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4 17:38:00

낙랑군

한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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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기원전 108 ~ 기원전 82 진번군 임둔군 *
기원전 82 ~ 기원전 75 낙랑군
기원전 75 ~ 1세기 현도군
(흥경으로 이현)
1세기 ~ 204 (무순으로 이현)
204 ~ 313 대방군**
313 ~ 404 (요서로 이현) (요서로 이현)
*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음.
** 대방군은 314년 한반도에서 축출되었음.


파일:attachment/proto_three.jpg

1. 개요2. 역사
2.1. 멸망 이후
3. 313년 이후의 낙랑군
3.1. 낙랑군의 교치3.2. 고구려의 舊 낙랑군 지역(평양지역) 지배
4. 유적과 유물
4.1. 낙랑군 관련 유물4.2. 낙랑군 관련 고분 자료
5. 낙랑과 관련된 연구와 주장6. 낙랑군 한반도설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
6.1. 이덕일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7. 역사 왜곡 : 낙랑군 평양설 식민사관설8. 미디어에서의 등장9. 관련 문서

1. 개요

樂浪郡 / 낙랑군

한나라의 옛 군현으로 기원전 108년 한나라고조선(위만조선)을 1년간의 전쟁 끝에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이다. 위치는 지금의 대동강 일대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원래는 한나라 출신과 고조선 출신이 구별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아예 낙랑군 출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초기 낙랑군의 상황은 일단 한서 지리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조선 지역의 관습법 혹은 자체적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관리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에는 한의 법률을 시행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인 죽간들이 발굴되면서 '시도는 했다'는 정도로 정리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몰입(沒入)하여[1]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자, 급기야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한사군의 다른 군현은 임둔(위치 때문에 골치 아픔), 진번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고구려현의 반발로 후퇴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낙랑은 이 폐지된 군의 관할 구역 중 관리할 여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흡수하면서 한때 인구가 40만이 넘는 성대를 누렸다. 이 때 낙랑은 25개 현을 산하에 두고 함경남도 ~ 강원도 방향의 옛 임둔군 지역인 '영동 7현' 지역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방향의 옛 진번군 지역에는 남부도위를 두었는데 이는 이민족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보인다. 도위가 설치된 지역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았다.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은 되도록이면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현지에 적응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형 동검 문화가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평양 정백동 고분군의 '부조예군', '부조장인' 등의 인장이 발견된 점 등으로 유추한 것이다. 또한 삼한의 군장으로 추정되는 염사치의 귀화 시도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나 멀리 있는 진한이 협박에 데꿀멍하는 기록, 초기 백제신라가 낙랑에게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기록 등을 통해 보아 주변국과의 관계 또한 낙랑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보인다.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 삼한, 등의 사이에서 동방의 외교 창구가 되었고, 주변국에 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을 전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변국의 유력층에게는 낙랑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묘제로는 덧널무덤이 나타난다.

이러한 부를 기반으로 전한 - 신나라 - 후한의 교체기로 중국 대륙이 혼란했던 서기 25년에 토인(土人, 고조선계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王調)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 사실상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서기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 왕조가 세운 독립 낙랑은 마침 내분이 일어나 군삼로 왕굉(王閎)이 결조사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살해하고 왕준을 맞이해 5년만에 싱겁게 멸망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32년 경 등장하여 37년 경 멸망하는 최씨낙랑국도 낙랑군과 같은 지역 혹은 낙랑군의 일부 지역이 독립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2] 이것이 맞다면 이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 혼란기에 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광무제가 44년에 살수(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되어 있어 다소의 혼란은 있다. 어쨌건 이 때 도위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광무제의 일관적인 정책이기도 했지만 동부도위 지역, 즉 영동의 7현이 버려졌다. 아마도 고구려와 같은 이민족의 성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세기 중반까지 낙랑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해진다. 부여의 111년 침공 기록이 있지만, 그것을 딱히 쇠퇴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수의 인구가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한 군현 공격이 두드러지는 등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요동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삼한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전하는 등 다시 재건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북방에 대한 견제는 어려워졌는지, 낙랑군은 황해도에 대방군을 건설(남부도위가 위치하던 지역)하면서 중심축을 남쪽으로 돌린다.

