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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만리장성 | |
중국어 | 长城 | ||
영어 | The Great Wall | ||
프랑스어 | La Grande Muraille | ||
국가·위치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허베이성, 베이징시, 톈진시, 산서성, 내몽골 자치구, 섬서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간쑤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 산둥성, 허난성, 후베이성, 후난성, 쓰촨성, 칭하이성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438 | ||
등재연도 | 1987년 | ||
등재기준 | (i)[2], (ii)[3], (iii)[4], (iv)[5], (vi)[6] |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
<colbgcolor=#CCC,#666><colcolor=#000,#FFF> 명칭 | 한국어 | 만리장성 | |||
간체 | 长城 | ||||
번체 | 長城 | ||||
영어 | Great Wall | ||||
몽골어 | ᠴᠠᠭᠠᠨ ᠬᠡᠷᠡᠮ/Цагаан хэрэм | ||||
분류 | 고건축 (古建筑) | ||||
시대 | 춘추시대~명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AA급~AAAA급[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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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666><colcolor=#000,#FFF>일련번호 | 1-0101-3-054: 바다링(八达岭)[8] 1-0102-3-055: 산하이관(山海关) 1-0098-3-051: 쥐융관(居庸关) 1-0103-3-056: 자위관(嘉峪关) 3-0210-1-030: 위먼관(玉门关) 3-0058-3-006: 진산링(金山岭) 4-0032-1-032: 위 장성(魏长城) 4-0034-1-034: 구양 진 장성(固阳秦长城) 4-0132-3-054: 자징관(紫荆关) 4-0136-3-058: 주먼커우(九门口) 5-0442-3-248: 나머지 | ||||
소재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톈진시, 칭하이성, 산둥성, 간쑤성, 섬서성, 내몽골 자치구, 허베이성, 산서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허난성 | ||||
등재 | 1961년 ~ 2001년 | ||||
차수 | 제1~5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 }}} |
<colbgcolor=#CC0000>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장성 |
파일:중국 금산령.jpg |
진산링(金山岭) 구간의 만리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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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중국의 대표적인 성벽으로, 흉노족이나 몽골족과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후대 왕조에 의해 확장, 보수되어 온 인류 최대의 성곽 구조물이다.진시황의 집권기에는 가장 강했던 북방 이민족이 흉노족이었고, 지금의 만주 땅에 있었던 숙신이나 고조선계 예맥인들은 그다지 남의 나라를 약탈하고 압박하지는 않았기에 궁극적인 목표는 흉노족의 남침에 대한 예방차원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후대 왕조들은 약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타 다른 민족들의 방어에도 아주 잘 써먹었다. 사실 이민족 침략 방지가 주목적이지만 이민족의 재산인 가축이 못 넘어오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경을 넘어선 가축을 핑계로 이민족이 넘어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리장성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내몽골 자치구의 남쪽 경계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만리장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000리보다 조금 더 길다. 10,000리는 약 4,000km이고, 만리장성의 길이는 6,350km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0,000리의 약 1.5배가 된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그냥 장성이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는 '장성'이라 발음되며, 중국어로는 '창청'으로 발음된다. 이름을 본떠서 만든 창청자동차(长城汽车) 라는 국유자동차회사도 있다. 만리장성의 굽은 커브를 전부 펴면 그 길이는 무려 한반도를 감싸고도 남으며, 비행기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동쪽 끝은 허베이성의 산해관 산하 노룡두이며, 서쪽 끝은 간쑤성의 가욕관(자위관) 제1돈이다.
2. 역사
|
만리장성의 위치 |
2.1. 전국시대
중국 최초의 장성은 초나라가 쌓은 장성이었다. 초나라는 남방에서 광활한 영토를 영유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중원 국가들의 영토를 빼앗으며 서서히 북진했다. 그렇게 얻은 영토 중에는 하남성 일대의 영토도 있었는데, '중원'이라 불리는 하남성 일대는 국경으로 삼을 만한 자연 경계가 없었다. 초나라가 차지한 이 영토는 삼면으로 다른 중원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초나라는 이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300km가 넘는 장성으로 영토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의 장성을 건설했다. 이것을 장성의 효시라 할 수 있다.이후 장성 건설은 전국시대 강대국들의 트렌드가 되었다. 전국시대 초기, 영역국가로서 재빠르게 변법에 성공한 위나라는 서쪽의 강국인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쪽에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지금의 함곡관보다 훨씬 서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서안시 동쪽에 위치한 화산 북쪽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길이는 대략 60km 정도로, 진령산맥과 진북산맥을 잇는 형태로 건설했다.
제나라는 남쪽에 장성을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강국이었던 오나라와 월나라, 그리고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한나라 또한 위나라와의 접경지대에 짧은 장성을 건설했다.
한편, 조나라는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는데, 그 영토 자체가 유목과 농경의 경계지를 대부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목민족과 접촉이 많았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역 또한 유목민족의 남하를 막을 만한 자연 지형이 없었기에 장성 건설은 필수였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 우리나라는 자연적인 만리장성이 깔린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역시 북방민족과 접해있었던 연나라는 기동성이 우수한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진나라 역시 전국시대 때부터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다. 건국 초기 때부터 상대해온 오랑캐인 융적, 그리고 북방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장성 축조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 첫 번째는 자국의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려던 것이었다. 최초의 장성인 초나라 방성은 중원에서 획득한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건설한 것이었다. 전국시대가 되면 기술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 국가 권력의 강화로 중국 내지가 충분히 개간되었기 때문에 이제 자국 영토를 개발하고 개척하는 것보다는 이미 개발된 상대국의 영토와 인구를 빼앗는 형태로 전쟁의 양상이 변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효과적인 영토와 인구의 보호가 절실했는데, 전국시대 각 국가들이 행한 이른바 변법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장성은 그 주요 방편 중 하나로 그 자체가 영토를 둘러싸 보호하기도 하지만, 적의 침입과 기동로를 제한하고, 아군의 빠른 대응을 가능케 해주어 영토와 인구 보호에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목적의 장성 건설 사례는 최초의 장성 건설 국가인 초나라, 그리고 한나라와, 위나라, 제나라 등 중국 내지의 국가들에게서 두드러진다.
- 두 번째는 북방 유목민족과의 경계선 확립이다. 장성과 경보체제를 갖추면 아무래도 유목민족이 남하하기 어려워진다. 그전에는 주요 감시망을 피해서 목축 동물들을 데리고 내려와 눌러 살면 그만이었지만, 장성 축조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 경계가 부족한 지역에 장성을 건설함으로써 목축민들이 내려오는 한계를 설정하고, 그를 통해서 수월하게 국경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장성 건설의 사례는 북방 유목민족과 접한 북쪽의 국가들, 즉,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에서 두드러졌다.
