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7 14:16:13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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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혁명 전까지3. 자코뱅의 지도자4. 공화국을 구하다
4.1. 로베스피에르가 구했다?
5. 공포정치6. 테르미도르7. 사생활8. 역사적 평가
8.1. 긍정적 평가8.2. 부정적 평가
9. 기타10. 관련 항목

1. 개요

우리는 조국의 낡은 것을 갈아치우길 희망한다. 관습이 지배하는 독재 정권 대신 이성이 지배하는 제국을 희망한다. 불쌍하고, 어리석고, 비참한 백성들 대신 고결하고, 강하고, 행복한 백성을 희망한다. 이는 군주제의 모든 악덕과 유치함 대신 공화국의 모든 덕과 기적을 희망한다는 뜻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발언 中
막시밀리앙 프랑수아 마리 이지도르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년 5월 6일 ~ 1794년 7월 28일)는 프랑스변호사, 혁명가, 정치가이자,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를 주도한 주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현대 프랑스 공화국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도 이 사람의 작품이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중에서도 급진파에 해당하는 인물로 앙시앵 레짐의 모든 유산을 청산하려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혁명을 반대하는 반동 세력에 대한 탄압 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 중에서도 혁명성이 의심되는 인물[1]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는 "공포정치"를 주도했다. 때문에 혁명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능하고 깨끗하고 청렴한 정치가였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부패할 수 없는 자(l'Incorruptible)'. 그의 폭압적 정치에 반발하던 반대파들도 이 점 만큼은 인정했다고. 하지만 보통 이러한 자들이 그렇듯 "자신은 사리사욕이 없으므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옳다"는 독선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로베스피에르는 정권을 잃었고 자기 목숨도 잃었다.

2. 대혁명 전까지

프랑스 아라스 시에서 법률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에 사산으로 어머니를 잃고 8살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외조부모 집에서 자랐다. 11살에 성직자가 되기 위해 루이르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2]에 진학했으나 로마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 루소와 카토, 키케로의 사상에 매료되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소와는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고. 12년간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3] 상당히 가난한 편이라 종종 찢어진 옷, 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때때로 옷이 없어 외출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도 하고.

하지만 성적은 우수해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루이 16세가 대학을 방문하자 17세의 로베스피에르는 성적 우수자의 자격으로 500명 학생을 대표해 축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 날 비가 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를 맞으며 연설을 해야 했고, 애초에 한 나라의 폐하께서 비 맞아가며 17살짜리 애가 떠드는 알아듣지도 못할 장문의 라틴어 연설을 듣고 싶을 리도 없었으니 건성으로 듣고 대답없이 돌아갔다고.[4][5]

대학을 졸업한 뒤 아라스시의 법률가가 되어 괜찮은 수입을 올리며 살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그들을 대변하는 등의 행위로 여러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다. 법률가 시절의 유명한 사건 중에는 피뢰침에 대해 신성모독 혐의로 철거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변호해 피뢰침을 지킨 사건이 알려져 있다. 또한 사형제 폐지(!), 처벌 앞에서의 평민과 귀족의 평등, 유죄를 선고받은 자에 대한 재산 몰수 폐지, 서자(사생아)들의 처우 개선 등의 개혁을 주장했다.

3. 자코뱅의 지도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천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결코 현명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 1789년 12월 23일, 유대인투표권을 옹호하며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31세의 나이로 시민층의 지지를 받아 아르투아 주 제3신분 대표[6]삼부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한다. 혁명 초기의 로베스피에르는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부터 가장 단호한 제3신분 대의원의 한 사람이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 45번째로 맹세했고 7월 9일 국왕에게 파리 주변의 외국 군대 철수를 요구할 24인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7월 17일 루이 16세의 파리 방문을 수행했다.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의회에서 파벌의 분화가 이뤄지기 시작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거두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의 준수를 촉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보통 선거, 근위대·공무원·군장교 계급의 자격 제한 철폐 및 청원권을 위해 싸웠으며, 왕의 거부권을 반대하고 행정권의 남용과 종교적·인종적 차별을 배격했다. 또한 사형제 폐지 법안을 제출했고(뭐?)# 당시 연설문(영어), 범인 친족에 대한 형벌(연좌제)을 금지하는 법안에 관여하였으며 배우·유대인·흑인 노예들을 옹호하고 과거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이 프랑스에 재통합되는 것을 지지했다.

이러한 로베스피에르의 활동은 상퀼로트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가 소속된 자코뱅은 의회 내에서 소수파였고, 그런 탓에 의회에서의 활동의 성과는 미미했던 편이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바렌느 배신사건 이후였다. 바렌느 배신 사건은 국왕이 파리 시민들을 외국으로 도망쳐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토벌해야 하는 반란군으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퀼로트들로 대표되는 파리 시민들이 살아남거나, 왕이 살아남는 둘 중 하나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의회 내부의 왕당파와 지롱드파는 국왕을 옹호하는 쪽을 택했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은 상퀼로트의 편에 선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바렌느 배신 사건의 충격을 덮기 위해 지롱드파와 왕당파가 이 사건을 '국왕 유괴 사건'으로 조작하려 할 때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고, 국왕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각 정파들의 기묘한 이해관계 합치로 최후의 수단으로서 제시된 유럽 각국에 대한 선전포고[7]에도 로베스피에르는 거의 유일하게 반대하는 의원이었다. 프랑스는 전쟁을 치뤄내기에는 너무 막장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8] 그러나 결국 선전포고와 함께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고, 당연히 프랑스는 연전연패한다. 게다가 프로이센군이 파리 인근으로 접근했고, 이를 지휘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파리 시민들에게 협박을 가하자, 격분한 상퀼로트들은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일으키고, 그 결과 국민 공회가 들어선다.

