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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ssacres de Septembre프랑스 혁명 기간의 사건. 파리 시민들이 왕당파와 반혁명 죄수들을 끌어내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2. 상세
1792년 9월 2일 브라운슈바이크 공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프로이센 왕국군이 베르됭을 함락시키고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다. 이런 가운데 파리에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이미 파리 근교까지 진출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혁명을 붕괴시키려는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음모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결국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엿새동안 감옥을 습격해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끌어내 그들을 재판도 없이 살해했는데 이를 9월 대학살 사건이라고 칭한다.
이런 대학살 사건의 이면에는 파리 코뮌[1] 정부가 있었다. 장폴 마라와 조르주 당통을 비롯한 코뮌 정부의 각료들과 지도자들은 반혁명 세력의 숙청을 주장 혹은 수수방관하며 이런 대학살을 부추겼다. 코뮌 지도자들은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각처로 서신을 보내 각처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 세력들이 혁명정부를 붕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숙청을 권고했고 각처에서 파리에서와 같은 학살극이 벌어졌다.
이 일련의 사태 동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이었던 랑발 부인이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다.[2] 군중들은 살해된 랑발 부인의 시신을 난도질한 다음 그녀의 머리를 창 끝에 꽂고 왕비가 감금된 탕플 탑으로 몰려가 왕비에게 보여주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엿새동안의 학살로 파리에서만 1200명의 사람들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다른 국가에서도 알려지면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3] 9월 대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과격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이후 국민공회의 공포정치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3. 이후
한편 이 사건으로 혁명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특히 장폴 마라를 암살한 샤를로트 코르데의 사연을 보아도 당시의 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서 먼 행위이자 귀족층 가운데는 벌어지던 전쟁을 역전시킬 수 있는 장교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죽거나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프랑스는 나폴레옹과 같은 부관들이 생기기 전까지는 계속 졸전하기 시작했고 전쟁 말고 정치적 누명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4][1] 민중 공동체 비수무리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100년 뒤 그 파리 코뮌의 유래가 된다.[2] 당시 랑발 부인은 탕플 탑에 갇혀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중을 들다가 라호루스 감옥으로 옮겨졌는데 여기서 끌려나와 군중들이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여 격분한 군중들에게 살해된다. 사실 그녀가 군중들의 요구를 거부한 이유는 혁명의 정당성과 시민들의 자유를 인정하기 싫어서가 아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욕하라는 요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향한 증오를 맹세할 것을 요구했으나 랑발 부인은 "전자는 기꺼이 하겠으나 후자는 내 마음이 거부하니 차마 하지 못하겠군요."라는 대답을 했다. 그녀는 다른 시녀나 시종들과는 달리 왕실에게 빌붙어 자기이익만 챙기려 한 아첨꾼이 아니었고 진심으로 왕실에게 충성하며 마리 앙투와네트를 보좌한 선량한 인물이었다.[3] 특히 앙숙인 영국은 당시 학살을 일으킨 프랑스인들을 아주 극렬하게 깠으며 식인까지 하는 삽화까지 그렸다.[4] 당시 혁명 정부는 반혁명가들을 없앤다고 반혁명가를 고발하면 상금까지 주기로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고발이 빗발쳤다는 문제가 생겼고, 그러면 정책을 철회하거나 수정했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아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다. 문제는 그 중에는 빵값이 올랐다고 불평했거나 혁명 정부에 불만스런 말을 꺼낸 이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그외에도 집에 영국이나 독일에서 생산된 물건을 갖고 있어도 죽이는 통해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때죽음을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