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인 1792년 9월 20일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파리 근교 발미에서 맞붙은 전투. 이 전투는 프랑스 혁명군의 첫 승리였으며, 이후 프랑스 혁명 정부는 본격적으로 '혁명의 정신을 널리 퍼트린다'는 명목하에 대외 전쟁을 벌인다.2. 배경
1792년 7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코블렌츠에 집결했다. 페르디난트는 라인 강을 도하하여 프랑스로 진격하기에 앞서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에서 "우리는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루이 16세의 정당한 통치권을 회복시키기 위하는 것이며, 우리를 적대하지 않은 프랑스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지만 만약 왕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파리를 불태우겠다."고 밝혔다. 8월 1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문이 파리에 도착했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라인 강을 도하했다는 소식도 동시에 전해졌다. 이에 민심은 극도로 격양되었고 각지에서 의용병들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군중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왕당파 귀족들이 외국에게 기밀 정보를 누설하고 있다고 여기며 국왕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갔다. 8월 9일 과격 혁명가들이 파리 시청을 급습해 장악하고 코뮌을 결성한 뒤 파리 전 지구의 시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했다. 이에 시민들은 다음날 봉기를 일으켰고(1792년 8월 10일 봉기) 루이 16세 일가는 의회로 도주했지만 군중이 의회를 애워싸고 국왕 일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결국 의회는 굴복해 국왕 일가를 시민들에게 넘겨줬고, 시민들은 그들을 탕플 탑에 유폐시켰다. 이리하여 왕권은 정지되었고, 봉기를 주도한 조르주 당통 등이 요직을 차지했다. 그리고 북부군 사령관 라파예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8월 19일 망명했고[1] 외무장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가 그를 대신해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8월 19일, 프랑스 국경을 넘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8월 25일 롱위를 점령하고 9월 2일 베르됭을 함락시켰다. 이에 공포에 사로잡힌 파리 시민들은 동맹군이 파리에 도착하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 혁명주의자들이 봉기한다는 루머를 믿고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엿새 동안 감옥을 습격해 죄수 및 용의자 15,000명을 모조리 학살해버린다. (9월 대학살) 이렇듯 파리에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북부군 사령관 뒤무리에는 여전히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공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신병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한 후 파리로 진격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공격을 포기하고 9월 2일 스당으로 향했다. 이후 혁명 정부는 뒤무리에의 북부군과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장군이 이끄는 중앙군이 서로 연계하여 파리를 방위하라고 지시했다.
스당에 도착한 뒤무리에는 숲이 우거진 아르곤 삼림지대에서 최후 방어선을 결성하기로 하고 메츠의 켈레르만에게 연락을 보내 연합군의 후미로 진군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아르곤 삼림지대를 강행 돌파했고, 뒤무리에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했고, 그 과정에서 북부군 천여 명이 적과 교전도 하지 않고 탈영했다. 이후 뒤무리에는 잔존 병력 2만 명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가서 수비에 전념하는 것과 현 위치를 고수하며 켈레르만과 연계하는 것 중 어느 쪽을 택할 지를 고심하다가 후자를 택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북부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던 켈레르만의 중앙군에게 전령을 보내 생-므누 인근에서 합류했다. 이렇듯 프랑스군이 합세하여 후방을 위협하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군대를 돌려 이들과 교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9월 20일, 양측은 발미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지휘관: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 병력: 47,000명.
3.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 지휘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 병력: 35,000명.
4. 전투 경과
전투 전날인 9월 19일, 뒤무리에는 생-므누 인근에서 켈레르만과 합세한 뒤 켈레르만에게 중부군이 오브 강을 끼고 포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켈레르만은 그곳은 포병대를 끌고 포진하기엔 좋지 않은 장소라며 거부하고 발미 마을 앞의 풍차 언덕과 이브롱 언덕, 좌층 전방의 륀 언덕을 장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는 발미 마을 쪽으로 진군했고, 뒤무리에는 발미 마을 인근은 4만 7천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기엔 비좁다고 판단하고 원래 계획 대로 생-므누 마을 앞 들판에 남았다.9월 20일 아침 7시, 프로이센 기병대가 출격하여 중부군 측면을 우회하려 했다. 마침 륀 언덕을 점령하러 나섰던 장 밥티스트 시뤼스 드 발랑스 장군의 부대는 이들 기병대와 교전을 벌였다가 후퇴하여 에티엔 드프레 크라시에 장군의 전위대와 합류, 륀 언덕 좌측의 이즐레트로 이어지는 도로를 틀어막았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풍차 언덕에 적이 포진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향해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 포병대는 그들을 향해 일제히 대포를 발사했고, 프로이센군도 맞대응하면서 전투는 곧 포격전으로 변했다. 당시 포병대 옆에 계속 머물렀던 켈레르만은 한 포병 장교가 포를 지나치게 높이 조준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에게 물었다.
이보게, 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장교가 답했다.
아니라는 걸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각하!
그 후 발사된 포탄은 후퇴하는 프로이센 기병 중대 한 가운데에 정확히 떨어졌고, 이걸 본 켈레르만은 크게 기뻐하며 포병 장교를 안아줬다고 한다. 그 후 켈레르만은 그동안 오합지졸으로서의 면모만 보였던 병사들이 의외로 대오를 지키고 있는 것에 고무되어 적을 공격하기 위해 기마대를 이끌고 진격에 나섰다. 그러나 곧 프로이센 포병대의 집중 사격에 직면한 프랑스군은 패퇴했고, 켈레르만 자신도 말이 산탄에 맞아 쓰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여 부하들이 간신히 구출해야 했다. 이 광경을 본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물러섰고, 포병대 역시 동요하여 포격을 잠시 중단했다. 프로이센군은 이 틈을 타 언덕 위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62 보병연대는 도주할 기미를 보였다.