4. 공화국을 구하다

"여러분은 어떤 정부가 승리했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국민공회의 정부입니다. 빨간 보닛을 쓰고 거친 모직 옷을 입고 나무신을 신은, 보잘것없는 빵과 질 나쁜 맥주를 먹으며,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깨어서 논의할 수 없을 때는 그들 집회실의 마룻바닥에 깔려 있는 이불 위로 잠을 자러 갔던 열정적인 자코뱅의 정부입니다. 프랑스를 구했던 것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저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황제의 거처를 자랑으로 여기듯 저는 이 사실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훗날 러시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의 도지사가 국민공회 시기는 더 망한 상황에서 이겼는데 왜 나폴레옹 황제는 그걸 못하냐고 까는 연설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국민공회 정부가 들어섰고, 왕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더 이상 파리 시민들의 격분에서 국왕을 보호하는 건 불가능했고,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상퀼로트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지롱드파와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파는 루이 16세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격한 대립을 보인다. 지롱드파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한 반면 자코뱅은 확고한 혁명의 완수와 공화국 체제의 완비를 위해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코뱅은 파리의 민심을 등에 업고 지롱드파를 몰아붙여 결국 의회에서 벌어진 투표 끝에 승리하게 된다.

국민공회 안에서는 지롱드파가 갈수록 산악파에 밀려 기세를 잃어갔다. 거기에 지롱드 계열의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지롱드파는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결국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마르세유, 보르도, 리옹 등지에서 군대를 동원해 파리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으로 부당한 체포가 연이어 일어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1793년 5월 31일,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12인 위원회"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 체포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6월 2일,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의회에 난입하여 시민들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들의 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제명되어 지롱드파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만다. 이로써 국민공회는 자코뱅이 장악하게 된다.[9]

이렇게 되자 프랑스 안의 반혁명세력들은 혁명 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곳곳에서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부 방데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이는 지롱드 파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들이 내전 준비를 하고 있던 리옹, 보르도 등지로 확산되었다. 또한 프랑스를 고립화시키기 위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에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나폴리, 교황청 등이 가담하여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윽고 프랑스 공화국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1793년, 프랑스의 80개 현 중에서 60개가 파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북쪽과 동쪽에서 프랑스로 침공하고 있었으며, 영국군이 남쪽과 서쪽에서 침입해 오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정부는 고립무원이었고, 당연히 파산 직전이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두 번 연속으로 외세와 연계한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도주하기까지 했다.[10]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혁명의 승리를 위해 창설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 한명이 된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를 단순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의 한 명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조르주 당통, 강경파 마라 등을 중재하며 자코뱅을 이끄는 지도자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자코뱅이 국민공회 내에서 다수파는 아니었을지라도, 국민공회의 다수파는 이 시점에서 자코뱅이 공화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공안위원회 역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요청에 응해 창설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공회기의 상당기간동안 로베스피에르는 사실상의 프랑스의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지롱드 파에 의해 지연되어온 급진화한 새 헌법(1793년 헌법)이 포고되었다. 여기서 보통선거, 저항권, 노동생계유지의 권리, 모든 사람의 행복이 정부의 목표이며 인민의 권리는 손에 넣을 수 있고 실시되어야 한다는 공식성명이 이뤄진다. 이는 근대국가에 의해 포고된 최초의 민주주의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모든 잔존해 있던 봉건적 권리들을 무상으로 완전히 쳘폐하였고, 몰수된 망명귀족들의 토지를 소규모 구매자가 매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진시켰다. 아이티의 흑인노예혁명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영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프랑스 혁명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총동원을 표방한 징병제가 실행되었으며,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경제적 통제를 실행했다. 완전히 붕괴해버리다시피 한 장교단을 충원하기 위해 하사관, 병사들에게 능력과 실적에 따른 승진 기회를 제공했으며, 혁명군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공안위원회 파견의원들이 전선에서 군대를 독려했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공화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94년 3월 경에는 이전의 3배에 달하는 군대를 1793년 3월의 절반에 불과한 비용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공화국은 적군을 압도했으며, 혁명군은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군사적인 우세를 시작해나갔다. 이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한 유일한 재원이었던 아시냐 화폐의 가치조차도 최하 3분의 1 선에서 지켜내기까지 했다.[11] 또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파리 코뮌의 각 구들을 비폭력적으로 무장 해제하는데 성공하여, 중앙집권과 안정적인 의회의 통치가 가능하게 된다.

4.1. 로베스피에르가 구했다?

정작 로베스피에르 집권시기의 프랑스 혁명전쟁은 엄청난 참패가 계속됐다. 국민개병제를 통한 가공할 머릿수로 이를 버텨내고 있었던 것인데, 당시 인구 3천만이던 상황에서 1794년 기준으로 150만을 징집했고, 이중 80만 병력이 정규군 취급을 받았다. 이는 전근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비율을 아득히 넘어버린 것이었다. 이 덕분에 보급이 징병을 따라가지 못해서 보급상황도 악화되고 결국 군대로서는 최악인 현지 보급 명령까지 내려진다. 위에 언급된 3배의 병력을 같은 비용으로라는 문구가 내포하는 진실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전만큼 보급을 안 해주니 돈이 들어갈 리가 없다.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군은 곤봉으로 무장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안정된 중앙집권과 의회통치가 시작되었다는 파리와 달리 지방에서는 반란이 속출한다. 아래 언급에는 혁명군의 성과로 벨기에 점령과 함께 언급되지만 규모에서 비교도 안되는 플랑드르 전역에 시간이 이렇게 소모된 것은 지롱드를 축출한 1793년에 지롱드 파벌이 많았던 남프랑스에서 반란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왕당파도 아니고 지롱드 반란이라는 것은 완전한 정치적 실패이다.

그리고 이 시기 연이어 벌어졌던 툴롱 공방전은 그 당시 프랑스군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다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툴롱의 왕당파는 외국군을 끌어들여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할 프랑스군 지휘관은 전직 화가에 변호사, 의사 출신 무능력자들이다. 이 때문에 병력이 2, 3배가 되는 프랑스군은 희생자만 쌓았고, 여기에 나폴레옹이 내려꽂힌 다음에는 나폴레옹까지 포함된 지휘관들의 정치싸움이 시작된다. 결국 정치싸움으로 일개 장교이면서 장군들을 다 날려버린 나폴레옹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장군과 함께 사실상 자기가 지휘해서 툴롱을 함락했고, 툴롱의 왕당파들은 학살된다.

