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5:01:56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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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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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불교 종교표지(흰색).svg 일제강점기불교 31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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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불교조계종 상징.svg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수도산 봉은사
修道山 奉恩寺 | Bongeunsa
파일:봉은사 로고.svg
<colcolor=#fff> 가족과 함께하는 도심 속 천년고찰
<colbgcolor=#8a1e04> 위치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73)
창건 794년
창건자 연회국사
주지 원명
회주 공석[1]
등급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external/www.bulkyo21.com/22432_16362_3625.jpg
<colbgcolor=#8a1e04> 봉은사 전경

1. 개요2. 역사
2.1. 부동산 진통
3. 상세4. 전각 및 문화재5. 주요 행사 및 즐길 거리6. 여담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73)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본래는 수도산(修道山)[2]에 있는 산사(山寺)로, 정식으로는 수도산 봉은사로 부르며 강남 지역의 발달 및 도심화로 인해 현재처럼 도시 가운데 있는 모습이 되었다.

선정릉능침사찰[3]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잘 보존돼 지금은 흔치 않은 도심 속의 고찰(古刹)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강남 한복판에 있어서 다른 산사들과는 달리 접근이 편리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려면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1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4]

2. 역사

서기 794년 남북국시대 신라 원성왕 시절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처음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고 위치도 선릉 근처라 지금과 달랐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것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선종 수사찰이 되어 과거 제도 중 승과 시험을 보는 곳이 되었다.[5] 이 때문에 많은 유생 안티들이 양산되었다. 봉은사는 한양과 가까운 데다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었기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봉은사와 승과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능침사찰이라 회암사처럼 불태워지는 사태는 없었다.[6] 하지만 승과시험 때문에 당시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해서 관직에 오르려고 했고 이것 때문에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판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파일:서울강남 봉은사 전경.jpg
일제강점기에 찍은 봉은사 전경 [7]
파일:서울강남 봉은사 화엄경판전.jpg
파일:서울강남 봉은사 대웅보전.jpg
일제강점기에 찍은 봉은사 판전[8] 일제강점기에 찍은 봉은사 대웅보전 [9]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에는 봉은사 주지 청호(晴湖) 스님이 절의 재산을 털어 배를 구입해 지금의 잠실 인근 곳곳에 고립된 주민들을 구조하고 절에 임시로 수용하는 선행을 펼쳤다.[10]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큰 화재를 겪었으며 1950년 6.25 전쟁 때 전각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때문에 봉은사 건물은 판전 등 소수의 건물을 제외하면 주로 1940년대1980년대 전후로 재건된 것들이다.

한때 경기도 광주군(現 경기도 광주시)에 속하여 경기도 사찰로 분류되었으나 1963년에 이 지역이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경기도 사찰에서 서울특별시 사찰로 변경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강남구 관할로 편입되었다. 지금은 상상이 안 되지만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뚝섬 유원지에서 사실상 뗏목에 가까운 나룻배를 타고 봉은사에 다녀오기도 했다. 1964년 기사

2.1. 부동산 진통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 봉은사 주변은 허허벌판 논밭이었고 한양에서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오지와 다름없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봉은사는 주변부터 말죽거리의 1만 평 논까지 합쳐 10만 평에 달하는 땅을 갖고 있었다.원래 대명중 근처에 일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강남이 개발되면서 갈등이 생겼다. 이 중에는 박정희 정부 시절 강탈당한 수도산 절반이 있었으며 그 땅에는 종로에서 넘어온 경기고등학교가 세워졌다.

시초는 조계사나 여타 한국 불교 사찰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된 대처승[11]과 비구승[12]의 갈등이었다. 8.15 광복 이후 봉은사는 꾸준히 왜색 불교 정화활동을 벌여 1965년에야 겨우 비구승이 대처승을 몰아냈지만 이 과정에서 개발지 한가운데를 차지한 봉은사의 땅을 싸게 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던 정부에 대처승과 그 가족들이 봉은사의 땅을 불법으로 팔았다. 2017년에야 대법원 판결로 "국가는 진관사에 23억 2617만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다. #

이후에도 부유한 절[13]의 주지 임명권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이 터져나왔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하게 나타난 것이 1988년에 일어난 이른바 ‘봉은사 사태’였다. 절의 주지 자리를 두고 폭력배들까지 동원한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재판까지 갔다. 판결문은 서울중앙지방법원 2019가합588708, 서울고등법원 2021나2038018, 대법원 2022다274103 등이다. 법률신문

