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0:51:21

박지원(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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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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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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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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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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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박지원
朴趾源
파일:external/books.chosun.com/2007032400106_0.jpg[1]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출생 1737년(영조 13년) 3월 5일[2]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805년(순조 5년) 12월 10일[3] (향년 68세)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묘소 개성시 판문구역 은덕동[4]
직업 소설가, 사상가, 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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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44> 시호 문도(文度)
본관 반남 박씨
미중(美仲)·중미(仲美)
연암(燕巖)·연상(煙湘)·열상외사(洌上外史)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종교 유교 (실학)
정당 노론([[중상학파|{{{#!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13; font-size: .8em")
관직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안의현감(安義縣監)
면천군수(沔川郡守)
양양부사(襄陽府使)
주요 활동 문학 집필, 학문 연구
저서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가족관계 5대조부모 박미ㆍ정안옹주(선조)
고조부 박세교
증조부 박태길
조부 박필균
부친 박사유
어머니 함평 이씨
형 박희원
부인 전주 이씨
아들 박종의, 박종채[5], 박종간
손자 박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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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박지원의 사신 방문
3. 사상
3.1. 철학 사상3.2. 문학 사상3.3. 경제 사상
4. 여담5. 그의 작품

[clearfix]

1. 개요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문장가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대중에게는 열하일기(熱河日記), 양반전(兩班傳), 허생전(許生傳) 등의 풍자 소설을 집필한 문학가로 유명하다.[6] 근대 이전 산문 역사에서 가장 큰 명성과 높은 위상을 차지한다. [7]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대표적 학자. 실학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서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이다. 그의 활동 영역은 소설[8], 철학, 경세학(經世學), 천문학, 농사 등 광범위했다. 탐정 노릇까지 했는데 1792년 안의[9]현감에 임명되어 임지로 향하던 중 대구에서 경상감사의 부탁을 받고 4건의 살인 사건을 훌륭하게 해결한다.[10] 4건 모두 사람이 죽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황당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아 수령들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감영으로 올려보낸 것들이었다.

2. 생애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이다. 박지원의 가문인 반남 박씨는 본래 서인으로 노론, 소론이 갈릴때 박필균이 노론의 편을 들었고 박필균이 노론 중에서도 탕평책에 반발하는 골수 노론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박지원의 가문은 노론의 벌열이 된다.[11] 박필균은 청백리로도 유명했으며 박지원의 아버지 박사유도 음서로 말직에 나갔을 뿐이기 때문에 박지원이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100냥도 안 되는 밭과 한양의 30냥짜리 집 한 채가 있었을 뿐이었다.[12]

박지원은 영조로부터 신임을 받으면서도 외척이라는 혐의를 피하고자 애썼으며 청렴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다.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에도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웠으나 사회적 모순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759년 어머니, 1760년 할아버지, 1767년 아버지가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葬地)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의 뜻을 접었다. 하지만 실제 박지원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이유는 벗인 이희천의 죽음으로 보인다. 이희천은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1771년 처형되었다.[13] 그런데 당시 한양의 많은 지식인들이 주린의 또다른 저서이자 역시 조선 왕실을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은 <강감회찬(綱鑑會纂)>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감안했을 때 이희천의 죽음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희천이 읽었던 <명기집략>은 사실 박지원의 8촌 형이자 화평옹주의 남편이자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의 것이었는데 박명원은 별다른 추궁도 받지 않고 넘어갔다. 이회천은 금서를 읽어서 죽은게 아니라 노론 계열이라서 죽은 것이다. 이회천이 주린의 책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죽은게 영조 41년인데 영조 37년 7월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영조 본인이 주린의 또다른 저서인 <봉주강감(鳳洲綱鑑)>을 친히 가져다 강독케 해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참 전에 주린의 책 내용을 알았으면서도 수 년간 묵혀놓다 나중에 터트린 것이었다.

