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5:37:23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3.2. 프로이센군
4. 전투 경과
4.1. 전초전4.2. 예나 전투4.3. 아우어슈테트 전투
5. 결과

1. 개요

독일어: 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
프랑스어: bataille d'Iéna
영어: Battle of Jena–Auerstedt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6년 10월 14일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압승을 거뒀고 프로이센군은 참패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뒤이은 추격전에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2. 배경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프랑스 제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틀 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와 접견해 휴전에 합의하고 12월 27일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해 오스트리아가 대프랑스 동맹을 탈퇴하고 전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의 전장을 정리한 후 남부 독일의 주둔지에 자리잡았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6년 6월에 자신에게 복종한 독일 제후국들을 모아 라인 동맹을 결성하고 자신은 라인 동맹의 보호자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의 이같은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들은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전에도 대프랑스 동맹국 편에 서서 나폴레옹과 싸울지를 고려했고 프로이센 외상 크리스티안 폰 하우크비츠 백작은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전 나폴레옹을 찾아가 최후통첩을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싸울 마음이 없어서 최후통첩이 전달되기 전에 크리스티안을 돌려보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인 12월 15일 크리스티안과 다시 만나 자신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프로이센 왕실의 메시지를 전한 외상에게 신랄한 어조로 대답했다.[1]
"아무리 봐도 미리 써놨다가 주소만 바꾼 축하 메시지로군."

이후 프랑스 대군이 남부 독일에 대군을 배치시키고 라인 동맹을 결성하자,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이 라인 강 동쪽에 영구적으로 주둔하게 된 것에 위협을 느꼈다. 이에 프로이센은 작센을 비롯한 몇몇 북부 독일 소공국들을 모아 '북부 독일 연방'을 결성해 라인 동맹에 대항하려 했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해 용인해주겠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 정도면 됐다고 여기고 프랑스와 더이상 갈등을 벌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1806년 7월 28일, 파리 주재 프로이센 대사 루케시니가 본국에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평화를 위해 하노버를 다시 영국에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고 보고했다. 이보다 앞서,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전에 프로이센을 묶어놓기 위해 하노버를 프로이센에게 넘겨줬다.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받고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하노버를 왕실 소유지로 두고 있던 영국과 단교하게 되었고, 외해에 나가 있던 프로이센 선박 700척이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노버를 영국에게 돌려주겠다니, 프로이센으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파일:Prussian_Guard.jpg
프로이센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계단에 칼을 가는 프로이센 기마헌병연대 대원들.[2]

이에 프로이센 정계는 프랑스에 대한 적의로 들끓었고 기마헌병연대 대원들은 프랑스 대사관의 계단에 칼을 갈며 도발했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왕비는 부군에게 러시아 제국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우자고 설득했고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를 비롯한 다수의 장군들은 프로이센군은 유럽 최강이니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나폴레옹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주전파 신료들의 간곡한 설득에도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1806년 8월 8일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편지를 보내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해도 되는지를 물었고, 차르는 지원을 약속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마침내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심했다. 1806년 8월,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작센 공국, 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게 저항자세를 보였다. 8월 말,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라인 동맹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것은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때까지만 해도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하노버를 영국에게 돌려주고 영국과 화친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대신 프로이센에게 다른 지역을 넘겨주는 걸 고려했다. 프로이센이 라인 동맹 주둔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등 불온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는 예비군 동원을 9월 6일까지 늦췄다. 또한 나폴레옹은 9월 10일 총참모장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로이센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9월 18일, 외교관과 밀정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보고를 종합한 나폴레옹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독일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각 군단에게 집결 명령을 내린 후 뷔르츠부르크로 향했다. 한편 프로이센은 11월 초 러시아군이 자신들과 합류할 거라고 예상했고 나폴레옹이 아무리 빨리 와도 그때까지는 오지 못하리라고 판단해 10월 8일을 회신 기한으로 한 최후통첩을 프랑스에 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예상과는 달리 이미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었고, 10월 8일 아침 자신의 선봉 군단을 프로이센 국경에 진출시킴으로써 최후통첩에 대한 답을 전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발발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프로이센군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부터 시작한 군제개편을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어받아 크게 확장시킨 결과, 19만에 가까운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1806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17만 5천명에 달하는 병력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다. 그 중 나폴레옹에 맞설 야전군으로 동원가능한 병력은 12만 5천 명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총사령관을 맡았고 중앙군 5만 명을 거느렸지만 전쟁 경험이 없어서 실제 지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에게 맡겼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당시 71세의 노장으로 1792년에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 혁명군에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내심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반대했고 측근들에게는 "임박한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총사령관직을 수락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빌헬름 3세는 5만 군대를 이끌고 나움부르크에 주둔해 1만 2천여 명의 추가 증원군을 기다렸다.