3. 상세

<colbgcolor=#8a1e04> 미국인 유튜버 Cory May가 촬영한 봉은사 경내

도심 속 숲으로 이루어진 봉은사는 자연을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특히 도심지에서 등산 없이도 바로 접근이 가능하면서도 규모가 이만큼 큰 사찰은 많지 않다. 게다가 봉은사가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요란하다는 서울 강남 한복판인데 봉은사 안으로 들어가면 신기하리만치 조용해진다. 때문에 근처 업무지구에서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대에 많이 찾는다. 근처에는 코엑스몰이 있어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서울에 사는 불자라면 봉은사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이다. 물론 서울에는 조계사화계사, 진관사 같은 곳도 있지만 조계사를 제외하고 화계사와 진관사는 모두 산중에 있어 서울에 있어도 마음 먹고 가야 하는 곳이다. 반면에 봉은사는 지하철만 타면 절 바로 앞에 내릴 수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가기 좋은 곳이다. 강남구는 물론이고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에 사는 불자들은 대부분 봉은사를 찾으며, 특히 머지 않은 곳에 가장 학구열이 높은 대치동이 있기 때문에 강남 학부모들이 자녀 학업성취 발원을 드리기 위해 많이 온다.

과천에서 기거하던 말년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던 절인만큼 대웅전판전의 현판은 그의 작품이다. 특히 판전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으로, 어린아이의 글씨 같아 보이면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초월한 느낌을 주는 글씨로 알려져 있다.

4. 전각 및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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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름 있는 절 중에서도 규모가 꽤 큰 편에 속한다. 봉은사에 발걸음을 하는 사람 중 대부분은 대웅전만 들렀다 가지만 사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각이 30여 개가 된다. 그 중에서 요사선방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한 8개 정도 되는 법당을 둘러 보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리고 뒤로 돌아서 구생원까지 포함하면 절의 넓이가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역사 깊은 절이니만큼 문화재가 많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봉은사에서 소장하고 있거나 봉은사에 있던 유물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파일:대한불교조계종 상징.svg 수도산 봉은사 문화재 목록
<rowcolor=#fff> 분류 번호 이름 수량 소재지 비고
보물 321호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
(奉恩寺 靑銅 銀入絲 香垸)
1점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
(견지동, 광교빌딩)
1819호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1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봉은사
(삼성동 73)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64호 봉은사 선불당
(奉恩寺 選佛堂)
건물 1동
토지 344.3㎡
76호 홍무 25년 장흥사 명 동종
(洪武 25年 長興寺 銘 銅鐘)
1구
83호 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
1점
84호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목판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初木版)
3,190판
160호 봉은사 목사천왕상
(奉恩寺 木 四天王像)
4구
226호 봉은사 목 삼불상(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
(奉恩寺 木 三佛像(釋迦佛,阿彌陀佛,藥師佛))
3구 지정해제[14]
227호 봉은사 목 삼존불상(석가불, 가섭존자, 아난존자)
(奉恩寺 木 三尊佛像(釋迦佛,迦葉尊者, 阿難尊者)
3구
228호 봉은사 목 십육나한상
(奉恩寺 木 十六羅漢像)
12구
229호 봉은사 대웅전 신중도
(奉恩寺 大雄殿 神衆圖)
1폭
230호 봉은사 판전 신중도
(奉恩寺 板殿 神衆圖)
1폭
231호 봉은사 괘불도
(奉恩寺 掛佛圖)
1폭
232호 봉은사 비로자나불도
(奉恩寺 毘盧舍那佛圖)
1폭
233호 봉은사 칠성도
(奉恩寺 七星圖)
1폭
234호 봉은사 삼세불도
(奉恩寺 三世佛圖)
1폭
235호 봉은사 삼장보살도
(奉恩寺 三藏菩薩圖)
1폭
236호 봉은사 감로도
(奉恩寺 甘露圖)
1폭
237호 봉은사 영산회상도
(奉恩寺 靈山會上圖)
1폭
238호 봉은사 십육나한도
(奉恩寺 十六羅漢圖)
12폭
425호 봉은사 판전
(奉恩寺 板殿)
건물 1동
토지 210.7㎡
서울특별시
문화재 자료
38호 봉은사 사자도
(奉恩寺 使者圖)
1폭
39호 봉은사 영산전 신중도
(奉恩寺 靈山殿 神衆圖)
1폭