요동 공손씨는 조조가 낙랑태수로 보낸 양무를 억류하는 등 낙랑을 자기 세력권에 두고 있었지만, 3세기 중엽에는 위나라사마의공손연의 요동을 공격, 멸망시키고 관할 지역을 수복하였다. 낙랑도 유주자사 관구검의 관할에 들어갔는데, 이 시기 고구려는 위나라와 싸웠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대차게 깨져 300년경까지는 더 이상 세력확장을 하지 못했고, 낙랑 · 대방군이 삼한 8국의 영유권을 주장한 데 대해 마한 세력[3]이 반발하여 군현을 공격했으나 역관광 루트를 타고 망했다. 백제도 여기에 얽힌 것 같긴 한데, 포로를 잡았다가 돌려주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어서 마한이 움직이는 통에 숟가락 얹은 정도라는 것이 중론. 대방군고이왕 항목 참조. 하여튼 낙랑군은 이 때 주변국에 제대로 힘을 썼고, 주위의 소국들이 줄줄히 항복, 복속하는 상황에서 고이왕도 혼인 관계를 맺고 책계왕 때는 왕을 죽이고 분서왕 때 크게 한방 얻어맞았지만 얼마 안가 분서왕도 죽이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4]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중국과 교통이 재개된 것도 무색하게, 위(삼국시대)를 뒤엎고 건국된 서진은 27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주 동이교위에 소속시키며 적극적으로 동방에 개입하려 했다. 동이교위가 동방 정책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 대방, 현도는 점점 세력이 쇠퇴해 가며, 그 사례로 한반도 남부의 마한진한은 더이상 과거처럼 한사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하지 않고 270년대부터는 마한과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본토의 서진에 직접 나아가 통교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진의 삼국통일 이후 팔왕의 난영가의 난, 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290~300년대경부터 한사군과 중국 본토 본국과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다시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위나라에 패했던 피해를 수습한 고구려는 다시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끝내 미천왕이 이를 수복했다. 서안평은 현재의 단동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압록강 건너편이 신의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공략이 힘든 곳이다. 굉장한 백제의 분서왕이 낙랑을 공격했다가 암살당하는 등 과거 삼한 지역 또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미천왕 대인 313년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1년뒤인 314년에는 대방군 또한 멸망시켜 한반도의 한사군 축출을 완료했다.

2.1. 멸망 이후

고구려의 정복 직전에 탈출한 1,000여가의 낙랑인 세력은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이 모용씨 연나라 치하에서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 복원을 시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나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5]

한편 고구려가 정복한 옛 낙랑군 땅에 남아있는 낙랑 유민도 많았고, 물론 낙랑군이 군사적으로 무너졌다고 해서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2세기 ~ 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 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문화의 침투를 동반한 것이었고, 광개토대왕 대 남부 7성의 건립이나 평양 지역 9개 사찰의 건립 등 정지 작업을 기반으로 장수왕 때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참고로 서구 학계에서는 이 313년을 한국사의 시작, 즉 구체적 국가가 등장한 시점이라 보기도 한다는 견해가 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학계에서의 국가라는 개념은 굉장히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학계에서 다루는 국가의 개념은 사실 아직도 완벽한 정의가 되지 않았다.

고조선이나 초기부여, 삼한 등은 분명 일반적 명사로써 국가는 맞지만 그렇다고해서 중앙집권적 체계나 분명한 영토선을 갖는 일정한 체계와 기록체계를 갖춘 국가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서구학계의 국가의 시작이라는 논의에서의 '국가'는 예시처럼 학술적 차원에서의 국가의 정의일 뿐 결코 한국사의 시작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몽골을 보더라도 중세까지도 씨족, 부족사회였지만 그들은 분명히 몽골이라는 부족 이상의 개념 속에서 공통성을 가졌다. 이들에 대한 정의는 분명 국가이지만서도 마냥 시스템을 갖춘 국가라고 쉽게 정의내리긴 어렵다.

