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2:29:17

건마국

마한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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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 건마국
乾馬國
BC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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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山州 金馬渚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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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주 금마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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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전주목
함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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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
전라도 전주목
용안현

全州 臨陂郡 龍安縣
1321
조선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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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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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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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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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4
전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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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전주부
전주군

全州府 全州郡
1895
전주부
여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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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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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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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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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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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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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G는 금마 일대 (現 금마면, 춘포면, 왕궁면 서부), O는 옥야 일대 (現 이리(시내 동지역), 오산면)
Y는 여량 일대 (現 여산면), N은 낭산 일대 (現 낭산면, 망성면)
H는 함열 일대 (現 함열읍,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 황등면, 삼기면), A는 용안 일대 (現 용안면, 용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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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마한 맹주국 시기2.2. 목지국의 주도권 아래 있었던 시기2.3. 백제국에게 병합되어 가는 시기2.4. 후일담
3. 관련 문서4. 연구

1. 개요

乾馬國

파일:baekje_map_ge.jpg

삼한시대 마한의 국가.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 있었고, 마한의 주도권이 목지국에게 넘어가기 전에는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는 후삼국시대까지 익산 지역에 전해지던 전승 그리고 고조선 준왕이 남하했던 지역의 소국이란 전승[1], 21세기 들어 익산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성과 등으로 뒷받침된다. 사실 음운적으로만 봐도 '건'(乾)과 '한'(韓)의 발음은 중고한어 기준[2]으로 *gan으로 같으므로, '건마'(乾馬)와 '한마'(韓馬)가 동일한 것을 뜻하는 단어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편 서동요의 실제 배경이 되는 곳으로도 추정된다.[3]

2. 역사

2.1. 마한 맹주국 시기

묘제나 부장 유물에선 전북 서부의 미륵산에서 모악산에 이르는 널따란 평야 지대인 익산 팔봉동, 신동리, 평장리, 다송리, 오룡리, 완주 갈동, 전주 여의동, 중화산동, 중인동 등등에서 갑자기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철기 문화 유입이 관찰된다. 완주 갈동 유적의 절대 연대 편년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250년 상한으로 하여 중심연대는 기원전 190년이 되는데, 물론 갑자기 세형동검 등을 비롯한 각종 청동제 유물도 등장하며 상당히 대규모 인원이 이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각 주거지가 따로 놀지 않고 위계 관계가 아예 처음부터 군집내 위계질서마저 확고하게 관찰되는 것으로 보면, 이는 바로 고조선의 준왕 집단이 지금의 익산을 중심으로 전주, 완주를 포함한 전북 서부 일대에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전승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준왕 집단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와서 건마국을 세운 건 아니었다. 해당 지역에는 토착계격인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을 비롯해서, 준왕 이전에 이미 기원전 4~3세기경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정벌 당시 이 지역에 내려와 있었던 조선계 유민들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족으로, 고고학적으로는 오늘날 경주 일대에도 조선계 집단이 이주했던 걸로 보인다. 이들도 연과의 전쟁 이후 내려온 고조선 집단, 한씨조선이 망할 무렵 내려온 집단, 위만조선이 망할 때 내려온 집단 세 부류가 주 루트로, 기원후 2세기 초중반 내려온 박혁거세 낙랑계 집단 아래 2세기 후반에 하나로 통합되기 전까지 서로 대등하게 병립하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4] 다만 꽤 대규모로 내려와서 나타나자마자 주변 집단들을 제압한 준왕 집단과는 달리, 비슷한 시기에 남하해서 서라벌에 정착한 이 한씨조선 집단은 이전에 먼저 내려온 고조선 유민 등 기존 세력과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태를 이룬 채 병립했던 게 두드러지는 차이다. 이들이 익산 건마국 준왕 집단과 어떤 연락을 유지했는지,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이때 전북 서부 일대에 있던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은 훗날 전남 남서부 침미다례가 될 지역과 일본으로도 빠져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건마국 주도 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어느 정도 이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시간이 흘러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 경 위만조선에서 다시 한번 한반도로 대규모 유민이 내려오게 되는데, 기이하게도 이들은 건마국이 아닌[5] 더 먼 침미다례와 훗날 신라가 될 사로국 쪽으로 주로 이주한 듯하다. 사로국으로 이주한 집단은 소위 서라벌 6부 집단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며, 침미다례로 이주한 집단은 선진 문물과 조직력을 기반으로 기존 침미다례 세력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된다.

