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8 13:29:48

신장 위구르 자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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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장.png 중국의 제1급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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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新疆维吾尔自治区, ruby=Xīnjiāng Wéiwú'ěr Zìzhìqū)]
(新疆維吾爾自治區)
[ruby(شىنجاڭ ئۇيغۇر ئاپتونوم رايونى, ruby=Shinjang Uyghur Aptonom Rayonu)]
신장 위구르 자치구
Xinjiang Uyghur Autonomous Region
카자흐어 [ruby(شينجياڭ ۇيعۇر اۆتونوميالى رايونى, ruby=Shınjıań Uıǵur Avtonomıaly Raıony)][1]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03416332.jpg

자치구정부
소재지
우루무치시 톈산구 중산로 2
(烏魯木齊市 天山区 中山路 1)
지역 시베이
면적 1,664,897km²
하위 행정구역 4지급시 5지구 5자치주 9(자치구 직할)현급시
인구 2,500만명
인구밀도 13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천촨궈(陈全国)
정부주석 쇼라트 자키르[2](雪克来提·扎克尔 / شۆھرەت زاكىر‎)
HDI 0.725 (2017)
GRDP $1,843억 4,900만 (2018)
1인당 GRDP $7,476 (2018)
행정구역 약칭
ISO 3166-2 CN-XJ
홈페이지
1. 개요2. 주민3. 지형 및 기후4. 산업5. 교통6. 역사
6.1. 흉노 연맹의 오른팔6.2. 중국으로의 불교 전파6.3. 당나라의 안서사진6.4. 위구르인의 정착6.5.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6.6. 청나라의 새로운 강역 신장6.7. 신장의 재정복6.8.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
6.8.1. 1933년 인구 조사
6.9.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
7. 교육8. 관광9. 기타10. 출신인물11. 행정 구역

1. 개요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 위구르족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은 자치구이다.[3]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 중 가장 면적이 크고, 자치구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

이름이 길어서 지명이 '신장위구르-자치구'라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연변 조선족 자치주'처럼 '신장'이 지역 이름이고 '위구르 자치구'가 법적 지위이다. '신장(新疆)'이라는 말은 건륭제 때 새로 얻은 땅이라는 것에서 유래했다. 중화민국은 "신장성(新疆省)"이라는 용어를 썼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중화민국에는 없던 자치제도가 실행되어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었다.

행정구역 약자는 신(新), 혹은 강(疆)이다.

2.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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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2010년 기준 21,815,815명이며 면적은 1,664,897㎢이다. 이 지역의 주류민족은 위구르족이며, 45%의 인구를 점유하고 있다. 한족은 40%, 카자흐족이 6.5%이고 회족이 4.5%이다. 그외 기타민족(키르기스족, 사리콜인와키인, 러시아계 중국인, 몽골인, 우즈베크족, 튀르크멘족, 타타르족, 시버족 등)들도 거주하고 있다. 종교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비중이 높고, 이 중 사리콜인과 와키인은 쉬아 이슬람 이스마일파에 속한다. 소수민족에 따라 불교를 믿는 경우도 있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내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교회를 믿고 있다.

1933년 인구 조사 통계에서는 위구르인이 290만여 명으로 77.75%, 카자흐인이 32만여 명으로 8.55%, 인구 비율 3위인 한족이 20만여 명으로 5.41%였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이 지역을 인수한 후 대규모로 한족을 이주시키고 문화대혁명과 대약진 운동 와중에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 러시아인이 대거 소련으로 망명하면서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한족이 위구르인과 비슷한 규모의 다수 민족이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 위구르스탄(혹은 위구리스탄), 위구르 독립론자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쓰기도 한다. 이것이 한자화되어 동돌궐, 중국어로는 둥투(东突)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심도시는 위륌치(ئۈرۈمچى شەھىرى‎/Ürümqi, 중국어 발음으로는 우루무치(乌鲁木齐))이다.

3. 지형 및 기후

이곳의 지형은 톈산 산맥을 기준으로 북부의 준가리아와 남부의 타림 분지로 나뉜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막-초원 지형이다.

자치구 내 최고봉은 서쪽에 위치한 쿤룬 산맥의 최고봉이기도 한 쿤구르 산이다. 현재 중국이 관할하고 있는 샥스갬 지역을 포함하면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최고봉은 초고리 봉(K2)이다. 하지만 샥스갬 지역은 인도와 영유권 분쟁 중이며 샥스갬 지역을 제외하고는 파미르 고원쿤룬 산맥에 위치한 쿤구르 산이 최고봉이다. 그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가운데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는[4] 타림 분지를 중심으로 만년설로 덮인 산맥들이 톈산 산맥이 북쪽에, 쿤룬 산맥이 남쪽에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 고원이 있다. 톈산 산맥을 경계로 나뉘던 준가리아와 타림 분지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동쪽의 투르판 분지는 여름에 무척 더우며 지하 수로와 오아시스 농업을 바탕으로 포도를 비롯한 여러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중국과 교역이 제한되면 주로 투르판 분지에서 농산물과 말린 과일을 수급하였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안보 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일례로 한나라 때 이 지역은 흉노의 오른팔로 여겨졌으며 한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이 지역도 같이 한나라 군의 공격을 받았다.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들은 대게 이 지역으로부터 농산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공급받고 이 지역의 도시들을 거점 삼아서 막대한 무역 소득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면 항상 북방 유목민들에게 끌려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러시아, 인도,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와 접경하고 있다. 역사가들이 괜히 이곳을 유라시아의 교차로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 국경수비대와 중국 국경수비간에 잦은 교전이 있었지만 중국-소련 국경분쟁처럼 전면전 수준까지는 비화되지는 않았다.
파일:Tashkurgan1.jpg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 위치한 타슈쿠르간 타지크 자치현

4. 산업

중국 최대의 행정구역으로 면적이 넓은 만큼[5] 엄청난 자원의 보고이다. 원유산업 및 광업이 발달했다. 하지만 연해지역에 비해서는 인구도 적고 소득 수준이 낮은데, 과거에는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으나 대항해시대 이후 무역이 쇠퇴하면서 오아시스 농업 이외에 산업 기반이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지하 자원 개발의 이득을 누리지 못하는 박탈감 및 위구르인의 경제 빈곤, 박탈감 문제가 독립운동의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이곳에 경제특구를 설립하고 탈빈곤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대거 독립하면서 인종·종교·문화적으로 유사한 위구르족들의 독립 열망도 커졌다”며 “2000년대 초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원했던 미국이 유엔에서 위구르족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한 테러리스트 규정을 지원하면서 미·중 합작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즉 위구르 독립운동은 이슬람국가 건설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농업도 실시되고 있으나 사막화가 진행 중이라 그다지 농업 생산이 풍부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일교차가 크다는 특성 상 각종 과일의 특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하미의 메론이 유명해서 하미과하고 부르기도 한다.

5. 교통

지하철은 우루무치 지하철 참조.

일반철도로는 준가르 분지를 지나는 란저우-신장 철도(란신철로, 1962년 개통)와 투루판분지를 지나는 남장철로(南疆铁路, 1999년)가 있다. 이 철로들은 모두 인접 국가로 연결되며, 안보적인 이유로 만들어졌다. 2006년부터는 칭하이성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노선이 건설 중이다. 일대일로 사업의 일환으로 여러 도로-철도가 개통되거나 건설 중이다.

공항은 우루무치 디워푸 국제공항 참조.

6. 역사

위구르의 역사
كىرگۈزگەن ئىبارە ئۇيغۇرچە ئەمە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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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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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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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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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세 근대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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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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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중화민국
신장성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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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H
T위구르스탄
K카슈가르 칸국
야르칸드 칸국
호자
※ Z는 북부 중가리아 분지, H는 투루판 분지 (하미), T는 타림 분지, K는 카쉬가리아}}}}}}

위구르족의 역사 참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 역사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준 지역이기도 한데, 고대 전차를 비롯한 청동기 문물 상당수가 이 지역의 인도유럽어족 토하라인들을 통해 유입되었던 것.[6] 토하라인을 뒤따라서 들어온 스키타이 사카(塞)인들이 기원전 8세기 무렵 동아시아에 초기 철기문물과 승마술을 전파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와서 불교를 전하거나 불경을 한역할 때도 대부분 해로 대신에 육로로 왔으니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투르케스탄 동부가 중국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곳은 위구르족만이 대대로 정주했던 영역은 아니고, 위구르족을 포함한 여러 오아시스 도시국가 및 유목민족의 활동지였다. 위구르족은 원래 외몽골 지역에 살았는데 키르기즈인들의 침공으로 이곳으로 이주했다.

6.1. 흉노 연맹의 오른팔

파일:Centum_Satem_map.png
파란색 부분은 켄툼어군 Centum, 빨간색 부분은 사템어군 Satem.