한편, 호헨로에 공작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는 1만 9천여 명의 병력과 함께 나움부르크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셈니츠에 주둔해 작센군 2만 명의 합류를 기다렸다. 그리고 에른스트 폰 뤼헬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병력은 아이제나흐와 에어푸르트 사이에서 보충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렇듯 프로이센군은 3개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인근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도조차 가지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연락도 부실했다. 여기에 뵐텐베르크 백작 요한 다비트 루트비히가 지휘하는 예비군 1만 5천명이 합세해 프랑스군과 상대할 예정이었다.

4. 전투 경과

4.1. 전초전

1806년 10월 8일, 프랑스군은 바이에른 왕국 북부 국경인 프랑켄발트를 통해 국경을 넘어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먼저 프로이센과 작센을 분단시켜 작센을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베르나도트 원수가 이끄는 제1군단이 중앙에서 진군하고, 다부의 제3군단과 뮈라의 기병군단, 그리고 황실 근위대가 그 뒤를 따르도록 했다. 우익은 술트의 제4군단과 네의 제6군단, 그리고 프랑스와 연합한 바이에른군이 맡게 했고, 좌익은 란의 제5군단, 오주로의 제7군단이 맡게 했다. 나폴레옹은 중앙군에게 크로나크로부터 슐라이츠로의 길을 따라 진군할 것을 지시했고, 우익은 호프를, 좌익에게는 코부르크로부터 잘펠트까지의 길을 따라가도록 지시했다.

한편, 프로이센 수뇌부는 파리로 진격할지, 국경을 사수할지, 적절한 방어선으로 후퇴해 러시아군이 올 때까지 버틸지 등 여러 선택지를 놓고 대립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일단 후퇴하여 러시아군이 올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루이 페르디난트 대공과 호헨로헤 대공 등 주전파는 즉각 프랑스군과 격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보니 전쟁 준비는 지지부진했고 병력 집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참모장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대령은 병력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시당했다.[3]

10월 8일, 호프와 잘부르크에서 프랑스 기병대가 프로이센 기병대를 가볍게 격파했다. 이튿날인 10월 9일, 작센을 향해 진군하던 베르나도트와 뮈라가 이끈 2만여 명의 프랑스군은 보그슬라브 타우엔치엔이 이끄는 9천여 명의 프로이센 및 작센 연합군과 슐라이츠에서 마주쳤다.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은 적을 가볍게 격파했고, 타우엔치엔은 약 5백명의 사상자 및 포로를 낸 채 퇴각했다. 이때 작센군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던 호헨로헤 공작은 슐라이츠 전투 소식을 접하자 즉각 군대를 이끌고 루돌슈타트와 예나 사이에 병력을 집결하려 했다. 그러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이 이동을 제지했다. 이런 혼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루이 페르디난트 대공은 호헨로헤 공작의 지시를 잘못 해석하여 잘펠트를 사수하라는 것으로 알아듣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10월 10일, 란의 제5군단 1만 3천 명은 페르디난트 대공[4]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8천명이 지키고 있던 잘펠트로 쳐들어왔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시 외곽에 나가 잘레 강가에 진을 치고 프랑스군과 야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란은 인근의 언덕을 확보한 뒤 배수진을 친 적을 상대로 포격을 벌여 전열을 흐트러트린 후 언덕 아래로 보병들을 진격시키는 동시에 프로이센군의 측면으로 기병대를 돌격시켰다. 프로이센군은 적의 공세에 밀리다가 결국 붕괴되었고 잘펠트 시로 도망쳤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보병들이 도주할 길을 터주기 위해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프랑스 보병대의 측면으로 돌격했다. 하지만 프랑스 보병들의 방진을 뚫지 못한 그의 기병대는 프랑스 기병대에게 둘러싸여 혼전을 벌였다. 그때 쥔데라는 이름의 프랑스 제10경기병대 부사관이 가로막으며 항복하라고 외쳤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무 대꾸없이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 쥔데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그 직후, 쥔데는 페르디난트와 치열한 결투를 벌이다가 페르디난트 대공의 가슴을 칼로 찔렀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약 400명의 사상자와 천명이 넘는 포로를 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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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펠트 전투에서 프랑스 제10경기병대 부사관 쥔데와 맞붙고 있는 페르디난트 대공.

