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수여하는 상. 줄여서 쿠베르탱 메달이라고도 부른다. 명칭은 당연히 근대올림픽 창시자로 불리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의 이름에서 따왔다.2. 수여 기준
스포츠맨십을 구현한 인물에게 수여한다.물론 성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수상자 명단을 보면 나름 성적을 낸 선수들이 많긴 하지만... 이 상을 받을 정도면 평범 이상의 정신력이나 인품을 갖췄다는 얘기이고, 그런 선수라면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낼 가능성이 높다. 또 선수는 아니지만 스포츠에 또는 올림픽에 뚜렷한 공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되는 경우도 있다.
스포츠 정신을 세계무대에서 인정받았다는 증표이다보니 어찌보면 금메달보다 더 큰 영예다. 메달은 올림픽 한 번에도 수두룩하게 배출되지만, 이 상은 1964년 처음 제정된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수상한 사람이 25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올림픽 관련 메달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크고 의미가 남다른 메달. 수상할 경우 스포츠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정도이며, 명예 그 이상이다.
3. 수상자
- 루츠 롱(Luz Long, 독일, 육상)
1936 베를린 올림픽 멀리뛰기 출전. 라이벌인 미국의 제시 오언스가 예선에서 잇따라 구름판을 넘어서 도움닫기를 하여 실격판정을 받으며 탈락할 위기에 처했다. 그때 이미 결선 진출을 확정지은 상태였던 롱은 오언스에게 다가가 구름판과 간격을 넉넉히 남겨두고 뛰어라. 네 실력이라면 그렇게 해도 예선통과에 충분한 기록이 나올 것이다.라고 조언한다. 마지막 한 번의 기회에서 오언스는 롱의 조언을 그대로 따라서 결선에 진출하고 금메달까지 획득한다. 이 때 은메달리스트가 바로 롱이었는데, 만약 롱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금메달은 롱의 차지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롱은 오언스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가장 먼저 악수를 건네며 축하해주었고, 시상대에서도 밝은 표정으로 은메달을 받았다.그걸 지켜보던 이 분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다 카더라[1] 오언스와 롱그리고 동메달 수상자인 일본의 타지마 나오토[2]이 시상식과 포토 타임을 마치고 라커 룸으로 들어간 후, 롱은 오언스의 4관왕 달성을 축하하고 오히려 오언스가 "그러다 큰일난다!"고 걱정해줬다고 한다. 오언스는 1970년 출간한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술회한다.히틀러의 면전에서 나와 같은 흑인과 친구가 된 롱의 용기는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제시 오언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사상 최초의 육상 4관왕[3]으로 육상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고[4] 루츠 롱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받고 함부르크에서 수습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오웬스와 롱의 편지 교류가 끊어졌고, 롱은 독일군으로 징집되었다가 1943년 7월 10일 시칠리아 전선에서 전사한다.[5] 1951년 유럽의 전후 복구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자, 제시 오웬스는 루츠 롱의 묘소를 방문하고, 그의 장남 카이 롱(Kai Long)을 만나 루츠 롱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롱 가와의 인연을 다시 이어나갔다. 생전에 제시 오언스는 카이 롱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지금까지도 오언스 가와 롱 가 양가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파시즘과 인종차별에 맞서는 이 행동으로, 루츠 롱은 올림픽 이후 28년, 그의 사후 21년 뒤인 1964년에 최초의 쿠베르탱 메달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역대 올림픽 사건 중에서도 올림픽 정신과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사례로 가장 유명하다. 이 일화는 한국의 모 출판사 영어교과서에도 수록되었으며, 2016년 레이스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 에우제니오 몬티(Eugenio Monti, 이탈리아, 봅슬레이)
1964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2인승에 출전. 당시 영국 조의 썰매가 고장이 나자, 먼저 레이스를 마친 몬티가 자기 썰매의 부품을 써도 된다고 흔쾌히 제안한다. 몬티의 도움을 받은 영국 조는 최고의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하고 몬티의 조는 동메달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한 논란에 대해 영국 팀은 나 덕분에 우승한 것이 아니라, 가장 빨리 달렸기 때문에 우승했을 뿐이다.라며 논란을 일축하기도 했다. 1964년 루츠 롱과 함께 수상. # ##
- 칼 하인츠 클리(Karl Heinz Klee, 오스트리아, 스키)
스키 선수로 활동하다 은퇴 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 스키 선수들의 법적 지위 향상과 도핑 규정 정립에 힘썼다. 1977년 수상.
