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
홍세화 洪世和 | Hong Se-hwa |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출생 | 1947년 12월 10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 |
사망 | 2024년 4월 18일 (향년 76세)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 |
본관 | 남양 홍씨 (南陽 洪氏) |
학력 | 서울창경초등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 66 / 중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외교학 69 / 학사) |
가족 | 배우자 박일선[1] 장남 홍용빈 장녀 홍수현 |
최종 당적 | | [이중당적] |
경력 | 장발장 은행 은행장 노동당 후원회장(이백윤 후원회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편집국장 대통령 예비후보자 이백윤 후원회장 |
외부 링크 |
[clearfix]
1. 개요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언론인, 평론가, 작가.김규항, 박노자, 오세철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정당인으로서 줄곧 진보좌파 군소정당 소속으로 활동해왔지만 현 세대 거의 모든 진보정당의 효시인 민주노동당이 2000년 창당할 때는 참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내걸고 활동하는 정당을 원한다고 했기 때문. 이후 진보신당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사망 전까지 진보신당의 후신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당 소속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2. 생애
2.1. 초기
1947년 12월 1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의 여파로 부모님은 이혼하고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서울창경초등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지만 1967년 10월 자퇴했다.대학 1학년 시절이던 1966년 9월 추석 때 겪은 일을 ‘사유체계의 바탕을 무너뜨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고 술회했다.[3][4] 친척에게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아산 황골에서 국군에 의해 일어난 학살 당시 3살이었던 본인이 어머니, 동생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양 홍씨 문중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몰살당했으나 홍세화 가족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5] 홍세화의 아버지는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다가 도피한 상황이라 사건 당시엔 없었고 이 사건의 여파로 부모님이 이혼한 데다 얼마 후 동생 홍민화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6] # #
이후 방황과 낙제를 거듭하다가 대학을 중퇴했고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2.2. 운동권 활동
이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문리과대학 연극반 활동을 하며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70년 이후 본격적으로 운동권에 투신해 교련반대 투쟁에 앞장섰고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 1974년에는 군 복무 중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국군보안사령부에서 고문을 당했다.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과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을 접하며 그의 저항정신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 1977년 대학 졸업 후 한국민주투쟁위원회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다. 한편 생업전선에도 뛰어들어 무역회사 '대봉산업'의 뒤셀도르프, 파리 지사에서 근무했다.
2.3. 망명
파리 지사에서 근무하던 1979년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프랑스에서 20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 이 시절의 이야기는 자서전 겸 파리 안내서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상세하게 나오며, 1부 마무리에 2부의 부제인 "갈 수 없는 나라 꼬레"가 나온다.[7]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보니 프랑스 이민국의 망명 담당자가 했던 질문이란 게 "당신은 그저 당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한 것뿐인데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8]라고 묻자, 홍세화가 "한국에서는 극우에겐 극우가 아닌 자는 모두 좌익이다"라며 열변을 토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 열변이 받아들여져서 망명신청에는 성공했지만 도리어 한국에는 돌아갈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9]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고 해외여행 자유화도 막 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유럽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는 몇 안 되는 언론인으로 꼽혔다.
1995년 프랑스에서의 택시기사 생활 경험과 프랑스 사회에 대한 소개, 본인의 성장기와 한국 사회의 과제를 담은 책 [10]《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출간했고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 일시적으로 귀국하면서 출간한 문화비평 에세이《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역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4. 귀국 이후 한국에서의 활동
2002년 1월 영구귀국했고[11] 2월 한겨레에 입사해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한겨레 기획위원으로 있을 때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담는 지면 ‘왜냐면’을 만들었다.
2002년
3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2월 5일, 민주노동당 측 패널로 MBC 100분토론에 출연했다가 한겨레에서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언론인들의 중립성과 개개인의 양심과 관련한 여러 논의가 일었다. 당시 기사
2008년
2월 5일,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탈당 사유로 '오늘의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기사 탈당의 변
2009년
한겨레가 발행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을 지냈다.
2011년
11월 25일, 진보신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했지만 당 득표율이 3%를 넘지 못해 낙선했다.
2012년
10월 27일, 진보신당 상임대표직에서 사퇴했다. 기사
2013년
'말과 활' 발행인을 지냈다.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을 설립하고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2018년
김길오 등이 연루된 '노동당 언더조직 폭로 사건'의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
2020년
2월 14일 더불어민주당의 임미리 교수 고발 사건에 대해 "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 배타적이며 비관용적"이라며 비판했다. #
2021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를 "내용은 없고 수사(꾸미고 다음어진 말)만 있는 정부", "남은 임기 동안에도 임금님이 아닌 대통령으로 돌아오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2022년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현재는 스페인 포데모스 식의 선거 연합이 불가능한 구조다.[12] 칠레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도, 5년 전 한국의 촛불보다 좀 더 강한 저항을 통해 제헌의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개헌 정도로는 안 된다. 지금의 구조는 과도한 기득권 중심의 금권 정치다. 정당법이나 선거법에 의해 소수 정당이 약진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있다"라는 발언으로 기존 선거제를 비판하였다.
