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6 12:57:07

사회당(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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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 Socialiste | 사회당
<colcolor=#f70059> 영문명 <colbgcolor=#ffffff,#1c1d1f>Socialist Party
약칭 PS
슬로건 Ensemble, retournons au combat.
함께 투쟁으로 돌아가자.
창당일 1969년
이전 정당
주소
99 뤼 몰리에르, 94200 이브히 쉬흐 센 파리
(제13구역, 사회당 당사)
총서기 올리비에 포르 / 4선 (14~17대)
전국위원장 코린 나라시갱 / 초선 (14대)
상원 원내대표 파트리크 카네 / 초선 (10대)
하원 원내대표 보리스 발로 / 3선 (15~17대)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 21대 (1981.5 ~ 1995.5)
프랑수아 올랑드 / 24대 (2012.5 ~ 2017.5)
상원
61석 / 378석 (18.7%)
하원
59석 / 577석 (10.2%)
유럽의회
3석 / 81석 (3.8%)
시주지사[2]
4석 / 17석 (23.5%)
데파르드망[3]
21석 / 95석 (22.1%)
상원 교섭단체
하원 교섭단체
유럽의회 정당
이념 사회민주주의
생태주의[4]
친유럽주의
내부 계파 :
제3의 길[A]
사회자유주의[A]
민주사회주의[B]
생태사회주의[B]
기독교 좌파[A]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익[10]
유럽 정당 유럽 사회당
청년조직 젊은 사회당[11]
LGBT 조직 사회주의와 호모섹슈얼[12]
국제조직


당원 수 41,000명
당 색
빨간색 (#F7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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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역사
3.1. 19세기에서 2차 대전까지3.2. 제4공화국3.3. 제5공화국 출범 이후3.4. 창당과 미테랑 집권3.5. 미테랑 이후의 사회당3.6. 암흑기3.7.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3.8. 부활
4. 출신 인물
4.1. 사회당 소속 대통령4.2. 사회당 소속 총리4.3. 기타
4.3.1. 탈당한 인물
5. 역대 총서기6. 역대 선거결과
6.1. 대통령 선거6.2. 국민의회 선거6.3. 상원의원 선거
7. 기타8. 둘러보기

1. 개요

프랑스정당.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다.

2. 상세

프랑스의 가장 거대했던 좌익 정당으로 프랑스에서는 중도좌파 스탠스로 인식된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수아 올랑드라는 두 명의 전임 프랑스 대통령을 배출한 프랑스 제5공화국 기준 프랑스 범좌파 진영의 대표 정당이다.[13]

표방 이념은 사회민주주의이며, 전신은 1905년에 창당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이다.[14] 가입되어있는 국제조직은 진보동맹,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유럽 사회당이며, 상위 유럽의회 정당은 사회민주진보동맹에 소속되어 있다.

3. 역사

프랑스하면 좌파 운동 이미지가 강한 편이지만, 사실 사회당 자체는 상당 기간 비주류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세기야 사회주의 자체가 유럽에서 겨우 이름을 들이밀때라 지지층들은 오히려 급진당자유주의 정당에 묻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고, 20세기 초에도 그렇게 묻어가다 사회당의 전신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가 창당되고 좌-우 이념이 확립될 쯤엔 당 내분으로 1920년 공산당이 창당되어 진영 내 팀 킬을 해서 지지층을 분열시켰기 때문. 덕분에 제5공화국 이전엔 사회당이 집권할 때도 연립내각으로 집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집권했을 땐 뭐 좀 해보려고 하긴 했는데, 이때도 뜬금없이 나치가 쳐들어오지를 않나[15] 겨우 물리치고 전후 복구 좀 하려 했더니 이제는 제국주의 시절이 저물며 식민지 독립 운동이 전개되지를 않나 그렇게 바쁜 일상을 거닐던 중 제5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는 68 운동의 여파 속에서 오히려 구좌파로 몰려 근 20여년 간 정권을 찾지 못하다 1969년 지금의 사회당으로 재창당하고 1980년대 미테랑 시대를 맞으면서 오늘날의 좌우 정권 교체 틀을 잡게 된다.

