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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 Horse
1. 개요
한국 품종의 말로 조랑말의 일종이다. 다만 제주마는 조랑말이면서 중(中)형마에 속한다.현재 제주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2. 역사
탐라순력도 산장구마(耽羅巡歷圖 山場駈馬)에서 묘사된 조선시대 산마장의 모습. 조선시대의 양마장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그림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의 특산물로는 단궁, 반어피 그리고 과하마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이 '과하마'가 현 제주마의 조상이라는 게 통설이다. 이 토종 과하마가 원 간섭기에 도입된 몽고마, 혹은 서아시아의 우량마와 교잡된 것을 현재의 제주마로 본다.
작은 체구 때문에 무시받기 좋지만, 엄연히 한민족의 전통 군마였다. 특히 제주마 중에서도 전설적인 명마인 응상백은 이성계가 가장 아끼던 애마 중 하나였다. 특히 체구에서 오는 인상과는 달리, 중기병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1]
제주마는 소위 '제말걸음'이라 해서 왼앞다리, 왼뒷다리를 같이 내딛고, 그 다음에 오른앞다리, 오른뒷다리를 같이 내딛는 식인 일명 '측대보(側對步)' 방식으로 뛰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본시 몽고마[2]의 걸음걸이[3]였던 것이 제주마의 핏줄에도 영향을 끼쳐 지금까지 제주마 DNA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 방식은 말이 뛸 때 등자의 높이가 수평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마궁술용으로 적합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반도 왕조의 주적은 고대부터 조선까지 거의 항상 몽골이나 여진 등의 북방 기마민족이었고, 이들은 만주-몽골-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거대한 스텝 지대를 통해 서역의 대형마를 도입하기 쉬운 환경이었다. 굳이 서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진족의 말은 중세부터 몽골이나 한국의 조랑말보다 덩치가 크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한반도 왕조들은 대대로 외국의 대형마들을 들여와 토착화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고려 시대에는 원간섭기 제주도에서 몽골이나 서역의 대형마들을 풀어놓고 길렀으나 점차 토착 조랑말과 교잡이 진행되어 조선 초기에 이미 조랑말이 되어버렸다. 조선 시대에는 국초부터 여진과 교역해 서역이나 몽골의 대형 품종을 들여와 어떻게든 토착, 개량해보려고 노력했으나 근대적인 유전학 지식이 부재해 여의치 않았다.출처
대신 전국에 양마장을 설치하고 질 좋은 여진족의 말을 수입해서 제법 효과를 보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본토의 양마장 대부분이 파괴되었고[4] 광해군 재임기엔 양마장 말들을 관리하던 감목관 직책이 사라지며 사실상 방기되었다. 인조대에 들어서는 청의 위협에 맞서 육성을 지속적으로 시도했으나, 이미 광해군 대에 인프라가 많이 파괴되어 복구하기 힘들어지기도 했고, 계속된 기근으로 중앙군 급료도 챙겨주기 힘들 지경이라 여의치 못했다. 그 이후에는 인프라가 많이 회복되어 외국 대형 말을 키우는 목장도 조선 전기에 비해 대폭 늘어났지만, 인조 이후로는 외국과의 전쟁이 사실상 사라지고 가끔 내부 반란만 터지는 상황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현대인 관점에서는 조선 후기 들어서 군마의 질과 양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체감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러한 기록들 때문에 조선시대 군마가 모두 제주마와 같은 말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조랑말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또 품종이 갈리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만주, 몽골, 북중국에서 수입한 호마(=달마, 청마), 함경도의 북마, 제주도의 제주마, 그 외 지역의 향마로 말의 품종을 구분했는데, 이때 북마, 제주마, 향마는 조랑말에 속한다. 하지만 북마는 제주마, 향마와 같은 조랑말이라고는 해도, 군마로서 매우 뛰어난 품종으로 여겨졌다.[5] 제주마는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좋은 군마로 취급받았으나, 후기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출처
조선 시대 안장 |
청나라 안장 |
조선 후기 조랑말이 넘처나 조선의 안장이 더 높았다는 말도 있으나, 한국 안장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앞뒤의 턱이 높을 뿐 실제 앉는 부분에 높이는 별 차이가 없다.