고대에는 인도-유럽계 토카리아인들과 샤카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토카리아인과 샤카인 모두 백인종이긴 했지만 사용하는 언어[7]나 문화가 꽤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흉노족들이 토카리아인들을 공격하면서 토카리아인 상당수가 일리강과 추강 유역으로 이동했는데 이들을 대월지[8]라고 한다. 이들은 원래 그곳에 살던 이란계 사카인들을 쫓아냈고 쫓겨난 사카인들 대부분은 멀리 이주하여 인도-스키타이가 되나 일부는 타림분지 서부로 들어와 호탄을 중심으로 정착한다. 토하라인들이 흉노족을 피해 이주하는 과정에서 낙오한, 이른바 “소월지” 족은 타림 분지 동부의 오아시스를 따라 정착하며 흉노에 조공을 바쳤다. 토카리아인들이 세운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은 흉노족에 복속했고 때문에 중국도 기원전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국은 한무제시절 장건의 보고에 의해 흉노가 이 지역에서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과 교역을 하거나 조공을 받으며 많은 이득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나라는 흉노족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 흉노의 오른팔을 자른다.[9]라는 계획 아래 이곳으로 원정군을 보내 군마를 징발하고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에서 흉노 주둔군을 몰아냈다. 결과를 떠나서 중앙아시아 원정은 보급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원정나간 한나라 군인들은 대부분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막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기원전 115년경부터)... 기원전 60년까지 전한 정부는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또는 그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대담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을 복종시키고 한이 선호하는 왕들을 그들이 수용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계획된 두 차레의 군사 원정[10], 한의 관원들이 현지의 왕을 살해하기 위해 음모를 계획했거나 이와 연루된 5개의 사례[11], 현지 주민 모두가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살해당한 경우[12], 허수아비 왕이 세워지고 주민들이 거주 지역에서 쫓겨나 그 후 흉노에게 넘어간 사례[13], 국가 권력과 주민에 대한 지배권이 2명의 현지 지배자 간에 나누어진 경우(오손)에 대해 알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당시 한나라의 타림 분지 통치가 소위 왕도 정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흉노족의 지배보다 더 가혹한 편이었다.

현지인들의 비협조 때문에 보급이 너무 힘들어지자 궁여지책으로 한나라는 죄수들과 고아들을 서역 영토에 주둔군으로 정착시키고 둔전을 설치하였다. 둔전 경작은 타림 분지에서 장안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보급에 비용이 너무 많이 나가는 문제[14] 때문에 만들어낸 방식인데, 비용 절감 효과가 확실하다는게 입증되서 삼국시대 이후로는 중국 전역에 확대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한나라의 힘이 절정에 이르렀을 시점인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이식쿨 호 근방에까지 둔전이 한 곳 설치될 정도였지만, 후한 시대에는 오늘날의 하미 근처의 둔전 하나만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후한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인하고자 반초를 보내 이 지역으로부터 조공을 다시금 징수하는데 성공했다. 반초가 귀환한 후 서기 102년이 되자 한나라는 서역에 투입시킨 병력을 감축하였고, 이로 인해 타림 분지 일대는 107년부터 125년까지 다시 한번 북흉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반초의 아들 반용이 뒤를 이어 이 일대를 다시 정복함으로서 한나라는 다시금 127년부터 15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타림 분지 일대를 다스릴 수 있었다.

6.2. 중국으로의 불교 전파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대부분은 마니교 경전에서 "쿠처카슈가르에서 코초와 베슈발리크에 이르는" 토하리스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쿠샨 왕조의 초기 이름이랑 헷갈릴 수도 있는데, 토하리스탄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그냥 토하라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서기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는 간다라 지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롭 노르 호수 근방에 정착한 후 크로라이나(Kroraina) 왕국을 세우고 이 지역에 카로슈티 문자를 보급했다. 인도에서 도입한 문자가 널리 쓰임과 동시에 타림 분지 곳곳에 불교 경전이 보급되고 불교 사찰에 기반을 둔 초기 형태의 학교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흉노족과 선비족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사이에 에프탈족이 이 지역을 장악한다. 중국과 이 지역이 모두 유목제국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쿠차 출신의 쿠마라지바[15]가 중국으로 건너가 불경을 대거 번역하는 등 인도와 중국, 중동을 연결하는 경제/문화 교류가 무척 활발해졌다. 물론 쿠마라지바 한 명만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 수많은 중동,중앙아시아 출시 승려들이 오호십육국 시대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환영을 받으며 불경을 한역하였다. 오호십육국을 세운 유목 민족들은 한족과 비한족 간의 통합을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했던 것. 당시에 유행한 불교는 더욱이 경전 공부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교종이었다.

구자국으로도 알려진 쿠처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의 중심지 중 한서에는 서기 2세기 인구가 8만에 달하는 도시라고 기록되었으며, 진서晉書에서는 3~4세기 쿠처에서 불교가 번성한다는 기록이 있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은 삼중으로 되어있다. 불사와 불탑이 천여개소에 달한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에 종사하며 남자 여자 할것없이 머리는 모두 목까지만 기른다. 왕이 사는 궁전은 마치 귀신이 쌓아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으리으리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6세기 이 쿠처를 방문한 현장[16]은 불교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대해 다소 미화된 기록을 남겼다.
이곳은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을 심기 알맞으며... 훌륭한 포도와 석류, 자두, 배, 복숭아와 아몬드가 생산된다... 근처의 금과 구리와 철, 납과 주석 광맥이 풍부하다. 공기도 좋은 곳이며 사람들은 행실이 정직하다... 천축(인도)에서 유래된 문자를 조금 변형해서 사용한다. 이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현악기와 피리를 훨씬 더 능숙하게 다루며 비단에 자수를 놓은 의복을 주로 입는 등 여러모로 풍요로운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5,000명 이상의 출가자들을 가르치는 백여개의 사찰이 있다. 소승 불교를 주로 믿으며 교리와 계율은 천축국의 그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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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처 인근의 키질(Qizil) 동굴의 석굴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과 성소가 있었다. 키질 석굴은 동굴을 파내고 그림을 그려 성소로 이용하는 인도의 전통이 중앙아시아로 확대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사원 형태의 다른 예로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17], 투르판 분지의 베제클리크, 둔황, 룽먼석굴 등이 있다.

토하리스탄 쿠처에서 부파 불교를 믿고 팔리어 원전의 설일체유부 경전과 자타카[18]를 공부한 것과 대조적으로 샤카 족이 살던 호탄 왕국에서는 대승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반야부 경전을 주로 공부하였다. 호탄을 방문한 중국인이나 신라인 승려들은 이 곳 주민들이 삼보를 매우 공경하여 집집마다 집 앞에 불탑을 조성하고 큰 사찰만 14개에 작은 사찰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기록하였다. 호탄의 왕족들은 둔황의 한족이나 소그드인 유력자들과 자주 통혼하였으며 둔황과 룽먼 석굴 조성에 직접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살단나(Kustana, 호탄의 산스크리트어 이름)국은 모래와 돌이 태반이고 토양이 있는 곳은 조금뿐이다. 토양이 비옥하여 갖가지 과일이 많다. 이 곳에서는 품질 좋은 면제품이 나오고 백옥과 예옥이 난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회오리 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사람들의 성질은 예절바르고 온순하며 학예를 좋아하면서도 음악도 발달했다. 가죽옷이나 모직물을 입은 사람은 드물고 면직물 옷을 입은 사람이 많다. 천축국(인도)에서 유래된 문자를 변형해서 쓴다. ... 사찰은 1백여개에 승도는 5천여명에 달하며 모두 대승을 학습하고 있다.

호탄 왕국은 중국의 둔황과 교류하기 앞서 인도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들은 크로라이나 왕국과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인도의 카로슈티 문자를 변형시켜 사용했으며 인도에서 도입한 면직물을 생산하며 번영을 누렸다. 호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산스크리트어로 땅의 젖이라는 이름의 쿠스타나(Kustana)로 칭했다. 중국보다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와 교류가 많았던 호탄 왕국이었지만, 불행히도 고대 중앙아시아 역사 기록은 대부분 중국인이나 그리스인에 의해 기록되었던 바, 호탄 왕국의 역사와 생활상의 많은 부분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는 부파 불교와 대승 불교가 서로 공존했던 것과 다르게 중국에서는 부파 불교가 잘 도입되지 못하고[19] 도교와 융화가 가능했던 대승 불교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널리 전파되었다.

6.3. 당나라의 안서사진

중원을 통일한 당나라는 동맹이었던 동돌궐 제국을 활용하여 투르판 분지와 타림 분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호탄의 우전도독부, 카슈가르의 소륵도독부, 카라샤르에 언기도독부를 설치한 후 쿠차에 설치한 안서도호부[20]로 하여금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 영토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를 "안서사진"이라고 한다.