내지에 위치한 나라들은 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북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2.2. 진•한 시대
<colbgcolor=#CC0000> 중국 서북 돈황의 고비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의 유적으로, 한나라 시기에 건설되었다.[11]판축기법이라고 한다.] |
전국시대에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 등 세 나라가 쌓은 장성을 진시황이 통일 이후 연결해 지은 것이 시초였다. 당시 주관자는 몽염이었다. 하지만 이 장성은 진나라의 붕괴와 함께 한동안 역사의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전한의 세종 무황제가 한 번 더 대규모 공사를 해서 장성의 위치가 이전되었으며, 그 길이도 진나라 시절보다 길어졌다. 그 이후 후한시대까지는 잘 유지되어 왔지만 후한 말 이후의 사회 혼란과 분열이었던 위진남북조시대에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서서히 무너져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완성되었다. 그래서 현재 부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의 장성을 말한다. 진대와 명대 장성은 위치도 상당히 달라서 사실상 다른 장성이다. 오늘날에도 진•한 시대에 쌓은 장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진시황이 연결해서 지은 장성은 지금의 벽돌이 아닌 흙을 이용해 지은 토성의 형태였고, 높이도 높지 않은 데다가, 지켜야 할 영역이 워낙 넓다보니 감시도 소홀해서 사람이나 말이 맘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곡괭이 등으로 성벽을 허문 다음에 우르르 몰려가서 만리장성 아래를 부수면서 박살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나라 다음 왕조인 전한 시기만 봐도 고조 유방부터 무제 유철이 등장하기 전까지 북방의 흉노에게 관광당하기에 바빴고, 삼국시대와 서진시대를 거쳐서는 북방이 전부 5호 등의 북방 민족의 손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등 숱하게 황하 이북을 북방 민족에게 넘겨줬던 시기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장성의 효용성 자체에 큰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정말 철옹성 같은 방어를 생각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면 손 안 쓰고 떡 먹으려는 놀부 심보나 다름없다. 해자, 창검벽, 외곽 성벽, 이중 성벽 등등 온갖 방호시설을 두루 갖춘 성일지라도 함락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달랑 성벽 한 겹 둘러놓고 군대의 침공을 막아내겠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 만리장성의 용도가 북방 기마민족의 남침에 대한 방어선이 아니라 동•서 교역을 하는 상단을 보호하는 역참과 내몽골과 중국을 가르는 국경선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을 통제하고 대규모 적의 침공을 최소 지연시키거나 최대한 방어해내는 것으로서 만리장성은 그 가치를 충분히 해냈다. 그 역할을 할 자연적인 지형이 부족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즉 만리장성의 역할은 철옹성 같은 방어요새의 구축이 아니라 경계의 구축이었다.
실제로 백등산 포위전 이후 한고조 유방과 흉노의 묵돌선우 간의 협상에서 만리장성을 흉노와 한나라 간의 국경으로 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리장성이 유목민의 침공을 발견하고, 잠깐이라도 지연하는 동안 후방에서 방어를 위한 기동군을 편성하거나 거점의 요새화를 하는 등 실질적인 방어 준비를 할 수 있지만, 장성이 없으면 그럴 시간조차 못 버는 것이다. 역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성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경계를 만드는 일은 만리장성 외에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이다. 가장 비슷한 사례로 이란의 사산 왕조가 중앙아시아의 훈족과 에프탈족,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북동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수백 km에 걸쳐 쌓았던 '고르간 장성'이 있는데, 이는 만리장성이 있는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견고한 장성이었다. 이외에 픽트족을 막기 위해 로마인들이 쌓았던 브리튼 섬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나 코린토스 지협에 쌓은 헥사밀리온 등이 있다. 근대에도 비슷한 일이있었는데 마지노선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의외로 평야인 지역이 아주 많다. 특정 방어 거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만 뚫으면 중국은 영토 자체가 워낙 거대하여 허허벌판인 경우가 대다수다. 전체적으로는 산지여도 그 지역의 평야 면적이 한반도 수준이거나 전국 팔도 중 하나랑 맞먹거나 하는 수준이다. 즉 평야가 여간한 국가에 맞먹는 넓이였다. 그래서 그런 산지에 사는 사람들조차 다수가 평지에 도시 건설을 해서 평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장성이 없었다면 화북은 유목민족의 침공 및 약탈에 더 시달렸을 것임이 자명하다. 실제로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내주자 이후 수백년 동안 한족 국가들은 만주와 몽골의 이민족들에게 크게 시달리게 되었고, 이민족들은 중원에 거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이런 나라들로, 이들 이민족 국가들은 명나라가 세워지고 나서야 물러나게 되었지만, 명나라는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중국 대륙을 넘겨주고 말았다.
즉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화북과 몽골 고원에는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어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을 구분해둔 것이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살았던 지역인데도 만리장성을 쌓은 다음에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비록 마음만 먹으면 만리장성을 돌파하기는 용이했으나, 대군이 통과할 길목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었으며, 이로 인해 만리장성은 마치 강과 같은 방어능력을 보여주었다. 강가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해서 무적의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작전 지역을 우회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므로 방어의 효과는 충분한 것이다.
명청교체기때 청나라는 이미 만리장성을 돌파할 수 있었으나, 만리장성을 돌파한 다음에는 보급선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침공하기가 어려웠다. 보급선이 끊기면 작전 기한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나라의 침공은 산해관을 통과한 다음에나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예친왕 도르곤에게 항복하여 산해관의 통제권을 청나라군에게 내어주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colbgcolor=#CC0000> 만리장성의 다큐멘터리 |
2.3. 명•청 시대
명나라는 제8대 헌종 성화제의 치세때인 1473년부터 산시 일대에서 40,000여 명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485년까지 거의 960km에 달하는 토성과 망루, 요새를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1482년에는 몽골군이 침략했다가 성벽에 막혀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가기도 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될 점은 원나라와 명나라 초기까지 변경 일대에는 만리장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전에 진시황이 만든 장성은 오래 전에 무너졌으며, 이후 한나라와 금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가 장성을 다시 쌓았다. 그러나 금나라가 세운 장성들은 명나라의 북방 국경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으며,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명나라 중기부터 쌓기 시작한 장성은 서북방의 오르도스 일대에 국한되었으며, 동쪽 일대의 장성은 가정 연간인 1540년대 이후부터 축성되었다. 제11대 세종 가정제의 치세때 몽골계 튀메드부의 수장이었던 알탄 칸에 의해 베이징이 포위되는 사건(경술의 변)이 일어난 이후, 제12대 목종 융경제 때가 되어서야 몽골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현재와 같은 벽돌을 이용한 장성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이 기존 한나라의 영역보다 상당히 남쪽으로 축소되었으므로, 사실상 장성을 신축해야 하는 데다가 공법의 변화까지 겹쳐서 장성의 재건설은 장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지속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수축은 베이징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역 지휘관의 재량에 따른 판단으로 임의적으로 수축된 것이었고, 그래서 성벽의 재료도 지역마다 달라 벽돌로 지은 곳도 있었고, 바위로 쌓은 곳, 흙벽돌로 쌓은 곳 등등이 있었다. 일부 구간은 결국 명나라가 이자성의 농민 반란으로 멸망당하는 시점인 1644년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구간은 완성되어서 상당한 방어력을 부여받았으며, 대표적인 곳이 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이었다. 실제로 명대 만리장성은 만주족인 청나라군이 돌파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멸망한 사실을 안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반란군을 토벌할 때 지원군으로 도르곤의 청나라군을 이용하기 위해 협약을 맺고, 그냥 문을 열어줘서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대쯤 되면 공성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었으므로 설령 만리장성이 석조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양상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산해관 같은 강력한 점방어가 가능한 몇몇 지역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성벽 한 겹인지라 대군으로 밀고 오면 뚫렸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북방의 몽골까지 지배하는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만리장성의 효용가치가 없어서 베이징 근처의 일부 구간만 약간 보수하는 선에 그쳤다.
