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2:47:08

경쟁

1. 개요2. 정의
2.1. 사회학적 정의2.2. 생물학적 정의
3. 일상에서의 역할4. 효율적인 승부의 척도5. 부작용: 과열 경쟁 (경쟁만능주의)
5.1. 경쟁과 행복의 관계5.2. 경쟁의 적정 한도 논쟁
5.2.1. 대안 제시
5.3. 기회의 평등에 관한 논쟁
5.3.1. 대안 제시
6. 여러 사상가들의 입장7. 경쟁과 관련한 어록8. 관련 문서

1. 개요

/ Competition

일반적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겨루는 것'을 의미한다. 대개 경쟁은 '승리 혹은 우승을 위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 정도의 의미로 이해된다.

2. 정의

2.1. 사회학적 정의

학술적으로[1] 설명하자면[2] 프랑스어에서 경쟁(concurrence)은 '같이 달린다'는 의미이지만, 같이 달리는 것이 모두 경쟁인 것은 아니다. 달리는 방향(욕망의 방향)이 같을 때에만 경쟁이 일어난다. 달리는 방향이 다르면 아무리 같이 달리더라도 경쟁의 갈등이 일어날 소지는 적다.

경제학에서는 시장시장가격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표적이고, 기업들 간의 연구개발 경쟁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쓰일 수 있는 개념이다. 그 외에 우리가 하는 스포츠를 비롯한 게임에서부터 국가 단위의 전쟁까지 그 종류는 무수히 많다.

2.2. 생물학적 정의

생물들 사이에서는 '경쟁 배타 원리'가 작용한다. 단독적으로 배양했을 때는 생장 곡선이 일치하나, 혼합 배양했을 때는 두 종 중 하나의 종만이 번성하여 더 많은 자손을 남기고, 그렇지 못한 종은 서식지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개념인데, 사회학에 억지로 적용시켜 우생학 같은 제국주의적 사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혹은 이를 역이용해서 '경쟁에서 지면 도태된다. 그러니 경쟁을 없애야 한다' 따위의 정치적인 감성 찌르기나 동심파괴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이는 원칙 혼동의 오류에 해당한다.

3. 일상에서의 역할

경쟁은 중립적 용어며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쟁은 서로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위한 과정을 유도하며, 그 속에서 본인도 의도하지도 않았던 발전과 공공 이익을 낳기도 한다. 오히려 경쟁시키지 않으면 경각심 결여로 사기가 다운되고 다같이 하향평준화 분위기를 형성시킬 수도 있다(예: 고3 수시 원서 접수 기간).[3]

상대방과 경쟁을 하게 된다면 상대보다 더 나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여 좋은 산출물을 낼 수 있다. 특히 적대적 공생의 경우 서로간의 피터지는 경쟁 속에서 링 위의 선수들처럼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고 양측 모두 성장한다.

대표적으로 정치권에서도 "보수진보는 왜 서로 싸움질만 하는가?" 라는 등 비관적인 시선이 많지만, 이마저도 의도적 경쟁 중의 하나로써 서로를 감시하고 알력 다툼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치열한 발전을 이룩하는 것의 한 예시다. 만약에 '일당 독주 체제'가 도래하면 좌우를 막론하고 독재와 정치부패가 성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적인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다만,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온갖 부정과 편법(인맥, 학연, 지연, 혈연, 사재기, 뇌물, 갑질, 음서제, 성상납, 낙하산 인사, 승부조작(성적조작))이 동원되기도 한다. 또한 기업들 간에 지나친 경쟁으로 환경오염을 초래하거나 노동 여건이 열악해질 수 있다. 그리고 경쟁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 외에도, 제3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 간의 경쟁을 부추기기도 한다. 어부지리라든가.

4. 효율적인 승부의 척도

"아, 그런데, 자리가 하나 밖에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시험을 칠 거야. 빨리 끝내."
-조커, 영화 다크 나이트

비교적 합리적이고 신속한 방식이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의 장점과 능력을 가지고 겨루며,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남는 자가 다른 사람에 비해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의 사실상 방증이 되므로 경쟁을 의도한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이것을 위해 경쟁의 참가자 모두가 노력하게 되므로 사회가 계속 움직이는 동력원이 된다는 점. 이론적으로 경쟁 자체는 굉장히 효율적인 논리다.