실제로 이 시기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은 우습게도 사관학교 경력을 갖춘 낙하산 나폴레옹이었고, 프랑스 혁명전쟁 시기 프랑스군의 업적은 대부분 로베스피에르가 죽고 국민공회가 붕괴된 다음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전쟁을 치러왔던 하사관들이 경험을 쌓았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로베스피에르 사후 성립된 부르주아 정부는 혁명보다 생존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기존 귀족집단 장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다시 군대에 받아들이고, 혁명군을 기존의 정규군으로 재편한 결과였다. 기존의 혁명군 시스템[12]이었던 민병대 국민위병은 로베스피에르 시기에는 수시로 예비대 형태로 전선으로 보내졌다. 아래 언급되는 로베스피에르가 전선에 보내서 문제가 생겼다는 혁명군이 바로 이 국민위병인데, 예비병을 계속 전선에 밀어넣다보니 기존에 로베스피에르가 장악하고 있던 국민위병 상당수도 전선으로 보내졌고,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보충된 국민위병을 로베스피에르 반대파가 장악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혁명성향이 강한 민병대를 이런 식으로 소모하다 보니 당연히 자기 지지층은 줄어들고 혁명의 피로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 성향이 약한 사람들을 보내기도 곤란한데, 프랑스 혁명전쟁 문서에도 있지만 정신무장이 안된 사람들을 무작정 전선으로 보내면 전투를 거부하고 탈영하거나 심지어 사령관을 죽이고 스스로 해산해버리는 상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목표의식이나 동기부여가 없이 머릿수만 억지로 채운 군대는 도적떼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될 수 있다. 후에 나폴레옹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을 다 뜯어고쳐서 해당 부대를 철저한 예비대로 만들었다[13].

5. 공포정치

"여러분이 세우는 정책의 첫 번째 원칙은 민중은 이성으로, 민중의 적들은 공포로 이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화국 내외의 적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화국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혁명 정부는 전제정에 항거하는 자유독재입니다. 언제까지 독재자들의 분노정의로, 민중의 정의는 야만이나 반란으로 불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압제자들에 대해 완고합니다. 나는 민중을 학살하면서 전제군주를 용서하는 인류애를 알지 못합니다. 제헌의회에서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사형제의 폐지를 요구하게 만들었던 그 감정은 오늘 그것을 내 조국의 압제자와 그가 구현하는 왕정 자체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게 하는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나는 사형에 찬성합니다."
루이 16세에 대한 사형을 주장하는 연설 中

로베스피에르의 집권 기간은 공포 정치의 기간이기도 하다. 반혁명 분자, 반역자라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1793년부터 1년 동안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1만 7천명이 사형을 당했다. 특히 가톨릭, 반혁명 지지 방데 반란에 대한 학살진압은 근대적인 학살의 효시로 기록될 정도로 잔인하고 철저했으며, 이 기간 동안 갓난아이, 임산부까지 포함해 최소한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숙청은 자코뱅파 내부에게까지 미쳤다. 로베스피에르는 급진 혁명주의자 자크 르네 에베르와 그 지지자들을 고발했으며 이들은 1794년 3월 처형당했다. 조르주 당통은 공포 정치와 전쟁의 중단을 요구하며 공안 위원회의 정책을 점점 더 격렬하게 비난했다. 당통파 지도자들과 의원들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청산할 때의 부패 혐의로 1794년 4월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다.

여기서 공안 위원회와 국민 공회, 로베스피에르를 분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자코뱅은 사실상 국민 공회를 주도해가고 있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확고한 지도자였다. 당시 프랑스의 모든 정치범 숙청은 (10월 봉기로 인한 지롱드 완전 실각 이후 기준) 특별 법원에서 행하였고, 로베스피에르는 단 한 번도 이 특별 법원의 검사 혹은 재판장을 맡은 적이 없다고는 하나[14] 혁명 재판소 역시 1793년 10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로베스피에르파 에르망 등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또한 프레리알법[15]의 입법과 시행에도 로베스피에르는 큰 영향을 끼친다. 다만 공안 위원회와 국민 공회, 혁명 재판소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은 공포 정치가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선동과 민중들의 학살'이라는 편견과 달리 당시의 법과 제도에 따른 국가 권력의 집행이었다는 것이며, 로베스피에르와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선동적 학살이 아니라 제도적 국가권력의 집행이라고 한다면 수정주의적 혁명사가들이 프랑스 혁명과 전체주의 사이의 친연성을 지적하며 제기한 공포정치가 대숙청 같은 국가권력의 대량살해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도 대답해야 할 것이다.

수정주의적인 시각에서 주목받는 방데 반란에 대한 진압 역시 일방적인 폭력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니고 양쪽 모두 폭력을 휘둘렀으나 왕당파의 학살보다 로베스피에르의 집정부 쪽 학살이 압도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잔혹했다. 그리고 혁명정부가 방데 지방에 혁명 정부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권리를 제한해서 주민들이 혁명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해야 하고 공화파가 먼저 당했다는 학살도 실상은 150에서 160명 정도로 추정되며 오히려 공화국 군대가 먼저 방데 농민들을 처형했음을 알아야 한다.[16]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억울한 희생양 정도로 미화하는 당통 역시 부정부패의 죄목은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다. 애초에 당통 - 로베스피에르 - 마라의 자코뱅 3두정 시기에도 당통의 도덕성은 자코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당통파는 당통의 부패 혐의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차라리 로베스피에르가 필요할 때는 당통의 혐의를 책하지 않았냐는 것을 묻는 게 더 나을 지경. 또한 로베스피에르가 과격해져서 당통마저 숙청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상은 당통이 갑자기 원래의 입장을 뒤집은 쪽에 가깝다. 일단 공안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전반기를 주도한게 당통이다. 에베르의 경우에도 실제로 쿠데타 기도까지 간 상황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며, 에베르는 에베르 이전에 과격파를 이끌던 자크 루 등의 격앙파 지도자들을 숙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무분별한 처형에 반대했으며[17], 지롱드 당원과 국왕의 누이를 체포하는 데 대해 항의했던 의원들을 보호했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순찰 의원'(지방의 반대파를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들)이 저지르는 학살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혁명을 모독하는' 그들의 소환을 요구했다. 위에 언급된 방데 내전과 주민 학살의 경우도 이 문제와 관련된 격론에 그가 참가를 하지 않았고 파견된 군대가 그의 지시에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면도 있어서 학살 사건이 단순히 그의 책임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하다.