영조 대에는 청나라와의 사행길에서 상행위가 굉장히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그 중에는 서적 구매도 있었다. 구입 목록 짜서 말이 안 통하면 손짓발짓 해가며 얼마나 열심히 구입하고 베끼고 서로 판본을 비교해가며 맞추는 통에 청나라에서 소실된 책이 조선에 가면 있을 정도로 도서 구입이 성황이었다. 이때 유통된 서적들은 성리학 경서뿐 아니라 소설도 무척 많았고 각종 잡서나 비공식 사찬 사서도 많았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문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심에 있는 이들이 역관 가문과 연계해 많은 책을 사모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경화세족과 노론이었다. 영조는 문체반정과 같은 맥락으로 신서적 유통과 이를 통한 의식 변화를 통제하고 탕평책에 줄곧 비판적이었던 노론 청류계 지식인들의 기세를 꺾어놓고자 일부러 일을 계속 키워서 관련 사대부 중에서 노론계인 이회천을 콕 집어 죽였다. 박지원은 벗 이희천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음에 틀림없고 산송 문제로 과거를 폐하기로 한 후로도 감시(監試)에 수석 합격하기도 했으나 이희천이 처형당한 후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14]

1768년 한양의 백탑(白塔, 지금의 탑골공원) 부근으로 이사했다.[15] 박지원 주변에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등도 모여 살았고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모임이 형성되어 많은 신진 기예의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문풍과 학풍을 이룩하니, 이것이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었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살 생일이 있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파견했는데 사신단장으로 박지원의 8촌 형인 박명원[16]이 파견된다. 박명원이 자신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박지원을 임명하면서 박지원은 청나라로 가게 된다. 5월 25일 조선을 출발해 8월 1일 베이징에 도착, 8월 5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다가 건륭제가 열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4일만에 500리를 달려 8월 9일 열하에 도착하는 등 강행군으로 고생하다가 10월 27일 한양에 돌아왔다. 연행에서 청나라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 체계에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人倫)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17]

박지원은 귀국한 이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청나라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 및 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 비평서였다.[18] 1783년 무렵에 일단 탈고되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개작 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수습은 그가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자유 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 의식에 반기를 든다는 점 때문에 찬반 양측에서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문체반정을 지향한 정조도 1792년 그에게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렸다. 근데 결국 안 썼다 이 시기 그는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도 했다. 그러다 만년에 이르면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박지원 특유의 비판력은 약화되고 개량적이며 타협적인 성격으로 기울었다.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3년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는 북한 땅인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19] 대세현(大世峴)에 있으며 1999년 김정일개성을 찾았을 때 유명인 묘들을 단장하라는 명령에 따라 황진이의 묘와 함께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 박지원의 사신 방문

양반 출신 박지원은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제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북경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임명되자 ‘상국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친명, 반청 원리의 도덕적 올바름과 청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다. 그는 청의 성취를 인정하는 데 괴로워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했다.[20]

그의 놀라움과 괴로움은 봉황문에 도착할 때부터 시작된다. 청나라 영토의 ‘동쪽 끝’에서 가구와 거리가 잘 설계된 작은 마을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영토 중심은 더 번영했을 것이라 예상한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인 장복에게 “만약 네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를 물었다. 하인 장복은 “중국은 오랑캐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답으로 그를 안심시켰다.[21] 그러나 자신이 배워왔고 알았던 이상과 다른 현실에 그는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박지원은 여행을 통해 1644년 이후 조선이 청으로부터 문화적으로 고립되며 생긴 자신과 중국인 사이의 현실적 격차를 깨닫게 된다. 박지원이 신민둔(新民屯)이라는 마을의 전당포를 방문했을 때 선물로 글씨 몇 자를 써달라는 주인의 청을 받는다. 박지원은 심양과 요양의 일부 점포에서 “서리를 능가하고 눈을 능가한다(欺霜賽雪)”라는 네 글자가 써 있는 것을 기억하고 글자를 쓴다. 박지원은 그 네 글자의 의미가 상인들의 마음이 서리와 눈처럼 순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밀가루의 품질을 비유한 뜻이었다. 상인이 이 글자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중얼거리자 그는 화가 나 가게를 나왔다. 다음날, 소흑산(小黑山) 마을에서 보석상 주인에게 같은 글자를 써 주고서야 그 글자의 실제 의미를 깨달은 박지원은 당황하지 않고 다른 글자를 써서 가게주인에게 찬사를 받았다.[22]

이와 같이 문화적, 인문적 소양에서 조선과 청의 격차를 실감한 박지원은 “비록 오랑캐가 만든 것이라도 우리 민족과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청의) 좋은 방법과 유용한 제도를 배우자”라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된다.

