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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 |
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大韓佛敎 總本山 曺溪寺 | Jogyesa | |
<colbgcolor=#B9A26A><colcolor=#fff>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 44) |
설립 | 1395년 (태조 4년)[1] |
주지 | 원명 |
등급 | 직할교구의 교구본사 |
링크 | | | |
조계사 전경 |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의 교구본사이자 총본산(總本山)이다. 봉은사와 함께 서울 시내 시주가 많이 들어오는 대표적인 사찰이기도 하다.사찰 규모는 소박한 편이나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다는 거대한 대웅전이 있고, 입구에는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현판이 걸린 거대한 일주문이 정문 역할을 한다. 경내 대중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Pinus bungeana)[2][3]이 자란다. 500년 이상 묵은 노송이지만, 대도시 한복판 조계사에 있는 관계로 생장환경이 열악해 전반적인 상태는 좋지 않다.
2. 역사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 현 조계사는 그 역사가 비교적 짧으나 얽힌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들어오는 일본불교 세력에 밀리기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서울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한다.
원종의 주 목표 중에는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것도 있었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멀쩡한 절도 산자락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급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이에 3개월 동안 백미 1천 석, 6천여 환을 모아 중부 박동(薄洞)[4]에 있던 동녕위궁(東寧尉宮)을 3천 환에 사서 허물고 1910년, 그 터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웠다. 이 자리는 현 조계사의 바로 옆이며, 이 각황사가 조계사의 전신이다. 각황(覺皇)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으로 부처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드디어 깨달은(승려 도성 입성 금지를 해제하고 도성 내 절 설립을 허가한) 대한제국 황실에 감사한다는 뜻도 있었다. 그런데 원종의 창종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각황사를 설립하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한성부에 신청했으나 서류 처리 도중에 경술국치로 나라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원종 종무원의 대표격이었던 이회광(李晦光)은 잘못된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일본불교의 힘을 빌어 원종을 인정받고자한 것이었다.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5]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연합맹약'이란 것을 맺어 연합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조동종 밑에 원종이 들어가는 꼴이었다. 이회광은 인품이 훌륭하다는 글도 전해지는 승려였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보지 못하고 친일행적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듣고 전라도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북쪽에서는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경솔한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1911년에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했고, 북의 원종과 남의 임제종이 양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원종의 신청을 기각도 승인도 하지 않고 싸움을 지켜보다가, 1911년에 사찰령 등을 내려 한국불교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 이상 일본불교를 앞세워 조선침략을 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국불교마저 총독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듬해부터 해인사를 시작으로 30본사를 선정, 사법을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했고 곧 임제종과 원종이란 명칭을 못 쓰게 했으며 임제종은 저항 끝에 강제 해산되었다. 이회광과 원종은 곧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바꾸고 존속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쓸모없어진 원종의 기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원도, 승인도 안 해줬고 결국 1912년에 원종은 사라진다. 원종의 친일적 주지승들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로 들어가 종명이 '조선불교선교양종'이 된 한국불교 30본사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한편 강제해산당한 한용운 등 임제종 승려들은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찰령에 의거한 30본산제도에 대응하는 한국불교계의 새로운 대표기관을 세우고자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회' 등을 조직하고자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방해하여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발전과 포교를 지원해주겠다고 교묘하게 회유하였으니, 과거 조선시대 600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던 승려들은 이에 감격하여 많은 수가 친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역시 30본산제 체제의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용운 등 지각 있는 승려들은 서서히 민족적인 사상을 가다듬으면서 3.1 운동, 만당(조선불교청년총동맹) 등을 주도하며 일제에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다.