사실 로베스피에르가 국민 공회 내부의 숙청을 하지 않고, 지롱드파 의원들을 보호하며, 지방의 무분별한 숙청을 반대하고 그를 이끌던 순찰 위원들을 소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야말로 로베스피에르의 몰락과 테르미도르 반동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6. 테르미도르

"음모에 가담한 자들은 만일 자신들이 성공한다면 극단적인 관용에 의해 현재의 상황과 대조를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잠시 혁명의 고삐를 늦춰보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은 군사독재가 혁명을 탈취하고 당파들의 지도자가 국민의 타락한 대표체를 전복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 전 날의 연설에서[18]
"민주주의는 두 가지 과도함으로 망합니다. 통치하는 자들의 귀족주의로 망하거나, 인민스스로 확립한 권위를 경멸함으로써 망합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모든 성공은 그를 몰락으로 이끌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는 전쟁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 이는 더 이상 비상조치의 필요성이 없어짐을 의미했다. 국민총동원에 의해 열성적인 상퀼로트들이 혁명군에 입대했고, 이는 파리 시민들 중 자코뱅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혁명군은 공세를 취해 남프랑스의 반란을 평정하고 벨기에를 정복하며 라인강 일대로 진격했다. 이는 최악의 상황에서 자코뱅이 혁명군에 기댈 여지조차 없음을 의미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에 의해 파리 코뮌은 약화되었으며 코뮌과 의회의 충돌은 거의 사라졌으나, 이 역시 자코뱅의 최고의 기반이었던 파리 코뮌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역설적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종래의 가톨릭 대신 이성에 대한 신앙으로 공화국의 통합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도는 간단히 써져 있어서 그렇지 그야말로 사이비종교였고, 로베스피에르가 했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를 꼽으며 비호받기도 하는데 누가 봐도 미치광이 같은 짓이었고 당연히 소용이 없었다[19]. 도대체 뭔지도 모를 "최고존재" 따위를 숭배하라는데 먹힐 리가 있나. 또한 공포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무엇보다 로베스피에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시점에 '순찰의원'들을 소환해서 지방에서 저지른 학살 등에 대해 규명하고 처벌할 뜻을 밝혔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

1794년 7월 26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누구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은채 지금 이 공회안에 반혁명파가 존재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시작했다. 장장 2시간이나 비난을 퍼부어대는 연설이었고 오늘은 또 누가 죽어나가나 하는 공포와 불안감 속에 결국 탈리앵과 바렌이 단상에 뛰어올랐다.
"저는 어제도 그저께도 이런 고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또 어김없이 의원들에 대한 중상과 모략입니다. 이 자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동료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늪 속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제안합니다. 이 사악한 음모의 장을 이제 그만 걷어치워 버립시다!"
- 장랑베르 탈리앵(Jean-Lambert Tallien)

탈리앵의 외침에 이어 자코뱅을 제외한 의원들 대다수가 "반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독재타도!"라고 외치며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공회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공회를 빠져나온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코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의견불일치로 결정을 머뭇거리는 사이, 조지프 푸셰가 이끄는 '순찰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반 로베스피에르 세력을 결성했으며 로베스피에르가 보호해주던 지롱드파 의원들이 여기 결탁했다. 여기에 더해 로베스피에르가 숙청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다수파였던 국민공회의 비자코뱅 의원들이 이에 연합했으며, 공안위원회 소속의 상당수 의원까지 이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1794년 7월 27일, 국민공회는 그를 고발하였고, 그를 비롯한 일파들의 체포안도 통과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체포되면서 "공화국은 망했다. 악당들이 이겼다"라고 소리질렀다.

그가 체포된 후 파리 코뮌들에 의한 로베스피에르 구출작전이 일어났으며 이 작전은 상당한 지지를 받아 파리 시청을 한때 점거하기까지 했지만,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 테르미도르파가 지휘하는 국민군에 의해 쉽게 분쇄되었다. 이것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에 의해 파리 코뮌들이 순순히 무장을 해제하고 조직을 해체한 데서 기인한다. 공포정치를 통해 민중들이 로베스피에르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보는 것은 왜곡이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 탓에 쉽게 파멸해 버린 것.

7월 28일 오전, 법정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은 자신들이 정적들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 사실 관계 조사와 변론의 기회는 없었다. 그들을 기소한 검사나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 모두 이제까지 해왔던 절차를 이번엔 그대로 로베스피에르 일파에게 적용했다.

그는 체포되는 과정에서 권총탄에 뼈가 날아가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바람에,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교도관들이 보기 흉한 그의 턱뼈를 붕대로 대충 고정시켜놓은 채 로베스피에르는 다음날 단두대 앞에 서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당대의 연설가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지만, 거칠게 떼어진 붕대 때문에 턱뼈가 달랑달랑거리는 와중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처절한 비명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꼴로 잡혀왔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고발 이후 잡히기 직전 그는 자살하기 위해 턱에 구를 대고 총을 발사하는데, 불행히도 죽지 않고 턱뼈만 날아갔다는 설이다. 권총으로 자살할 때 턱 밑을 대고 쏘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대부분 저렇게 턱이나 까지 날아가고 죽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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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가지는 당시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기 위해 모인 헌병 중 하나인 메르다(Charles-Andre Merda)라는 사병이 지근거리에서 그의 입에다 발포(!)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 기록화도 있다. 메르다는 이 사건 이후 출세해 나폴레옹 1세 치하에서 육군 기병대령까지 올랐다가, 보로디노 전투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전사, 육군 준장으로 사후 추서됐다.

어쨌든 테르미도르 10일(7월 28일) 오후 5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로베스피에르, 동생인 오귀스탱과 동료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최초의 22인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혁명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 올랐다.[20]
오후 4시 정각, 사악한 행렬이 정의의 궁전 마당에 나타났다. 지금까지 파리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로베스피에르가 타고 있는 수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불행한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으며, 처형대로 옮겨질 때야 다시 눈을 떴다. 이 비참한 사내의 머리는 이제 끔찍하고 징그러운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머리가 몸에서 떨어졌을 때, 사형 집행인은 그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끔찍한 장면이었다.
- 로배스피에르의 처형을 지켜본 한 시민의 증언

그 뒤 모두 108명이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지지한 죄로 죽었다. 이후 프랑스 전국에 걸쳐 자코뱅파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었으며, 재산과 관계없는 보통선거제 도입, 노예제 폐지, 투기 금지와 최고가격제 등등의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가 취한 개혁적 조치는 모두 폐지되었다.

