지 않는다면[83] 옛 튜튼 기사단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18세기 말이 되면서 이러한 인식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체제의 후진성을 인식하고 점차 전체적인 개혁과 중앙집권화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왕령 프로이센의 자치권을 침해하면서였다. 결국 왕령 프로이센인들은 폴란드인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코사크들을 폴란드의 '억압적 지배'에 저항하는 자유의 투사로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12. 문화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근대적인 정치, 사회사상의 발전에서 유럽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에라스뮈스와 같은 철학자가 칭찬한 당시로는 희귀했던 외견상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대응 종교 개혁의 시대에 있어서도 매우 특이했던 종교적 관용을 실현시켜, 유대교[84], 동방정교[85], 아르메니아 가톨릭, 개신교[86], 국교였던 가톨릭과 더불어 이슬람교[87]까지 공존한 것을 가만한다면 동시대의 여러 국가에서 그 풍경을 보고 까무라칠 정도였다. 대홍수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코사크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일에서 보듯이, 종교가 다른 여러 민족들을 이간질시킬 때도 많았다.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국가연합으로 합치기 전부터 이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나 프란치스크 스카리나(Францыск Скарына), 안제이 모드제프스키(Andrzej Frycz Modrzewski) 같은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나라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블린 조약으로 통일된 이후에도 역사학, 지도학, 화학, 민족지학, 군산업에 종사하는 개발자, 천문학, 수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명망있는 학자들이 연방의 문화 발전을 이끌어 왔다. 이중 미하우 보임(Michał Boym)은 예수회 소속 선교사이자 과학자이면서 외교관이기도 해 남명 정권을 섬긴 전적이 있었다. 그외에 수많은 고전작가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슐라흐타들은 회상록이나 일기를 남겨 문학적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저서들을 남겼다. 그 외 건축술은 마그나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건축가들을 후원하면서 성당과 궁전을 건축했고 이 건축물들은 현대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에 문화유산으로 남겨지게 된다.

교육 시설들이 대부분 종교기관에 예속되어 있던 중세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에, 가톨릭에 바탕을 둔 폴란드 문화는 서유럽의 최신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용이했다. 루스 귀족 상당수가 성당을 통해서 전파되는 최신 폴란드 문화에 매료되어 폴란드인으로 완전히 동화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리투아니아어 사용지역은 국가연합 이전 동군연합에 머물던 시대에도 꾸준히 축소되었다.[88] 오늘날에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의 정교회 유력자들도, 같은 이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폴란드어를 쓰며 폴란드인으로 동화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르부프정교회 신도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압력과 당시의 시대 상황의 영향으로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귀족층들 사이에선 사르만티즘(Sarmantyzm)이란 이데올로기가 유행했다. 사르만티즘이란 폴란드 민족의 선조라고 생각된 사르마티아인들과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숭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슐라흐타들의 문화에 깊숙히 스며들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들의 생활영역의 전면에 침투했다. 사르만티즘은 슐라흐타 계급에게 있어 평등의식, 그들의 기마 취미, 전통 중시, 지방에서의 전원생활, 평화주의를 장려하고 오리엔트에 영향을 받은 복식의 유행을 낳았다. 거기에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방의 귀족계급에게 단일 민족의식에 가까운 연대감을 주었고, 슐라흐타의 "황금의 자유"에 정통성을 각각 부여했다.[89] 초기 사르만티즘은 이상주의적인 것으로 문화활동에서 분류되어 나온것으로 신앙심, 성실함, 애국심, 용감함, 평등과 자유를 고취시키는 작용을 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성격은 서서히 부정되었다. 후기에 나타난 과격한 사르만티즘은 신앙심을 광신시키고, 성실함을 정치적 무지로 변화시켰으며, 자랑을 오만으로 만들고, 용감을 완미(頑迷)로, 자유를 무질서로 변모시키는 작용을 하고 말았다. 이 사르만티즘은 당대 연방의 개혁가들이나 독립운동가[90]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91] 이러한 비판은 폴란드의 붕괴가 내부 분열에 의한 것으로 포장하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역사왜곡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항으로 현대 폴란드에서는 아이러니를 뜻하는 단어가 'Sarmata' 일 정도로 역사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주류계층들이 이렇게 좋은 문화와 생활을 향유했던 것에 반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노들은 슐라흐타들의 착취 때문에 엄청나게 고통받았다.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농업 덕분에 농노제는 약화되긴커녕 오히려 더 철저하게 강화되었다. 세임은 자신들의 사유재산인 농노들을 더 착취하기 위해 세월이 흐를수록 농노의 인신자유를 구속하는 법령을 강화했다. 농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결혼도 마음대로 못했다. 그들의 직업은 지주의 명령에 따라 결정되었다. 부역 기간은 점점 늘어나 18세기에 이르면 일주일에 8인일[92]이 부과될 정도로 심했다. 농노제가 강화되는 추세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18세기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끝났다.[93]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노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와 위에서 언급한 사르만티즘 같은 이념이 자주 사용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에서는 슐라흐타들이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의 후손이며, 농노들은 둘째 아들이자 저주받았다고 알려진 의 후손이라고 가르쳤다.[94] 그밖에도 조금이라도 농노들을 벗겨먹을 목적으로 각 가정마다 의무적으로 일정량의 보드카를 구입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많은 농노들은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냈다.#[95] 농노들은 흑인 노예들처럼 개별 단위로 판매되진 않았지만 대신 토지에 묶여서 도매금으로 거래되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더 가혹했는데, 연방 본토의 농노들은 적어도 같은 민족으로 봤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들에게 그저 야만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슐라흐타들은 자신들이 이 야만인들을 문명인으로 개화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으며 정교회 신앙을 탄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였다. 전성기에는 7천명의 슐라흐타들이 3백만명이나 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농노로 부렸다.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훗날 흐멜니츠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런 농노제의 철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시점은 1차 폴란드 분할 이후 1780-90년대였고, 철폐된 것은 1791년이었다. 하지만 주변국의 간섭과 분할로 폴란드가 분할되면서 농노제가 부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농노제를 폐지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농노제를 유지한 러시아령 폴란드는 1864년이 되어서야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주도로 폐지했다. 그러나 그 잔재는 이후로도 몇십년 가량이나 지속되었다.

13. 사회계층

13.1. 농민

당시 시대가 다 그렇긴 했지만 농민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비톨트 쿨라의 계산에 따르면 1578년 기준 대폴란드, 소폴란드, 마조비아의 농민 비율은 약 67.2 %에 달했다. 다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농민의 범주에 넣지 않은 부농 등이 제외된 수치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봐야한다.[96]

16~18세기 농민 및 마을민들을 규제하는 통일된 법적 규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폴란드 왕령에 사는 대부분의 농민은 농노의 지위였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1588년의 3차 리투아니아 헌장에 종속되었다.[97]

13.2. 도시민

도시민은 시대와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인구의 4~10%를 차지했다. 도시민 다수는 귀족, 유대인, 독일인이었다. 도시의 성장은 서유럽에 비해 느렸지만 예외적으로 바르샤바는 18세기 베틴 왕조 통치기 경제호황을 타고 1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 당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해외에서 정착민들을 소폴란드에 데려왔는데 대부분 오스트리아와 실레시에에서 온 루터교 독일계였고 이후는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들이 합류했다.