촉망받는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 대공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프로이센 수뇌부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직감하고 비로소 안전한 방어선까지 철수해 러시아군이 합세할 때까지 버티는 방안을 고려했다. 그러나 호헨로헤 대공과 블뤼허를 비롯한 주전파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하는 건 프로이센군의 명성에 먹칠하는 꼴이 된다며 반대했고, 이로 인해 군사회의는 제대로 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했다. 그러는 사이, 다부의 제3군단이 10월 12일에 나움부르크를 제압하고 시가지 서쪽에 야영지를 구축했다. 또한 베르나도트의 제1군도 같은 날 저녁 나움부르크 남쪽에 도착해 똑같이 야영지를 구축했다.

10월 13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모든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국왕으로부터 철수 승인을 받아낸 뒤 호헨로헤가 지휘하는 군대에게 예나 근교에서 적의 전진을 저지하고 주력의 후퇴를 엄호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뤼벨에게 분견대를 불러들어 호헨로헤와 합세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주력을 나움부르크 방면으로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주력이 잘레 강 서쪽의 에어푸르트 일대에 남아있다고 여기고 그쪽으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이때 그는 캠니츠에서 나움부르크까지 이르는 60km에 이르는 거리를 작전권 내에 두고 각 군단을 넓개 산개시켜서 적이 위치한 장소를 알아내게 했다. 10월 12일, 란의 군단은 예나 인근에서 상당 규모의 프로이센군을 발견하고 진격을 멈췄다. 이와 동시에 뮈라가 자이츠에서, 오주로가 칼라에서 각각 전령을 보내 프로이센군이 서쪽의 에어푸르트 방향으로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적의 주력이 예나에 있다고 판단하고 즉각 예나로 달려갔다. 이때 나폴레옹은 나움부르크에 주둔한 다부의 제3군단에게 예나의 북서쪽에 위치한 아폴다로 내려와 적의 북상을 틀어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에게도 지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이 애매모호했다.
"만약 다부와 함께 나움부르크에 있다면 다부와 함께 아폴다로 가라. 만약 도른부르크에 있다면 뮈라와 합류하여 예나로 내려오라.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있어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 명령서를 접한 베르나도트는 자신이 예나로 달려가는 게 나폴레옹이 바라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아폴다에 있는 다부를 내버려둔 채 예나로 진군했다. 이리하여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막이 올랐다.

4.2. 예나 전투

10월 13일 밤, 나폴레옹은 잘레 강을 건너 예나로 진군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배후의 란트그라펜베르크 구릉지에 놓인 가파른 사면으로 병사들을 올려보냈다. 그는 야포를 사면에 올리기 위해 나무를 베어 길을 닦게 하면서 친히 도로 공사를 감독했다. 적이 보지 못하는 고지의 가파른 반대 경사면에서, 그는 횃불을 들고 직접 험한 산을 기어오르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대포를 실은 포가가 산길 중간에 바퀴가 빠져 오갈 수 없게 된 광경을 보고는 훌륭한 병사들에게 제대로 길을 제시 못하여 이렇게 병사들을 고생하게 만든 장교들을 나무라며 그 대포를 빼내는 작업을 직접 감독했다. 또한, 병사들에게 바로 작년에 있었던 울름 포위전에서 대승리를 상기시키며, "지금 다리를 조금 더 고생시키면 내일 훨씬 더 적은 피를 흘리고도 대승을 거둘 수 있다"며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10월 14일 아침이 밝아왔지만 짙은 안개가 껴서 가시거리는 채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전날 저녁의 정찰로 프로이센군의 진지를 파악했지만 그들의 정확한 배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집결을 서두른 군대의 배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루체로다와 클뢰스비츠 인근의 진지에서 적을 몰아내기로 했다. 7시 30분, 나폴레옹은 란의 제5군단 소속 제17경보병연대에게 루체로다와 클뢰스비츠 진지에 주둔한 적의 사이로 진군해 적을 분단시키라고 명령했다. 제17경보병연대는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며 보이지 않는 코 앞의 적에게 사격을 가했다. 전진 과정에서 진로가 휜 이들은 폰 제츠슈비츠가 이끈 작센 사단의 가공할 사격에 대열의 측면을 노출시켰다. 이에 이들 경보병을 지원하는 경포들이 단거리 산탄을 퍼부어 작센군을 퇴각시켰다.