- 로렌스 르미유(Lawrence Lemieux, 캐나다, 요트)
19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요트 선수. 2위로 순조롭게 달리던 도중, 강풍으로 인해 싱가포르 팀의 요트가 전복되고 선수들이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본 그는 망설임 없이 코스를 이탈해서 그들을 구조하고, 의무보트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의무보트가 선수들을 안전히 후송하는 것을 마치고 나서야 레이스를 재개하고 22위로 골인했다. 매우 화제가 되어 이례적으로 대회 기간 도중임에도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받았다. #
- 저스틴 할리 맥도널드(Justin Harley McDonald, 오스트레일리아, 봅슬레이)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남자 4인조 봅슬레이 팀의 주장으로 참가하여 스웨덴 팀에게 11kg 분량의 밸러스트를 빌려주었다. 몬티의 사례와 비슷하게, 이걸로 스웨덴 팀은 오스트레일리아 팀보다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각각 15등과 20등으로 둘 다 메달권은 고사하고 입상[6]도 못하는 성적이었긴 하지만. 대회 직후 수상.
- 레온 스튀켈(Léon Stukelj, 유고슬라비아→슬로베니아, 체조)
1924년부터 1936년까지 금3은1동2 도합 6개의 메달을 땄다. 매우 장수한 사람으로 1999년 11월 8일, 101세가 되기 직전에 사망했고 직후인 12일에 추서. #
- 에밀 자토펙(Emil Zátopek, 체코슬로바키아, 육상)
20세기 육상계의 추앙받는 전설. 그런데, 이 메달을 선수로서가 아니라 선수 은퇴 후의 활동으로 수상받은 케이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자유화를 지지하다 숙청되어 우라늄 광산에서 강제노역까지 해야 했다. 비록 벨벳 혁명으로 복권되지만 이 때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0년 작고하고, 이 때 IOC로부터 쿠베르탱 메달을 추서받는다.
- 볼프 리베르그(Wolf Lyberg, 스웨덴)
1936 베를린 올림픽부터 시작하여 27회에 걸쳐 올림픽을 보도한 기자이자 역사학자이다. 2012년 8월 12일 작고한 뒤 추서받음. #
- 스펜서 에클스(Spencer Eccles, 미국)
선수는 아니고 경영가, 행정가이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집행위원 및 선수촌장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대회 직후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받았다.
- 타나 우마가(Tana Umaga, 뉴질랜드, 럭비)
올림픽은 아니지만, 웨일즈와의 친선 럭비경기에서 격렬한 몸싸움 도중 웨일즈 선수가 쓰러져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자 다른 선수들이 모두 공격 상황에 집중하는 와중에 홀로 쓰러진 선수에게 달려가 마우스피스가 기도를 막지 않게 조치하고 경기장 밖으로 내보내 의료진이 응급처치를 할 수 있게 했다. 쿠베르탱 메달이 아니더라도 럭비 선수로서 뉴질랜드에서 국민영웅급 인기를 가진 선수이다. 2003년 수상.
- 세실리아 타이트(Cecilia Roxana Tait Villacorta, 페루, 배구)
올림픽 출전 기록만 따지면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게 전부. 1998년에 정치에 입문하여 시장, 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재능 있는 후진 양성, 스포츠인 후원 등에 힘썼다. 2003년 수상. #
- 반데를레이 리마(Vanderlei Cordeiro de Lima, 브라질, 육상)
가장 유명한 수상자이자 리마의 수상으로 인해 이 메달의 존재가 더욱 크게 알려졌다.
2004 아테네 올림픽의 그 마라톤 선수 맞다. 레이스 후반까지 선두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난입한 몰지각한 관중과 부딪히는 바람에 이후 페이스를 잃어버리며 두 선수에게 추월을 허용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실성하고도 남을 정도로 화날 상황이었겠지만, 리마는 환하게 웃으며 경기장에 진입했고,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에는 비행기를 흉내내는 익살맞은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가장 유명한 쿠베르탱 메달 수상자일 듯. 대회 마지막 날인 2004년 8월 29일 수상. #[7] 이후 모국에서 개최된 2016년 리우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를 점화하는 영예를 갖기도 했으며, 이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강한 메시지를 가진 개막식 중 하나가 되었다.
- 엘레나 노비코바-벨로바(Elena Novikova-Belova, 벨라루스, 펜싱)
1968년부터 1980년까지 올림픽에 다수 출전하여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한 사람이다. "Outstanding services to the Olympic movement"이라는 까닭으로 2007년 5월 17일 수상.
- 샤울 라다니(Shaul Ladany, 이스라엘, 육상)
1972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의 경보 대표로 참가. 올림픽의 흑역사인 뮌헨 올림픽 참사 당시 사태를 빨리 알아채고 이스라엘 선수단 동료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데 힘써서 더 큰 참사를 막았다고 평가된다. 2007년 5월 17일 수상.
- 페타르 쿠파치 & 이반 불라야 & 파블레 코스토프(Petar Cupać, Ivan Bulaja, Pavle Kostov, 크로아티아, 요트)
2008 베이징 올림픽 요트 3인승 종목에 참가. 예선 성적은 20개 팀 중 17위로 부진했고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됐으나, 덴마크 조의 돛이 망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들은 어차피 탈락했다며 대신 쓰라고 요트를 빌려준 일로 화제가 되었다. 덴마크 팀은 이 선수들의 요트를 타고 무려 금메달까지 획득한다. 2008년 11월에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첫 공동 수상 사례이기도 하다.