다만 왕령 프로이센의 주요 도시들의 발전은 폴란드는 물론이거와 서유럽에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98] 이는 그곳만의 차별된 특성이 작용했는데, 상대적으로 서유럽과 가까워서 상업이 발달했고 마그데부르크, 쿨룸 같은 독일법에 기초한 도시 자치가 유지되었으며 반면 농업이 발전하지 못했기에 폴란드 본토만큼 지주귀족들이 도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3.3. 코사크

공식적으로 코사크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로 편입시킨 인물은 지그문트 2세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시도는 스테판 바토리에 의해 행해졌다.[99] 1578년에 코사크의 대표를 자처하는 이들이 바토리의 궁에 출현하여 급여를 받는 대신 군사 복무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외국인 출신으로써 확고한 지지기반을 만들 필요가 있었고, 러시아와의 전쟁 중이었던 바토리에게 이는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당연히 수락한다.

13.4. 귀족

슐라흐타(Szlachta)라고 불렸다. 이론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평민이 합법적으로 귀족이 되는 것이 1578년 세임에서는 승인되었고 이후 헌법에 명시되었다. 그 외에 외국인에게 귀족을 부여하는 인디게나트(Indygenat)도 존재했다.

폴란드 본토에서는 일시적으로 국왕이 귀족들을 억누를 때도 있었고, 귀족들도 지방에서 세를 늘리기 보다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왕권과 귀족권 사이에 대립-협력의 미묘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에서는 기존 귀족들이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는 루블린 연합 이전의 특권들을 상당 부분 보존해서 따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연합 이후로도 오랫동안 정교회-루스에 기반한 리투아니아 루스(혹은 루테니아) 정체성과 발트 다신교에 기반한 게미니드조 리투아니아 정체성이 이어져 내려와서 적어도 상당한 정교도 귀족들에게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인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거나 브레스트 연합 등의 억제책에 대한 반발로써 옛 정체성이 재구성된 것으로 보인다.[100]

때문에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동군연합 이후 리투아니아 크냐지들이 종교적, 민족적 이유로 억압받았다고 서술하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러시아로 망명한 당대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계 귀족들이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반대로 폴란드 역사학계에서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확장과 전제정 억압의 희생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마찬가지로 폴란드로 망명한 당대 러시아, 리투아니아계 귀족들이 그렇게 주장했다(...).[101] 그러나 어쨌든 양측 모두 어느 정도는 맞다고 할 수 있고 이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 권역의 귀족들도 각자 상황과 생각이 달랐음은 분명하다.[102]

반대로 왕령 프로이센의 귀족들은 전반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충성했으나[103] 상대적으로 가난했기에 폴란드 귀족들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쪽은 오히려 독일 법에 기반한 도시 자치가 인정되면서 전통적인 지주 귀족들보다는 도시 엘리트들의 영향력이 훨씬 컸다.

귀족의 절대다수는 이른바 소작농 귀족(Szlachta czynszowa) 내지는 거지 귀족(Hołota)에 불과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귀족과 농민 사이의 차이는 참정권과 인신자유를 보장받았느냐 아니냐에 불과했다. 이들 귀족은 18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지배한 후견주의 경향에서 클리엔터스에 해당했으며 파트로누스인 마그나트에게 재화와 용역을 받는 댓가로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흥미롭게도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로마 공화정을 본받아서 그런지 단점도 빼다박은 수준이다.

16세기에 후견주의가 대두되면서 종속 귀족(Szlachta zależna)이라는 새로운 하위 범주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더 강대한 마그나트나 기타 세력가에게 투탁한 이들로써 군복무나 기타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토지를 임대받았다. 이들은 세이미크에서의 투표권을 비롯한 귀족권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왕령에서는 스타로스타[104], 영지에서는 상위 영주의 관할에 놓였으며 왕에게 탄원할 자격이 없었다.[105] 이쯤되면 반쯤 농노화된 귀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래의 마그나트를 포함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 인구 비율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귀족들이 폴란드를 지배해서 그 시대 기준으로도 농노들이 가혹하게 착취당했다는 전통적 관점을 고수하는 쪽은 귀족 인구를 크게 추산하여 10% 안밖으로 추산하는[106] 반면 그게 과장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근데 어쨌든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는데는 양측 모두 동의한다.

13.4.1. 마그나트

흔히 고귀한 혈통의 부유하고 권세 높은 대지주-귀족들이나 중앙정계의 핵심 인물들로 묘사되며 실제로 많은 마그나트들이 그런 존재였기는 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민주정 체제에서 정치적으로 모든 귀족들은 평등했기에 공식적인 작위나 직책이 아니었다.[107] 실제로는 마그나트는 폴란드 귀족 사회에서 얼마나 인정 받느냐에 따라 포함되기도 퇴출되기도 하는 유동적인 계층이었다. 때문에 지역적, 시기적으로 상이했고 그 유형 역시 중앙 관료형, 지방 호족형, 거점 군벌형 등 다양했다. 교육, 생활방식, 사고방식의 측면에서 마그나트와 하급 귀족의 차이는 사실상 마그나트와 농민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폴란드의 마그나트들이 리투아니아의 일반 귀족보다 못할 수도 있었다.

굳이 가장 흔한 특징을 찾아보자면 1) 대토지를 보유하고, 2) 해당 지역 및 인척 네트워크에서 영향력을 가졌으며, 3) 사병을 보유했으며, 4) 예술, 학문, 기술, 군사학 등의 교육을 받거나 이를 후원하거나 정부 고위 직책을 맡거나 군공을 쌓아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인정받은 존재였다.

14. 의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한때 중부유럽동유럽에서 강력한 국가였다. 정치, 군사, 문화에 있어서 찬란한 역사를 자랑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정을 실시[108], 왕을 선출하였고 군사적으로 전성기에 동유럽 최강국을 자처했으며 그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하면서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라는 칭호도 얻었다. 문화적으로는 서쪽으로 서유럽을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과 동쪽으로 러시아, 북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쪽으로 발칸 반도와 오스만 제국과 위치하고 있어 동유럽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또한 후기에 들어서는 귀족들의 야욕과 탐욕도 연방을 나락으로 끌고 가는데 한몫했다. 귀족들의 세임에 대해 견제할 세력이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사사건건 왕권에 대항했으며 심지어 이익에 눈이 멀어 조국을 배반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력을 악화시켰다. 한때 강성했던 나라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에 의해 국토가 분할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데에는 이같은 지배계층의 애국심 부족도 한몫을 했다.

허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간접적으로나마 세계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마지막으로 채택한 헌법은 미국과 혁명으로 공화정이 된 프랑스의 기본 헌법으로 제정되었으며 그들의 정치사상은 미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국을 공화정을 유지하되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혼재하게 했다.

특히 폴란드의 공화정은 주변국이자 폴란드 분할의 당사자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귀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과 폴란드식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낳았다. 반대로 해당 국가들의 귀족권이 강력해져서 재판 농노제가 성립되어 농민에 대한 착취가 증대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때의 이미지 때문에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에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바르고 게르마니아(독일 지방) 영주들을 위협하며 주무대인 영불제국을 견제하려는 나라로 등장한다. 한니발의 승리를 다룬 시간여행 SF타임 패트롤 시리즈》의 "델렌다 에스트"에서는 리톤(리투아니아에서 유래된 듯)이라는 이름으로 동유럽 전체를 차지하기도...

14.1. 러시아에 미친 영향

모스크바 귀족들은 마그나트들에게 유리하게 왕권을 제한하는 제치포스폴리타의 정치체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보야린들은 비슷한 체제를 루스에 퍼트리고 같은 식으로 차르의 전제권력을 제한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루슬란 스크리니코프, 보리스 고두노프 中
알렉산드르 백작[109] 자신은 특정 자유주의 사상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그것들을 인지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의 안에는 안나를 제위에 올리고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길 원했던 오래된 자유주의 러시아 귀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유럽을 여행하고 아우구스트 3세 통치기의 바르샤바를 지나면서 러시아가 그 당시의 폴란드처럼 되고 러시아의 신민들이 폴란드인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권리와 특권들을 얻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유익한 조국을 상상할 수 없다고 내게 말했다.
아담 차르토리스키, 회고록 中
폴란드사학자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폴란드가 러시아의 서구 사상과 기술의 전달자였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정부 주도의 의식적인 서구화는 스테판 바토리 치하 전성기의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점차 폴란드의 군제, 전략, 기술을 흡수하면서 시작되었다는데 러시아 역사학자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편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군사 및 외교 용어에서는 폴란드어 차용 단어들이 많고[110] 양측 군대에 러시아인, 폴란드인들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브레스트 연합은 러시아 정교회에 위기감을 조성하여 타 국가 정교회, 프로테스탄트들과의 활발한 신학 교류와 이로 인한 발전을 촉구하기도 했다.

