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px -10px" {{{#!folding [ 상원 교섭단체 구성 ] | |||||||
공화당 그룹 148석 | 사회·생태·공화주의1 65석 | 중도연합2 57석 | |||||
민주·진보·무소속 연합3 24석 | 공산·공화주의·시민과 생태주의4 15석 | 민주사회적 유럽연합5 14석 | |||||
무소속 그룹 | |||||||
무소속-공화국과 국토 그룹6 13석 | 연대·국토 생태주의 그룹 12석 |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상원의원들의 행정 회의7 3석 | |||||
*. 각 교섭단체 소속 의원은 정당과 상관없이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교섭단체에 있는 정당명과 소속의원의 당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1. 사회당, DVG(범 좌파 진영), MDC(시민 운동)으로 구성된 교섭단체. 2. UDI 중심의 중도 교섭단체. 3. 르네상스 중심의 교섭단체. 4. 공산당 중심의 교섭단체. 5. 급진운동, 사회당, DVG(범 좌파 진영) 등으로 구성된 중도 교섭단체. 6. 범 우파진영, UDI, 급진운동 등으로 구성된 중도우파 교섭단체. 7. 교섭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연합, 재정복!이 여기에 속한다. | }}}}}}{{{#!wiki style="margin:0px -10px" {{{#!folding [ 하원 교섭단체 구성 ] | 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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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그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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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치 특성상 원내 구성이 자주 바뀌는 경우가 많아 갱신이 늦을 수 있음. *. 각 교섭단체 소속 의원은 정당과 상관없이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교섭단체에 있는 정당명과 소속의원의 당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N. 신인민전선 가맹 그룹. C. 공화당 내 에릭 시오티 파벌이 내분 끝에 별도로 만든 교섭단체. 1. 르네상스 외 9개 정당 참여중. 2. 민주운동 외 1개 정당, 무소속 의원이 참여중. 3. 수평선, 민주독립연합 외 3개 정당 참여중. 4. 공화당 외 4개 정당 참여중. 5. 국민연합 외 1개 정당 참여중. 6. 불복하는 프랑스 외 6개 정당 참여중. 7. 사회당 외 3개 정당 참여중. 8. 유럽 생태녹색당 외 5개 정당 참여중. 9. 사회당 외 9개 정당 참여중. 10. 프랑스 공산당 외 6개 정당 참여중. 11. 바로선 프랑스와 불복하는 프랑스 외 2개의 정당의 개별 의원들이 이에 해당함.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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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 Socialiste | 사회당 | |
<colcolor=#e50040,#FFF> 영문명 | <colbgcolor=#fff,#1f2023>Socialist Party |
약칭 | PS |
슬로건 | Ensemble, retournons au combat. 함께 투쟁으로 돌아가자. |
창당일 | 1969년 |
이전 정당 | |
주소 | 99 뤼 몰리에르, 94200 이브히 쉬흐 센 파리 (제13구역, 사회당 당사) |
제1서기 | 올리비에 포르 / 4선 (14~17대) |
전국위원장 | 코린 나라시긴 / 초선 (14대) |
상원 원내대표 | 파트리크 카너 / 초선 (10대) |
하원 원내대표 | 보리스 발로 / 3선 (15~17대) |
대통령 | 프랑수아 미테랑 / 21대 (1981.5 ~ 1995.5) |
프랑수아 올랑드 / 24대 (2012.5 ~ 2017.5) | |
상원 | 61석 / 378석 (18.7%) |
국민의회 | 59석 / 577석 (5.4%) |
유럽의회 | 3석 / 81석 (3.8%) |
시주지사[1] | 4석 / 17석 (23.5%) |
데파르드망[2] | 21석 / 95석 (22.1%) |
당색 | 빨간색 (#E50040) |
이념 | 사회민주주의 생태주의[3] 친유럽주의 내부 계파 : 제3의 길[A] 사회자유주의[A] 민주사회주의[B] 생태사회주의[B] 기독교 좌파[A]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9] |
국제조직 | |
유럽 정당 | 유럽 사회당 |
유럽의회 정당 | |
청년조직 | 젊은 사회당 (Jeunes socialistes) |
LGBT 조직 | 사회주의와 호모섹슈얼 (Homosexualités et Socialisme) |
당원수 | 41,000명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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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당.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다.2. 상세
프랑스의 가장 거대했던 좌익 정당으로 프랑스에서는 중도좌파 스탠스로 인식된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수아 올랑드라는 두 명의 전임 프랑스 대통령을 배출한 프랑스 제5공화국 기준 프랑스 범좌파 진영의 대표 정당이었으나[10]표방 이념은 사회민주주의이며, 전신은 1905년에 창당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이다.[11] 가입되어있는 국제조직은 진보동맹,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유럽 사회당이며, 상위 유럽의회 정당은 사회민주진보동맹에 소속되어 있다.
