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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그룹 148석 | 사회·생태·공화주의1 65석 | 중도연합2 57석 | |||||
민주·진보·무소속 연합3 24석 | 공산·공화주의·시민과 생태주의4 15석 | [[유럽 민주사회연합 그룹| 유럽 민주사회연합 그룹5 14석 ]] | |||||
무소속 그룹 | |||||||
무소속-공화국과 국토 그룹6 13석 | 연대·국토 생태주의 그룹 12석 |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상원의원들의 행정 회의7 3석 | |||||
*. 각 교섭단체 소속 의원은 정당과 상관없이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교섭단체에 있는 정당명과 소속의원의 당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1. 사회당, DVG(범 좌파 진영), MDC(시민 운동)으로 구성된 교섭단체. 2. UDI 중심의 중도 교섭단체. 3. 르네상스 중심의 교섭단체. 4. 공산당 중심의 교섭단체. 5. 급진운동, 사회당, DVG(범 좌파 진영) 등으로 구성된 중도 교섭단체. 6. 범 우파진영, UDI, 급진운동 등으로 구성된 중도우파 교섭단체. 7. 교섭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연합, 재정복!이 여기에 속한다. | }}}}}}{{{#!wiki style="margin:0px -10px" {{{#!folding [ 하원 교섭단체 구성 ] | 여당 | |||||
[[공화국과 함께 그룹| 공화국과 함께 그룹1 99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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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그룹2
수평선 그룹3
민주 그룹2
36석
]] ||<width=50%> [[수평선 그룹|수평선 그룹3
3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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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합 그룹| 국민연합 그룹5 126석 ]] | [[불복하는 프랑스 그룹| 불복하는 프랑스 그룹6,N 72석 ]] | [[사회당 그룹| 사회당 그룹7,N 66석 ]] | |
[[공화당 우파 그룹| 공화당 우파 그룹 47석 ]] | [[생태주의자 그룹| 생태주의자 그룹8,N 38석 ]] | [[자유·독립·해외 및 국토| 자유·독립·해외 및 국토9 21석 ]] | |
[[민주·공화 좌파 그룹| 민주·공화 좌파 그룹10,N 17석 ]] | [[공화국우파연합 그룹| 공화국우파연합 그룹C 16석 ]] | 소속 그룹이 없는 의원11 8석 | |
*. 프랑스 정치 특성상 원내 구성이 자주 바뀌는 경우가 많아 갱신이 늦을 수 있음. *. 각 교섭단체 소속 의원은 정당과 상관없이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교섭단체에 있는 정당명과 소속의원의 당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N. 신인민전선 가맹 그룹. C. 공화당 내 에릭 시오티 파벌이 내분 끝에 별도로 만든 교섭단체. 1. 르네상스 외 9개 정당 참여중. 2. 민주운동 외 1개 정당, 무소속 의원이 참여중. 3. 수평선, 민주독립연합 외 3개 정당 참여중. 4. 공화당 외 4개 정당 참여중. 5. 국민연합 외 1개 정당 참여중. 6. 불복하는 프랑스 외 6개 정당 참여중. 7. 사회당 외 3개 정당 참여중. 8. 유럽 생태녹색당 외 5개 정당 참여중. 9. 사회당 외 9개 정당 참여중. 10. 프랑스 공산당 외 6개 정당 참여중. 11. 바로선 프랑스와 불복하는 프랑스 외 2개의 정당의 개별 의원들이 이에 해당함.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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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4002B,#FFF> 약칭 | <colbgcolor=#FFF,#1F2023>PCF |
한국어 명칭 | 프랑스 공산당 |
창당일 | 1920년 12월 30일 |
전신 |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
주소 | 2, place du Colonel Fabien – 75019 파리 |
전국위원장 | 파비앙 루셀 |
상원 | 14석 / 348석 |
국민의회[1] | 9석 / 577석 |
유럽의회 | 0석 / 79석 |
당색 | 빨간색 (#E4002B) |
이념 | 유럽공산주의[2][3] 민주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연성 유럽회의주의[4] |
스펙트럼 | 좌익 ~ 극좌[5][6] |
국제 조직 | |
청년 조직 | 프랑스 청년 공산주의 운동(JC) |
기관지 | 뤼마니테(L'Humanité) |
유럽 정당 | 유럽 좌파당 |
당원 수 | 47,349명(2019년 기준)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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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공산주의 정당.