2.2. 목지국의 주도권 아래 있었던 시기

일단 적어도 BC 194년 위만조선 성립 당시에는 건마국이 마한의 맹주국이었음이 유력하다. 하지만 백제가 막 고대국가로 발돋움해서 낙랑군을 긴장하게 만드는 3세기 중반 시기엔 수장국 지위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를 중심으로 했던 목지국에게 빼앗긴 상태였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건마국의 준왕 직계 집단이 얼마 못가, 훗날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하는 주구묘제 및 토돈분구묘제 집단[6]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으로 고고학적으론 분석된다.

역시 이 또한 준왕 집안의 대가 끊겨 마한 수장이 준왕의 혈맥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삼국지》 <위지>의 기록과 묘하게 일치한다. 다만 건마국 내부에서 조선계 집단이 멸절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준왕 일가 자체는 정말로 후손이 궁해서 대가 끊겼을 수는 있지만, 여타 왕족인 친척들을 비롯해 고조선계 집단 전체의 후손이 절멸되지는 않았다. 《후한서》기록은 건마국 내부 주도 집단이 준왕계가 아닌 다른 집단이 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상술했듯 고고학적으로는 준왕 집단이 건마국을 지배했을 당시엔 피지배 집단에 불과했던 집안들이, 2세기에는 건마국의 지배 집단이 되었던 현상이 후한서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본 문서에 나오는 여타 고조선계 세력들은 여전히 잔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건마국을 흔들 기회를 포착한 백제 부여씨 왕실로부터 꽤 대우를 받았던 걸로 보인다. 즉 건마국의 수장이 더 이상 준왕 집단 혹은 준왕과 관련있는 고조선 직계 집단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던 사실, 천안 청당동 목지국이 적어도 묘제로만 봐선 준왕 집단과 훨씬 더 가까운데다 낙랑군과 거래할 때의 입지도 유리했던 사실, 기원전 1세기부터 전한이 마한의 성장을 경계해 철 공급 및 철기 기술 유출을 마한한테만 통제해 진변한 일대가 오히려 철 제작 관련 기술은 마한을 능가하게 되는데 건마국이 주도하던 마한은 마땅히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했던 상황 등을 이유로, 다른 마한 및 삼한 거수국들에 대한 권위 및 실력에서 목지국에게 밀려 수장국 지위를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7]

하지만 역사학자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 기원후 1~2세기 시기에 해당하는 이렇다할 마땅한 유적이 발굴되지 않는 것이다. 아직 발굴을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있는데 미처 발굴하기 전에 개발해서 죄다 부서진 건지, 다른 시기의 유적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파괴된 것인지, 혹은 정말로 어떤 사건으로 그 일대에 사람이 살지 않아 그렇게 된 건진 아무도 모른다. 기원후 3세기 시기부터는 번영하는 걸로 드러나긴 하는데 이 시기 즈음이면 이미 목지국의 시대다. 백제국과 목지국 사이에 있었던 일은 문헌 및 고고학적 사료로 이제 그 전모가 거진 드러난 편이지만, 건마국과 목지국 사이에 도대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진 모두 추측의 영역이다.

온조왕 때 마한 기습 정벌 기사를 근거로 건마국 또한 기원후 1세기경(《삼국사기》 기록을 인용할 경우 서기 9년) 한성백제의 급습으로 멸망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는데 문헌상 근거가 부실한 것은 물론이고 고고학적으로도 부정된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그 시기는 고구려계 유이민 정착이 한강 유역은 고사하고 임진강 유역에서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풍납토성이 될 곳은 토착민인 낙랑계 유이민 세력이 겨우 3중 환호나 세운 조촐한 깡촌으로서 국력이 바로 주변에 있는 세력들보다 훨씬 딸렸던 것도 눈 여겨볼 사실이다. 애초에 이 문서에서 다루는 준왕 집단 남하와 건마국 수립 관련 내용, 건마국과 백제국 사이 관계 등은 준왕 집단 남하만 그나마 문헌 근거가 있지, 그 외에는 거진 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해 드러난 내용이다. 때문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극초기 기사는 여기에 개입될 여지가 적다.[8]