티베트가 654년대부터 676년까지 이 지역으로 팽창하며 타림 분지를 점령하고 우전도독부와 소륵도독부를 파괴하자, 당나라 조정은 황급히 안서도호부 본진을 투르판으로 옮겨야 했다. 당나라가 지배할 당시 투르판 주민들은 망자에게 입힐 옷과 모자, 신발을 주로 재활용 종이로 만들었는데, 투르판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망자의 옷으로 만들었던 여러 문서들 관청에서 쓰고 버리던 서류 및 계약서, 약 처방전, 학교 교재 등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한다. 이렇게 보존된 종이 중에는 마니교 경전도 있었는데, 여태 수수께끼에 쌓여있던 마니교 경전 내용이나 교리가 20세기 초반 투르판에서 마니교 경전이 발견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한다.

당나라와 티베트는 660년대부터 730년대까지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의 지배권을 놓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 티베트 제국의 명장 가르친링 첸드로[21]가 이끄는 티베트군이 670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의 대군을 궤멸시키자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당나라는 나당전쟁에 파견보낸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티베트군과 맞서야 했다. 당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은 티베트는 690년대까지 신장 지역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8세기 초 우마이야 왕조의 팽창으로 티베트의 동맹이던 튀르기스족이 약화된 틈을 타서, 744년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군이 티베트의 돌궐 동맹군을 궤멸시키고 일리 강과 이식쿨 호 근처의 영토를 다시 수복하면서 당나라가 서역에서 직접 통치[22][23]하는 영역은 최대 판도로 증가하였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페르가나의 왕과 연대하여 750년 타슈켄트를 점령하고 왕을 생포했다. 오늘날의 타슈켄트에 해당하는 사쉬 왕국의 왕은 평화적으로 물러났지만 고선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보내 사쉬 왕국에 강간, 살인, 약탈을 자행했고 타슈켄트의 왕을 장안으로 압송시켜 처형당하게 만들자, 사쉬 왕의 아들은 압바스 왕조 아랍인들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고선지는 아랍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를루크족 기병들을 동원하였으나 이들은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배신하면서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만다. 탈라스 전투는 그 자체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랍인들도 탈라스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당나라 영토로 더 진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선지와 가서한을 비롯한 여러 유능한 장수들이 죽어나가고 안서사진의 정예병들이 소모되면서, 결국 타림 분지와 투루판 분지는 소모된 당나라 군을 대신해 안록산의 난을 진압해준 위구르 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6.4. 위구르인의 정착


항목 참조.

위구르 칸국이 키르기스인들에 의해 멸망하자 일부 위구르인 난민들이 당시 티베트 제국의 영토이던 타림분지로 들어와 쿠차와 카라샤르를 장악하고 843년 코초 위구르국을 세웠다. 위구르족들이 토하리스탄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들을 정복하고 정착하면서 위구르인들과 토착 토카리아인들의 혼혈현상이 발생했다. 이들이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인의 직계 조상이 된다.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은 타림 분지 오아시스 도시 경제에 적응하며 도시 정주민이 되어갔다.

감숙성으로 이동한 위구르인들이 세운 국가, 즉 하서회골의 주민들은 후에 유구르족(=유고족)의 선조가 된다. 이들은 감숙성에 있었기에 나중에 몽골제국 멸망 후 이루어진 카를루크어파(=차가타이어파) 언어를 쓰던 이들의 지하드를 겪지 않아 무슬림도 아니고 카를루크어파의 지금 위구르어를 쓰지도 않고 원래 위구르어(시베리아어파)를 보존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영향을 받아 동부 유구르족들은 몽골어족 언어를 사용한다.

10세기 페르시아 지리서 후두드 알-알람에는 오우즈 투르크 영토 동쪽에 위치한 코초는 중국화된 도시로, 코초를 중심으로 하는 다섯 도시에 소그드인들이 많이 살고 이들은 조로아스터교(마니교), 기독교, 다신교(불교)를 믿고 있다고 기록되었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신장 지역에서도 마니교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불교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던 듯 하다. 중국 사서에도 비슷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는 비와 눈이 잘 내리지 않으며 무척이나 덥다. 매년 중 가장 더울때면 이곳 주민들은 땅 속에 굴을 파고 그 곳에 머무른다. 은이나 놋쇠로 만든 관으로 서로 물을 튀기며 더위를 식히는 놀이도 종종 즐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며 귀족들은 말고기를 먹고 그 이하 사람들은 양고기, 야생 오리와 거위의 고기를 먹는다... 비파와 해금으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이곳에서는 양질의 면포가 생산된다. 그들은 달력으로 아직 개원력[24]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50개가 넘는 사찰이 있으며, 각 사찰의 이름은 과거 당나라 때 알려진 그 이름과 같다. 사찰에서는 대장경을 사경하며 이곳에서는 당음, 옥편 그리고 경운에 관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봄 날 밤에는 지역 주민들이 무리지어 사찰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한다. 이곳에는 물론 페르시아인 승려가 자신들의 계율을 말하며 불경(佛經)을 외도(外道)라고 칭하는 마니교 사원도 있다. 이 나라에는 빈자가 없으며 누구든지 먹을 양식이 모자란 사람은 여럿에게 도움을 받는다. 사람들은 보통 백살이 넘도록 장수하며, 젊은 나이에 일찍 죽는 사람이 없다.
-『송사 고창전』

코초 위구르는 876년 둔황의 한족 군벌들과 싸워 하미(쿠물)를 정복했다. 위구르인, 토하라인, 소그드인이 중심이 되고 튀르크인, 사카계 호탄인, 중국인, 티베트인의 영향을 받는 위구르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은 인종의 전시장이자 국제 도시였다. 코초 위구르 주민들은 굳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와 종교, 언어에 대해서 기본 상식을 갖출 수 있었으며 이웃 유목민들은 이들을 초원의 지식인들이라며 부러워했다. 위구르인들은 과거 쿠차 어나 한어로 된 불교 결정들을 위구르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열심히였으며, 평범한 노예도 계약서를 직접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식자율이 높았다 한다.

코초 위구르국이 존재할 당시에는 중국에 면화가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장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서하요나라의 위구르인 상인 공동체를 통해 중국으로 수출되면서 위구르인들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코초의 위구르인들은 풍부한 일조량과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을 이용하여 목화, 포도를 비롯한 많은 상품작물을 재배했다. 위구르 농부들은 이모작을 통해 많은 잉여 농산물을 생산하며 이 지역 상인들에게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1130년 이들은 서요에 복속 국가가 되었으나 1209년에는 몽골군이 서요를 아작내자 즉각 몽골 제국 쪽으로 줄을 갈아탔다.

6.5.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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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림분지 서부는 10세기 중반 이후부터 이슬람교로 개종한 투르크 계통의 카라한 왕조의 정복과 약탈 그리고 수피들이 이 지역 불교 신자들에게 이슬람 신비주의를 전파하면서 급격히 이슬람화된다. 카를루크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카라한 칸국은 10세기 중반 이슬람 수피즘으로 개종한 이후 주변에 다른 튀르크 부족들을 공격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고대 샤카인들의 후손이자 대승 불교를 믿던 호탄 왕국도 1006년 카라한 왕조에 멸망당하면서 호탄 왕국의 샤카족 주민들은 튀르크-이슬람화 되었다. 카라한 왕조는 동부의 코초 위구르와도 전쟁을 벌였지만 정복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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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탄과 카슈가르의 불교 문화는 수피 이슬람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발라사군에서 태어나 카슈가르의 대학에서 공부한 튀르크 무슬림 문인 유수프 카스 하지브[25]는 중세의 대표적인 튀르크어 문학 작품 중 하나인 "쿠타드구 빌리그(복락지혜)"를 집필했다. 그의 책에서는 네 명의 등장인물 칸, 재상, 현자, 고행자가 종교 생활과 사회 생활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데, 페르시아어 문학 작품들과 소재가 꽤 다르다. 이 책에서는 불교 문화와 텡그리 신앙의 잔재가 중세 튀르크 무슬림들 문화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몽골 제국 시대에는 코초 위구르를 중심으로 한 위구르인들과 타림 분지 서부의 무슬림 주민들이 서요를 침공한 몽골군에게 적극 협력하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26] 그러나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카이두가 이 지역을 두고 서로 전쟁을 벌이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쿠빌라이 칸은 이 지역에 몽골 기병과 화살받이 중국인 보병들을 정착시켰는데,[27] 이 때문인지 당시 위구르 지역에서는 이슬람, 불교, 기독교, 마니교 신자 뿐만 아니라 도사들이나 유생들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한다.

