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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3년 5월 7일 |
사망 | 1813년 10월 19일 (향년 50세)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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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샤바 공국의 군인이자 초대 전쟁장관.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군주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의 조카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26인 원수 중 한 명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소속된 폴란드 군대를 이끌었던 장군으로 유명하다.
부하들에게 폴란드의 바야르(Le Bayard polonais)[2]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하며 폴란드의 공작[3]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4]이기도 했다.
2. 일생
2.1. 출생에서 오스트리아군 복무시절까지
포니아토프스키는 1763년 5월 7일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는 킨스키 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국왕인 스타니스와프 2세의 동생 안제이 포니아토프스키(Andrzej Poniatowski, 1734 ~ 1773)였고, 어머니는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 가문인 킨스키 가문 출신의 여인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궁정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육군 원수로서 복무하고 있었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유제프와 유제프의 3살 연상 누나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 Antoinette Josephine Poniatowska, 1760 ~ 1834)의 1남 1녀를 두었다.포니아토프스키가 10세가 되던 해, 결핵으로 아버지가 사망했고, 숙부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가 후견인이 되어 둘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빈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머니가 있던 프라하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숙부가 계신 바르샤바에서도 지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군 경력은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1780년에 포니아토프스키는 대위로 임관했고, 1786~1788년에 걸쳐 진급, 1788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일 시에는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그 해에 그는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막료로 종군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눈부신 공적을 세웠다. 그는 샤바츠에서 부상을 입기도 하였지만, 크게 활약하였고, 그곳에서 카를 필리프 추 슈바르첸베르크라는 동료 청년 장교를 구하기도 하였다.[5]
2.2. 폴란드군으로 이적하다
그가 26세 되던 해, 포니아토프스키는 숙부 스타니스와프와 폴란드 세임의 요청으로 폴란드군 장교로 임관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와 인구의 2분의 1을 잃는 엄청난 손해를 입은 상황으로 스타니스와프는 주변의 국가들이 폴란드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폴란드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같은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하던 폴란드인 동료들과 함께 폴란드로 이주했고, 1789년 스타니스와프가 재편한 폴란드군에서 그는 같이 왔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소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우크라이나 방면에 있는 군대의 사단장으로 부임했으며, 이때의 경험으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군에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느꼈다.포니아토프스키는 열성적인 개혁 지지자였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세임에 개혁의 필요성을 건의했으나 세임은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포니아토프스키는 무력을 동원하여 개혁안과 관련된 법안을 확실하게 통과시켰다. 이 의회에서 통과된 헌법은 5월 3일 헌법으로 불리며, 이 헌법은 세계에서 2번째, 유럽에서 첫 번재 성문헌법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1792년 5월 6일에 포니아토프스키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우안 우크라이나 방면의 폴란드군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5월 3일 헌법을 비롯한 각종 개혁을 반대한 귀족들이 타르고비차 연합을 결성,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자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요청받은 유제프는 오스트리아군 출신의 폴란드인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군 저지를 목표로 분투했다. 이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압도적인 우세를 점한 러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부득이하게 후퇴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군에 유리한 상황이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노력한 끝에 지엘렌체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군의 압도적인 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바르샤바까지 러시아 제국군이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군이 반격하기 위해 출정하는 그때, 포니아토프스키의 앞에 특사가 나타났다. 그의 숙부가 러시아와의 조약에 서명했고, 러시아의 하수인인 타르고비차 연합에 가입하며, 폴란드군은 더 이상 러시아군에 대해 적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793년 그로드노에서 열린 마지막 세임에서는 5월 3일 헌법을 비롯한 모든 개혁을 파기하고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에게 또다시 영토와 인구를 뭉텅이로 떼어주는 법안을 승인하였다. 그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반병신 상태가 되었고 폴란드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모두가 절망했고, 몇몇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쿠데타를 일으키자 주장했으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비탄에 잠긴 그는 폴란드군의 마지막 교전인 마르쿠셰프 전투에서 적을 향해 돌격하여 고의적으로 전사 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6] 그 후 그는 실망한 많은 폴란드 장성들과 함께 퇴역하여 폴란드군을 떠났다. 그를 존경했던 부하들은 작별의 표시로 그를 기념하는 메달을 만들어 가졌으며, 몇몇은 빈에 있는 그의 어머니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
폴란드를 떠나 빈으로 돌아온 포니아토프스키는 조국을 파국으로 밀어넣은 원흉인 타르고비차 연합의 지도자 슈쳉스니 포토츠키(Stanisław Szczesny Feliks Potocki)에게 반복해서 결투를 신청했다. 하지만 러시아 황제는 그가 폴란드로부터 사라지길 원했기에, 겁먹은 숙부는 그에게 압력을 가해 여길 떠나라고 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결국 빈을 떠나 서유럽을 떠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도중, 프랑스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의 끔찍한 사건들[7]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2.3. 코시치우슈코 봉기
1792년에 그는 숙부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편지를 썼는데, 내용은 국가적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아직 싸울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폴란드는 국가를 위해 궐기하자고 한다면 그에 응하여 귀족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코시치우슈코[8]와 포니아토프스키[9]
1794년에 스타니스와프 2세는 조카에게 편지를 썼고, 그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였다. 포니아토프스키는 그의 전 부하인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10]의 아래에서 복무하게 되었고, 풍전등화 신세인 조국의 상황에 분노한 코시치우슈코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코시치우슈코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제안받았지만, 언제 변심할지 모르는 숙부로부터 떨어질 수 없었던 그는 거절하고 대신 다른 장교를 추천했다.