타우엔치엔 장군으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호헨로헤 공작은 적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당초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주력이 안전하게 후퇴할 때까지 후위를 사수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천천히 후퇴하면서 주력군을 엄호해야 했다. 그러나 호전적인 성향이 강했던 그는 오히려 반격을 가하기로 결심하고 병사들에게 란트그라펜베르크의 구릉지대로 진격해 프랑스군을 밀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전 8시 30분, 안개가 조금 가라앉아 양군의 진영이 보이게 되었다. 란의 군단은 공세를 개시했고, 호헨로헤 대공으로부터 반격 명령을 받은 프로이센군 역시 적극적으로 반격했다. 그러나 호헨로헤 대공은 병사들의 대오를 아무 엄폐물도 없는 벌판에 얇은 횡대로 주욱 늘어놓았다가 엄폐물에 숨은 프랑스군의 조준 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만드는 실책을 범했다.

이런 상황이 2시간이나 지속되자, 호헨로헤 대공은 기병대를 란의 제5군단에 돌격시켜 적을 격퇴하려 했지만, 프랑스군은 포격과 머스켓 사격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했고 뒤이어 프랑스 용기병들이 혼란에 빠진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러는 사이에 오주로와 술트의 군단이 현장에 당도해 수적 우위를 착실하게 쌓아나갔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군대 집결이 완료될 때까지 군대를 출격시키지 않았고, 란의 제5군단은 그동안 프로이센군과 홀로 맞붙으며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파일:Iena.jpg

후방에서 나폴레옹을 경호하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제국 근위대는 어서 전장에 나가 아군을 지원하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이 근위대를 사열하고 있을 때 나폴레옹 뒤에 서 있던 근위병들의 대오 중에서 누군가가 "전진! 전진!"을 외쳤다. 나폴레옹은 그 외침을 듣고 옆의 참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지금 고함 지른 병사는 아직 턱수염도 안 난 애송이일 걸세. 저 친구가 내게 작전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하려면 적어도 전투를 20번 정도는 경험해 봐야 할 거야."

그런데 미셀 네는 전투가 무르익자 공로를 탐하여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제6군단 선봉 4천 명을 독단으로 돌격시켜 제5군단의 좌익을 지나치며 진군하게 했다. 그는 처음에는 작은 승리를 거두며 프로이센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듯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곧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해 오히려 네의 6군단을 포위해 버렸다. 이에 나폴레옹은 5군단 휘하 사단을 그쪽으로 파견하고 그 대신 근위대를 5군단과 합류시킴으로서 간신히 6군단을 구해냈다.

오전 10시, 호헨로헤 대공은 안개가 완전히 걷히면서 자신이 상대하는 적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급히 에른스트 폰 뤼헬 장군에게 전령을 보내 속히 자신과 합류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오후 1시, 술트와 오주로의 군단이 각각 좌익과 우익에 포진을 완료하자, 나폴레옹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프로이센군은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자 붕괴되었고, 나폴레옹은 여세를 몰아 근위대와 더불어 뮈라의 기병군단까지 투입했다. 이미 대형이 무너져 내린 프로이센군은 완전히 박살이 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도 타우엔치엔 장군의 부대는 패주하는 아군의 후방을 엄호하며 적을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지만 프랑스 포병대의 압도적인 포화에 결국 무너져 먼저 도망간 동료들의 뒤를 따라갔다.

한편 남쪽에서는 작센군 2개 여단이 절망적인 저항을 벌였다. 그들은 지원 기병대를 거의 잃은 채 오주로가 지휘하는 제7군단의 전 병력에게 공격받았다. 여기에 북쪽에서 추격전을 펼치던 수개 연대의 프랑스 용기병들이 작센군을 덮치면서, 작센군은 한층 더 암울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들은 방진을 쳐서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포병대에게 무지막지한 포화를 1시간이나 얻어맞았다. 결국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오후 3시경, 루헬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1만 5천여 명이 카펠렌도르프에 도착했다. 그는 아군을 추격하고 있던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을 격퇴시켰지만, 그 사이 오히려 더 많은 프랑스군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프랑스군 6개 포대가 루헬의 병사들을 포격했고 란과 네의 병사들이 앞장선 프랑스 보병대가 전진했다. 결국 루헬의 군단은 궤멸되어 패주하기 시작했고, 뮈라의 기병대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추격했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궤멸시켰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승리에 도취했지만 10월 14일 늦은 저녁에 아우어슈테트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4.3. 아우어슈테트 전투

