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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TOP 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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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뤼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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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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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사르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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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 타지프 | 에리크 타바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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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두이예 | 장 자크 골드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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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 | 레옹 지트론 | 니콜라스 윌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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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 프랑시스 카브렐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르노 | 베르나르 쿠슈네르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미셸 세로 | 미셸 드러커 | 라이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레이먼드 풀리도르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질베르 베코 | 조제 보베 | 장 페라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뤽 베송 | 티노 로시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세르지 레기아니 | 프랑수아즈 돌토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676767><colcolor=#fff> 아베 피에르 Abbé Pierre | |
본명 | 앙리 마리 조제프 그루에 Henri Marie Joseph Grouès |
출생 | 1912년 8월 5일 |
프랑스 제3공화국 리옹 | |
사망 | 2007년 1월 22일 (향년 94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사제, 정치인, 사회운동가 |
부제 수품 | 1937년 12월 18일 |
사제 수품 | 1938년 8월 24일 |
부모 | 아버지 루이 테베네 그루에, 어머니 |
형제자매 | 7명 |
학력 | 성 요셉 기숙학교[1] 몽플레지르 가톨릭 고등학교 (졸업) |
종교 | 가톨릭 |
병역 | 프랑스 육군 기차연대 부사관 (제2차 세계 대전) |
경력 |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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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 잠시 하원의원[2]을 지냈던 정치인이자 빈민구제운동에 헌신했던 성직자로,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은 인물로 불린다. 대체로 '피에르 신부'로도 불린다. 하지만 사후 연쇄 성범죄가 폭로되어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수직으로 하락할 상황이 되었다.2. 생애
1912년 8월 5일 리옹에서 견직물 상인의 8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앙리 그루에였다. 1930년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필립"이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다. 1938년 8월 24일 소속을 바꾸어 그르노블 교구 소속의 프란치스코회 재속사제로 사제품을 받고, 그르노블 대성당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아베 피에르[3]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키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1945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원 생활 중에는 월급 전액을 빈민활동에 썼고, 1954년 노숙자들의 숙소를 짓기 위해 엠마우스 재단을 세워 종교를 초월한 빈민,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구제하는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88년에는 엠마우스 운동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딴 '아베 피에르 재단'을 설립하였다.
3. 평가
그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부각되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지명도가 거의 없지만[4], 프랑스인을 상대로 '위대한 프랑스인', '가장 존경받는 프랑스인' 설문조사를 할 때 샤를 드 골과 함께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정치적으로는 전후에 샤를 드 골이나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과 함께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핵, 반민족주의[5] 운동을 하기도 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대하고 해방신학 계열의 사제들과도 교류하며 말년에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등 중도좌파적 성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적극적인 정치활동 및 사회활동이 껄끄러웠던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높으신 분들이나 교황청으로부터 "오만함을 주의하라"는 지적을 종종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혁신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가톨릭교회의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우리가 교회다 조직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4. 사후 성범죄 폭로
