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0:44:03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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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풍속화에서 묘사한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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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풍속화에서 묘사한 주막

1. 개요2. 역사3. 주막의 모습들4. 숙박업 부진의 이유5. 계승6. 여담7. 각종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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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주막

조선 시대 후기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 생긴 식당이자 술집여관이다. 서양의 Tavern이나 Inn과 가깝다. 숙박업과 요식업을 겸했고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도 비슷하다.

2. 역사

오늘날 알려진 여객 업소로서의 주막과 같은 시설이 사료에서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 후기인 것이 분명하다.

주막은 조선 후기를 다루는 사극은 물론이고 심지어 원삼국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도 등장하는 단골 요소로, 조선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들의 대표적인 고증오류[1]다. 사실 교과서 수준의 역사 지식에서도 주막이 생긴건 조선 후기라고 배우기 때문에 그 부분만 더듬어도 고증오류임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등장 인물들이 서민적인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계획을 꾸미는 시츄에이션을 넣기엔 이보다 적절한 장소가 없기에 넣는 듯하다.

또한 술을 마시는 '술집'의 경우는 주막처럼 복합적 형태가 아니었을 뿐 주점, 주가, 주헌, 주루 등 여러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여행자를 위한 숙박, 편의시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驛)'과 '원(院)'이 있었다.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이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고, '원'은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이었다. 역과 원은 국가에서 공적 용도로 사용했던 곳이고 17세기 초까지도 공무가 아닌 일반 여행자가 잠을 잘 수 있는 주막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여행자는 지역별로 존재하는 에서 숙박하거나, 아니면 좀 큰 부잣집에서 잤다. 여행자에게 저녁밥을 내주고 하룻밤 재워주는 건 근현대 이전에는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조선시대 수령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과객을 하루 재워줄 정도로 고을 인심을 좋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여행을 다닌 사람이 있으니 아무튼 뭘 받고 숙박 시켜주는 '시설'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전근대의 일반적 관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폐경제가 당연스레 자리잡은 현대의 심상을 투영한 결과일 뿐이다. 접대의 관습 문서 참고.

결론적으로 대중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술과 음식, 그리고 숙박을 제공하는 상업 형태로써의 전형적인 주막은 조선 중기부터 나타난다.

주막은 임진왜란 당시에 쓰여진 일기인 고대일록(孤臺日錄)에서 처음 언급된다. 그리고 17세기에 관설 원(院)의 기능이 쇠퇴하고 참마다 참점(站店)을 설치하여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등장 빈도가 높아진다. 1604년에 편찬된 갑진만록(甲辰漫錄)에 따르면 영남이나 삼남대로변에 있는 주막에도 술과 말을 먹이기 위한 풀, 그리고 땔나무밖에 없어서 여행객들은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두세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싣고 다녔다는 내용이 나와 17세기 초반까지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막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후이다. 전쟁의 상처가 가라앉고 대동법이 시행되고 상품경제가 발달하여 화폐 유통량이 증가하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보다 활발해지면서 여행객에게 술과 음식, 그리고 숙박을 제공하는 주막들이 제법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막에서 일하는 여주인을 주모라고 부른다. 기생일을 은퇴한 퇴기(退妓)출신이 많았고, 격이 낮은 궁녀나 나인들이 퇴궁하거나 궁에서 쫓겨나 주막을 차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가난한 백성들이 농사 대신 너도나도 할것 없이 주막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전해진다.

큰 고개 밑의 길목, 교통 요충지 대로변, 나루터 주변, 장터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지나가는 장소에 위치했는데, 주막을 알리는 간판은 '酒'라고 쓴 깃발이나 등을 걸거나, 술 거르는 도구인 용수를 장대에 달아 문앞에 걸어두기도 했다. 식사로는 양지머리로 국물을 우려 간장을 타서 먹는 장국밥이 주종을 이루었다. 술은 탁주나 청주를 팔았으며 양반이나 고관들은 방문주라 하여 주막에서 따로 만든 고급술을 팔았다.