애시당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가톨릭화와 귀족정화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111]은 러시아로 망명했고, 러시아 전제정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인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하였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쪽의 농노제나 상황이 악화되면 농민들은 다른 한쪽으로 도망쳤다. 결국 양국 사이에서 엘리트층부터 하층민들까지 주기적인 교환(?)이 이루어졌기에 양국에 대해 잘 알고 어떻게든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제정 시대 내내 친폴란드 성향의 지주-귀족 세력이 항상 존재했으며 17세기에는 아예 3국인 스웨덴에서 러시아 귀족들이 폴란드에 충성해서 차르가 폴란드를 상대로 할 수 있는게 없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폴란드가 러시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거시적인 국가 방향성를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에 있었다. 폴란드의 귀족정 체제는 주변국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폴란드화는 러시아사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귀족정화 및 농민 예속화[112]이반 3세에 의해 격파되었고 포메스티예(봉직영지)[113]로 대체됨으로써 러시아는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본격적으로 전제정으로의 재건을 시작한다. 이후 혼란시대[114], 알렉세이 1세 통치기의 반란[115], 궁정 쿠데타 시대[116] 등등 여러 역사적 사건들의 원인이 되었으며, 전제정 재건과 농노제 폐지를 추진하는 니콜라이 1세가 등극하여 자유주의를 탄압하고 폴란드인들을 축출하고 그 대신 발트 독일인들을 대거 등용하는 계기가 되었다.[117] 폴란드 차르국의 자치권 폐지 추진이 시작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주목할 점은 러시아 자유주의 사상이 폴란드 '황금의 자유'의 직접적인 계승자라는 점이다. 차르토리스키가 지적했듯이 자유주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를 러시아 제국에서 구현하려는 귀족의 '오래된' 속성이었다. 게다가 이는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 지주계층이 강력한 사회집단으로 떠오르고, 차르토리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폴란드인들이 등장함으로써 더 강력해졌다.[118]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러한 자유가 폴란드의 대홍수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동란시대, 스테판 라진의 난, 푸가초프의 난 등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겼다. 때문에 통제되지 않는 자유는 혁명을 불러일으키며,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전제정이 존재해야만 한다[119]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반동적인' 이념이 형성되기도 했다.

차르토리스키를 비롯한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 공화국의 자유를 칭송했지만 정작 알렉산드르 1세와 미하일 스페란스키가 프랑스 모델을 따라 농노제를 폐지하고 '헌법'적 체제를 수립하려고 할 때, '헌법'으로 차르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이를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데카브리스트들 조차도 농노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위해 귀족이 일정 부분 희생해야 한다는 언급은 없었다.[120] 따라서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법적,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프랑스식 공화주의자들이었지만[121]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농노제에 기반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를 수호하는 봉건귀족이라는 양면성이 있었다. 어쨌든 시간이 갈수록 점차 개화되긴 했지만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동유럽의 자유주의자들 상당수는 이러한 모순적인 면모를 버리지 못했다.[122]

이는 그가 가담했던 11월 봉기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봉기 당시 많은 폴란드 핵심인사들은 니콜라이 1세와 협상하려 하거나 적극성을 보이긴 커녕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그들의 전술한 정체성의 모순이 원인이었다.[123] 시인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나의 모스칼 친구들에게'라는 시에서 "차르에게 영혼을 팔지 말고" 싸울 것을 촉구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 지배에 대한 폴란드 민족주의적 저항이 아니라 전제정 체제에 맞선 러시아인과 폴란드인 공통의 투쟁인 것이다. 어차피 러시아군을 격퇴한다 한들 체급 차이로 인해 언젠가는 밀릴 수 밖에 없지만 러시아 내부의 귀족들, 자유주의자들의 친폴란드 성향은 유명한 것이었고 이들이 궁정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최소한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면 (이전의 다른 차르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1세는 굴복할 수 밖에 없고 단번에 상황은 역전될 것이라 예측할 수 있으니 오히려 합리적인 혹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전대 러시아 황제들이었다면 이게 먹혔을 것이다. 문제는 니콜라이 1세는 농노제를 완화하려다가 귀족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와 달리 이미 황제원 3국, 비밀경찰, 헌병대 및 독일인 장교들로 친위세력을 구축해서 쿠데타 움직임을 사전에 입수하여 무력으로 찍어누를 여력이 있었고, 폐위되거나 암살당할까 전전긍긍하며 귀족들 눈치나 보던 첫째 형과 그게 두려워서 제위를 계승하기도 거부했던 둘째 형[124]과는 달리 자기 목숨 걸고 제위에 오를 정도로 신념이 확고했다는 점이다.

차라리 폴란드 봉기 주동자들이 러시아 자유주의자들과 선을 긋고 폴란드에 국한된다는 것을 명확히 하거나 민족봉기, 민중봉기임을 강조하거나 아예 귀족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최소한 차르토리스키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류사회에 연줄이 있는 이들이 없었더라면 평화적으로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실제로 니콜라이 1세는 봉기 직후 군대를 움직이지 않은 채 상황을 관망했고 협상 의지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후의 탄압 행보로 가려지는 사실이지만 당대 유럽 열강 군주들 중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사상적, 정치적 견해와 별개로서) 친폴란드적 인물이었다.[125] 그러나 이 폴란드 귀족들이 러시아 내의 자유주의자들, 더 정확히 말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길 원했던 오래된 자유주의 러시아 귀족' 세력의 행동을 촉구한 것은 최악의 경우 두 번째 동란시대를 야기할 수 있는 재앙으로 인식되었다. 그 시점에서 협상이라는 선택지는 없어졌고 니콜라이 1세는 가능한 한 철저하고 잔혹하게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러시아 내부의 자유주의 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어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던 궁정 쿠데타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야만 했다.

즉 차르들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한건 단순히 독재정권이 민주투사들을 탄압한게 아니고, 황제권과 귀족권의 파워게임이며 동시에 더 근본적인 국가 생존이 얽힌 이념 문제였다. 사실 비슷한 시기의 러시아 차리즘, 프랑스 보나파르티즘, 프로이센 절대주의[126] 등등 소위 '반동보수'라고 불리는 근왕주의적 이념에는 대부분 이런 논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관점에서는 법적 자유는 특정 사회 계층이나 집단이 국가에 대한 통치권을 배타적으로 보유하지 않거나 보편적인 이익 추구가 가능할 만큼 의식 수준이 높을 경우에만 가능한데 당시에 해당 국가들은 사회 구조상 그러지 못했다. 때문에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초계급적인 중앙정부의 주도로 이러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려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제한할 수 있는 대의제나 헌법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자유주의적 우파와 자유주의적 좌파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실패국가로 규정하고 멸망의 필연성을 주장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영미권 역사학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당대 배경을 살펴보면 폴란드의 귀족들, 동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를 해당 국가들에서 구현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때문에 반발하는 이들은 폴란드 멸망을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국이 같은 길을 걷는다면 최후 역시 똑같을 것이라고 경고 혹은 비관적 예측을 내놓은 것이다. 고로 정복국가의 피정복국가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을 까고, 반공주의자들이 소련을 까는 것과 같은 정치이념 문제였다. 애시당초 그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당시에도 폴란드인들은 이러한 문제로 갈라져서 서로 싸웠고, 왕당파를 위시로 한 일부는 이러다가 나라 망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러한 지적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상황을 지나치게 폄하해서 후대에 왜곡된 이미지를 고착시켰다는 평을 받는 것까지 똑같다(...).