2.4. 근현대
1933년 열하사변 당시, 만리장성에 배치된 국민혁명군.
20세기에도 만리장성은 중국 현대사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군이 일으킨 열하사변 때 베이징을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방어하려는 국민혁명군이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과 산해관에서 격전을 벌인 것이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산해관이 함락되었고, 만리장성 산악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끝에 중국과 일본은 그해 5월 <탕구 협정>을 체결하여 휴전했다. 조약에 의거하여 만리장성 하북 구간은 일본군 관할이 되었고, 장성 남쪽 100km 지역은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베이징(당시 지명은 베이핑)은 일본군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4년 후의 중일전쟁 당시 본격적인 교전 개시 후, 불과 5일만에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만 중일전쟁이 점차 중국 중남부로 확산되며 화북 지방의 일본 주둔군의 병력수가 줄어든 틈을 타 중국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이 만리장성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기도 했다.
제2차 국공내전 초기에도 만리장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직 양당간 휴전협정(<쌍십협정>)이 맺어져 있었던 1945년 말 국민당과 공산당은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만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국민당은 산해관을 장악하고, 당연히 공산당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북에 있었던 공산당의 병력은 장성 밖을 넘어가 내몽골를 통과해 만주로 가기보다는 산동반도까지 이동하여 뱃길로 요동반도로 건너가 만주 내륙으로 들어갔다. 장제스는 해군사령관 천사오콴에게 이동하는 공산군이 탄 배를 격침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천사오콴은 휴전협정을 깰 수 없다며 불복종했고, 결국 해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마침내 1946년 국민당이 선공함으로써 국공내전이 재개되었다.
3. 시황제와 관련된 설화
언급되었듯이 만리장성은 단순히 한 사람, 한 왕조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건축 시도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진시황의 폭정을 언급할 때 '만리장성을 무리하게 축조하도록 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넣기 때문에 진시황에 의한 축조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나 그중에서 《초한지》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설화로 '망진자호'(亡秦者胡)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시황제는 말년에 늙지 않고, 죽지 않게 만드는 불로장생초를 얻기 위해 온갖 미신을 믿고 다녔다. 그때 황해를 넘은 땅에 삼신산이 있어, 수많은 선인들이 칩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불로장생의 영약이 숨겨져있다는 방술사(方術士)들의 말을 들은 진시황은 그중 한 명인 서복에게 그 영약을 찾아올 것을 명령했다. 서복은 영약을 위해서는 남녀 동자 500명과 금은보화가 필요하다고 했고, 시황제는 흔쾌히 수락했는데, 서복은 그 길로 불로장생초를 구하기 위해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사라진 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시황제는 불안하여 노생(盧生)이라는 다른 방술사를 보내어 서복을 찾게 했는데, 노생은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에서 선문고(羨門高)라는 선인을 만나
"이 책에 담긴 뜻을 해석해내면 능히 불로장생의 비결을 얻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천록비결》(天籙祕訣)이라는 책을 건네받았다. 노생은 《천록비결》을 진시황에게 바쳤으나 《천록비결》은 수많은 은어로 이루어져 도저히 읽을 수 없었고, 이에 진시황은 수많은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천록비결》을 해독하고자 했다. 그 뜻을 해독해내는 데는 결국 실패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망진자호'(亡秦者胡)라는 한 글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시황제는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오랑캐(胡)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만리장성으로 북방의 오랑캐를 막고자 했으나, 胡는 오랑캐가 아니라 이세황제 호해(胡亥)를 뜻하는 것이었고, 진나라는 호해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는 설화이다.야사이므로 실제로 이런 일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며, 바리에이션도 꽤 있다. 신선이 건네준 책에서 비롯된 글귀가 아니라 단순히 점쟁이가 내려준 글귀였다는 설도 있으며, 정치적인 문제를 덮을 목적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당시 진나라의 상황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4. 관광
장성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팔달령 장성의 비수기 & 성수기 풍경.
중국의 상징 중 하나로써 만리장성은 연간 셀 수 없는 숫자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여행 명소이다. 특히 베이징시 근처 4개 구역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 중 서양 사람들은 주로 거용관 코스를 선호하고 한국인들은 팔달령(바다링) 코스를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유인즉 서양 관광객들은 진짜로 등산하듯 아래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며 즐기는 경우가 많고,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은 케이블카로 얼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사진 찍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그런데 저렇게 등산하듯 올라가던 서양 관광객 중 몇 사람이 10월 말 불어닥친 이상한파와 폭설로 인해 장성 중간에서 발이 묶이는 바람에 동사하는 사고가 발생한 경우가 있다. 위에 써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도 무려 패키지 코스로 갔으면서 발이 묶여 동사한 사례가 있다.
팔달령과 같은 인기 있는 구간을 탐방할 때에는 시기를 잘 고려해야 한다. 중국의 춘절, 노동절, 국경절, 중추절 연휴와 봄 & 가을의 주말 등의 성수기에 방문한다면 유적 구경이 아닌 사람 구경을 하고 오게 될 수도 있다. 만리장성은 외국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엄청난 인기 관광지이다. 30분이면 오를 수 있는 구간도 관광객들이 몰려 정체가 일어나면 1시간이 훌쩍 넘게 걸릴 수 있다. 하지만 비수기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방문한다면 항목 상단의 사진처럼 장성을 전세 낸 듯이 여유롭게 둘러볼 수도 있다. 또한 슬라이딩카를 타게 된다면 성수기일 경우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으니 대기시간을 반드시 확인하자. 참고로 팔달령 밑에 고속철도(CRH)가 정차하는 역도 있으므로 이를 활용하면 더욱 편하게 관광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인기 관광지이지만 여전히 2천년 이상 중화 문명의 북쪽 경계로써 중원을 수호하던 방어 시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철원 일대의 휴전선과 같은 군사 시설이었던 것이다. 즉, 단순히 누구나 방문하는, 편하고 친숙한 여행지로 생각하고 갔다가는 예상하지 못한 높이와 최대 40도에 육박하는 경사로 인해 고생할 수 있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경우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다. 넘어질 듯 강하게 부는 바람도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장성 구간은 산지에 형성되어 있고, 그중에서도 높은 능선을 따라 지어졌기에 대기의 이동에 있어 가장 강한 저항력이 발생한다. 특히 북서풍이 부는 겨울에 바람이 제주도 이상으로 강력함을 느낄 수 있으니 옷을 두껍게 입고 가는 것이 좋다.
