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6:05

사회주의 리얼리즘

1. 개요2. 설명3. 개념
3.1. 경향성3.2. 당파성
4.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내재적 기준
4.1.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와의 차이?4.2. 주체사실주의
5. 각 분야별 상황
5.1.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5.2.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5.3.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극5.4.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
6. 관련 인물7. 매체 등장 사례8. 관련 항목

1. 개요

Socialist realism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러시아 혁명으로 수립된 소련에서 태동한 예술 사조, 미학 체계이며[1]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동구권에서 전성기를 꽃피워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평생 미학을 집중서술하진 않았지만 이미 저서 전반[2]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론적 핵심을 정의해놓았다. 그것이 하나의 미학 체계로서 완성된 것은 레닌 이후였다.

막심 고리키와 그의 작품 어머니가 유명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러시아 제국의 부조리상을 고발하는 반체제 예술작품을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집권한 이래 견본삼아서 널리 장려했다.

2. 설명

그 이론과 창작은 19세기부터 존재하였지만, 체계적인 시작은 1930년대로, 1934년의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회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올바르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그때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근로자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와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문학용어는 1932년 5월 29일 소련의 <<문학신문 Literaturnaja gaseta>>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모든 노동자 문화예술 조직을 해산할 것을 결의함과 동시에 <제1차 소비에트작가총회 조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당시까지의 마르크스주의 예술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얻어진 성과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개념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그 최초의 정의는 <소비에트 작가동맹>의 강령에 명시되었는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문학의 근본적 방범인 바, 예술가로 하여금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과정에 따라 진실되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릴 것을 요구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 후 이 개념을 둘러싸고 사회주의권의 문학이론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이론적 논의가 전개되어오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현실주의)은 1930년대 소련에서 세계관과 방법을 둘러싸고 정립된 이론이다. 과거 소련 ’라프' 파의 이론가들은 세계관과 창작방범의 동일성 테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로젠타리 등은 ‘아직 올바른 세계관에 서 있지 못한 작가든 우선적으로 자기의 세계관을 교정한 연후에야 비로소 창작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이로부터 예술창작상에서 세계관과 방법 간의 관계 및 모순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세계관과 방법 사이의 변증법적 연관관계가 밝혀졌고 예술이 단순히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인간이 현실을 반영하고 인식하는 특수한 전유방식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내용은 과거 마르크스엥겔스가 이른바 ’지킹첸 논쟁'을 페르디난트 라살레와 벌이면서 강조했던 셰익스피어적인 차원과도 통하는 것이었고, 또 엥겔스가 그 의 편지들에서 제시한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용어에 압축되어 있던 문제외식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930년대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게오르크 루카치의 리얼리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편향을 가져왔다. 그는 예술방법이 단순히 형식적·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작가의 연관관계, 즉 세계관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임을 해명했다. 그의 모더니즘과 자연주의에 대한 예리한 비판은 이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세계관과 방법 사이의 관계를 보는 데 있어 일정한 전도(顚倒)를 초래하고 말았다.

즉 그는 세계관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하는 계급적 관점을 작가의 의도나 정치적 입장과는 일정 정도 무관하게 작품이 가지는 ’진보성'이나 ‘민중성'에 의해 대치하는 오류를 범했다. 다시 말해 루카치는 세계관과 방법상의 모순 가능성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실상 세계관과 방법을 대립시키는 이론적 편향을 노출했던 것이며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 문학운동에 있어서 부르주아계급의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예술적 유산을 받아들일 것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나아갔다. 이는 그의 이론이 1930년대 파시즘의 등장에 따른 인민전선 정책기의 공식적 입장으로서 지니는 특질이기도 하지만 명백한 우편향으로 평가된다. 또 문예이론상에서 볼 때는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는 측면에만 국한됨으로써 예술의 특수성을 올바로 해명하지 못하는 ‘인식론주의'의 대표격으로 간주된다.