독일 경제학자인 아우구스트 폰 학스타우젠(August von Haxthausen)은 서구화된(=타락한) 러시아 귀족의 이미지를 지적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부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서구화(폴란드화)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농노제를 정착시켰으며 귀족과 농민의 민족적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고 주장했다.[127] 슬라브주의적 성향이 있는 레프 톨스토이가 괜히 러시아 농민만을 '진정한 러시아인'이라 칭하고, 러시아 고전문학에서 폴란드인들을 탐욕스럽고 부패한 악덕 지주로 묘사한게 아니다.[128] 또한 극단적인 경우 서구화가 러시아 내에서 폴란드인, 독일인들의 지배계층으로써의 지위를 보장하는 러시아인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인식과 이에 대한 반동으로 러시아 민족주의의 발흥과 이후 제국 내 비러시아인들에 대한 러시아화(Русификация)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부터 소련과 현대 러시아 연방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인들의 자본주의적 물질주의에 타락한 서구문명이라는 반서방적 개념이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게 동로마 제국이다. 세계총대주교좌에서 벗어나려는 중세 러시아 정교도들도 동로마를 깠지만[129] 중세 이후 서구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러시아는 쇠락한 동로마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럽에서부터 고립되었고 억압적인 전제정을 창조했으며, 때문에 만약 러시아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가톨릭을 받아들였으면 '폴란드처럼'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과 인식들의 대다수는 이념적, 정치적 이유로 과장된 것이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기도 힘들다. 중요한 점은 진실이 어떻게 되든 당대 러시아인들이 이를 믿고 행동했으며, 러시아의 역사 흐름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결국 러시아는 폴란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5. 식민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식민지가 없었다.(식민제국이 아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봉신국이었던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에는식민지가 존재하였다.자신한테는 식민지가 없지만 식민지(속국)는 식민지가 있는 상황(?)

토바고섬에 식민지가 있었고 그 식민지의 이름은 노이 쿠를란트(뉴 쿠를란트)이다. 그리고 감비아쿤타 킨테 섬과 감비아의 강가에도 쿠를란트-젬갈렌의 식민지가 있었다.[130]

16. 대중매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대중적으로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군사사에서 인기가 많은 기병의 강국이라는 사실과, 그 중에서도 정점인 윙드 후사르라는 기병의 압도적인 인기, 그리고 한때 찬란한 문화와 국력을 자랑했으나 비극적으로 멸망했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역덕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각종 대중매체에서도 큰 관심을 갖고 반영하는 편이다.
  • Hearts of Iron IV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중 하나로 플레이한다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역을 점령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재건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는 워낙에 체급이 작은데다, 발트 단일국 루트도 있기 때문에 주로 폴란드로 재건한다.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폴란드로 생디칼리슴 루트를 선택하면 폴리투를 재건할 수 있는데, 0.23 패치 이전에는 그냥 리투아니아 왕을 선출하면 재건이 가능했다.
  • 토탈 워: 엠파이어에서는 메이저 팩션 중 하나로 등장하며, 실제 역사와 달리 달리 단점이 없는 입헌군주정이라는 정치체제와 초반 러시아와의 동맹 상태로 인해 양면전선을 제한할 수 있는 점, 꽤 큰 초기 영토 등으로 인해 쉬운 팩션으로 꼽힌다. 그러나 메이저 팩션임에도 마이너 팩션과 다를 바 없는 특색 없는 유닛 구성 때문에 인기 없는 팩션이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 행정 기술 10으로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를 평화합병 하는 디시전이나, 아니면 그냥 요구 프로빈스를 점령하여 강제 결성 하는게 가능하다. 시작부터 양국의 영토가 매우 광활하여 초기부터 깡패 국가이며, 기병 전투력 33%가 있어 기병 국가라는 편견이 있지만, 보병 전투력, 육군 사기, 규율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 군사력 만큼은 전 세계에서 순위를 앞다툴 정도로 막강하다.
  •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5부터 폴란드가 나오고 있는데, 지도자인 카지미에시 3세는 연방이 수립되기 이전의 인물이지만 고유 유닛인 날개 후사르가 이 시대를 상징한다. 후속작이자 최신작인 문명 6에서는 역시 연방 수립 이전이지만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야드비가 여왕이 지도자로 등장하며, 역시 날개 후사르가 등장하여 이 시대를 체험해 볼 수 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결정판에서는 2022년 4월 지중해의 기사단 DLC 출시로 등장한 유럽 왕가 중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조였던 야기에우워 왕조바사 왕조가 등장했으며 윙드 후사르가 바사 왕조 소속 원주민 유닛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2024년 2월 23년, 2024년 말에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함께 정식 문명으로 출시될 것임을 발표하였다.