장성 종주를 시도 중인 서양 관광객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만리장성을 걸어서 완주하는 것은 중국 내에서도 대단하다고 보도되는 일이다. 일단 6,000km나 되는 성곽을 걷는 것이니 서너달 정도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 건강한 사람이 하루종일 약 60km 정도를 걷는다고 할 때, 만리장성은 험준한 산성을 걷는 것이니 만큼 보통 걷는 것보다 곱절로 힘들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관광구역이야 당연히 관리가 잘 되지만,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관리가 되지 않아 수풀이 우거지거나 무너진 부분이 중간중간 있는데다, 몇몇은 국군 제8보병여단의 네발계단처럼 가파르고, 또 몇몇은 그냥 암벽이라 등반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거기다 식수와 식량 문제, 배설 문제, 폭염 또는 혹한 대비 등등까지 고려한다면 어지간한 등산보다 험난해서 조난 사고도 많다. 2012년에는 폭설로 인해 만리장성 등산에 오른 일본인 관광객 3명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산악투어 상품을 만든 일본 여행회사는 2009년 일본 토무라우시산 조난 사고도 일어난 적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여행업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저 완성된 성을 따라 계속 걷는 일만도 이러한데 그 비탈지고 긴 거리를 따라 성을 축조한 당시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해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올 노릇이다.
중국의 유명한 문화유산이자 상징적 아이콘이다 보니 해외 스타들이 중국을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스타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곧잘 방문하며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그 가족들도 중국 방문 시 만리장성에 오른 적 있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보디가드 어깨에 목마를 탄 채 등반해 논란이 있기도 했다.
지금이야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건축물이지만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기 전까지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다고 한다. 출처
관리가 잘 안된 장성 구간
한국 관광객들은 잘 시도하지 않긴 하지만 혹여나 팔달령-모전욕-진산령처럼 복원이 이루어진 곳이 아닌 산시성 등의 비인기 구간을 방문하게 된다면 안전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기나긴 장성을 중국 정부가 전부 관리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이나 아예 끊겨 절벽처럼 되어버린 곳이 적지 않다. 그러한 구간을 만난다면 원래의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보존상태 문단 참조.
5. 보존 상태
미복원 상태의 만리장성 구간 |
현재 전체 장성 중, 50%는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 파괴되었다고 한다. 유지보수의 중단 및 지역주민들이 집 지을 돌을 마련하느라, 혹은 관광객에게 팔려고 만리장성의 돌을 빼갔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직도 각종 개발사업으로 파괴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국가 역시 문화유산이니 보존하고 관광용으로 개발하자는 의식 자체가 생긴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았지만, 현재진행형이라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하지만 장성 관리하는데 군인이나 관리인을 각 구간마다 전부 두는 것이 효율성도 떨어지고, 돈이 한두푼 드는 일도 아닌지라 관리가 잘 안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또한 현재 만리장성의 벽의 80% 정도가 훼손되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름 낙서. 만리장성의 벽은 기본이고 케이블카의 벽과 유리 부분에 낙서가 많이 되어있다고 한다. 케이블카의 색깔이 원래 하얀색이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낙서를 칼로 판 후에 판 곳을 화이트 등으로 채우는 짓을 해서 복구도 힘들게 한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유산이기 전에 세계문화유산이어서 개인이 훼손 시 최소 160만 원에서 최대 800만 원의 벌금을 물게 되어있다. 그러니 낙서하면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 망신에 집안 망신이므로 절대 하지 말자. 자기 나라의 유산에 누군가 낙서하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알파벳에 히라가나&가타카나는 물론이고 한글 낙서들까지 알아본 중국인이 이를 인터넷에 올려 공론화해 중국 누리꾼 사이에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관련 기사
게다가 안 그래도 전술된 낙서와 자연적인 풍화로 성벽이 점차 소실되어 가고 있는 상황인데 지역 주민들이 집을 짓거나 묘지에 석재로 쓰려고 만리장성의 벽돌을 훔쳐가는가 하면, 심지어는 기념품으로 벽돌을 뽑아가는 관광객이나 작정하고 기념품으로 팔아먹을 목적으로 벽돌을 훔치는 장사꾼들까지 나오는 막장화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기사 1(조선일보) 기사 2(SBS 뉴스 보도). 현지에서 만리장성 벽돌이 하나당 한화 50 위안(5천원) 선에서 팔리고 있다고 한다. 2012년 중국 국가문화유산청의 보고에 따르면 이렇게 소실된 장성의 구간만 해도 전체의 22%에 달하는 1,961km 정도나 된다고 한다. 여기에 서부 간쑤성의 구간은 모래폭풍으로 인한 침식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중국 정부에서 만리장성의 일부 구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시멘트로 메우는 것에 대해 누리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관련 기사
일부 지역의 장성은 댐 공사 때문에 수몰된 장성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산맥을 따라 성곽을 쌓더라도 강 주변이나 주요 평야지역을 지나가려면 장성의 위치도 낮아지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러니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중국인들은 이를 수장성이라고 부른다.
현재 예전 명·청시기의 장성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20%에 불과하다고 하며, 만리장성 중 관광지가 된 구역은 상당수 마오쩌둥이 복구공사를 진두지휘한 곳이다. 그래서 일부 베이징에 가까워서 관광지로 개발된 '포인트' 부분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조금만 멀리 나가면 관리가 별로 안 되어 바스러져 가는 구간이 많다. 당연히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만리장성의 특성상 쭈욱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장성을 따라 수십 km를 걸어다니는 걷기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금지지만 만리장성 외곽지역의 인적이 드문 성벽 위에서 텐트치고 야영하면서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부 구간은 복구를 해도, 하필 시멘트로 복원하여 논란이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만리장성 바로 밑에 고속철도 역을 건설하기로 해 논란이 예상된다. #
6. 축성법
가장 유명한 팔달령 장성 구간. 바위를 자연 성벽으로 삼은 점이 인상적이다.
석축과 전돌이 혼합된 장성 구간
만리장성이 바다와 만나는 노룡두
만리장성이 하천을 지나는 구문구 구간의 수문
서부 간쑤성 구간의 장성
자위관 서남쪽으로 뻗은 끝자락의 장성
만리장성은 건축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동서 6천 km에 이르는 구간을 지나는 동안 장성에는 각 지형에 맞는 건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평지를 지날 경우 성벽은 방어력 강화를 위해 더 두껍고 높아지게 되고, 산간 지방을 지날 때에는 낮아지는 대신 재해에 견디기 위해 더욱 견고해지며, 물 위를 지날 때에는 홍예 수문이 설치된다. 또한 기후적으로도 온대 기후에서는 일반 벽돌이나 돌을 사용하지만, 건조 기후에서는 진흙을 덧바른 진흙 벽돌을 사용한다. 후자는 부하라, 히바와 같은 중앙아시아의 성벽 혹은 사마라, 페스와 같은 중동 지역의 성벽과 유사한 공법이다.
7. 구간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만리장성에 대해 중국 정부는 각각의 구간을 두어 관리한다. 그중에서도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널리 알려진 곳들을 꼽으라면 베이징 근처의 바다링(八达岭), 구베이커우 (古北口,), 스마타이 (司马台), 쥐융관(居庸关), 진산링(金山岭), 황화청 (黄花城), 젠커우(箭扣), 무톈위 (慕田峪) 장성 등이 유명하다. 그외에 수관장성이라고도 불리는 후루다오의 주먼커우(九门口), 친황다오의 자오산(角山), 논란이 많은 후산 (虎山) 장성 등이 있다.