한때 서유럽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으며 여러 번 원내 1당을 지위를 얻기도 하였고 합법적 정당+교섭단체 지위에 만족하던 다른 서유럽 지역 공산당과 달리 4차례에 걸쳐서 공동여당의 지위를 누렸지만 냉전 이후 당세가 쇠퇴하면서 불복하는 프랑스의 장뤼크 멜랑숑 후보를 지지하는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다.
2. 역사
2.1. 창당~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약칭 SFIO)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당원들이 당 내부의 개량주의 노선에 반발하여 탈당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으로 창당했고 이듬해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창당 초기만 해도 코민테른의 지령에 충실했고 극우파들보다 한 술 더떠 SFIO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 정권이 수립되고 프랑스 좌익이 파시스트 쿠데타 시도라고 여긴 1934년 프랑스 폭동 이후 SFIO와의 공투 노선으로 선회해 1936년 총선에서 레옹 블룸의 인민전선 내각 수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나치의 대항마를 자처했지만 사민당과의 대립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 결국 인민전선을 짜내는 데 실패한 독일 공산당에서 교훈을 얻어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고 국회에서 공동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키는 형태로 내각에 협력했다. 그러나 인민전선 내각은 스페인 내전 참전 문제, 대 소련 정책 등을 놓고 허구헌날 갈등을 일으키다가 출범한 지 1년도 안 돼서 급진당에 다시 주도권을 내주었고 급진당이 뮌헨 조약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을 때 원내정당 중 유일하게 이를 거부하면서 인민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공산당은 다시 프랑스 국회의 소수파로 전락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과도내각 시대
1939년 이오시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공산당은 크렘린의 장녀[7]라는 멸칭에 걸맞게 이를 열렬히 지지하며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고 정부의 국방예산 증액에 반대했다. 심지어 방위산업체 내부의 공산당원 노동자들이 고의로 무기를 고장내고 파업을 시전하는 등 독일 국방군의 파리 함락 및 비시 프랑스 정부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프랑스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사실상 독일이 배후의 소련의 위협을 없애고 노골적으로 프랑스와 한판 뜨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8] 이런 상황에 프랑스 공산당은 소련 및 독일 편을 들었고 프랑스 정계에서 좌우 할 것 없이 공공의 적으로 찍혀 버렸다.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당의 반파쇼 인민전선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를 뒤집어 버리면서[9] 우파뿐 아니라 사회당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 버렸다.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과 소련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갈라먹고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가짜 전쟁 기간의 8개월간 달라디에 정권은 공산당에 해산 명령을 내렸고 공산당 의원들은 당적을 포기하든지 체포돼서 군사재판에 서는 것 중 양자택일해야 했다. 우파뿐 아니라 사회당에서도 공산당 의원의 불체포 특권 박탈에 동의했고 생디칼리즘 단체인 노동총연맹(CGT)에서도 공산당 출신들은 배제해 버렸다. 정당뿐 아니라 관련된 기관지나 공산당 출신의 지자체장들까지 줄줄이 박살났고 국민 여론까지 최악으로 돌아서면서 프랑스 공산당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비시 프랑스의 페탱 치하에서도 공산당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공산당은 지하조직으로 연명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은 크렘린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당계, 드골계 레지스탕스와의 공동투쟁을 거부했으며 심지어 독일 점령당국에 협조하여 어떻게든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등 모호한 입장을 유지했다. 이 같은 태도는 비시 정권이 성립된 1940년 7월부터 독소전쟁이 발발한 1941년 6월 무렵까지 거의 1년 가까이 이어졌다. 1941년 히틀러가 스탈린의 뒤통수를 치자 프랑스 공산당은 기존의 대독협력 노선에서 전면투쟁으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뒤늦게 레지스탕스 운동에 합류했지만 레지스탕스에 규모 있게 참여해서 활약한 덕택에[10] 프랑스 대중들로부터 종소, 극좌 정당이라는 음침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연합군의 파리 함락 이후 결성된 과도내각에서 모리스 토레즈 서기장이 부총리로 입각하고 제4공화국 출범 이후 치러진 194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182석을 획득하며 원내 1당에 올라서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다.
