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75> 아이웨이웨이 艾未未 | Ai Weiwei | 애미미[1] | |||
출생 | 1957년 5월 18일 ([age(1957-05-18)]세) | ||
베이징시 | |||
국적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베이징전영학원 (애니메이션과) | ||
링크 |
[clearfix]
1. 개요
중국 출신의 사회 비평적 현대예술가.중국 미술계는 태생적인 결함이 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 추구와 사실 추구라는 입장을 포기했습니다. 언어와 다른 수단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을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아이웨이웨이 #
아이웨이웨이 #
2. 생애
1957년 5월 18일 베이징시에서 시인이자 중국화가 아이칭(艾靑)의 5남으로 태어났다.[2] 아이칭은 1957년 비공산주의 계통 지식인을 대거 숙청한 반우파 투쟁(反右派鬪爭) 때 견책을 받은 바 있는데, 이듬해인 1958년 이때문에 온 가족이 체포되어 헤이룽장성 북부 황무지[3]에 있는 노동교양소(勞動敎養所)로 이송되었고, 1961년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스허쯔시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16년간 생활했다.2.1. 현대예술 입문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석방되었고, 베이징시로 돌아왔다. 1978년 베이징전영학원 만화영화과에 입학하였다. 동기로는 장예모, 천카이거 등이 있다. 70년대 후반 세잔과 고흐 등의 회화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1981년 미국 필라델피아 및 캘리포니아로 떠나 현대미술을 수학하였으며, 1982년 1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마오》 시리즈, 《두 개의 마오》 등 이 무렵 아이웨이웨이의 회화는 신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띄는, 사회와 자신에 대한 냉소를 보내는 유화 작품이었다.마오 1-3, 캔버스에 아크릴, 180×135cm. |
|
원근법 연구 - 천안문 광장, 1995, 1998. |
2.2. 2008년 쓰촨성 대지진과 탄압
Name List Investigation(2008-11). 대지진 당시 "학교 붕괴 원인을 공개적으로 조사하겠다"고 천명한 중국 당국의 기만에 대한 화답적 작업이다. 그는 시민조사단을 꾸려 지진으로 실종된 모든 학생 이름과 생일의 목록을 수집하여, 총 5,196개의 성명을 수집하고 전시장에 제시했다. 영상 |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 베이징국가체육장의 예술 컨설턴트를 맡을 만큼 중국 사회와 당국으로부터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2008년 쓰촨성 대지진 직후 시민조사단을 결성하여 피해자 유족, 관료 등과의 인터뷰, 사망한 유아들의 성명과 숫자를 집계, 현장 촬영 영상들을 본인의 블로그에 게시하였다. 2008년 쓰촨성 대지진 현장에서 발견한, 누락된 철근들을 모아 재구성한 《곧은(Straight)》(2008-12), 학생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책가방을 매체로 활용한 《Snake Ceiling》(2009), 《Remembering》(2009) 등을 발표했다.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건드린 그의 액티비티적 움직임으로 인해 자원봉사단 다수가 체포되고 개인 블로그는 폐쇄되는 등 탄압이 시작됐다. 하지만 아이웨이웨이는 개의치 않았는데, 2009년 8월에는 환경운동가 탄쭤런의 재판 참석차 방문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경찰에 둘러싸인 상황조차 사진으로 촬영해 작품을 내놓았다. #
2010년에는 반체제운동가 류샤오보의 석방을 요구하다 2개월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아울러 2011년 4월, 홍콩 방문을 위해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으로 향한 아이웨이웨이는 중국 공안에 연행됐으며, 공안은 그의 스튜디오를 압수수색했다. 세계 각지의 미술계, 인권단체들의 항의가 빗발쳤으며, 81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신화통신은 "탈세 혐의를 인정했고 개선의 여지를 보이기 때문에 석방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가택연금에 처했다. 중국 당국은 2015년 국제앰네스티 인권상을 수상하자 그제서야 그의 여권을 돌려주었고, 곧바로 독일로 출국해서 거점을 옮겼다.