1915년 무렵 각황사로 보이는 사진[6] |
각황사 건립 당시(1910)와 모습이 달라졌다. 1913년 스리랑카의 반승반속(半僧半俗) 수행자 다르마팔라(Dharmapāla, 1864-1933)[7]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조선 불교계에 기증하자 조선 승려들은 이를 각황사에 봉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각황사가 누추하다고 판단했는지 잠시 동대문 밖 원흥사에 잠시 안치하고, 각황사 대웅전을 일본식 건물로 개축한 뒤에 가져왔다. 사진 위 중앙의 큰 건물이 개축한 일본식 건물이며, 옆의 것들은 부속된 전통방식의 절 건물로 보인다. 다르마팔라가 기증했던 진신사리는 2009년에 조계사 앞마당 10층석탑에 새로이 봉안했다. 앞의 보성중학교[8]가 지금의 조계사 자리이다. |
이에 1937년에 각황사 옆자리에 새로 절을 건축하고, 1938년에 완성하자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태고사라고 개칭하였다.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였던 태고 보우국사를 모시던 태고사를 이어받겠다는 의지이자 한국 조계종의 본산에 어울리는 이름을 칭하려는 의도였다. 각황사는 1938년 현재의 조계사가 완공된 후 건축비용 마련 차원에서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이후 일본식 본당 등이 철거되어 사라진 듯하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할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이 인가를 얻어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다.
광복 이후인 1954년에는 대처승[9]과 같은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10]들이 태고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였고, 이승만 등이 지원함에 힘입어[11]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났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유지된다.[12] 비록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13]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내었음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모습으로 부분회귀하는 데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조계종은 내부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근본주의 항목 참조.
조계종과 조계사 그리고 한국 근대 불교의 역사는 친일 행적과 민족적 행적이 뒤섞인 모습이다.[14] 전체를 친일이냐 민족이냐로 규정하기 전에 상당히 불행했던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를 창피하게 느끼는지 많은 글에서 조계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15] 실제로 조계종/태고종이나 조계종/태고종 주도로 펴낸 불교 관련서적과 일반 학자들이 쓴 불교사 책[16]를 비교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차이가 크다. 일반 학자들이 쓴 책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각 종파들이 낸 책은 유혈충돌 부분은 최소화하면서 자기 종파의 정통성 강조에 특히 집중한다.
3. 시설
조계사 조감도 |
3.1. 대웅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124호 | ← | 125호 | → | 126호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조계사 석가불도 | 조계사 목불좌상(석가불) | ||
125호 | ← | 126호 | → | 127호 |
조계사 석가불도 | 조계사 목불좌상(석가불) | 조계사 대웅전 | ||
126호 | ← | 127호 | → | 128호 |
조계사 목불좌상(석가불) | 조계사 대웅전 | 양정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5호 | |
조계사 석가불도 曺溪寺 釋迦佛圖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견지동) |
분류 | 유물 / 불교회화 / 탱화 / 불도 |
수량 / 면적 | 1幅 |
지정연도 | 2000년 7월 15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6호 | |
조계사 목불좌상(석가불) 曺溪寺 木佛坐像(釋迦佛)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견지동)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목조 / 불상 |
수량 / 면적 | 1軀 |
지정연도 | 2000년 7월 15일 |
시대 | 조선시대 후기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7호 | |
조계사 대웅전 曺溪寺 大雄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견지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
수량 / 면적 | 건물 1棟, 토지 1,143.5㎡ |
지정연도 | 2000년 9월 10일 |
시대 | 1922년 |
관리자 (관리단체) | 조계종 조계사 |
<colbgcolor=#B9A26A> 대웅전 |
대웅전 본존불 |
대웅전 〈석가불도〉[17] |
대웅전에 불상 3좌를 봉안하여 이를 삼존불이라고 부른다. 좌로부터 각각 아미타여래(아미타불), 석가여래(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이 세 불상은 법당 내에 모신 불상 중에선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실제로 보면 크기에 압도된다. 불단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크기의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는 대웅전 중수 당시 영암 도갑사에서 모셔온 불상이다.
조계사 대웅전은 1.6 m 높이 돌 기단 위에 아름드리 나무 기둥 34개를 세웠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 길이는 정면 30 m에 측면 17 m이다. 원래 십일전보다는 대웅전이 약간 작고, 부분적으로 다르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18] 사진상으로는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을 정도의 큰 규모지만 실제 크기는 근정전보다 조금 작다. 일단 근정전의 기단은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이기에 조계사 대웅전의 석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다만 대웅전의 기단이 단층석축기단이긴 해도 기단 높이는 1.6m에 이른다. 그리고 이 점이 근정전보다 크게 보이는 착각의 원인으로 보이는데,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조계사 대웅전보다 칸 수는 적지만 오히려 면적은 정면 30 m에 측면 21 m로 더 넓다. 1칸의 길이가 근정전이 훨씬 커서 일어난 오해일 것이다. 높이 또한 단층인 조계사 대웅전보다 중층팔작(重層八作) 지붕인 근정전이 당연히 더 높다.