3.1. 19세기에서 2차 대전까지

사회당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여파로 프랑스 좌파는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자잘한 정당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중산층은 급진당[16]을 지지했고, 노동자 계급과 좌익 세력은 정부 참여, 중도 리버럴 세력과의 연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열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05년 쯤 되어서야 SFIO(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의 단일정당으로 힘을 합치게 되는데, 이 정당이 사실상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의 모체다.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SFIO는 제2인터내셔널에 프랑스 노동 계급-좌익 세력의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 기간 동안 SFIO는 주로 리버럴 정당과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리버럴이 정권을 잡아도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쉽게 말해 중도좌파 진영의 콩라인이 이 시절 사회당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SFIO는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좌-우파로 분열된다. 결국 1920년대 당내 좌파는 프랑스 공산당으로 떨어져 나가고, 반 쪽이 된 SFIO는 기타 중도좌파 정당들을 흡수합병하면서 세력을 키우다가 1936년 급진당, 공산당 등과 함께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당선된 레옹 블룸이 프랑스 최초의 정통 좌파 총리.[17][18] 하지만 다양한 정당들의 연립은 오래 유지되기 힘들었고 중도파와 좌파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여차저차하는 사이 나치의 프랑스 침공으로 제3공화국은 1940년 멸망했다.

3.2. 제4공화국

알고보면 사회당의 진짜 황금기.

프랑스 해방 이후 세워진 프랑스 제4공화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복지국가의 기틀을 잡은 시기이다. 제3공화국의 주도세력이었던 중도파의 세가 급속히 쇠락하였고, 드골파와 공산당의 세가 크게 신장되었지만 1946년에 드골파가 정권 탈퇴 선언을 하고 공산당이 집권에서 배제되면서, 프랑스 정치는 이른바 '삼당주의(Tripartisme)'라고 불리는 일종의 새로운 대연정이 주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 삼당주의의 삼당은 SFIO, 급진공화당[19], 대중공화운동(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20]으로 어느 당도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하자[21] 이런 대연정을 통해 집권을 꾀한 것이다. 그래도 이 삼당주의는 꽤 효과를 봐서 제4공화국 기간 동안 이들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고, SFIO 역시 내각에 참여해 사회보장제도를 창설하는 등 복지국가 프랑스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게 된다.

다만 넓은 스펙트럼의 대연정 성격상 내각 교체가 잦았고, 특히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이어지는 독립 전쟁, 점점 심화되는 냉전의 위기 등으로 인해 제4공화국은 위기를 맞게 된다. 결정타는 1958년 5월 알제리 독립에 결사 반대하며 드골 장군 옹립을 주장하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으로 내전을 우려한 연립내각은 반란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드골이 임시 총리로 취임하고, 결국 헌법도 바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제5공화국이 세워진다.

3.3.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제5공화국 초기 SFIO는 왼쪽의 공산당, 오른쪽의 드골주의에 치여 한동안 갈피를 못 잡는다. 드골주의에 찬성하는 건지, 반대하는 건지 모를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젊은 층의 마음은 떠나버렸고 결국 몇 번의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한다. 결과를 보자.

그래도 제5공화국 출범 7년만인 1965년 대선에선 드골의 단독 과반 득표가 예상되던 추측을 깨고 결선까지 진출하여 44.8%를 득표하며 나름대로 선전했고, 196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선 SFIO가 동거정부 설립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의석수를 65석에서 117석으로 늘리고 우파 정당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다시 부활의 조짐도 보였다.

허나 68 운동 와중에 치러진 196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좌파 정당들의 사분오열과 우파의 대결집으로 인해 당초 좌파가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참패해버렸고, 드골 사임 직후 1969년 대선에서는 5.21%를 얻는 기염을 토했다.[25] 게다가 2차 선거에서 1차 선거 결과에 실망한 상당수 좌파 지지자들이 투표에 불참하면서 드골파였던 조르주 퐁피두가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연장했다.