역사학계에서는 테르미도르 반동을 기점으로 프랑스 대혁명은 끝났다고 평가한다. 즉 그의 사망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이 끝났다고 봐도 된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집권한 총재정부가 왕당파와 자코뱅파의 중간에 속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을 대혁명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의 종말을 프랑스 대혁명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7. 사생활

부패할 수 없는 자(incorruptible)라는 그의 별명은 반대파들도 인정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매일 해진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근검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근검했다. 때문에 국민 공회기 전부터 자코뱅의 도덕성을 책임졌으며, 특히 당통이 왕창 깎아먹었던 자코뱅의 이미지를 회복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사실상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된 뒤에도 목공 장인인 뒤플레가 세놓은 방에서 출퇴근했다. 셋방에서 집무실로 출근한 국가 원수는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래도 항상 깔끔한 옷차림과 몸가짐은 했다고 한다.

취미 생활도 독서와 산책 정도뿐. 여자관계도 매우 깨끗해서, 기술한 셋방 주인 딸과 처형 직전 약혼한 것 이외에는 없었다. 연애의 전설인 프랑스에서, 그것도 국가 원수급이, 심지어 혁명기라는 큰 혼란기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로베스피에르나 루이 16세,[21] 루이 필리프 1세, 샤를 드 골 등을 제외하고 미라보, 조르주 당통, 바라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수아 미테랑,[22] 니콜라 사르코지[23], 프랑수아 올랑드,[24] 에마뉘엘 마크롱[25] 등등 프랑스의 권력자들은 대개 화려한 여성 편력을 뽐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이다. 그래서인지 로베스피에르는 미라보에게 애초부터 영 수상쩍다는 반응을 보였고, 당통에게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살라고 지적했다. 약혼자에게 남긴 편지에서조차 루소의 도덕론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 가득했다고 한다.

8. 역사적 평가

공안위원회는 강력했고 방탕했으며 아마 부패했지만 무한한 재능을 가진 보기보다 온건했던 혁명가 당통(그는 최후의 왕정을 대신했다.)을 잃고 로베스피에르를 얻었는데,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위원이 되었다. 미덕을 개인적으로 독점했다는, 다소 과도한 의식을 지닌 멋쟁이이며, 냉혈하고 광신적인 이 변호사에 대해 냉정했던 역사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인간도 중립일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영광스러운 혁명력 2년의 체현자(體現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오늘날 스파르타식 낙원의 건축가인 젊은 생 쥐스트의 빛나는 수학적 엄격함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종종 편협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부상시킨 인물 중에서 그 주위에 숭배가 생겨났던―나폴레옹을 제외하면―유일한 인물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듯이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자코뱅 공화국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출된 하나의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와 미덕의 무섭고도 영광스러운 통치이며, 이러한 통치 아래 국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선량한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였고, 인민들은 반역자들을 죽였다. 장 자크 루소와 정의에 대한 투명한 신념은 로베스피에르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단지 국민공회에 속한―결코 전능하지는 않지만 가장 강력했던―소위원회에 불과했던 공안위원회의 한 위원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독재 권력이나 심지어 관직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권력은 인민―파리의 대중―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그들의 공포정치였다. 인민들이 로베스피에르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했다.
에릭 홉스봄, 1998, 『혁명의 시대』, 한길사, p.17

프랑스 혁명기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대의 중심에 있었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꽤나 양분된다. 그러한 양 갈래의 평가는 그가 정치를 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26] 그에 대해서, 공포정치를 주도하며 피에 굶주린 독재자였다는 비판과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행동한 진정한 혁명가라는 주장이 엇갈렸다. 프랑스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박한 편이었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부터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됐다.

8.1. 긍정적 평가

"나는 이제, 예전에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생 쥐스트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을 후회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그들이 그들만으로도 모든 혁명가들을 다 합친 것보다 낫고, 그들의 독재정부가 진실로 훌륭하게 고안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혁명정부가 사라진 이후에 일어난 이 나의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정당화해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무거운 범죄를 저질렀으며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을 죽였다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이 결백하다 해도 나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죄가 없다고 믿는다. 명예를 탐하고 자만심으로 꽉 찬 자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우리의 로베스피에르가 보기에 수레의 방향을 놓고 그와 다투려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틀림없이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경쟁자들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지녔다 해도 모든 것을 방해하고 망쳐놓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성가진 요정(妖精)들을 그들의 선한 의도와 함께 질식시켜버리자.’ 그래도 나의 견해는 그가 잘했다는 것이다.
쇄신을 도모하는 자는 넓게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고, 가는 길을 막고, 그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거나 오만하거나 명예를 탐하는 사기꾼들에게 모두 마찬가지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들이 거기 있단 말인가? 로베스피에르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그 점이 내가 그를 찬양하는 이유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를 진정한 재생의 이념을 지닌 천재로 보는 것이다."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그가 죽고 나서는 그에 대한 향수가 일기도 하였다. 특히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던 자코뱅이나 좌파 세력에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 특히 '네오 자코뱅'으로 유명한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는 로베스피에르의 집권 당시에는 그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출범한 총재 정부에 실망하여 그를 재평가하였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를 재평가하는 바뵈프의 글 이외에도 총재정부의 친(親)부르주아적 정책에 반발한 상퀼로트들은 "빵과 93년 헌법을!"이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 재평가가 있을 정도였다![27] 하지만 부르주아 공화정의 수립과 나폴레옹쿠데타, 그리고 이어진 프랑스 제1제국왕정복고는 그에 대한 옹호론에 재를 뿌렸다. 이후 2월 혁명, 7월 혁명, 파리 코뮌 등의 혁명적 사회 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진보적이고 좌파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왔다. 1889년 처음 개설된 이후 상당기간 프랑스 혁명사 해석의 "주류"를 상징하게 된 소르본 대학 프랑스 혁명사 강의의 첫 주임 교수였던 알퐁스 올라르(Alphonse Aulard)는 자코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 해석의 기틀을 닦았다.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강의를 맡게 된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즈(Albert Mathiez)는 온건공화파를 강조하는 기존 학계를 비판했는데, 특히 전임자 올라르가 혁명적 정통성의 담지자로 평가한 당통을 깎아내리고 로베스피에르를 대안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많은 사료를 검증하여 '부패할 수 없는 자'라는 별명의 로베스피에르를 복원하였으며, 그의 도덕적 권위와 혁명적 순수함을 입증하였다. 또 '로베스피에르 학회'를 만들어서 로베스피에르와 프랑스 혁명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도록 도왔다.[28] 그의 뒤를 이은 조르주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는 마티에즈의 연구 성과를 그 동안의 주류 역사학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전기작가 장 마생(Jean Massin)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전기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29]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자코뱅에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이들의 프랑스 혁명사 인식을 자코뱅-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르며,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까지 혁명사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전통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전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계속 주류 역사학에서 비판받는 입장인 것처럼 서술한 부분이 있었지만 적어도 20세기 초부터 1970년대까지 전통주의로 대표되는 혁명사학계 다수파는 로베스피에르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는 위대한 웅변가도 아니었고 뛰어난 조직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태를 명석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의지를 통해 입증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혁명 초기부터 이미 민주주의자로서 평판을 지녔고 죽을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가 민주주의자였음은 곧 혁명 프랑스가 대내외적인 반혁명의 위협 앞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으려면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곧 스스로 혁명적 부르주아로서 민중 세력과의 연대를 적극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감지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전술이나 전략의 차원이 아니라 신념으로서 추구하였다. 민중에 대한 그의 사랑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는 혁명정부의 이데올로그이자 혁명 프랑스의 조타수로서 우파의 부동주의, 좌파의 모험주의 양자를 모두 배격하였다. 그는 민중세력의 동참과 민중 운동의 활력이 혁명을 지켜내는 데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인식하여 그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지롱드파의 숙청을 받아들였다.
최갑수(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30]