5. 부작용: 과열 경쟁 (경쟁만능주의)

공정한 경쟁이 존재하지 않을 때보다 적절한 수준으로 존재할 때 더 큰 효과를 얻는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다만, 최소한의 경쟁이 사회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여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당연히 깔려있다. 이것이 역기능이 되는 것은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해지거나 (경쟁의 적정 한도), 경쟁이 불공정하게 행해지는 (기회의 평등) 2가지를 들 수 있다. 사람들이 경쟁에 너무 익숙해지니 굳이 경쟁이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당한 반칙을 저지르며 남들을 짓밟고 경쟁할 거리를 만들어내는 바람에, 경쟁만능주의같은 문제점을 일으키는 현상도 생긴다. 권력욕, 인권 침해, 황금 티켓 증후군, 황금만능주의의 원인이기도 하다.

5.1. 경쟁과 행복의 관계

경쟁이라 하면 보통 선의의 경쟁보단 타인을 무작정 짓밟고 올라가는 무의미한 경쟁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경쟁은 승자나 패자나 불행의 굴레에 빠뜨린다. 승자는 절대 지면 안된다는 압박감으로 인한 극도의 불안에 빠지고 , 패자는 자신이 패배자가 됐다는 큰 절망감에 빠져 결국 서로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승자는 극소수고 패자는 절대다수일 수밖에 없는데 그 소수의 승자가 압박감과 불안으로 자신이 승리로 쟁취한 부귀를 유지하기 위해 사다리 걷어차기를 시전하면 절대다수의 패자는 활로가 없어져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고 이러면 사회의 활력이 엄청나게 죽어버린다.

재벌, 양극화, 세대 갈등, 저출산 등등의 문제들이 발생하는 결정적인 이유로, 결국 과열된 경쟁사회에서 최고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경쟁 없이 경쟁의 결과물만을 취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수록 재산의 형성에서 근로소득보다 상속을 위시한 불로소득의 비중이 더욱 커진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노력충 문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5.2. 경쟁의 적정 한도 논쟁

경쟁으로 얻어지는 이익보다 경쟁에 의해 생기는 사회적 비용이 더 커지는 경우가 생긴다. 경쟁이 과열된다고도 표현한다. 구태여 경쟁을 강조하지 않아도, 현대 사회는 사회적 희소가치가 한정되어 있고 서로 그것을 차지하려고 이미 경쟁이 벌어지는 와중인데, 여기서 경쟁이 더 심해진다면 경쟁이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협력이 중시되는 사회 부문에서도 냉혹한 경쟁 내지는 경쟁 구도 자체를 파괴하는 논리[4]가 득세하게 된다. 이런 사회는 겉보기에는 강해보이지만 막상 협력이 필요할 때는 구성원의 힘을 모으지 못해 내부분열이 일어나 외부 경쟁집단과의 경쟁에서 오히려 도태되는 역설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사회의 경우는 이러하다. 대한민국은 냉전의 최전방으로서 자유 경제체제를 대변하였고, 북한과 체제의 우수함을 두고 싸움과 격렬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나 동구권 몰락, 소련의 몰락 덩달아 맞수였던 북한이 몰락하였고 이러한 몰락의 원인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이 공산권 사회의 의지 부족, 즉 남들보다 돈을 더 벌기 위한 경쟁의 부재가 체제 구성원들의 현실 안주를 불러왔고, 이에 따라 사회 동력원이 상실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생각한 대한민국에서는 경쟁에 대한 믿음이 좀더 강고해졌다.