3. 기타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대체로 거친 성격이라서[6] 편자를 갈때는 다리 넷을 묶어서 포박한 뒤에야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 조선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봐도 사악하다, 악마같은 짐승, 말 모습을 한 맹수 운운하는 내용이 있는 걸 봐서 성질이 참 더러운 모양이다.[7]
하지만 저렇게 편자를 박는 건 포장된 도로를 달리기 위한 승용마 기준이고, 현대의 경주용 제주마들은 편자를 박지 않는다. 자체 체중이 가볍고 발굽이 워낙 튼튼해서 편자를 박지 않아도 감당이 된다고 한다.[8]
성질머리 외에도 그냥 기본적으로 고집이 센지 입맛도 꽤 까다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조랑말들은 도통 뜨겁게 익힌 사료가 아니면 먹질 않으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뭐 겨울에야 추우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여름에까지 저랬던 게 문제였는데, 조선의 가옥은 기본적으로 취사시설과 난방시설이 일체형이라 소죽을 끓이느라 방 전체도 뜨겁게 달궈져 버려서 여름에 주막에서 묵던 선교사들이 쪄죽을 뻔 했다는 기록이 꽤 보인다.[9]
1970년대 군에서 박격포나 무반동포 수송을 위해 조랑말을 사용해 보려 한 적이 있었다. 덩치에 비해 힘도 쎄고, 폭음(爆音)에도 덤덤한 편이었기에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사료를 따로 제공해야 한다는 번거로운 점과 거친 성격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거기다 이 시기 경제개발로 식단이 개선되고 입대자들의 체격도 커지면서 그냥 병사들이 뺑이치는 걸로 종결되었다.
[1] 체구가 작은 조랑말로는 중기병을 양성할 수 없다는 건 기병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현대인의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시대 개마무사들은 말과 기수 모두 철갑으로 온 몸을 감쌌는데, 이들이 탔던 말의 크기는 제주마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실제로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 개마무사들의 말뼈를 토대로 당시 말의 키를 계산해보면 기껏해야 120~3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닌 것이 중세 유럽의 군마들도 현대 기준으로는 조랑말 수준인 것이 많다. 역시 조랑말인 몽고마를 타고 다녔던 몽골군 역시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을 잘만 운용했으며, 칭기스 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하기 이전에도 망구트족 등 돌격전에 특화된 부족이 있었다.[2] 몽골 제국군의 군마.[3] 몽골어로는 '조로모리식 걸음'이라고 불렀다.[4] 한반도 왕조는 거의 항상 북방이 최전선이었고, 이 때문에 양마장 중 상당수는 남쪽 지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자 양마장들은 치명타를 입었다.[5] 이는 북마가 호마보다 덩치는 작지만 성질이 굳세고 지구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몽골군이 자신들의 조그마한 몽고마와 서역이나 여진족 등의 대형 말을 비교하면서 했던 이야기와 유사한데, 실제로 이 이유 때문에 북마는 함경도 밖으로 반출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왼쪽 귀를 살짝 갈라서 다른 조랑말과 다르다는 표식을 했다.[6] 종종 조랑말이 온순하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대부분 셰틀랜드 포니와 같은 품종을 제주마로 오인한 케이스다.[7] 지금도 크게 다른 것이 아닌 게 제주 경마장 관계자들의 증언으론 경주마들도 순치된 척을 할 뿐, 깨물거나 낙마시켜려고 벼르는 놈들이 많다고...[8] 참고로 몽골 유목민들이 키우는 몽고마도 편자를 박지 않는다. 제주마와 비슷하게 체중이 가볍고 발굽이 튼튼한 데다, 초원 환경의 특성상 편자를 박을 필요가 없기 때문.[9] 주막은 말을 타고 가던 사람이 말을 마굿간에서 쉬게 하기 위한 역참의 역할도 했다. 물론 말을 바꿔 탈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