2.3. 냉전 시대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1947년 내각에서 추방되었고 제4공화국 내내 총선에서 원내 1당의 지위는 유지했으나 매번 내각 구성에서 왕따를 당하면서 야당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와 베트민 간의 연립정부 구성을 지지하기도 했지만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1947년 혹은 1948년부터 베트민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사실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에 유일하게 베트남의 탈식민화를 주장한 정당은 프랑스 공산당뿐이었고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됨에 따라 보다 명확한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표명했다.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수였던 모리스 토레즈는 1950년 4월 프랑스 공산당 제7 위원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지금부터 베트남의 평화를 위해 투쟁을 하는 것,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권리까지 포함하는 베트남 민족의 자결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선언했으며 195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도 인도차이나 전쟁이 아시아에서 미 참모부의 전략적 기지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미국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샤를 드골 주도의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원내 2당으로 추락했고 무비판적 친소 노선과[11] 68운동 당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것 등이 누적되면서 인기를 잃어 결국 좌파 진영의 주도권을 프랑수아 미테랑이 영도하는 프랑스 사회당에게 내주게 되었다. 실제로 1969년 드골 사임 직후의 대선에서 자크 뒤클로가 23.3%를 득표하여 간발의 차로 결선투표에 탈락한 것은 마지막 영광이 되었다.
1971년에는 조르주 마르셰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1977년, 프랑스 공산당 제22차 당대회에서 공산당은 "계급투쟁 노선 속에서 민주주의를 추구, 자유민주적 공산주의 추구"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공산당 지도부는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유럽공산주의로 전환하였고 사회당과 선거연대, 정책연대를 추진하는 등 대중정당으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좌파 진영의 주도권을 놓친 상황에서는 사후약방문이었다. 오히려 197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최초로 사회당에 득표를 추월당했다.
실제로 당시 당 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이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당 내의 주도적 사상가였던 루이 알튀세르가 프랑스 공산당 제22차 대회에 대한 테제를 발표하며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비판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조르주 마르셰는 15.3%를 득표하여 미테랑의 25.9%에 크게 밀렸다. 울며 겨자먹기로 공산당이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곧이어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범좌파 진영이 5공화국 출범 후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로랑 파비위스 내각에서 4명의 장관을 배출하는 데 성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인민전선 내각 때와 마찬가지로 파비위스 내각에서도 사회당과의 불협화음은 끊기지 않았고 결국 1984년에 사회당-공산당 연정이 붕괴되면서 다시 야당으로 전락했다. 좋게 말하면 여권 내 야당이었으나 나쁘게 말하면 여당도 야당도 아닌 행보는 실정 책임론은 그대로 받으면서 사회당 지지표도 깎아먹는 자충수 그 자체였다. 이후에도 신임과 보완 형태로 각료직을 내기도 했지만 198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고작 8.6%를 득표해 반토막도 못 건졌고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앙르레 라주아니는 고작 6.8%를 득표했다. 그렇게 프랑스 공산당은 극우 성향 국민전선의 대두와 소련 붕괴로 인해 그야말로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2.4. 냉전 이후
1994년 제28차 전당대회에서 조르주 마르셰 서기장이 은퇴하고 로베르 위가 그 자리를 이었다.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로베르 위는 8.6%를 득표하면서 그나마 성적을 올렸고 199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당 역사상 마지막으로 두자릿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12] 35석을 획득했고 255석을 획득한 사회당과 연립내각 구성에 합의해 리오넬 조스팽 내각에 2명의 장관을 배출했다.공산당은 이전까지와 달리 조스팽 총리의 제3의 길 노선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공기업 민영화, FTA 정책 등을 묵인하고 공산당계 노조의 파업도 "장관으로 국정운영에 헌신하는 동지들을 배신하는 행위"라면서 자제시키는 등 '반대만 하는 극좌정당'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히려 기존 좌파 지지층까지 이탈했다.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한 로베르 위 서기장이 트로츠키주의 정당과 녹색당 후보보다도 낮은 3.3%의 득표율에 그치며 참패했다.