[1] 연방 멸망 직전인 1791년에 헌법으로 확립한 공식 명칭이다. 두 민족이라 함은 당연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이 시기가 진정한 폴란드 제1공화국이다.[2] 국기와 국장은 정확히는 스웨덴바사 왕조 출신의 왕이 통치한 시기(17세기)의 것이다. 국기와 국장 안의 문장이 바로 바사 왕조의 것.[3] 로마서 8:31, 공동번역 성서[4]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치세의 최대 강역. 1618년 데울리노 협정으로 루스 차르국체르니고프,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스몰렌스크 등을 획득한 이후의 강역이다. 프로이센 공국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봉신국이었으며, 지도와 달리 리보니아도르파트, 페르나우, 벤덴 3주는 1626~1629년의 폴란드-스웨덴 전쟁 당시 스웨덴이 점령하여 실질적으로는 스웨덴 지배 하에 있었다. 따라서 해당 지도는 1620년경 영토를 그린 것이라 보는게 더 맞다.[5] 명목상 1569~1793[6] 명목상 1793~1795[7] 세습→선거→입헌[8] 폴란드의 왕으로서는 1548년부터 재위.[9] 연방의 마지막 군주.[10] 그 다음해인 1772년 폴란드 분할이 일어나면서 인구가 거의 반토막 났다.[11] 우크라이나어벨라루스어의 전신[12] 그단스크, 프로이센 공국,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에서 사용[13] 한때 유대인의 낙원이라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관용적인 나라였다. 176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수는 75만 명 이상으로 당시 유럽 유대인의 절반을 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14] 특히 루블린 협정을 맺을 때 우크라이나 일대의 관할권이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로 이전되었다.[15] 후자는 폴리투를 넘어서 독일의 라이히(Reich)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고유의 정치체 전부에 쓰인다.[16] 통념과 달리 야기에우워 왕조는 대가 끊길 때까지 폴란드 왕국에서는 선출된 국왕이었다. 혈통으로 세습이 보장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는 사정이 달랐다.[17] 1560년대 폴란드에서 징수된 세금의 70%가 리투아니아-러시아 전쟁의 전비로 나갈 정도였다. 게다가 폴란드는 리투아니아-러시아 국경 쪽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여 리투아니아를 원조했다.[18] 예를 들어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리투아니아 대공 1544~72 재위, 폴란드 왕 1548~72 재위)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은 결국 폴란드의 위협이라고 주장하면서 통합의 필요성을 설파했다.[19] 당시 폴란드로 병합된 루테니아 지역의 루스 귀족들은 의외로 폴란드의 병합을 매우 환영했는데, 이는 폴란드가 보유한 인프라를 통해 서유럽 교역망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폴란드 귀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루스 귀족 상당수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여 폴란드 귀족에 동화된다.[20]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루스 귀족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루스 농민들에게는 보다 엄격한 농노제가 적용된다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귀족들은 코사크들에게도 농노제를 적용하려고 하였고, 이는 결국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21] 현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의 영토와 거의 일치한다.[22] 단 루블린 연합으로 명목상의 한 국가가 되었고, 실질적인 통합이 가속화되는 전환점 중 하나였지만 이후로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크게 구분되는 사실상의 별개의 국가였다.[23]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이 현대에는 서로를 제대로 구별하게 된 것은 똑같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폴란드가 폴란드 입헌왕국이라는 명목상의 독립국가로 한동안 이어져온 반면 리투아니아는 그런 것도 없었던 것, 20세기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각각 따로 독립한 것(폴란드 섭정왕국폴란드 제2공화국/리투아니아 왕국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냉전 시절 폴란드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위성국)로 존재한 반면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구성국(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어 또다시 러시아계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것 때문이다.[24] 16세기부터 일찍 폴란드어 화자가 다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소련나치 독일이 갈라먹기 전까지 폴란드계가 다수를 점한 빌뉴스와 달리 카우나스는 중세부터 지금까지 리투아니아어 모어 화자가 다수거나 적어도 폴란드계와 비등했고, 전간기 시절도 폴란드 쪽에 뜯기지 않고 저 상술한 외교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투아니아'족'의 신생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끝까지 영유했다. 본 발언의 문맥에 따르면 완전 편협하고 몰역사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봐도 '순수 리투아니아 땅'이라 주장할 여지가 훨씬 더 큰 도시 태생이란 의미이다.[25] 언어는 폴란드어를 쓰지만 나고자란 지방은 현대 폴란드 땅이 아닌 폴란드어계 지식인 전통 전반.[26] 이 중세 폴란드 왕국령 내 루스인들이 주로 살던 지역을 20세기 이전에는 적러시아, 즉 말 그대로 붉은 러시아라고 불렀다.[27] 폴란드어: 르부프[28] 폴란드어: 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29] 폴란드어: 스타니스와부프. 우크라이나어로도 1960년대에 민족주의 시인 이반 프란코를 기념한다고 개명하기 전에는 스타니슬라비우라고 불렀다.[30] 단 도시만! 조금만 도시 외곽으로 빠지면 확고하게 루스인들이 절대다수였다. 이러한 민족분포는 20세기 초중반까지 이어져 나치 독일소련5차 폴란드 분할 당시 소련의 동부 폴란드 병합 명분이 되었다.[31] 언어학적 조사에 따르면 15세기 초반쯤 되면 리투아니아 대공국 전체 인구 9백만명 가량 중에서 리투아니아어 모어 화자가 1백만명이 안됐다.[32] 러시아어로 카자크, 폴란드어로 코자치, 우크라이나어로 코자키 등으로 표기되지만 본 문서에서는 가장 범용성이 높은 영문 표기를 사용한다.[33] 근세 유럽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종파주의가 강한 시대였다. 당장 17세기 전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일 때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과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스웨덴까지 와서 성전을 벌일 정도였다.[34]탈린을 중심으로 하는 에스토니아 북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35]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증손자.[36] 아내의 사망으로 폴란드를 잃기도 전에 사촌인 비타우타스와 리투아니아의 대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요가일라 측에서 한발짝 양보, 비타우타스를 자신의 부섭정에 임명하였다. 사실상 그를 리투아니아의 실질적 지배자로 인정한 것이라 리투아니아 내의 권력기반이 상당부분 실추된 상태였다.[37]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력이 그렇게 강대한 편은 아니었다. 그룬발트 전투에 참전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은 4만 명 내외, 많이 쳐줘봐야 5만여 명 정도였다. 한편 독일 기사단의 병력은 2만 7천여 명이었다.[38] 하지만 어디까지나 별도의 왕국이며, 브와디스와프는 보헤미아의 왕위가 빈 1471년부터 왕위를 주장했으나 경쟁자인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야기에우워 왕조의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은 러요시 2세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전사하면서 2대만에 단절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보헤미아 왕국 참조.[39] 지그문트 2세는 카지미에시 4세의 막내아들 지그문트 1세의 외아들이지만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지한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의 자손들도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문을 닫았다. 카지미에시 4세의 차남 카지미에시는 성직자였고, 3남 얀 1세 올브라흐트와 4남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40] 프랑스 왕국삼부회에 해당한다. 여담으로 현재에도 폴란드(Sejm)와 리투아니아(Seimas), 라트비아(Saeima)의 의회가 이 이름을 쓰고 있다.[41] 정확히는 발루아 왕조의 방계인 발루아-앙굴렘[42] 그러나 헨리크 발레지 역시 술과 도박에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오늘날 폴란드에서는 먼 나라에서 와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불평불만이나 하다가 곧 돌아간, 도대체 뭐하러 왔는지 모를 잉간 취급이나 당하고 있다고.[43] 헝가리어로는 '바토리 이슈트반'. 그 유명한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외삼촌으로, 스테판의 누나 언너가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44] 막시밀리안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에서 신교도에게 가장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지독한 가톨릭 원리주의자였던 것을 본다면 신교도 귀족들의 반대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45] 스웨덴은 모국이자 부왕 요한 3세가 어느정도 기반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귀족 계층이 지지했던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선출 군주인데다가 외국인이어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안정된 스웨덴을 귀족들과 숙부에게 맡기고 본인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집중하는 것이 일리는 있었다.