- 에릭 모냉(Éric Monnin, 프랑스, 유도)
유도 선수 출신이기는 하지만 올림픽에는 출전한 적조차 없고, 선수 경력과는 관계 없이 은퇴 후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올림픽을 연구한 공로로 2013년 8월 6일 수상.#
- 리샤르 가르노(Richard Garneau, 캐나다)
50년 넘게 스포츠 보도에 종사해 온 공로를 인정. 2013년 사망하고 나서 2014년에 사후 추서. 사족으로 이 분 캐나다 훈장 최고등급(Companions of the Order of Canada; CC) 서훈자이기도 하다.
4. 기타
2012 런던 올림픽 펜싱에서 신아람의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을 때, 일각에서 쿠베르탱 메달 후보자로 추천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오심에 항의하면서도 3-4위전에 임했던 것이 이 상의 취지와 부합한다는 것이었는데, 쿠베르탱 메달의 인지도가 국내에서 워낙 낮아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2014 소치 올림픽 크로스컨트리 경기 도중 넘어져 스키가 부러진 러시아 선수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예비용 스키를 신겨 준 캐나다 코치 저스틴 워즈워스(Justin Wadsworth)가 쿠베르탱 메달 수상자로 유력시되었으나 정작 2014년 이후 수상자는 선수조차 아닌 사람들 투성이다.
2016 리우 올림픽 육상 여자 5000m 예선경기에서 2500m 지점을 통과할 때 뉴질랜드의 니키 햄블린(Nikky Hamblin)이 넘어졌다. 뒤 따르던 미국의 애비 디아고스티노(Abbey D'Agostino)도 햄블린의 발에 걸려 트랙 위를 뒹굴렀다. 머리를 감싸쥐고 좌절하던 햄블린에게 디아고스티노가 다가가 위로의 말과 함께 일으켜 세워줬다. 햄블린은 다시 일어나 달렸지만, 이번엔 넘어지면서 십자인대가 파열된 디아고스티노가 절뚝이며 넘어졌다. 먼저 도움을 받았던 햄블린이 이번엔 디아고스티노를 일으켜 세워줬다. 햄블린은 16명중 15위, 디아고스티노는 십자인대 파열에도 불구하고 완주하며 16위로 예선을 마쳤다. 먼저 들어온 햄블린은 뒤늦게 들어온 디아고스티노와 감격적인 포옹으로 전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줬다. 대회 조직위는 넘어짐에 고의가 없었음을 이유로 두 선수 모두에게 결선진출권을 부여했지만 햄블린은 결선 17위에 그쳤고 디아고스티노는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기권하였다. 대회 종료 후 이들이 이 메달을 수상했다는 오보가 있었으나 이들이 수상한 것은 쿠베르탱 메달이 아니라 CIFP(국제 페어플레이 위원회)가 주는 페어플레이상이다.###### 이들 외에 노르웨이 핸드볼 대표팀도 1월의 유럽 대회 중 일어난 해프닝에 대한 대인배스러운 대응으로 이 상을 받았다(결과적으로 노르웨이는 졌고, 상대 팀인 독일이 올림픽 출전권을 얻었다).
[1] 심기와는 별개로, 히틀러가 제시 오웬스를 비롯한 흑인 선수들에게 악수하고 축하해주는 행동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미담만큼이나 유명한 루머라서 오연스 생전에도 부정하는 발언 및 저술을 여러 차례 남겼다. 정작 올림픽 육상 4관왕인 제시 오언스를 무시한건 다름아닌 그의 조국이자 대표팀으로 출전한 미국이었다(...).[2] 3단 뛰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일본 육상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육상 선수다.[3] 1980년 오언스가 폐암으로 죽을 때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고, 1984 LA 올림픽에서 칼 루이스가 타이기록을 세웠다.[4] 아돌프 히틀러의 악수 거부 사건은 루머였던 반면에 정작 자국인 미국의 백악관에 초청도 못 받은건 유명한 사실이다. 당시 재선 선거전을 치르던 루즈벨트가 남부의 표를 의식해서 오언스를 초청하지 않았다고. 뉴욕의 호텔에서 올림픽 승전 파티에 참석할 때도 제시 오언스는 백인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 해 화물 엘리베이터를 사용했다고 한다.[5] 정확히는 싸우다가 치명상을 입었고, 4일 후 사망.[6] 8등까지.[7] 이 사건 때문에 브라질 육상 연맹에서 공동 금메달을 요구하며 강한 항의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리마 본인이 직접 "나는 메달을 두고 싸우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밝히며 사태를 직접 마무리짓기도 했으며, 경기 도중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건이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최종 1위를 했을지는 알 수 없다."라고 밝히며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