3. 역사
프랑스하면 좌파 운동 이미지가 강한 편이지만, 사실 사회당 자체는 상당 기간 비주류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세기야 사회주의 자체가 유럽에서 겨우 이름을 들이밀때라 지지층들은 오히려 급진당 등 자유주의 정당에 묻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고, 20세기 초에도 그렇게 묻어가다 사회당의 전신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가 창당되고 좌-우 이념이 확립될 쯤엔 당 내분으로 1920년 공산당이 창당되어 진영 내 팀 킬을 해서 지지층을 분열시켰기 때문. 덕분에 제5공화국 이전엔 사회당이 집권할 때도 연립내각으로 집권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래도 집권했을 땐 뭐 좀 해보려고 하긴 했는데, 이때도 뜬금없이 나치가 쳐들어오지를 않나[12] 겨우 물리치고 전후 복구 좀 하려 했더니 이제는 제국주의 시절이 저물며 식민지 독립 운동이 전개되지를 않나 그렇게 바쁜 일상을 거닐던 중 제5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는 68 운동의 여파 속에서 오히려 구좌파로 몰려 근 20여년 간 정권을 찾지 못하다 1969년 지금의 사회당으로 재창당하고 1980년대 미테랑 시대를 맞으면서 오늘날의 좌우 정권 교체 틀을 잡게 된다.
3.1. 19세기에서 2차 대전까지
사회당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여파로 프랑스 좌파는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자잘한 정당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중산층은 급진당[13]을 지지했고, 노동자 계급과 좌익 세력은 정부 참여, 중도 리버럴 세력과의 연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열된 상황이었다.그러다가 1905년 쯤 되어서야 SFIO(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의 단일정당으로 힘을 합치게 되는데, 이 정당이 사실상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의 모체다.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SFIO는 제2인터내셔널에 프랑스 노동 계급-좌익 세력의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 기간 동안 SFIO는 주로 리버럴 정당과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리버럴이 정권을 잡아도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쉽게 말해 중도좌파 진영의 콩라인이 이 시절 사회당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SFIO는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좌-우파로 분열된다. 결국 1920년대 당내 좌파는 프랑스 공산당으로 떨어져 나가고, 반 쪽이 된 SFIO는 기타 중도좌파 정당들을 흡수합병하면서 세력을 키우다가 1936년 급진당, 공산당 등과 함께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당선된 레옹 블룸이 프랑스 최초의 정통 좌파 총리.[14][15] 하지만 다양한 정당들의 연립은 오래 유지되기 힘들었고 중도파와 좌파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여차저차하는 사이 나치의 프랑스 침공으로 제3공화국은 1940년 멸망했다.
3.2. 제4공화국
알고보면 사회당의 진짜 황금기.프랑스 해방 이후 세워진 프랑스 제4공화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복지국가의 기틀을 잡은 시기이다. 제3공화국의 주도세력이었던 중도파의 세가 급속히 쇠락하였고, 드골파와 공산당의 세가 크게 신장되었지만 1946년에 드골파가 정권 탈퇴 선언을 하고 공산당이 집권에서 배제되면서, 프랑스 정치는 이른바 '삼당주의(Tripartisme)'라고 불리는 일종의 새로운 대연정이 주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 삼당주의의 삼당은 SFIO, 급진공화당[16], 대중공화운동(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17]으로 어느 당도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하자[18] 이런 대연정을 통해 집권을 꾀한 것이다. 그래도 이 삼당주의는 꽤 효과를 봐서 제4공화국 기간 동안 이들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고, SFIO 역시 내각에 참여해 사회보장제도를 창설하는 등 복지국가 프랑스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게 된다.