크기도 그렇지만 이 건물은 전통적인 예법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건방진 면이 있다. 지붕 아래 화려하게 장식된 공포의 형식에서 그러한 면을 느낄 수 있다. 조계사 대웅전의 공포는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근정전보다 외부, 내부 모두 2출목씩 많다. 부분적인 형식 면에서는 조선의 정궁보다 더 화려한 것이다. 그래서 유난히 높고 화려해 보인다. 실제로 창덕궁 대조전 중건을 맡았던 정5품 도편수 최원식이 건축을 지휘한 건물이다.
<colbgcolor=#B9A26A> 십일전 |
조계사 대웅전은 본래 일제강점기 시절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1936년 유사종교해산령이 선포되어 보천교가 해체되었고, 십일전 목재를 불교계에서 매입하여 1937년 11월 26일에 지금의 대웅전을 세웠다. 조계사는 대웅전을 완성한 이듬해에 단청을 칠하고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떠서 현판을 만들고,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에서 본존불상을 가져와서 대웅전에 안치하였다.[19]
원래 다른 종교의 건물을 해체한 자재로 건축했기 때문에, 문짝 등에 새겨진 조각과 문양들이 불교와는 맞지 않았다. 이후 2004년 대웅전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부구조를 개수하여 전통불교 양식으로 단장하였다.
참고로 현 대웅전 현판은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바탕으로 복제한 것으로 해당 편액의 글씨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8남인 의창군 이광(1589~1645)이 썼다고 한다.
매년 부처님오신날에 봉행하는 봉축 법요식이 이 건물 앞뜰에서 열린다.
3.2. 극락전
대웅전 옆의 건물 1층에 위치한 작은 법당.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곳은 조용히 염불이나 참선하기 좋은 분위기이다. 특히나 조계사 신도들의 49재나 천도재 등을 이곳에서 하는지라 더더욱.
3.3. 관음전
2015년 현재 조계사 앞쪽에 새로이 '관음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건물은 그냥 현대식 사각형 시멘트 건물이다. 법당에는 관음좌상이 안치되었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고 법회도 많이 열려 분위기가 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 곳은 그야말로 고요한 좌선실 분위기 그 자체다.사실상 24시간 개방인 대웅전과 달리, 17:00경이면 문을 닫으므로 좌선이나 참배를 하려면 그 전에 가야 한다.
3.4. 불교중앙박물관
홈페이지조계사 안에는 불교중앙박물관이 있는데,우리나라 성보박물관을 대표하는 불교계의 국립중앙박물관이라 할수 있는 곳이기에 여느 절의 성보박물관과는 수준이 달라서 나름대로 소장품의 질이나 전시의 질이 꽤 좋은 편이다. 한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눈여겨 볼 만하다. 소장품 목록에 나오듯 대한민국의 보물을 10여점이나 보유 중이다.상설전은 하지 않고 전시는 모두 특별전으로 열려 살펴보지 않고 갔다간 허탕칠수도 있다.조계종에서 운영하는지라 웬만한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에서도 보기 힘든 성보문화재도 전시되는 편.
3.5. 불교대학
정식 4년제 단과대학이 아니라, 불교에 대해 심층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신도와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체 교육기관이다.신도들에게 불교교리 및 문화강좌가 진행되는 곳. 일종의 불교교양대학이다. 불교대학 2년 4학기, 불교대학원 2년 4학기를 운영한다.
3.6. 구 조계사종
자세한 내용은 구 조계사종 문서 참고하십시오.과거에 조계사에 걸렸었던 범종으로 광복 이후 국보에서 해제되면서 위작이냐 진품이냐를 놓고 논쟁이 뜨거웠지만 현대의 조사 결과 신라시대 범종이 맞다는 설이 대세. 그러나 국보 재지정 논란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현재는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소장 중이다.