그리고 SFIO는 망했다. 식민지 독립 문제와 기타 사회 문제에 있어 이도저도 아닌 모습을 보여주던 당시 SFIO는 학생운동을 통해 등장한 소위 "신좌파"들이 보기엔 드골과 마찬가지로 몰아내야 하는 "구좌파"에 불과했다. 그렇게 결국 SFIO는 1969년 사회당(Parti Socialiste)으로 재창당하게 된다.

3.4. 창당과 미테랑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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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 시기는 사회당의 제2의 전성기라 불릴 만했다. SFIO가 사회당으로 재창당한 이후 가장 큰 전환점은 프랑수아 미테랑의 입당이었다. 이미 단일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며 좌파 전반과 느슨한 연대를 유지했던 그는 합류와 동시에 사회당을 좌파·중도 진영 전체의 중심 정당으로 격상시켰다. 미테랑은 제4공화국 시절 장관직을 역임한 경력과 드골주의에 대한 일관된 비판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었고, 이는 사회당이 새로운 정치적 위상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다.

당권을 잡은 미테랑은 당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와 조화를 이루는 사민주의로 전환하는 한편, 공산당을 포함한 다른 좌파 정당들과의 선거 연합을 추구했다. 이러한 전략은 전통적 지지층과 중도 유권자를 동시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냈다. 1973년 총선에서의 선전을 시작으로, 1974년 대선에서는 비드골 우파인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를 상대로 1차 투표에서 승리하며 가능성을 입증했으나 2차 투표에서 아쉽게 패배했다. 1977년 지방선거에서는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며 기세를 올렸지만, 1978년 총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강세를 보이고도 2차 투표에서 중도·우파 연합 공세에 밀려 주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거에서 사회당은 처음으로 공산당을 앞지르며 좌파 진영의 주도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다.

1981년 대선에서 미테랑은 데스탱을 누르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도 사회당은 단독 과반을 확보하여 정권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는 냉전 구도와 맞물려 공산당의 급격한 쇠퇴와도 연관이 깊다. 이미 68 운동 이후 공산당은 혁명을 외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고,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한 것이 결정타였다. 공산당 지지율은 반 토막이 났고, 좌파 유권자들은 승리 가능성이 높은 사회당으로 전략적 투표를 집중시켰다. 미테랑의 판단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사회당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처음으로 좌파 단독 집권에 성공했다.

집권 초기 미테랑 정부는 110개조 강령으로 상징되는 진보적 개혁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집권 중반에 접어들며 고환율, 재정 적자, 자본 유출 등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자 정책 기조는 점차 보수적으로 이동했고, 이는 곧 공산당과의 결별로 이어졌다. 1986년 총선에서 과반을 상실한 사회당은 결국 우파 지도자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하여 제5공화국 최초의 동거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이 시기 사회당은 내치에서 한계를 드러냈지만, 미테랑은 외교적 성과와 대통령으로서의 상징적 권위를 바탕으로 정치적 균형을 유지했고, 1988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결과적으로 미테랑은 14년간의 집권을 이어가며 프랑스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재임은 사회당을 제5공화국의 주요 집권세력으로 확립시킨 결정적 전환점이었고, 동시에 프랑스 진보진영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3.5. 미테랑 이후의 사회당

상술한 바와 같이 1971년 이후의 사회당은 많은 의미에서 미테랑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요직을 맡았던 인물들 대부분이 미테랑 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그의 정치적 유산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미테랑 퇴임 이후 사회당의 상황은 순탄치 않았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우파 진영의 자크 시라크니콜라 사르코지에게 연달아 권력을 내주었고, 사회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꼽히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은 오히려 성추문 사건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고 대선은 꿈도 못꾸는 상황이 됐다.

특히 2002년 대선은 사회당에 치명적이었다. 후보로 나선 리오넬 조스팽은 여론조사에서 시라크를 앞서기도 했으나, 실제 투표에서는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에게 밀려 결선 진출조차 하지 못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았다. 지지층이 안일하게 투표에 나서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후 좌파 유권자들은 차악을 택한다는 심정으로 시라크를 지지해 압승을 이끌었는데, 당시를 상징하는 구호가 “부패한 자를 뽑자, 파시스트보다는 낫다!(Votez escroc, pas facho!)”였다.

