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蘇塗, 삼한 시대 무속신앙 성역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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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한국사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무렵 삼한에서는 각 나라마다 별도로 읍(邑)을 세워 제사를 올릴 장소를 선정하는데, 이 장소를 소도 또는 별읍(別邑)이라고 한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았다고 전한다. 헌데 이 소도는 성역이었기 때문에 당시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범죄자들이 도피하기 딱 좋았는데, 범죄자들이 피해 살다보니 도적질이 성행하는 병폐도 생겼다. 어떻게 보면 격리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한반도의 사회 구조가 고조선의 제정일치 사회에서 제정분리 사회로 넘어갔다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성역에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공권력자가 종교를, 종교권력자가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공권력자가 종교 지도자를 겸하는 제정일치 사회라면, 당연히 성역인 소도에서 범죄자를 끌어내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 소도에 사람이든 범죄자이든 받아들이는 것도 쫓아내는 것도 종교 지도자의 권한이었고, 공권력자가 종교 지도자가 되면 당연히 공권력을 투입할 것이기 때문.
당시 마한 54개국 가운데에는 신소도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여기서 신(臣)은 크다는 뜻의 접두사로 추정되므로[1] 가장 영향력이 큰 소도가 위치한 종교적인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당시에는 백제가 해당 문화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최치원이 893년 작성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비문에 의거한 것으로, 최치원은 백제의 소도 풍습이 마치 중국 전한의 한무제가 흉노로부터 노획해 온 제사용 금인(金人)을 감천궁(甘泉宮)에 봉안해 제사지냈던 일과 같다고 평가했다.
사실 소도처럼 성역에 범죄자가 들어가면 못 잡는 풍습은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삼한만의 일은 아니었고, 거의 모든 종교기관이 다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죄수라도 신전에 들어가면 함부로 끌어내지 못했는데, 이 당시 정적에게 쫓긴 정치인이 신전으로 도망가서 나올 생각을 안 하자, 빡친 상대 측이 신전의 창문과 출입문을 막아버렸다. 결국 도망친 정치인은 신전 안에서 굶어 죽었다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 있던 도피성과 유사한 면이 있다.[2] 또한, 중세 도시의 교회, 묘지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교회 입구에 쇠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이걸 잡고 있으면 도둑놈이라도 체포하지 못했다고. 또 묘지 역시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해서 도적들의 은신처가 되곤 했다고 한다.
현대에도 종교 기관이 소도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독재 시절 시위대의 피난지와 은신처가 되었던 명동성당이 대표적. 개신교의 종로5가 기독교회관이나 향린교회, 불교계의 조계사 역시 그러한데, 과거와 달리 이곳 종교인들은 시위대 측이 너무 막 나가면 퇴거를 요청한다. 실제 시위대가 오물과 쓰레기를 아무 데나 내버렸다가 명동성당에서 한동안 입장을 거부하기도 했고,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당시 집시법 위반으로 수배되었던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도 조계사 측에서 퇴거를 요청하자 팬티만 입고(...) 버티며 불응하다 결국은 조계종 당국과의 합의에 따라 퇴거하여 남대문 경찰서로 자진 출두하였다.
또 종교 기관과는 상관없이 치외법권인 시설로 대학이 있다. 중세 때 대학은 대표적인 치외법권 지대로, 영주나 도시 지도부가 함부로 간섭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술 먹고 깽판 부렸다고 잡아 가뒀다가 대학 지도부 측에 무릎 꿇고 사죄한 일도 있다. 이 시기 대학은 신학과 관련해서 종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역시 면책 특권이 있었던 것. 일례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학생 감옥'이란 시설이 남아있으며 대학자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 개량형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대학 구내에서였다.
참고로 이런 대학자치의 특권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 역시 과거 독재 정권 당시 수사관들이 함부로 대학 구내에 진입하지 못해[3] 프락치를 심어두는 방식으로 운동권 지도부를 감시했다. 실제 80년대~90년대 정부 당국으로부터 수배를 당했던 운동권 인사들은 민주 정부가 출범하고 사면을 받을 때까지 10년 넘게 대학 구내에 은신했다.[4]
현재 무속신앙의 중심지인 서낭당의 기원이 바로 이 소도라고 여겨지는데, 조선 시대부터 추정되어 온 나름 역사가 깊은 학설이다.
2. 대한민국의 음악 커뮤니티
자세한 내용은 소도(커뮤니티) 문서 참고하십시오.3. 대중매체
3.1. 베이블레이드의 등장인물 소도 형제
자세한 내용은 소도 단·레이키 문서 참고하십시오.3.2. 포켓몬스터소드실드 등장인물
자세한 내용은 소도&실디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에티오피아의 도시 월라이타 소도
자세한 내용은 월라이타 소도 문서 참고하십시오.[1] 삼한의 군장 호칭인 신지뿐만 아니라 삼한에서 세력이 컸던 것으로 기록된 신분활국과 신운신국에도 같은 접두사가 붙었다. Schuessler (2007)에 따르면 2~3세기 당시 한자 신(臣)의 발음은 /*gin/으로 재구되기 때문에, 이후 6세기 백제에서 사용된 왕호 '건길지'와 신라에서 왕성(王城)을 부르는 명칭 '건모라'의 '건(健)'과도 연관지어볼 수 있다.[2] 엄밀히 말하면, 도피성은 구약의 율법 중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들을 위한 피난처다.[3] 정확히 말하자면 박정희 정부 초기에는 들락날락했지만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4.19 혁명의 주역이 학생이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거니와 유신정권으로 흑화하기 전에는 학내 운동권들도 박 정부와 사생결단을 내려고 들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유신 이후로는 정부도 운동권도 다들 격렬하게 싸웠다.[4] 의외로 수배 자체는 1990년대까지도 존재했다. 한총련이 불법단체로 규정되면서 김영삼 정부가 수배령을 때렸기 때문. 19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는 대부분 노태우~김영삼 시기에 수배가 풀리며 복학했다. 봉준호 감독이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연세춘추에 실은 만화에 보면 그 당시 민주화 운동 복학생 얘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