그래서 KERI 연구원도 가나의 사례를 들면서 가나와 한국은 동시기에 비슷한 조건으로 출발했지만 현재 한국이 훨씬 잘 사는 이유로 자본주의의 도입을 꼽는다. 가나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후 첫 정권이 사회주의 정책을 도입하여 국민들이 나태에 젖어 결국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론 은크루마 정권의 사회주의 체제 때문에 가나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나의 군사 독재정권이 한국과는 달리 중공업 육성에 관심이 없어서 국민들에게 퍼주고 자기들이 비자금으로 챙긴 결과 영국의 원조금을 다 까먹는 등 복합적 원인이 작용해 가난해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사방이 북한과 강대국으로 둘러 싸인 형세에서 국토도 비좁고 자원도 부족한 상황에 내세울 만한 것은 인적자원을 키워내는 것뿐이었고, 이렇게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고 뽑는 데에 경쟁만큼 합리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와 사회는 경쟁을 사실상 권장해왔다. 이러한 경쟁만능주의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예시로 입시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열 경쟁 환경에서 경쟁에 참여하는 현대 사회 구성원들은 거의 사실상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긴장 상태가 된다. 쉽게 말해 사회가 전쟁터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환경에서는 구성원들의 피로도가 급격히 증가하며, 특히 경쟁에서 낙오한 소위 "패배자" 들의 상실감과 분노, 열등감, 박탈감은 사회 구성원들의 분열이나 의욕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 즉 이러한 추세가 장기화되면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가 발생하고, 대다수 "패배자" 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의 피로감 상승으로 이어지며, 소위 "패배자" 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과 후속조치가 없는 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가져와서 빈부격차의 심화와 자살율과 범죄율의 증가를 불러오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실제로 범죄 통계를 보면 우발적인 분노에 의한 범죄의 비율이 해마다 상승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입시 과열 경쟁은 상대평가 제도가 도입되면서 더더욱 격화되었다. 위에 말했듯 "내가 99% 완벽해도 남이 100%를 이뤘다면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 환경" 이 극도로 대중화되고 보편화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다. 이게 문제시되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까지 열심히 노력한다면 경쟁에서 "패배" 하게 된다. 따라서, 학생들의 학업성취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는 결국 "경쟁자를 쳐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물론 항상 상대평가 제도가 문제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교사의 재량에 맡기거나 충분한 논의와 점검을 거쳤어야 할 문제였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의 자살, N수생들의 증가 등도 대두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단지 수많은 사회적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수험생들은 경제 활동을 거의 못하고, 현실적으로도 상당한 가계부담이 되기 때문에 수험생들이 증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사회에 좋지 않기 때문. 조선일보의 주간지인 《주간조선》에서도 특집으로 "한국 교육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지 않으며,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

그리고 취업에서 소위 말하는 스펙 쌓기도 과열 경쟁의 큰 폐해이다. 즉 스펙이 갈수록 상향 평준화되고 어느정도 비슷해지면서 차별화한답시고 업무랑 전혀 관련이 없는 것마저도 스펙으로 쳐주기 시작하고 급기야 모든 경쟁자들마저 업무와 관련이 없는 스펙마저 쌓아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때 스펙 열풍이 과도하게 휘몰아쳤을 때에는 "병아리 감별사 자격증"까지도 스펙에 넣는 구직자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노력과는 별개로 일자리 숫자가 극도로 제한된 사회에서 상대평가만 적용하면 붉은 여왕 효과의 극대화가 터지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자리에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심지어 열심히 노력해도 뒤로 밀려나기만 하는 현상을 겪게 된다. 어지간한 스펙으론 청년구직자들이 원서를 수백곳에 내도 낙방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더욱 문제되는 것은 기존에 경쟁에서 성공한 소수가 타인을 위해 자신이 성공한 팁이나 정보 등을 공유해 주는 경우, 사람을 뽑는 측에선 그 팁이나 정보를 알고 도전해야 겨우 뽑히는 기본 스펙처럼 당연하게 취급해 버리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입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나 자격증, 토익, 각종 스펙쌓기 등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면서 각종 폐단을 낳고 매년 경쟁 허들만 무제한으로 올리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개개인의 근로의욕과 자존감을 감소시키며 각종 사회문제로 연계되는데,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사회 전체에 끼치는 해악이 범죄저출산까지 확대되고 경쟁이 주는 이익보다 피해가 훨씬 커지게 된다. 더구나 다른 구성원을 위해 자신만의 정보를 공공에 풀어주거나 돕는 행위는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데, 지나친 경쟁 때문에 정보를 공유하는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미친짓이고 손해라는 인식이 갈수록 커지는 것도 큰 문제이다. 그렇다고 경쟁을 유지하기 위해 범죄를 억제하는 수단을 강화하는 과정은 개개인의 통제에 대한 선을 넘도록 유도된다. 결국 경쟁을 강화하는 과정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통제는 권력자의 권한을 점차적으로 강화시키고, 이를 지속적으로 묵인하는건 독재를 향한 계단을 쌓아올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외에도 국제중학교 입학비리 사건이나 갑질, 그리고 해외의 사례를 들자면 일본 정치인들이 대표적인데[5]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정당당한 실력 경쟁이 아니라 돈이나 가문빨처럼 전혀 상관없는 수단까지 동원해 경쟁에서 이기려는 과열 경쟁의 폐해가 잘 드러나 있다.