2.3. 백제국에게 병합되어 가는 시기

목지국백제 고이왕 혹은 책계왕의 급습으로 3세기 후반에 수장 자격을 부정당한 이후에도 목지국이 위치한 충청도 북부는 그렇게 순순히 백제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았고, 현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를 중심으로 했던 신월리 집단이 이끄는 침미다례 또한 마한 신미국을 자처하면서 백제국의 후기 마한 영도국 자격을 부정했다. 백제는 3세기 후반에 천안 일대를 장악하지만 충청도 일대의 다른 마한 거수국들의 저항을 무마하는 건 4세기 중반까지 무려 한 세대에서 반세기가 걸렸고[9] 침미다례와 협상을 완전히 마무리짓는 건 무려 6세기 초반에야 이뤄졌다.

하지만 건마국은 마한 일대의 이 급격한 변화 과정에서 딱히 뭘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고학적으로는 건마국 및 건마국의 세력이 미치는 전북 서부 일대는 늦어도 4세기 전반에 백제의 세력권이 된 게 분명하다. 또한 백제와 상당한 마찰을 빚었던 게 분명한 충청도 목지국 친위 세력 및 침미다례 일부 세력과는 달리 거수국 세력들의 인위적 해체가 짐작되는 사례가 전혀 발견되지 않아, 적어도 전북 서부 건마국 잔여 세력은 다른 마한 내부 세력들보다 처음부터 백제 왕실과 대단히 관계가 협조적이고 우호적이었다고 볼 수는 있다. 이는 역시 백제의 건국 사화에서 나오듯 애초부터 한성백제 건국과 확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서부 해양 세력과 비슷한 사례다.

아무래도 건마국 입장에서 목지국은 마한 그리고 삼한의 수장 자리를 빼앗아간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딱히 무리하게 마한 내부 신흥 강자 백제국의 비위를 거슬러가면서까지 목지국의 편을 들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 같은 마한이라는 이유로 자주 묶이는 침미다례와의 관계를 보면, 이 시기 건마국은 묘제나 문화 조합으로만 보면 영산강 유역의 침미다례(신미국)와 공통점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토착민계 토돈분구묘, 주구묘, 그리고 고조선계 토광묘제[10]의 조합. 그러나 주도 집단과 조선계 유민의 상황은 매우 달랐음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건마국 주도 집단은 적어도 그 시기엔 토돈분구묘 및 주구묘 집단이었던 반면, 침미다례의 주도 집단은 위만조선계 집단이었고, 상술했듯 건마국의 조선계 집단은 대부분 준왕 망명 때 내려온 집단인 반면 침미다례의 조선계 집단은 위만조선이 망할 때 내려온 집단이었다. 즉 주도 집단이 달랐던 데다, 서로 얽힌 이런저런 역사적 사정으로 연합이나 제휴가 대단히 어려웠다는 얘기다.

게다가 건마국 일대는 백제와의 거리 또한 침마다례보다는 훨씬 가까웠기에 백제에 대한 태도는 침미다례와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목지국은 옛 제후국인 백제국 밑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 당시엔 더 이상 마한 수장국도 아니었고 백제국을 휘하에 거느려본 적도 없는 건마국 입장에선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였으며, 침미다례는 무역로상 이권이나 해로 장악 등등으로 백제에게 빼앗길 게 많았으나 이 또한 건마국 입장에선 남의 얘기에 불과했다.

때문에 건마국은 근초고왕 시기에도 공납 및 간접적 관리에 그쳤고 개로왕대의 한성 공함 이후엔 아예 잠깐 따로 독립까지 했던 걸로 추정되는 침미다례 일대와는 달리, 비류왕 시기부터 이미 간접 지배 상태에 들어갔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한성백제는 건마국 해체에 대해 진지하게 구상하는 단계에서부터 건마국 내부에 아직 남아있던 옛 고조선 직계 집단들에게 주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준왕 집단과 같은 고조선계 토광묘제 집단이었던 익산시 입점리 및 웅포리 세력을 지원하여 건마국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금동관을 비롯한 위세품이 유독 건마국 내 비주류 집단인 옛 준왕계에게만 나타나고 있는 게 그 증거. 이는 백제가 목지국 및 침미다례에게 써먹었던 그 수법 그대로였다. 백제는 목지국 방계 세력이었던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용원리 세력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본류였던 청당동 세력을 견제하여 결국 목지국을 완전 해체했던 바 있었다. 마찬가지로 역시 침미다례의 두 주축 중 하나였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다른 한 축인 신월리 세력은 저항이 막심했던 모양인지 아예 무력으로 초토화시켜버렸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세력을 지원하여 결국은 침미다례 또한 목지국에 비해 시간은 더 오래 걸렸을망정 이런 이이제이 수법으로 완전 해체 후 직할지로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그전까진 침미다례 일대와 같은 문화권이었으나 그 내부에서는 언더독에 불과했던 광주 주변 전남 내륙 세력을 적극 지원한 후 친백제화하여, 침미다례로부터 떼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고창 일대를 비롯한 전북 서남부 해안 일대도 본디는 침미다례와 같은 문화권이었으나 비슷한 이유로 보다 빨리 백제화를 겪었기에, 침미다례는 근초고왕 정벌 이전과 상황을 비교해본다면 자치권을 제약당해 간접 지배 지역이 되고 무역 이권을 빼앗기는 것에 더해, 고창과 광주 일대를 잃어버린 게 된다.

