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5:47:55

피에르 드 쿠베르탱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드미트리우스 비켈라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Greece_%281822-1978%29.svg.png
제2대
피에르 드 쿠베르탱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제3대
앙리 드 바리에 라투르
파일:벨기에 국기.svg
제4대
시그프리드 에드스트룀
파일:스웨덴 국기.svg
제5대
에이버리 브런디지
파일:미국 국기.svg
제6대
마이클 모리스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제7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파일:스페인 국기.svg
제8대
자크 로게
파일:벨기에 국기.svg
제9·10대
토마스 바흐
파일:독일 국기.svg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콜뤼슈
6위7위8위9위10위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16위17위18위19위20위
장 가방
21위22위23위24위25위
26위27위28위29위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32위33위34위35위
볼테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41위42위43위44위45위
미셸 사르두
46위47위48위49위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52위53위54위55위
다비드 두이예
장 자크 골드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달리다
레옹 지트론
니콜라스 윌로
61위62위63위64위65위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66위67위68위69위70위
71위72위73위74위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77위78위79위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82위83위84위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87위88위89위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91위92위93위94위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97위98위99위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제2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쿠베르탱 남작
Pierre de Coubertin
파일:external/www.sportsfeatures.com/img1_51593.jpg
<colbgcolor=#fff><colcolor=#000> 본명 피에르 드프레디, 쿠베르탱 남작[1]
Pierre de Frédy, Baron de Coubertin
출생 1863년 1월 1일
프랑스 제국 파리
사망 1937년 9월 2일 (향년 74세)
스위스 제네바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교육자, 체육 행정가

1. 개요2. 생애3. 비판4. 기타

[clearfix]

1. 개요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회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닌 얼마나 잘 싸우는 것이냐다."
“L'important dans la vie, ce n'est point le triomphe, mais le combat. L'essentiel n'est pas d'avoir vaincu, mais de s'être bien battu.”[2]
"모든 스포츠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Tous les sports pour tous les hommes.”
[navertv(42954960)]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6부 - 올림픽 ·격동의 제전中[3][4][5]
프랑스의 前 교육자이자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그리스인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Δημήτριος Βικέλας, 1835–1908)와 함께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를 설립했으며 제2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올림피아 제전 연구 및 올림픽 부활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체육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다.

2. 생애

1863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샤를 루이 드프레디 쿠베르탱 남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샤를은 화가였는데 병인박해로 한반도에서 순교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사제 4명을 추모하기 위해 이들의 출정을 그린 1868년의 작품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이 대표작이다.
파일:etrange.jpg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 왼쪽부터 성(聖) 위앵 민 루카 신부(1836-1886),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1839-1866),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1840-1866),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1838-1866).[6] 뒤돌아보는 어린아이가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다.
쿠베르탱은 노르망디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프랑스가 과거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에 비해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된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실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전인 1815년, 나폴레옹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의 '역사적 역할'은 역사의 뒤쪽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은 1871년에 파리 코뮌이 피바다 속에서 파괴된 것으로 사실상 끝났고 이들은 더 이상 혁명 세력이 되지 못한 채 시민 사회로 정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숙청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국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쿠베르탱은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에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열렬한 애국주의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청년이 된 쿠베르탱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사관학교를 중퇴한 후 교육학을 전공했다.

교육학을 연구하면서 쿠베르탱은 프랑스 몰락의 원인을 군인들의 체력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는 그 당시 발굴했던 고대 올림피아 유적지의 연구와 맞물려 그가 고대 스포츠를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7]

이외에도 쿠베르탱은 스파르타의 교육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는데 스파르타가 고대 그리스의 맹주로 떠오르면서 이웃 국가들과 맺은 동맹이 고대 올림픽의 안전장치로 작용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쿠베르탱은 후에 <프랑스 스포츠 연맹>을 조직하여 학교 체육의 활성화 및 프랑스 전국체육대회의 성격을 띤 경기대회를 추진했으며, 이곳에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스포츠 철학을 구성하게 된다.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국제주의의 영향을 받은 쿠베르탱은 편협한 민족주의 사상에서 한층 진보하여 스포츠를 통한 세계 청년들의 화합이라는 사상 아래 근대 올림픽의 부활을 꿈꾸게 된다.[8]

그러나 그의 포부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프로젝트에 대한 세간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894년 6월 16일부터 23일까지 파리 소르본대학교에서 <올림픽 경기의 부활을 위한 의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올림픽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이 회의에는 쿠베르탱의 작업을 국제적으로 지원하던 미국영국의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쿠베르탱은 자신의 설득과 지지자들의 성원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13명의 IOC 위원들이 선정됐고 초대 위원장으로는 쿠베르탱의 추천에 따라 그리스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가 선정되었고, 자신은 사무총장이 되었다.