카슈가르는 중세 초부터 네스토리우스파 대주교구가 존재할 정도로 기독교가 번영했던 도시로, 이 지역의 소그드인들과 위구르인 기독교도들은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웅구트 등 여러 몽골 부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카슈가르를 장악한 카라한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호탄의 불교가 수피 이슬람으로 대체되는 와중에도 카슈가르의 기독교 공동체는 무슬림 튀르크인들과 공존하며 수백년동안 계속 번영하였다. 카슈가르를 1273~4년에 여행했다는 마르코 폴로에 따르면 아직 그 당시에는 많은 수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주민들과 여러 교회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13세기 말 차가타이 칸국의 투글룩 티무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기독교인 주민들에게도 이슬람을 강요하기 시작한 듯 하다. 흑사병의 창궐과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의 이라크 이주 이후 티무르[28]가 카슈가르를 약탈하며 카슈가르의 교회들을 파괴한 여파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신장에서 사멸했다.

1390년 차가타이 칸국의 히즈르 호자는 키타이에 대항하는 성전을 벌여 위구르스탄의 중심지인 투르판과 코초를 정복하고 위구리스탄 주민 전부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고 주장했다. 히즈르 호자는 중국인에 맞서 싸운 것도 아니었으며 위구르의 불교 주민들은 그의 주장과 다르게 정복 이후 수십년에 걸쳐서야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위구리스탄 주민 전부를 개종시켰다는 주장과 다르게 이들은 15세기 초 불교 승려를 대동한 사절을 북경으로 파견하였으며, 1420년대 이 지역을 거쳐간 티무르 제국의 사절은 이 지역에서 다신교(불교) 사원들이 엄청 화려하고 수도 많다고 기록했다 1450년대 즈음 되서야 이 지역에 모스크가 많다는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다.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원나라 왕족들이 위구르계 주민들을 다스리던 불교 왕국인 카라 델 왕국은 하미를 수도로 삼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16세기 초까지 잔존하고 있었으나, 모굴리스탄 칸국의 만수르 칸에게 정복당해 멸망당했다. 명나라는 하미를 탈환하기 위해 몽골족 한 개 부족을 통째로 고용하는 등 비싼 비용으로 대군을 동원하며 맞섰으나, 결국 망신만 당하고 실패하였다. 하미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을 원치않은 이들은 명나라에 요청해 난민이 되어 감숙성으로 이주하였다 한다.

6.6. 청나라의 새로운 강역 신장

원나라 멸망 이후 북원의 몽골인들이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한 것을 계기로 몽골계 오이라트인들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이슬람을 배교하고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했다. 한 편 한 때 중세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켰던 키르기스인들도 이식쿨 호와 천산 산맥 근처로 이주하며 오이라트인들이 거주하는 준가리아와 무슬림 농민들이 거주하는 타림 분지 사이에 정착했다.

오이라트인의 일파 중 갈단 칸이 이끄는 준가르 인들은 동 모굴 칸국에서 일어난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29]의 내분을 이용하여 17세기 타림 분지 동부를 정복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이라트인들 중 토르구트인들은 카스피해 근방으로 이동하여 코사크들과 손을 잡을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들을 정복하고 노예화했다.[30] 이슬람측 사료와 러시아 측 사료는 이들 오이라트인들을 칼미크(Kalmyk) 혹은 깔무끄(قلموق)라고 칭했다.

준가르 칸국은 신장 지역으로 진출을 노리던 키르기스인들과 카자흐인들을 격파하고 1705년 야르칸드 칸국마저 멸망시키며 신장 전역을 장악했다. 17세기와 18세기 전반부에 준가르인들은 위구르인들과 부하라인들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거두고,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중가리아 오아시스에 라티푼디움(...) 비슷한 농장까지 세우며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 이들은 타림 분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현지 지도자들에게 은과 곡물, 강제 노역을 징수했고, 이들이 각종 세금을 징수하러 올 때마다 술과 음식, 여자들이 제공되었다 한다.

준가르 칸국은 청나라의 전성기 강희제, 옹정제 제위 시절에도 팔기군이 준가르 칸국으로 원정 올 경우 100일치 이상의 군량을 준비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청군을 준가르 영토 깊숙히 유인한 뒤 습격하는 방법으로 괴롭혔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준가르 칸국도 정치 권력의 안정을 위해 티베트 불교계의 수장 달라이 라마에게 의지해야만 했고, 달라이 라마들이 청나라 조정과 손을 잡자 청나라와 대립하던 준가르 칸의 권위도 실추되기 시작했다. 건륭제 시절 준가르가 내분에 시달리는 틈을 노리고 마침내 팔기군이 1756년 준가르 칸국을 정벌하였고,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으로 신강성 즉 신장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나라군은 중앙아시아 원정과 방어가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부담된다고 생각하여, 준가르인들이 다시는 세력을 복구하지 못하도록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생존자들은 전부 팔기군의 노예로 삼아 청나라 각지로 분배했다. 신장 지역 북부가 오이라트인들이 인종 청소 당하며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 농민들, 남쪽의 타림분지에 있던 위구르인 농민들을 공백지에 이주시켰다.

청나라는 준가르족의 거점 중 땅이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를 거점으로 삼고 새로 이주민들과 팔기군을 정착시킨다. 4~5만명 정도의 팔기군은 주로 신장 북부, 과거 준가르족이 살던 곳에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칼미크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인들 이른바 칼미크인들도 러시아 제국에게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명 정도가 다시 신장 북부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기나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인들이 이들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인들은 이들의 친척인 준가르인들이 많은 카자흐인들을 노예로 삼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청나라의 신장 지배 동안 중가리아의 목초지가 대거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신장 지역의 농업 생산량과 인구가 급증하였으나, 중앙 유라시아 실크로드 교역이 망하는 바람에 위구르인들의 문화와 학문은 발전은 커녕 퇴보하였다. 한 때는 중세 튀르크어 사전을 편찬하던 바그다드 대학의 교수까지 배출시켰던 신장 지역은 문해율이 대폭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상류층 자제들도 글을 읽을 수는 있으나 작문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한다. 신장은 청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매년 막대한 원조금을 지원받아야만 신장에 주둔한 팔기군의 봉급을 충당할 수 있었다 한다.

청나라의 통치 시기 동안 인구가 늘고 장작 수요가 늘어나자 신장의 많은 고대, 중세 불교 유적들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당시 불교를 미신으로 경멸[31]하던 청나라 관료들은 무슬림 주민들이 비료로 활용하기 위해 불화를 긁어내서 쓴다던가(...) 사찰 유적의 나무를 가져다가 땔감으로 쓴다던가 같은 행위를 방조하였고, 이로 인해 신장의 불교 유적 상당수가 건조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위구르 농부들은 밀과 쌀, 여러가지 과일을 재배했다. 화덕에 구운 난(빵)과 차를 곁들인 살구, 아몬드, 복숭아, 포도가 주식이었으며 양고기는 주중에 한두번 먹었다. 노령으로 죽은 야크와 말의 고기나 하천에서 잡은 물고기는 비교적 저렴했다. 명절 때는 우즈베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양의 비계와 당근, 양파를 넣은 쌀밥 폴로우를 먹었다.

청나라가 헤롱거리자 코칸드 칸국은 이 틈을 노리고 신장성을 계속 습격하고, 신장의 한족 상인 대부분을 살해했다. 청나라 조정은 결국 1835년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관세를 일방적으로 코칸드 칸국에 유리하게 조정하고, 코칸드 상인의 치외법권을 보장하며 매년 은전 12500~50000을 보조금으로 받는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은 청나라가 맺은 사실상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 조정은 굴욕적인 조약에 대한 반발과 민심의 동요를 덮기 위해서 코칸드 칸국 병사 6만명을 사살했다는 거짓 전과를 공표했기 때문에, 강남의 한족들은 청나라가 이런 불평등 조약을 맺었는지도 몰랐다.

19세기 말에는 청나라 중앙 정부에서 보내주는 원조금이 태평천국운동으로 인해 끊기고 팔기군들은 위구르인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군비를 충당했다. 그 결과 많은 신강 무슬림들이 불만을 품게되었다. 또한 태평천국운동은 다른 방향에서도 반란에 영향을 주었는데 태평천국운동과 같은 일이 발생할까봐 청 정부가 중국(정확히는 China proper)내 회족들을 학살한 것이다. 1850년대 운남성의 회족들이 수 천명 단위로 집단 학살 당하고, 1862년 감숙성섬서성의 회족들이 학살을 당했다. 1862년의 학살은 섬감회족의 난을 불러일으켰고 이 반란의 진압과정에서 도망친 회족들이 신장에서도 회족들을 청이 수천명 단위로 집단 학살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뜨렸다. 원래 세금증가로 불만을 가지던 쿠차의 회족들이 이와 같은 유언비어를 듣자 1864년 반란을 일으키며 팔기군 요새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를 쿠차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해서 쿠차반란이라 한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같은 이슬람교도[32]인 호탄의 위구르족들도 청나라에 저항하며 들고 일어나면서 위구르인들도 회족들의 봉기에 대거 합류했다. 파죽지세처럼 보이던 신장의 반청운동은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한 회족과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한 위구르족 사이의 반목, 그리고 좌종당의 성공적 전략 수립으로 실패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위구르인들을 안정시키는데 적극 노력했으나,[33] 야쿱 벡의 반란 세력은 일단 기원이 용병세력에 불과해서 국가통치 경험이 청에 비해 부재했고 일종의 모험 결과로서의 국가 성립이라 청에 비해 체계적인 국가이지도 않았다. 유럽으로 치환해보면 코르테스의 멕시코 식민지와 본국인 스페인-신성로마제국만큼의 차이 였던 것이다.