다만 넓은 스펙트럼의 대연정 성격상 내각 교체가 잦았고, 특히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이어지는 독립 전쟁, 점점 심화되는 냉전의 위기 등으로 인해 제4공화국은 위기를 맞게 된다. 결정타는 1958년 5월 알제리 독립에 결사 반대하며 드골 장군 옹립을 주장하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으로 내전을 우려한 연립내각은 반란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드골이 임시 총리로 취임하고, 결국 헌법도 바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제5공화국이 세워진다.
3.3.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제5공화국 초기 SFIO는 왼쪽의 공산당, 오른쪽의 드골주의에 치여 한동안 갈피를 못 잡는다. 드골주의에 찬성하는 건지, 반대하는 건지 모를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젊은 층의 마음은 떠나버렸고 결국 몇 번의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한다. 결과를 보자.- 195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제1당 공산당 (150석; 25.36%); 제3당 SFIO (95석; 14.93%)
- 195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제1당 프랑스인민연합[19] (189석; 17.6%)[20]; 제4당 SFIO (40석; 15.5%)
- 195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샤를 드골 당선 (78.51%); SFIO 후보 없음.
- 1962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제1당 프랑스인민연합 (206석; 31.94%); 제2당 SFIO (65석; 12.54%).
- 1965년 대선: 샤를 드골 당선 (55.2%); SFIO 후보 없음.[21]
그래도 제5공화국 출범 7년만인 1965년 대선에선 드골의 단독 과반 득표가 예상되던 추측을 깨고 결선까지 진출하여 44.8%를 득표하며 나름대로 선전했고, 196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선 SFIO가 동거정부 설립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의석수를 65석에서 117석으로 늘리고 우파 정당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다시 부활의 조짐도 보였다.
허나 68 운동 와중에 치러진 196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좌파 정당들의 사분오열과 우파의 대결집으로 인해 당초 좌파가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참패해버렸고, 드골 사임 직후 1969년 대선에서는 5.21%를 얻는 기염을 토했다.[22] 게다가 2차 선거에서 1차 선거 결과에 실망한 상당수 좌파 지지자들이 투표에 불참하면서 드골파였던 조르주 퐁피두가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연장했다.
그리고 SFIO는 망했다. 식민지 독립 문제와 기타 사회 문제에 있어 이도저도 아닌 모습을 보여주던 당시 SFIO는 학생운동을 통해 등장한 소위 "신좌파"들이 보기엔 드골과 마찬가지로 몰아내야 하는 "구좌파"에 불과했다. 그렇게 결국 SFIO는 1969년 사회당(Parti Socialiste)으로 재창당하게 된다.
3.4. 창당과 미테랑 집권
[23]
이 시기는 그야말로 사회당 제2의 전성기였다. SFIO가 사회당으로 재창당한 후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프랑수아 미테랑의 입당이었다. 좌파 전반과 느슨한 연대를 유지하며 단일 후보로 대선에도 출마했던 미테랑이 입당하면서, 사회당은 중도파와 좌파의 맏형 비슷한 이미지를 쌓게 된다. 그가 제4공화국의 장관직을 역임했고 샤를 드골의 등장 직후부터 드골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던 점 역시 미테랑과 사회당의 대중적 지지를 높히는데 도움을 준다.
이후 당권을 잡은 미테랑은 당의 정책을 정통적 사회주의가 아닌 시장 경제와 접목된 사민주의로 트는 것과 동시에, 공산당 등 기타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를 추구하므로서 집토끼와 산토끼 둘 다를 잡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973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선전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974년 대선에선 1차 투표에선 승리를, 2차 투표에선 석패를 거두며 사회당의 부활을 알렸으며 1977년 지방선거에서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7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선전했음에도 2차 투표에서의 분패로(그래도 공산당을 앞지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동거정부 수립에는 실패하고 다시금 주춤해졌다.