물론 쿠베르탱의 시도 전에도 근대올림픽을 부활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17세기 초 영국에서 있었던 코츠월드 대회의 주최자인 로버트 도버는 이 대회를 올림픽이라고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가 1838년에 올림픽 경기의 부활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스웨덴, 프랑스에서도 올림픽의 이름을 걸고 개최하는 스포츠 대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회들은 지역적인 결속을 위한 대회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마디로 근대 올림픽은 쿠베르탱이라는 어느 선각자가 갑툭튀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고대 문명에 대한 향수라는 그 시대정신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올림픽 부활의 시도 속에서 쿠베르탱의 근대 올림픽만이 성공한 이유는, 시대를 읽을 줄 아는 탁월한 안목 때문이었다. 지역적 특색과 국내 선전용 행사라는 한계가 분명했던 다른 대회들과는 달리, 쿠베르탱의 대회는 세계화를 표방하는 대회이자 그의 출신 배경을 뛰어넘는 자유주의적 사고, 영국과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배운 '체육'과 체계적인 '스포츠'의 철학에 기초하여 탄생된 세계화된 대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일찍이 어느 국가나 다른 인물에 의해서 시도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근대 올림픽을 세계의 제전으로 발전시킨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3. 비판

올림픽 정신을 강조하는 것과는 다르게 성차별적인 인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여, 초기에는 여성의 올림픽 출전을 거부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쿠베르탱의 이와 같은 이중성을 다룬 내용을 방송했었다. 여성은 시상식에서 남성 메달리스트에게 메달이나 주면 된다느니 여자가 땀 흘리며 달리는 것처럼 꼴보기 싫은 건 없다는 발언까지 했을 정도다. 이에 대한 근거로 고대 올림픽에 여성의 참가가 없었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거듭된 비판에 결국 제2회 1900 파리 올림픽부터 여성들도 올림픽에 자유롭게 참석하게 되었다.

사실 쿠베르탱이 반대한 것은 여성의 육상 경기 출전이었다. 하지만 여자 육상 선수들이 1922년1926년에 자기들끼리 경기(Women's World Games)를 치러 여자도 고난도의 육상 경기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자 결국 쿠베르탱도 굴복하여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 여성의 육상 경기가 도입되었다.[9]

그리고 독일의 올림픽 출전을 싫어하여 초대 올림픽 대회에 독일을 초청하지 않는 행적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스포츠 진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프랑스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였고, 때문에 독일에 반감을 가졌던 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올림픽은 독일에서 열렸다.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의 흑역사인 인류학의 날과 연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자신은 이를 부인하고 조직위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4. 기타

  • 1964 도쿄 올림픽부터 성적과 관련 없이 스포츠맨십을 구현한 인물에게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 이 사람이 고안한 종목이 바로 근대 5종이다. 해당 종목은 비인기 종목이며 승마 부분에서 형평성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10], 창시자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유지하고 있다.
  • 1976년 소련의 천문학자 니콜라이 체르니흐(Николай Черных)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 2190에 쿠베르탱(Куберте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 박명수무한도전 오호츠크 해 특집에서 애틀랜타에 관한 아무말 대잔치랩에다가 갑자기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이라는 가사를 넣었다.올림픽...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쿠베르탱 탱 탱 탱
  • 위의 성차별적인 선입견을 가졌던것과는 별개로 인종문제에 대해서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서 1920년대에 아프리카인들의 지역대회가 필요하다고 여겨서 아프리칸 게임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구상안은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식민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쿠베르탱 살아 생전에는 실현되지는 않았지만[11] 아프리카 국가들이 잇따라 독립 한 후인 1965년부터 콩고 공화국 브라자빌에서 아프리칸 게임이 개최되면서 현실화되었다. 다만 제국주의 시대를 살아간 인물인 만큼, 스포츠를 원주민들을 훈련시키는데 유용하다는 류의 글도 기고하는 등 백인우월주의적인 선입견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바는 있으며,[12] 그래서 현대 프랑스에서는 언급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이 어록 중 앞 문장은 1908 런던 올림픽 당시 미국 성공회 펜실베이니아 주교였던 에델버트 댈벗(Ethelbert Talbot, 1848-1928)의 설교를 인용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항목 참조.[3] 2020년 6월 20일 방송[4] 쿠베르탱과 근대 올림픽의 탄생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5]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평화의 제전 올림픽의 격동을 시간 순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6] 그림 속 4명의 신부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한국 103위 순교성인)[7] 이 단순한 결론은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고 실제로도 고대 올림픽의 스포츠는 군사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다. 창던지기, 전차경주, 레슬링 등을 보면 실제 전투를 염두에 두고 신체 단련을 위해 창설한 종목이다.[8] 그러나 국제주의라는 이상 하에도 불구하고 각 민족들의 선전용으로 올림픽이 활용된 면이 강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9] Women's World Games은 1934년 4회 대회까지 열린다.[10] '적군의 말을 빼앗아 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어' 말을 기수가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추첨한다. 그렇다보니 숙련도와 상관없이 운에 의해 승부가 갈리는 면이 매우 컸다. 이에 더해 동물학대 논란(말이 안달리면 억지로 달리게 하기 위해 선수들의 채찍질 등이 가해지는 경우가 있었다)까지 계속되어 결국 2024 파리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근대 5종에서 승마 종목은 퇴출되고 이후부턴 장애물 경기가 추가된다.[11] 1925년 알제리, 1928년 이집트에서 대회를 개최할 계획이 있었지만,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계기를 마련할것을 우려한 서방열강의 압력으로 결국 취소되었다.[12] 사실 이 당시 아예 유색인종을 분리시키는 미국, 호주의 인종주의와 유색인종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프랑스, 영국의 인종주의는 그 결이 다르기는 했다. 물론 유색인종 입장에서 대놓고 사람취급 못받느냐 하층민 취급받느냐의 차이였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