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06-13 23:02:36

숭유억불

1. 개요2. 배경3. 억불 정책의 방법과 영향4. 예외 사례5. 정말 조선은 단순히 불교가 쇠퇴하는 시기였을까?6. 긍정적으로 본 숭유억불7. 부정적으로 본 숭유억불

1. 개요

崇儒抑佛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 숭유라는 말이 들어가 있음에도 포인트는 억불에 있다는 것에 주의.

그런데 의외로 태조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왕이었고 정종은 유교나 불교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억불정책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고, 현대에도 조선 전기 대표적인 억불군주로 통한다.

2. 배경

삼국시대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불교는 국교의 위치에 서서 정치권력과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성골 왕실을 전륜성왕, 석가모니 가문과 동일시했으며, 궁예견훤은 본인을 미륵과 동일시했으며 고려훈요 10조를 통해 불교의 입지를 대대로 공고히 하도록 창업군주 왕건이 못박아놓기도 했다. 팔관회연등회 같은 불교행사가 국가적으로 치뤄졌으며 수도에는 궁궐보다 더 크고 높은 황룡사, 흥왕사 같은 거찰이 지어졌다. 일반인의 생활에도 불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 이전의 장례는 화장(火葬)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1] 제사음식도 절에서 차렸다. 사실 중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신라, 고려시대까지는 유불도 삼교가 융합된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 주류였지, 이 중 어떤 것을 배제하려는 모습은 강경한 일부 외에는 대세가 아니었다.

허나 문제는 고려 말기의 불교 교단이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점점 멀어져 변질되고 타락해 가는 것으로 보였던 데 있다. 원간섭기에 한국 불교계는 원나라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데 티베트 불교는 승려의 성관계를 교리적으로 허용하는 등 이질적인 부분이 있었고, 고려 말 당시에는 교리해석의 차이로 '성관계를 해야만 깨닫는다'는 식으로 다소 변질되기도 해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퇴폐적으로 보였기도 했다. 또한 불교 교단은 지배층과의 야합을 통해 백성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지배세력이 되어버렸다. 고려 말 쯤 되어서는 사찰이 광대한 토지를 가지고 소작민을 부리며 사이비 탁발승들이 부처님 이름을 팔아 행패를 부리는 등 불교 교단과 승려들의 패악과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밑에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이전 시대의 집권계층들에 비해 상당히 강경한 성리학 위주의 지배질서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새로운 나라 조선에서는 민심을 봐서라도 적폐 불교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 절차인 것이었다. 물론 그건 명분이고, 사실은 밀려난 고려의 옛 기득권층이 불교 세력과 연계하여 조선에 반기를 들 수있는 힘을 미리 꺾어놓는 것이 본심이었겠지만.