10월 13일, 다부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들어 제3군단을 이끌고 아폴다로 진군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주력군이 예나에 다 모여 있다고 판단했고 다부와 베르나도트가 각각 따로 움직여 예나 인근까지 내려와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오판이었고, 실제로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약 6만여 명의 프로이센군 본대가 잘레 강을 따라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다부의 제3군단 2만 7천명은 아폴다로 남하하기 위해 잘레 강 여울목을 건넜다. 전체 군단의 약 2/3이 잘레 강을 건넜을 무렵인 10월 14일 아침 7시, 프랑스군의 선두에 있던 엽기병 부대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프로이센 기병대를 발견했다. 양측 기병대는 잠시 교전을 벌이다가 각각 후방으로 물러나 적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부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인근의 작은 마을인 하센하우젠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준비했다. 프로이센 기병대 지휘관 블뤼허는 전 기병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프랑스 보병대는 마을 입구에서 견고한 방어진을 짜고 프로이센 기병대를 잘 막아냈고, 블뤼허는 수차례 돌격을 해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단 후퇴했다. 이후 다부는 병력을 전방으로 전개해 야전을 준비했다. 한편, 블뤼허로부터 프랑스군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접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깜짝 놀랐지만 적의 규모가 아군에 비해 큰 편이 아니라는 보고를 접하자 그들을 밀어내고 잘레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블뤼허의 기병대와 보병대, 그리고 포병대를 함께 전개시켜 프랑스군을 치게 했다.

프로이센군은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여 프랑스군을 하센하우젠 마을에서 밀어내려 했다. 프랑스군은 이에 맞서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을 상대로 악착같이 저항했다. 하지만 마을 남쪽으로 이동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 제85전열보병연대에게 가차없는 포화를 퍼부었고, 뒤이어 기병들이 돌격해 전선을 뒤흔들었다. 다부는 제85전열보병연대가 얼마 지탱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하고 제12전열보병연대를 투입했다. 제12전열보병연대는 후퇴하는 제85전열보병연대를 스치고 지나가며 아군을 추격하는 기병대에게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렇게 해서 적 기병대는 격퇴되었고, 전열을 추스린 제85전열보병연대는 방진을 짰다.

이렇듯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이,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아우어슈테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예나로 행군하고 있었다. 베르나도트는 분명 아침부터 들려온 총성과 포성을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후방에 고립된 동료군단이 적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게 분명하니 그는 마땅히 그들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전날 받은 나폴레옹의 명령서에 집착했다. 사실 베르나도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나폴레옹으로부터 추격전의 성과가 보잘 것 없다며 야단맞은 적이 있었다. 이 당시 그의 군단엔 기병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나폴레옹은 그런 사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에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결국 곤경에 처한 다부를 내버려두고 예나로 진군해 버렸다.

위 서술에서는 베르나도트가 마치 이전 나폴레옹의 실책으로 인해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만 집착해야 했다고 하나, 애초에 같은 진격 명령을 받은 동료 원수가 근처에서 공격받고 있는데 "나는 같이 합류해야하는 아군이 공격당하든 뭐든 진격 명령만 따르겠다." 수준의 판단을 한다는 것은 베르나도트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게다가 베르나도트가 다부를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나폴레옹의 명령에만 따라야 한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나폴레옹의 축출 음모를 꾸미다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아 자신을 감시하던 다부에게 발각당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또한 베르나도트는 자신보다 아랫 계급인 다부의 명령을 받을 처지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을 그르쳤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정확한 명령은 다부와 함께 도른부르크로 집결해서 같이 아폴다로 진격하라는 명령이었기에 베르나도트는 결과적으로 황제의 명령도 절대적으로 지켰다고 보긴 어렵다.