그래도 2012년 대선에서 프랑수아 올랑드가 승리하면서 사회당은 오랜만에 집권에 성공했다. 같은 해 총선에서도 다수당이 되어 동거정부를 피할 수 있었고.[27], 17년 만의 정권 교체로 높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올랑드 정부는 취임 직후 공약과 다른 우경화 정책을 추진했고, 장기화된 경기 침체와 잇따른 테러 사태로 지지율이 빠르게 하락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당의 내분이 심화되었다. 올랑드 키드로 불리던 전 경제장관 에마뉘엘 마크롱은 당을 떠나 중도 성향 신당 앙 마르슈!를 창당하고 2017년 대선에 출마했다. 반대로 사회당은 당을 이탈한 진보 성향 지지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올랑드와 반대되는 성향의 브누아 아몽을 후보로 내세웠지만, 내부의 분열과 지지층 이탈로 참패했다. 중도 성향 유권자들은 마크롱에게, 강경 좌파는 장뤼크 멜랑숑불복하는 프랑스(LFI)로 이동했고, 아몽은 집권여당 후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낮은 득표율에 머물렀다.

마크롱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회당 소속 의원 상당수가 공개적으로 앙 마르슈!에 합류를 신청했고, 실제로 다수가 공천을 받았다. 그 결과 2017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불과 29석(연합 포함 44석)만을 확보하며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했다. 지지 기반은 사실상 붕괴했고, 당의 정체성은 중도 세력과 급진 좌파 사이에서 완전히 양분되었다.

결정적으로 대선후보였던 브누아 아몽마저 탈당하면서 위기는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당시 당 총서기(당대표)였던 장 크리스토프 캄바델리는 “사회당을 지키는 것이 좌파의 미래다”라는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했다. 그 결과 사회당은 공중분해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비판과 조롱을 피할 수 없었다.

3.6. 암흑기

총선 이후 당 총서기였던 장크리스토프 캉바델리스가 퇴임과 브누아 아몽의 탈당이 이어지고 나서야 사회당은 주요 당직자를 전면 교체했다. 올랑드 정부의 노동개혁에도, 마크롱 정부에도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좌파 성향의 올리비에 포르 의원이 새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다.[28] 교섭단체 명칭도 기존의 사회주의(socialiste)대신 신좌파(Nouvelle gauche)로 변경되었다. 이에 대해 당 관계자는 “역대 최저 수준의 의석수와 급변한 좌파 정당 지형 속에서 좌파의 내용을 새롭게 정의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사회당이 반(反) 마크롱 전선에서 가장 큰 의석을 보유한 정당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 규모는 여전히 30석이 채 되지 않았다.

이후 좌파 재편 논의가 진행되면서 브누아 아몽과 그의 신당 운동세대(Génération.s)’등이 대안정당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 재정도 악화되어 2017년 12월에는 당사 건물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2017년 하반기 들어 마크롱 지지율이 다시 반등하면서 사회당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계도 더 이상 사회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2018년 10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당내 좌파 그룹인 연합과 희망(L'Union et Espoir)을 이끌던 에마뉘엘 모렐 유럽의회 의원과 마리-노엘 리네만 상원의원이 650여 명의 활동가와 함께 탈당해 장뤼크 멜랑숑의 불복하는 프랑스와 연대하는 신당을 창당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사회당이 유럽의회 진출에 필요한 5% 득표선조차 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마크롱 정부의 지지율이 노란 조끼 운동으로 크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사회당 지지율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좌파 진영의 주도권은 멜랑숑과 LFI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회당은 6.19%를 득표해 5석을 확보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최저 수준의 결과였지만, 한때 원내 진출 여부조차 의심받던 상황을 고려하면 최악은 면한 셈이었다. 이후에도 당은 부진을 이어갔으나, 코로나19 확산과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 강행을 계기로 열린 2020년 지방선거에서 반전을 마련했다. 파리와 마르세유 등 주요 도시에서 생태녹색당과 연합해 1차 투표에서 선전했고, 코로나19로 연기된 2차 투표에서도 파리 시장직을 지켜내며 일부 지지층이 사회당으로 복귀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그러나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당은 다시 주저앉았다. 2020년 지방선거 승리로 잠시 주목을 받았던 안 이달고 파리시장이 대선 후보로 나섰으나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당 전체의 지지율도 반등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1차 투표에서 사회당 표는 마크롱이나 멜랑숑 쪽으로 쏠렸고, 사회당 후보는 사실상 존재감을 잃었다. 대선 직후 열린 총선을 앞두고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은 결국 멜랑숑의 불굴의 프랑스가 주도하는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2022년 총선 결선 투표에서 사회당은 선거 전보다 4석 줄어든 26석을 확보하며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좌파 진영의 주도권은 완전히 멜랑숑과 LFI에 넘어갔고, 사회당은 또다시 당의 정체성과 노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3.7.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NUPES 합류 이후 사회당은 기존의 사회자유주의·제3의 길 성향에서 벗어나 좀 더 좌파적이고 선명한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진보주의로 이동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특히 198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집권 이전의 사회당과 비교되곤 한다. 불굴의 프랑스와의 연대에 반대하던 구(舊) 올랑드계가 상당수 탈당하면서[29] 오히려 당 노선이 명확해졌고, 범좌파 진영과의 화해가 가능해졌다는 긍정적 평가도 제기된다.#