6.7. 신장의 재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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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신장 지배 당시 자치를 누리던 많은 위구르인 토후들이 야쿱 벡의 지배에 반발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동쪽 입구 부분에 해당하는 하미(쿠물)의 술탄이었다.

감숙, 섬서 반란을 진압한 좌종당의 사병들이 신장을 재정복하기 위해 진입하자 하미 술탄은 이에 적극 협조하여, 좌종당의 한족 민병대가 신장 기후에 적응될 때까지 충분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까지 줘가며 식량을 보급해주었다.

야쿱 벡을 제압하고 신장을 재점령좌종당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하미의 술탄에게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며 자치를 누릴 권리를 하사했는데, 하미의 술탄과 그 자손들은 이 “마음대로 세금을 거둬도 된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나머지 하미의 위구르인 농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했다.[34]

좌종당은 위구르인 어린이들에게 논어를 비롯한 전통 유학 교육을 실시했다. 기숙 학교에서 강제로 중국어를 배우게 된 위구르 어린이들은 위구르어를 배우지 못해서 부모와 대화할 때조차 위구르어 통역이 필요했다고 한다. 야쿱 벡의 반란과 감숙,섬서 회민반란 와중에 신장과 감숙성을 잇는 도로망과 숙박 시설들도 대거 파괴되었고 그 빈자리는 좌종당이 데려온 산서성의 한족 상인들이 메꿨다.

좌종당의 야쿱 벡 반란 진압 이후 신장은 한족 관료에 의해 중국식 행정 체계가 도입되며 새롭게 한족의 제국주의 식민지로 변화하려는 찰나, 러시아 제국이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 1881년 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35] 통해 러시아와 청나라 조정간의 통상이 자유화되자 러시아 제국 상인들이 유입되어 러시아산 물산을 중국산 공산품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카슈가르의 시장에서는 루블화가 청나라 화폐보다 더 잘 통용되었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590만 루블어치의 상품이 신장에서 러시아로 수출되었고[36] 340만 루블어치의 상품이 수입되었다. 신장에 주둔한 청군은 러시아가 언제 이 지역으로 쳐들어올지 조마조마하면서 청나라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청나라는 착실히 막장 테크를 밟고 있던 시점이라 많은 지원을 보내기 힘들었다.

중국식 교육 체계도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카잔에서 온 타타르인 무슬림 교사들과 오스만 제국에서 온 터키인 교사들이 부유한 위구르인 가정 자녀들을 대상으로 근대 서구 학문과 이슬람 학문을 동시에 가르치자, 좌종당이 설치한 서당의 인기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것

신장에서 한족의 패권을 보호할 수 있는 집단은 한족 군벌밖에는 없었다. 좌종당이 신장을 재점령할 때 적극 협조했던 하미의 위구르인 칸이 위구르인 주민들에게 세금을 두 배 이상 늘리고 그 돈을 가지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쓸데없는 사치품을 사 쓰자, 분노한 위구르인 농부들은 자신들의 처우를 한족 농부들과 동일하게 해달라고 폭동을 일으켰다. 청나라 조정은 봉기를 진압한 후 하미의 칸에게 세금을 원래 걷었던 만큼만 걷으라고 명령했으나 하미의 칸은 듣지 않았다. 청나라가 멸망하자 하미와 투르판의 위구르인 농부들은 다시 봉기하며 한족들을 살해했다. 각지에서 군벌이 들끓는 상황에서 중화민국은 신장을 포함한 중국 대륙 전역에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 조정이 무너지자 한족 군벌 양쩡신이 위구르인 봉기군들을 진압하거나 회유하는 방식으로 진정시키고 군사력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신장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양쩡신은 청나라의 보조지원금이 끊긴 신장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신장과 중국의 다른 지역과의 연락을 차단해버렸으며, 좌종당이 세운 학교들 상당수를 긴축 재정을 위해 폐쇄시키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재정의 72퍼센트 가까이를 군사력 유지에 몰빵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3~4만에 이르는 러시아 난민들과 무장한 백군이 준가리아로 들어왔는데 이들 대부분은 양쩡신 입장에서는 환장하게도 백군 군인이었다. 양쩡신은 계략을 써서 백군 지도자 안넨코프를 죽이고 적군을 불러들여 백군을 알타이 산맥으로 몰아냈다. 러시아 백군을 몰아낸 것을 계기로 양쩡신 통치 시기의 신장과 소련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해졌는데, 1928년 소련과 신장의 교역량은 신장과 중국의 교역량의 거의 10배인 2400만 루블에 달했다. 한족 민병과 군벌들이 신장을 통치하면서 이들은 신장이 한화되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신장의 위구르인들은 계속해서 러시아인들과 투르키스탄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튀르크 민족주의를 배우고 위구르 민족주의를 확립해나갔다. 국민당의 사주로 양쩡신이 암살당하고 중화주의자 진수런이 일방적인 한족우선주의를 내세우자 위구르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계기로 다시 한 차례 폭발했다.

6.8.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

진수런은 여태 청나라와 양쩡신 군벌 정권에서 위구르인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시행한 정책들을 싹 갈아엎고 위구르인들에게 유교 교육을 강제하고 경제적 이권을 일방적으로 한족에게 몰빵시켰다. 위구르인 사이에서 몰래 자체적으로 튀르크-이슬람 교육이 시행되는 마당에 이러한 정책은 기름에 라이터를 던지는 꼴이었다. 1931년 중국인 경찰서장이 위구르인 여성에게 집적거리다 분노한 위구르인들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하미에서 또 한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양쩡신이 위구르인 봉기군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면서 제압한 것과 다르게 진수런은 한족의 복수라며 항복한 위구르인 민간인마저 마구 학살했고, 이에 당황한 위구르인들은 회족 군벌 마중잉을 끌어들였다. 1931년 마중잉이 이끄는 회족 기병 수백여명이 진수런의 군대를 하미에서 축출하면서 1932~33년 사이에 신장 전 지역이 봉기에 휩싸였다.

4.12 디화 정변을 통해 진수런이 실각한 혼란을 틈타 하미 칸의 전임 재상이었던 니야스 호자는 중국인 군벌 성스차이의 지원을 받아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세워 독립을 선언하고, 1933년 6월부터는 자기들이 불러온 회족 군벌 마중잉과 싸웠다.또 팀킬 시작 마중잉의 회족 군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카슈가르에서 위구르인 4,500명을 학살했다.

신장에서 소련과 국민당 정권, 러시아 백군 난민과 회족과 위구르인이 서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탄생한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의외로 민주주의를 강조했으며, 헌법에서 교육의 진흥과 외국 과학 기술의 도입에 관련된 내용을 집어넣었다. 허나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실질적으로는 소련과 성스차이 군벌의 통치를 받았으며, 민주주의와 교육 및 과학을 진흥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실행할 만한 돈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신생 공화국의 정책은 실질적으로 니야스 호자 정권의 생존에 맞춰졌다. 신장에 체류하던 스웨덴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빌려 유인물을 인쇄하는 정도가 이들이 할 수 있는 근대화의 전부였다. 소련에서 보내준 고문들은 대게 KGB 요원들이었다.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삽질만 한 것은 아니고 오늘날의 위구르족 민족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남긴다. 국민당과 진수런이 과거 이 지역에 있었던 토하라인들이나 사카인들이 한어의 방언을 썼다고 우긴 것과 다르게 러시아의 튀르크어 학자 세르게이 말로프와 동투르키스탄 정부는 신장의 여러 민족들을 비교분석한 후에 신장의 무슬림 농민들에게 위구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준 것. 성스차이는 소련 학자들이 고안한 "위구르 민족"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유포했으며, 동투르키스탄 정부는 이름을 위구리스탄으로 변경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마중잉의 공격으로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성스차이의 소련인 고문들이 동투르키스탄 민족주의자들을 의심하고 대거 숙청하면서 해당 계획은 파기되었다.