이러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기존의 '피에 굶주린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어느 정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혁명, 자유, 평등, 민주주의, 민중 등의 가치에 대해 순수하고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부르주아를 넘어서서 상퀼로트들에 대한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것, 프랑스 대혁명기의 인물 중 도덕적 권위를 가졌다는 것, 사생활이 아주 깨끗했다는 것 등이 20세기 중반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다.

8.2. 부정적 평가

파일:로베스피에르의 숙청냄비.jpg

왕당파는 물론이고, 온건한 혁명을 지향하는 공화주의자들이나 지롱드파에게는 상당히 위험스럽고 증오스러운 인물이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그가 몰락한 후 그는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냉혈동물", "피에 굶주린 독재자"온갖 악명을 획득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19세기 역사학계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아주 많이 깠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슐레(Jules Michelet)는 자신의 저서 『폭군』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잘못된 종교정책과 폭군적 야망을 지닌, 시대에 역행한 인물로 규정했다. 실증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 텐느(Hippolyte Taine)는 "고전적 정신의 조생아, 낙제생", "혁명적 현상을 타락한 소수의 자코뱅의 기도"라며 그를 비난했다.

이외에도 로베스피에르에게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서술이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프랑스 혁명 관련 서적을 차지했다. 그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큰 것은 공포정치에 대한 것이다. 공포정치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혁명을 변질시켰다는 것이다.[31]

자유를 위해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정작 집권후에는 통제적 경제정책으로 자유를 말살하는 모순을 저질렀다는 비판도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우유가 대표적인 예인데,[32][33] 그는 집권하자 "모든 프랑스 아동은 우유를 마실 권리가 있다"며 우윳값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우윳값은 잠시 떨어졌다가 폭등했다. 농민들이 돈이 되지 않는 젖소 사육을 포기하고 이를 모두 육우로 내다팔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농민들을 불러 젖소를 키우지 않는 이유를 캐물었다. 농민들이 건초값이 너무 비싸 우유를 생산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답하자, 로베스피에르는 건초값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건초생산업자들은 건초를 불태워버렸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어 우유가 품귀현상을 빗자, 결국 우유에 대해 암시장이 형성되었고 우윳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평민들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입한 가격통제로 인해 우유는 잘 사는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 돼버린 것. 이러한 이유로 한나 아렌트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유를 위해 자유를 없앴다며, 이것이 나중에 스탈린대숙청굴라크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이 가진 전체주의적 속성을 꼬집은 것.

한편, 좌파 내에서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먼저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왜 더 과격하지 않냐(...)고 비판한다. 당장 대혁명 때도 자크 르네 에베르 등의 자코뱅 급진파는 로베스피에르당통을 싸잡아서 온화주의자라고 비판했고, 그를 재평가했던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테르미도르 반동 전까지 로베스피에르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프랑스의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쓸모없고 잔인한 권력자라고 깎아내렸고, 마르크스는 (그의 진정성만큼은 인정해주었으나) 그가 부르주아적 사상을 탈피하지 못한 채로 정치의 힘에만 의존하고 경제를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34] 한편, 로베스피에르보다 온건한 성향의 좌파들은 우파들의 비판처럼 그의 공포정치가 가지는 잔인함과 비민주성에 초점을 맞춰 비판한다.

9. 기타

로베스피에르의 전기로 장 마생의 <로베스피에르 : 혁명의 탄생>이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인생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을 풀어낸 작품인데, 로베스피에르를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꽤 괜찮다. 다만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을 것.

베르사유의 장미에 프랑스 혁명 관련으로 나온다. 베르나르 샤틀레와 생 쥐스트의 스승격이자 공화주의자로 지하에서 혁명 세력의 중심격인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려 하자 시민들 스스로가 혁명의 주체가 되길 원했던 베르나르와는 달리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주도하는 혁명으로 이끌어 나가길 원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생 쥐스트도 그를 권력을 탐하는 테러리스트라고 평하였다. 혁명을 마친 이후에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기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진정남 나폴레옹에서는 작중 내내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포스 있는 정치인으로 등장하는데, 동정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일명 사형간지 로베스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재판에 임해서 '사형' 아니면 '무죄'만을 선고했다는, 당대부터 유명한 카더라이다. 참고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권력을 잡은 후 종종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 이게 다름 아닌 로베스피에르의 선글라스다. 이 작품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꽤 우호적으로 묘사하는 편인데 작품에서는 로베스피에르에서 생 쥐스트를 거쳐 나폴레옹으로 이어지는 가상의 정신적 후계 구도를 묘사하고 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나폴레옹과 로베스피에르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나폴레옹은 원래 워낙의 하급 장교라서 출세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출세할 수 있도록 전방 장교로 꽂아주고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트 로베스피에르이다. 오귀스트가 나폴레옹을 낙하산으로 임명한 것은 알려지기로는 나폴레옹이 쓴 공화제옹호 정치선전물을 보고 감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군사쿠데타를 경고한 로베스피에르이지만, 그 씨앗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던 셈이다.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가 숙청된 다음에는 곤란을 겪게 되지만, 자신이 자코뱅이 절대로 아니라고 열심히 부정을 한 결과 같이 단두대로 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소설가 전민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막시민 리프크네란지에 로젠크란츠 등은 로베스피에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캐릭터 조형이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실종된 상태의 장남이라는 가족배경과 어린 시절 해진 옷을 입고다니는 패션 그리고 이름[35] 등에서 막시민 리프크네와의 공통점을, 청렴결백한 것으로 유명한 공화주의자 혁명가라는 점에서 란지에 로젠크란츠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다. 초기 판타지 작가로 지명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확고한 팬층을 가진 '에누마 엘리시'의 작가 김유나 역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이 사람을 들었다고.