3. 억불 정책의 방법과 영향

아래는 여러 가지 사례를 언급한 것이다. 어떤 것은 여러 임금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고, 어떤 것은 한 임금 때에만 시행하였다.
  • 산지로 사찰 강제 이전 : 조선 이전에 절은 산기슭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당이나 교회와 같이 도시의 길거리에 흔히 있는 시설이었다. 경주시에 있는 황룡사니 분황사니 사천왕사니 하는 큰 절 유적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절들을 산중턱으로 보내면 접근성이 떨어져 자연히 신도는 줄어들어 쪼그라들고 세력확장이나 타 세력과 야합하기가 어려워진다. 대신 승려들의 수행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되므로, 조용히 수행하고 싶은 승려들은 오히려 환영(?)하기도 하였다.
  • 불교종파의 강제 통폐합 : 태종은 불교 종파를 11종단에서 7종단으로 줄였고, 세종대왕은 더 나아가 2종파로 줄였다. 본시 시초는 고려 광종 시절이고, 이후 고려 숙종 시절로 의천과 숙종이 주도했다.
  • 사찰의 숫자와 승려(=사제)의 숫자를 강제로 줄이기 : 이는 본시 고려 성종 시절이 시초이다. 참고로 고려에서 불교에 대해 가장 개혁에 박차를 가한 인물은 고려 성종최승로였다. 단, 성종은 고려 왕 중 특별히 유교적인 케이스에 가까웠고, 팔관회 폐지 등은 2대를 못 가 현종이 되돌렸다.
  • 도성 내의 절은 불태우거나 가정집 등으로 변환. 세종대왕대에는 조선 전국에 선종 18개소, 교종 18개소를 합쳐 총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 승려들은 환속(종교인이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요받았다. 초반기엔 도첩이 없는 승려에 한해 강제되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승려가 된 사람들이 속출한 것을 보면 가끔씩 한번 휘몰아치고 잊어버리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 과거 제도에서 승과를 폐지 : 승과는 중기 문정왕후가 다시 시행했다가 그가 죽자 다시 폐지되었다.
  • 사찰이 가진 모든 토지와 노비 등을 국유화. 승려들 보고 스스로 먹고 살라는 소리다.
  •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 다른 억불정책이 오래 가지 않아 엎어지거나 완화된 것과 달리 이 정책만은 구한말에야 해제되었고, 이런 오랜 억불정책 청산의 상징으로서 지금의 조계사사대문안 위치에 조선시대 이래 처음으로 지어진다.
  • 여성의 사찰 출입 금지 : 여말 불교종단의 폐단 중에는, 승려와 여성의 간통 문제도 있었다.
  • 승려를 양인이 아닌 천민으로 대우함.
  • 왕릉에 쓰일 혼유석(왕릉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돌) 운반을 승려들에게 맡김.
  • 도첩제 : 나중에 금승법으로 대체된다. 단 오래가지는 않았다.
  • 경국대전의 도승조(度僧條)폐지
  • 국사(國師), 왕사(王師) 폐지
  • 사찰에 조상제사 대행 금지 : 고려시대에는 조상의 위패를 에 맡겨서 제사를 대행시킨 경우가 많았다. 조선이 망한 후 현대에 들어, 다시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5만 원만 내면 제사를 대신 지내준다고. 500년만의 전통 부활
  • 국가적 불교 행사 폐지 : 팔관회는 건국되자마자 폐지. 연등회는 규모가 줄어들었다. 신라 때부터 열렸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 성종이 일시적으로 폐지한 적이 있었으나 이후 현종 시절 다시 부활해 고려시대 내내 번창했던 행사다. 고려 태조가 소홀히 하지 말라던 행사이기도 하다.
  • 면세혜택 금지 : 쉽게 말해서 지금으로 치면 종교인 과세와 비슷한 것인데 조선초에는 승려들이 조세는 물론 공물도 제공했어야 했다. 정작 유생들은 오랜 기간 면세혜택을 받아서 이후 호포법 등을 통해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조선의 숭유억불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교단의 폐단을 뿌리뽑기 위해 세력을 억압하고 교세를 강제로 축소시키는 것이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를 금지하고 불교 신앙을 뿌리뽑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불교신앙이 민간에 깊게 뿌리내린 지 오래된 상황에서, 서양이나 중동의 유일신교처럼 다른 종교를 아예 지워버리는 수준으로 탄압하기 어려웠다. 또한 유교만으로는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모두 충족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불교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불씨잡변을 쓴 정도전처럼 불교혐오 성향이 짙은 강경파 사대부들도, 그런 현실을 무시할 정도로 무뇌하진 않았다. 그래서 민간신앙으로서 불교는 냅두되, 교단에서 횡포를 부릴 만한 힘은 뺏은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불교와 지배층의 야합이 가장 경계되었고, 결국 사대부들과 관료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멀리하고 불교를 맹렬히 공격할수록 개념인이라는 풍조가 정착했으며, 경연이나 국가시책에 대한 회의에서 역대왕조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게 다 불교 때문이다란 식으로 책임을 불교에 돌리는 사례도 많았다. 특히 고려 왕조의 멸망에 대해선 기승전불교 수준.