또한 이백윤 후보와 사표론에 대해 '이백윤 후보가 얻는 표만큼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이 커진다. 민주당이 다급해지면서 결선투표제 이야기를 꺼냈다.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절대 사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1차 투표는 사표 걱정 없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기 때문에, 그것의 분포가 사회 구성원의 정치지형을 그대로 드러낸다. 결선투표제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 이백윤 후보의 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이만큼 지지를 받았구나’라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이번 사회주의 대선 후보의 출마는 사회주의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
11월 3일 녹색당에 입당하여 이중당적을 가졌다.#
2023년
1월 12일을 마지막으로 한겨레 칼럼 연재를 중단했다.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당시 한겨레 간부과 김만배 간의 뇌물 사건이 보도되며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그만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글 말미에 이와 무관하다고 밝혔다.[13]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즈음에 전립선암이 발견되었고, 이 글이 사망 전까지 마지막 글이었기 때문에 건강 문제로 인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2.5. 사망
‘똘레랑스’ 일깨운 홍세화 별세… 마지막 당부 ‘성장에서 성숙으로’2023년 2월 전립선암이 발견되었고 12월경 암이 몸 전체로 퍼지면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당시 노동당에서 투병 후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2024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 지역구 선거는 무의미하다 생각해 투표하지 않았고, 비례대표 선거 정당투표에서 노동당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2024년 4월 18일, 입원해 있던 녹색병원에서 오전 11시 55분경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임종의 순간에 옆자리를 지켰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졌다. 시신은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한 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 4일 전인 4월 14일 한겨레신문과 진행한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4월 20일자 지면으로 공개되었다. "기사를 (내 죽음이) 임박했을 때, 최대한 늦게 내달라."고 기자에게 부탁했지만 인터뷰 다음날부터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기사가 나가기 전에 먼저 떠나게 되었다.
척탄병으로 살고 싶다는 꿈은 이루셨는지 모르지만 수염을 풀풀 날리진 못하셨어요.
그가 모처럼 웃었다. 링거선 치렁치렁한 팔을 들어 밋밋한 턱을 손으로 쓸었다. 암 진단 뒤 그는 항암 대신 남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암세포의 활동을 막아왔다. “중성화된 덕에 수염이 없어지고 피부도 매끈하게 예뻐졌다”며 그는 암세포에 뼈까지 잠식된 지난 연말에 농담하듯 말했다. # #
그가 모처럼 웃었다. 링거선 치렁치렁한 팔을 들어 밋밋한 턱을 손으로 쓸었다. 암 진단 뒤 그는 항암 대신 남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암세포의 활동을 막아왔다. “중성화된 덕에 수염이 없어지고 피부도 매끈하게 예뻐졌다”며 그는 암세포에 뼈까지 잠식된 지난 연말에 농담하듯 말했다. # #
3. 논란
3.1. 대통령 기자회견 횟수 오류
2020년 11월 19일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 '기자협회보' 자료를 인용하며 역대 대통령의 직접 브리핑과 기자간담회를 합친 횟수는 김대중 150회, 노무현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 문재인 6회라는 수치를 제시하며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비판했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권과 정부 비판 세력에서는 이 수치를 인용하며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14]그러나 홍세화가 출처로 제시한 '기자협회보'를 발간하는 기자협회에서는 대통령 기자회견 횟수를 조사한 적은 없다. 어떤 경로로 우리를 출처로 제시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더군다나 기자회견 횟수를 어떤 기준으로 집계하더라도 홍세화가 제시했단 수치는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홍세화는 잘못 알려진 수치를 기반으로 하여 칼럼을 썼고, 이것이 팩트체크도 되지 않은 채 수도 없이 인용되어 왔던 것이다.[15] 오류를 범한 홍세화는 물론 국민의힘 역시 비판을 받았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0000>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비례대표 | [[진보신당|]] | 242,995 (1.13%) | 낙선 (2번) |
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민주노동당|]] | 2002 - 2008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8 | 탈당[16] |
[[진보신당|]] | 2008 - 2012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2 | 정당 해산 |
[[진보신당연대회의|]] | 2012 - 2013 | 창당 |
| 2013 - 2022 | 당명 변경 |
| 2022 - 2024 | 녹색당 입당[17] 사망 |
6. 여담
- 2003년 2월 18일,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지나오며 느낀 대학생들에 대한 비판을 담은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개인 아카이브)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입시 위주 교육과 취업의 관문으로 전락한 대학에 들어와서 놀기만 하지 말고 고전이나 현대사를 직접 찾아보라' 정도가 된다. 명색이 대학생임에도 실제로 알고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이 적다는 것을 꼬집은 계몽적인 글이라는 호평도 있지만, 엄청나게 달라진 세상에서 가혹해진 취업경쟁에 말라가는 청년층의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학생운동을 부추기는 20대 개새끼론의 시초라는 혹평도 있다.