덤으로 조스팽 총리가 1차 투표 2위를 차지한 장마리 르펜 후보에게 불과 1% 차이로 결선투표행 티켓을 내주고 낙선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발생하면서 본의아니게 조스팽 낙선의 주범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전국정당으로서의 완전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13]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마리-조르주 뷔페 후보가 1.9%의 득표율에 그친 것을 마지막으로 사회당과의 연대를 끊고 급진좌파 정당과의 공동투쟁 노선으로 선회했다.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와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각각 좌파당, 불굴의 프랑스 후보로 출마한 장뤼크 멜랑숑 후보를 지지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행정부 출범 직후 치러진 201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7석 → 10석으로 의석수를 늘리기는 했지만 불굴의 프랑스와 연합해도 30석 안팎이라 여전히 전성기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한 수준이다.
2018년 11월 새 서기장으로 파비앙 루셀(Fabien Roussel)이 취임했다.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선거가 시작된 1979년 이후 최초로 단 한 석도 못 건졌다. 2004년만 해도 11%를 득표했던 정당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불과 15년 사이에 존재감 마저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멜랑숑과의 연대를 선택하지 않고 파비앙 루셀이 독자 후보로 출마했으나 멜랑숑이 1차 투표에서 20%를 넘는 득표율을 올리며 좌파 진영의 대표로 떠오른 반면 루셀은 2.31% 득표에 그쳐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2위를 차지한 마린 르펜과 멜랑숑의 득표율 차이가 단 1.2%p 차에 그쳤기 때문에 마치 2002년처럼 좌파 진영 후보 결선 진출 실패의 한 원인으로 지목당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러한 비판을 받은 후 2022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불굴의 프랑스 및 사회당과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을 결성하여 선거연대에 참여했다.
3. 선거 결과
3.1. 대통령 선거
연도 | 선거명 | 대통령 후보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결과 |
1958 | 195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조르주 마란 | 10,355 (12.99%) | 간접선거 | 낙선 |
1969 | 1969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자크 뒤클로 | 5,268,613 (23.31%) | 3위로 진출 실패 | 낙선 |
1981 |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조르주 마르셰 | 4,456,922 (15.35%) | 4위로 진출 실패 | 낙선 |
1988 |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앙드레 라주니 | 2,055,995 (6.76%) | 5위로 진출 실패 | 낙선 |
1995 |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로베르 위 | 2,632,460 (8.64%) | 5위로 진출 실패 | 낙선 |
2002 |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960,480 (3.37%) | 11위로 진출 실패 | 낙선 | |
2007 |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마리조르주 뷔페 | 707,268 (1.93%) | 7위로 진출 실패 | 낙선 |
2022 |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파비앙 루셀 | 799,352 (2.31%) | 8위로 진출 실패 | 낙선 |
3.2. 국민의회 선거
4. 기타
- 당사 건물이 매우 크고 화려하기로 유명한데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작품이다.[14]
- 국제 정당 연합체 중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에 참여해온 바 있다. 자주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가끔 가다 참여하는 정도다.
-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도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 많다. 특히나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철학계와 공산당의 연이[15] 꽤 깊은 편이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던 유명 인사로는 대표적으로 유명 화가 파블로 피카소[16],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펠릭스 가타리[17], 에티엔 발리바르[18], 미셸 푸코[19], 작가 알베르 카뮈[20], 루이 아라공, 물리학자 폴 랑주뱅 등이 있다. 정치가 에드바르트 기에레크[21]와 호치민[22]도 프랑스 공산당원이었고 호치민은 창당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여담으로 장폴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운동을 지지했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인 것으로도 잘못 알려져 있으나 왜인지 공산당에는 한 번도 입당하지 않았다.