한성부(한양)이나 평양부 등의 큰 도시의 주막에서는 술과 밥만 팔았지만 지방에서는 식당, 주점과 숙박업을 겸했다. 규모가 큰 주막이 아니면 보통 봉놋방이라 불리는 온돌이 있는 큰 방에서 잠을 잤는데 식사한 사람들은 공짜로 쓸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대신 그만큼 사람이 몰려 비좁은 경우가 많았고 남녀 가리지 않아서 혼숙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주막이 점차 사라지던 시기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인데, 이때 신작로가 뚫리고 자동차들이 많이 다니면서 많은 주막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세태 변화에 빠른 주모들은 도로 공사를 하러 나온 측량사나 자동차 운전기사들에게 돈을 찔러주거나 술을 먹여 꼬드겨서 자기네 주막에 사람들이 들러갈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막이 사라진 것은 신작로가 뚫려서라기 보다도 주요 장거리 교통로를 철도가 대체해서 라는 점이 더 컸다. 이 당시에는 자동차는 커녕 버스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에서도 자동차는 잘사는 사람들이나 보유할 수 있던 시절이라 철도가 훨씬 대중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이렇게 주막이 점차 사라져갔지만 철도가 커버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주막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여인숙과 여관이 시골 방방곳곳에까지 널리퍼지면서 남은 주막들은 점차 폐업하거나 술집, 여인숙으로 갈아탔고,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경북 예천군 풍양면에 있는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련 씨가 2005년에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삼강주막은 2005년 12월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2007년까진 빈집으로 방치되다 2008년 해체 후 관광지로 개발되어 옛날처럼 술이나 음식 등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유옥련 씨 생전에 찍힌 사진들을 보면, 삼강주막은 새마을 운동이 진행된 1971년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시멘트로 보수한 전형적인 오래된 시골집으로 주변에 논과 풀밭, 강둑이 있었는데 2005년 당시의 모습 2008년 해체 후 복원하면서 황토벽에 초가지붕 얹은 전혀 다른 건물로 만들어 버리고 주변도 싹 밀고 정비해서 옛 자취는 완전히 사라진 단순한 관광지가 되었다.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건 주막 내부에 보전해 놓은 유옥련 씨의 외상장부[2]와 주막 뒷편의 느티나무 뿐이다. 생전에 찍힌 다큐 영상을 보면 유옥련씨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숙박업소 기능은 사라지고 동네 노인들 마실 나와 간단한 안주에 소주 한잔 걸치는 점방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다. 이 땐 매출이 적어 막걸리는 들여놓을 수 없었고[3] 소주과자를 팔았다. 소주도 한병에 1000원에 팔아서 남는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유옥련 씨를 회상하는 기사

3. 주막의 모습들

산간벽촌에도 주막이 없는 곳이 없다.
조선풍속집(이마무라 도모, 1909)

큰 지역 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지역까지 주막이 존재하였으며, 굳이 마을이 아니여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마다 주막이 존재했다.

음식점, 술집, 여관이라는 원래의 기능 이외에도 임시병원, 시장, 심지어는 우체국까지[4] 사람들의 일상을 관장하는 여러 서비스를 제공해주다 보니 해당 지역 주민들의 양반, 평민, 천민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은 교류의 장소이자 지나가던 나그네들에게도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등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시설 중 하나였다.[5] 또한 마을에 주막이 단 한곳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의 주모는 가히 마을 주민들의 대모로 통하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 신문, TV, 라디오가 없던 시기에 정보유통과 여론형성을 담당하는 일종의 창구였기도 했다.[6]