그 후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주변에서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며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싸움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며[11]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갈라먹으며 지도 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이후 프로이센 영토가 되어버린 바르샤바에서 사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의 영지는 몰수당했지만, 러시아에서는 그런 그를 자국 군대의 장교로 삼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추파를 무시했고, 러시아 황제와 귀족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그것을 무시하고 1795년 빈으로 이사했다. 그 때 또다시 코시치우슈코는 마지막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개국 앞에서 중과부적이었으며 반란은 곧바로 진압당하고 코시치우슈코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조국의 멸망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가 끝난 것이었다.
2.4. 휴식기 및 다시 군으로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한 후, 새로 즉위한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는 그의 영지를 돌려주고 그를 데려오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포니아토프스키는 그것을 요양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나 1798년에 전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가장 친했던 숙부의 죽음이기에, 그는 숙부의 장례식에 참여했고, 몇 달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폴란드로 돌아온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의 그의 영지에 머물며 1806년까지 쭉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1802년에는 그의 숙부의 작위 계승을 문제로 베를린에 다녀왔으며, 그곳에서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로부터 진심어린 환대를 받았다.
그러던 1806년 10월 1일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면서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프로이센군은 무참히 깨졌다. 10월 9일 슐라이츠 전투,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0월 17일 할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연달아 대승을 거두었고 10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도망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바르샤바의 행정을 떠맡게 되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와 인근 지역의 주둔군을 강화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왕실이 도망간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하였고 그 와중에 폴란드에 진입하였다. 나폴레옹이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자신들에게 나라를 되찾아 줄 수 있는 존재는 나폴레옹밖에 없다고 생각한 프로이센 내의 폴란드인들은 대거 봉기를 일으켰고 프랑스군이 폴란드를 지날 당시에는 프로이센령 폴란드 중 상당수 지역이 봉기군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프랑스군은 폴란드인의 해방자로서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1806년 말에 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대륙에서 가장 큰 반프랑스 세력인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을 견제하는 데에는 폴란드인이 적격이라고 판단한 프랑스군은 곧바로 폴란드인의 회유에 나섰다. 뮈라와 그의 측근은 바르샤바에 남아있던 포니아토프스키에게 프랑스군에 임관하도록 권유하였고 포니아토프스키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군에 임관하였다. 1807년 7월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이 탄생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장관과 바르샤바 주 방위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당시에는 나폴레옹이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지만, 1808년에 루이니콜라 다부의 휘하에서 치러진 여름 전역 당시 선보인 훌륭한 지휘로 인해 1809년에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2.5. 나폴레옹 전쟁과 포니아토프스키
바르샤바 공국이 설립되고 얼마 뒤인 1809년 봄, 포니아토프스키는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젊은 다스부르고에스테(d'Asburgo-Este) 가문[12]의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게 붙은 폴란드를 혼내주려고 완편된 군단 3만 5천[13]에 현지 징집까지 더해서 병력 총 4만 명을 끌고 왔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군 1만 5천 명[14]을 데리고 바르샤바 코 앞의 마을 '라신(Raszyn)'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결전을 벌였다. 폴란드군은 이곳의 자연지형과 마을 건물들을 이용한 우주방어를 펼치며 오스트리아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강요했다. 여기서 포니아토프스키는 주요 길목이 뚫릴 위험에 처하자 말에서 내려 직접 착검한 머스킷을 들고 병사들과 같이 총검돌격을 하는 등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적을 막아내는 대활약을 펼쳤다.