스탈린 사후 1950년 후반부터 다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는 활발해졌고 그 이후 다양한 이론적 입장의 등장에 따라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은 더욱 풍부해지게 된다. 그 중에서 어느 정도 정설로 확립된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용법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주요한 창작방법으로서의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문학과 예술의 발전 및 그 미학적 원리들의 진전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적 단계를 뜻할 때의 용법이다. 후자의 용법으로 사용될 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새로운 세계의 예술이 지니는 미학적 체계'라는 의미를 가지며 19세기 비관적 리얼리즘의 시대와 그 이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이 경우의 용례인 것이다.

여기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예술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에른스트 피셔처럼 사회주의 예술의 범주로써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개념을 사실상 폐기하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는 독일의 카프카 같은 모더니즘의 작가를 이른바 ‘열린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리얼리즘 작가로 분류하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유의미성을 파괴해 버리려는 수정주의적인 노선을 주장한다. 피셔와 같은 입장과 반대 되는 극단에서 사회주의 예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동일시하는 이론이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졌거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지만, 아직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값하는 예술적 질에는 오르지 못한 예술작품들을 평가할 기준을 갖지 못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예술 간의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세계관상에 있어서 과학적 사회주의와 여타의 비과학적인 다양한 사회주의가 병존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회주의에의 지지와 공감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미적 태도와 창조적 예술성과의 전제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당파성, 리얼리즘적 예술방향 세 가지의 통일로서 성립된다. 여기서 ‘당파성'이란 개념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논하는 데 있어 극히 중요하다. 당파성(Parteilichkeit)은 노동자 계급의 이익실현을 위한 투쟁 및 그 투쟁의 경험과 과학적 사회주의를 결합시키는 원리이다. 당파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학운동이 노동자 대중운동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결합의 조직적 구현체인 노동자 당사업의 일환이 되어 그 지도와 원칙 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당파성과 관련하여 민중성 Volksverbundenheit (민중연대성)의 범주가 중요하게 취급된다. 자본주의사회를 지양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 노동자계급은 여타의 피착취계급과 동맹하게 된다. 여기서 민중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필연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당파성은 민중성의 최고도의 표현이라고 칭해진다.[4]

3. 개념

3.1. 경향성

경향성은 엥겔스의 지킹엔 논쟁, 발자크론 등으로 정립되었다.

3.2. 당파성

당파성은 레닌의 『당조직과 당문학』으로 정립된다.

4.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내재적 기준

현실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의 정의 역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특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다. 현실사회주의 이념을 따르는 국가들은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에 따라 예술의 발전 단계를 비판적 리얼리즘(Critical realism)-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공산주의 리얼리즘(Communist realism)[5]의 3단계로 정의하였다.

이 중 첫 단계인 비판적 리얼리즘은 '반 자본주의적이고 반 파시즘적인 노동자, 무산대중의 시각으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조를 의미한다. 즉, 예술이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노동자와 힘없는 민중의 시선을 대변하는 도구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 단순히 문제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것으로는 '무산대중의 입장을 대변하여 적극적으로 사회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적 리얼리즘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대중에게 이념적 지향점을 제시해주는(님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어떻게 해야 님을 만날 수 있는지 제시해 주는) 두 번째 단계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나타날 예술의 사조가 세 번째 단계인 공산주의 리얼리즘 인데 이건 패스. 마르크스가 주장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레닌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명명한 이래, 현실사회주의 진영에서 사회주의적 XXXX에 대비되는 공산주의 XXXX를 이야기할 경우 후자는 그냥 '이상적인' 무언가라는 추상적 개념이다. 나타난 적이 없으니 분석할 수도 없다.