성스차이는 소련에 석유와 텅스텐, 망간, 주석, 우라늄 채굴권을 팔아먹었고 1937년부터는 스탈린의 충실한 꼬봉 노릇을 하게 되었다.[37] 또한 자신을 도와줬던 스웨덴인 선교사들을 1938년 추방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극소수의 위구르인들을 샤리아를 어겼다는 이유로 교수형 시켰다.(...) 그러다가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소련이 망할 것 같자 이번에는 갑자기 반공을 외치며 소련과 중국공산당에서 파견한 정치고문들을 체포한 후 상당수를 처형했다. 이때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민을 총살해서 공산당에 원한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이 다시 독일을 밀어 붙이자 성스차이는 다시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서 화해를 요청하고, 신장을 소련에 편입시키고 싶다고 아첨을 한다. 스탈린은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성스차이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장제스에 보냈다. 이에 분노한 장제스는 그를 신장 지역에서 임시수도 충칭으로 끌고 오면서 이 지역은 국민당 정권의 직할 통치 하에 들어갔다.

6.8.1. 1933년 인구 조사

민족명 인구수 (비율)
위구르인 2,900,173 (77.75%)
카자흐인 318,716 (8.55%)
한족 202,239 (5.41%)
회족 92,146 (2.47%)[38]
키르기스인 65,248 (1.75%)
몽골인(오이라트계 포함) 63,018 (1.69%)
타란치[39] 41,307 (1.11%)
러시아인 13,408 (0.36%)
시버족 9,203 (0.25%)
사리콜인, 와키인 8,867 (0.24%)
우즈베크[40] 7,966 (0.21%)
타타르 4,601 (0.12%)
다우르족 2,489
만주족 670 [41]
합계 3,730,051

6.9.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

신장성을 직접 통치하게 된 중국 국민당 정부는 소련과 신장 간의 국경을 봉쇄하고 무역을 차단했다. 목축업을 하던 키르기스인들과 카자흐인들은 밥줄이 끊긴 것도 모자라 소련 대신 중국에서 더 비싼 가격으로 생필품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불만이 폭발했다. 1944년 여름부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가을이 되자 주요 식품 가격이 8배나 인상되었다.

또한 성스차이 정권 시절 신장에서 통용되던 기존 화폐가 중국 국민당 화폐로 대체되었는데 이 과정에 국민당 권력자들의 농간이 개입하여, 위구르 소상인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는 와중에 한족 상인들은 폭리를 챙겼다.

한술 더 떠서 국민당에서는 중일전쟁을 위해 군마가 필요하다며 1932~33년 홀로도모르 당시 기근을 피해 신장의 일리 강 일대로 피신한 카자흐인 유목민들의 말을 무상으로 뺏어가려다 카자흐인 유목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말을 뺏으러 온 국민당 군과 경찰의 기강이 헤이한 것을 보고 카자흐인들은 이들을 손쉽게 제압했으며, 오히려 카자흐인들이 여세를 몰아서 국민당 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국민당 군은 소수의 카자흐군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망신을 당하는 상황에서, 때마침 국민당 경찰 본부에서 훼손된 무슬림 시신 200구가 발견되자 분노한 위구르인 공산주의자들도 카자흐인들의 무장저항에 합세하여,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수립된 뒤 정확히 11년 후에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세워 다시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련군 공군의 지원까지 얻은 동투르키스탄 정부의 일리 민족군은 키르키스인들도 끌어들이며 국민당 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승전을 거두었다. 위구르, 키르기스, 카자흐인들이 힘을 합쳐 국민당 세력을 신장 서부 전역에서 축출해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하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내부에서는 정치적 장래를 둘러싼 내분이 생긴다. 종주국이었던 소련마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연대를 위해 위구르를 버리자 1949년 임시 정부의 주석이었던 부르한 샤히디(بۇرھان شەھىدى‎, Burhan Shahidi)는 중국 공산당과의 연합을 선언했고, 부주석이었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ئەيسا يۈسۈپ ئالپتېكىن‎, Isa Yusuf Alptekin)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에 반대해 터키로 망명했다. 이로서 동투르키스탄은 중국령이 되었고, 1955년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지정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이 지역을 장악하자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들은 대약진 운동의 혼란상을 틈타 대거 소련 영토로 탈주하고 소련과 중국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영향력은 자취를 감추었다.

7. 교육

2002년부로 위구르어문을 제외한 모든 강의가 중국어로만 진행되도록 강제되었다고 한다. 해외의 위구르인 커뮤니티들은 해당 정책이 위구르인 전통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시도라며 적극 반발하고 있다. 해당 교육 개혁에 관여한 신장 당 서기 왕러취안은 "소수 민족들의 언어는 수용 능력이 대단히 작고 근대 과학과 기술에 관한 표현들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어서 이 분야에 대한 교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21세기 사회와 보조를 맞출 수 없다."[42]라고 소수 민족 언어에 대한 한족들의 경시 태도를 대놓고 노출하였다. 위구르족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의 소수민족들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실정.

우루무치에는 6개 대학이 있으며, 1924년 설립된 신장 대학이 가장 유명하다. 이 대학은 위구르인들이 많이 진학한다. 이 대학의 총장이었던 위구르인 타슈폴랏 티프(Tashpolat Tiyip)는 국가분열죄로 체포되어 2017년 사형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15세 이상 인구의 문맹률은 2.3% 정도로 통계가 이루어진 31개 행정구역 중 8위에 해당한다.# 소득 수준은 낮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지역으로 2000년 중국에서 발표한 민족별 문맹률과 교육 수준 자료를 보면 15세 이상 한족 평균 문맹률은 8%, 소수민족 평균 문맹률은 14%였던 반면, 신장에 주로 거주하는 타타르족은 1.8%, 우즈베크인은 2.5%, 카자흐인은 2.6%, 시버족 2.7%로 심지어 조선족(문맹률 2.8%)이나 만주족(문맹률 5%)보다 문맹률이 낮은 걸로 나왔다.[출처]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의 경우 문맹률은 한족과 비슷하며 고등교육 이수율은 한족보다 좀 낮다. 같은 통계에서 러시아계 중국인의 경우 3%대의 문맹률이 나왔다.

칭하이성에 주로 거주하는 튀르크계 무슬림 살납족의 문맹률이 49%, 간쑤성의 몽골계 무슬림 동향족은 63%를 찍는 것과 드라마틱한 대조를 이룬다. 비교를 위해 첨언하자면 같은 통계에서 티베트인은 문맹률 40%대, 회족은 문맹률 17%[44]가 나왔다.

8. 관광

인천공항에서 우루무치까지 가는 항공편이 주 3회 있다.

고대와 중세 실크로드 유적 및 카레즈라고 불리는 지하 수로, 맛있는 음식과 오아시스 과수원 등 엄청난 관광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본격적인 휴가철인 여름에 날씨가 살인적으로 더운데다가,[45] 영어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점 등등 중국의 대부분 지역처럼 관광 인프라가 그다지 좋지 않다. 물론 교통이 불편한 점을 참을 수 있으면 굉장히 흥미로운 지역이다. 우루무치와 같은 대도시는 한족과 위구르족의 문화가 공존하며, 서부의 카슈가르나 남부의 호탄같은 중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 지역은 중국문화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이슬람교 우세 지역이기 때문에 색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중국에서는 신장 위구르 관광이 미식 투어 지역으로 유명한 모양인데,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말린 과일은 우수한 품질의 특산품으로 유명하고, 라그만[46], 양꼬치, 낭[47] 등의 위구르 요리들은 중국 전역에서 별미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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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가르의 잡화상

방문해 보면 이곳은 투르크족 이슬람교 우세 지역임을 체감하게 된다. 서부로 갈수록 위구르족 여자는 히잡, 남자는 타키야(무슬림용 빵떡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으며, 안 쓴 사람들은 젊은이들이거나 대체로 한족이다. 다른 이슬람 지역과는 달리 신장 내 한족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여자들이 길거리에서 민소매 옷에 핫팬츠 입고 맨살 맨다리를 내놓고 다녀도 모스크에 들어가거나 할 때 말고는 거의 복장 문제로 제지하는 일이 없다.

다만 여성 위구르족에게 먼저 말 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비이슬람권 사람들이 이슬람권 여성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이슬람권에서 좋은 시선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에 발생한 우루무치 소요사태도 한족 여인이 위구르족 남자에게 성추행당했다,[48] 혹은 그 반대로 여성 위구르족이 한족에게 당했다는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이 원인이였다.