3. 사상

3.1. 철학 사상

그는 자연 과학 지식에 해박했다. 홍대용(洪大容)과 더불어 지구설(地球說),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해 주자 성리학에서의 지방지정설(地方地靜說)에 반대했다. 그는 '세계는 천체로부터 자연 만물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결합(凝聚結合)하고 운동·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 만물이 생성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교의 천주재설(天主宰說)을 비판하고, 자연은 자연 필연성을 가지고 자기 운동을 할 따름이며, 그 어떤 목적 의지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하늘이 의지를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도 반대했다. 또한 미신적·신비적인 참위설(讖緯說)과 오행상생상극설(五行相生相克說)에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 물질적 기(氣)의 일차성을 주장했다. "만물이 발생함에서 무엇이나 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차 있는 것은 기이며 차는 까닭은 이(理)이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하는 그 가운데 이가 있으며 기로써 이를 싸는 것이 마치 복숭아 씨를 품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기론). 만물의 시원은 기이고, 이는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운동 변화의 법칙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또 감각의 원천은 객관적 외부 세계이며, 감각·의식은 객관적 외부 세계의 사물이 감각 기관에 작용한 결과 발생한다는 인식론을 전개했다.

3.2. 문학 사상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는데, 현재는 9편이 전해지고 있다. 〈광문자전〉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의리있는 도덕 행동[23]과 사리사욕과 명예에 눈 먼 양반을 대치시킴으로써 양반의 가식적 도덕을 폭로·비판했다. 〈마장전 馬傳〉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건강한 도덕성과, 고결성이 퇴색되고 비속화된 양반들의 사교를 대비시킴으로써 양반의 허식적 생활을 풍자·비판했다. 〈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에서는 똥거름 치는 근로자인 주인공 엄행수(嚴行首)의 삶에서, 서민적 덕성(德性)으로서의 건실한 생활 철학을 형상화했다. 근로 인민의 도덕이야말로 진실한 도덕이라고 강조하고, 엄행수는 성인(聖人)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년기의 작품인 〈양반전 兩班傳〉은 양반 도덕의 허위성, 위선적인 양면성, 몰염치한 착취에 기반한 무위도식, 양반의 무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규탄과 폭로로 관통되어 있고, 양반 몰락의 역사적 현실성과 필연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양반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하늘에서 사람을 낼 때 4가지 종류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선비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선비는 양반이라고도 부르는데 잇속이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농사도 하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고 책권이나 대충 훑으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하고 적어도 진사는 떼놓았다. (중략) 우선 이웃집 를 끌어다가 밭을 갈리고 동네 백성들을 끌어다가 김을 매게 한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겠는가.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 놈의 코에 잿물을 부어 넣으며 상투를 잡아 휘두르고 귀쌈을 때린들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인간 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 사회는 당론(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 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폭로하고, 그 평등 윤리인 우정의 세계를 희구(希求)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생활 도덕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서민군상(庶民群像)과 함께 호흡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지식인 체질이었으며, 서민 군상 자체가 새로운 사회의 주도층이 될 수 있는 사회층으로 성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결국 박지원의 신분관 역시 성리학과 유학에 있어서의 원형적 신분제로서의 복귀라는 체제 유지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박지원은 현실 양반들의 허례허식을 비판하면서도 제대로 된 처사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교적 방식을 버리지 못했고, 박지원의 작품 속에서 양반은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다른 신분이 양반을 대체한 적도 없고 같은 수준으로 올라선 적도 없었다. 그래서 박지원의 소설 속에서 진정한 양반은 장사치와 비견되는 존재이다. 허생은 스스로 장사를 하면서도 '나를 장사치로 아는가'라고 했고, 양반전의 양반이 박지원에게 가장 비판받는 대목은 놀고 먹다가 환곡을 천섬이나 쓴 것이 아니라 '족보를 장사치처럼 매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본문과는 달리 잘 알려져 있는 서문에서 대놓고 언급되는 부분이다.