식사는 각 주막마다 달랐지만 대체로 밥, 국, 찌개, 나물, 김치가 주로 나왔고 어쩔땐 수육 같은 고기 요리, 구운 생선, 전, 부침개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며 제철이 되었다 하면 신선한 야채도 주었다고 하며, 식후엔 따뜻한 숭늉이 입가심용으로 나왔고 특히 해안가 지방의 주막은 회, 굴, 전복, 조개, 매운탕, 미역국 같은 해산물 반찬이 나왔다고 한다. 밥값은 2끼를 기준으로 해서 평범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나 그 절반 정도로 당대 기준에서는 제법 비싼 값이었지만 그 대신 밥을 고봉밥으로 푸짐하게 퍼주어서 그야말로 배터지게 먹을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점점 발달하면서 주막은 물론 상인들을 중심으로 외식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밥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지만 아궁이와 가마솥을 사용하는 당시 요리 문화 특성상 밥을 짓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한두 사람 먹을 만큼 적은 양으로 밥을 짓는 것은 큰 가마솥을 쓰던 당시 한국의 전통적인 주방 여건 상 비효율적인 일이었기에 손님을 받기 전에 밥을 먼저 지어 둘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밥은 미리 지어두면 찬밥이 되기 마련이고, 이를 따뜻하게 만들어 먹기 위하여 찬 밥에 뜨거운 국물을 부어[7] 밥을 따뜻하게 만들어 손님에게 내는 방법이 바로 토렴이다. 자세한 건 토렴국밥 참고.

어떠한 마을에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가거나 무언가 중요한 행사가 벌어질 때는 주막을 잡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합숙을 하기도 했고, 합숙으로도 방이 모자라 마구간에서 자는 등의 일도 있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진다. 구한말에 조선을 방문하여 주막시설을 이용해 본 영국인 이사벨라 비숍은 '좁은 방에 몇명이 들어사며 자는데 방은 가을과 겨울에도 땀을 흘리는 걸 떠나 화상 입을 정도로 매우 뜨거워 고문 같았다. 이 때문에 곤충들의 배양기 역할이 되어 어느 주막에서나 곤충들이 보였고 한겨울에도 워낙 벌레가 들끓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서 문풍지에 구멍을 뚫어놓고 숨을 쉴 수 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더워서 환기를 시키려 하면 호랑이 같은 맹수가 들어온다고 문을 곧 닫게 했으며 참다 못 해 밖에 나가 자겠다고 하니 , 호랑이, 표범, 늑대, 승냥이 등의 맹수들이 어슬렁 거리는데 괜찮겠냐고 말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8]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주막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박만 하면 1냥, 삼시세끼 다 챙겨먹고 사소한 까지 챙겨주면 2~3냥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여관임에도 소란은 별로 없어서 가끔식 약주 들이키고 잠깐 소란을 부리는 아저씨들이나 조랑말이 지들끼리 싸우는 정도가 다였던 듯.

물론 큰 싸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라 가끔 양반들을 수종하던 노비들이나 머슴들끼리 싸움이 붙어서 상전인 양반들이 뒷수습하느라 쩔쩔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양반들끼리 충돌이 나면 해당 양반들을 모시는 노비들이나 머슴들이 자기 주인 편든답시고 상대편측 노비들이나 머슴들한테 싸움을 걸어서 일이 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양반들 사이의 충돌은 비교적 가벼웠는데 정작 해당 양반들을 모시는 노비들이나 머슴들이 자기 주인 편든다는 명목으로 상대측 노비들이나 머슴들과 서로 싸움을 벌여서 일이 커지곤 했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장소에 따라서 각종 범죄자들과 노름꾼들이 주막에서 술판과 도박판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도박판이 그렇듯 돈 문제로 싸움이 벌어진다거나 꽐라가 되어서 진상짓을 한다거나 하는 일도 생기곤 했으며, 중요한 범죄사건이 벌어졌을 때 범죄자들도 일단 도망칠 때 잘 곳은 있어야 하니까 주막에서 묵는 경우가 많았기에 무슨 사건사고만 터졌다 하면 포도청 같은 곳에서 범죄자를 색출하려고 주막부터 뒤지는게 관례였다고 한다.