경쟁 자체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일지 몰라도, 당연히 만능이 될 수 없다. 특히 인류가 이런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협동에 기반한 집단 vs 집단 간의 경쟁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경쟁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가 없다. 협동과 경쟁이 균형을 이룰 때 인류 사회는 개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긍정적으로 발전한다. 협동심은 없고 경쟁심만 가득한 집단은 상호 간에 불신과 적대감만 존재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되어 결국 붕괴되기 마련이다.[6]

위까지는 개인 차원의 이야기고, 기업 차원까지 넘어가면 경쟁 과열로 일어난 참사와 부작용이 셀 수 없이 많다. 예를 들자면 일본의 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라거나. 한국의 경우 버스 회사들끼리의 경쟁 과열로 난폭운전과 지나친 과속을 일삼다가 어딘가에 충돌하거나 버스가 전복되는 경우가 생각외로 많이 있어왔다. 일반적으로 기업간의 과잉 경쟁시에는 보통 직원만 갈려나가기에 구성원만 고통받고, 사회적으로는 별로 티가 안 나는 반면에, 수송업이라는 예외적인 업종의 특성상 고객(=승객)까지 갈려나가고 이는 언론의 주목을 끌기 때문.

5.2.1. 대안 제시

개개인의 물질에 대한 욕망이 경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므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다만 모두가 수도승이 될 수도 없고, 그러한 욕망에 대한 거세를 권장하는 것 또한 건강한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따라서 욕망에 대한 접근을 대단히 어렵게 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행동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사회상을 직접 그리는 것도 분명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고 다수의 개인이 원한다면 그러한 모습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고, 자기 집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정도로 평가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독신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정치권에서 1인 가구에 대한 정책이 거론될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세대들 위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문화로까지 형성된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굳건하게 사회에 뿌리내려 영원히 불멸할 것만 같은 자본주의 또한 등장한지 수백년 밖에 되지 않았다.[7] 수백년 후에는 얼마든지 전혀 다른 체제가 우리 사회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항상 사회를 비판하되, 스스로 아무것도 개혁할 수 없다는 허무함에 빠지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변화를 시도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세상에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Pay it forward (미리 지불하기) 운동'도 개인적 차원의 대안으로 고려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뜬금없이 선행을 받았을 때, 자신도 타인에게 선행을 퍼뜨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뜬금없는 선행을 전염시키자는 운동. 이를 다룬 책이 바로 캐서린 라이언 하이디 작가의 트래버이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원작이며 자신이 누군가에게 선행을 받으면 자신도 세 명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원칙을 다루고 있다. 다만 현실은 시궁창이라서 결말이 충격이며 현실의 냉혹함을 잘 보여준다. [8]

과열 경쟁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면, 자본주의를 통제하려는 정치세력이 자연스럽게 힘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체제 스스로 상속을 통해 신분으로든 능력으로든 처음 부를 독점한 자의 지위를 유지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공평을 초래하며, 심화될 경우 사회구성원간 협동심을 약화시켜 사회의 안정성을 해친다. 과열 경쟁이 사람들로 하여금 체제에 불만을 품게 한다면, 불공평을 일으키는 자본주의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토빈세와 같이 자본의 순환에 세금을 매기는 자본주의를 통제하는 정책을 실현할 힘을 얻게 된다.

5.3. 기회의 평등에 관한 논쟁

자본주의의 기본 모토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가장 중요시된다. 장 자크 루소 같은 자유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후천적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공평한 경쟁이다. 따라서 신분과 같은 선천적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것은 공평한 경쟁이 아니다.