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결국 미테랑은 대권 도전에 성공하고, 취임 직후 치러진 1981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도 사회당이 단독 과반에 성공하면서 사회당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냉전이 계속되고 소련과 중국의 현실이 드러나면서 공산당은 지지를 잃었고[24] 다수의 좌파 유권자들이 사회당에 전략적 투표를 할 것이라는 미테랑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미테랑의 집권 초기는 "110개조 강령" 이라는 좌파 정책들을 충실히 이행한 시기였다. 하지만 집권 중반기를 지나면서 미테랑 정부는 고환율, 재정 적자 등의 이유로 좀 더 우클릭한 정책들을 도입했고 공산당 등 기타 정당과 결별하게 되었다. 198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과반을 내주면서 우파 자크 시라크 총리와 정권을 공유하는 "동거정부"를 구성했지만 미테랑 사회당 정부는 외교적인 성과를 기반으로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14년간의 재임기간을 통해 미테랑은 역대 최장 재임 프랑스 대통령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3.5. 미테랑 이후의 사회당
오늘날의 사회당은 미테랑의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당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전부 미테랑 밑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 좋으나 싫으나 미테랑 라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테랑 퇴임 이후 사회당은 내내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자크 시라크와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연달아 대권을 내준 것도 그렇고, 유력 대권주자로 손꼽히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심지어 2002년 대선에선 후보로 내세운 리오넬 조스팽이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에게 밀리면서 결선 진출에 실패하는 대참사를 맛보기도 했다. 사실 여론조사 결과만 보자면 오히려 조스팽이 시라크보다도 약간 더 앞서있었다. 그런데 지지층이 여론조사에 안심하고 투표장에 안 나온 것인지 뭔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르펜이 2위 자리를 차지하면서 멘붕. 그래도 결선에서는 시라크를 밀어줘서 압승을 거뒀으니, 나름 대인배라면 대인배다. 물론 정말로 비판적 지지이기는 했다. 당시 시라크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던 모토가 "Votez Escroc, pas Fasho! (파쇼 말고 부패한 놈 뽑자!)"였으니 말 다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정말 오랜만에 정권을 잡았다. 총선도 승리해서 동거정부를 꾸릴 이유도 없다는 것은 덤.[25] 17년만의 정권 교체로 초반 지지율은 높은 편이었지만 취임하자마자 적극적인 우클릭에 나서며 공약과 다른 정책을 펴는 데다가 계속된 경제난과 연달아 터진 큼직한 테러의 여파로 올랑드에 대한 지지도는 급속히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올랑드 키드'로 유명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전 경제부 장관은 사회당을 탈당해서 중도신당 앙 마르슈!를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다. 사회당에서는 올랑드와 반대 노선을 걷는 브누아 아몽이 후보로 나섰지만, 올랑드 대통령은 암묵적으로 마크롱을 지지했고, 사회당 내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지지자들도 중도파는 마크롱으로, 좌파는 장뤼크 멜랑숑[26]으로 떨어져 나가고, 아몽은 대선 1차 투표에서 집권 여당 후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처참한 득표율로 광탈했다. 출구조사가 끝난 직후에 바로 승복 선언을 했을 정도.
마크롱 대통령 당선 후에는 사회당 현역 의원들 중 무려 90명이 앙 마르슈!에 공천을 신청했고 그 중 24명이 공천을 받았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만큼 해당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대선 다음 달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겨우 44석[27]으로 추락하면서 대차게 망해버렸다. 중도적인 유권자들은 마크롱의 앙 마르슈!로, 강성좌파 지지자들은 뚜렷하게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불굴의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지지 기반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더욱이 당의 대선후보였던 브누아 아몽[28]마저 탈당하면서 사회당의 미래는 더더욱 암울해졌다. 이 상황에서 당 제1서기(당 대표)인 장 크리스토프 꺙바델리는 '사회당을 지키는 것이 좌파의 '미래다'는 공염불스런 말만 시전하고 있어, 당의 공중분해가 머지 않았다는 조롱마저 나오고 있다.