공무로 인해 지방으로 출장나가는 관리들은 보통 해당 지역의 관아, 동헌, 파발마를 관리하는 역 같은 데서 숙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관아나 동헌이 가깝지 않은 경우 주막에서 묵었지만 사적인 일로 이동하거나 공무로 이동하더라도 주막이 없으면 민가에서 하룻밤을 청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이는 주로 권력이 미미한 관직이거나 권력이 있어도 이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에 한하며, 권력도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행차가 크며 요란해진다. 이 행차소리를 듣고 지역유지들이나 지방관이 알아서 마중을 나와준다. 이런 경우는 잠자리는 기본 제공이고, 권력의 정도에 따라 술자리에 기녀에 거마비까지 두둑히 찔러주는 경우도 있었다는 모양.

높으신 분들이 투숙객들이 가득 찬 상태인 주막으로 오면 다른 투숙객들이 골치아파지기도 했는데, 으레 높으신 분들은 독방을 원했기 때문. 이럴 때는 신분이나 돈의 힘을 이용하여 투숙객들을 내쫓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을 내세워 독방을 원했던 높으신 분들이 되려 큰코를 다친 사례도 야사로 많이 전해지는데, 조선시대에 교리직[9]이었던 어떤 양반이 첫 지방출장에서 벼슬을 내세워 한 방의 모든 투숙객을 쫓아냈다. 그런데 그 투숙객 틈에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묵고 있던 판서[10]가 끼어있었다. 산소에 제사를 올리러 가던 도중 우연히 주막에서 묵게 된 것. 판서는 그 자리에서 교리를 꾸짖고, 후일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해 파직시켰다.

4. 숙박업 부진의 이유

조선 후기의 숙박업은 기록에서 여러가지로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시기의 중국, 일본, 서양에 비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 중 화폐 경제의 발달이 늦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가장 지배적인 이유로 보는데 조선시대의 본격적인 화폐 유통과 화폐 문화가 정착한 시기는 동아시아에서도 많이 늦은 축인 19세기이며 그나마도 제대로 시행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11] 외식 문화와 숙박 문화가 발달하려면 화폐 제도 정착이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조선 후기는 그것이 늦어 숙박업의 수준이 많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 실제로 조선 말기는 물론이고 개화기까지도 화폐 대신 무명이나 곡식과 같은 현물로 거래를 했다는 사료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당시 양반들의 손님 접대 문화 때문에 숙박업이 발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당시 양반의 가계부를 보면 전체 수입의 1/3 정도를 접빈에 썼다고 한다. 옛 이야기 등에서 나그네들이 그 고을의 좀 살만한 집 문앞에 가서 하룻밤만 신세지고 싶다고 하면 그 집 주인이 성격이 고약하거나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은 나그네의 숙식은 물론 떠날 때 노잣돈까지 쥐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발견된 옛 기록들에 따르면 나그네의 객고를 풀기 위해 그 집안의 여종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부북일기'에 나타난 여행객의 성생활[12][13]

접대의 관습 문서에서 보듯 오죽하면 김삿갓의 시조 중 '황혼축객비인사'라는 말까지 있어서 밤늦게 재워 달라는 나그네를 그냥 쫓아보내는 것은 패륜으로 봤을 정도이다.[14] 양반들이 얼마나 이를 중요시했는지는 지금도 양반 종가집에 남아 있는 말인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유서깊은 종가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 음식은 제사음식을 제외하면 이런 접대용 음식과 술 빚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나그네가 길 가다가 밤이 깊으면 양반집 문을 두들기고 길 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없냐고 말하는 것도 고증이 잘 된 셈이다.