전투가 끝난 뒤 포니아토프스키는 페르디난트를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를 내주는 대신 폴란드군을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했고, 풋내기였던 페르디난트 대공과 오스트리아군은 격전으로 인해 피해가 컸던 터라 결국 이에 동의하였다.[15] 폴란드군은 수도를 내주기는 했지만 병력을 보존한 채 나름 명예롭게 후퇴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목표였던 바르샤바를 점령하긴 했지만 주요 전장인 남부 독일도 아니어서 전략적 가치가 전무한 곳이었고 폴란드군의 주력 역시 그대로 있었다. 이들은 하필 또 멀리 가지도 않고 약 올리듯 근처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병력 4만 명을 놀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이전 전투에서 폴란드군한테 하도 쳐맞은 기억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지 않았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마을 하나 점령 못 하는 추태를 보였다.[16] 다른 영토들도 점령 해야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몇천 단위로 쪼개져서 돌아다녔는데, 폴란드군은 이들을 곳곳에서 요격해버리며 계속하여 패배를 안겨주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돔브로프스키가 바르샤바에 적의 주력을 묶어두는 동안, 자신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남부 폴란드로 진격하여 루블린, 르부프 같은 주요도시들을 해방시켜 나갔다. 한편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는 등 전세가 오스트리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결국 바르샤바에서 나와 포니아토프스키를 잡으려고 남진하였으나 폴란드군은 전투를 최대한 피하면서 요리조리 도망다녔고 그 와중에 폴란드의 고도 크라쿠프까지 해방시켰다. 이후 폴란드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알박기를 시전하며 훗날 협상 테이블에서 남부 폴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후 쇤브룬 강화로 전쟁이 끝나면서 결국 남부 폴란드는 바르샤바 공국의 땅이 되었으나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와 바그람 전투의 시원치 않은 결과 때문에 포니아토프스키의 뛰어난 작전 역량을 눈여겨 보지 못했다. 그래도 포니아토프스키는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나폴레옹에게 직접 명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기병도를 하사받았다.[17]
1811년 4월에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공작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대신하여 파리로 갔고, 나폴레옹 2세의 세례식을 참관했다. 그는 거기서 4달간 머물렀고, 황제와 그의 장군들과 함께 러시아 공략의 준비를 했다. 그는 거기서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남부 루트로 갈 것을 건의[18]했지만 나폴레옹은 그것을 기각하고 본래 구상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주 퇴짜놓은 것은 아니었던지,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군단이 그 루트를 통해 당초 계획을 보조하도록 했다.
폴란드군은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끄는 10만의 군대를 파견,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계획이 틀어져서, 제롬은 포니아토프스키의 군대를 대육군의 좌익을 맡도록 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군은 전위대로서 훌륭히 싸웠고, 모스크바로 전진하면서 맞닥뜨린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나갔다. 스몰렌스크에서는 단독으로 그의 군대를 지휘, 도시 내로 돌입했고, 보로디노에서는 우티차 고지에서 해질녘까지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5군단을 지원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모스크바에 가장 먼저 입성한 것도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직후 발생했고, 나폴레옹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서 싸우지 못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귀환해야만 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이때 후위를 맡아 전투에서 포위되었던 루이니콜라 다부를 구해내는 등 활약했으나 뱌지마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그러고서도 그는 며칠 동안 더 지휘를 했으나 결국에는 마차에 실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베레지나 가교 위의 교통 체증 때문에 마차가 가질 못하자 그의 보좌관이 경비병에게 뇌물을 찔러주며 간청하여 길을 열게 했고 간신히 러시아의 포로가 되는 걸 피했다.[19] 그리고 그해 12월 12일, 다시 바르샤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2.6. 라이프치히, 그리고 죽음
그리고 1813년, 부상이 나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빠르게 폴란드군을 재정비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다른 폴란드 지도자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을 때도, 포니아토프스키는 끝까지 나폴레옹에 대해 충성을 바쳤다. 2월 5일에 러시아군이 침공해오자, 포니아토프스키는 군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쿠프로 이동했고, 결국 8군단이 있는 보헤미아로 갔다.보헤미아에서 프랑스군과 합류한 포니아토프스키는 라이프치히를 향해 이동, 뢰바우와 제틀리츠에서 파흘렌 장군이 이끄는 동맹군을 격파하며 이동했다.
