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2 18:35:02

애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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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4. 평가


1. 개요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慈悲心)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제 1편 제 2장(p.19)-
Adam Smith.[1]1723년 6월 5일[2] ~ 1790년 7월 17일 (67세)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3],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

2. 생애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파이프 커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경에 집시 무리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어머니 마거릿 스미스(결혼 전 성은 더글러스)에게로 돌아왔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했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했다. 1748년에 케임스 경의 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 도덕 철학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했다. 명성을 얻자, 돈이 궁했는지 1764년부터 스미스는 타운젠트 공작의 장남의 개인 교사가 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받고 교수직을 사임한다. 그의 개인교사로서의 임무는 이 소년과 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주는 것이었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했다. 이렇게 여행하는 동안 그는 심심풀이로 책을 쓰기 시작했고 1776년 여행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책을 한 권 냈으니 이것이 바로 국부론이다.

국부론에서 그는 정부는 민간의 경제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국가의 경제 발전이 보다 많이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정부의 역할을 소극적인 경찰관의 지위로까지 낮춘 야경 국가론을 펼쳤다. 이에 따르면 정부의 필수적인 의무를 세가지로 주장한다. 1) 국가는 다른 나라의 폭력과 침략에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 2) 국가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법제도를 엄정하게 세워야 한다. 3) 국가는 사회 전체에는 큰 이익을 주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윤이 비용을 보상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없는 공공사업과 공공기구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공공재) 또한 국제적인 경제 질서에서도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하여, 당시 각국의 정부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을 자연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자연의 법칙에 맞는 경제 질서는 국제적 분업에 입각한 자유 무역이라고 강조했다.

스미스는 인간의 더 큰 만족을 추구하는 공통적인 성향(propensity)및 교역 본능을 억압하기보다는, 본래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 대신 남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게끔 유도하는 시장을 통해 본능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개인뿐 아니라 일반의 부를 추구하는데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자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공익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왔다.

그는 당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중상주의에 대해서 특히 비판을 아끼지 않았는데, 중상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국민의 부는 금은 화폐의 보유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작업 능률에 비례하고,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한 필수 요소가 바로 분업이라고 보았다. 도시의 산업에 과도한 특혜를 부여한 중상주의에 맞서, 농업만이 유일하게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며 상공업은 불임적이며 비생산적인 산업이라고 주장하던 중농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인류에게 무해했고, 앞으로도 무해할 학문체계의 오류를 (중상주의처럼) 길게 검토할 가치는 없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짤막히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책도 스미스 생전에 베스트셀러가 되긴 했지만 정작 본인은 <국부론>보다는 1759년에 쓴 <도덕감정론>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스미스 본인은 늘그막에 지인들에게 이 책들을 두고 졸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생전 인정받아서 대학교수로 역임되었고 글래스고 대학의 학장이 되면서 부와 명예를 누렸다.

3. 기타

낯가림이 다소 심하고, 작은 키에 말을 더듬었으며, 얼굴을 계속 흔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반면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잘 치곤 했다고 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궁궐을 지나는데, 위엄있게 서있는 근위병을 보고 갑자기 지팡이를 쳐들고 근위병 쪽으로 가더니, 총을 쳐들고 늠름하게 움직이는 근위병 뒤에 붙어서 지팡이를 들고 그 행동을 따라했다. 친구 하나는 "원숭이가 사람 따라하는 꼴 같다." 고 말했고, 근위병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바라보긴 해도 뒤에서 막거나 한 게 아니고 스미스가 꽤 이름있는 학자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그를 교수로 임명하던 것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교수가 되면서 열심히 일했고 학장이 되기까지 연구를 끊임없이 거듭했기에 반대하던 이들도 결국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영국 수상과 고위급 정치인들마저 존경심을 표할 정도로 대가로 인정받았다. 애덤 스미스 본인은 그런 찬사에 매우 쑥스러워 했다고.[4]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바로 여성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 어머니 마거릿이었는데, 그녀와 같이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론 홀로 살았다. 그런데 뜻 밖에도 세 여성과 얽힌 적도 있었다. 이들은 스미스가 흄과 함께 프랑스 사교클럽에서 교류하면서 만난 여인들인데, 세련된 매너에 풍부한 학식을 가진 스미스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 같다. 한 명은 스미스와 같은 호텔에 머문 후작부인인데, 스미스를 유혹하려고 부단히 애썼으나 당연히 그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한 명은 스미스가 젊은 시절 만난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답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는데, 스미스가 이 여인을 몇 년 동안 사랑했다고 한다. 이유는 몰라도 이 둘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여인도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죽기 전에 '미발표된 많은 글들을 태워달라'고 친구에게 요청했는데, 죽기 전에 친구에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내 눈앞에서 태워달라고 요구해서 친구들은 할 수 없이 20권 분량이나 되는 글을 불태웠다.

4. 평가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반대하고 자유시장과 자유 무역의 옹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으로 잘 나타나는데,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를 교조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는 정부의 선의와 역량을 거의 믿지 않았고, 정부를 통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자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중략) 그럼에도 그는 만약 더 나은 수단이 없다면 개인이 하지 않을 것 같거나 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과제를 정부에 맡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 제이콥 바이너[5]

스미스는 자신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도덕감정론>[6] 그 사례로 로마제국의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비판인데, 박애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지역과 민족, 복합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을 핀 나머지 로마제국의 혼란과 멸망을 초래했다는 비판이다. 또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 개념은 프로이트의 초자아(superego)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1] /ˈæd.əm smɪθ/[2] 공교롭게도 정확히 160년 후인 1883년 이날에, 경제학사의 또 다른 거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태어났다. 여담으로 이 해는 경제학사의 또 다른 거두로 이들의 영원한 라이벌(?)인 카를 마르크스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3] 정작 애덤 스미스 자신은 스스로를 철학자로 생각했다. 사실 당연한 것이, 그가 살아있을 당시엔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철학의 하위분야로 여겨졌다. 경제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20세기 때의 일.[4] 한번은 고위급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만 지각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수상이던 피트는 "우리 모두는 그저 당신의 학생일 뿐" 하며 넘어갔다.[5] "Adam Smith and Laissez-Faire", 1927,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35(2)[6] 도덕감정론은 기존의 합리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모순되는 책이다. 합리주의하에서 도덕은 이성의 영역이지만 애덤 스미스는 도덕을 감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도덕이 이성인가 감정인가에 대한 질문은 조슈아 그린과 뇌과학자들의 트롤리 사유 실험에서도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