2.3. 유럽에서의 활동
2016년 3월 12일, 그리스 북부 이도메니의 난민촌에서 시리아 난민 여성 누르 알크잠이 아이웨이웨이가 제공한 피아노를 연주했다. |
3. 주요 작업
한대 도자기 떨어뜨리기, 148 x 121 cm, 젤라틴 실버 프린트 3점, 1995(2017) |
원근법 연구 - 천안문, 1998. |
Colored Vases, Ca. 35 x 27 x 27 cm (each), 2006. |
한 마리 호랑이와 여덟 젖꼭지, 2011. |
Coca-Cola Vase, 35 x 50 x 27 cm, 한대 꽃병에 채색, 2014. |
기억하기, 9,250 x 10,605 x 10 cm, 하우스 데르 쿤스트, 2009. |
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파카인 동물, 벽지, 2015. |
빨래방, 행거 12개, 옷걸이에 걸린 옷 579벌, 신발 32켤레, 2016. |
난민 모티브의 도자기 기둥, 312 x 51 cm, 도자기, 산화 코발트, 2017. |
숨을 쉴 수가 없어, 213 x 154 cm, edition of 2, plus 1 AP, 2019. |
구명조끼 뱀, 65 x 2,250 x 85 cm, 구명조끼 140벌, 2019. |
코카콜라 유리 꽃병, 19 × 21 × 21.2 cm, 반투명 붉은 유리꽃병에 주조, 2023. |
4. 기타
- 2021년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 코로나 19로 인해 방한은 하지 못했다. 도록 영상
- 부인 루칭(路靑)[5] 사이에 자녀는 없고, 애인인 왕펀(王芬) 사이에 아들 아이라오(2009~)를 두고 있다. 2011년 중국 당국이 아이웨이웨이에게 중혼 혐의를 씌우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왕펀은 애인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금은 셋이서 케임브리지에 거주 중이다.
- 2023년 11월, 아이웨이웨이는 X에 “유대인 박해에 대한 죄책감은 때때로 아랍 세계를 상쇄하기 위해 변질된다”는 트윗을 게재했다가 반유대주의 논란이 일었다. 이때문에 런던 리슨갤러리(Lisson Gallery)에서 예정되었던 전시회는 물론, 미국 뉴욕 리슨갤러리와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 막스 헤츨러 갤러리(Galerie Max Hetzler) 등 3개 전시도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며, “사회가 다양한 목소리를 견딜 수 없을 때, 그것은 붕괴 직전에 흔들린다”고 논평했다. #
- 2024년 1월 11일, 'Ai vs AI'라는 주제로 자신과 AI 인공지능이 81일[6] 동안, 동일한 81개의 질문 목록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아이웨이웨이는 인공지능이 ‘정답’이 단 하나뿐인 나치 독일이나 문화대혁명기와 유사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의 이념, 하나의 과거, 그리고 소위 '올바름'이라는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건 위험하다.” #
- 아이웨이웨이는 같은 인터뷰에서 ‘사실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초전을 맞추는 고전적인 미술 교육을 비판했다. “AI가 이를 수행하는 데는 1초가 걸릴 뿐이며, 그것은 그들이 지속적으로 배워온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피카소나 마티스가 지금 살아있다면 그들은 직장을 그만둘 것이라고.
- 최근 중국 미술계에서 후세대가 정치에서 탈궤해 자신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두고 “이 사회에서 우리는 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말 본질적인 권리 없이 개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피할 수도 있고, 가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예술은, 말하자면 투쟁을 통해 발전한 것이다. 그 뒤에는 강력한 철학이 있다.”고 비판했다.[7] 이를 인정하지 않는 예술가들은 단순히 중국 당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양에서 전시를 홍보하는 2가지를 모두 욕심내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 언어와 다른 수단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을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방향성인데, 중국 미술계는 그것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
[1] 한자 발음.[2] 아이칭의 3번째 부인 가오잉(高瑛)의 첫번째 자녀.[3] 흔히 북대황(北大荒)으로 일컫는다.[4] 아이 웨이웨이의 독립출판물: 헤이피슈, 바이피슈, 훼이피슈 연구[5] 천안문 앞에서 팬티를 드러내는 《원근법 연구》의 주인공으로, 아이웨이웨이의 동료이기도 했다.[6] 2011년 중국 정부에 의해 감금되었던 동일한 일수.[7] 평론가 임근준은 아이웨이웨이를 제외하면 중국에 사회 비판적 의식을 드러내는 미술가가 전무한 수준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 예술가들도 “우상 타파적 실험미술가라면서, 뒤로는 기념 동상 제작하기를 일삼고. 그게 왜 문제인지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비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