전해지는 야사 중 인조 시절 유혁연이 수원 부사로 재임중이었는데, 한 번은 그의 백부 되는 유충걸이 수원을 지나다 민가에 유숙을 청했지만 가는 곳마다 모조리 거절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초저녁부터 축시까지, 양반가에서부터 민가까지 모두 거절당하자 화가 끝까지 난 유충걸은 그 즉시 수원 부사를 불러냈고, "네놈이 도대체 어떻게 치민(治民)을 했기에 여기 인심이 이토록 고약하다는 말이냐!"라고 크게 꾸중하였다. 수원부사 유혁연은 그 말이 지당하고 무엇보다 가문의 존장인 백부가 그런 꼴을 당해 몹시 민망하여 관아로 모시려고 했지만 "이 따위로 다스리는 놈의 관아에는 내 얼어죽어도 안 간다."라고 거부하여 그 길로 떠나가 버렸다. 다음 날 부사는 수원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여 곤장을 치고, 수원 땅 인심을 크게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길손을 박대하는 것은 크게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반들이 이렇게 손님을 대접하는데 열심이었던 이유는 인품이 후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관대함과 깍듯한 손님 접대를 보여줘서 인심을 얻고 자신은 양반이라 베풂을 실천한다고 홍보하기 위해서였던 것도 있다. 또 옛날엔 교통, 통신이 좋지 않아서 타지의 정보를 모으기 힘들던 시기에 이야기를 하며 양질의 정보도 얻어낼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재산을 불리거나 손실을 최소화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었다.[15] 대표적인게 경주 최부자 문중이다. 이는 접대의 관습과도 약간 이어지는데 해당 문서를 참고. 한 마디로 숙박비를 안 받으면서 번듯한 방에서 재워주고, 식사도 공짜에 노잣돈도 주고 심지어 젊고 예쁜 여자 노비들과 섹스까지 즐길 수 있는 호텔(?)들이 고을마다 널려 있는데 따로 돈을 받는 숙박업이 발전하기는 어려웠을 거란 이야기다. 주막에서 따로 숙박비까지 받지 않고 밥값과 술값만 받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더불어 숙박업은 상업 발달과 함께 야간 문화, 교통 등 사회적 인프라가 뒷받침 되어야 발전할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은 이러한 것들이 동시기 타 국가들보다 비교적 늦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야간 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선 밤에도 불을 밝히기 용이한 조명 시설이 필수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동시기 일본에서는 유채꽃을 대량으로 재배하면서 저렴해진 유채유를 조명 기름으로 사용하여 야간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으나[16] 조선은 지배계층 외에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기엔 조명용 물건들의 가격이 매우 고가였다.[17]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은 물고기나 동물 기름, 송진 등과 같은 저가형 재료들을 대체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각자가 필요한 만큼 자급자족하는 정도였다.

5. 계승

한국에서는 전근대의 전통 숙박시설이 이어져오는 경우는 없다. 주막이라는 것이 원래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18] 저가 숙박시설이니만큼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며 보존해야할 문화라기보다는 과거의 잔재 정도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삼강주막도 간단한 안주 정도만 제공했지 숙박의 기능은 오래전에 상실한 상태였다.

다만, 현재에 들어선 여관이나 모텔이 과거 주막의 위치를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옥이라는 형태에 국한하여 본다면, 한옥호텔이 그 후계형태라고 볼 수는 있으나 한옥호텔은 보통 숙식을 제공하는 저가의 숙박시설과는 거리가 멀다. 기능과 형태에 주목한다면 현재 주막과 가장 가까운 숙박시설은 식사를 제공하는 한옥 민박이나 한옥 펜션이다.