만화 슈발리에에서는 데옹 드 보몽을 지원해주는 소년으로 등장한다.(애니메이션/코믹스 판 공통) 하지만 이 작품이 실제 역사물보다는 팩션에 가까운 물건이므로 단순히 이름만 같은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Fate/Grand Order에서는 슈발리에 데옹의 인연퀘스트에서 등장. 성배가 일으킨 영향의 잔재 때문에 망령으로 소환됐다. 망령으로 소환된 탓인지 자신의 정의를 잃고 숙청과 죽음만 외치는 상태. 본래는 결의에 찬 기백을 지닌 남자로, 데옹과 검을 나눈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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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성전기사단, 정확히는 신 성전기사단과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실제 역사적 사실보다는 공포 정치의 수장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36] 어찌되었든, 공포정치로 프랑스를 장악하였지만, 게임 후반부에 신 성전기사단을 토벌하려는 아르노 도리안엘리즈 드 라 세르가 여론을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물밑 작업을 하는 바람에 체포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코뮌의 보호를 받으며 숨게되면서 최종보스에게 도달하게 된다. 결국 뒤쫓아온 경비병들에 의해 체포당하였고, 여기서는 그가 죽기 전에 입가에 총을 맞아 말을 못했다는 가설을 따랐다. 그리고, 그 총을 쏜 사람이 엘리즈 드 라 세르다! 로베스피에르가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소원대로(?) 바로 총을 쏴버리는 것이 압권

게임 아머드 코어 포 앤서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로 스토리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맥시밀리안 테르미도르라는 링크스가 반체제 혁명 조직 오르카 여단의 보스로 등장한다. 또, 공교롭게도 그 체제의 꼭대기에는 그가 사형당한 날인 28일을 이름으로 하는 링크스가 존재한다...

혼블로워 시리즈를 오마주한 밀리터리 SF스페이스 오페라 소설 아너 해링턴 시리즈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로버트 스탠튼 피에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예 작중에서 '롭.S.피에르'라는 약칭이 나온다. 프랑스를 모델로 한 헤이븐 인민공화국의 유력자로, 정치경찰의 2인자 오스카 생 쥐스트, 극단주의 포퓰리스트 코델리아 랜섬[37]과 함께 자작극을 벌여 정권을 손에 넣는다. 붕괴한 헤이븐의 산업과 교육을 정상화한 업적이 있지만[38] 패전한 지휘관들을 그 가족까지 함께 처단하거나 열악한 환경의 행성을 비밀 수용소로 운영하는 등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자신이 중용한 에스더 맥퀸 국방장관이 일으킨 쿠데타 와중에 사망한다. [후속작스포]

영화 4교시 추리영역에서는 그가 남긴 "범죄는 원하는 바를 얻으려 결백을 도살하고 결백은 범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운다."라는 명언이 언급된다.