그간의 훌륭한 전공으로, 라이프치히 전투 도중 전장에서 프랑스 원수로 진급하였다. 라이프치히 전투의 끝에 이르러[20] 자크 마크도날과 함께 프랑스군의 후위를 지키며 끝까지 싸우던 포니아토프스키는 1,000명 가량의 잔존병력을 이끌고 "제군, 이제 우리에겐 명예롭게 죽는 길밖에 없다."라고 외치며 돌격하였으며 결국 이것이 그의 마지막 돌격이 되었다. 심장 위쪽을 총검에 찔려 치명상을 입은 채 고립된 포니아토프스키는 동맹군 경보병대의 사격에 여러 발 총상까지 입었으나 항복을 거부했다. 피를 많이 흘려 극도로 약해진 포니아토프스키는 결국 엘스터강의 급한 물살에 휘말려 익사하고 말았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냥 도강 중 익사했다는 설과, 위 사진처럼 포위된 상황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말을 몰아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것과, 아예 그가 다리를 건너는 도중 다리가 폭파됐고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는 것.[21] 일단 확실한 것은 사인이 익사라는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도강 중 익사를 정설로 보고 있다. 이쪽은 다른 곳보다 내용이 좀 더 디테일하고 정확하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다리가 폭파된 상황에서 도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고 이미 시체와 잔해들로 가득 찬 강가로 왔다가 정신을 잃고 강물에 빠졌고[22] 그를 보좌하던 히폴리투스 블레샹스 대위(Captain Hippolytus Blechamps)는 포니아토프스키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관을 물 밖으로 데리고 나오려 했지만 결국 같이 익사했다고 한다. 시체는 그가 사망한 지 4일이 지난 후에야 엘스터강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폴란드 병사들은 조국의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불꽃이었던 상관의 관 옆을 지키며 눈물을 흘렸다. 나폴레옹은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명예로웠고, 용맹했으며, 고귀한 자였다."라고 말했다.
훗날 그의 유해는 1817년에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으로 이송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배출한 명장 얀 3세 소비에스키와 옛 부하이자 동료였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옆에 묻혔다.
3. 평가
성격이 조금 성급하긴 했지만 열성적이었고, 쾌활하며 누구에게나 부드러웠다고 한다.군사적 능력 또한 당대 장군들 중에서도 평균 이상이었으며 폴란드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부동의 1위였다. 그의 인생 그래프를 보면 중간 중간 휴식기가 있긴 했지만 중반부터는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서 쉬지도 않고 활동했고 전투에서 싸울 때는 또 야수와 같이 맹렬히 싸웠다. 이 때문에 그의 용맹은 조아킴 뮈라에 비견되는 평가를 받을 만큼 대단했다. 왕족급의 신분이었지만 말에서 내려 평민 출신의 사병들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우는 걸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하였던 자의 밑에 고개 숙여 들어가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인품도 훌륭하여 장교와 사병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사생활 면에서도 깔 게 없는 것이, 그의 행동에는 개인적인 사리사욕도 없이, 진심으로 조국의 안위를 생각하며 순수하게 애국심 하나만으로 싸웠다. 사실 왕족이나 다름 없는 귀족 가문이라 개인 자택과 농장 등, 평생 놀고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금수저였다. 게다가 그의 능력을 보고 여러 나라에서도 그를 포섭하려 했으니 그냥 아무 데나 가도 좋은 대접을 받았을 테고, 이도저도 다 싫으면 그냥 재산 들고 제3국으로 망명해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많은 이들이 조국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사건과 흑역사를 낳으며 독재자가 되거나 신념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했던 반면, 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그리고 나폴레옹 밑에서 싸워온 행적들이 말해주듯, 한 번 믿음을 준 사람은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일지라도. 그나마 한 가지 오점이라면,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 사실 한 명 있긴 한데, 정식으로 결혼한 게 아니라 연인 관계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한다.