이 관점에 따른 분류를 객관적으로 볼 경우 비판적 리얼리즘의 사조에는 20세기 초중반의 걸작 중 상당수가 포함된 데 비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속하는 작품들의 평가는 영 좋지 않다. 이는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사용된 예술 작품들 대다수의 평가가 좋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그 문제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특유의 가치에 충실한 비판적 리얼리즘과는 달리,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의 경우 프로파간다의 목적이 개입되면서 작품성에 타격을 입는다. 다만 사회주의 사실주의 입장에서는, 비판적 리얼리즘은 사회 고발이라는 명목 하에 빠져버리기 쉽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작가는 혁명적인 자세까지도 견지해야 한다는 것.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발단이 되는 문서인 레닌의 저술 '당 조직과 당문학'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의 예술이란 겉으로는 "완전한 자유"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예술가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진정한 사회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사회의 아주 파편적이고 일부에 불과한 현실을 사회의 진정한 모습인양 팔아댄다는 것이다. 그러한 문헌은 사실상 포르노에 불과하며, 대중을 마비시키는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공산당의 문학은 노동자 계급과의 연대를 직접적으로 표방하고 나섬으로써 떳떳하게 자신들의 작품에는 반계급적인 시선이 녹아들어있음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어떻게' 묘사할 것이냐, 즉 이를 어떻게 '혁명적인'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사회주의 사실주의에서 중시하는 전형성이다. 전형성은 도식적이고 판에 박힌 묘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다양하게 묘사가 가능한 현상들, 즉 현실의 사건들에서 그 사건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사회주의적) 역사성을 담아내는 순간을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형이란 앞서 말했다시피 어디까지나 '오류가 없는' 당의 예술이어야 한다. 레닌은 당의 예술이 이를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범주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설파하는데, 그것은 당파성(партийность)[6], 계급성(классность), 인민성(Народность)이다.

여기서 당파성이란 사회주의 문학예술은 공산당의 예술이기 때문에 철저한 당의 톱니바퀴와 나사, 즉 도구로서 당의 이념을 선전할 수 있어야한다는 뜻이다.[7]

계급성이란 애초에 무계급적이거나 계급중립적인 예술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으므로 철저하게 노동 계급의 입장을 옹호하고 담아내야 한다는 뜻이다.[8]

마지막으로 인민성이란 예술은 반드시 전체 인민대중에게 봉사하는 것이어야 하지, 결코 일부 특권 계층을 위해 만들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전체 인민 대중이 향유하고 이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한다는 뜻이다.[9]

물론 작가가 작품 창작에 있어서 공산주의적 시선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하기에 사회주의적인 묘사가 필요하기는 하다. 이것이 작가의 시선에 의한 왜곡이라면 왜곡이고 체제 선전이라면 선전이기는 하지만 전형의 문제는 레닌이 발명해낸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예술 사조, 특히 19세기의 문학 이론가 벨린스키를 필두로 이어져 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혁명 초기의 문화대혁명 비슷한 반달리즘[10]에서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기도 한데 마르크스와 레닌은 그러한 예술작품 역시 어느 정도 당대 사회와 민중의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고 표현했고 그렇기에 보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열심히 설득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흔히 생각하는 문예창작에 대한 관학적이고 교조적인 태도, 일일이 개입하고 검열하거나 가혹한 숙청을 가하는 사례는 안드레이 즈다노프 시대 이후에는 많지 않았으며 현실에서도 그러한 창작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은 북한 정도나 되어야 한다. 실상 북한조차도 하단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화계 내에서 숙청을 단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알아서' 선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고 해서 무턱대고 수령에 대한 찬양고무나 체제 선전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소위 말하는 '감동실화' 중심의 소재를 주로 선택하였지만 판타지를 억압하거나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당의 시점하고 잘 맞아떨어지기만 한다면, 웅장하고 거대한 작품을 묘사하는 경우 국가 지원을 받아 내실이 있으면서도 빵빵하게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다만 즈다노프의 시대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모더니즘 사조의 작품들, 즉 현대 예술을 '할 짓 없는 자본주의 인텔리겐차들이 배 따뜻하니까 튀어보려고 만드는 대중과 유리된 지식놀이'로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11] 또한 모더니즘과 반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총력을 기울이는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는데 "예술가가 무슨 복사기도 아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걸 구분도 못 하고 있는 그대로 묘사한답시고 아무 관점도 없고 특색도 없이 묘사만 하고 있는 뻘짓"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비판 대상이었다.

4.1.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와의 차이?

Socialist realism과 자주 혼동되는 것으로 Social realism이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적 리얼리즘의 차이 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의 차이.

위의 국가들 이외의 자유주의 진영 국가에도 소수이지만 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 작업하는 화가들이 있었다. 심지어 미국에도 메카시즘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화가들이 있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집권기에는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농업안정국(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이나 공공산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에서 실업자가 된 예술가들을 시골에 보내 사진을 찍게 하거나 벽화를 그리게 시켰다. 그때 만들어진 작품들은 지금도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주요 자료로 손꼽히고 있다.