7.1. 관문
내성의 일부인 옌먼관(雁门关)
만리장성은 초원과 중원의 경계였지만 무조건 교류를 차단할 수는 없는법, 여러 개의 관문을 두어 상호 소통하거나 군사 원정에 활용하였다. 가욕관, 거용관, 산해관의 3대 관문 외에도 안문관, 평형관 등이 있었다. 단절되어 있긴 하지만 돈황에는 옥문관, 양관도 있다.
7.2. 팔달령 (바다링) 장성
흔히 만리장성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八达岭长城
베이징 옌칭구에 위치한 장성 구간으로, 명나라 홍치제 ~ 만력제 연간에 수도 방위를 위해 벽돌을 이용하여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20세기 말엽 대대적인 복원공사까지 이루어져 가장 완벽한 형태의 장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베이징 시내와 직결되는 바다링 고속도로와 철도 등이 있어 교통이 용이하다. 따라서 베이징을 통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며, 특히 하늘이 맑은 가을철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베이징의 전문, 천안문 (역사박물관 앞), 숭문문로 입구에서 장성 전용 관광차를 이용하면 인당 왕복 36위안에 편하게 도달할 수 있다. 가장 저렴한 방법은 덕승문에서 5분 간격으로 있는 919번 버스를 타는 것이다. 교통카드 사용시 40% 할인 적용된다. 철도 교통으로는 베이징 베이역(북역)에서 교외 교외기차S2선을 타고 바다링창청역에 내리는 것이다.
바다링 관광 지도
팔달령 장성은 작은 관문성을 중심으로 협곡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관성(关城)이라 불렀다. 지도의 오른쪽 상단에 남쪽으로 확 꺾어지는 곳의 동쪽으로도 성벽이 일부 연장되어 있으나 중간에 바위가 있어 위험하니 가보지 않는 것이 좋다. 케이블카(왕복 60위안)가 양측 산 모두에 설치되어 있어 능선 위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20명 이상의 단체라면 야간 관람을 예약하여 19-21시 동안 둘러볼 수도 있다.
연휴 기간에는 오전 10-11시와 오후 2-3시 경에 혼잡하여 그 시간대를 피하는 것이 좋다. 팔달령 구간은 만리장성 중에서도 경사가 큰 편인 곳이라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성수기 (4월 ~ 10월)에는 성인 기준 45위안(노인, 학생은 25위안. 장애인 무료)이고 비수기(11월 ~ 3월)에는 성인 기준 40위안(노인, 학생은 20위안, 군인 및 장애인 및 어린이 무료)이다.
7.3. 고북구 (구베이커우) 장성
구베이커우 장성의 장엄한 풍경
명나라 대의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산세를 휘감는 모습이 용과 같다 하여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언급되었다. 다만 팔달령과 달리 관광지화는 되어 있지 않아 찾아가려면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접근이 워낙 어렵다보니 현대에도 중장비 동원이 쉽지 않아 많은 구간이 방치된 상태이다. 따라서 방문시 안전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7.4. 가욕관 (자위관) 장성
가욕관에서 서쪽으로 약 6km 가량 더 뻗어 있는 명대의 장성. 다른 장성 부분들과 달리 진흙을 다지는 중동-서역식 공법으로 지어졌다. 명대 장성의 서쪽 끝인 제1돈은 바이다 강의 절벽 위에 세워져 정말 끝자락임을 실감하게 한다.
7.5. 둔황의 한대장성
서역으로의 관문이던 옥문관 유적
양관 인근의 돈대 유적
명대의 장성보다 약 300km 가량 더 서쪽으로 뻗어 있던 한대 장성의 유적. 옥문관과 양관의 두 개의 끝 지점이 있다. 장건의 서역 원정이나 서유기의 모태가 된 현장법사의 서역행이 다 이곳에서 시작되거나 끝난, 역사적인 명소이다. 실크로드의 상징물 중 하나이다.
8. 논란
8.1.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 포함 시도
<colbgcolor=#CC0000> 고구려 천리장성이 만리장성이 된 경우를 다룬 KBS 역사스페셜의 영상 |
몇몇 자료에서는 진-한대의 장성에 이어 고구려 성을 장성으로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박작성 유적을 만리장성 동쪽 부분의 시작 지점으로 삼겠다는 몇몇 사학자들의 주장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허베이성 끝에 위치한 산해관이었으며,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호산산성은 장성의 동단 기점이 아니었다. 물론 고지도에는 현 요동 반도 지역에 벽돌로 쌓은 장성 대신 목책과 보를 표시하고 있어서 이를 장성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중국에서 펴낸 장성에 관련된 연구 서적을 살펴 보면 '목책은 장성으로 볼 수 없다.'고 당당히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책과 보를 중심으로 쌓은 것을 장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성의 정의를 방어 목적으로 길게 이어 쌓은 성이라 말하는데도 요동의 목책은 장성처럼 길게 이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주요 군사 지역 주변에 드문드문 설치한 것이라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이 주장의 요지는 여러 고지도에서도 표시되지 않는데도 '장성의 석축'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관련 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보고서가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박작성이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것으로 보인다. # #
<colbgcolor=#CC0000> 사실 한반도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중국의 주장을 다룬 비디오머그의 영상 |
또한 중국은 한반도 북부(평양 지역)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영상에서도 나오듯, 이는 북한을 합병하기 위해서 북한 유사시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빠르게 밀고 내려와 북한을 점령한 뒤, 한반도가 중국의 영토라는 걸 주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뉴욕 메트뮤지엄 '중국관' 역사날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 지도' 오류 투성이 '평양까지 뻗은 만리장성' 中 동북공정이 왜곡한 세계지도 반크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뻗어 있는 지도를 두고 '만리장성이 고무줄인가요?'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SNS에서 배포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왜곡 행위를 바로 잡아줄 것을 유네스코 등 국제사회에 요청한다고 밝혔다.# 유네스코 등재란에 만리장성 소재지에 지린성 및 랴오닝성도 포함되어 올라가있어 문제가 많다. 정작 유산에 대해 소개하는 항목에는 "허베이성에서 시작해 간쑤성에서 끝난다"라는 기존의 문구가 그대로 있어 소재지 표기와 모순되는 상황이다.
다만 현재까지 변한게 없는 걸로 보아 유네스코는 이 문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어보인다. 사실 한국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지않아서 화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3월에 백두산이 창바이산으로 등재된 이후, 각 언어의 위키백과에 올라온 이미지에서 만리장성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도 심각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뉴스위키백과 영어위키백과 일본어
8.2. 길이
2012년에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기존의 두 배 이상 늘어난 21,196.18km라고 발표했다. 21,196.2km이면 서울에서 뉴욕이나 토론토까지의 거리의 두 배, 서울에서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까지의 거리보다도 길다는 것이 된다. 참고로 서울에서 토론토까지는 10,700km, 뉴욕까지는 11,000km,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는 19,400km, 몬테비데오까지는 19,600km다. 지구 한 바퀴가 40,075km로, 걸인 지구 둘레의 절반보다 약간 긴 수준의 거리이다. 기사를 살펴 보면 중국의 발표는 고구려나 발해 성을 장성의 일부로 왜곡한 것도 있지만 주된 것은 진나라 및 한나라, 명나라의 장성 유적뿐만 아니라 그외 기타 왕조에서 건설된 다양한 장성을 조사한 것으로 그것을 모두 합산하여 만리장성의 길이가 연장되었다는 내용이었다.8.3. 우주에서 보인다?