폴란드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구국영웅이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전사했을 때, 그의 죽음은 당대의 모든 폴란드인들에게 거의 재앙에 가까운 충격이었다고 할 정도다. 한 때 그의 부하이자 상관이기도 했던 코시치우슈코와 더불어 그 시절 암울했던 조국의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모든 걸 바쳐가며 싸웠던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적국이었던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에서도 비록 적이었지만 용맹한 장군으로 평가했다. 특히 러시아는 그의 인성과 능력을 보고선 수없이 자기네 나라로 오라고 회유했지만 포니아토프스키는 오로지 폴란드만 바라보며 살았던지라 소용이 없었다.
오늘날의 폴란드 바르샤바의 대통령궁인 라지비우 궁전 앞에는 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업적을 기려 동상을 세우고 싶다는 폴란드 귀족들의 청원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받아들여 1829년 덴마크의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이 실물 크기의 청동 기마상을 제작해 바르샤바의 대통령궁(당시에는 폴란드 총독 관저) 앞에 세운 것이다. 1830년 폴란드인이 11월 봉기를 일으키자 격노한 니콜라이 1세가 당장 동상을 치워버릴 것을 명령해 1834년 바르샤바 근처 모들린 요새 창고에 처박혔고 1836년 여러 조각으로 해체되었다가 1840년 바르샤바를 방문한 니콜라이 1세의 현지지도에 맞춰 동상을 재조립했다. 재조립된 동상을 본 니콜라이는 아예 동상을 고철로 스크랩할 것을 지시했으나 마음을 바꿔 11월 봉기를 진압한 당시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 이반 파스케비치예리반스키(Ива́н Фёдорович Паске́вич-Эриванский)에게 하사했다. 파스케비치는 동상을 자신의 저택에 전리품으로 전시했고 원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파스케비치의 동상이 세워졌다.
파스케비치의 동상은 1918년 폴란드가 독립에 성공한 후 바르샤바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졌고 1922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끝낸 리가 조약으로 폴란드가 소련으로부터 포니아토프스키의 동상을 다시 돌려받아 사스키 광장에 전시하였다. 그러나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 독일군 진압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의 명령으로 동상이 폭파되면서 원본은 사라졌고 토르발센의 조국인 덴마크 정부가 새로 동상을 만들어 1951년 바르샤바 시에 기증했다. 처음에는 와지엔키 공원에 전시되어 있다가 1965년 원래 동상이 있던 자리인 대통령궁 앞으로 이전하면서 동상은 131년 만에 원위치로 오게 되었다.
4. 여담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의 휘하 장군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라 동맹국의 왕으로 대우해줬다.[23] 이에 크게 감동받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했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도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참가하여 나폴레옹을 위해 정말 열심히 싸웠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아직 청년이던 시절에 엘베강에서 중무장을 하고 훈련할 때 지나가던 한 집시 여인이 그의 점을 치고 '나리, 엘베는 정복하실 겁니다. 하지만 까치가 나리를 정복할 겁니다.'라고 예언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익사한 강이 바로 엘스터(독일어로 '까치')강임을 생각하면 은근히 소름끼치는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폴란드 망명 정부 소속 자유 폴란드군에서 포니아토프스키의 이름을 딴 폴란드 공군 폭격기 편대가 존재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유명한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 중 하나인 "하늘 끝까지(天の涯まで)"는 포니아토프스키의 일생을 다루었다.