[46] 훗날 국력 관계가 역전된 러시아 제국과 이를 계승한 소련이 폴란드를 그토록 가혹하게 공격하고, 탄압했던 것도 이런 전례가 있어 러시아 입장에서 폴란드는 무슨 무해한 작은 이웃이 아니라 자국에게 실존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고,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다른 변경 지대가 폴란드 주도로 독립적인 하나의 세력으로 묶여버리면 이런 실존적 위협이 되살아 날 수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같은 후대 폴란드의 지도자들도 똑같은 계산에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키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가 소련을 견제할 만한 국력을 아예 정신적인 차원에서부터 갈아버리자고 카틴 학살을 저지르며 저런 상호 불신의 역사를 되풀이했다. 여하튼 러시아 입장에서 폴란드는 러시아가 동유럽의 패자, 나아가 세계적 열강으로 클려면 반드시 꺾어야 하는 전통적인 강적이자 라이벌이었다.[47]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인 독소전쟁에서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이 벌어진 지역.[48] 이 전투에서 흐멜니츠키와 휘하 코사크는 포로로 잡은 8천여 명의 포로들을 모두 참수하거나 내장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학살했다. 이 때 연방군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는데, 최고의 엘리트 병력이 바토흐 전투에서 모두 전멸했기 때문. 따라서 흐멜니츠키 봉기가 끝나고 나서는 동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루스 차르국 군대와 북쪽의 숫자는 적으나 질적으로 우수한 스웨덴군을 막을 정예군이 없었다.[49] 연방의 전성기 인구가 1,200만 정도 달하였으나 봉신국들이 독립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의 영토를 대거 상실한 것과 전란으로 적지 않은 인구가 사망한 영향으로 400만 정도 감소하였다.[50] 지도에 오류가 있는데 프로이센 공국은 1660년 올리바 조약으로 폴란드 국왕과의 주종관계를 청산했다. 그래서 이 때부터는 실질은 물론 명목으로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가 아니었다.[51] 대홍수 때 일어난 바토흐 전투에서 자신의 형이 포로로 잡혀 학살당했고, 전공을 세워 왕으로 선출될 시점에선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총사령관이었다.[52] 대신 스타니스와프는 프랑스가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승인 조건으로 얻은 로렌 공국을 노후를 보낼 영지로 받았다. 그리고 스타니스와프는 자식이 없기에 사후 로렌은 그대로 프랑스 땅이 되었다.[53] 사실 오리엔트 정교회 신자와 신학자 본인들은 오래된 오해에서 비롯된 비칭이라며 '단성론' 운운하는걸 거부한다[54]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오리엔트 교회, 비삼위일체파 군소 '이단'들.[55] 역사학계에선 이런 16-17세기 유럽사 전반의 트렌드를 '교파화 과정 (confessionalization/Konfessionalisierung)'이라고 한다[56] 로마 교황에게 세계총대주교좌의 성유물을 전해주거나, 러시아를 방문해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을 러시아로 이전할 것을 요청하다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창설에 동의하거나, 개신교와 정교도 간의 최초의 신학 교류를 수행하는 등 여러모로 파격적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57] 키예프 루스의 야로슬라프 1세 시대에 창설된 최초의 정교회 수도원이다.[58] 현재 성인으로 시성된 인물이라서 당대 행실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 1623년 세임에서 쿤체빅이 정교도들을 탄압한다는 발언이 나온 것으로 봐서 당대 폴란드인들 관점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정교도들을 탄압했던 인물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폴란드사 권위자인 노먼 데이비즈도 쿤체빅이 정교도에 대한 온갖 억압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59] 러시아-폴란드 전쟁(1654-1667) 이후 평화조약에서 폴란드는 정교도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억압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반대로 러시아는 가톨릭 교도들에게 같은 것을 보장한다는 조건이 들어가 있다.[60] 미코와이 토로소비치는 이전부터 다른 아르메니아인들과 갈등이 있었는데, 때문에 이 이후로는 반대파들에게서 자기 명성과 권력을 지키려고 라틴 교황과 손잡은 배신자로 취급받았다.[61] 그는 키예프 루스가 동슬라브인의 국가가 아니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모스크바인의 정체성도 현대 러시아인과 큰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남들과 구분되는 차이가 있고 각자 방향대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중근세에 엘리트층을 제외하면 민족의식 논하는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62] 이 때문에 브와디스와프 3세의 별명은 바르넨치크(Warnenczyk)이다. '바르나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63] 계속 농촌에 남아 농업에 종사하던지, 도시로 떠나 임노동자로 먹고 살든지 자유롭게 택할 수 있도록 했다.[64] 위에서 말한 콘페데라치아.[65] 위에서 보았다시피 헌법 이전에는 입법부가 사법부와 행정부를 거의 쥐고 흔드는 상황이었다.[66] 영어로는 캐시미어 풀라스키[67] 사실 카타프락토이를 모델로 한 드루지나 기병대, 예니체리를 모델로 한 스트렐치, 스웨덴군을 모델로 한 포병 부대 및 제조시설, 외국 연대(Полки иноземного строя) 등 중세 러시아인들은 의식적으로 외국을 모방한 실험적 부대와 기술들을 많이 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모델로 한 서구화 개혁은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아예 차르가 귀족에게 패배해 전제정이 붕괴된 시기가 아니라면) 전제군주정을 지향하는 러시아에선 폴란드 귀족 기병대처럼 귀족들에게 많은 권한을 내어주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즉 전제주의적인 러시아는 보병이 발달했고, 귀족주의적인 폴란드는 기병이 발달함으로서 양 국가간의 군사 발전의 대비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68] 오스만 제국의 아큰즈와 유사한 경우이다.[69] 보헤미아 왕국 포함[70] 대표적인 사례로 혼란 시대 당시 러시아 각지를 약탈하며 악명을 떨쳤던 리소프치치들이 모스크바에서 격퇴된 이후에는 다시 서쪽 독일과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에 개입하여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약탈로 묵시록의 기사들이라는 악명을 얻었던 사례를 들 수 있다.[71]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유대인은 대개 폴란드어를 할 줄 모르고 이디시어밖에 할 줄 몰랐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의 사촌 쉬베크가 이 케이스.[72] 폴란드의 도로 사정은 폴란드인들도 자조할 정도로 후진적이었으므로 하천을 통한 물류 운송이 교역의 큰 역할을 했다. 통념과 달리 대홍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곡물수출이 격감한 이유는 흑토지대 상실이 아니라 농업과 교역의 인프라가 송두리째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종사자들(귀족, 상인, 도시민, 농민)이 떼죽음을 당해 인프라를 복구하거나 관리할 인력도 격감했기 때문이다.[73] 중세 러시아는 좀 애매한게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심지어 반공주의적 학자들에게도 아예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sche Produktionsweise)을 가진 동방적 전제주의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이 관점에 따르면 러시아는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라기보단 중국, 오스만, 서로마, 동로마 같은 아시아 국가에 더 가깝다 (여기서의 아시아는 지역 구분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농노제가 귀족정인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국가를 지배하는 귀족이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농노를 예속시키는 것이라면, 전제정인 러시아에서는 국가에 통제당하는 귀족이 봉직의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농노에 대한 일정 권리를 허용받는 것이다. 때문에 반공주의적 학자들로부터 지나친 국가통제가 사적 이익 추구를 가로막아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주장을 받기도 했다. 즉 반공주의자들의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며 실제로 전제정을 공산주의의 모체라고 보았다. 물론 전근대라서 정치제도나 원칙이 존재하더라도 실제 얼마나 이행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고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은 지양되는 추세이지만 결국 원칙적, 명목상으로는 농노제의 개념이 정반대였고 대중적 인식에서 흔히 보이는 러시아의 폴란드식 농노제는 전제정의 붕괴와 서구화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에 가깝다. 때문에 이 '농노제'의 주체를 차르(국가)로 보느냐 아니면 귀족(유산계급)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설명이 달라지며 바로 그 제정 러시아의 정치 엘리트들도 이 두 가지 농노제를 구분했다.[74] 이들은 러시아가 농민공동체를 통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 카를 마르크스조차도 말년에는 러시아 농민공동체에 주목했다.[75] 이는 조선 말기의 실학자들이 오히려 현실과 뒤떨어진 지극히 몽상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 노비제에 대한 과장한 많은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 역사학자들의 노비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와 같다.[76] 다만 이는 단순히 정복국가의 피정복국가에 대한 프로파간다 작업은 아니었다. 당시 3국의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정치체제를 칭송하면서 이를 자국에 이식하려고 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군주를 비롯한 반귀족 세력의 폄하가 시작됨으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귀족의 천국, 농노의 지옥' 같은 이미지가 당대에 고착되어 버린 것이다.[77]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농민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분석과 봉건제와 농노제의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폴바르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다. 