이와 함께 지지율도 반등하여 공화당을 앞서는 조사 결과가 나오며, 범좌파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2023년 1월 치러진 프랑스 국민의회 파드칼레 제8선거구 보궐선거에서는, NUPES 단일 후보로 출마한 사회당의 베르트랑 프티가 결선에서 66%를 득표하며 압승을 거두었다.[30] 반면 아리에주 제1선거구 보궐선거에서는 사회당이 독자 후보 마르틴 프로제를 내세워 NUPES 단일 후보와 맞붙었고, 니콜라 메이어로시뇰과 베르나르 카즈뇌브 등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면서 당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상원 간선 선거에서는 좌파 연합을 유지하며 의석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당세도 점차 회복세를 보였다. 2023년 12월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좌파 진영 내에서 불복하는 프랑스를 앞서며 범좌파 정당 중 1위를 기록하기도 했고, 두 자릿수 지지율을 회복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둔 여름 여론조사에서는 10% 초반대 지지율로 국민연합과 르네상스에 이어 3위를 차지했으며, 4월 말 기준으로는 르네상스와 2위 자리를 두고 경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국민연합의 대약진과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 선언에 가려졌지만, 사회당은 14%의 득표율로 LFI를 제치고 르네상스 주도의 여당 연합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이 성과 덕분에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 총선 결정 이후 결성된 신인민전선 내 선거구 조정 과정에서, 사회당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선거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3.8. 부활

2024년 치러진 국민의회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여한 신인민전선이 2차 투표까지 가는 끝에 제1당을 확보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그 중에서도 사회당이 60석 가량을 확보하여 의석수를 2배로 불리며 크게 선전했다. 게다가 사회당이 신인민전선 내에서 가장 온건한 성향인 덕에 중도 정당의 묵인 아래 사회당이 오랜만에 신임 총리를 배출할 가능성도 커졌다. 사회당이 총리 자리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향후 의회에서 영향력이 대폭 증가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마크롱이 불복하는 프랑스국민연합을 배제하고 온건 좌우파와 중도파가 연합하는 소위 공화연대를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사회당이 자당 인사를 총리로 올리기 위해 신인민전선에 내부총질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번지고 있다. 당연히 사회당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31]# 다만 마크롱이 결국 프랑수아 바이루를 총리로 지명하고, 사회당이 바이루 불신임안에 반대하며 신인민전선 내 갈등은 심화되었다.

4. 출신 인물

4.1. 사회당 소속 대통령

  • 프랑수아 미테랑 - 제21대 프랑스 대통령. 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자 14년의 임기로 역사상 최장 기간 재임한 프랑스 대통령.[32] 사회당을 넘어 프랑스 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프랑수아 올랑드 - 제24대 프랑스 대통령.