이처럼 박지원 역시 허생(許生)처럼 기재(奇才)를 가지고 고독하게 숨어 살면서 세상을 풍자하고 개탄하는 한 양심적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등에서 허생전에 관해 가르칠 때 '결국 양반이라는 신분과 선비의 입장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작가의 모습을 반영한다'라고 가르치기도 하며,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한 작품에서는 홍길동과 허생을 비교하면서 말하기를 '허생은 선비라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웅이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라는 학생의 말을 통해서 언급되기도 한다. 다만 박지원이 신분제를 인정하면서도, 단지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과거 같은 인재 등용을 막거나, 멀쩡한 자신의 자녀를 두고 다른 적자를 양자로 맞이하는 서얼 차별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허균처럼 신분과 출신으로 인재등용 막아놓고 인재없다고 한탄하는 적서차별과 신분차별을 비판한 것.

정조의 문학 탄압인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정조 때에는 기존의 성리학 경전에서 사용하는 고문체(古文體)에서 벗어나 참신한 방법의 문체[24]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선두에는 바로 열하일기 박지원의 글이 있었다. 철저한 성리학 원칙주의자였던 정조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고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조는 정작 박지원 본인에겐 고문체를 사용한 반성문을 내면 중용하겠다며 온건하게 대응하였다. 다만, 정조 본인은 남몰래 이런 신문체를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문체 자체에 대한 반감보다는 노론 권세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체반정을 도모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박지원의 동시기에 존재했던 국학의 한 방향인 한글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박지원이 남긴 글들은 모두 한문학, 한시로 국문시 등은 남기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에도 '나는 언문은 알지 못하니' 등의 표현이 나온다. 정말 한글에 무심했는지, 혹은 알아도 의도적으로 한글을 멀리했는지 간에 박지원이 한글에 관심을 두지 않은 건 확실하다. 후배 박제가가 한국어와 한글이 중국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중국어 공용어론을 주장한 것과 비슷한 사상을 가져 한글을 의도적으로 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3.3. 경제 사상

그는 학문에서 귀중히 여길 것은 실용임을 강조했다.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를진대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승강질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며 학문의 초점을 유민익국(裕民益國)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맞추었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국가에 유용할 때에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없이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덤으로 당시 청에 사신으로 가는 연경사들이 서적이나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거나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지식 대신 이미 망한 명나라 의복을 자랑하거나 겨우 3개월만 쓰고 버리는 털벙거지, 화장품, 가죽신 등 사치품만 구입하는 것을 상당히 비판하였다. 즉 외국에 나가면 쓸데없는 허영심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들 생계에 도움되는 것을 구하라는 뜻이었다.

그가 실용을 중시하고 이용후생을 외친 것을 보고 박지원이 성리학을 타파/극복하고자 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실학’과 이용후생은 모두 성리학의 전통적인 구호이며, 실학은 도교/불교의 공리공담을 뜻하는 허학과 대비되어 진짜 학문이라는 의미로 쭉 쓰여온 구호이다, 이용후생이라는 단어가 박지원이나 북학파가 만든 것도 아니고, 실용을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당시 성리학의 주류를 이끈 노론 학맥이 호락논쟁의 사변화로 인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빠지면서[25] 실제 현실과 괴리가 생기자 이를 비판하고 실학과 이용후생이라는 주자학의 원 모토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는 생산력을 복구·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도구의 개선과 영농법의 개량, 농사 시설의 복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방책을 저서 〈과농소초〉에서 제시하고 있다.

과농소초에서는 절기와 그에 따른 전답(田畓)의 구획법, 농기구의 개량, 토지의 경작과 개간 및 수리 사업과 그 설비, 토양, 거름, 곡물의 품종, 종자의 선택, 파종, 김매기, 해충 구제, 수확, 곡물 저장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인 개선 대책을 제시했다. 특히 관개 사업의 복구·발전을 강조하면서, 저수지를 구축해 수차(水車)[26]와 기타 수리 시설을 광범위하게 이용할 방책을 제시했다.