6. 여담

  • 산의 초입이나 고갯길 근처에 위치한 주막들은 밤에 길을 넘어가려는 손님이 단 한 명이면 호환을 방지하기 위해 그냥 보내지 않고 일단 밤을 지내게 하고 날이 밝으면 보내거나 정 밤중에라도 가야 한다면 상단이나 길을 넘어가려는 다른 사람들을 최소 열 명 이상 무리지어 보내곤 했다.
  • 1903년조선을 찾은 러시아 작가 Y.시에로셰프스키의 기록 <코레야 1903년 가을>에 따르면, 여행길에 처음 묵는 주막에 돈을 맡기고 영수증을 받은 다음, 그 영수증으로 여행길에 있는 다른 주막에서 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의 마지막에 묵는 주막 주인은 영수증을 회수하고 처음 주막에 맡긴 돈에서 그동안 사용한 금액을 차감하여 남은 금액을 거슬러 줬다고 한다. 주막에서 발급한 영수증을 마치 오늘날의 체크카드처럼 사용했던 것이다. 해당 책에서는 주막 주인들의 전국적 규모의 조직이 있기에 이런 기능이 가능하다고 추정하고 있다.[19] 이러한 어음은 실제 활용법이 기록으로도 남아있고 어음 자체의 실물도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도 체크카드가 있었다고?
  • 서양 판타지 문학 및 이에 영향을 받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Tavern, Inn을 한국어 번역에서 선술집으로 오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 문서에서 열거한 주막의 기능과 역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Tavern, Inn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주막의 주모 역시 alewife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Alewife가 지금은 물고기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 뜻은 말 그대로 alehouse의 아주머니. 여기서 또 alehouse를 찾아보면 tavern과 동일한 단어로 나온다. 말 그대로 맥주(ale)집 아줌마이니 주모와 일맥상통. 실제로 박철 교수가 번역한 시공사판 돈키호테에서는 주막이라고 옮겼다.
  • 일본의 '차야(茶屋)'도 입지 조건, 시설 기능, 전반적인 풍경 등으로 보았을 때 주막으로 번역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으나, '찻집'이란 이름처럼 술이 아닌 차와 과자류(특히 당고) 위주로 팔았고 숙박 기능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1:1로 대응하는 번역은 아니다.