4.2. 사회당 소속 총리

  • 피에르 베레고부아 - 프랑스의 전 총리이자 미테랑과는 일생의 동지였으나 1993년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자살했다.
  • 리오넬 조스팽 - 1995년 대선에서 의외의 선전을 거두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당시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와 좌우 동거정부를 구성했다. 당대에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 지도자라는 평을 받았지만 2002년 대선 당시 좌파가 대분열하는 상황 속에서 장마리 르펜에게 밀리며 1차 선거에서 충격의 탈락을 하는 참사를 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 마뉘엘 발스 - 올랑드 행정부 당시 총리였다.

4.3. 기타

  • 세골렌 루아얄 - 2007년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와 맞붙은 여성 정치인이다. 그리고 한때는 프랑수아 올랑드의 동거인으로 무려 3명의 자녀까지 낳았다. 하지만 2007년에 대선을 치르면서 결별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랑드가 대통령으로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 루아얄을 환경부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4.3.1. 탈당한 인물

5. 역대 총서기

파일:사회당(프랑스) 로고(2025) 흰색.svg 사회당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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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알랭 사바리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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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대 선거결과

(지방선거는 제외)

6.1. 대통령 선거

||<table width=100%><width=10%> 연도 ||<width=25%> 선거명 ||<width=15%> 대통령 후보 ||<width=20%> 1차 득표수 (득표율) ||<width=20%> 2차 득표수 (득표율) ||<width=10%> 결과 ||
1974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프랑수아 미테랑 11,044,373 (43.25%) 12,971,604 (49.19%) 낙선
1981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7,505,960 (25.85%) 15,708,262 (51.76%) 당선
1988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10,367,220 (34.10%) 16,704,279 (54.02%) 당선
1995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리오넬 조스팽 7,097,786 (23.30%) 14,180,644 (47.36%) 낙선
2002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4,610,113 (16.18%) 첫 1차 탈락[33] 낙선
2007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세골렌 루아얄 9,500,112 (25.90%) 16,790,440 (46.94%) 낙선
2012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프랑수아 올랑드 10,272,705 (28.60%) 18,000,668 (51.64%) 당선
2017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브누아 아몽 2,291,565 (6.36%) 5위로 1차 탈락[34] 낙선
2022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안 이달고 604,203 (1.74%) 10위로 1차 탈락 낙선

6.2. 국민의회 선거

||<table width=800><width=10%> 연도 ||<width=40%> 선거명 ||<width=40%> 총 의석 (비율) ||<width=10%> 결과 ||
1973 1973년 총선 89 (18.9%)
1978 1978년 총선 104 (22.6%) [35]
1981 1981년 총선 269 (36.0%) [36]
1986 1986년 총선 206 (31.0%) [37]
1988 1988년 총선 260 (34.8%)
1993 1993년 총선 53 (17.6%) [38]
1997 1997년 총선 255 (23.5%)
2002 2002년 총선 140 (24.1%)
2007 2007년 총선 186 (24.7%)
2012 2012년 총선 280 (29.4%)
2017 2017년 총선 29 (7.44%) [39]
2022 2022년 총선 26 (4.51%) [40]
2024 2024년 총선 59 (10.22%) [41]