한편 박지원은 당시 생산력의 발전을 생산 관계가 저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생산 관계를 개혁할 것을 제기했다. <과농소초>의 뒤에 부록으로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 토지 제도의 개혁안을 제기했다. 당시의 토지 소유 관계의 형편에 대해 "농민들의 속담에 '일 년 내내 뼈가 빠지게 일해도 소금 값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농가 중에서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건 부농의 경우로서 열에 겨우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토지 소유 관계의 개혁안으로서 한전법(限田法)을 제창했는데, 전국의 토지 면적과 호구를 조사하여 1호당 평균 경작 면적을 국가가 제정하고, 누구든지 그 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법률적으로 제한하되, 이 법을 시행하기 이전의 토지 소유는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운 매입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27][28] 이렇게 하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는 고르게 나누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모든 토지와 부가 소수의 대지주나 위정자들에게 쏠리는 부의 불평등함을 지적하며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그로 인한 농민들의 몰락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허생전을 통해 순진한 백성들이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이 된 것은 양반과 관리들의 부패와 수탈로 몰락한 백성들이 살고 싶어서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으로 떠도는 것이다. 이들이 천성이 천하고 악하거나 게을러서된 것이 아님에도 사회적문제 해결은 등한시 하고 추상적인 도덕관념에 빠져 토벌할 생각만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국가가 확고한 화폐 정책을 실시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것과 은(銀)을 화폐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지 못하기 때문에 수공업도 농업도 발전하지 못하므로, 우선 교통을 발전시켜서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광범위하게 수레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을 촉진할 것도 제기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그는 생산력의 발전을 가장 중요시했고, 이를 위해 한전법을 통한 농업 생산 관계의 개혁을 제기했으며 상품의 전국적 유통을 주장했다. 이는 객관적으로는 통일적 내수 시장의 형성을 가져올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그는 또 이러한 개혁의 일차적인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덕(德)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용후생 위주의 새로운 사고 방식으로 종래의 인륜 위주의 사고 방식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한국 사상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한편으로 그가 이상적으로 여긴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전통적인 유교의 이상향인 농업사회였다. 농업 중시와 상업 중시를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당대에 농업을 기본, 근본으로 삼는다는 관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 멜서스 트랩을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보통 ‘상업을 중시했다’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고려 왕조의 경제조차도 근본은 농업이었고 상업은 어디까지나 부업(?) 수준이었을 뿐이다. 이는 허생전에서 극명히 드러나는데, 허생전은 결국 사농공상이라는 전통적 신분제를 타파하지 못했고, 허생이 번 돈을 버리고 섬으로 들어감으로서 이윤추구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농업 중심의 유교적 이상사회를 여전히 좋은 것으로 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박지원이 생산력을 강조한건 무슨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치를 제시한 게 아니라, 기존 조선 농업사회의 단점을 극복하고 더 나은 농업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제시한 방책이었을 뿐이다. 그의 경세론의 정점인 한전론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과거 유교의 이상적 토지제도에서 따온 것이고, 이마저도 정부의 강력한 개입과 통제를 주장함으로서 ‘근대 자본주의’는 커녕 서양 중농주의보다도 못한 수준의 사고를 보여주었다. 서양 중농주의 역시 생산력 증대를 강조했지만 이들은 박지원과 달리 정부 개입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현대 학계에서는 박지원과 북학파의 경세론을 더이상 근대 자본주의의 발아로 보지 않는다.

4. 여담

  • 음주에 관해서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시면서 풍류를 읊는다는 건 다 핑계거리에 불과하고 술에 취하면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너도나도 가 된다고 독설을 하기까지 하였다. 헌데 당시 임금은 역대급으로 술을 좋아하는[29] 군주였다는 점이 아이러니. 막상 열하일기 등에 종종 나오는 술 마시고 친목질하고 인맥 만드는 장면, 중국에서 외국인들도 많고 좀 분위기 무서운 주점에 들어가니 눈치가 안 좋은 걸 독주 원샷으로 분위기 뒤집은 사례[30] 등을 보면 음주의 해악은 알고 있어도 막상 본인도 꽤 술을 즐긴 듯 하다.[31]
  • 초상화에도 드러나듯 생전 체구가 크고 눈매가 부리부리해 거칠어 보이나, 외모와는 반대로 감성적이고 정이 깊은 성격이었다. 생전 형제자매들과도 우애가 깊었고, 큰형인 박희원(朴喜源)을 추모하며 '형님 얼굴 그리우면 냇물에 내 얼굴을 비춰봐야겠다'는 시를 짓기도 했다. 큰누님의 장례 비문(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에는 8살 터울인 누님이 시집가던 날 심통을 부리던 자신을 누님이 달래주었던 추억이 담겨있다.**
  • 조선시대에 드물게 생전 장례식을 치른 사람이기도 한데, 자신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약을 물리치고 계산초당에 친구들을 불러 생전 장례식을 치렀다.
  • 형조참의를 지냈던 정약용 정도는 아니지만 현감 당시 의옥 사건에 제법 연루되어 관찰사 등에게 피의자에 무실을 호소하는 편지를 4건 정도 보낸 일이 있다. #
  • 해학과 날카로운 풍자가 가득 담긴 글을 많이 남겨서 유쾌한 지식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외모 자체는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이미지와는 차이가 나는 편이다. 당시 박지원의 모습을 묘사한 글에서도 초상화처럼 풍채가 당당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5. 그의 작품