이에 대해 존 롤스는 루소의 이 같은 주장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일단 후천적 능력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면 그 세대까지는 공평할지 모르나, 이것이 상속을 통해 선천적 능력으로 작용하면서 자연스레 불공평이 발생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의 주장은 공평을 이룩하기에 부족하다. 공평을 이룩하려면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서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사회계약을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적은 권리를 행사하는 자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을 때야 비로소 차별은 정당화 된다."

자본주의의 기원은 특정한 환경과 조건에서 자본의 독점이 일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식민지 근대화론 문서로.) 그래야만 자본가가 탄생하고 자본을 중심으로 한 상위구조(문화,정치,사회)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 또는 경제력을 갖춘 자가 경쟁을 빙자해서 서민층을 착취하여 기득권을 유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마르크스 주의의 기본 이념중 하나일 정도로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전제이다.

존 롤스가 말한 것처럼 처음엔 공평한 분배 방법이었던 능력주의상속을 통해 선천적 능력인 신분을 부활시키는데 일조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기원인 부의 독점을 능력주의를 통해 실현한 것이며, 상속이 없어지거나 세금을 통해 제한받지 않는 한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의 동력으로 공평한 경쟁을 방해하고 기회의 균등에서 멀어진다.

기회의 균등은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개념이 아님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기회의 균등은 오히려 평등주의에서 기원한 개념이다. 따라서 결과의 균등과 대치되지 않으며 오히려 결과의 균등을 이룩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존재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결과의 평등을, 자본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중시한다는 서사는 각 개념의 기원을 오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불공평을 향해 달려갈 때 그것에 제동을 거는 방법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칸트의 경우 사람은 수단이 될 수 없고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하므로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는 제한받는다. 공리주의자의 경우, 자본주의 체제가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달려간다면 그것은 불공평하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불공평하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존 롤스의 경우 무지의 베일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계약과 사회적 약자의 혜택 보장이 있는 사회만이 공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직의 경우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를 독점한 자가 자발적 의지로 '기부'를 행함으로서 자연스러운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에 국가가 간섭하는 것은 개인의 소유권에 대한 침해로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왈저의 경우 어떤 재화가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는 것이 공평한 것이며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은 부를 독점한 자가 다른 모든 재화까지 독점하는 데 있다는 의견을 냈다. 부자는 돈을 많이 소유한 자일 뿐인데, 자연스럽게 모든 의료서비스, 교육서비스, 식량, 의복, 주거까지 독점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경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경쟁을 강조하는 지도층들도 경쟁에 지쳐서 점점 경쟁을 안 하려고 하거나 남들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서 경쟁하려는 문제가 생긴다. 