그리고 지하디스트 위구르인들에 의한 테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지정한 여행자제지역(황색경보)이다. 실제로 여러 신강 여행기를 보면 테러가 발생해서 특정 도시 출입이 금지되어 길을 돌아갔다는 식의 언급이 심심치않게 출현한다.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중국 당국의 감시도 철저하다. 중앙아시아쪽 접경 일부 지역은 중국 당국이 외국인 방문 제한구역으로 묶어 놓았다. 소요사태가 벌어질 때는 중국 당국이 인터넷을 포함한 통신망을 차단하여 아예 외부와 통신이 두절되기도 한다.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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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제가 벌어져서 중국 당국은 테러와 소요사태 방지를 위해 이슬람 근본주의적-반정부적인 위구르인들을 수용소에 잡아두거나, 혹은 거리에 설치된 안면인식장치를 이용#, 테러 용의자를 체포한다고 한다. 2018년 기준으로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신장에서 위구르인 100만여 명이 이러한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다고 밝혔다.#

주변 카자흐스탄 등의 이슬람 국가를 방문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위구르인들도 있다. 이러한 정책의 이유는 이슬람 국가 내부의 테러조직과 연계해 신장에 자동차나 폭탄으로 테러하는 사건이 실제로 터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은 1990년대에도 발생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그러나 호주나 일본을 방문했다 같은 이유로 체포되어 몇 주에서 몇 십년 동안 수용소에 수감되는 경우도 있다. 도서관에서 중세 위구르 역사서를 대출했다고 징역 6년을 선고받는다든지 아니면 금요일 예배 중에 "중국 공산당의 도움 없이도 무슬림 여성의 인권을 직접 개혁해야 한다"고 설교했다가 징역 12년을 선고받는 사례도 나온다. 수용소에서는 손발에 수갑 채워놓기나 물고문 등의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수감자 중 일부 자살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는데 고문 피해자들이 진짜 고문을 못 견뎌서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고문치사가 자살로 위장된 것인지는 중국 공안 당국에서 정보를 엄격히 통제하는 관계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중국 당국은 일가친(一家親)운동을 벌여, 공산당 간부들을 2개월마다 최소 5일간 무슬림 가정에 머물도록 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인원만 해도 900만 위구르 가정에 100만 공무원을 파견하는 수준인데, 신장 지역 당국의 프로파간다 그림 중 하나가 부르카를 딸들에게 씌우지 말자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슬람교도들의 이슬람 국가 성립 의지와 성차별, 가정폭력 등을 방지할 의도로 시행한 듯 하다. 그러나 일부 질 낮은 당원들이 위구르인 여성들을 성폭행하면서 큰 논란이 벌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가정 폭력을 예방하겠다고 공무원이 집에 상주하는 시스템은 사생활 침해로써 인권을 침해한다는 문제점도 있다.

심지어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소유한 차량에 GPS 추적 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하고, # 주민들의 생체 인식 정보를 저장[49]한다. 이를 두고 스웨덴과 네덜란드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예 대놓고 조지 오웰식 디스토피아 시스템을 실현하려는게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1980년대 일본 NHK에서 만든 "실크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개혁개방 직후의 이곳 풍경과 풍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만주의 봉소전쟁이나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는 중국군이(국민혁명군, 인민해방군 할 것 없이)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이곳에선 이렇다할 충돌은 없었고 국경수비대끼리 가끔 총격전을 한 정도이다. 80년대 제작된 다큐멘터리인 "실크로드"를 보면 중국 측은 이곳의 유목민들을 민병으로 편제하여 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장(新疆)은 청나라 조정에서 회족이 사는 회부와 준가르족이 사는 준가르부를 아울러 붙인 중국어 지명이며, 위구르 독립운동가들은 동 튀르케스탄이라는 지명을 쓴다. 지명 관련 분쟁도 간혹 있어서 민족명인 위구르(위구르스탄 또는 위구리스탄)도 지명으로 쓰인다.

당연하겠지만 거리 곳곳에 중국어와 위구르어가 병기되어있고, 공산품들도 마찬가지이다. 위구르 자치구 지역생산품은 물론, 기존 중국 기업의 공산품들도 위구르 유통분은 위구르어가 병기되어있는듯 하다. 이 글 중간에 위구르에서 유통되는 중국라면 사진이 있다.[50]

여행자가 받은 인상: 흡사 감옥과 같은 신장(新疆) 자치구

2010년도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장 통치 방식은 과거 청나라 팔기군의 신장 통치 방식보다도 훨씬 더 억압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서구와 러시아 학계에서는 청나라의 주도권이 만주족에게 있던 시절에는 신장에서 현지 위구르인들에게 자극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면서 선정[51]이 베풀어졌으나, 한족들이 지배권을 쥐면서 무슬림들의 이권이 계속 박탈당하면서 갈등이 벌어진다는 의견이 주가 된다.[52]

사실 이러한 지식(위구르인들의 이권 부족 등)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국 공산당에서도 생산되는 지식이다. 그러나 일반 중국인들의 재산을 뺏고 위구르인들에게 주는 분배정책은 일반 중국인들의 인권 침해이기 때문에 일반 중국인들의 재산침해는 없이 위구르인들의 복지를 증진한다는 탈빈곤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특성으로 인한 충돌이 이런 억압을 낳는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슬람교의 교리들을 존중하지 않는 한족의 태도가 무슬림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리 박탈로 느껴진다고 본다.

10. 출신인물

  • 레비야 카디르: 위구르족 독립운동가. 현재 미국 거주중이다.
  • 외르케슈 될레트[53]: 1989년 천안문 항쟁 때 학생 대표였던 민주화 운동가. 위구르족이며 망명 후 현재 대만에 거주하고 있다.
  • 에미르 압둘 하크 알 투르키스타니: 위구르 무장분리주의 단체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의 수장.
  • 디리러바: 중국의 연예인.
  • 구리나자: 중국의 연예인.
  • 왕지옹이
  • 딩옌위항
  • 우몽롱
  • 엔베르 토흐티 : 중국의 사형수 장기적출을 공개한 위구르인 의사. 현재는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

11.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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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카자흐 자치주)[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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Ürümchi
乌鲁木齐
Wūlǔmùqí
3,112,559 한족 74.9%
위구르족 12.5%
3 카라마이 시
(커라마이 시)
قاراماي
Qaramay
克拉玛依
Kèlāmǎyī
391,008 한족 81.7%
위구르족 11.5%
4 알타이 지구
(아러타이 지구)
ئالتاي
Altay
阿勒泰
Ālètài
603,283 카자흐족 54.4%
한족 38.6%
5 타르바가타이 지구
(타청 지구)
تارباغاتاي
Tarbaghatay
塔城
Tǎchéng
1,219,369 한족 65.7%
카자흐족 19.8%
6 투르판 시
(투루판 시)
تۇرپان
Turpan
吐鲁番
Tǔlǔfān
622,903 위구르족 69.0%
한족 25.0%
7 쿠물시(하미시) قۇمۇل
Qumul
哈密
Hāmì
572,400 한족 69.4%
위구르족 17.8%
8 케슈케르 지구
(카스 지구)
قەشقەر
Qeshqer
喀什
Kāshí
3,979,321 위구르족 90.6%
한족 8.0%
9 악수 지구
(아커쑤 지구)
ئاقسۇ
Aqsu
阿克苏
Ākèsū
2,370,809 위구르족 75.9%
한족 22.9%
10 호텐 지구
(허톈 지구)
خوتەن
Xoten
和田
Hétián
2,014,362 위구르족 96.2%
한족 3.6%
11 뵈르탈라 몽골 자치주
(보얼탈라 몽골 자치주)
بۆرتالا
Börtala
博尔塔拉
Bó'ěrtǎlā
443,680 한족 65.0%
위구르족 13.3%
12 산지 회족 자치주
(창지 회족 자치주)
سانجى
Sanji
昌吉
Chāngjí
1,428,587 한족 75.3%
회족 9.5%
13 키질수 키르기스 자치주
(커쯔러쑤 키르기스 자치주)
قىزىلسۇ
Qizilsu
克孜勒苏
Kèzīlèsū
525,570 위구르족 64.7%
키르기스족 27.3%
14 바인골린 몽골 자치주
(바인궈렁 몽골 자치구)
بايىنغولىن
Bayingholin
巴音郭楞
Bāyīnguōlèng
1,278,486 한족 59.3%
위구르족 31.8%
15 시헨제 시
(스허쯔 시)
شىخەنزە
Shixenze
石河子
Shíhézǐ
380,130 한족 91.9%
16 우자취 시 ۋۇجياچۈ
Wujyachü
五家渠
Wǔjiāqú
9만(`14)
17 툼슉 시
(투무수커 시)
تۇمشۇق
Tumshuq
图木舒克
Túmùshūkè
142,601 주로 위구르족?
한족 31.5%
18 아랄 시
(아라얼 시)
ئارال
Aral
阿拉尔
Ālā'ěr
158,593 한족 89.9%
19 베이툰 시 بەيتۈن
Beytün
北屯
Běitún
7.63만(`11)
20 바슈에김 시
(톄먼관 시)
باشئەگىم
Bash'egim
铁门关
Tiĕménguān
5만(`14)
21 코슈외귀즈 시
(솽허 시)
قوشئۆگۈز
Qosh'ögüz
雙河
Shuānghé
5.38만(`14)
22 쾩달라 시
(커커다라 시)
كۆكدالا
Kökdala
可克达拉
Kěkèdálā
7.5만(`15)
23 쿠룸카슈 시
(쿤위 시)
قۇرۇمقاش
Qurumqash
昆玉
Kūnyù
4.75만(`16)

현 중국 행정구역상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4개 지급시(우루무치, 커라마이, 투르판, 하미), 5개 자치주, 5개 지구, 9개 자치구 직할 현급시로 이루어져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자치구 직할 현급시가 계속 설치되고 있는 중이다.