<colbgcolor=#CC0000> 위성으로 바라본 만리장성 |
만리장성은 사실 길이는 길지만 폭이 좁으므로[12]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건 상식. 저 위의 사진도 줌기능으로 당겨서 본 거지, 본래 사진을 보면 그냥 안 보인다.
본래 이 말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유명한 천문학 책인 《코스모스》에서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이 실은 오늘날(1980년) 지구를 선회하는 인공위성에서 식별할 수 있는 지구의 유일한 거대 (인공)지형지물이다.'
라는 문구(한국어판에서는 151P.)가 달로 와전된 경우로 보인다.실제로는 그 이전 문헌에도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20세기 초의 기록에서도 비슷한 문구가 발견되는 것을 볼때 우주시대 이전부터 떠돌던 관용구가 과학기술 발전으로 반박된 뒤에도 계속 남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중국인 최초로 유인 우주선에 탄 양 리웨이는 지구 바깥에선 그 어느 건물도, 그 어느 것도 안 보였다고 말하면서 칼 세이건의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에 널려있는 아파트들, 공원 운동장들조차도 만리장성보다는 폭이 넓다. 10m면 아파트 건물은 커녕 집 1채의 길이/폭과 비슷하다. 망원경으로 보더라도 아파트나 운동장보다 더 안 보이는 게 만리장성이다.
21세기 기준으로는 현재 나무위키를 읽고 있는 독자가 현재 위치해 있는 건물들은 사실상 100% 민간 위성지도에 기록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만리장성 같은 곳도 구글 지도 같은 서비스에서 얼마든지 위성 이미지를 찾아볼 수는 있다.
9. 여담
- 수나라의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2대 대공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대운하는 역대 중국 왕조 시절은 물론 현대에서도 경제력 향상에 기여했다면[13] 만리장성은 청대 이후로는 원래 목적을 상실했다.
- 현재까지의 천문 관측에 의하면, 우주는 텅 빈 공간을 거대 은하단들이 마치 벽처럼 채워놓은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구조를 만리장성(great wal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주 거대 구조 문서로.
- 당시 만리장성의 노동 강도와 환경은 아주 열악하고 위험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만큼 사망자와 부상자, 실종자가 하도 많아 "무덤장성"이라고 불렸을 정도였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로 불리고 있다.
- 만리장성과 얽힌 중국의 유명한 설화로 열녀 맹강녀 설화가 있다. 진시황 때 만리장성 건설 인부로 끌려간 남편에게 겨울옷을 갖다주기 위해 옛 제나라 땅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온 맹강녀라는 여인이, 남편이 이미 죽고 시신은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구덩이에 쌓인 해골 무더기에 흘리자 피가 스며드는 해골이 있었고 맹강녀는 그 해골이 남편의 해골이라고 확신, 장례를 치른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는 것. 조금 각색된 설화로는 맹강녀의 남편이 단순 인부가 아니라 인신공양 제물로 진시황에게 직접 살해되었고 맹강녀의 미모를 탐낸 진시황이 맹강녀를 강간하려 하자 맹강녀가 자결하는 순간 만리장성에 벼락이 내려 무너졌다는 변형도 있다. 맹강녀가 죽은 곳이 산해관 근처라 하여 지금도 그곳에 맹강녀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다른 버전으로 공사 현장에 갔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맹강녀가 주저앉아 며칠을 통곡했는데, 하늘이 그 한을 알아봤는지 갑자기 그 근처의 만리장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는 결말도 있다. 기껏 지어놓은 성이 무너졌으니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뒷목을 잡았으리라. 수신기에는 중남부 후베이성의 예렌(야인/모인)이라는 괴물들이 있는데 어떤 무기로도 죽지않고 유일하게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여럿이 모여 손뼉을 치며 만리장성을 쌓으라고 하거나 진시황이라고 외치는 것이고 이러면 도망간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 남녀가 밤을 함께 보내는 것을 비유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둘 사이에 큰 일을 치렀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본래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변형된 것이다. "하룻밤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원래 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줄거리는 "길가던 행인이 날이 저물어 어느 여염집에서 하룻밤 묵게 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날 밤 집 여주인이 행인과 밤을 함께 보내며 만리장성에 노역을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전해달라 부탁하였고 마침 행인이 그곳을 지나갈 참이라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행인은 만리장성에 도착하여 그곳 감시관에게 편지를 전하였는데 편지의 내용인 즉슨, 이 사람이 남편과 교대하기로 한 사람이오니 남편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하는 내용[14]이었고 행인은 노역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내용." 이것이 "하룻밤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의 어원이라고 한다.
전승에 따라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남편 대신 하루만 일해달라고 해놓고는 부부가 야반도주해서 평생 돌 나르게 됐다는 내용도 있고, 지나가던 손님이 아니라 감시관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부인이 워낙 절세미녀라 자발적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만리장성 쌓으러 갔다는 버전도 있다. 여담이지만 위에 언급한 간쑤성 자위관에는 관광 온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열쇠를 걸어놓는 곳도 있다.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의 의미는 비슷한 듯.
-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공약으로 내건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만리장성과 비교되는데, 본인도 저서에서 만리장성을 예시로 들며 장벽 건설을 주장했다.
- 2018년 현재, 중국 당국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외곽에 장성을 쌓을 것이라 발표했는데, 이것이 실제 성벽을 둘러 쌓는다는 것[15]인지 보안 강화의 은유적인 표현[16]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만리장성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은유적인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 중국의 핵전쟁용 지하 요새들을 가리켜 지하 만리장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6.25 전쟁 때도 지하 만리장성이라 부르는 급조 지하 시설을 구축하여 미군 화력 방어용으로 써먹었다. 이게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화력으로 중공군을 쓸어버리던 UN군도 고전하고 전쟁을 휴전으로 끝냈다.
-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있는 화베이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후난성 난창시에서 현지 주민들이 (멀어서 가보기 힘든) 만리장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짝퉁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 내에서도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같은 후난성 샹시 투자족 먀오족 자치주에는 진짜로 만리장성 버금가는, '남중국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남방장성이 있다. 길이는 겨우? 190km 이지만 구조가 비슷하고, 역시 명대에 세워졌다. 다만 북방 유목민 (북적)이 아닌 서남이인 묘족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같은 성이라 해도 난창시에선 차로 최소 5시간이 걸린다.
남방장성 풍경
- 야오밍의 별명이며, 넘사벽급 기량을 자랑하는 중국 탁구 국가대표팀의 위세를 비유할 때에도 사용한다. 비중국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을 때 '만리장성을 넘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며, 반대로 지면 '만리장성이 높았다.'라고 한다
- 2020년 1월 24일 일부 구간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예방의 일환으로 일시적으로 영업 중단을 한다고 밝혔다. #
- 금융권에서는 만리장성에서 유래한 차이니즈 월(Chinese Wall)이란 용어를 흔히 사용하는데, 투자은행이나 전략컨설팅에서 경쟁사간의 업무를 봐주는 경우도 있고 기업과 투자자간의 정보공유에 따른 이익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차이니즈 월을 쳐서 업무간의 정보공유를 원천차단한다는 뜻이다. 물론 금융권 외에서도 사용하긴 하는데, 대표적으로 삼성전자에서 스마트폰 부문에선 경쟁사지만 반도체 부문에선 고객사인 경우가 있다.