3.6. 암흑기
총선 이후 당 제1서기(당대표)였던 장 크리스토프 꺙바델리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고, 브누아 아몽의 탈당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드디어 주요 당직자들을 물갈이했다. 지난 올랑드 정권의 노동 개혁에도 반대하고 현 마크롱 정권에도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당내 좌파 올리비에 포르 의원이 원내대표에 취임했다.[29]그리고 교섭단체 명을 '신 좌파(Nouvelle gauche)'로 변경했는데, 왜 오랫동안 써오던 '사회주의(socialiste)'의 이름을 쓰지 않냐는 질문에 당의 관계자는 '유래가 없었던 정도의 적은 의석수와 급변해버린 좌파 정당들의 구도 속에서 좌파 자체의 내용을 바꾸고 새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답변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도 전임 대통령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보다 더 빠르게 폭락했고 반-마크롱 전선에서는 가장 큰 의석수(그래봤자 30석도 안 된다)를 가지고 있는 지라, 어느 정도 상황 정리가 되고 있는 모양새이다.그리고 탈당했던 브누아 아몽과 그의 정당인 '운동세대(Génération.s)'를 비롯해 좌파 재편 논의가 다시 진행되면서 사회당에 대한 기대 역시 모아지고 있지만, 결국 구상이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17년 12월에 기부금과 정당 보조금 급감으로 당사까지 매각한 상태이다. 더욱이 2017년 4분기 들어 마크롱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회복되고 있어 사회당으로서는 미래가 암담한 상황이다. 노동자들도 사회당에 예전과 같은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2018년 10월, 내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서 지지율은 호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내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당내 좌파 세력[30]을 이끌던 에마뉘엘 모렐(Emmanuel Maurel) 유럽의회 의원과 마리-노엘 리네만(Marie-Noëlle Lienemann) 상원의원이 650여 명의 활동가들과 함께 탈당하고 장뤼크 멜랑숑의 불굴의 프랑스와 연대하는 신당을 창당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의회 진출[31] 자체가 의심스러운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노란 조끼 운동과 함께 바닥으로 향하는 마크롱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의 지지율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마크롱 행정부의 떨어지는 지지율을 우파 측에서는 마린 르 펜의 국민연합이, 좌파 측에서는 멜랑숑의 불굴의 프랑스가 나눠서 먹고 사회당은 그냥 묻히는 형세.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6.19%의 득표율로 의석 5석을 얻었다. 물론 사회당 역사상 유럽의회 선거에서 얻은 최악의 득표율이지만, 한때 의석을 얻느냐 마느냐를 논할 정도로 지지율이 폭락했던 때보다는 그나마 나은 결과.
이후에도 부진을 이어갔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범유럽 확산과 이를 핑계 삼은 마크롱 행정부의 연금 개편안 직권 처리의 영향으로 2020년 3월 15일 열린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파리, 마르세유 등 주요 도시에서 녹색당과 함께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다. 대부분 주요 도시에서 범좌파(사회당-녹색당 등)가 득표율로 이미 과반을 확보한 상황이라 2차 투표에서 승리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22일로 예정되었던 2차 투표가 연기되었다.
그리고 2차 투표에서 파리시장 직을 지키는 등 예상대로 녹색당과 같이 선전하였다. 마크롱에 실망해 이탈한 진보 성향 지지자들이 조금씩 복귀하면서 다시 지지세가 회복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대선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여전히 준비가 지지부진한 편인데 2020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 마크롱 행정부에게 펀치를 날리며 지지율 3위로 올라섰던 안 이달고 파리시장이 다시 한자리수 지지율로 추락한데다가 당 지지율도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러면 사회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입장에서도 차선책으로 마크롱을 한 번 더 찍어야 할지 아니면 진영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사회당 후보를 찍어야 할지 고민될 것으로 보이며, 앙 마르슈!나 국민연합이나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하기는 난망할 것 같으니 차라리 대선보다는 총선을 노리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결국 실제 1차 투표에서 그나마 있던 표들이 마크롱이나 멜랑숑으로 쏠리며 대망했고, 이제는 당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결국 6월에 있는 국민의회 선거 과정에서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장뤼크 멜랑숑과 불굴의 프랑스가 주도하는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에 참여하기로 했다.