당연히 이들의 성향은 소련, 중국, 북한의 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달랐다. 그냥 유럽공산주의, 아나키즘, 트로츠키즘, 사회민주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작가들이 많았다.

다만 루카치가 리얼리즘 논쟁에서 정의하였듯 이러한 사회주의 예술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착각하여서는 안 된다.

4.2. 주체사실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주체사실주의를 가르는 기준은 ‘수령’이다. 주체시대란 곧 인민대중이 주인인 시대인데, 인민대중이 시대적 소명을 알고 주인공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수령’의 사상과 지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령 없이는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시대를 올바르게 형상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인 문제가 바로 ‘수령 형상’이다. 수령은 주체사상의 핵심이기에 수령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곧 북한 체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1960년대 유일사상체계 정립과정에서 김정일이 주장한 ‘새로운 혁명문학 건설’은 곧 북한문학에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문학예술의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주체시대에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혁명문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에 없는 수령의 존재를 올바르게 규정하기 위해서 당적 지도와 당적 통제를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철저히 당 정책에 의거하여 창작할 때 사상 이론적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으며, ‘편향을 극복하고 유일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올바른 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새로운 혁명문학’ 건설을 명분으로 문학가들에게 당의 유일한 지시와 결론에 따르는 엄격한 규율을 통한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작가들에게 당의 엄격한 규율 아래 조직화된 체계 속에서 항일 혁명 투쟁 역사를 깊이 연구하여, 수령을 모델로 한 혁명전통을 살린 ‘새로운 혁명문학’ 창작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새로운 혁명문학 건설은 자연스럽게 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작가들은 당의 방침을 실천하기 위해 당 정책을 학습하고, 당 정책에 의거하여 창작 소재와 주제를 선택해야 했다.

‘어떤 주제를 잡아 어떻게 쓸 것인가’와 관련한 이론으로 속도전과 종자이론이 있다. 속도전이란 당에서 요구하는 대로 최단기간에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속도전은 단지 빠른 속도뿐만 아니라 수준도 높은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빠르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평소 당 정책에 대한 교양을 열심히 하여 당이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작가들은 당에서 요구하는 주제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북한문학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종자’라고 한다. 종자는 단지 주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인 동시에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소재이다. 종자는 곧 창작의 출발이자 결과물을 의미한다. 종자로 표현하는 것은 작품의 소재를 찾아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식물의 성장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해지면 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잡아 창작하는데, 마치 식물의 종자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과정과 같이 완성된 작품, 즉 열매 속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종자가 올바르게 잡으려면 평소 종자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종자를 올바로 잡아야 수시로 변화하는 사회 현실에 맞추어 신속하게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자이론과 속도전이론은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는다.

또한 북한문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인민성의 원칙이다. 인민성의 원칙이란 인민의 입장에서 인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인민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인민들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주제가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북한문학이 인민을 대상으로 한 교양에 목적이 있는 만큼 인민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주제가 분명하지 않은 작품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작품의 주제가 분명해야 하고, 긍정적 인문과 부정적 인물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인민들이 긍정적인 인물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민성은 다른 측면에서 민족적 형식을 의미한다. 민족적 형식이란 오랜 세월동안 인민들의 삶 속에서 형성된 형식으로 인민대중에 의해 오랫동안 향유되면서 특유의 정서적 체험을 반영한 그 민족의 체질에 가장 알맞은 형식이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문학적 전통은 주인공의 성품이 아름답고 고상하고, 사건의 전개가 순조롭게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전개되는 순차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 구조를 통하여 극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엽기적인 사건이나 복잡한 갈등 관계, 삼각관계, 비극적 인간관계를 설정하거나 비순차적인 구조는 민족적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것으로 평가한다. 북한문학에서는 민족적 정서와 맞지 않은 형식이나 내용의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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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 분야별 상황