- 동쪽 끝인 산해관의 노룡두(老龍頭)는 바다 위에 성이 뚝 끊겨 있다. 엄청 대단한 걸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조금 허무하기도 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다 바로 앞까지 성벽을 쌓은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이색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다.
- 1992년 롯데제과에서 빙과류로 만리장성이라는 아이스바를 발매했었다. 아이스바 이름이 왜 만리장성인지 좀 생뚱 맞지만 함유된 원료가 라이찌 열매였기 때문에 이름을 붙인 게 추측된다. 광고모델은 당시 몰래카메라 코너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던 이경규가 출연했다.
한입 먹을 때마다 만리장성이 부서지는 건 덤~...공교롭게도 1992년은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루어진 해이기도 하다.
- 굴착기로 만리장성 성벽 틈을 구멍을 내 일부를 파손하고 길을 내버린 건설 노동자 2명이 구금되었다고 한다. # 훼손 이유는 황당하게도 멀리 돌아가는 것이 번거롭다며 지름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이들은 당시 훼손 장소인 32구역 인근에서 공사중이었는데, 성벽에 원래 있던 틈을 더 크게 만들어서 굴착기가 다닐 공간을 확보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파손한 성벽의 폭은 차량 2대가 교차 운행 가능한 정도의 규모였다.
- 중국의 대표적인 상징물인지라 중국 대항 구기 종목 스포츠 경기 해설이나 뉴스에 멘트로 언급된다. 농구나 배구 핸드볼 등에서 자주 사용이 되지만 그중 특히나 가장 대표적으로 넘사벽 만리장성 이라 불리는 종목은 건 단연 탁구이다.[17]
10. 대중문화에서
각종 창작물에서는 중국의 상징 중 하나라 그런지 중국인 캐릭터들의 홈 그라운드로 많이 애용되기도 한다.- 겁쟁이 강아지 커리지에서 만리장성에 간 뮤리엘에 나오는데 유스테스와 커리지와 뮤리엘이 왔었다.다만 유스테스 경우 별거 아니라는 등 그냥 돌담이라는 등 문이 있기를 하냐는 등 창문이 있기를 해 하다못해 지붕이 있기를 하냐는 등 돌담을 어디다 쓰냐는 등 모기 다람쥐를 막아주기를 하냐는 등 귀찮은 이웃들이 못 오게 해주기를 하냐는 등 그냥 담이라는 등 아무나 걸어다닌다는 등 평가한다. 다만 유스테스 입장에선 만리장성 역사를 당연히 알 리가 없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는 대항해시대 2, 대항해시대 3, 대항해시대 온라인 등에 나온다.
- 대항해시대 2: A급 발견물 중 하나로 등장하며, 황하를 따라가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유적으로 분류되며, 나름 상당한 투자가 필요.
- 대항해시대 3: 청두, 카이펑, 베이징, 항저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베이징 북쪽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발견 직후 도적단과 시비가 붙어 전투가 발생하기 때문에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일기토나 지상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발견 이후에는 증거품으로 청룡상을 얻는데, 부가 능력치가 해상전 시 사격 위력 1.5배 증가 및 반란 억제 등 쓸 만 한 것이어서 함선에 달아두면 여러 모로 유용하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 인식 11랭크, 고고학 13랭크에 자카르타에서 퀘스트를 받아 황하 하류에 상륙해서 발견할 수 있는 사적 발견물이다.
- 게임 바람의 나라에서는 중국 남부인 광둥성, 푸젠성, 장시성, 도삭산을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었으나, 패치 이후로 한 번에 부여, 고구려에서 바로 중국 남부로 갈 수 있게 되어서 아무도 안 지나다닌다. 다만 과거엔 만리장성 보수를 위한 벽돌 퀘스트가 존재했는데 일정 개수를 보수한 뒤 NPC에게 보고하면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18] 이밖에도 BGM이 좋은 지역으로도 유명해서 자작곡도 만들어졌다. 1, 2
-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문명 1에서부터 최신작 문명 6에 이르기까지 개근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문명 3까지는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의 배경에 만리장성이 세워진 모습만 보여준 데 비해, 그래픽 기술이 비교적 발전한 문명 4부터는 메인 맵 상의 자국 국경 전체를 성벽으로 두르는 시각 효과를 보여준다.
- 문명 1: 전쟁 중인 상대방 AI와 교섭 시, 상대방이 반드시 휴전을 제의해야만 하는 효과가 있다. 멀티플레이에서라면 쓸모가 없지만, 1991년에 나온 게임인 만큼 문명 1에는 멀티플레이 기능이 없다.
- 문명 2: 야만인 유닛을 상대로 방어력 보너스를 제공하고 불가사의를 완공한 문명의 모든 도시에 방어 건물인 성벽이 즉시 건설되며 전쟁 중인 AI와 교섭 시 상대방이 반드시 휴전을 제의해야만 하는 효과가 있다. 덧붙여 멀티플레이 기능은 본작에도 없다가 1999년에 나온 모드 모음집 겸 확장팩인 Test of Time에서야 추가되었다. 평가는 좋지 않은데, 이 불가사의를 지을 수 있게 되는 중세에는 이 불가사의 없이도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다 야금학을 개발하면 퇴보되어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
- 문명 3: 야만인을 상대로 공격력과 방어력에 2배의 보너스를 받으며, 성벽의 효과를 2배로 높여 준다. 효과 자체는 그럭저럭 괜찮으나 비슷한 시기에 건설할 수 있게 되는 공중정원이나 오라클보다는 떨어진다는 평을 받으며, 성벽 자체가 인구가 일정 수 이상 늘어난 도시에서는 효과가 사라지는 건물이기에 게임이 진행될수록 이런 게 있던가 싶은 수준까지 떨어진다.
- 문명 4: 위대한 스파이 점수와 약간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자신의 영토 내에서 벌어진 전투는 위대한 장군 점수를 2배로 제공하며 야만인이 국경 내로 침투해 오는 것을 방지한다. 핵심은 야만인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난이도가 낮거나 게임 속도가 빠르다면 별로지만 난이도가 높고 속도가 느릴수록 효율적이다. 특히나 확장팩 비욘드 더 소드에서 추가된 랜덤 이벤트 중에는 로마의 몰락 시나리오를 본편에서 찍으라는 건지 야만인 다수가 국경 인근에 생성되는 게 있는데, 얘네도 들어오지 못하므로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이웃 문명의 영토로 넘어가게 되면 이 동네가 어떻게 망하나 지켜보는 일만 남는다.