오전 9시 30분, 프랑스 제 3군단은 모랑 장군의 사단을 빼고는 모두 자리를 잡고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적과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축차투입을 일삼다가 각개격파당했다. 그러다가 비로소 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전면적인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후 약 4km 정도의 전선에서 7~8만 명에 달하는 양 군대가 서로 격렬하게 맞붙었다. 다부가 전투를 이끌던 도중 날아온 대포알에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고,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에게 압살당할 위기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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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이 총탄에 관통당한 채 후방으로 실려가고 있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말을 몰고 최전선으로 달려와서 병사들을 독려하다가 옆을 돌아보던 중 프랑스군 병사가 쏜 머스켓 탄환 한발이 그의 두 눈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치명상을 입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전열에서 이탈해 한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1806년 11월 10일에 숨을 거두었다. 또한 그와 함께 최전선을 지휘하던 슈메타우 장군도 총격에 전사했으며, 바르텐스레벤 장군 역시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군 지휘부는 대혼란에 빠졌다. 당시 프랑스군 좌익이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밀려 붕괴 일보직전인 상황이었으므로 그곳에 추가 병력을 투입한다면 프랑스군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휘권을 맡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장군들이 저격당하여 쓰러지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국왕이 이러니 휘하 장성들도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오전 11시경, 마침내 모랑 장군의 사단이 도착해 붕괴 일보 직전에 몰리던 프랑스군의 좌익에 배치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때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때마침 도착한 오라녜 공[6]의 사단을 둘로 나눠서 좌익과 우익으로 파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 조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프랑스군은 적을 상대로 거센 저항을 펼쳐 적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이때 프로이센군에게는 후방에 위치한 1만 5천명의 예비 병력이 남아 있었으므로, 이들을 투입시킨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적이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 걸 보고 자신이 적의 주력과 싸우고 있다고 착각해 예나에 있는 호헨로헤 공작과 합류해 그에게 지휘권을 일임하려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예비 병력을 투입시키지 못하고 후퇴할 궁리만 했다.

낮 12시, 다부는 적의 움직임이 굼뜬 것을 보고서 마침내 대반격의 시기가 찾아왔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프랑스군이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자, 프로이센군은 기세에 눌러 패주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전세가 불리해짐을 알고는 마침내 퇴각 명령을 내렸고, 프로이센군 전체가 전열이 무너진 채 도주했다. 다부는 전과 확대를 위해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을 하다가, 오후 5시에는 정식으로 추격 중단을 명령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예나로 후퇴하다가 예나에서 패주해온 아군과 만나면서 예나에 주둔한 호헨로헤 공작의 군대마저 박살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사분오열되어 사방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조직적으로 저항할 여력을 사실상 상실하고 말았다.

5. 결과

예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6천 명 정도였다. 이에 비해 호헨로헤 공작과 루헬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5만 4천 명 중 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포로만 해도 1만 4천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 군기 30개와 포 300문이 프랑스군에게 넘어갔다. 양측의 사상자 수가 별 차이가 없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프로이센군의 전투력은 프랑스군 못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애당초 예나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전투를 치렀고 전 병력의 절반 가까운 병력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피해는 사상자 1만, 포로 3천명이 발생했고 대포도 115문이나 노획되어 버렸다. 반면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 제3군단의 피해는 사상자 7천명이었는데, 이는 전체 병력 2만 7천 중 26%에 달하는 수치였다. 다부는 사상자 수습으로 인해 이날 밤에는 도저히 보고를 올리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야 연락 장교를 보내 나폴레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다음날 보고서를 읽은 나폴레옹은 다부의 시력이 매우 좋지 않다는 사실을 들어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자네 원수께 가서 유령을 본 건 아니냐고 전하게."

하지만 얼마 후 다부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게 분명해지자, 나폴레옹은 다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내 사촌이여, 자네의 빛나는 무훈에 진심어린 찬사를 보내네. 자네가 잃은 용감한 병사들을 애도하지만, 그들이 영광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자네 군단의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내가 크게 흡족해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그들은 나의 존경을 받을 만 하네. 자네의 소식을 더 보내주고, 자네 군단을 나움부르크에서 휴식시키게."