아베 피에르의 사망으로부터 무려 17년 후인 2024년 7월 17일, 아베 피에르가 1970년대 말부터 2005년 사이 최소 7명의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5명의 피해 의심 사례가 더 있었으나 묵비권을 행사하여 최종 피해자 명단에서는 제외됐다. 피해자들은 아베 피에르 재단과 엠마우스 인터내셔널, 엠마우스 프랑스 등 세 구제 기관의 직원이나 자원봉사자, 지인이었으며, 2023년 한 피해자가 엠마우스 인터내셔널에 성범죄 사건을 신고한 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2024년 9월 6일 기준 확인된 성범죄 피해자가 17명으로 더 늘어났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자신이 구제해온 약자들에게도 성범죄를 저질렀고, 1951년[6]부터 성범죄가 시작된 것을 넘어 미국, 모로코, 스위스, 캐나다[7]에서도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심지어는 15세 소녀와 8~9세 소녀에게까지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를 넘어 자신과 가까운 부부의 딸, 그것도 16~17세 정도밖에 안 된 딸을 성폭행했는데, 1980년을 시작으로 그녀가 성인이 된 후인 1982년과 1988년/1989년에도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의 성범죄는 성희롱, 성추행뿐만 아니라 강간까지 있었다. #1 #2
때문에 프랑스 사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8], 아베 피에르 재단은 이름을 바꾸고 로고에서도 그의 모습을 지웠으며, 엠마우스가 만든 아베 피에르 기념관은 영구 폐쇄되었고, 아베 피에르의 이름이 붙은 공공장소의 이름이 변경되거나 아베 피에르의 조각상들도 철거되었다.[9] 그리고 아베 피에르의 성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독립 위원회가 구성될 예정이다. # 심지어 엠마우스와 가톨릭 수도자들이 아베 피에르의 성범죄를 인지했다는 증거도 나왔다.[10] #
아베 피에르는 사망 1년 전인 2006년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자신을 진료하던 간호사를 성추행했지만 간호사는 그가 노망이 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믿어 오랫동안 이를 숨겨야 했다. #
놀랍게도 아베 피에르의 성적 문제는 그 이전에도 암암리에 알려진 편이었다. 2009년 아베 피에르 전기를 쓴 프랑스의 역사학자 Axelle Brodiez-Dolino는 아베 피에르는 평생 여성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성적 강박은 1950년대~1960년대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1 #2
5. 어록
'세상에 있는 돈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Avec tout l'argent du monde, on ne fait pas des hommes, mais avec des hommes et qui aiment, on fait tout)
'굶주린 자는 빵을 갖게 하고, 빵을 가진 자는 정의와 사랑에 굶주리게 하라(Que ceux qui ont faim aient du pain ! Que ceux qui ont du pain aient faim de justice et d'amour !)'
[1] 현재 생마르크 고등학교[2] 1945 ~ 1951년 재임. 뫼르트에모젤 지역구.[3] 우리말로 번역하면 '베드로 신부님'이라는 뜻.[4] 그나마 대중서적이라 할만 한 것 중에서 홍세화의 저서에서 관용과 인류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잠시 언급되던 삐에르 신부,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에서 레지스탕스 및 빈민구제 이력을 간단히 소개한 정도 뿐이다.[5] 물론 자유주의 등도 반민족주의를 지지하므로 반민족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실만으로 좌파라고 보기는 어렵긴 하나, 이 사람은 해방신학 계열 사제와 교류하거나, 프랑스 사회당을 지지하는 등, 진보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감히 드러낸 바 있다.[6] 국회의원 시절 그의 여성 보조관이 그로부터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을 겪었으며, 또 다른 여성 보좌관은 여성 직원들을 '공격'하고 그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그의 행동이 ‘성범죄자의 행동과도 같았다’고 한다.[7] 1963년 그가 몬트리올에서 저지른 성범죄가 드러나자 지역 경찰과 교회 당국이 아베 피에르의 캐나다 입국을 금지한다는 합의 하에 아베 피에르의 범죄를 덮어줬다.[8] 특히 아베 피에르가 오랫동안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Top 3 안에 들 정도로 엄청난 존경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유사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지미 새빌은 2002년 BBC가 조사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에 오르지도 못했고, 새빌의 실체는 타블로이드에서나마 거론되기도 했으며(다만 영국 타블로이드의 신뢰성 문제 때문에 당시에는 흔한 찌라시로 취급받았다), 퍼프 대디는 본격적인 폭로 이전부터 행실에 대한 악소문이 많았다.[9] 실제로 리옹에 있던 아베 피에르의 프레스코화에 빨간 선을 그은 후 검은색으로 '강간범'이라고 쓴 사람도 있었다. #[10] 사실 아베 피에르가 비교적 최근까지 프랑스 내에서 누려왔던 어마어마한 명성을 생각하면 피에르의 성범죄 피해자들이 사후 거의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성범죄 피해를 말할 수 있던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