경쟁이 점점 가속화될수록, 내가 99%를 이뤄도 남이 100%를 성취했다면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 환경이 만들어지고 과열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렇게 조금이라도 밀려나면 곧 사회에서 도태됨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잃어버릴 게 많은 지도층의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자손 대대로 물려준다거나, 아니면 밀려나서 기득권을 잃기 싫으니 편법을 동원해서 경쟁을 안 하게 되거나 혹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반칙, 조작 등의 비겁한 수단도 쓰게 된다. 즉 존 롤스가 말한 것 처럼 "경쟁에서 승리해서 기득권을 얻은 승리자는 다음 경쟁 때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형평성을 훼손하게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반칙을 통해 경쟁에서 이기는 건 실력의 유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력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 사회 고위층이 된 다음 자기보다 더 유능한 아랫사람을 지배한다는, 경쟁지상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이런 집단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리가 만무하므로, 다른 경쟁집단과 비교해 뒤처지는 효율성을 보충하기 위해 무능한 윗사람이 유능한 아랫사람을 자기가 할 몫의 경쟁까지 몰아줘서 착취하는 악습이 생겨나는 풍토를 만든다. 게다가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는 꼬우면 네가 경쟁에서 이겨서 승리자가 되든가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승리해서 사회주도층이 되더라도 뛰어난 인재 한 명이 구조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사회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현대 사회보다도 구조가 단순했던 고대와 중세 사회마저 간단한 개혁 하나 하는데 온갖 반대와 훼방을 거치게 되고 실패하거나 몇십년 뒤에나 겨우 성공하는 판에, 구조가 더 복잡해지고 전문화된 사회에서 고작 한 사람의 개혁의지가 세상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현실은 만화도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기존의 세력에 편승하지 않는 개인(=고작 한 사람)의 힘이 닥터 맨하탄이나 슈퍼맨처럼 초월적이고 강대한 경우는 몹시 드물었고, 그런 사람이 선한 상황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뭄에 콩 나듯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승리자가 되어도 패배자가 되어도 사회에 끌려다니는 무력한 개인으로서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다. 사회 변혁이 불가능하다고 당당히 외치는 것은 염세주의적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역사 속에서 사회는 늘 변화해 왔다는 역사적 특징은 여전히 현대 사회 또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대상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권을 가진자들 중 그 특권을 분배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서로 연대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다. 혼자서 특권을 내놓으면 그저 특권을 박탈당한 채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약자와 특권을 분배하고자 하는 개혁적 사회주도층이 서로 연대해 분배구조를 재정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사회 구조 개혁이 가능하다. 현대 사회라고 해서 과거와 완벽히 단절된, 기존의 이론이 일체 적용되지 않는 고립계가 아니기 때문에 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변화할 수 있다. 다만 그 시간이 더 오래걸릴 뿐이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한결같이 개혁의지를 고수한다는 보장도 없다. 비주류 출신에서 자수성가해 주류에 편입된 사람이 현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경우 빠르게 퇴출당하는 게 보통이다. 한 마디로 나라도 나라지만 자기 밥그릇을 깨기 싫기 때문에. 따라서 비주류→주류 테크트리를 탄 사람들은 보통 그 배고프고 추운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겨우 얻은 새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기존 주류들보다 더욱 더 보수적이고 과격하게 현 체제를 옹호하면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 비주류의 분노를 사게 된다. 하시모토 도루가 좋은 예인데, 그는 일본 사회에서 온갖 차별을 받는 부라쿠민 출신이었는데 이 사람이 부라쿠민 문제를 공론화하긴 커녕, 되려 정치 기득권을 쥔 일본 극우들의 시각에 동조해 온갖 망언을 쏟아내고 있어 일본 내에서도 비난을 받을 정도다.

