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8:52:44

샤를로트 코르데



파일:Charlotte Corday.png

파일:/image/038/2009/03/09/cocochoi200903082125500.jpg
마라를 암살한 직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보드리의 그림으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패러디한 것으로 여겨진다.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마라를 살해하다2.3. 처형 집행과 사후
3. 대중매체

1. 개요

마리-안느 샤를로트 드 코르데 다르몽(Marie-Anne Charlotte de Corday d'Armont)

프랑스 혁명 당시 온건파였으며 9월 대학살 이후로 혁명에 반감을 느껴 자코뱅의 거두 장폴 마라를 살해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1768년 7월 27일 노르망디의 소귀족 집안에서 출생했다. 고전 작가 코르네유의 후손이었고 1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여 캉에 있는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루소의 저서 등 많은 서적을 섭렵하였으며 자유를 사랑하였고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였다.

1793년 6월 산악파의 독재체제가 완료된 이후로는 혁명에 의혹을 느끼게 된다. 특히 루이 16세의 처형을 두고 지롱드파평원파같은 온건 세력은 급진 자코뱅 산악파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고 근소한 차이로 루이 16세의 처형이 확정된다. 이 와중에 혁명의 양대 산맥인 두 정당은 서로 등을 돌려 원수가 되어버린다. 지롱드파를 비롯한 온건파는 혁명의 수레바퀴가 살육과 피로 점철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고 과격파의 수장인 장폴 마라를 처단할 음모를 세운다. 그 당시 혁명광장에는 늘 잘린 머리가 나뒹굴었고 비릿한 피냄새가 자욱했다. 1792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엿새 동안 진행된 9월 대학살 동안 '감옥에서' 살해된 '혁명의 적'들만 해도 1,2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코르테는 파리에서 도망친 지롱드 당원들의 연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이런 상황이 종식되기 위해서는 독단적으로 마라를 해치워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9월 대학살의 책임이 마라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1793년 1월의 루이 16세 처형도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겼다.

사태가 이대로 흐르도록 놓아둘 경우, 프랑스가 혁명파와 반혁명파 사이의 잔혹한 내전에 휩싸이게 되리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반혁명분자 사냥 캠페인'이 공화국을 궁극적으로 분열시키리라 판단한 것이다. 이후 역사의 전개를 생각하면, 그녀의 판단은 거의 정확했다. 프랑스가 공포정치로 내정이 혼란스러워 혁명과 공화정에 대한 열기가 수그러들고, 프랑스는 혁명으로부터 채 20년도 안되어 나폴레옹의 황제정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2.2. 마라를 살해하다

그 해 7월 노르망디에서 사촌과 살고 있던 캉을 떠나 파리에 가서 평소 부스럼같은 피부병 때문에 목욕요법 중인 마라를 목욕탕에서 만났다. 물론 유력 정치가인 마라의 집에 개나 소나 들어갈 수는 없었고, 당시 마라는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코르데는 마라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자신의 주소를 적지 않는 실수를 해서 마라의 답장을 받지 못했고 마라의 집 앞에서 "나는 자유라는 명분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불행합니다. 인민의 벗, 시민 마라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불행한 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소란을 피웠다. 욕중에서 집무를 보던 마라는 그 소리를 듣고 코르데를 집안에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코르데는 마라에게 접근해 외국 군대와 손을 잡고 현 혁명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반동 세력의 명단이 적혀 있다는 위조된 명단을 마라에게 내밀고 마라가 그것을 읽는 순간, 숨겨둔 식칼로 무참히 찔러 죽였다.

사건 직후 그녀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간단한 재판을 받았다. 코르데가 마라를 괴물이라고 주장하자, 혁명재판소는 자신이 핍박받고 있다는 주장만으로 코르데를 집안에 들여준 마라의 인간적인 행동을 보고도 어떻게 마라를 괴물이라고 비난할 수 있냐고 질의했다. 이에 코르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다른 이들에게 그가 괴물이라면, 나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는게 무엇이 중요합니까?"

2.3. 처형 집행과 사후

구금 기간 동안 마라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몰려와 코르데를 씹어먹어야 한다고 울부짖으며 시위했다. 결국 코르데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마라의 장례식이 있었던 다음날인 7월 17일 저녁 6시,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1] 재판정에서 코르데는 자신이 단독으로 일을 벌였으며, "10만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없앴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 해 1월 루이 16세를 처형하기 직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한 말이기도 했다. 똑같은 말이 정반대 상황에서 발설된 것이다.

이때 샤를로트의 목이 잘리자, 르그로(Legros)라는 이름의 사내가 샤를로트의 잘린 목을 집어들고 마구 따귀를 갈겨댔다.[2] 열광적 마라의 지지자인지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관종인지는 알수 없으나 샤를로트의 목을 조롱한 이 행동은 지켜보던 군중의 분노를 샀고, 그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공안당국은 르그로를 징역 3개월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데의 살인행위가 참수형에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 시민들도, 잘린 목에 대한 더 이상의 모욕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신념주의자였던 인물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3]

자신이 단독범이라고 코르데가 밝혔음에도 공안당국은 그녀의 음순을 부검해 처녀임을 확인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 이런 유형의 사건은 남자가 배후에 있거나 주도하는 게 당연했고 잠자리와 살인 음모를 그녀와 더불어 한 남자가 있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처형자들의 의심과 달리 코르데는 처녀가 맞았다. 아마 그녀는 잔 다르크 이후 프랑스 역사에 개입했던 가장 유명한 미혼 여성일 것이다.

