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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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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애덤 스미스
Adam Smith
FRSA
파일:애덤 스미스 초상화.jpg
출생 1723년 6월 5일[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스코틀랜드 파이프 커콜디
사망 1790년 7월 17일 (향년 67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국적
[[그레이트브리튼 왕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경제학자, 철학자, 신학자, 교수
부모 아버지 애덤 스미스
어머니 마거릿 스미스
학력 커콜디 고등학교 (졸업)
글래스고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올 칼리지 (자퇴)
사상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2]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이신론)[3][4]
약력 글래스고 대학교 논리학 교수
글래스고 대학교 도덕 철학 교수
대표 저서 국부론, 도덕감정론

1. 개요2. 생애3. 국부론4. 평가5. 오해6. 기타

[clearfix]

1. 개요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국부론 1편 2장 中

영국철학자이자 경제학자.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며[5] 많은 유럽 열강들이 돈이 많아질수록 순환이 안 되고 더 가난해지는 중상주의식민지 경제를 버리고, 자본주의자유무역을 선택 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

2. 생애

그는 스코틀랜드 파이프 커콜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콜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경에 집시 무리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게 구출되어 어머니 마거릿 스미스[6]에게로 돌아왔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했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에서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했다. 1748년에 케임스 경의 후원으로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교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으며 이듬해 도덕 철학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을 발표했다. 명성을 얻은 이후로도 돈이 궁했는지 1764년부터 파격적인 조건을 받고 타운젠트 공작의 장남의 개인 교사가 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가 수행한 개인교사로서의 임무는 학생과 여행을 함께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주는 것이었다. 2년에 걸친 긴 여행기간 동안 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 접촉하여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 틈틈히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애덤 스미스가 저술하기 시작할 무렵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7]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인 1776년에 발표한 저서가 바로 국부론이다. 국부론에서 그는 정부가 민간의 경제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국부론을 출판할 당시 각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았으며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세금, 수출입 규제 등은 체계적인 이론적 바탕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는 직접적인 개입 없이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둔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국가의 경제 발전이 보다 많이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정부의 역할을 최소한의 치안유지 수준으로 유지하는 야경국가론을 펼쳤다. 이에 따르면 정부의 필수적인 의무를 세 가지로 주장한다.
1. 국가는 다른 나라의 폭력과 침략에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
2. 국가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법제도를 엄정하게 세워야 한다.
3. 국가는 사회 전체에는 큰 이익을 주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윤이 비용을 보상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없는 공공사업과 공공기구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
국제적인 경제 질서에서도 보호 무역이 아닌 자유 무역을 옹호하며 당시 각국의 정부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수입을 제한하는 것을 자연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자연의 법칙에 맞는 경제 질서는 국제적 분업에 입각한 자유 무역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더 큰 만족을 추구하는 공통적인 성향(propensity) 및 교역 본능을 억압하기보다는 본래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 대신 남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게끔 유도하는 시장을 통해 본능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개인뿐 아니라 일반의 부를 추구하는 데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자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공익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왔다. 그는 당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중상주의에 대해서 특히 비판을 아끼지 않았는데 중상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국민의 부는 금은 화폐의 보유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작업 능률에 비례하고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한 필수 요소가 바로 분업이라고 보았다. 도시의 산업에 과도한 특혜를 부여한 중상주의에 맞서 농업만이 유일하게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며 상공업은 불임적이며 비생산적인 산업이라고 주장하던 중농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인류에게 무해했고, 앞으로도 무해할 학문체계의 오류를 (중상주의처럼) 길게 검토할 가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짤막히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국부론〉의 저자로서 업적을 인정받아 부와 명예를 누렸다. 국부론이 스미스의 저서중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국부론보다는 〈도덕감정론〉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묘비명을 〈도덕감정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라고 적어주길 바랐다고 한다.
Here are deposited the remains of ADAM SMITH. Author of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and Wealth of Nations.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여기에 묻히다.
에든버러에 있는 애덤 스미스의 묘비명