3.7. 기타
<colbgcolor=#B9A26A> 조계사 사천왕상 |
통상적으로 말하는 사천왕의 지물과 조계사 일주문에 설치된 사천왕상의 지물이 서로 다른데, 조계사 사천왕상은 조선에서 17세기부터 나타나는 사례를 따랐다.[20] 비파를 들면 보통은 지국천왕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다문천왕이다. 이를 모르면 지물만 보고 사천왕의 이름을 착각하기 쉽다.[21]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이 조계사에 사천왕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금속공예가 이근세를 만나 작품을 주문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주문 밖에서 일주문을 바라보아 왼쪽부터 증장천, 광목천, 다문천, 지국천 순으로 일주문 기둥 앞에 일렬로 세웠다. 그러나 나중에 마치 천왕문을 통과할 때처럼 (사천왕이 통로의 중심을 바라보도록) 일주문 안쪽 양 옆으로 2개씩 세웠다.
사찰 경내 | ||
광목천 | 통로 | 다문천 |
증장천 | 지국천 | |
일주문 바깥 |
사실 대웅전은 크지만 기타 건물이나 부지가 좁아서 기본적인 사찰 가람 구조도 갖추지 못한 느낌도 있다. 차차 정비를 해서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춘다고 하는데 2016년이 넘어도 아직 멀었다는 느낌. 저 웅장한 대웅전을 빼면, 사찰 건물다운 건물은 대웅전 뒷쪽에 있는 범종루와 극락전밖에 없다. 조계종의 본산이라는 이름에 비해서는 초라함이 사실. 사실 절의 위치가 서울 도심 한복판이라서 확장이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사
근처 호텔 부지를 매입해 확장하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가지로 잡음이 많았다. 조계사 길 건너편에는 '템플스테이'라는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불교 서적을 파는 서점,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 템플 스테이 등 불교 관련 프로그램을 취급하는 곳 등이 있으며, 2층과 5층에는 사찰음식을 파는 발우공양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사찰 요리 전문가로 유명한 비구니 대안 스님이 총책임자로 있는 식당인데, 대부분의 식재료는 승려들이 직접 기르거나 만든 것을 사용한다. 2층은 뷔페식 메뉴와 일품요리 및 도시락, 5층은 좀더 비싼 코스요리를 파는데, 모두 채식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채식이나 사찰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하다. 2층은 그렇지 않지만, 5층은 며칠 전까지 예약 필수. 2층 식당 '발우공양 콩'은 적자 누적으로 인해 2015년에 폐업했다가 같은 해 '삼소'라는 식당으로 재개업했다. 이 곳 역시 사찰음식 전문점으로 점심에는 뷔페, 저녁에는 단품메뉴를 판매힜는데, 얼마 못 가 다시 폐업하여 현재는 사찰음식 교육관이 들어섰다.
<colbgcolor=#B9A26A> 조계사 옆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 |
조계사는 선종으로 분류되는데, 굳이 연원을 따지자면 중국의 소림사와도 닿는다. 조계사의 직할 말사 중에 한자도 똑같은 소림사가 있다.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학교 입구 부근에 있으며, 태조 5년 암자 규모로 창건되어 나중에 절규모로 중건 승격되었고 조계종이 자리잡은 이후에 흡수된 절이므로 본사인 조계사보다 오히려 연원이 깊은 절이다.