5.1.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

백과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소련에서 1920년대 말기부터 1930년대 초기에 제창되고 1934년의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회 대회에서 통일적 창작방법으로 확립된 문학예술의 방법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영미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20~30%로 대단히 높았던 시절이었고 식민지는 사정이 더욱 비참했던지라 이 시절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사회를 고발하는데 있어서 유용했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이 많았다. 소련도 러시아 제국 시절이 위낙 개판이었기 때문에 이런 요소의 문학 가운데서도 명작은 상당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기하여 카프 등이 생기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당시 도시 인구 비율이 20% 이하로 낮아 노동자 계층의 수가 많지 않았고 문맹률이 80%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높았기 때문에 향유계층이 적어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한반도의 현실에 발 맞추어 농촌소설과 결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8.15 광복 후 대부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들은 월북했으며 황혼을 쓴 한설야는 북한의 소설 미학에 매우 큰 공헌을 했다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북한은 도서정리사업을 단행해 철저하게 사상통제와 검열을 시행하였다.

소련 중, 후반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쿠바나 니카라과 등지의 남미 국가들에서 건너온 마술적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스푸트니크와 핵탄두들로 대변되던 소련의 만연한 과학만능주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결합되어 복잡한 장르로 발전하게 되는데 스트루가츠키 형제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손을 거치고 스토커 시리즈 같은 형태로 재탄생된 소련식 SF에도 영향을 미쳤다.

5.2.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

모더니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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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earthnutshell.com/60-haeju-military-propaganda-child.jpg

예시는 북한 선전 포스터.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전부 드러내는 건 아니지만 사상과 이념을 긍정적으로 그려내거나 홍보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의 경우 소련시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밀려 이전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시도했던 구축주의생산주의 운동이 탄압받았다. 이 당시 예술가들은 르네상스나 바로크 풍 그림, 사상적인 의미를 담은 그림만을 그릴 것을 강요받았다. 변월룡처럼 이 기류에 순응하면서도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는 형태도 있었으나, 카지미르 말레비치처럼 러시아를 떠나 망명하지 못한 화가들은 이런 환경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했다고. 오늘날 예술계에서는 이를 국가주의나 대중성만을 강조할 경우 예술에 생기는 부작용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기도 한다.[12] 한편 현재에 이르러선 러시아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탄탄한 드로잉력을 바탕으로 여러 업계에 진출하는 등 나름의 특색이 되고 있다.[13] 다른 국가는 개념, 추상미술 등으로 여러 갈래로 발전할 때, 러시아는 본의 아니게 인물화, 정물화 등을 더 파고든 셈이기 때문.
파일:attachment/내래 인민의 락을 보여주갔어/1303580.jpg
내래 인민의 락을 보여주갔어로 잘 알려진 선전 포스터
중국에서는 특유의 '홍조를 띈 토실토실하고 밝은 이미지'를 강조한 포스터가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색조는 밝은 색 몇 가지만 써서 뚜렷하게 보이도록 했으며 당연한 이야기지만 붉은색을 많이 쓴 편이다. 북한이 이 화풍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14] 2010년대 후반부터 뜨고 있는 아이웨이웨이, 장샤오강 등의 중국 신세대 작가들은 이 시기의 경험을 소재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런 밝은 색감과 강렬한 보색대비는 2010년대 후반부터 뜨고 있는 중국계 일러스트레이터의 특징이기도 하다.

북한은 소련에서 파견된 변월룡에 의해 미술 교육 방식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게 다시 세웠다.[15] 때문에 북한 회화는 러시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실적인 표현에 기반한다.

한편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백두대간 풍경화나 백두산 호랑이 같은 그림을 많이 그리고 줄리앙, 아그리파를 가지고 소묘 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 별도의 소묘 석고상을 만들어 그리게 한다고. 특이한건 자수가 발달해 있어 자수로 세밀화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1959년 김일성은 만수대 해외개발사를 설립해 1974년 에티오피아의 혁명승리탑 무상 건립을 시작으로 마다가스카르, 토고, 기니, 에티오피아, 세네갈 등에 공공건물, 기념비, 동상 등을 만들어주고 외화를 벌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주제로 작품을 만든 한국 작가도 있다.#