[1] 이 초상화는 손자이자 박규수의 동생인 박주수가 그렸다고 하는데(다만 실학박물관에서의 연구 결과 이 초상화는 20세기 초에 그려진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지원은 평소에 '초상화 그렸는데 내 실제 모습의 7할에도 못 미치면 그냥 태워버려라'라고 말했으며, 실제로도 중년기의 초상 두 점이 더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박지원이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의 아들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박지원의 외모가 상당히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는 안색이 불그레하고 윤기가 나셨다. 또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레나룻이 나셨다. 이마에는 달을 바라볼 때와 같은 주름이 있으셨다. 몸은 키가 크고 살이 쪘으며 어깨가 곧추 솟고 등이 곧아 풍채가 좋으셨다."[2] 음력 2월 5일[3] 음력 10월 20일[4] 일제강점기 때 무덤이 소실되고 1959년에 재발견 후로 수십 년째 방치되다가 1999년 김정일이 개성을 시찰했을 때 황진이 무덤과 함께 묘역 개보수를 지시하여 수리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⑩새 단장 박지원·황진이 묘 부근 문종묘도 '깔끔'[5] 장남이 개화파의 시조인 박규수이다.[6] 교과서에도 박지원의 단편이 많이 있다.[7] 버금가는 문장가로는 남인의 이용휴가 있다.[8] 마장전에서 츤데레를 정확히 정의하는 등[9] 오늘날의 함양군 안의면, 안의현의 일부가 거창군에 편입되기도 했다.[10] 정약용과도 유사한 면이다. 지향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었다.[11] 박필균의 6촌 재종조부이자 스승인 박세채가 소론이었음에도 박필균은 노론을 선택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친족인 박필현, 박필몽 등이 연루되었을 때는 아예 자기 이름을 필현에서 필균으로 고쳤다. 사실 박세체 본인이 소론이었을 뿐이지 그의 문인은 대부분 노론이 되었기에 박필균이 노론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12] 박지원의 8촌형이자 화평옹주의 남편이었던 박명원은 옹주와의 결혼 이후 뒷말을 피하려고 발길을 끊은 6촌 재종조부 박필균을 두고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위에 나와 있듯 이 집안 자체가 선조의 딸 정안옹주의 자손이다.),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박필균은 5세에 부친을 잃어 사촌형인 금녕군(錦寧君) 박필하(朴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박명원은 박필하의 둘째 아들 박사정의 아들이었다.)은 생각지도 않는가'하며 그를 원망했다고도 한다. 또 박필균은 사사로운 선물 조차도 거절하고 되돌려보내 노론내 정적들이나 소론, 남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또한 사도세자를 공격하는 것 역시 기피하여 후일 노론 내 다른 인사들이 정조 즉위 후 숙청당하거나 추탈되었을 때 그의 자손들만은 무사하였다. 한편 그의 아들들은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탓에 아무런 직책이 없었으므로, 그가 늦게까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가사를 이끌어갔다. 타계한 이후에도 재산이 없어 장례를 치르기도 벅찼다고 한다.[13] <명기집략>에는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성계이인임의 아들로 기록했을뿐 아니라(조선이 이 문제를 얼마나 민감하게 생각했는지는 종계변무 참조) 인조광해군을 불에 태워죽였다고 기록하는 등 사실을 왜곡해 인조반정을 비판했다.[14] 김윤조 교수는 과거 포기의 직접적인 동기를 이희천과의 우정에 기초한 현실의 모순에 대한 울분의 표출에서 찾는 것이 기존에 확인된 박지원의 행동 양식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일이라고 주장한다.[15] 현재의 종로구 계동. 박규수의 집으로 알려진 헌법재판소는 박지원 사후 아들인 박종채가 옮긴 집.