5. 둘러보기
[1] 요제프라고도 읽을 수 있겠으나, 폴란드어의 발음 상 'ó'는 'u' 발음이 된다. 따라서 유제프가 맞다.[2] 기사도의 상징으로 여겨진 피에르 테라유 드 바야르에서 따온 별명.[3] Prince polonais. 폴란드어는 Duke와 Prince 모두 크냐지(Książę)로 번역하나 서유럽에서는 슬라브계 국가의 공작을 Prince로 번역한다. 여담으로 폴란드의 크냐지(Książę)와 러시아의 공작(크냐즈/князь)은 어원이 같다. 간혹 유제프 공의 삼촌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의 조카였던 것과 연계해 여기서의 Prince가 왕족을 의미하는 Prince(독일어: Prinz)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왕족을 의미하는 Prince(독일어: Prinz)가 존재하지 않았다.[4] 독일어로는 라이히퓌르스트(Reichsfürst)라고 한다. 독일계 국가의 퓌르스트(Fürst)는 공작에 해당되는 Herzog와 백작에 해당되는 Graf 사이의 작위이나 마냥 후작으로 부를 수는 없는게 흔히 후작으로 번역하는 서유럽의 Marquess(또는 Marquis)의 어원이 퓌르스트(Fürst)와 Graf 사이에 위치한 변경백(Markgraf)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매한 서열 탓에 퓌르스트(Fürst)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공작으로 번역하기도, 후작이나 제후로 번역하기도 한다.[5]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를 계속 섬겼고,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 때 오스트리아군의 총지휘를 담당하였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전사한 라이프치히 전투 당시의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이 바로 슈바르첸베르크였다.[6] 왜냐하면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이 본의 아니게 승리해버렸다.[7] 당시 프랑스는 로베스피에르가 국왕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등 프랑스 혁명이 점차 본질을 잃어가며 과격해지고 있던 공포정치 기간이었다.[8] 백마에 올라 나폴레옹 모자를 쓴 사람[9] 모자를 벗으며 인사하는 사람[10] 미국 독립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준장까지 진급한 전적이 있고 대러 전쟁 당시 두비엔카에서 5배의 러시아 군을 유린하다시피 한 굇수다.[11] 여기에 관해서는 포니아토프스키와 다른 반란군 장성들과의 손발이 어긋났기에 실패했다고 하기도 한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휴고 코웡타이 등이 이끄는 급진적인 장성들이 주축을 이룬 반란군 내에서 소외감을 느꼈다고 한다.[1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분가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남 페르디난트 카를과 이탈리아 반도의 모데나 공국을 다스리던 에스테 가문의 상속녀 마리아 베아트리체가 결혼하면서 창설되었다. 여담으로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 대공은 가문의 창설자인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의 3남 (실질적으로는 차남)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였다.[13] 오스트리아군 중에서 가장 훈련도와 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심지어 창기병으로 유명한 폴란드군에 대한 카운터로 기병들까지 흉갑기병으로 구성했다.[14] 원래 총 병력은 3만 5천 명이었으나 2만 명가량이 스페인으로 파병을 나가 있었다. 본국에 잔류한 부대는 2선급에다가 군복과 머스킷 소총 같은 기본적인 장비조차 부족했다.[15] 포니아토프스키의 판단은 매우 현명했다. 바르샤바는 요새가 아니어서 방어에 적합하지 않았고, 폴란드군 또한 숫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싸워봤자 병력만 낭비할 뿐이었다.[16] 바르샤바 옆에는 비스와강이 있었는데 이 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이유는 제대로 된 다리가 없어서. 페르디난트가 데리고 온 병력들이 오스트리아군에서 A급이긴 했는데 하필 공병부대를 안 데리고 왔다.[17] 사실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폴란드군이 담당한 이쪽 전역은 한 줄만 언급될 정도로 비중이 적다. 애초에 주 전선은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였다. 가장 큰 의의는 4만명의 적 병력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외곽에 잡아둠으로써 적의 주전선 증원을 막았다는 것에 있다.[18] 이게 성립이 되었다면 러시아를 제대로 위협할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러시아 공격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잘만 했다면 러시아는 위기에 몰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읽은 미하일 쿠투조프에 의해 러시아는 급히 오스만 제국과 화의를 맺어 몰다비아 공국의 드네스트르강 동쪽 영토인 베사라비아까지 빼앗고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협공을 사전에 차단했다.[19] 가교 위에서도 병사들이 너무 많아 길이 막히자 최후의 수단으로 황제의 이름을 외쳐대며 길을 열도록 하였다.[20] 나폴레옹이 후퇴를 준비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물러서면 안된다며 항변했다. 나폴레옹은 "나에겐 병력이 얼마 없다."고 했지만 포니아토프스키는 "저와 병사들이 폐하를 지킬 것입니다. 우린 모두 폐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끌어안았다고 한다.[21] 다리 폭파설은 한국판 위키피디아에 있는 내용이지만 다른 곳에선 찾을 수 없는 내용이며, 투신설은 그의 죽음을 드라마틱하게 꾸미기 위한 페이크일 가능성이 높다.[22] 이때 한 발 이상 총탄에 더 피격되었다는 설도 있다.[23] 아직 폴란드 전체를 탈환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를 무작정 폴란드의 왕이라고 공식화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폴란드를 러시아로부터 빼앗기 위해 우선 바르샤바 공작위를 먼저 주고 이미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된 사례가 있던 작센 국왕을 공작으로 폴란드인의 지지를 얻기 위한 교두보로 삼으려고 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자신에게 바치는 만큼 포니아토프스키에게도 동일한 충성과 예우를 갖추도록 명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