- 문명 5: 소량의 문화와 위대한 기술자 점수를 매 턴 제공하고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에 성벽을 즉시 건설한다. 하지만 핵심은 영토 내로 들어온 적 유닛들이 각 타일마다 행동력을 1씩 추가로 쓰도록 만드는 것. 다이너마이트를 연구하면 퇴보하여 효과가 사라지지만, 기병 위주로 쳐들어온 게 아니고서는 적들의 발을 완전히 묶어 버릴 수 있고 이 경우라도 어쨌든 공성기를 끌고 와야 도시를 딸 수 있으므로 멀티플레이에서는 건설 자체가 금지되기도 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평을 받는다. 문명 1부터 4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불가사의가 특정 기술을 연구하면 퇴보되어 효과가 사라졌지만 5부터는 이런 시스템이 사라졌는데, 본작에서 퇴보하는 유일한 불가사의라는 점에서도 역으로 그 강력함을 알 수 있다.
- 문명 6: 역대 작품 내내 불가사의로 등장하던 것이, 중국의 고유 시설물로 강등되었다. 그 대신 시설물이 있는 타일에 위치한 유닛에게 방어 시 전투력 보너스를 제공하고 자체적으로 금을 생성하며, 인접한 만리장성 타일마다 금과 문화를 추가로 뱉어내는 강력한 녀석. 게임 후반에는 관광도 제공하므로, 중국을 문화 승리 강국으로 만든 요소 가운데 하나다. 다만 국경에밖에 지을 수 없기에 농장이나 광산, 지구 등 초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먼저 건설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짓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중국이 모델인 이티 제국에는 웨스테로스의 장벽과 비슷하게 다섯 요새가 존재한다.
- 요리왕 비룡의 리액션에 등장하는 그 곡 의 제목이 만리장성(万里の長城)이다. 만화책에선 만리장성을 이용한 요리도 있다.
- 용자왕 가오가이가에서는 기계31원종 중 하나인 척추원종이 통째로 융합해버린 뒤 몸체 다수가 가오가이가의 골디온 해머에 소멸당하고, 핵이 있던 나머지 부분은 지저 깊은 곳에서 킹 제이더 손에 소멸당하면서 사라져버렸다. 이후 기계문명과의 결전이 모두 종료되면서 카펜타즈의 손에 의해 복구되긴 했으나, 다른 복구된 문화 유적들이 그렇듯 짝퉁 취급하는 시선이 상당수이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판다리아엔 사마귀족의 침범을 봉쇄하기 위해 천둥왕 레이 션이 쌓아놓은 용의 척추가 있다. 판다리아의 안개가 전체적으로 중국 문화를 모티브로 했기에 당연히 진시황과 만리장성의 오마주.
- 스타크래프트 2에서 공성전차 행성요새 미사일 포탑 벙커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테란전술도 만리장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협동전에서 벙커만으로 모든 인구수를 채우는 벙커장성 빌드가 나왔다.
- 롤러코스터 타이쿤 2에 만리장성 주변을 개발하는 시나리오가 있다. 역시 대륙의 시나리오답게 돈이 무한이다.
- 진삼국무쌍 8에서 명승지 중 한 곳으로 등장한다. 해당 게임은 실제 중국 지형을 축소 측량해서 구현한 오픈월드 성격을 띠고 있어서 게임상 위치도 실제 위치와 비슷하며 엄청나게 긴 장성 길이와 좁은 폭을 감상할 수 있다. 근데 한나라 시절의 토성이 아니라 명나라 때 쌓은 석성(...)
- 토탈 워: 삼국에서는 고증에 맞춰 한나라 시절 성벽으로 등장하며 중간에 건설 안된 구간 제외한 해당 지역에 군대가 통과하지 못힌다.
-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에서는 방벽으로 만리장성을 구현해놓았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신문기사를 통해 언급되는데, 나치가 만리장성을 요새화(...)시켰다고 한다.
- Warhammer(구판)의 캐세이에서는 북방 민족들을 막기 위해 대요새(Great Bastion)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고대에 죽은 거대한 용의 뼈를 기준으로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 캐세이가 등장하는 토탈 워: 워해머 3 캠페인 맵에 구현되어있으며 위대장성으로 번역되었다. 단순한 벽이 아니라 카오스의 영향도 차단한다고 한다.
- 톰과 제리: 수퍼 레이스 (Tom and Jerry: The Fast and the Furry, 2005) 에서는 톰과 제리가 비행기 타고 파괴한다.
- 애니메이션 슈퍼배드에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도둑질당하자 자국의 문화재인 만리장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탱크들이 지키고 있으며 그 위로 새가 지나가자 바로 주포를 발사해 폭사시킨다.
- 툼 레이더 II에서 등장하는 유물 시안의 단검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가 만리장성이다.
- 중국 유명 래퍼 GAI의 노래 제목이다. 가사내용은 전형적인 국뽕 힙합이다.
- 아스팔트 8: 에어본에서 총 6개의 트랙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스팔트 8: 에어본/트랙 문서 참조.
- 아바타 아앙의 전설의 가상의 국가 흙의 왕국의 수도 바싱세는 중국을 모티브로 하였고 바싱세의 두 개의 거대한 성벽은 만리장성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 카트라이더 및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 빌리지 테마에서 "빌리지 만리장성"이라는 이름의 맵으로 등장한다.
- Fate/Grand Order 로스트벨트 No.3 인지통합진국 신에서 기계화화여 불사를 이룬 시황제가 지구를 정복한 후 지구 주변을 장성으로 둘러쌌다고 한다. 길이가 워낙 길어진만큼 정식 명칭은 삼십만천사백이십사리장성이지만 일일이 부르기에는 너무 길어서 장성이라고만 부른다고 한다. 지구를 감시하는 일종의 위성기지 역할도 하고 있는데, 반란분자가 있는 곳에 벽 부위 하나를 떨어뜨리는 궤도 폭격 무기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 근육맨: 완벽초인시조 편에서는 달마시맨 VS 블랙홀의 대결이 치뤄졌다. 본래는 라면맨이 달마시맨과 대결할 예정이었으나, 회복이 안된 상태여서 블랙홀이 대신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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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본래 해당 지역에는 장성이 없지만 중국은 해당 지역에 소재한 고구려 등 다른 국가의 성을 훼손 및 개조하여 장성의 일부라고 통해 주장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일환인 셈이다.[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6]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7] 구간에 따라 등급이 다르다.[8] 위 사진이 이 구간이다.[왜곡] [왜곡] [11]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고대 중국에는 성벽을 쌓는 방법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벽돌을 쌓아 만드는 방법이 아니었다. 흙과 건초 반죽을 번갈아가며 쌓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을[12] 만리장성의 전체적인 길이가 5,000km ~ 6,000km 정도 되는데 폭은 고작 10m도 안 된다.[13] 정작 수나라는 기껏 만들어놓고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당시 대운하 건설을 위해 수많은 인력이 희생됐으며 건설을 주도했던 수양제가 민생 대신 온갖 사치와 폭정, 무리한 원정 등에 집착하면서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14] 그리스 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편지가 등장한다. 벨레로폰의 편지 문서로.[15]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로부터의 보안을 강화하려면 검문을 강화하기위해 국경에 벽을 쌓는 편이 용이할 것이다.[16] 신장 자치구는 이슬람국가로의 독립을 노리고 있고, 중 정부는 이를 테러리스트들의 분열조장으로 바라본다.[17] 축구에서는 완전 정반대 이다.[18] 보수를 10회 성공하면 소량의 국내성, 장안성 비서를 주지만 10000회 성공하면 당시에 구하기 힘들던 천풍선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