이때 켈레르만은 병사들을 다그쳐서 혼란을 수습한 뒤 최전선에 섰다. 그는 자신이 최전방에 선 모습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고자 모자를 벗어 칼 끝에 씌워 높이 쳐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제군, 승리의 순간이다! 적들을 쏘지 말고 가까이 오게 놔두라. 놈들이 다가오면 총검으로 찔러줘라! 조국 만세!(Vive la nation!)
병사들은 지휘관이 이렇듯 자신들을 독려하자 진심으로 감동하여 일제히 따라 외쳤다.
Vive la nation! Vive la France! Vive notre general!
조국 만세! 프랑스 만세! 장군님 만세!
조국 만세! 프랑스 만세! 장군님 만세!
이것을 본 프로이센군은 주춤했고, 프랑스 포병대의 정밀한 사격으로 인해 프로이센 장교들이 잇달아 쓰러지면서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페르디난트는 이 광경을 보고 기세가 꺾였다고 판단하고 부대 재정비를 위해 퇴각을 명령했다. 이후 오후 4시경, 페르디난트는 보병대와 기병대를 2부대로 나누어 프랑스군의 좌익과 우익을 치게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결국 발미에서 철수했다. 이리하여 전투는 프랑스 혁명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약 300명이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사상자는 184명이었다. 8만에 가까운 양군이 맞붙은 것 치고는 싱겁게 끝난 셈인데, 이 때문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에 대한 의혹이 당대부터 제기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젊은 시절 7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기습 작전을 수차례 이끌어 '비정규전의 명수'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용맹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발미 전투에서 적의 전의가 만만치 않다는 이유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했으니 사람들이 의혹을 품을 이유는 충분하다. 많은 이들은 그가 프랑스 혁명 정부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후 사망한 그의 유품에서 부르봉 왕가의 보석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다만 그가 정말로 프랑스 혁명 정부와 내통하고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승리의 원인을 굳이 프랑스군 내부에서 찾는다면 포병 전력의 활용을 들 수 있다. 프랑스군 포병대의 화력이 효과를 발휘하자 연합군은 전의를 상실해서 후퇴하게 된 것. 당시 프랑스군은 의용군이 대부분이어서 높은 사기와는 별도로 질적 수준이 낮았지만, 예외로 포병은 혁명 이전부터 하급 귀족 및 평민 출신이 주류를 차지해서 혁명의 혼란으로 인한 전력 공백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질적 수준도 우수했다. 포병은 특성상 수학, 물리학 등 관련 지식이 필수였고, 이 때문에 신분보다는 개개인의 능력 자체를 더 우선시해서 이런 면모가 가능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보병이 진급하기 제일 쉬웠기 때문이다. 매관매직의 프랑스군이 조롱 받기는 하나 실제로 아예 능력을 넘어 자격조차도 없는 이들이 요직을 차지한 건 실제와는 거리가 좀 있는 얘기다.[2]물론 정말 매관매직으로 장교진이 개판이던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때까지나 7년 전쟁때는 맞지만 루이 15세가 개판인 육군을 바꾸기 위해 에콜 밀리테크 같은 군사학교들을 열었기 때문에 그래도 소수의 좋은 장교들을 배출해내기는 해냈다. 다부 원수도 귀족 사관이였다.
사실 발미 전투는 당대에는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발미 전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직후 프랑스 혁명기에 벌어진 주요 전투들에 대해 집필한 역사가들 역시 발미 전투를 생략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당시 프로이센군에 종군하고 있던 괴테[3]는 발미 전투에서 패배한 뒤 우울해하고 있는 장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오늘 이곳, 이 날부터 세계 역사의 새 시대가 열린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자신이 그 탄생의 순간이 있었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발미 전투는 괴테의 말대로 역사의 방향을 바꾼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만약 프랑스 혁명군이 발미 전투에서 무력하게 패했다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별다른 방해 없이 파리에 입성했을 것이고, 프랑스 혁명은 곧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미 전투에서 패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파리 진군을 포기하고 겨울 숙영을 위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철수했고, 벼랑 끝까지 몰렸던 혁명 정부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에 혁명 정부는 자신감을 되찾고 혁명을 유럽 각지에 전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본격적인 대외 전쟁에 착수한다.
6. 출처
- Charles J Esdaile, <The Wars of French Revolution 1792-1801>
[1] 인터넷에 오스트리아 망명으로 기술된 경우가 간혹 있는데 오류이다. 실제로는 벨기에(당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지역을 통해 친분 있는 미국으로 탈출하려다가 오스트리아군에 억류당한 것이다. 5년 동안의 억류기간 중에도 망명객 대우가 아니라 포로로서 연금되었다.[2] 물론 그렇다고 무능한 인물을 가려냈다는 얘기는 아니고 결국 귀족들끼리 해먹는 건 동일해 무능한 작자들이 양성되는 건 맞지만 그저 돈만 보고 장교에 아무나 꽂고 다닌 건 아니다.[3] 당시 괴테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참모로 있었다. 물론 괴테는 어디까지나 문학가 출신이므로 딱히 전략전술 분야에서 한 일은 없지만, 문학적 재능을 살려서 참전 기록을 상세하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