- 2000년대 초중반, "당적"을 갖고 소신을 얘기하는 언론인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몇몇 대학교에서 초청 강연을 하기도 했다.
- 당시 홍세화가 자주 언급하던 내용은 한국 사회의 부의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SUV 렉스턴의 마케팅 문구가 처음부터 대놓고 '대한민국 1%가 타는 차'라 하는 것(유튜브 광고영상)을 예로 들며, 한국은 사회적으로는 참살이(well-being)가 화두로 떠올랐지만, 실제론 점점 부(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모습과 여기에서 촉발될 악영향을 우려하였다.[18]
- 2018년 이후 가발을 쓰는 모양이다.
- 여성 듀오 무키무키만만수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곡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가사는 책의 내용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데, 이는 이 노래를 작사한 멤버 무키가 그저 앨범에 들어갈 수록곡을 고민하면서 방 청소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보고 그냥 쓴 곡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사회주의 성향이 확고한 인물이지만 자유주의에도 우호적인 편이다. 한국 보수 진영에서 사용하는 자유는 강자만의 자유이며, 보편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좌파 진영에서 자유를 적극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우파 진영에게 이 용어를 전유당했다며 조직이기주의, 선후배 간 위계질서, 여성에 대한 폭력, 굴종적인 노사관계, 경쟁지상주의 교육 등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해 봉건적 잔재의 억압에 맞섰던 자유주의의 진보적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는 논조이다. #
[1] 박만선이라는 보도도 있다.[이중당적] 노동당에는 실질적으로 2008년 진보신당 창당 때부터 소속되어 있었고, 녹색당에는 노동당원인 상태에서 2022년에 입당하였다. 다만 대한민국 현행법상 이중당적은 불법이므로 법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3] 가족이 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자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 자신의 사고방식은 '반공교육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밝혔다.[4]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계속 몰랐다면, 그냥 얼렁뚱땅 대학 졸업하고 세상에 무관심한 채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5] 홍세화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친척은 인민군에 강제로 징집당한 상황이었는데 그래서였는지 이 사건으로 부인과 자녀들을 포함한 일가족 14명이 모두 살해당했다.[6] '세화'와 '민화'는 아나키스트였던 아버지가 각각 '세계평화'와 '민족평화'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역사의 질곡에 휩쓸려 이름과 정반대의 운명을 맞은 셈.[7] 망명증명서에 딸려오는 여행문서에서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라는 문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8] 홍세화는 망명신청자로서 인정받기 위해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탄압받았다는 증거로 한국 신문을 첨부했는데, '그러면 당신은 공산주의자냐'는 질문에 홍세화가 반사적으로 '아니다'라고 하자 '그러면 그냥 돌아가서 발언의 자유를 누리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되물은 것이다.[9] 남민전은 이적단체 논란이 있으나 엄연히 법원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은 사건이다. #1 #2 #3 이념 논쟁을 떠나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학생운동을 반인륜적으로 탄압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노맹 사건 등 엄연히 극좌적 지하당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까지도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남민전이 이적단체나 극좌 단체였던 사실 자체가 뒤집히는 건 아니며, 이 사건의 관계자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도상해를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는 대공분실에서 고초를 치른 장면은 상세하게 나오지만 남민전 활동에 대해서는 어설펐다거나 연극 말고는 한 게 없었다는 식으로 축소되어 있다.[10] 200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11] 아주 어려서부터 프랑스에서 살아온 그의 딸과 아들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그곳에 남았고, 아내는 한국과 프랑스를 왔다갔다한다고. 한국 국적의 홍세화가 한국에 오지 못하는 동안, 프랑스 국적의 딸은 한국학을 전공한 뒤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한다.[12] 일단 총선에서 '어느 당이 이기든지', '어느 쪽 후원자들이 더 부유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절대다수의석 정당이 출현하기 어려운 선거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수많은 이권과 옥사(獄事)까지 다룰 권한이 주어지는 정계(政界)인만큼, 이 정도 상황은 되어야, 자의 반 타의 반 협의(協議)에 나선다는 것이다.[13] 그럼에도 동시에 한겨레가 프티부르주아 언론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14] 김, 노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 수치는 박근혜 정부 당시에는 반대진영으로부터 활용되어 비판의 소재로 사용됐다.[15] YTN의 팩트와이 기사가 나온 것은 한겨레 칼럼 게재 후 2개월이 지난 후였다.[1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7] 블로그를 통해 녹색당 입당 소식을 밝혔다.#(현재 접속 불가) 다만 한국 현행법상 이중당적은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18] 참고로 홍세화가 망명 생활을 했던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홍보 문구가 성립되기 어렵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7월 혁명 그리고 2월 혁명을 거치면서 상류층, 부유층들이 거센 풍파에 휩쓸리며 "목숨까지" 잃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프랑스제 고급 브랜드를 걸친 세련된 도시인들 모습은, 마케팅 및 미디어로 만들어진 환상에 가깝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