5.3.1. 대안 제시

경쟁 제도를 잘 설계하여 빈부격차, 편견 등이 영향을 적게 주도록 만들면 된다는 주장이다.

6. 여러 사상가들의 입장

  • 르네 지라르는 '획일화 상황에서 어떠한 차이도 만들지 못하는 무익한 싸움으로 사람들의 힘을 고갈시키는 경쟁'이 전체주의라고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점차 욕망의 모델과 가까워지는 평등은 조화를 낳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더 심각한 경쟁만을 낳고 있다. 물질적 이익의 원천인 이 경쟁은 훨씬 더 심각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어떠한 것도 이를(정신적)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경쟁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동일한 대상을 향해 수렴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경쟁을 하는 사람들은 욕망이 획일화되고, 욕망이 획일화되면 경쟁이 더더욱 가속화된다. 욕망의 획일화를 부추기는 경쟁이 초래하는 위기를 무차별 위기 (crise d'indifferénciation)라고 한다. 특정 국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장경제논리에서 본질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로 볼 수 있다.

7. 경쟁과 관련한 어록

파일:external/i1120.photobucket.com/redqueen_zps3b5f7922.jpg
Now, here, you see, it takes all the running you can do, to keep in the same place. If you want to get somewhere else, you must run at least twice as fast as that!
(여기서는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그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고.)
<거울 나라의 앨리스>, 붉은 여왕
여성 아이돌로 살아가는 건 돛단 배 같아요
악플 등 이런 저런 평가에 휩쓸리지만
결국 살아남아 목적지에 도착해야 해요
거친 풍파를 견뎌내는 건 자기의 몫이죠
- miss A 수지 -
But the annual revenue of every society is always precisely equal to the exchangeable value of the whole annual produce of its industry, or rather is precisely the same thing with that exchangeable value. As every individual, therefore, endeavours as much as he can both to employ his capital in the support of domestic industry, and so to direct that industry that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every individual necessarily labours to render the annual revenue of the society as great as he can. He generally, indeed, neither intends to promote the public interest, nor knows how much he is promoting it. By preferring the support of domestic to that of foreign industry, he intends only his own security; and by directing that industry in such a manner as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he intends only his own gain, and he is in this, as in many other cases, led by an invisible hand to promote an end which was no part of his intention. Nor is it always the worse for the society that it was no part of it. By pursuing his own interest he frequently promotes that of the society more effectually than when he really intends to promote it. I have never known much good done by those who affected to trade for the public good. It is an affectation, indeed, not very common among merchants, and very few words need be employed in dissuading them from it.
그러나 모든 사회의 연간 수입은 언제나 그 사회의 산업에서 생산하는 연간 총 생산량의 교환 가치와 정확히 같다. 또는 차라리 교환 가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자본을 국내 산업의 지원에 사용하고, 또 그 산업에서 최대의 이윤을 산출하고자 한다면, 모든 개인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연간 수입을 만들려 노력하게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분명히 개인은 공공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고 하지는 않으며, 얼마나 증진시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외국 산업보다 국내 산업에 대한 지원을 선호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안위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며, 그 산업을 운영하는 것도 자기 자신만의 이득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의도치 않았다고 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 할 때 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은 더 자주, 더 효율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다. 는 공공 이익을 위해 거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크게 이익이 되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상인들 사이에선 흔치 않다. 그리고 그러지 말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 book 4, chapter 2, page 2
'경쟁'이라는 표현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경제학계에서는 국부론이 경쟁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경구 중 하나로 꼽힌다.
Der Starke gewinnt nicht, derjenige der gewinnt ist stark[9]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자연은 인류를 육체적, 정신적 능력에서 평등하게 창조했다. 따라서 남보다 더 강한 육체적 능력을 지닌 사람도 이따금 있고, 두뇌 회전이 남보다 빠른 경우도 더러 있지만, 모든 능력을 종합해 보면, 인간들 사이의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편리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두드러지지는 않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같은 위험에 처해 있는 약자들끼리 공모하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런 능력의 평등에서 목적 달성에 대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 즉 누구든지 비슷한 수준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것을 원하지만 그것을 똑같이 누릴 수 없다면 그 둘은 서로 적이 되어 상대편을 무너뜨리거나 굴복시키려 하게 된다. 파괴와 정복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경쟁의 주된 목적은 자기보존과 때로는 파괴와 정복에서 오는 쾌감 자체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즉, 침략자가 타인의 단독의 힘 이외에는 두려워할 필요 없는 상황에서는, 누군가 농사를 짓거나 안락한 거처를 마련해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를 쫓아내고 노동의 열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생명이나 자유까지 빼앗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침략자 역시 다른 침략자에 의해 같은 위험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이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서 누구나 닥쳐올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면 선수를 치는 것 외에는 타당한 방법이 없다. 곧 폭력이나 계략을 써서 되도록 모든 사람들을 오랫동안 지배하여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력화하는 일이다.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경쟁의 세계에는 두 가지 어휘밖에 없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이다.
윈스턴 처칠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도서 4:4
우린 팀이 아니야. 이건 경쟁이야.
<언프리티 랩스타> 제시(가수)
힘든가? 오늘 쉬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카를레스 푸욜
승자는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패자는 없는 겁니다.
이세돌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경쟁을 통해 실망을 얻는다.
이민호
비 바람 부는 광야에 한참을 망연히 서 문득 눈을 떠 보니 나 홀로 남아 있네 오늘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함께 걷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내 앞을 질러갔거나 내 뒤에 오고 있나? 혹은 이름도 없이 사라졌나?

너무 멀리 와 버렸는지 아직 많이 남아 있는지 걷고 걸어 같은 곳으로 돌아온 기분도 드는데
그들이 가르친 이 길은 어디로 향해 있나? 어제로 가는 건가? 내일로 가는 건가? 혹은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건가?