국민의회 결선 투표 결과, 선거 전 대비 4석을 잃고 26석을 지키면서 멸절의 위기는 넘겼다. 하지만 그 대가로 좌파 진영의 주도권을 아예 멜랑숑과 불굴의 프랑스에 넘긴 셈이 되어서 향후 당의 노선을 두고 또 다시 치열한 논쟁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3.7.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NUPES 가입 이후로는 확실히 당이 기존의 사회자유주의 내지 제3의 길 성향에서 좀 더 좌파적이고 선명한 민주사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내지 진보주의로 이동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198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집권 이전과 비교되고 있는데, 불굴의 프랑스와의 연대에 반대하는 舊 올랑드계[32]가 당을 떠나게 되면서 오히려 노선 정리가 되어 범좌파 진영과 불가능할 것 같았던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평가.#또한 NUPES 참여 이후로 지지율 역시 반등하여 공화당보다 지지율이 높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범좌파 내에서 유의미한 영향력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1월 열린 프랑스 국민의회 보궐선거 중 파드칼레 8구 재선거[33]에서 NUPES 단일 후보로 나선 사회당의 베르트랑 프티가 결선 투표 끝에 66% 득표로 압승을 거두면서 의석을 지켰다.[34]
다만 아리에주 1구 보궐선거에서는 NUPES에서 반대해 사회당에서 독자 출마한 마르틴 프로제르가 니콜라 메이어로시뇰, 베르나르 카즈뇌브 등의 지원을 받아 NUPES 단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당을 다소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2023년 9월 열린 간선 상원 선거에서도 좌파 연합을 유지해 의석수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이후에도 위축된 당세를 이어가는가 했는데 2023년 12월 일부 조사에서는 좌파 진영 내 라이벌인 불굴의 프랑스를 누르고 범좌파 진영 정당 중 1위를 차지한 조사도 있을 만큼 당세를 회복했고 일부 조사에서는 두 자릿 수의 지지율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2024년 여름에 있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둔 여론조사에서 10% 초반대 지지율로 국민연합과 르네상스의 뒤를 잇는 3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4월 말을 기준으로는 르네상스와 2위 싸움을 펼치고 있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국민연합의 대약진과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 선언에 가려졌지만 14% 득표율로 불굴의 프랑스를 제치고 르네상스 주도 여당 연합에게 살짝 밀린 3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이 선전 덕분에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 총선 이후 신인민전선이 형성되자, 선거구 배분에서 이전과 달리 많은 선거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3.8. 새로운 부활
2024년 치러진 국민의회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여한 신인민전선이 2차 투표까지 가는 끝에 제1당을 확보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그 중에서도 사회당이 60석 가량을 확보하여 의석수를 2배로 불리며 크게 선전했다. 게다가 사회당이 신인민전선 내에서 가장 온건한 성향인 덕에 중도 정당의 묵인 아래 사회당이 오랜만에 신임 총리를 배출할 가능성도 커졌다. 사회당이 총리 자리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향후 의회에서 영향력이 대폭 증가할 것은 분명하다.하지만 마크롱이 불복하는 프랑스와 국민연합을 배제하고 온건 좌우파와 중도파가 연합하는 소위 공화연대를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사회당이 자당 인사를 총리로 올리기 위해 신인민전선에 내부총질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번지고 있다. 당연히 사회당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35]#
4. 출신 인물
4.1. 역대 제1서기
사회당 제1서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알랭 사바리 | 제2대 프랑수아 미테랑 | 제3대 리오넬 조스팽 | 제4대 피에르 모루아 |
제5대 로랑 파비위스 | 제6대 미셸 로카르 | 제7대 앙리 에마뉘엘리 | 제8대 리오넬 조스팽 | |
제9대 프랑수아 올랑드 | 제10대 마르틴 오브리 | 제11대 아를렘 데세르 | 제12대 장 크리스토프 캄바델리 | |
제13대 올리비에 포르 | ||||
◀ SFIO 서기장 | }}}}}}}}}}}} |
4.2. 사회당 소속 대통령
- 프랑수아 미테랑 - 제21대 프랑스 대통령. 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자 14년의 임기로 역사상 최장 기간 재임한 프랑스 대통령.[36] 사회당을 넘어 프랑스 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프랑수아 올랑드 - 제24대 프랑스 대통령.
4.3. 사회당 소속 총리
- 피에르 베레고부아 - 프랑스의 전 총리이자 미테랑과는 일생의 동지였으나 1993년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자살했다.
- 리오넬 조스팽 - 1995년 대선에서 의외의 선전을 거두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당시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와 좌우 동거정부를 구성했다. 당대에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 지도자라는 평을 받았지만 2002년 대선 당시 좌파가 대분열하는 상황 속에서 장마리 르펜에게 밀리며 1차 선거에서 충격의 탈락을 하는 참사를 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 마뉘엘 발스 - 올랑드 행정부 당시 총리였다.
4.4. 기타
- 세골렌 루아얄 - 2007년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와 맞붙은 여성 정치인이다. 그리고 한때는 프랑수아 올랑드의 동거인으로 무려 3명의 자녀까지 낳았다. 하지만 2007년에 대선을 치르면서 결별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랑드가 대통령으로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 루아얄을 환경부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4.4.1. 탈당한 인물
- 브누아 아몽 - 2017년 7월 1일 탈당. 현 운동세대 소속.
- 에마뉘엘 마크롱 - 2009년 탈당. 현 르네상스 소속. 제25대 프랑스 대통령.
- 장뤼크 멜랑숑 - 2008년 탈당. 현 불굴의 프랑스 소속.