또한 비록 불교신앙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혹세무민이나 기복신앙과는 담쌓고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를 가까이하는 사대부조차도 사대부답지 못하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율곡 이이 같은 당대의 거물 유학자도, 한때 절간에 들어가서 불경 좀 외우고 다녔다고 욕 먹은 바 있다.

정부 차원에서 억불을 행하기는 했어도, 그나마 한양이 지방보다는 덜 심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그나마 쉴드쳐주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주로 극딜하는 상황이 많이 나타난다. 태조 이성계조차 잠저 시절부터 독실한 불자였고, 효령대군같이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왕족도 있었으며, 이후로 간간히 왕이나 왕실인사가 불교를 보호하는 경우가 잦았다. 정부에서도 두부 제조나 공사 등에 승려들을 동원했고, 동서활인원에서 일하는 이들도 노비와 승려였고, 매골승이라고 해서 한양과 성저십리에서 버려진 시체를 매장하는 것도 승려가 맡았다. 또한 유생들이 너무 승려들을 핍박하면 유생들을 처벌하기도 했고, 유생들이 에 올라가서 행패를 부리는 걸 알고는 상서금지령[2]을 내리긴 했다. 효과는 없었지만.

이런 풍조 속에서 지방유생들이 회암사분황사같은 에 직접 테러를 가한 정황이 보이기도 한다. 회암사는 아래 참조.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사는 근처 우물[3]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좌가 나왔다. 불상은 비록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는 구조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혀 있는 건 반불교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작정한 반달리즘일 가능성이 높다. 이 목 잘린 불상들은 건져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 세워 놓았다. 경주 남산에서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몸체에 붙여놓은 것을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은 일부 유교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조정의 공식 입장은 이 정도로 강경하지는 않았다. 또한 사찰에 이 짓을 하려다가 오히려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특히 아래에 나온 것처럼 왕실과 직접 연관된 사찰이나, 실록 보관 등 조정의 일을 맡은 사찰을 테러하면, 억불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왕실에 도전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엄히 처벌했다.

임진왜란에서 불교계가 활약하면서 약간 억압이 완화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 예로 승려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신라, 고려시대에는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막 건국된 이성계 대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16세기 200여년 동안에는 억불정책에 의해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했는데, 임진왜란에서 활약해 광해군의 배려를 받은 사명당을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고승비가 세워져 19세기까지 고승비 170여개가 세워졌다.

이는 인조대를 지나면서 왕실 후손 특히 아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적어진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 어떻게든 후사를 보아야겠기에 왕실 여성들이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왕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이 억불정책은 일제강점기에도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불교가 친일을 행하게 된 것도 이 억불 정책의 잔재라는 해석이 있다. 오랫동안 한국 불교가 억압당했다는 걸 알던 일제가 이를 악용해서 회유책을 사용하고, 불교계도 여기에 넘어가서 친일 성향이 강해졌다는 것. 그 외에도 승려나 불교단체를 천시하는 풍습이 유교계에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4. 예외 사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그나마 쉴드쳐주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극딜하는 상황이 많이 나타난다. 즉 왕실은 불교계에 그나마 온정적,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던 편이다.

4.1.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부터 원래 불교를 독실히 믿는 전형적인 고려인이었고 특히 승려무학대사와의 우정을 보면 조선 최고의 친불군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학대사를 곧 폐지된 왕사로 모시기까지 했으니까.

유교국가 조선의 설계자이며 극렬 혐불주의자인 정도전조차도, 이성계에게 "왕위에 오르기 위해 불교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신앙심과는 별개로 불교의 폐단을 시정할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2. 태종

