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13:31:05

자크 루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자크 루
Jacques Roux
파일:Jacques_Roux_-_gravure_de_J.-Frédéric_Cazenave.jpg
출생 1752년 8월 21일
프랑스 왕국 프란작
사망 1794년 2월 10일 (향년 41세)
프랑스 제1공화국 비세뜨흐 감옥
국적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1공화국
직업 사제, 정치인, 교사
종교 가톨릭
정파 앙라제
1. 개요2. 상세3.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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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 사제. 프랑스 혁명기 인물. 초기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의 기원이 되는 인물.
별명: 붉은 사제, 작은 마라

2. 상세

부르주아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프랑스 남서부의 프란작(Pranzac) 후작령의 배석판사였다. 앙굴렘의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27살에 사제서품을 받기 전인 20살에 그곳에서 이미 철학, 물리학 선생이 되었다.

자크 루가 선생으로 있던 시절 그 신학교 선생들이 너무나 엄격하여 학생들이 몰래 밤마다 신학교의 창문에 돌을 던져 깨뜨리면서 분을 푸는 일이 잦았는데, 특히 자크 루가 유독 엄격하였다고 한다. 창문에 돌을 던지는 학생들에게 어느날 한 수사가 총을 쏘아 그 학생들 중 한 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여, 그 수사와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1]

1784년, 32세까지 신학교 선생으로 있다가 1785년, 33세에 프랑스 남서부의 샤또 드 몽또지에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1787년, 35세에는 역시 프랑스 남서부 꼬즈의 신부가 되었다. 이때 이미 그는 그 지역의 수많은 데모꾼들의 중심에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당시 거주하던 프랑스 남서부의 한 신문에 기고한 자작 시가 논란이 되면서 이후 1788년에 수개월간 논쟁의 중심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자신의 시에 대한 신문구독자들의 혹평에 극렬한 반박글을 올렸다. 그 해 말 그는 생-토마-드-꼬냑의 성직자로 보내졌다.

1790년 4월 25일 일요일에 발발한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심각했던 농민폭동을 부추긴 주모자로 알려져있다.

1790년 5,6월에 프랑스 파리로 옮겨와 그 해 말 파리의 정치클럽인 '코르델리에 클럽'에 가입하고 파리 시내의 주요 지역인 그라빌리에(Gravillers) 구역 내 주요 교회인 생 니꼴라 교회의 신부가 되었다. 1793년 1월 21일, 파리코뮌의 위원회 위원으로서, 루이16세가 단두대에 오를 때 동행한 인물 중 한 명이다.

파일:louis16exe.jpg
<단두대에 오르는 루이 16세: 그림 왼쪽 아래의 쪼그려 앉아 기록하는 인물이 자크 루>

그는 단기간에 파리코뮌의 그라빌리에 구역에서 상퀼로트들로부터 엄청나게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뛰어난 연설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생필품 투기꾼들을 비난하는 격한 연설은 상퀼로트 여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는데,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상퀼로트 여성들과 함께 할 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aura)가 엄청났다고 한다. 그가 만든 전단지와 애국적인 설교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자크 루의 활동은 1793년 2월부터 9월 사이에 집중된다. 수 개월 동안 이미 그는 대중 연설을 해오고 있었고, 이에 상퀼로트들, 특히 여성 상퀼로트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설탕비누의 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에 상퀼로트들은 이들 가격을 고정하자는 그의 제안에 반응하기 시작했다(이는 뒤에 가격상한제 법으로 이어진다). 시위참가자들(여자는 물론 남자까지)은 비누, 흑설탕, 설탕, 양초를 고정된 가격으로 팔아야 할 상품목록에 넣게 되었다. 이를 거부하는 식료품 가게 주인들은 자신들의 가게가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자크 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이런 약탈 행동들을 정당화했다.
”식료품업자들은 이제는 그동안 너무나 비싸게 받아 팔아서 번 것을 다시 인민들에게 되돌려줘야할 때이다.(Je pense que les épiciers ne font que restituer au peuple ce qu'ils lui faisaient payer beaucoup trop cher depuis longtemps)”

1793년 6월 25일, 코르델리에 클럽에서 뜨겁게 호응을 얻은 제안을 가지고 자크 루는 국민공회의 연단에서 아래의 연설을 하였다.
”프랑스 인민의 대표여러분! 이기주의자들과 사기꾼들의 범죄행각에 대한 성토가 이 신성한 공회 건물내에서만도 백번 울려 퍼졌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당신들(자코뱅)은 저 인민의 거머리들을 박살내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이제 곧 새 헌법 조항들이 승인 절차를 거칠 예정입니다. 그런데 새 법 조항 안에 투기를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갔습니까? 아니요! 독점업자들을 사형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까? 아니요! 상업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시하였나요? 아니요! (중략) 자! 당신들은 인민의 행복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하략)(Délégués du peuple français, Cent fois cette enceinte sacrée a retenti des crimes des égoïstes et des fripons ; toujours vous nous avez promis de frapper les sangsues du peuple. L'acte constitutionnel va être présenté à la sanction du souverain ; y avez-vous proscrit l'agiotage ? Non. Avez-vous prononcé la peine de mort contre les accapareurs ? Non. Avez-vous déterminé en quoi consiste la liberté du commerce ? Non. Avez-vous défendu la vente de l'argent monnayé ? Non. Eh bien ! Nous vous déclarons que vous n'avez pas tout fait pour le bonheur du peu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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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을 비난하는 자크 루를 더 이상 지켜보면 위험하다고 여긴 로베스피에르는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고, 감옥에 갇힌 자크 루는 자신의 재판이 혁명재판소에서 진행될 것을 알게 되자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그 때 나이가 41세.

3. 같이 보기


[1] 출처:https://fr.wikipedia.org/wiki/Jacques_Roux_(1752-1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