해당 작품에서는 필요한 요소만 강조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영지 — 왕실이나 교회 소유 — 의 비교 자료 없이는 폴바르크를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영지들에 대한 연구 상태는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충분하다. Andrzej Wyczański, Studia nad folwarkiem szlacheckim w Polsce w latach 1500-1580. (Warszawa: Państwowe Wydawnictwo Naukowe, 1960, 5[78] 단 일부 논문을 제외하면 폴란드어 독해 능력이 필요하다. 비찬스키를 제외하더라도 수정주의적 관점이 영어나 제3국어로 아직 번역된게 별로 없다. 그나마 영미권 학자가 폴란드어 서적을 인용하거나, 수정주의적 관점을 소개하는 내용들이 대다수이다.[79] 출생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령이었다.[80] 다만 훗날 스테판 바토리가 이를 재보장한 걸로 봐서는 잘 지켜지지 않거나 중앙과 별개로 종교 갈등이 존재했던 걸로 보인다. 1590년대에 지그문드 3세 바사가 가톨릭화 정책을 시도한다.[81] 아예 스웨덴군 침략 이전에 대한 대중적 기억과 기록이 끊어졌다고 지적된다.[82] 로마 공화정 시대 당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83] 블리페르니츠 본인은 코사크 봉기를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그래도 코사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에 다시 편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84] 약간 과장이 가미된 중세 기록에 따르면 전 세계 유대인의 80%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살았다. 아슈케나짐 항목 참조.[85] 통념과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적 차원에서 종교에 대하여 내린 지침은 귀족의 종교의 자유 뿐이고, 적어도 법적으로 16세기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리투아니아 쪽에선 절반에 가까웠던 정교회 신자들에게 대한 공식적인 차별은 없었다. 물론 가톨릭 반종교개혁과 예수회의 진출에 따라 비공식적 차원에서 불이익을 받기 시작했지만 오스트록스키 가문처럼 끝까지 개종도 안하고 영향력과 위세는 그대로 유지한 정교회 대귀족들도 충분히 있었다.[86] 독일계 이주민들이 도시 곳곳에 정착해서 상공업에 종사했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루블린 처럼 폴란드 자체적으로 도시민들 중심으로 개혁교회를 받아 들인 지방들도 있었고, 폴란드 형제단이라 부르는 이웃나라 보헤미아에서 유입된 후스파의 현지인 신도들도 있었다. 그단스크가 있는 왕령 서프로이센, 발트 연안 봉신국 쿠를란트 같이 루터교 독일인들이 주류였던 지방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87] 립카 타타르라고 해서 그룬발트 전투 당시 참전했던 타타르인 전사들이 귀화하여 대대손손 군인으로 활약했다. 한때는 빌뉴스와 트라카이, 나바흐루닥과 민스크를 중심으로 무슬림 타타르인 구역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였다.[88]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는 한동안 주민 대다수가 폴란드인과 완전히 폴란드에 동화된 리투아니아인들 그리고 아슈케나짐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89] 리투아니아의 립카 타타르는 사르만티즘의 수혜자들로 인종과 종교가 다름에도 같은 핏줄이라며 우대를 받았다. 주류계층이 아닌 우크라이나 코사크들 역시 이런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선조가 하자르 칸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요상한 신화를 창조해내기도 했다.[90] 1830년 11월 혁명과 1861년 1월 혁명이 실패한 원인 중 하나가 독립전쟁을 주도했던 귀족 출신 혁명가들이 코시치우슈코를 제외하면 대부분 토지개혁과 농노 해방에 소극적이라서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원인은 러시아를 포함한 분할 삼국의 무력 진압이었다.[91] 당시 폴란드인의 이러한 자기반성은 볼레스와프 프루스가 쓴 인형이란 소설에서 잘 확인해볼 수 있다. 굳이 폴란드에 관심이 없더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주제는 일단 폴란드의 미래와 애국주의에 관한 것이다.[92] 즉 한 가정에서 1명이(대개 그 가정의 가장) 영주의 영지에서 부역하고 다른 가정 구성원이 일주일에 1일 부역하는 것이다.[93] 예를 들어 1768년에는 영주가 농노를 사형에 처할 권리를 폐지시켰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신적 구속을 벗어나 소작제로 전환하거나 심지어 토지를 분배하는 경우도 있었다.[94] 참고로 19세기 미국과 브라질에서도 노예들에게 이와 비슷한 사이비 교리를 주입시켰다.[95] 영주가 농노들에게 술을 배타적으로 판매할 권리 및 농노의 술 구매를 강제한 조치를 폴란드어로 프로피나치아(Propinacja)라고 한다. 이러한 조치는 반유대주의 강화라는 또다른 악영향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당시 양조장과 선술집을 유대인들이 운영했기 때문이다. 프로피나치아는 폴란드 분할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다가 프로이센령에서 1845년, 오스트리아령에서 1889년, 러시아령에서 1898년 폐지되었다.[96] 굳이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이 아니더라도 전근대 농민은 하나의 계층이나 신분으로 범주화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집단이라 추정 수치를 산출하기 이전에 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가 항존한다.[97] 3차 리투아니아 헌장은 훗날 러시아 제국 농노제의 법제적 기반으로 여겨지는 1649년의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의 기반이 된다. 이는 훗날 러시아에 정복된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권역과 코사크 헤트만령에서도 상당수 유지되었으며 이후 니콜라이 1세에 의해 완전히 청산된다.[98] 사실 왕령 프로이센이 이례적인 경우고 도시의 전반적인 쇠퇴는 전 유럽적인 현상이었다. 단지 폴란드처럼 왕권이 약한 국가에서는 귀족들이 도시에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원인이었던 반면, 타 국가들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자치가 철폐된 것이 원인이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99] 바토리가 현지 스타로스타나 유력자들에게 독자적으로 코사크들과 교섭하지 말라는 칙령을 내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공식적으로 각 지방 단위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다.[100] 사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쪽 계열 귀족들 대부분은 당시 발트 다신교를 믿고 있던 게미니드조 리투아니아와의 투쟁 끝에 패배하여 복속 당한 것이라 이상한 일은 아니다.[101] 애시당초 후대 학자들의 이런 서술들이 당대 해당 귀족들을 근거로 하니까 당연하다.[102] 15세기 말의 러시아-리투아니아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서술에서 이 사건들에서 크냐지들의 역할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들의 모스크바에 대한 갈망을 서술했고, 반대로 외국 학자들은 크냐지들을 모스크바 침략의 희생자로 간주했다. 그러나 평가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접근 방식은 동일했는데 이 크냐지들을 동일하고 구분되지 않는 군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듯이 다양한 크냐지 가문들의 상태는 전혀 같지 않았다. Кром. М. М., Меж Русью и Литвой: Западнорусские земли в системе русско-литовских отношений конца XV — первой трети XVI в. (Москва: Квадрига, 2010), 83.[103] 자신들이 언어, 역사, 종교적으로 폴란드인들과 구분되는 프로이센인이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튜튼 기사단 시절에 분리되어 프로이센 공국과의 동질의식은 약했던 반면 폴란드의 귀족 자유 의식을 공유했다.[104] 왕에게 임명되어 관할지를 다스리는 직책인데, 이게 귀족들에게 내려지는 종신직이었고 사실상 세습되는 경우도 많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왕령이 왕령이 아니었다.[105] Z praw publicznych - zabierania głosu na sejmikach i reprezentacji sejmowej oraz podległości sądownictwu szlacheckiemu nie korzystała szlachta zależna (poddana, lenna), użytkująca ziemię należącą do wielkich właścicieli ziemskich w zamian za obowiązek służby wojskowej i daniny. Podlegała ona w zakresie cywilno-karnym sądownictwu starościńskiemu w dobrach królewskich lub sądowi dominialnemu (zamkowemu) panów gruntowych i nie miała prawa apelacji do króla ani do trybunałów. Urszula Augustyniak., Historia Polski 1572-1795 (Warszawa: Wydawnictwo Naukowe PWN, 2008), 257.[106] 비슷한 시기 대부분의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귀족 비율은 1~3%로 추정된다. 이례적으로 1568년 카스티야의 귀족 인구가 10.5%로 많긴 하다.[107] 법적으로 루블린 연합 헌장에 명시된 일부 크냐지 칭호만이 명예로운 전통으로써 인정되었다. 그 외에 신성로마제국, 교황청 등의 외국 군주들이 수여한 작위가 있었고 이를 내세우는게 금지되었긴 했는데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108] 단, 민주적이어서가 아니라 귀족들의 권력이 막강했던 것이다. 왕권이 귀족들을 휘어잡지 못한 것이다.[109] 본명은 알렉산드르 보론초프(Александр Воронцов)로 러시아 제국 재상(Канцлер)이자 외무장관을 지냈다. 후임 외무장관이 아담 차르토리스키이다.[110] 이를 폴로니즘(Полонизм)이라고 한다.[111] 대게 옛 리투아니아의 정교회 루스 계열 귀족들이었다[112] 노브고로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계 크냐지를 추대하는 대가로 흘롭(Хлоп)과 스메르드(Смерд)에 대한 사적 지배를 인정받기로 했다.[113] 러시아판 프로니아 제도 혹은 전시과, 과전법, 관료전이라고 보면 된다.[114] 아이러니하게도 그 바실리 슈이스키가 차르가 되기 전까지는 친폴란드 귀족 파벌의 수장이었다. 당시 차르였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보야린들한테 폴란드와 내통하지 말라고 직접 비난할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 귀족들은 폴란드 왕자를 차르로 추대하면서 정교회로 개종하라는 것 외에도 젬스키 소보르, 보야린 두마가 법률 제정 및 세금 설정권 등의 조건을 내세웠다.