3. 국부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국부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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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5. 오해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반대하고 자유시장과 자유 무역의 옹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으로 잘 나타나는데,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를 교조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는 정부의 선의와 역량을 거의 믿지 않았고, 정부를 통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자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중략) 그럼에도 그는 만약 더 나은 수단이 없다면 개인이 하지 않을 것 같거나 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과제를 정부에 맡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제이컵 바이너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발췌된 이론인 보이지 않는 손이 맥락에 관계없이 인용된 탓에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 같은 극단적인 시장 자유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원래 윤리학자였다. 그는 "독점은 수입의 모든 원천, 즉 노동임금과 토지지대 그리고 자산에 의한 이윤을, 그것이 없는 경우보다 훨씬 감소시킨다."라고 말하며 독점을 막는 제대로 된 정부의 정책이 필요함을 설파하는 등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국가개입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경제학자에 가깝다.[8]

그는 경제원리에서 '인간의 이기심'만을 강조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이기심을 가진 동시에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적 동정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절제하고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게 해 준다"라고 말했으며, 그가 이기심을 강조한 이유는 인간 본연의 도덕심이 이기심을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사상 하에 당시의 정부와 결탁했던 중상주의자들의 독점을 오히려 비판한 것이었다. 즉, 그는 인간의 '이기심과 도덕성'을 동시에 믿었으며 어디까지나 인간 사회의 경제가 돌아가는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부도덕한 자본가들의 임금 체불이나 탈세, 분식회계, 투기, 담합 등의 사회에 해가 되는 행위를 방관하도록 두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들의 이 행위가 사회 전체에 해가 된다고 직접 지적하였다.[9]
자본가가 제안하는 새로운 상업적 법률 및 규제들에 대해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하며, 그것들을 매우 진지하고 주의 깊게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뒤에 채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이익이 결코 정확히 공공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계급, 그리고 사회를 기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며, 따라서 수많은 기회에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으로부터 나온 제안이기 때문이다.
국부론 1권, 11장 중

즉, 그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극단적인 시장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당시 중상주의자들이 정부와 손을 잡고 독점을 하는 등의 폐해가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개인에게 시장을 맡기면, 부패한 정부의 독점적 행태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맥락과 상황을 고려한 주장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을 들어 시장의 독점을 긍정적으로 보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정부의 시장 간섭을 완전히 배제해야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잘못된 주장이 된다. 결국, 애덤 스미스는 정부가 기업을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정경유착을 비판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의 저서인 국부론은 분량이 많기 때문에 완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10], 정보의 접근성이 극히 낮았던 과거에는 아무리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이런 점을 파악한 사람들이 드물었다. 특히 오래전부터 극단적인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을 자신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해 왔기 때문에 이런 오류는 나이든 전문가 사이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최근에는 이런 점들이 밝혀져 있어서 인식을 바꿔가는 중이지만 아직까지도 자칭 전문가나 무지한 일부 언론인들이 간간히 정부가 소비자나 노동권을 위해 시장을 간섭하는 상황을 두고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며 시장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아전인수식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특히 일부는 임금체불, 탈세, 횡령, 투기 등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옹호하면서 최저임금이나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최소한의 안전규제도 반대하며 정부가 기업을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묵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6. 기타