이후 나폴레옹은 10월 23일 베를린에 입성했을 때 다부의 제3군단을 최초로 입성시켰고 다부에게 아우어슈테트 공작이라는 작위를 하사했다. 반면 베르나도트는 다부의 곤경을 무시하고 예나로 진군한 일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물론 나폴레옹이 잘못된 명령을 보낸 것에서 비롯된 사태였지만, 그 명령서에서도 나폴레옹은 "다부와 함께 있으면 다부와 함께 아폴다로 진군하라."고 적은 바 있었다. 또 설령 나폴레옹의 명령에 복종했다고 해도 당장 아군이 위험에 처한 게 분명한데 멀리 있어서 전황을 알지 못하는 황제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따라 아군의 위기를 무시하고 예나로 가버린 것은 베르나도트의 실책이 맞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실책을 베르나도트에게 돌리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맹비난했고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려 했다가 곧 그만뒀다. 하지만 이 일로 두 사람간의 감정이 악화된 것은 돌이킬 수 없었고, 이는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배신하여 훗날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허나, 위의 서술처럼 '베르나도트의 실책도 있지만 나폴레옹의 잘못 또한 상당 부분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애초에 나폴레옹이 잘못된 명령을 보냈다고 적혀있지만 나폴레옹의 정확한 명령은 다부의 군단과 도른부르크에 '같이' 집결 후에 아폴다로 향하라는 말이었는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군단 앞에 나타난 프로이센 주력군을 예상못한 것은 맞지만 그런 것은 상관 없이 베르나도트는 다부의 군단과 합류하라는 말을 무시하고 그냥 독자적인 판단으로 진격했다. 만약 그가 명령을 제대로 이행할 생각이 있었다면 다부 군단이 전투를 벌이는 것이 뻔한데도 그냥 자기 군단만 휑하니 도른부르크로 움직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 이유는 나폴레옹의 명령이 두려워 집착했다는 것 보다는 다부 원수와의 앙숙과 같은 관계에 더해 자신의 계급이 다부보다 높았기 때문에 굳이 다부와 연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베르나도트의 개인적인 문제가 크다. 또한 나폴레옹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일부러 맹비난 했다고 하는데 베르나도트가 다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일체 무시하고 자신은 나폴레옹이 싸운 예나의 전장에도 나타난 것이 아니고 엄한 데를 돌아다녔으니, 만약 다부가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면 당연히 그것은 베르나도트가 전적으로 저지른 잘못이 맞다. 맹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 그리고 이로 인해 베르나도트와 황제 사이가 악화됐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베르나도트는 이전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를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를 꾸미고 있었으며 이후 음모가 발각됐을 때 형수의 동생인 자신의 전 약혼자와 결혼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해서 별다른 처벌없이 용서받았다. 베르나도트는 미래에 벌어지는 전투들에서도 무능함을 여럿 보였으나 황제의 가족사에 끝없는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에게 질책만 들었지 크게 처벌받은 일은 없고 대부분 용서받았다. 훗날에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배신한 것은 그냥 이익에 따라서 움직인 것에 불과하지 감정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 근거로 러시아 원정 후 찾아오는 나폴레옹의 몰락 당시 베르나도트가 배신하여 대프랑스 연합에 참여하긴 했으나 그는 자신이 프랑스의 군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프랑스와의 전투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기여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같은 동맹들한테도 욕을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한편 이 시절 몇 안되는 프랑스의 동맹국, 우호국이었던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4세가 사냥이나 다니면서 아무 업무도 하지 않는 동안 왕비의 총신인 마누엘 고도이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는데, 두루뭉술한 내용이지만 프랑스와의 동맹을 깰 수도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이 성명서가 나폴레옹에게 전달된 날이 마침 이 전투가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난 날이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1808년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를 쫒아내고 스페인에 자신의 형을 왕으로 앉혔으니, 이 일이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불씨가 된 셈이다.
[1] 야사에 따르면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크리스티안 백작은 준비된 최후통첩을 담은 서신을 찢어버리고는 그 자리에서 축하 서신를 썼다고 한다. 단어 하나도 정말 세심하게 골라서 쓰는 외교문서 특성상 현장에서 정말 급하게 작성한 축하 서신은 누가 봐도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내용의 퀄리티였을 것이다.[2] 이 도발을 한 기마헌병연대는 결국 패전 후 군제개편 과정에서 해체되게 된다.[3] ...이후 그는 이러한 수뇌부의 현실에 크게 낙담한 나머지, 일기에다 대고 "우리가 뭘 해야 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하게 될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리라."하고 푸념했다고 전한다(...).[4]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막내아들인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의 아들이다. 즉, 당시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오촌 당숙. 참고로 이 사람의 손자가 독일의 극작가 에른스트 폰 빌덴브루흐이다.[5] 페르디난트 왕자를 전사시킨 쥔데라는 이름의 이 부사관은 전투 후 ‘프린스 슬레이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러나 후에 쥔데 역시 결국엔 나폴레옹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전사하고 만다.[6] 훗날 네덜란드 초대 국왕이 되는 빌럼 1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