4. 천연기념물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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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 |
서울 조계사 백송 서울 曹溪寺 白松 Lacebark Pine of Jogyesa Temple, Seoul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 |
분류 | 자연유산/천연기념물/문화역사기념물/종교 |
수량/면적 | 1주 |
지정연도 | 1962-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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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 서울 조계사 백송 (서울 曹溪寺 白松)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조계사 백송의 나이는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m, 뿌리부분 둘레 1.85m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고,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조계사 백송의 나이는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m, 뿌리부분 둘레 1.85m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고,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5. 사건 사고
<colbgcolor=#B9A26A> 조계사 분규 영상 |
현재 한국불교의 25교구 본사제는 일제 사찰령에 의한 31본산제로부터 유래한다. 31본산제는 본래 일제의 행정부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일제의 잔재청산과 자주교단을 설립하고자 한국불교는 31본산 제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교무원을 두는 교무제 실시를 결의했지만, 박정희에 의해 5·16이 발생하고 이후 1962년 통합종단이 발족하면서 다시 해방 이전의 본산제를 부활시켰다. 그것이 오늘날 25교구 본사제도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절들은 이제 본사와 말사로 묶여 파벌이 되었고, 파벌 싸움과 비효율적인 교구운영과 의사결정제도가 겹쳐 한국 불교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그러나 일단은 1999년을 마지막으로 대대적이지는 않아도 간간히 물리적 충돌이 벌어진다. 게다가 불교계 신문 광고란마다 주지 자리나 임원 자리를 놓고 선전광고를 띄우며 여론싸움을 한다.
2008년 촛불시위 때 시위 참가자 일부가 한때 은신하기도 했으며, 일부 개독교 인사들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는 사건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개신교/대한민국/사건사고/종교적 항목 참조. 경내에서는 민족 및 불교문화 수호를 위한 집회가 열리기도 하며, 2010년 하반기부터 한나라당이 예산안에서 템플 스테이 관련 예산을 삭감한 데 항의하여 일주문에 '한나라당 소속 의원의 조계사 출입을 금함' 이라는 현수막이 한동안 내걸리기도 했다.
2012년 5월, 성호라는 승려가 조계사의 전 주지승려를 비롯, 고위 인사들이 호텔에서 수억대 도박판을 벌였다는 폭로를 시작으로 조계사 인사들의 성매수, 몰래 부인 두기(은처), 해외 원정 도박[22] 등을 연쇄적으로 폭로하면서 조계사를 넘어 대한민국 불교 전체가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었다. 저것들이 전부 사실로 밝혀질 경우 1990년대 조계사 투기장 사태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흑역사로 기록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2013년 전국철도노동조합 파업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철도노조 지도부들이 조계사로 피신하여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해 있다가 자수하였다.
사실 군사독재 시기에도 민주화 운동 투사들이 체포를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난하고, 전두환도 5공 당시 비리가 터져나오자 수사를 피해 백담사로 몸을 숨기는 등, 대대로 종교시설은 좌우를 막론하고 체포를 피하는 피난시설로 애용되었다. 종교시설은 종교단체와 그 신자들이라는 큰 빽을 업고 있는 만큼, 잘못 건드렸다가는 수십만 표 이상이 날아갈 수 있기에 부담이 크기 때문. 또한 유권자들의 표심 뿐만 아니라 국제 여론 악화의 우려도 있다. 특히 가톨릭 같은 경우, 비록 성당이 바티칸의 치외법권 같은 건 아닐지라도 국제적으로 정부가 조리돌림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조계사가 현대판 소도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으며, 종교시설이 공권력까지 막는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켰다.[23]
6. 기타
조계사 바로 길 건너편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서울중앙교회가 있고[24], 종각역 방향으로 내려가면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중앙 감리교회가, 한 블록 넘어서 인사동 쪽으로 더 들어가면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이 있다. 수 많은 종교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162번, 606번, 1020번이 정차하는 정류장은 우정국 앞에 있다. 안국역(162번 한정)[25]이나 경복궁(경복궁역 말고)[26]에서 환승한다면, 위 3개 노선 중 하나를 이용시 좀더 가깝다.
<colbgcolor=#B9A26A> 〈심슨 가족〉에 나온 조계사 대웅전 |
조계사 맞은편에 중동고등학교, 중동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들은 모두 강남구로 이전했으며 이적지에는 학교 터였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남아있다.
매년 부처님오신날의 봉축법요식에 정치계 네임드들이 자리한다. 물론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불자대상 수상도 진행한다.