[115] 반란 자체는 어찌어찌 무마했지만 1649년 법전(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에 차르 권력의 제한, 귀족의 농노에 대한 지배권를 명시해야 했으며 이는 리투아니아 헌장(1588년판)을 참고했다.[116] 표트르 1세 사후 니콜라이 1세 이전까지 거의 모든 러시아 차르들은 귀족 쿠데타에 의해 등극하고 폐위되기를 반복했다. 인용한 차르토리스키가 이 당시 사람이다.[117] 발트 독일인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에서 요직을 차지했으며 불순종적이고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러시아 귀족들을 견제하는 전제정의 충실한 '사냥개' 역할을 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예 사회주의자인 알렉산드르 게르첸부터가 이걸 비판할 정도였다.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범슬라브주의, 슬라브주의적 성향이 있었다.)[118] 사실 그 표트르 스톨리핀이 러시아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해 서부 폴란드 지주계층의 이익을 침해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실각하게 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폴란드인들은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동슬라브인 계통을 제외하면 러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집단이었다. 다만 이러한 폴란드 지주계층에 가장 동조한 세력이 러시아 귀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민족적이라기 보다는 계급적 이유가 더 크긴 했다.[119] 예카테리나 2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거의 모든 황제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혁명에 대해 경고했다. 또한 전제정의 진정한 적이자 혁명의 주체는 귀족-지식인(인텔리겐치아)들이라고 여겼으며, 이들의 '혁명'으로 인해 전제정이 무너진다면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는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중적 이미지는 러시아 혁명이 빈곤에 시달리는 산업혁명기의 노동자들의 봉기로 알려지고 있지만 노동자 계급이라고 해도 고급기술직이나 중간관리직은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들이며 대게 1861년의 농노제 폐지로 몰락한 옛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단순 임금인상, 근무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체제 변혁, 타파를 목표로 하는 혁명으로 바꾸는건 이 귀족들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자유주의자이자 류리코비치 왕조의 방계 대귀족 가문 출신인 게오르기 리보프가 국가 수장이 되었지만 혁명을 통제하지 못하고 쓸려나갔으니 러시아 차르들의 혁명에 대한 예측은 적중한 셈이다.[120] 이는 러시아 차리즘 사상의 아버지, 1세대 차르주의자로 여겨지는 니콜라이 카람진이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농민이 토지가 없으면 농노제가 폐지되어 자유인이 되어도 지주귀족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으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 (실제로 프로이센 농노제 폐지가 큰 변혁을 가져오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때문에 차르주의자은 일단 농노제를 유지하되 정부가 귀족-농노 관계를 규제하면서, 점진적으로 귀족 토지를 농민의 사유재산으로 이전하는 장기적인 작업을 완료한 후 해방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유사시 귀족계급에게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제정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같은 맥락에서 훗날 니콜라이 2세도 1861년에 시작된 러시아 농노제 폐지는 아직도 완료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121] 사실 그 프랑스와 영국조차도 원래 상황은 다를 바 없었다. 영국 대헌장은 결국 영주들이 왕을 협박해 받아낸 봉건계약에 가까웠고, 같은 이유로 그 프랑스 혁명의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도 '왕의 거부권'을 폐지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자유주의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로 기능하게 되는데는 수 세기가 필요했다.[122] 반대로 따지자면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봉건적 잔재들과 그것이 복원될 가능성이 완전히 박살남으로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주의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차르토리스키도 11월 봉기가 실패하고 모든 것을 잃은 채 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나 봉건적 사상을 버리고 완전한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123] 이는 어느 정도는 세계 공통이다.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반란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식민지배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은 아니었지만 훗날의 민족주의적 사관에서 그런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넘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물론 당시에 이미 확고한 민족의식이 있었던 폴란드인과 그렇지 않은 우크라이나인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같은 사상을 향유할 수 있는건 귀족밖에 없으니 어느 정도는 귀족적, 봉건적일 수 밖에 없다.[124] 당시 기록을 보면 파벨 1세의 죽음이 아들들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틴 대공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일선에서 싸운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그들이 우리 아버지를 목졸라 죽였던 것처럼 나도 목졸라 죽일 겁니다"라고 편지를 남기면서 제위를 계승하길 거부했다. 폴란드 봉기 직후 폴란드 총독이었던 콘스탄틴 대공이 러시아군 투입을 반대하면서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으면서도 그 외의 뭔가 제대로 된 시도를 하지 못한 원인이 암살 시도와 귀족 쿠데타에 대한 PTSD 였다는 추측도 있다(...)[125] 니콜라이 1세가 1827년 10월에 형인 콘스탄틴에게 보내는 편지에 정치적인 사안들, 특히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영역을 폴란드 차르국 관할로 이전하는 것은 러시아에 가장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확신하기에 허용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좋은 러시아인인만큼 좋은 폴란드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적었다. 또한 정교회 황제가 가톨릭 성직자의 대관을 받으면 안된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1829년 5월에 황태자 알렉산드르와 폴란드 제복을 입고 대관식을 위해 바르샤바로 왔고 폴란드어로 대화했다. 그리고 황태자를 폴란드 장교들에게 소개하면서 "나는 그가 좋은 폴란드인임을 보장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를 그렇게 인정할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들이 가까운 가족들과의 사적인 대화와 편지에서도 여러 번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폴란드인 입장에서 위선적인 가식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는 있어도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2세가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거나 최소한 그럴려고 노력했고 단순한 정치적 퍼포먼스는 아닌 진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러시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정복'한 것이 아닌 단지 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형성한 것이고 과거에 있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외국인 왕들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이미지를 형성하려고 했고 이는 상당히 잘 먹혔다. 봉기 지도자인 요하임 렐레벨이 "전쟁이 시작되어 입헌적 왕이 전제적 황제와 싸우게 두십시오"라고 황제의 두 가지 면모를 구분하려고 했던건 이유가 있었다. 다만 이후 니콜라이 1세는 프랑스 대사와의 대화에서 "폴란드인들과 나 사이에는 완전한 불신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고 발언한 걸로 봐서 결국 폴란드 봉기를 기점으로 이러한 감정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126] 사실 훨씬 이전에 자무엘 폰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는 유력자들의 '자유'에 맞서기 위한 군주제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부터가 비슷한 논리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정치제제와 이념을 비판했다. 이후 프로이센-독일의 지도자들 중에 정치적, 이념적 이유로 폴란드를 안 좋게 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다.[127] 사실 이건 러시아 이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편입된 리투아니아나 우크라이나의 루스계 귀족들에 대한 견해에서부터 먼저 나타난다. 당장 해당 문서에도 존재한다.[128] 역으로 독일인들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순종적인 인물들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129] 동로마 제국이 교회를 이용해서 우월주의를 내세우고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다,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교도(오스만)에 정복당한 그리스인들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리였다.[130] 물론 직접적으로 다스리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에는 쿠를란트-젬갈렌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속국의 식민지 정도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