5.3.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극

사회주의 국가의 연극은 대체적으로 기존의 환영주의적 방식을 중시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적인 의제를 최대한 집어넣고자 한다. 물론 동구권에도 브레히트, 하이너 뮐러, 페터 학스 등 실험극의 걸출한 작가들이 있었긴 하지만 이들의 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계보에 속하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북한의 연극, 가극으로, 영화적 기법[16]까지 사용하여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는 게 특징이다. 한 마디로 스펙터클이 강하다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물론 대중이 선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하튼 북한에서 연극, 가극, 영화는 김정일의 특수한 관심 분야였던 만큼 정치의 변혁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5.4.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

1930년의 당대회(黨大會)에서 스탈린이 사회주의 국가의 문화에 대하여 '형식으로는 민족적, 내용으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으며, 4년 후의 문학자 회의에서는 고리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규약이 채택되어, 첫째로 음악은 계급적 또는 국가목적에 따른 구체적 제재를 지닌 것(오페라, 칸타타)이 바람직하며, 대중이 알기 쉽게 작곡양식은 고전적 질서와 낭만성을 띤 19세기적 스타일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철저한 방침에 따라 서구의 모더니즘은 전적으로 부정되었다. 그로 인하여 이 시기 이후의 러시아 작곡가는 신고전적 경향을 가장 농후하게 지니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6. 관련 인물

정의가 모호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직접 관련된 인물만 작성하기로 한다.

7. 매체 등장 사례

  • 문명 5에서는 사회 제도 시스템의 한 테넌트로 등장한다. 체제(공산주의) 이념의 1단계 테넌트 중 하나. 모든 기념비 행복을 +2 해주고 기념비를 2배의 속도로 빨리짓게 해준다. 재밌는건 객관적인 척도로서 정말로 행복도가 상승한다.
    다만 이것이 꼭 현실과 다른 어색한 묘사라고 할 수는 없다. 문명 시리즈에서 시민의 행복도(행복한 시민들)는 꼭 그 시민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자유롭고 행복한지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얼마나 체제에 불만이 없고 충성스러운가' 역시 같이 표현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즉 기념비(도시에 설치된 기념 시설)을 통한 선전선동의 효과를 높여서 시민들을 그만큼 체제에 충성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효과라고 보면 충분히 말이 된다. 문명 5/사회 정책 문서 참조.

8. 관련 항목



[1] 혁명 이후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지만 실질적으론 혁명 이전부터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로 이미 등장한 바 있다.[2] 「독일 이데올로기」 등[3] 출처: 노동자의 책[4] 루카치의 '리얼리즘 논쟁'의 내용[5] 무계급적 예술[6] 북한에서는 당성으로 표현한다.[7] 당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경우 혁명을 위한 역량을 결집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진정한 "사회주의적인" 역사관을 함양하고 있는가는 당이 결정한다는 것이며, 예술은 당의 입장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8] 한 마디로 노동자가 비참한 환경에서 노동을 하다가 다쳤는데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나는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산정 호수를 그려대는 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뻘짓이라는 것.[9] 이러한 인민성의 원칙 아래 소련에서는 오페라나 연극 등을 지방 소도시 등에도 보급하기 위해 애를 쓴 편이며 대중에게 예술 교육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10]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프롤레트쿨트가 대표적 예시였다. 보그다노프는 노동자들은 독자적인 문화를 창설할 필요가 있으며, 과거의 봉건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자칫 과거의 모든 문화를 파괴하자는 과격한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11] 서양권에서 피카소나 마그리트 같은 작가의 모더니즘 작품을 보면서 이게 무슨 예술이냐?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는 식의 반응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련도 별다르지는 않았다. 소련의 문화검열을 완화시킨 흐루쇼프도 이러한 추상예술을 보고서는 "당나귀가 제 꼬리로 그렸어도 이보다는 낫겠다!"라는 평을 남길 정도였다.[12]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만 추상화개념미술 등의 아방가르드 예술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착각이다.[13] 심지어 2차 창작, 퍼리 팬덤 등의 서브컬쳐까지.[14] 그래서 해당 밈이 유행했을 때 이 그림북한에서 그린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많았다.[15] 이전까진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일제식 미술교육이 주를 이뤘다.[16] 무대미술을 활용하여 빈 공간을 채운다든가 OST 역할을 하는 악단을 넣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