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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

파일:정극인.jpg
정극인의 초상. 제작 시기 및 작자는 미상이다.[1]

丁克仁
1401년(태종 1) 8월 6일 ~ 1481년(성종 12) 8월 6일

1. 개요2. 생애3. 업적

1. 개요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영성(靈城), 자(字)는 가택(可宅), 호(號)는 불우헌(不憂軒), 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이다.

2. 생애

1401년 8월 6일 충청도 광주목 두모포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아버지 정곤(丁坤)[2]과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 安氏)[3] 사이의 7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9년(세종 11) 29세의 나이로 식년 생원시입격하고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그 뒤 여러 번 문과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으며, 1437년에는 당시 세종대왕이 흥천사(興天寺)[4]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유생들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샀고, 결국 성균관에서도 쫓겨났다.

원래는 사형을 당할 판이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북도(北道)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그쳤고, 그 뒤 풀려나 부인 임실 임씨(任實 林氏)[5]의 친정이 있는 전라도 태인현(泰仁縣)[6]으로 내려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不憂軒)이라고 지었다. 그는 불우헌 앞에 있던 냇물인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1451년(문종 1)에 천거를 받아 6품 벼슬인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었고,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에 제수되었으며 1453년(단종 1)에는 당시 한성부 판관이었던 성순조(成順祖)의 권유로 식년 문과[7]에 응시하여 정과(丁科) 13위로 급제하여,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1455년 태음력 6월 11일, 수양대군자기 조카였던 단종의 왕위를 차지하고 자기가 즉위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다시 태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해 12월에 조정에서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려 다시 관직에 올라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냈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했다.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이 되었다. 또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를 하다가 하옥되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됐다.

1470년(성종 1)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태인으로 가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2년 뒤 벼슬에 뜻을 접고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이 내려지자 이에 감격해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송축했다. 1481년(성종 12)에 81세의 나이로 죽었고, 사후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으며,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그의 무덤이 있다.

3. 업적

공직자로서 눈에 띌 만한 업적을 이룬 바는 없었으나 선비로서 청렴한 삶을 고수했고,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문학적 소양이 매우 뛰어나,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인 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문학사에 큰 공헌을 했으며, 불우헌집(不憂軒集)이라는 2권 1책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상춘곡은 현대 국어 교육과정이나 현대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로, 이것은 상춘곡의 표현 기법이 조선 가사 문학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춘곡은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수험생들의 악몽 관동별곡의 표현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8] 문학사에서 그의 위상은 정치사에서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여담으로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에는 정극인이 숭유억불의 뜻을 굽히지 않은 공을 기리기 위하여, 사후 16년이 되는 해인 1497년(연산군 3년)에 왕명으로 건립된 홍교(虹橋), 즉 아치형 돌다리가 있다. 1992년 11월 30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1] 이 초상은 경주 정씨 문중에서 보관해오던 것인데, 현재는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2] 이명 정인(丁寅).[3] 안정(安挺)의 딸이다.[4] 태조 이성계신덕왕후가 죽자 이를 슬퍼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 인근에 건설했던 사찰. 그러나 조선 건국 당시의 슬로건 중 하나였던 숭유억불과 태조가 세운 건물이라는 명분이 충돌했기 때문에 이후 철거되고 다시 건설되는 일이 번갈아 일어났다.[5] 임은(林殷)의 딸이다.[6]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전에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으로 각각 나뉘어 있던 현을 통합한 것이다. 정읍시/행정 문서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7] 그해 식년시 문과에는 김수녕(金壽寧)이 을과 1위로 장원급제하였다.[8] "~거든 ~지마나"라는 식의 표현법으로 이는 현대의 "잘생겼으면 키 크지나 말지"같은 완곡한 표현으로 잘생기고 키도 크고 다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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