- 에두아르 필리프 - 정치를 시작하던 시절 사회당 소속이었다. 이후 마크롱 행정부에서 총리를 지낸다. 현 수평선 소속.
- 베르나르 카즈뇌브 - 2022년 탈당. 사회당의 NUPES 참여를 이유로 탈당했다. 현재 무소속.
5. 역대 선거결과
(지방선거는 제외)5.1. 대통령 선거
연도 | 선거명 | 대통령 후보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결과 |
1974 |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수아 미테랑 | 11,044,373 (43.25%) | 12,971,604 (49.19%) | 낙선 |
1981 |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7,505,960 (25.85%) | 15,708,262 (51.76%) | 당선 | |
1988 |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10,367,220 (34.10%) | 16,704,279 (54.02%) | 당선 | |
1995 |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리오넬 조스팽 | 7,097,786 (23.30%) | 14,180,644 (47.36%) | 낙선 |
2002 |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4,610,113 (16.18%) | 첫 1차 탈락[37] | 낙선 | |
2007 |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세골렌 루아얄 | 9,500,112 (25.90%) | 16,790,440 (46.94%) | 낙선 |
2012 |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수아 올랑드 | 10,272,705 (28.60%) | 18,000,668 (51.64%) | 당선 |
2017 |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브누아 아몽 | 2,291,565 (6.36%) | 5위로 1차 탈락[38] | 낙선 |
2022 |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안 이달고 | 604,203 (1.74%) | 10위로 1차 탈락 | 낙선 |
5.2. 국민의회 선거
연도 | 선거명 | 총 의석 (비율) | 결과 |
1973 | 1973년 총선 | 89 (18.9%) | |
1978 | 1978년 총선 | 104 (22.6%) | [39] |
1981 | 1981년 총선 | 269 (36.0%) | [40] |
1986 | 1986년 총선 | 206 (31.0%) | [41] |
1988 | 1988년 총선 | 260 (34.8%) | |
1993 | 1993년 총선 | 53 (17.6%) | [42] |
1997 | 1997년 총선 | 255 (23.5%) | |
2002 | 2002년 총선 | 140 (24.1%) | |
2007 | 2007년 총선 | 186 (24.7%) | |
2012 | 2012년 총선 | 280 (29.4%) | |
2017 | 2017년 총선 | 29 (7.44%) | [43] |
2022 | 2022년 총선 | 26 (4.51%) | [44] |
2024 | 2024년 총선 | 59 (10.22%) | [45] |
5.3. 상원의원 선거
2017년 상원 | 46 (26.90%) | 2위 |
6. 기타
||<-3><tablebgcolor=#002395><tablebordercolor=#002395><tablewidth=100%> ||
사회주의 | 자유주의 · 급진주의 | 자유주의 우파 드골주의 내셔널리즘 |
7. 둘러보기
[1] 한국의 광역자치단체장에 해당한다.[2] 한국의 기초자치단체장에 해당한다.[3] 프랑스 사회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사회-생태' 이념으로 부른다.[A]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舊 올랑드계를 비롯한 당내 온건파들이 대거 이탈한 상황이다.[A] [B] 現 사회당 주류파.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당권을 잡고 있다.[B] [A] [9] 중도좌파 ~ 좌익 내지 단순 좌익 계열에 가까운 사람들이 주류이며 중도 ~ 중도좌파에 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 참여 이후 거의 다 빠져나갔다.(舊 올랑드계 출신인 올리비에 포르 제1서기 제외.)[10] 사실 사회당의 전신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시절 레옹 블룸 내각이나 기타 대연정 시절 연립여당으로 참여한 적도 있긴 하지만, 선봉에 서서 정권을 이끌어가는 수준은 아니었다.[11] 프랑스에서 우파 정당은 명칭을 자주 바꾸는 데 비해, 사회당은 1969년부터 명칭을 쭉 유지해오고 있다.[12] 사실 사회당 계열은 이전에 집권하다 내려왔고, 이땐 집권하고 있을 시기는 아니었다.[13] Parti Radicale, 프랑스 혁명 직후 창당된 정당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땐 반-왕정 스탠스로 "급진"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때쯤에 이르러서는 중산층의 리버럴 정당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14] 그 전까지 급진당 등 중도파가 권력을 잡은 일은 있었지만, 이념적으로 따졌을땐 사회주의 정권은 아니었다. 