최근에는 봉은사 경내의 명부전 뒤편에 새로 시왕도를 봉안할 전각을 짓는 공사 중이다. 1777년에 봉은사에서 조성한 시왕도는 1950년대~1960년대 사이에 봉은사에서 무단 반출되었고, 일부는 국외로 흘러나간(제2대왕, 제4대왕) 것도 있어서 2018년 4월에야 소재가 확인되어 환수가 이루어졌다. 동국대 박물관에서 소장하던 ‘봉은사 시왕도’ 2점(제5대왕, 제7대왕, 제9대왕이 봉안된 한 폭과 제6대왕, 제8대왕, 제10대왕 한 폭)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왕도’ 1점(제1대왕, 제3대왕)까지 이 4폭이 모두 한 세트로 봉은사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봉은사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해당 시왕도를 봉은사로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자신들도 그게 불법유출인 줄 모르고 구입한 건데 잘못하면 소송까지 갈 수 있다는 이유로 난감해했다. # 봉은사에서는 2025년까지 명부전 뒤에 시왕전을 완공하여 시왕도를 모실 계획이라고 한다.

5. 주요 행사 및 즐길 거리

  • 개산대재(開山大齋) - 매년 음력 9월 1일~3일 - 역대 조사 다례재를 한다.

    • 역대조사 다례재의 대상이 되는 스님: 연회국사, 허응당 보우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남호 영기, 한암 중원, 영암 임성, 석주

6. 여담

  •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영화를 보고 조금 어둑해진 저녁 시간대에 가면 엄청 낭만적이다. 절 내부는 조용하고 평안한 분위기에 시선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초고층 아파트인 아이파크 삼성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COEX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도심의 한 발짝 뒤에서 고요한 분위기를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입구 바로 맞은편에 코엑스가 있고 차량도 엄청나게 많지만 신기하게도 봉은사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바깥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 2010년 직영사찰 전환 문제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여기에 당시 주지승이었던 명진 스님이 개입되었다는 일설[15]이 돌면서 봉은사 승려들과 신도들이 강력반발하기도 했었다. 이에 당사자인 명진 스님은 승적을 포기하고 조계종단 승적까지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는데 이 안건과 종정 비방, 종단 비방 건으로 승적이 박탈되었다.[16]
  • 동년 10월에는 찬양인도자학교라는 단체가 봉은사 입구에서 개신교예배[17]를 올리는 동영상이 온라인에 공개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이들은 봉은사를 방문하여 사죄 의사를 표하였고 사찰 측에서도 이를 받아들였으며 모 개신교 단체가 봉은사를 오가는 불특정 다수의 불자들을 상대로 '부처님 계신 곳 좋은 만남'이라는 라벨이 붙은 CD를 배포했는데 정작 CD를 틀면 목사의 설교가 나오는(…) 페이크 불경 CD를 만들어 배포한 적도 있다. #
  • 서울 지하철 9호선 929번 정거장과 인접하기 때문에 봉은사 측에서 929번 정거장 명칭을 봉은사역(가칭)으로 지정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당초 이 정거장은 주변에 코엑스, 아셈센터, 한국도심공항 코엑스가 있기 때문에 코엑스역(가칭)으로 지을려고 하였지만 봉은사 측이 코엑스보다 더 오래된 봉은사의 역사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정거장 역명을 봉은사역으로 지정하는 게 옳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현재는 봉은사역으로 정해졌다.
  • 래퍼 도끼가 다니는 절로 밝혀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게다가 엄청 독실한 불자라고(...).
  • 일요일법회를 봉행하는 절 중 하나다. 반면 음력 법회는 초하루법회 방생대법회 등으로 적으며 모든 법회는 법왕루에서 봉행한다. 2016년에는 혜민 스님이 일요법회를 봉행하기도 했다.
  • 수계식 중 연비 의식에서 남자는 왼팔, 여자는 오른팔에 선향을 놓는다.
  • 불교 신자인 야구선수 강윤구NC 다이노스시절 이 곳에 다녀온 다음 날 경기에서 호투하는 징크스가 있다.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이후에도 징크스를 이어가는지는 불명.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제일 가까운 사찰이다 보니 큰 경기 직전 야구팬들이 봉은사에 와서 기도를 하고 가기도 한다.
  • 교육열 높은 강남 대치동 학원가가 인근에 있어서인지 대웅전 법당 안쪽 한 구석에서 문제집 펴 놓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끔 있으며 그 옆에서는 높은 확률로 학부모가 108배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혹은 같이 앉아서 불경을 읊거나 좌선을 하고 있거나...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창궐 이후에는 절 측에서 아예 참배객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다.
  • 고승덕 변호사가 사법고시 준비하던 시절 이 곳에서 공부했다고 자서전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에 서술해 놓았다. 본인 말로는 "그 시절엔 서울 교외에 있는 한적한 절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영동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인 어린 시절 이야기인 듯하다. 고승덕이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1976년이고 사법시험을 2차까지 합격한 게 1978년[21]이니 영동개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한창 강남에 도로 깔기 시작하던 시절이다.
  • 2016년 12월 29일에 봉은사 미륵보살상 앞에서 31세 여성이 분신자살하는 사고가 있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김씨(31세 여성)가 몸에 인화성 액체를 뿌린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고 소방 당국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숨졌다고 한다. 김씨는 과거 과대망상 증세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추가적으로 발생한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는 없었다. 참고로 모든 관련 기사가 '관음보살상' 앞에서 벌어진 사고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사건이 발생한 곳은 미륵보살상 앞이었다.
  • 2003년 말 두산 베어스의 김경문 감독이 감독 취임발표하기 전에 봉은사를 찾아가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 봉은사역과 절 입구에 노숙자들이 많다. 특히 청테이프와 비닐봉지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는 노숙자는 터줏대감이다. 부유한 불자들이 많다는 것 때문에 구걸을 하러 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7. 같이 보기