[16] 박명원은 화평옹주의 남편으로 국왕 정조와는 고모부 관계였다. 이런 중국 사신단은 왕의 친인척이 사신단장으로 가는게 외교 관례였다.[17] 이때 열하에서 판첸 라마 6세도 접견한다. 박명원은 판첸 라마에게 절하라는 건륭제의 요구에 고민 끝에 그냥 주저 앉아버리는 식으로(...) 대처했는데, 다행히(?) 건륭제가 매우 삐진 정도로 끝났고, 대신 사행단의 귀국길은 청나라의 홀대로 대단히 고되었다고 한다. 건륭제가 내려준 불상은 아예 외교문제가 되지 않도록 압록강을 건널 때 버린다.[18] 당시 박지원은 조선으로 돌아와 자기 집 정원을 중국식으로 꾸며놓았다고 전해진다.[19] 이북 5도 위원회 기준 행정 구역으로는 진서면(津西面). 금릉리와 어룡리는 수복되어 있다.[20] 왕위안충(王元崇), 「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 손성욱, 너머북스. 2024, p.144[21] 朴趾源, 「熱河日記」1, 臺北: 臺灣書店 1956, 10b 면(김혈조 옮김,「熱河日記」1. 파주: 돌 베개, 2009, p.61~62)[22] 朴趾源, 「熱河日記」 1,臺北: 臺灣書店 1956, 59b~65b면(김혈조 옮김,「熱河日記」1, 파주: 돌베개, 2009, pp.221~222, pp.237~238)[23] 그런데 실제 광문의 모델이 된 거지 두목 달문검계(조선의 범죄조직)와 연루된 사람이었다.[24] 백화문 입말을 그대로 옮기거나, 근대 한국어를 비롯한 각지의 방언을 그대로 음차하거나, 전통적인 역사서의 서술방식을 따르지 않고 통속소설의 문장/문단구성을 취한다든가 했다.[25] 처음 호락논쟁은 나라의 통치와 국제 관계, 신분제 등에 대한 함의를 담은 ‘실용적인’ 논쟁이었다. 현대의 ‘실용’과는 의미가 다르지만 당시엔 이게 실용이었다[26] 박지원 선생은 특히 수레의 도입을 조선의 제일 숙제라고 생각했다.[27] 먼훗날 제1공화국에서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이 주도한 농지개혁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약용이 주장했던 경자유전의 원칙과 박지원이 주장했던 토지소유의 상한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직접 이 두 명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28] 경자유전의 원칙은 제헌헌법에 포함된 이래 여러차례의 개헌에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한편, 토지분배에 상한을 두자는 주장은 1990년대 노태우 정권에서 토지공개념의 일환으로 다시 거론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29] 아예 신하들을 불러모아 술판을 벌이며 감시자까지 정해놓고는, '취하지 않으면 집에 갈 생각하지 마라'(無醉不歸)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30] 청나라 주점에 가니 분위기가 안 좋아 원샷하자 어느 청인이 "그건 논에 물을 붓는 거 같소. 술을 마시는 느낌이 아니잖소?"라고 딴지를 걸었다. 박지원은 쿡 비웃으며 "논에 물을 가득 붓는 것을 농삿일에 충고로 뭐라고 할 수 있으나 술을 마시는 걸 그렇게 견주면 이야기하는 건 그냥 오지랖이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요? 주점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난 점잖게 작은 잔으로 폼잡으며 마신다는 거요?"라고 말하며 남이사 끼어들지 마란 투로 대꾸하며 태연하게 술을 마셨다. 그러자 다른 외인으로 보이는 이가 "기분 좋게 술을 마시러 오는 거지 남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싸우고자 시비를 거는 것이오. 다 같이 기분 좋게 마시는 거요."라며 중재하며 서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31] 어느 정도 해악이 있는 문화를 비판하면서도 사회적인 면을 고려하며 사는 경우는 흔하며, 오히려 사회생활을 위해서라면 타협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은 꽤 흔하다. 아주 엄격한 성격의 성웅의 이미지를 가진 이순신도 수군 부하들을 하나로 묶고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사적인 자리에선 음주가무를 어느 정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