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뒤, 적잖은 예술가들이 코르데의 삶과 죽음을 제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앞에서 언급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나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4] 같은 회화 작품 외에도, 코르데의 삶은 소설, 연극, 오페라, 대중가요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2014년 가을 뮤지컬 모차르트!, 엘리자벳, 레베카를 만든 실베스터 르베이와 미하엘 쿤체가 다시 뭉쳐 2006년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화제가 된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원작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인데,[5] 여기서 샤를로트 코르데는 '아녜스'라는 이름의 수녀로 등장한다. 단, 뮤지컬에서는 안 나온다.

야위고 신경질적이었으나 아름다웠다고 하며, 법정에서의 그녀의 침착하고 순수한 마음씨가 세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한다.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은 1847년 간행한 <지롱드파의 역사>에서 암살의 천사라는 칭호를 주었다.

코르데가 마라를 죽일 때 입었던 드레스와 보닛 모자는 그녀의 이름을 따 '코델리아(cordelia)'로 불릴 정도로 유행이 되었다.

파일:Munch_death_of_marat_I_1907.jpg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도 장폴 마라를 죽이는 샤를로트 코르데의 모습을 그렸다. 정확하게는 툴라 라르센이라는 뭉크의 스토커를 코르데에 빗대고 자신을 마라에 빗댄 것. 툴라 라르센은 권총을 들고 뭉크에게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다가 총알을 잘못 발사해 뭉크의 손가락을 다치게 했다. 그러고 나선 3주 뒤에 다른 화가와 결혼했다. 뭉크는 여복이 없었는데 툴라 라르센을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관련 영어권 사이트

3. 대중매체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에 등장하는 프랑스 검객 샤를로트 크리스티느 콜데의 이름이 여기에서 모티브를 따온것으로 추정된다.

Fate/Grand Order에서 어새신 클래스로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샤를로트 코르데(Fate 시리즈) 항목으로.

성녀전기의 등장인물 샤를로트 코르네유는 이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노센트에서도 출연. '암살의 천사'라는 별명으로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몇 회에 걸쳐 나온다. 혁명에 감화되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는 이상주의자로 등장한다. 누구에게도 자기 뜻을 꺾지 않았던 마리 조셉 상송의 양보를 얻어낸 작중 유일의 인물. 마라의 경호원으로 일하던 마리 조셉 상송은 마라를 암살하겠다는 샤를로트 코르데의 결의를 확인하고 감탄하며 길을 비켜준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B급 전투 항해사로 등장한다. 직업은 타격대로, 백병 스탯이 높고 백병 관련 스킬이 많다. 그 중에서 난전백병이라는 광역 백병 스킬을 50레벨에 배울 수 있는데 이 스킬이 대단히 평이 좋다. 날카로운 미형의 외모와 책 사이에 단검을 끼우고 있는 특징적인 일러스트 또한 호평받고 있다.
[1] 이때의 처형인은 루이 16세의 처형을 맡았던 샤를 앙리 상송이었다.[2] 야사에 따르면 따귀를 맞은 샤를로트의 목이 뺨이 상기되면서 분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심지어 단두대에서 처형된 직후 그녀의 목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는 괴담이 있다. 당연히 폐 등과 분리된 사람 목에서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기에 불가능하다. 아마 소리없이 뻐끔거리기만 해서 사람들이 알수 없는 언어라고 생각한 듯.[3] 당시 혁명에 의해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이 날로 인간성을 상실해갔음에도 어느 정도는 남아있다고 볼 수 있는 사례다.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 당시, 혁명 정부 당원들이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누명을 씌우려는 주장을 했던 적이 있다. 이 때 입 다물고 잠자코 듣고 있던 앙투아네트는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유일하게 "아무리 내가 당신들에게 있어 못났다고는 하나 그것은 부모로서, 사람으로서는 큰 죄악이 아닙니까? 난 여기 있는 어머니들에게 이를 묻고자 합니다."라며 입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자 모든 배심원들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진 것은 물론, 오히려 듣고 있던 여성들이 당원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여론은 가히 최악이었음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가차없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을 들어 재판하고 있던 당원들을 비난한 것. 당시 시민들은 저건 좀 심했다며 괜히 저런 핑계를 대가며 왕비를 죽이려던 혁명 정부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를 들은 로베스피에르조차 저딴 누명을 잘도 가져온 에베르를 두고 저 멍청이 때문에 왕비가 또다시 승리했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4] 위에서 두번째 그림. 다비드의 그림은 장폴 마라 문서로.[5] 국내에서는 90년대 왜색 논란으로 인해 민예사에서 '앙드레 까스뗄로'라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해적판으로 출간한 듯 보인다. 이름이 바뀐 비슷한 경우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스테반드바이트라는 정체불명의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유리가면도 넬 베르디라는 국적 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로 마개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