[1] 카자흐스탄식으로는 Шыңжаң Ұйғыр автономиялық ауданы (Shyńjań Uıǵur Avtonomıalyq Aýdany).[2] 표준중국어 음차로는 쉐커라이티 자커얼[3] 일반적으로 주(州)가 구(區)보다 높은 행정단위로 쓰이지만, 중국의 자치구는 자치주보다 더 행정단위가 높다.[4] 이 것 때문에 위구르 지역은 미세먼지 수치가 대단히 높은 편이다.[5] 거의 만주에 육박한다.[6] 강족을 통해 간접적으로 여러 문물을 전해준 것으로 추정된다.[7] 토하라어는 켄툼어군에 속하며 사카어는 사템어군에 속했다.[8] 월지는 고대 중국어로 토콰르를 음차한 한어이다.[9] 흉노의 왼팔로 여겨지던 세력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조선, 고조선 역시 한무제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10] 페르가나쿠차에 대한 원정[11] 사차, 욱성, 오손, 계빈, 누란(크로라이나)[12] 윤대[13] 거사[14] 보통 중국의 왕조들이 중앙아시아로 원정을 보낼 경우 소와 말이 먹을 건초와 병사들이 먹을 군량 보급 문제로 100일 이상의 원정 계획을 짜는 건 사실상 자폭 행위나 다름 없었다.[15] 대승 불교를 믿던 인도 출신 아버지와 설일체유부 부파불교를 믿던 쿠차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이다. 금강경을 한역한 것으로 유명하다.[16] 쿠마라지바와 함께 불경 번역사업의 크게 기여함[17] 탈레반이 바미얀 불상을 파괴하기 앞서 불화들을 화염방사기로 반달했다.[18] 팔리어 경전에 여러 가지 설화를 주석삼아 덧붙인 이야기 모음집[19] 다만 부파 불교 경전은 아함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긴 했다.[20] 원래는 한족이 많은 고창국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정작 당나라 장수들이 대부분이 돌궐족 출신이 되면서 의미가 없어져서 인구가 더 많고 중요도가 높은 쿠차로 옮긴 것.[21] 가르 가문은 토하라인들과 티베트인 사이의 혼혈 가문이다.[22] 당나라 치세 초에 동맹이던 돌궐 제국이 호라산 일대까지 석권한 적도 있지만, 당나라의 직접 통제가 전혀 미치지 못했다.[23] 당나라 치세 초 7세기의 서역 원정군은 사실상 돌궐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고선지가 이끄는 안서사진 군대는 한족과 소그드인 병사들이 많았다.[24] 719년에 당나라에서 제정된 달력.[25] 유수프 알 발라사구니 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하다.[26] 이 지역은 몽골 제국 시대에도 여전히 비옥한 과수원들에서 과일을 풍족하게 수확하며, 말린 과일이나 포도주가 품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반면 징기스칸 군대가 제대로 깽판 친 호라산 일대는 농경지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주민의 4분의 1이 튀르크계 유목민으로 대체되었다.[27] 이 지역으로 끌려간 중국인 보병들은 이 지역의 미개간지에서 둔전을 일구며 몽골 기병에게 먹일 식량을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28] 아까 차가타이 칸국의 티무르 말고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29] 은둔과 고행을 강조했던 기존의 수피 교단과는 다르게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에서는 수피 교단의 지도자가 직접 나서서 샤리아가 엄격하게 적용되도록 국가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가르쳤다. 18세기 무렵에는 중국의 현지인 무슬림 회족들에게도 널리 전파되었는데, 특히 감숙성과 섬서성의 회족 사회를 장악한 낙슈반디야 수피들은 회족들에게 비무슬림 한족들에게도 샤리아를 적용시켜야 한다 주장함으로써 한족과 회족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반면 낙슈반디야 교단의 영향을 적게 받은 북경의 회족들은 한족들과 갈등이 비교적 적었다.[30] 참고로 노가이 족들은 중세 말 동유럽 일대에서 악명 높은 노예 사냥꾼으로 유명했었으나, 이들의 노예 사냥을 복수하려던 코사크와 신장에서 이주해온 토르구트인들의 공격을 동시에 받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31] 그러나 정부차원에서 청나라는 티베트 불교를 존중했다. 방관조치는 청의 이 지역 무슬림들에 대한 우호적 정책이 관료들에 하달되어 생긴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확인 바람.[32] 이슬람이란 종교는 회족과 위구르를 묶는 중요한 기제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반란이 이슬람교도 이외의 지역 내 한족, 만주족, 시버족 등에서 발생하지 않았고 처음 반란지도자 제의를 받은 사람은 이슬람 성직자였다. 이런 위구르인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강렬한 지지때문에 야쿱 벡이 이슬람주의적 정책을 시도한 것이다.[33] 물론 예외로 투르판에서 만주족이 위구르인 부녀자 수백명을 납치하고, 투르판의 위구르인들이 여기에 항의하자 오히려 위구르인 1만 여명이 반란군으로 몰려 학살당하는 억울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은 애초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할 것을 생각하고 팔기군 기지를 대부분 위구르인 거주지와 최대한 분리시켜 놨다. 사실 팔기군 주둔지는 대부분의 중국지역에서 일반 중국인 거주지와 분리되어 있었다. 위구르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장의 경우는 다른 중국지역과 달리 분리가 한족/만주족 이 아니라 한만/위구르 식으로 분리되어있었다.[34] 이후 하미에서는 1930년대까지 계속해서 폭동과 소요가 일어나게 된다.[35] 위구르인들이 봉기가 한창이던 1871년에 러시아 제국이 합병한 일리 강 유역과 쿨자 일대를 반환하는 문제와 관련한 협정. 쿨자의 위구르인들과 둥간들이 한족들의 보복을 두려워 해 러시아 제국의 잔류를 요청한 것을 계기로, 일리 강 유역 서부는 반환되지 않고 오늘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영토로 남게 된다.[36] 주로 목화나 말린 과일같은 1차 생산품.[37] 자신을 따르지 않는 한족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면서 숙청했었다 한다.[38] 수가 생각보다 적은데 1864년 봉기 때 상당수가 팔기군과 야쿱 벡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일대로 탈주했다.[39] 우루무치의 무슬림 다민족 혼혈. 오늘날에는 위구르족에 흡수됨[40] 일부 튀르크멘인 포함[41] 1864년 봉기의 결과 거의 전멸했다.[42] 이런 의견은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한국어가 학문언어로서 부족함이 많다."는 주장도 있다. 가령 한국어에서는 엄밀한 경제용어가 부족해서, 즉 '돈'이란 말이 많이 너무 많은 뜻을 담고있어 아무데나 쓰이기 때문에 경제학 학부 교과서를 보면 영어를 많이 직역한다. 그냥 영어용어로 가르치는 경우도 많다. 한국어도 어떻게 보면 학문에서는 소수언어이다. 그러나 이런 한국어로 학문을 하기 위해 한국어 번역을 중시하는, 즉 영어의 과도한 사용을 줄이려 하는 학자들은 많은 용어들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한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언어정책의 문제점은 이러한 시도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출처] 중국소수민족연구 (주)한국학술정보[44] 다만 회족의 교육 수준은 지역별 편차가 엄청 크다.[45] 여름에 날씨가 40~50도 가까이 올라가는데 근처에는 해수욕을 할 수 있는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의 관광 산업 발전에도 악영향으로 작용한다.[46] 위구르식 굵은 면발의 볶음면.[47] 화덕에 구운 두툼한 빵으로 인도 식당에서 파는 빵보다 조금 더 두툼하다.[48] 해고된 한족 노동자가 원래 자기가 일했던 공장에 앙심을 품고 위구르인 남성들이 한족 여성을 성추행했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밝혀졌다.[49] 이는 사실 중국 본토에서도 시행되는 시스템이다. 한국의 주민등록증의 지문도 이런 정책에 속한다.[50] 대만계 기업인 팅신그룹의 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브랜드인 캉스푸의 제품이다.[51] 청과 협력하는 명망있는 이슬람 신학자가 1800년대 위구르의 반란 시도 때 반란 참가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청의 이 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유화적 정책은 너무 지나쳐서 코칸드 칸국과의 협정에서 청이 대 손해를 본 경우도 있었다.[52] 반면 일본 학계에서는 준가르 칸국을 고평가하면서 청나라의 신장 지배를 가급적 폄하하려는 추세이다.[53] 이름을 한어로 발음하면 우얼카이시 둬라이티.[54] 인구 통계는 자치주의 일부인 알타이 지구와 타르바가타이 지구를 제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