7. 각종 매체에서


[1]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이런 사극에서 주막 앞에 술 주 자()가 쓰인 깃발을 내걸어서 주막이라고 표시한 것도 고증오류다. 문맹이 많던 시대라 술 주 자 깃발을 걸어도 못 알아볼게 뻔하지 않은가? 조선시대 주막은 집 앞에 술독용 용수를 내걸어서 주막임을 표시했다.[2] 그녀는 문맹이라 벽에 금을 그어 표시했다.[3] 막걸리는 적어도 일주일안에 소비하지 않으면 시어버린다.[4] 서신이나 물품을 전달하거나 받는데에 주막이 거점 역할을 했다. MBC에서 방영한 상도에서 우체국으로서의 주막의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5] 다만 상평통보에서 나왔있듯이 갑오개혁으로 모든 세금이 금납화 하기 전까지 전체 화폐의 유통율은 25% 정도로 추정되며 화폐의 유통은 한성과 같은 상설시장인 시전이 있는 곳 위주였으며, 75%에 해당되는 곳들은 여전히 현물경제로 해당 지역의 주막들은 지역 주민들 보다는 과거보는 선비나 보부상과 같은 나그네들을 대상으로 음식과 술의 판매가 집중되었을 것이다.# 특히 서구권과는 달리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술을 만들어서 먹은 가양주 문화가 일반적이었다는 이유도 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한 한성부 등의 인구수가 많은 주요 도시들을 제외하면 주막에서 술을 사서 마시는 경우가 어느 정도였을 지는 정확히 추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곳곳마다 주막이 번성했던 것으로 보아 수요는 분명 있었던 듯 하다.[6]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도 조보라는 신문이 있었지만 주로 관료나 양반가 위주로 유통되었다. 선조 연간에 민간으로도 발행된 적이 있지만 선조가 조보에 국가기밀까지 실린다는 사실을 알고 관련자를 처벌한 적이 있다.[7] 국이나 찌개는 차가워지면 쉽게 상하고 맛도 없어지기에 아궁이에 걸어 둔 가마솥에 따로 보관했다. 국이나 찌개 같은 탕일 경우 약불로 계속 끓이면 되었다.[8] 사실 비숍만 이런 기록을 남긴건 아니고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 거의 대다수가 '조선 사람들은 사계절 동안 난방을 너무 뜨겁게 틀어놓는다'고 기록했다. 한 외국인은 조선인들은 뜨거운 온도를 즐기고 방에서 빵처럼 따끈따끈 구워지길 좋아한다고 써놓았을 정도(...).[9]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 등으로 속하여 문장을 담당하는 벼슬. 정오품 또는 종오품이었다.[10] 3 바로 밑인 데다가 이호예병형공, 즉 6명밖에 없는 고위 관리로, 쉽게 말해서 형조판서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이다. 당시 기준으로 궁궐 내부까지 사인교를 타고 갈 수 있었던 직책. 정부청사 정문까지 최고급 세단을 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왕), 총리(정승), 장관(판서) 정도 뿐일 것을 생각해 보면 해당 위치가 짐작이 간다.[11]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상평통보 항목에 잘 나와 있다.[12] 부북일기의 내용을 대충 정리해 보면, 주인공인 박취문과 일행들은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좌수 이득곤 댁 계집종 통진, 의성현 검동 댁 계집종 분이, 김팽남 댁의 딸 예현, 향교의 계집종 옥환 등과 잠자리를 하였고 이 외에 관청 소속의 여자 노비인 '주탕'들과도 잠자리를 같이 했다. 내용 출처[13]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사회의 지배층이 하는 짓 치고는 굉장히 문란해 보이지만, 한 번 장거리 이동을 떠나면 목적지까지 몇 달 이상은 기본이었던 게 전근대였고 성욕은 아무나 무시 못 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에 이런 경우도 있었다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당장 인구 밀도가 매우 낮고 이웃집은 커녕 넓게 펼쳐진 땅만 천지인 곳에서 사는 유목민족 같은 경우는 길가던 나그네에게 집주인이 여종도 아니고 자신의 아내를 하룻밤 상대로 붙여주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현대의 기준으로 문란하다고 할 것은 못 되는 게 상술했던 열악한 지형적 환경으로 인구 보존이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택한 종족 보전법이다. 유목민족이 아니더라도 옛날에 자기 하인이나 아내를 손님의 잠자리 상대로 한 사례는 찾아보면 생각보다 전 세계적으로 많다.[14] 밤이 되면 산짐승들에게 당해도 아무도 모르는 암흑천지가 되는 시대였으니 이런 마인드가 퍼질 만도 했다.[15] 통념과는 달리 조선의 양반은 서양의 귀족처럼 단순히 혈통으로만 세습되는 관직이 아니었다. 부모가 양반이라고 해도 자식이 스스로 관직을 얻지 못 하면 그냥 일반인이 되는, 현대의 공무원과 가까운 제도였다. 물론 어느 나라나 부의 대물림은 있었기에 부모가 양반이라면 자식이 평민 가정의 자식처럼 농사일 하느라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불상사는 없을테니 양반 부모 밑에서 공부를 해서 스스로도 양반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렇기 때문에 양반조차 재산 관리는 쉽지 않았으며 이 점 때문에 이방인을 극진히 대접하여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다.[16] 물론 이러한 것을 일본의 일반 서민들이 얼마나 사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17] 당시 왕족 및 고위 양반 계층들은 밀랍을 이용한 양초참기름을 조명으로 사용하였다.[18] 물론 양반층이 머무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높으신 분들은 대개 관청이나 동네 유지가 알아서 모셔가곤 했다.[19] 다만 주막 주인들의 전국적 조직 규모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입증된 내용은 아니다. 외국인의 기록에서만 한 번 나올 뿐, 다른 기록에서는 이러한 교차검증 내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