다만 건마국에 대해선, 주류와 대립 관계에 있는 비주류 세력을 우선 지원하여 내분을 일으킨 다음 양쪽 다 제압한다는 패턴 자체는 거의 같지만 내용은 약간 달랐다. 목지국 청당동 세력은 이런 견제와 푸대접을 참다못했는지 반항을 멈추지 않다가 비류왕 시기인 4세기 중반에 궤멸당했고, 충청도 일대는 반항을 멈추지 않다가 완전 해체당한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추정되는 거수국들이 적어도 너덧 군데는 있다. 물론 침미다례에서도 백제가 이를 악물고 응징한 탓에 고고학적으로 갑작스럽게 존재가 사라지는 소국이 두 군데나 있다. 하나는 근초고왕 때 해남 신월리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동성왕 때 해남 군곡리[11] 세력이다. 한편 백제에게 항복을 선택한 걸로 추정되는 침미다례 시종면 세력은 목지국의 청당동 세력과는 달리 박한 대우를 꽤나 잘 참은 편이었지만 반남면 세력에 비해 낮은 대우를, 538년에 백제가 그 일대를 직접 지배할 때까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우대받은 반남면 세력마저 한성 공함 후 가야나 왜에 다리를 걸쳐대며 은근슬쩍 독립을 시도한 것이 백제 왕실을 분노하게 한 탓에, 직접 지배기에 들어가자 군에서 현으로 강등당하는 응징성 조치를 받으면서 백제 왕실의 가까운 파트너 지위를 복암리 세력에게 빼앗기게 된다.

한편 이런 우여곡절들이 드러나는 다른 마한 세력들과는 대조적으로, 건마국이 소재했던 익산 일대는 입점리 세력이든 웅포리 세력이든 그 외 여타 세력이든 꽤 대우받은 편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준왕 집단 방계인 입점리나 웅포리 세력이 꽤 일찍부터 지속적으로 백제 왕실에게 충성했고 한성 공함 이후에도 백제에게서 이탈하지 않았던 이유에서인지 좀 더 대우받았다는 것. 자치력은 전남 일대와는 달리 이미 근초고왕 대부터 박탈당해가는 단계였지만 대우가 좋았기 때문인지 딱히 백제 부여씨 왕실에게 불만을 품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2.4. 후일담

건마국 일대는 5세기 후반 백제 동성왕 시기에 담로 지역으로 편성되면서 백제의 직접 지배지로 편성된다. 이후 옛 건마국 지역은 무왕(백제) 시기에 이르러 백제의 제2수도권으로 개편되며 한 단계 더 발돋움하게 된다.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익산에서 발견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이후 전개는 익산시/역사 참조. 다만 흥미롭게도 무왕 당시 백제 부수도[12]가 운영되었고 지원도 더욱 많이 받았던 지역은 그간 건마국 비주류 준왕 잔여 세력에 비해선 아무래도 찬밥이었던 익산 동부 내륙 건마국 주류 세력의 세력권인데, 침미다례 또한 정작 직접 지배지 편성 과정에선 그전까진 일관되게 찬밥이었던 영암군 시종면 세력이 더욱 우대받았던 패턴과 역시 일치한다. 다만 아무래도 무왕이 어린 시절 자랐던 고향 자체가 건마국 주류 세력의 근거지였을 개연성도 제기된다.