6.3. 상원의원 선거

2017년 상원 46 (26.90%) 2위

7. 기타

||<-3><tablebgcolor=#002395><tablebordercolor=#002395><tablewidth=100%>
프랑스의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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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자유주의 · 급진주의 자유주의 우파
드골주의
내셔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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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수아 미테랑[2] 한국의 광역자치단체장에 해당한다.[3] 한국의 기초자치단체장에 해당한다.[4] 프랑스 사회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사회-생태' 이념으로 부른다.[A]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舊 올랑드계를 비롯한 당내 온건파들이 대거 이탈한 상황이다.[A] [B] 現 사회당 주류파.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당권을 잡고 있다.[B] [A] [10] 중도좌파 ~ 좌익 내지 단순 좌익 계열에 가까운 사람들이 주류이며 중도 ~ 중도좌파에 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대부분 빠져나갔다.[11] Jeunes socialistes[12] Homosexualités et Socialisme[13] 사실 사회당의 전신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시절 레옹 블룸 내각이나 기타 대연정 시절 연립여당으로 참여한 적도 있긴 하지만, 선봉에 서서 정권을 이끌어가는 수준은 아니었다.[14] 프랑스에서 우파 정당은 명칭을 자주 바꾸는 데 비해, 사회당은 1969년부터 명칭을 쭉 유지해오고 있다.[15] 사실 사회당 계열은 이전에 집권하다 내려왔고, 이땐 집권하고 있을 시기는 아니었다.[16] Parti Radicale, 프랑스 혁명 직후 창당된 정당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땐 반-왕정 스탠스로 "급진"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때쯤에 이르러서는 중산층의 리버럴 정당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17] 그 전까지 급진당 등 중도파가 권력을 잡은 일은 있었지만, 이념적으로 따졌을땐 사회주의 정권은 아니었다. 물론 이 좌파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보냐의 문제긴 하지만.[18] 지금의 프랑스 정치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주도하는 모습이지만, 제5공화국 수립 이전까지만 해도 의원내각제였고 덕분에 총리가 실질적인 행정수반이었다. 그 전통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라서 프랑스는 지금도 흔히 대통령과 총리의 "이원집정부제"라고 묘사된다.[19] 리즈 시절이었던 제3공화국에 비해서 세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일종의 대연정이 구성된 덕택에 이 시기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20] 기독교 민주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 1967년 '민주중도'로 당이 개편되며 해체되었다.[21] 심지어 이때 좌파 제1당은 SFIO가 아닌 공산당이었다.[22] 드골의 신생정당.[23] 총 의석 576석.[24] 대신 좌파 단일 후보로 미테랑이 출마했다.[25] 참고로 이 선거에서 공산당은 21.27%를 얻었다.[26]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의 승리를 예측하는 방송사 출구조사이다. 자세히 보면 텔레텍스트로 그려진 얼굴로 보인다.[27]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5년으로 줄면서 동거정부 형성의 가능성이 줄어들기는 했다.[28] 다만 동시에 올랑드 계파에 속하기도 했다.[29] 2017년 이후 마크롱을 지지하면서도 사회당 당적을 유지하던 세력이었으나, 총선을 전후해 대거 탈당했다. 다만 올랑드 본인은 탈당하지 않았다.[30] 1년 전 선거에서는 56% 득표였으므로 약 10%p 상승한 결과였다.[31] 앙상블(168석)+사회당(59석)+공화당 내 드골주의자 의원들(45석)을 합치면 272석이 되며, 역시 온건한 성향의 생태녹색당(33석)까지 연대하면 305석이 되어 과반을 넘긴다.[32] 당시에는 프랑스 대통령이 7년 중임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는 5년 중임제이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이 이 기록을 넘어설 수는 없게 되었다.[33] 당초에는 조스팽 총리가 나름대로 인기가 좋았기에 시라크 대통령에게 조금 우세했지만 정작 출구조사가 발표되니까 장 마리 르 펜 결선 투표 진출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가 나왔다.[34] 기존 사회당 지지층이 마크롱과 멜랑숑에게 쏠려서 1차에서 10%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며 탈락했다. 기존에 양당체제를 이루던 공화당 역시 득표율 3위를 기록하면서 탈락했다.[35] 이 선거를 기점으로 공산당의 의석수를 넘어섰다. 사실 사회당 입장에서 볼때 2차 선거에서의 역전패로 그리 좋게 기억되지 않는 선거이기는 하지만.[36]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회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했다.[37] 결선투표제가 아닌 비례대표제로 실시되었다.[38] 사회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 되고 있는데 집권여당 의석수가 전체의석(577석)의 10%에도 못 미치는 엄청난 참패였다.[39] 당 대표가 1차 투표에서 낙선 하였다.[40] 범좌파 정당연합인 NUPES에 참여했다. 의석수가 역대 최저를 기록했지만 이마저도 정당연합에 참여해 겨우 선방했다는 표현이 나올정도로 사회당 입지가 추락했다.[41] 범좌파 정당연합인 신인민전선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