- 2000년 5월 17일에 당기관지 '뤼마니테'에서 북한에 대해 "북한 체제를 공산주의와 동류로 취급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며, 북한 스스로도 감히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좌시할 수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5. 둘러보기
||<-3><tablebgcolor=#002395><tablebordercolor=#002395><tablewidth=100%> ||
사회주의 | 자유주의 · 급진주의 | 자유주의 우파 드골주의 내셔널리즘 |
[1] 교섭단체: 민주·공화 좌파 그룹[2] 출처: #[3] 사실상 민주사회주의에 가깝다.[4] 공산당답게 반EU적 색채가 있다[5] 공식적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나 반체제적 혁명 노선은 이미 70~80년대에 내다버린 지 오래고 90년대 이후에는 사회당의 제3의 길 노선을 잠시 눈감아주기도 했다.[6] 1976년까지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극좌, 이후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는 불굴의 프랑스나 반자본주의신당보다는 온건한 좌익, 현재에는 불굴의 프랑스와 성향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좌익~극좌로 분류된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좌익~극좌로 분류된다.[7] 프랑스는 '가톨릭의 장녀'로도 통한 바 있다. 이래저래 맏딸 이미지.[8] 영국과 프랑스가 히틀러의 침략정책과 도발을 감내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독일이 소련에 대항한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히틀러가 소련과 제휴하면서 빅 엿을 먹여 버리자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전쟁을 준비했다.[9] 물론 소련과 제3인터내셔널을 추종하면서 기존 당내노선을 내던질 판이되자 당연히 당론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당내 주류에 동조하지 않는 일부 인사들은 사태를 관망하거나 탈당하여 활동을 중단해 버렸다.[10] 당시 전체 레지스탕스 조직 가운데서 절반 가량이 공산당 계열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11] 열성 당원이었던 이브 몽땅이 언론 인터뷰에서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무력 침공을 비판했다가 당에서 쫓겨날 정도였다.[12] 정확하게는 9.96%.[13] 이 선거에서 좌파는 1차투표에서 후보 난립 때문에 아무도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했다. 결국 인기가 바닥을 기던 우파의 자크 시라크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14] 그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총설계한 건축가이자 브라질 공산당 서기장을 겸했던 공산주의자로, 브라질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린다.[15] 고등사범학교의 철학 교수이자 열혈 공산당원이었던 루이 알튀세르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공산당 입당을 권유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다만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고 사실 프랑스 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프랑스 공산당이 진정한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지 않다며 깠다(...). 실제로 평생 공산당원이었던 알튀세르 본인을 제외하면 공산당 당적을 가졌던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노선 문제로 탈당하거나 출당당했다.[16] 피카소는 평생 공산당 당적을 유지했지만 1953년에는 당 중앙위원회의 공개비판을 받는 등 지도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런데 비판의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스탈린의 초상화를 피카소 화풍으로 그린 그림이 서기장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였다. 직접 보자. 이 사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외의 예술 사조에 대해 편협했던 현실사회주의의 예술적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17] 공산당의 노선이 권위적이고 자신의 철학 사조와 맞지 않는다며 탈당했다.[18] 알튀세르의 권유로 입당했으나, 당의 이민자 관련 정책을 비판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81년 강제로 출당당했다.[19] 알튀세르의 권유로 입당했으나 성소수자를 대하는 당의 노선이 편협하다고 느껴 1953년 자진 탈당했다.[20]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소련의 잔혹한 진압에 반발하며 탈당했다.[21] 후대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지도자가 된다. 막대한 외채를 빌려 경제를 번영케 하였으나 외채 만기 기한이 다가오자 경제를 도로 무너트려서 서기장 자리에서 쫓겨났다.[22]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당 발기인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사회당에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