너의 머릴 밟지 않고 그 곳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오늘 하루도 살아남은 것이 기쁠 뿐인가?
너의 머릴 밟지 않으려 멀리 돌아 여기 왔지만 발을 딛고 선 이 땅에 이미 형제는 누워 있었네

비바람 부는 광야에 한참을 망연히 서 문득 눈을 떠 보니 누군가 오고 있네 오늘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우림 <曠野 (광야)>[10] 가사 中
다른 사람들을 이기고 대회에 우승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최대치로 발휘하거나 무언가를 배우는 데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첫째, 경쟁이 불안과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이고, 둘째, 성취란 협력을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지는데 경쟁은 협력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경쟁은 단순히 효과가 없는 게 아니라 역효과를 냅니다. 왜냐하면, 성취는 내적 동기에 따라 움직일 때에만 이루어지는데 경쟁은 외적 동기이기 때문이죠. 사회심리학 연구에서 철저하게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진리는 시험점수나 트로피, 인증서, 대학간판 등 보상에 집중하는 순간 성취 그 자체에는 덜 관심을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은 거죠. 따라서 경쟁은 배움에 대한 관심을 죽일 뿐 아니라, 경쟁 그 자체만으로도 나쁜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경쟁에 반대하는 이유죠.
알피 콘 교육 심리학자
스포츠 세계에서 2등은 꼴찌하고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야구선수 선동열의 발언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꼴찌를 기록해서 감독직에서 잘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돌곤 했었다.[11] 다만, 이 표현은 스포츠에서 1등만이 살아남는 프로 선수들의 치열한 주전경쟁과 승부의 냉정함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2022년 본인이 작성한 칼럼에서도 다시 한번 언급했다.#

8. 관련 문서





[1] 김진식 (2010), 다른 경제를 위하여 - 르네 지라르를 통한 시장경제논리 비판 6, 한국프랑스학논집.[2] 표제어에 대해 '르네 지라르의 경쟁 사상', '무차별 위기' 등 다양한 표제어가 가능할 수 있으나, 프랑스 철학에 대해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다같이 이해하기 쉬운 표제어로 통일하였다.[3] 경쟁으로 가장 실체 없는 공격을 당한 게 수능인데, 매번 '줄 세우기', '정답 찾기에 급급한 교육' 등 입발린 말들로 근본과는 무관한 공격을 시도한다. 우리나라는 출세 목적 교육을 지향하는 사회 정서상 수능처럼 공정하고 효율적인 평가가 더욱 필요한 실정이다. 당장 사회 구조를 전부 뜯어고쳐 개인의 특성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공부법을 도입할 수도 없는 노릇인 현 시점에선 대학 '선발'의 '공정성'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상대평가를 실시해야 하는데, 여러 폐단과 문제점이 난무하는 수시의 비중이 커지는 현상에 대해선 국민적 반발이 나올수 밖에 없는 상황. 그나마 정시 모집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시에 비해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4] 극단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제거만을 뜻하는게 아닌 정치적, 사회적인 매장을 위해 다양한 공작을 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경쟁이 만연한 사회는 상호간의 협력과 성장이 아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이끌어내는 상황을 만든다. 고위직엔 자신의 재능 외에도 정치적 능력이 필요한 것도 경쟁에 따른 이익이 생길 수 없는 상황으로 여기고 상대를 내려앉히기 위한 투쟁이 벌어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5] 일본 정치인들의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간단하다. 부모 정치인이 자식에게 선거구를 물려주고 재벌가 후손들과 결혼하는 등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똘똘 뭉친, 상대적으로 경쟁에서 안전한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게 일본 정치인들의 생활상인데, 이렇게 되면 당연히 현실감각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현실감각이 떨어진 정치인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는 없다.[6] 유고슬라비아소말리아가 좋은 예이다.[7] 페르낭 브로델의 주장[8] 물론 게임 이론은 이런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 운동에서 가장 큰 재미를 보는 사람은 남들에게는 이 운동을 퍼뜨리자고 말하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선행을 하지 않는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9] 1974 FIFA 월드컵 서독 결승전에서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뒤 한 말이다. 프란츠 베켄바워는 세계 최고의 선수인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우승했어야 했다는 사람들에게 이 말 한마디로 멋지게 응수했다.[10] 경쟁사회를 비판한 곡이다.[11] 선동열이 해태 선수 시절에는 단 한번도 한국시리즈에서 꼴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프로 스포츠에서 우승을 기록해본 선수들이라면 저 정도의 마인드가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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