태종 12년 1월 15일, 궁중에서 연등회를 열었을 때 허조, 윤회종 등이 이런 짓은 그만둬야 한다고 간언하자 태종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해오던 것이다, 크게 하려는 게 아니라 시험삼아 하는 것이다 등의 이유를 대면서 강행했다. 그러나 3년 뒤 1415년에 결국 연등회를 폐지하게 되는데 결국 대신들의 반발에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원경왕후의 와병 중에 승려들을 불러모아 쾌유를 기원하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문제는 왕후의 병에 차도가 없으면 불교를 없애버리겠다라고 한 것(...). 그나마 원경왕후가 회복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토지를 내리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다만 위 사례 외에는 철저한 억불이었다. 태종 2년(1402)에 왕의 명으로 승려들을 천인 취급하게 했고 특별지정한 70사(寺)를 제외한 전국 모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을 모조리 압수했다. 1405년 11월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양주군, 개성, 한성부에 사원 하나씩, 그리고 각 군현에 1사(寺)씩을 남겨두고 나머지 모든 사찰들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이 작업으로 신라시대 때부터 이어져오던 사찰 수천여곳이 불타 사라지고 전국의 사찰은 242곳만이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406년에 또다시 대규모 사원혁파를 단행하여 전국의 수많은 절들을 불태워 무너뜨렸고 이에 석성민(釋省敏) 등 수백 명의 승려들이 신문고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이들 집단을 파하게 했다. 1417년에는 조선 팔도의 불경들과 무속 관련 서적들을 보이는 대로 모조리 모아 눈앞에서 소각하게 했다.

그 외에도 당시까지 11개였던 종단을 7종으로 축소했으며, 왕사와 국사 제도를 폐지했다. 또한 도첩제를 강화해 출가하는 것을 어렵게 했고, 각종 부역에 승려를 무상으로 강제동원했다.

4.3. 세종

초기에는 상왕이자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의 유지를 따라서 철저히 억불정책을 펴긴 했다. 세종 6년에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여 선교 양종만 남겼고, 태종의 폐불정책 이후 전국에 남아 있던 사찰들을 다시 무너뜨려 오직 36개만 남겼다. 그리고 승려들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무산되긴 했지만) 모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 근처에 사찰을 지으려고 했던 걸 보면, 자기 아버지 같은 혐불주의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후 내불당을 설치하고 승려 신미를 총애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상당한 친불 정책을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처님의 이야기를 으로 낸 것을 보면 당시 백성들의 불교 신앙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니, 조선의 임금치고는 호불군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은형 효령대군과 차녀 정의공주도 독실한 불자로 유명했다.

4.4. 세조

임금이 되기 전부터 이러한 경향을 보였으니까. 아버지인 세종대왕 때에 왕명을 따라 부처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게 바로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이다. 흔히 알려진 계유정난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4]으로 시작된 경향은 아니다.

관련 발언으로 다음이 있다.
  • 어머니 소헌왕후 심 씨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
  •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을 취하지 않겠다!"
    왕자 시절의 발언인데, 이게 왕이 된 것마냥 한 발언이라서 문제가 되었다.
  •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
  •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
    유교 국가의 군주가 이런 말을 했으니, 얼마나 불교에 우호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었다. 당시에 임금이 아니었음에도. 이에 대해서는 권력에 대한 야심 표출이라는 해석이 있으며, 본인도 월권행위라는 걸 인식해 바로 다음날 해명서를 제출했다.
  • 원각사, 간경도감(불경을 간행하는 국가기관) 설립. 원각사를 짓기 위해서 집이 200채나 철거되고 많은 재물이 쓰였는데 그런데도 신하들은 "원각사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났습니다"라고 해야 했다.
  • 친필로 부처님에게 봉안할 문서 작성

4.5. 예종

성종 때 도첩제 폐지 안이 나왔을 때, 신하들이 "예종께서도 불교 좋아했지만 명이 짧았습니다."라고 했는 걸로 보아, 불교를 신봉한 듯.

4.6. 명종

중종의 중전이자,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5]의 불교 보호.

회암사를 유생들이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금지했다.[6]

하지만 명종은 정말 불교가 좋아서 옹호하지는 않은 듯하다. 걍 자기 어머니 문정왕후가 불교를 좋아해서 입 다물고 있던 것일 뿐인 거 같다.

5. 정말 조선은 단순히 불교가 쇠퇴하는 시기였을까?