7. 외부 링크
8. 같이 보기
[1] 현 위치는 1910년(융희 4년) 설립.[2] 소나무속(Pinus) 중 한 종. 나무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하얗다.[3] 또한 직선거리로 1 km 정도 떨어진 통의동에도 더 크고 오래된 천연기념물 4호 백송이 한 그루 있었는데, 1990년 폭우와 바람에 부러져 죽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현재 그루터기만 남았다.[4] 현재의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근처[5] 지금의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출신이며 승적은 니가타현 겐쇼지(顕聖寺)에서 취득했다.[6] 대한매일신보 연구 (커뮤티케이션북스, 2004).[7] 일제강점기 신문에선 한자로 達摩婆羅(달마파라, 달마바라)라고 음역했다. 반승반속(半僧半俗) 수행자로서 불교를 위해 헌신하다가 1931년에 승단에 입문, 1933년 1월에 구족계를 받아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만 68세로 숨을 거두었다.[8]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보성고보)로 개칭되었고,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로 나뉘었다. 참고로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본래 보성고보와 보성전문은 같은 재단이었으나, 다른 재단으로 분리되었다.[9] 결혼을 하여 처자식을 가진 승려. 일제 이전에도 종파에 따라 소수 존재했지만, 일본식 불교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주류였다.[10] 결혼하지 않는 남자 승려로, 전통적인 불교에 입각한 것. 비구니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 승려다.[11] 일제 말기에 양산된 대처승들을 불교계에서 쫓아내려고 하였다.[12] 이때 밀려난 대처승들이 만든 종파가 바로 한국불교태고종이다.[13] 조계종과 태고종 모두 나중에는 정치깡패까지 동원하였다. 심지어 정치깡패를 머리 깎이고 명목상 승려로 두고 전투원으로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고승들은 조계종이고 태고종이고 할 것 없이 멸시하였다. 현대의 유명한 고승 성철 스님은 나중에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을 때, 기존 불교계에 항의하는 의미로 종정 취임식장은커녕 재임기간 내내 머물던 절을 떠나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겻다. (하지만 성철은 정작 한국불교의 근본주의화에는 우호적이었다).[14]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즉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일제의 통제 대상이었으며, 신사 참배와 연관하여 굴복한 쪽과 저항한 쪽으로 나뉘어졌다. 천주교는 공산주의(=무신론=소련)을 적으로 하였다는 이유로 나치와 추축국, 그 동맹인 일본제국에 호의적이었던 바티칸의 영향으로 신사 참배를 인정하고 굴종하였으며, 개신교 쪽에서도 많은 교단이 일제에 협력하였다. 공산주의-사회주의 계열 단체와 인사들 대부분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음은 종교와도 상당히 연관이 있다.[15] 친일 행적이 있는 기독교계 교단 또한 불교처럼 일제 시대의 행적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축소한다.[16] 대표적으로 이이화의 <역사 속의 한국 불교>가 있다.[1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8] 기둥 높이가 줄었다고 한다.[19] 현재는 법당에 모신 삼존불 오른쪽 아래에 따로 모셨다.[20] 통도사에 있는, 1718년에 조성된 사천왕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21] 조선 중후반에 왜 사천왕의 지물이 바뀌었는지는 논쟁 중으로, 어떤 학자들은 "지물이 바뀐 게 아니라 제작자가 무지하여 착각했을 뿐"이라 주장하기도 한다.[22] 무려 수백억대라고 한다.[23] 다만 이렇게 종교시설에 피신하는 수배자들은 상당수가 위에 나온 것처럼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얽히는 편이라서, 오히려 해당 종교단체가 중재역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애초에 종교시설에서 잠시라도 해당 수배자들을 보호함부터가 정치적인 행위. 애당초 논란이 있는 정치범이 아니라면 종교시설에서 받아주지도 않으며, 정부도 체포에 부담이 없다.[24] 단 해당 교단의 총부(總部)인 ‘본부교회’는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시조사 및 삼육서울병원과 함께 있다.[25] 151번, 172번은 무정차 통과한다.[26]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홍지문방면 노선들의 환승은 강남대로 중앙버스전용차로 뺨치는 막장환승이다. 신촌이나 창덕궁 방면은 그나마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