[1] 23.11.30 자승 스님 입적.[2] 100m가 안 되는 높이의 산이다. 정상 부근에 경기고등학교가 있다.[3] 봉은사 외에도 남양주 광릉봉선사, 여주 영녕릉신륵사, 화성 융건릉용주사도 능침사찰이어서 살아남았다.[4] 2분 거리에 봉은사가 있다.[5] 유사하게 봉선사교종 수사찰이 되어 승과를 치렀다.[6] 조선 시대의 사찰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왕실과의 커넥션을 형성함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피했던 사찰이 좀 있다. 대구의 파계사 같은 경우 절의 승려인 현응 스님이 숙종을 위해 숙빈 최씨의 회임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려 연잉군이 태어나자 기뻐하며 사찰 인근 토지 40리의 조세를 주겠다는 숙종에게 “돈은 됐고 조선 국왕의 위패를 파계사에 모시도록 허락해 주세요”라고 요청해 숙종이 이를 수락했다. 당연히 선대왕의 위패가 모셔진 사찰에서 행패를 부렸다간 그 유생은 그날로 삼족이 파직으로 끝나면 다행이고 삼족이 멸해질 수도 있으니 유생들의 적대 행위를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7]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8]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9]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10] 당시에는 한강의 흐름이 지금과 달라 석촌호수 방향으로 흐르던 송파강이 본류였고 현재의 본류는 신천강이란 이름의 지류였으며 잠실은 이 사이에 끼인 섬이었다.[11] 결혼을 하여 처자식을 두는 승려다. 이전에 한국에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에 주류가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대처승이 친일은 아니었고 만해 한용운처럼 독립운동가인 대처승도 있었다.[12] 결혼을 하지 않는 승려다. 전통 불교.[13] 봉은사는 서울의 절 중에서 조계사와 더불어 시주량이 어마어마한 절로 알려져 있다. 코엑스 뒤편이라는 환상적인 입지 조건과 강남의 부유한 불자들이 엄청나게 시주를 하여 보유한 부동산도 많기 때문이다.[14] 보물로 승격[15] 후일 위 안건에 대해 불교신문에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어 보상금으로 1000만원을 받았다 한다.#[16] 이후 명진스님은 총무원장 자승 스님, 종정 진제 스님을 비롯하여 조계종을 비판하는 반 조계종 인사가 되었다.개인 유튜브 채널[17] 라고 하기도 뭐하다. 땅밟기라고 불리는, 성경이나 오래된 전례에도 나오지 않는 개신교와 무속신앙의 혼종 짓거리를 "절이 무너져라"고 봉은사에서 하면서 뒷목 잡을 짓을 벌였다. 개신교/대한민국/사건사고/종교적 문서 참조.[18]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교보타워사거리에서 서울종합운동장이 있는 송파구 종합운동장삼거리까지를 잇는 도로.[19] 박원순 본인은 무종교인이지만 개인적으로 친불적인 성향이었다.[20] 여담으로 이때 봉은사 일요법회를 방문해서 신도들의 의견을 들어봤는데 한 신도의 의견이 서울 지하철 9호선 역명을 봉은사역으로 지정해 달라는 것이었다.(당시 봉은사역으로 서울시지명위원회가 확정하였지만 개신교 단체들의 반발로 무산될 뻔한 적이 있었다. 지네들이 역명 갖고 장난치려던 건 기억 못하나보다) 당시 박 시장은 흔쾌히 알겠다며 봉은사 신도들의 박수를 받았다.[21] 그러니까 이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한 지 2년만에 사시 합격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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