일단 반대하는 견해도 있긴 하다. 숭유억불의 존재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조선시대 불교 쇠퇴설이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다카하시 도오루의 <이조불교>에서 확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한 게 아니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현존하는 사찰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중창·중수되었고[7] 불서의 간행이 빈번히 이뤄졌다. 또 수행체계와 법통의 정립, 강학의 성행과 교학의 전수, 사원 경제의 기반 확대와 상속, 염불 정토신앙의 성행 등 역사적 사실들은 조선불교의 쇠퇴론이나 멸절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다.

또한 손성필도 최근 <보조사상> 제40집에 게재한 ‘조선시대 승려 천인신분설의 재검토’에서도 “조선시대 승려는 천인 신분이 아니었다. 승려 천인 신분설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지금도 교과서를 비롯해 정설은 조선시대의 승려는 천인 취급이다. 그러한 설도 있다는 것.

물론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전 신라, 고려 때에 비해서 그 화려하고 창대했던 귀족적 세력과 지배층적 성격이 크게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특히나 돈줄이 되어 줄 수 있는 당대의 사대부 권력층이 워낙에 불교를 멀리하는 바람에. 당장 누구나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 간단히 불교승려 같은 키워드로 검색만 하면, 불교에 대해서 혐오발언을 하며 공격하는 기사들이 한 트럭 쏟아지는 걸 볼 수 있다.

6. 긍정적으로 본 숭유억불

숭유억불의 실상이 무조건 정치적 보복 및 숙청 행위였다고 보기에는 진짜로 불교가 저지른 폐단이 꽤 많았다.

고려시대 이전처럼 매년 국가 예산을 펑펑 들여서 팔관회를 열고 고래등 같은 절간에 화려한 가사 장삼을 두른 귀족 승려들이 활개치며 소작민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며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교 본연의 시각에서 불교의 발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일본 전국시대까지의 오랜 폐단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싹쓸이를 시전했던 승병단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중생들 속으로 뛰어들어간 석가세존의 가르침 자체가 필요가 없고 불교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특히가 불교가 말하는 윤회론은 불교 내에서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실제로 부처가 이것을 말했는지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 신자들끼리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와 그리고 선종과 교종 논란은 불교 신자들간에 숱한 알력과 서로간의 불신과 상처를 남길 정도였다. 선교 통합론이냐 아니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불교를 싫어하거나 안믿는 사람들 입장에선 밥그릇 싸움 그 자체이다.

후대의 입장에서는 유럽의 성당이나 일본의 사찰처럼 외국에 자랑할 수 있는 크고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주지 않아 비난하기도 하지만[8][9], 불교의 진정한 발전은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파고들며 가련한 중생들의 번뇌를 얼마나 잘 달래주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번역에 문제가 생겼고, 계율에 의거하여 자질없는 승려들을 쫓아내는 노력이 필요했으나 삼국시대나 발해와 신라왕조나 고려왕조의 경우는 이것에 대해 게을렀던 감이 많았다. 현재도 불교 탄압이 사라지고 오히려 기독교의 타락에 대한 반감으로 불교에 호감을 갖는 사람이 좀 늘어나면서 고려시대만큼은 아니라도 불교를 우대하자 다시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다. 몇년전 조계종 승려들이 범죄에 연루되어 불교 종단은 매우 엉망이 되었고, 이전에는 또 천탕산 공사에 대한 무리한 반대로 불교에 대한 지탄도 거세졌다. 결국 몇년뒤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여 마침내 종교인 과세를 단행하게 되었다.종교인 과세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면 나름 이해갈만한 대목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화려한 문화재를 못남긴 것은 고려시절부터 불교에 대한 문화재가 이미 몽골로 인해 파괴된 상태였다는 점이 한몫했다. 이때는 유교와 관련된 문화재도 불탔는데 사서가 여럿 분실, 방화등으로 피해를 입을 정도였고 유학자들이 남긴 시집이 여럿 분실 유실되었다. 이것을 다시 복구하고 다시 만드는 것만해도 인력의 소모나 나라의 예산 소모가 매우 컸다. 실제로 고려말 불교 사찰들의 무리한 건립으로 반불 성향이 강해졌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불교의 화려한 문화재들은 몽골로 인해 불탔다. 이는 우즈베키스탄이 몽골의 침략으로 호라즘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문화재를 많이 잃었다는 점에서 봐도 그렇다. 그런데 몽골 제국의 후신을 칭한 티무르 제국이 새로운 문화재를 남겼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