한편 백제부흥운동기 일본으로 이주한 장수인 답본춘초(答㶱春初)[13]가 준왕의 후손이었단 기록이 《신찬성씨록》에 있다. 특이한 게 '백제국 조선왕 준'의 후손이라 하여 조선왕이 백제에 종속되었던 듯한 모양새로 적혀 있다. 이후 자손 혹은 친척으로 보이는 답본양춘(答本陽春)이 724년 아사다노무라지(麻田連)씨[14]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3. 관련 문서

4. 연구

  • 김정배 著 고려대학교출판부 출간 한국고대의 국가의 형성과 기원
  • 노중국 著 마한백제문화 제10권 기고분 마한의 성립과 변천
  • 문안식 著 호남인의 기원과 문화원형
  • 국립전주박물관,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著 익산, 마한.백제연구의 새로운 중심
  • 김진영 著 영산강유역 마한 형성과정 연구
  • 한성백제박물관 著 백제학연구총서 제4권 백제의 왕권은 어떻게 강화되었는가

[1] 현지에서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전북 부안군 해변가에 도착한 뒤 내륙으로 이동해 현 금마면 일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항은 제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간 백제의 기원과 건국 제220쪽 참조)에 실려 있다.[2] 후한서는 남북조시대 유송에서 편찬된 서적으로, 당시 중국어는 이미 중고한어에 훨씬 가까운 동한어(Eastern Han Chinese) 또는 만기상고한어#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이때도 둘 모두 -n이 -l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서동요의 실제 모델로 추정되기도 하는 무왕이 어린 시절 건마국 지역에서 자란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쌍릉왕궁리 유적도 익산에 있다.[4] 문헌적으로는 박혁거세가 세운 사로국 이전에 이 일대에 이미 고조선 유민 출신들로 이뤄진 6촌이 있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위만조선이 망할 무렵 내려온 역계경 집단 이야기 정도가 전해진다.[5] 위만조선이나 한씨조선이나 시기는 달라도 출발한 곳은 같은 만큼, 어째서 건마국이 위치한 전북 서부 일대에는 위만조선인들이 별로 정착하지 못했는지는 의문인데, 생각할법한 이유는 준왕 집단이 위만 조선에 대해 여전히 감정이 좋지 못했을 가능성 외엔 사실 없지만, 문헌 사료가 없으니 그저 추정의 영역으로 남아있다.[6]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에서 주로 번영했던 토착집단. 고구려 유이민이 오기 이전 한성백제 및 영산강 유역 집단의 기반 세력이기도 하다.[7] 실은 목지국도 중원 정권의 이런 마한 견제 및 진변한 편애 행태를 근본적으로 고치진 못했으나, 기원후 2세기 후한-동연-조위 정권은 전한같이 빡빡하진 않았기에 건마국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게다가 목지국은 건마국과는 달리 대놓고 조위 정권에게 무시받자 신분고국과 힘을 합쳐 정면 도전이라도 감행은 했다. 비록 패배해서 백제 좋은 일만 시켜주긴 하였으나.....[8] 상술했듯 기원후 1세기경에는 서울은 고사하고 경기도 안에서 부여 혹은 고구려인 관련 고고학적 자료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온조왕이든 백제든 그 당시에 한성은 고사하고 경기 지역에 있지도 않았던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삼국지 마한 관련 내용과 삼국사기 기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며, 학자들 대부분은 기년은 교차검증이 가능한 삼국지를 신뢰하면서 삼국사기 기록 내용을 그 기년에 맞춰 분해하며 이해하고 있다.[9] 그 마지막 단계가 바로 천안 청당동 목지국 잔여 세력의 완전 초토화 및 해체였다.[10] 단, 상술했듯 침미다례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위만조선 출신인 반면 건마국에서는 위만조선계 유이민들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매우 묘한 상황이다.[11] 다름아닌 바로 그 신미국이다. 근초고왕 정벌 당시에는 해남 신월리, 영암 시종면 두 거수국에게 주도권을 내준 상태였으나 동성왕 때까지는 존재를 유지했는데, 동성왕 시기에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12] 백제 수도 6부 중 별부가 익산에 설치되었다. 물론 나머지 다섯 부는 사비에 소재했다.[13] 관등은 2위인 달솔, 병법에 능했다고 한다.[14] 정확히는 '아사다'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氏), '무라지'가 가문의 격을 나타내는 '카바네'(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