10. 관련 항목


[1] 대표적으로 혁명 동지였던 당통이 있는데, 당통은 부패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는 주저하지 않고 당통을 단두대로 보내버렸다.[2] 루이 14세 때부터 부르봉 왕조의 후원을 받아오던 파리 최고의 명문학교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등학교인데 그랑제꼴 합격률이 프랑스 최고다.[3] 같은 시기에 카미유 데물랭이나 루이 프레롱 등의 혁명기 유력 정치인들이 같은 콜라쥬에 다녔으나, 로베스피에르의 학창시절은 거의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4] 이후 루이 16세를 처형하게 되는 로베스피에르다 보니 비 맞은 복수를 했다는 드립이 있다.[5] 그런데 당시 루이 16세는 21세였다. 루이 16세는 어릴 때부터 숫자 21을 무서워해왔는데 그 때문에 건성으로 듣다가 돌아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프랑스 혁명 전 루이 16세에게 자금난으로 인해 돈을 요구한 귀족의 수는 21명이었고, 그가 처형된 날도 21일이었다고 한다.[6] 귀족, 성직자, 평민(엄밀하게 말하면 부르주아 계급).[7] 공식적 명분은 "혁명을 방해하는 외세에 대한 전쟁"이었고, 이 탓에 로베스피에르를 제외한 자코뱅 의원들은 이에 대해 반대하지 못했다. 반면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패배를 통해 외국 군대로부터 구출되기를 바라 전쟁을 찬성했고, 지롱드파는 전쟁을 통해 바렌느 배신사건 이후 왕가에 적대적인 상퀼로트들의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 찬성하는 상황이었다.[8]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는 각 정치 세력들의 동기에서 보이듯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일단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게 된 원인인 엄청난 국가 부채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9] 그러나 자코뱅은 국민공회의 다수파가 아니었다. 봉기로 인한 상퀼로트의 영향력과 전쟁의 급박함 탓에 다수파였던 지롱드 파가 자코뱅의 주도를 묵인한 것에 가깝다. 이것은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10] 라파예트 장군과 뒤무리에 장군[11] 엄청난 가치 하락이지만, 실상은 아시냐 지폐는 1789년 발행된 이후 계속 가치가 급락한 상황이었고, 이를 공안위원회가 전시통제경제를 통해 전쟁에도 불구하고 안정시킨것에 가깝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아시냐는 다시 폭락해, 결국 1797년 30분의 1의 가치로 환금하게 된다.[12] 국민위병은 장교를 1년마다 병사들의 선거로 선출했다.[13] 나폴레옹이 주목받은 첫 전투인 툴롱 전투에서 좋은 예가 있다. 툴롱을 함락하기 좋은 위치(포대를 만들면 항구로 사격이 가능한 해변 언덕)가 있는데 영국군이 점유하고는 있지만 아직 요새화가 제대로 되있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병사를 이끌고 여기를 공격했는데(이것도 전투를 회피하다가 우발적인 사건에 생긴 사고) 상황이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문제는 같이 공격나갔다가 상대의 대포 사격에 겁먹은 프랑스 사령관이 도망치며 후퇴명령을 내려 공격이 실패했다. 이 당시 의회가 선출한 사령관의 전직 직업이 화가와 내과 의사였다(...). 전쟁 도중에 일어난 피와 시체 때문에 겁에 질려 도망가 버리자 나중에 전투가 끝나고 나폴레옹이 이 소식을 듣자 황당해 했을 정도로 당시의 상황이 말도 아니었다. 이 때 빡친 나폴레옹의 강력한 항의로 그 다음 사령관은 제대로 된 군인이 왔고, 언덕 점령에 성공하자 얼마 안가서 영국군이 철수해서 툴롱 탈환에 성공했다.[14] 특별 법원이 처음 설립될 당시(10월 봉기보다 더 이른 혁명력 2년의 일) 그에게 특별 법원 검사 직위를 제안했으나, 그는 "피고의 대부분이 자신의 개인적인 적(敵)이기 때문에 이 직위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반려했다.[15] 1794년 6월 10일, 혁명 재판소의 소송 절차를 간소화하고 피고의 변호와 예비 심문 제도를 폐지.[16] 다만 이와 별개로, 로베스피에르와 공포 정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이 남아 있다. 우선 공포정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형당했다고 하지만 그중 거의 대부분은 실제 반혁명 활동의 혐의가 짙게 입증된 경우이다. 즉 무턱대고 사형시킨 게 아니다. 물론 반혁명 활동이 사형당할만한 죄냐는 물음에는 또 다른 답이 필요하지만.[17] 국왕의 누이동생에 대한 처형에 반대했다.[18] 기타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그 군사 쿠데타의 씨앗이 자신의 옆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는 것이 로베스피에르의 한계이다. 이론과 현실이 괴리를 이뤄갔던 당시처럼.[19] 이 종교 내용이 당시의 이 종교에 대한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이성의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로베스피에르가 정장을 입고 내려오는 공연 극장을 했다. 물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쟤는 지가 신이라고 된다고 생각하나? 미친 거 아니야?"라고 비판적인 시선이 대다수였고 이윽고 그가 초심을 잃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20] 당통이나 에베르 등은 사형판결이 내려진 며칠 뒤에 형이 집행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 일파는 오전에 선고받고 오후에 집행이 되었다.[21] 루이 16세는 되려 이 때문에 남자답지 못하고 소심한 군주라는 이미지를 가져 통치에 악영향을 줬다.[22] 두집 살림을 해서 혼외자가 있었다.[23] 이탈리아 여배우 카를라 브루니와의 스캔들[24] 2014년 여배우와의 스캔들로 물의를 빚었다.[25] 담임 선생님을 NTR끝판왕[26] 프랑스 혁명 초기에 활동했던 미라보 백작은 로베스피에르를 두고 "저 사람은 멀리 갈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모두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27] 대표적인 이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 루이 16세를 심문하고 반동 다시 로베스피에르를 고발한 것으로 유명한 베르트랑 바래르는 "나는 테르미도르 이후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해 보았다. 로베스피에르가 골몰한 것은 공화정부의 수립이고 그가 공격한 것은 이를 저지하려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또 그에게 자크 루이 다비드조르주 당통흉상 제작을 논하자 "로베스피에르를 잊지 마라! 그 사람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진정한 공화주의자였다.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킨 것은 그 자신의 오기와 잘 노하는 그의 감수성과 동료에 대한 부당한 도전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공화국의 큰 불행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8]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망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전기물을 끝내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29]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말고도 헝가리의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György Lukács)는 계급투쟁을 끌어들여서 당통은 혁명을 부르주아의 이해에 한정했기에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완수 목표에서 벗어난 사람이었고, 로베스피에르에게는 봉건제도로부터 해방되는 것 이상의 목표가 있었다고 봤다.[30] 한국 역사학계에서 프랑스 혁명 연구를 개척한 민석홍 교수의 제자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주의 계열 프랑스 혁명 연구자다.[31]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안티테제로 역사학자들은 지롱드파조르주 당통을 '공포정치의 피해자' 혹은 '순교자'로 치켜세우며 '온건한 혁명'을 강조해왔다.[32] 이 내용은 해외 문헌과 교차검증되는지 확인바람.[33] Food Control and Price-Fixing in Revolutionary France: II 보면 생필품에 대한 가격통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가격통제 목록에서 우유는 제외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많은 생필품 가격통제 사례에서 우유, 계란, 고기 등의 물품이 대표적인 통제사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어 자체는 존재할 수도 있다 봅니다. 추가적인 검증 바랍니다.[34] 가격규제정책을 펼칠 것이 아니라 아예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했었어야지...[35] 막시민은 막시밀리앙의 변형이다.[36] 성전기사단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원체 자코뱅과 성전기사단을 연결시키는 것은 음모론의 단골 소재이기는 하다.[37] 뛰어난 선동가라는 묘사와 삼두정의 일원이라는 점, 코델리아와 '코르들리에(Cordelier)'의 유사성으로 보아 조르주 당통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38] 때문에 작품 내의 헤이븐 인물들에겐 오히려 평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심지어 피에르의 반대파 소속 인물도 "교사가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게 만들었다."며 그의 업적은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후속작스포] 피에르의 측근들 또한 맥퀸의 반란군에 의해 대부분 사망하는데 오스카 생쥐스트만이 생존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생쥐스트는 대통령이 된 후 에스더 맥퀸이 장악한 수도를 핵폭탄으로 날려버리는 초강수를 두면서 반란을 진압하고 맨티코어와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군부를 불신하여 경찰의 권한을 늘리고 군부 인사들을 숙청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공화국군의 쿠데타에 의해 그 또한 죽고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