만약 불교가 고려시대와 같은 폐단을 다시금 반복하거나 중생들을 구제하고 부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면 조선왕조500년과 같은 시련을 다시한번 당할수있다는 사실을 한국불교는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가 온갖 비난과 조롱을 당하고 있고 유교가 낡은사상이며 조선왕조를 망친 주범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역시 직접 보고 크게 느껴봐야 할 것이다.

7. 부정적으로 본 숭유억불

불교 측에선 유학자들도 실은 불교를 믿었고 도교를 남몰래 믿고 좋아했다고 불교에 대해 폄하한 유학자들에 대해 높은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까기도 한다. 불교가 오랑캐가 믿는 국가라고 했으나 정작 유교에서 추앙받는 요순또한 이민족 출신이었고, 그리고 유교를 좋아했던 북위의 효문제나 북주의 무제도 이민족 출신이라고 했다. 즉 이민족 출신들도 유교를 믿었다는 것으로 이것을 반론할 수 있다. 이것은 유교 정책을 펼친 금 세종과 비슷했다. 불교측의 경우도 사실 고려 성종이나 최승로에 대해서 높은 평을 하기도 했는데 그들도 본시 불교 신자였고 최승로도 실은 절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김부식도 불교를 믿었고 정도전 역시도 승려와 접촉해 불교에 대한 지식이 꽤 높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했다. 다시 말해서 숭유억불은 불교 자체에서 불교의 업보라 인정했고, 그리고 동책정수에선 이런 점을 참작해서 불교를 미워하는 것은 좋으나 정치를 하는 유학자들이 유학자 노릇을 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면서 깠다. 우리가 흔히 알던 유교는 이미 쇠락하여 그 유교의 장점들을 불교, 개신교, 천주교 3대 종교가 대부분 흡수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보면 숭유억불 자체도 초기면 모를까 중기나 후기에 이걸 적용하기란 무리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대에는 불교와 유교는 함께해왔고 조선왕조의 경우도 생각보다 여러 사람들이 불교를 믿어왔기에 다 없앨수 없는 노릇이었다.


[1] 21세기에도 화장 비율이 늘고는 있지만, 조선시대부터 20세기까지는 매장이 대부분이었다.[2] 에 가는 걸 금하는 영[3] 분황사 문서에도 사진이 있는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 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신라 우물이다.[4] 장자계승제에 대한 위협과 육친(조카 단종)를 간접적으로 죽였다는 점[5] 명종 즉위 당시에, 수렴청정을 함.[6] 그런데 그걸 기록한 사관은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왕한테까지 들어가서 일을 못하게 되었냐??"는 식으로 써 두었다. 한마디로 회암사를 불태웠어야 한다는 것. 이쯤 되면 무섭다. 회암사는 얼마 가지 않아 정말로 불탔다. 어차피 사관은 반불사상이 강한 유학자들이다.[7] 조선 후기에 많은 사찰이 중수됐지만 폐허가 된 조선 후기 불국사 사진처럼 또 많은 사찰이 망해서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줄어들었는데 쇠퇴한 게 아니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8] 조선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정부가 나라를 비교적 검소하게 운영했기에, 한국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원색적인 화려한 문화재를 보기 어렵다.[9] 사실 이러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중간에 자연재해로 박살나고 다시 중건한 것들도 꽤 많다. 예를 들어 일본의 천수각 같은 경우는 19세기에 한번 벼락으로 박살났다가 1931년에 복구되었다. 사실 이전에도 몇번 박살난 바 있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사실 만리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차례 훼손되기도 했다. 자금성 같은 경우도 문혁의 여파로 박살이 날 뻔 했으나 저우언라이가 군대를 보내 보존되었고, 베이징 성은 결국 문혁의 여파로 아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