  • 그는 죽기 전 친구들에게 미발표된 많은 자신의 글들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놀란 친구들이 이유를 묻자 너무나도 부끄러운 졸저라서 도저히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평생을 써온 글들을 허무하게 재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친구들은 이 분부를 어기고 책으로 내려고 생각했는데, 이걸 알아차렸는지 스미스도 죽기 직전 친구들에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눈앞에서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은 할 수 없이 그의 눈 앞에서 벽난로에 집어넣어서 남은 글들을 전부 불태웠고 이걸 보고 나서야 마음놓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때 재가 된 그의 글은 분량으로 따지면 20권이 넘을 정도로 많은 글이었고, 이 때문에 그의 사후 발표된 미발표 저술 등은 단 하나도 없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많은 경제학자, 철학자들에게 그 재로 사라진 글들이 두고두고 애석하다고 한탄을 듣고 있다.
  • 낯가림이 다소 심하고 작은 키에, 남과 대화할 때 말을 더듬고 얼굴을 계속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치고는 유머도 있었는지 지인들 앞에선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했다고 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궁전을 지나는데 위엄 있게 서있는 근위병을 보고 갑자기 지팡이를 쳐들고는 근위병 쪽으로 가더니 총을 쳐들고 늠름하게 움직이는 근위병 뒤에 붙어서 그 행동을 따라했다. 친구 하나는 원숭이가 사람 따라하는 꼴 같다고 말했고, 근위병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본인들의 업무를 방해한 것은 아닌 데다 당대에도 이름 있는 학자라서 그냥 놔뒀다고.
  •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보니 그가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교수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고 학장이 되기까지 연구를 끊임없이 거듭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던 이들도 결국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말년에는 영국 수상과 고위급 정치인들마저 존경심을 표할 정도로 대가로 인정받았는데 그런 찬사에 매우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한 번은 고위급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만 지각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수상이던 피트는 "우리 모두는 그저 당신의 학생일 뿐"이라고 농담하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 어린 시절부터 몽유병이 종종 나타나서 한번은 잠든 채로 무려 24km를 걸었다고 한다.
  • 의외라면 의외일 수도 있지만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인 노엄 촘스키가 자주 인용하는 인물이다. 국부론에서 말하는 초기적 자유주의와 중상주의 비판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이유는 여성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포를 느끼지 않은 여성은 어머니 마거릿과 사촌누이 재닛 뿐이었고, 어머니와 같이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재닛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세 여성과 얽힌 적도 있었다. 이들은 스미스가 흄과 함께 프랑스 사교클럽에서 교류하면서 만난 여인들인데 세련된 매너에 풍부한 학식을 가진 스미스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 같다. 한 명은 스미스와 같은 호텔에 머문 후작부인인데 스미스를 유혹하려고 부단히 애썼으나 당연히 그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한 명은 스미스가 젊은 시절 만난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답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는데, 의외로 스미스가 이 여인을 몇 년 동안 사랑했다고 한다. 이유는 몰라도 이 둘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로 진 또한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스코틀랜드 파운드/scotland034.jpg파일:£20 back-4.jpg
  • 1981년부터 2006년까지 스코틀랜드 클라이즈데일은행 50파운드 지폐의 도안에 그의 그림이 있었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도안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전판의 인물은 잉글랜드가 자랑하는 음악가인 에드워드 엘가였다. 2007년은 그의 탄생 150주년으로 관련 단체들이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던 그 무렵 2007년부터 20파운드권 인물이 엘가에서 스코틀랜드의 애덤 스미스로 갑자기 변경되어 위의 단체들이 허탈해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11]
  • 문명 2에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경제학 연구가 완료되면 불가사의로 "애덤 스미스의 무역회사(Adam Smith's Trading Company)"를 지을 수 있다. 효과는 유지비용이 1골드인 도시 건물들의 유지비용을 없애준다. 불가사의를 지으면 나오는 동영상에서는 국부론의 표지도 나온다.


[1] 정확히 160년 후인 1883년 6월 5일에 경제학사의 또 다른 거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태어났다.[2] 다만 후술되어 있듯 애덤 스미스는 시장 만능주의자는 아니었으며 단지 중상주의와 보호무역 등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역할을 반대했을 뿐이다. 스미스는 정부가 할 일은 오히려 독과점 방지라고 봤기 때문에 그 독과점이 벌어질 수 있는 정경유착을 비판하고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한편 그것을 대체할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을 옹호한 것이다.[3] 장로교회 신자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신앙 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4] 그의 사상, 종교적 견해는 이신론과 많이 밀접해 있다. 심지어 그는 종교의 해체까지 옹호할 정도였다. [5] 다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도덕철학자로 여겨졌으며 애덤 스미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생전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경제에 관한 내용은 철학의 하위 분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이 독립된 학문이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6] 결혼 전 성은 더글러스[7] 이 문장은 거시경제학의 창시자격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경제학에 막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한 말과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로 꼽히기도 한다.[8] 다만 스미스 본인의 성향과는 별개로 그의 저서 국부론에 나온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움직인다."는 문장이 자유방임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9] 영국 애덤 스미스 연구소장인 에이먼 버틀러는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문구로 '국민이 대부분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데 그 나라가 부유하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을 언급했는데 이는 국가의 풍족함이 자본가의 풍족함이 아닌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임을 언급한 말이었음을 볼 수 있다.#[10] 참고로 사회주의계의 거물 중 하나인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 자본론도 인지도에 비해 완독한 사람이 드물어서 잘못된 해석이 많다.[11] 또한 엘가 도안의 20파운드권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사용된 반면 스미스 도안의 20파운드권은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넘게 사용되었기에 엘가의 팬들은 더욱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