물론 이 좌파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보냐의 문제긴 하지만.[15] 지금의 프랑스 정치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주도하는 모습이지만, 제5공화국 수립 이전까지만 해도 의원내각제였고 덕분에 총리가 실질적인 행정수반이었다. 그 전통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라서 프랑스는 지금도 흔히 대통령과 총리의 "이원집정부제"라고 묘사된다.[16] 리즈 시절이었던 제3공화국에 비해서 세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일종의 대연정이 구성된 덕택에 이 시기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17] 기독교 민주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 1967년 '민주중도'로 당이 개편되며 해체되었다.[18] 심지어 이때 좌파 제1당은 SFIO가 아닌 공산당이었다.[19] 드골의 신생정당.[20] 총 의석 576석.[21] 대신 좌파 단일 후보로 미테랑이 출마했다.[22] 참고로 이 선거에서 공산당은 21.27%를 얻었다.[23]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의 승리를 예측하는 방송사 출구조사이다. 자세히 보면 텔레텍스트로 그려진 얼굴로 보인다.[24] 이미 68 운동 때부터 입으로만 혁명을 외칠 뿐 정작 나서지는 않는 공산당의 행태에 많은 좌파 지지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일방적으로 옹호한 게 결정타였다.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고, 그 이후로 프랑스 공산당은 계속 추락해간다.[25]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5년으로 줄면서 동거정부 형성의 가능성이 줄어들기는 했다.[26] 멜랑숑도 1974년에 사회당에 입당한 골수 사회당 당원이었지만 2009년에 사회당을 탈당해 여타 좌파 정당들과 연합해서 두 차례에 걸쳐 대선에 출마하고 있는 중이었다.[27] 사회당 자체가 얻은 의석수는 29석이지만 좌파 계열 정당 2개와 연합해서 얻은 득표수가 44석.[28] 한 때는 망해가던 사회당의 대선 후보로서 지지율을 16%까지 올리는 등 시민 경선으로 당선된 나름 '혁신파' 후보였으나, 당권파는 그를 버렸다.[29] 다만 동시에 올랑드 계파이기도 하다.[30] 연합과 희망(L'Union et Espoir)[31] 지지율의 컷오프 기준인 5% 아래로 나오고 있다.[32] 2017년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을 지지하면서도 사회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던 당원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이 총선 전후로 아예 탈당을 선택했다. 다만 올랑드 본인은 탈당하지 않았다.[33] 2022년 12월 2일, 프랑스 헌법위원회에서 이 선거구에서 열린 지난 선거를 무효화처리했다.[34] 1년전 선거에서는 56%로 승리했으니 대략 10%p 득표율이 올랐다.[35] 앙상블(168석)+사회당(59석)+공화당 내 드골주의자 의원들(45석)을 합치면 272석이 되며, 역시 온건한 성향의 생태녹색당(33석)까지 연대하면 305석이 되어 과반을 넘긴다.[36] 당시에는 프랑스 대통령이 7년 중임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는 5년 중임제이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이 이 기록을 넘어설 수는 없게 되었다.[37] 당초에는 조스팽 총리가 나름대로 인기가 좋았기에 시라크 대통령에게 조금 우세했지만 정작 출구조사가 발표되니까 장 마리 르 펜 결선 투표 진출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가 나왔다.[38] 기존 사회당 지지층이 마크롱과 멜랑숑에게 쏠려서 1차에서 10%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며 탈락했다. 기존에 양당체제를 이루던 공화당 역시 득표율 3위를 기록하면서 탈락했다.[39] 이 선거를 기점으로 공산당의 의석수를 넘어섰다. 사실 사회당 입장에서 볼때 2차 선거에서의 역전패로 그리 좋게 기억되지 않는 선거이기는 하지만.[40]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회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했다.[41] 결선투표제가 아닌 비례대표제로 실시되었다.[42] 사회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 되고 있는데 집권여당 의석수가 전체의석(577석)의 10%에도 못 미치는 엄청난 참패였다.[43] 당 대표가 1차 투표에서 낙선 하였다.[44] 범좌파 정당연합인 NUPES에 참여했다. 의석수가 역대 최저를 기록했지만 이마저도 정당연합에 참여해 겨우 선방했다는 표현이 나올정도로 사회당 입지가 추락했다.[45] 범좌파 정당연합인 신인민전선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