사학계에서도 신화적인 설화를 바탕으로한 초기국가형태에서 탈피하여 부체제, 나부체제 체계를 갖춘 이후, 보다 완성된 국가적 단계로 진입한 것은 300년을 전후한 시점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고학계에서는 물질자료상의 국가형성에 대한 논의 속에서 BC100~AD300년의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는 시대를 정의하였으며, 이는 선사단계에서 역사단계로의 전이를 뜻하는 원사(原史)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구 학계에서 말했다는 한국사의 구체적 국가라는 표현은 이러한 맥락의 것이지 낙랑 이전의 고조선이나 부여, 초기고구려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족 개념으로 인정하는 것이지 국가라는 개념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에 바이킹족이나 게르만족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오래됐으나 게르만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는 프랑크 왕국이듯이, 고조선이나 부여등을 부족 개념으로 인정할뿐 국가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3. 313년 이후의 낙랑군

3.1. 낙랑군의 교치

낙랑군이 313년에 미천왕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낙랑군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존재했다. 물론 이 낙랑군은 평양에 있던 그 낙랑군과는 다르다.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멸망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에게로 갔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이전 시켰다. 이를 교치(僑置)라고 한다.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 그후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고 이때쯤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 대에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가 세운 기존의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요서 낙랑군에 대한 기록들을 기존의 낙랑군에 대한 기록인 듯이 왜곡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하기도 한다.

평양에 있던 낙랑군의 자체적인 정부는 멸망했지만 지역 자체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 평양성으로서 남았고, 이는 고려시대의 서경과 현재 북한의 수도 평양직할시로 이어진다. 현재 평양에서 낙랑군의 흔적은 락랑구역에 남아있다. 낙랑에서 이름을 따온 지명인데, 낙랑군 관련 유적이 많이 발굴되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다만 현재의 평양 중심부에서는 다소 떨어져 위치해있고, 또 바로 다음시대인 고구려의 안학궁 유적이 있는 대성구역은 정반대로 평양 동북쪽에 위치해있어 같은 평양이어도 두 유적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유적이 나온다고 해서 이곳이 과거 낙랑군의 중심지였다는 근거는 없지만.

3.2. 고구려의 舊 낙랑군 지역(평양지역) 지배

역사고고학적인 상황으로 볼 때 낙랑군은 3세기 후반을 즈음하여 낙랑이 향유해오던 전실묘 문화가 점차 중원과 분리되어 낙랑만의 형태로 변화하는 것이 간취된다. 원래는 흙을 구워 만든 벽돌[塼]로 만들던 무덤이 점차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드는 전석혼축분(塼石混築墳)으로 변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벽돌 자체의 소성도가 떨어지는 양상도 나타난다. 대방군이 재설치되는 3세기 중엽 언저리를 끝으로 한식(漢式) 유물의 부장량이 현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고고학적 정황이 역사적으로 마지막 불꽃을 살랐던 대방군의 재설치를 이후로 낙랑은 쇠퇴 일로를 걷는 것과 일치한다.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낙랑군은 분명 313년에 축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낙랑계 전실분들이 계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명한 낙랑계 전실분으로는 대방태수 장무이묘, 동리묘(영화9년명 고분)이 대표적이다. 다만 고분의 구조적 차원에서보면 전실분은 보통 궁륭형(아치형) 천장을 갖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313년 이후의 낙랑계 전실묘들은 궁륭형 천장이 아닌 석개(石蓋) 천장의 형태로 간략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3세기 말 경부터 나타나는 전석혼축분과 같은 맥락의 현상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전실묘라는 유형의 무덤은 사실 한반도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형태의 무덤이다. 중국의 중원지역에서는 큰 돌을 구하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돌보다는 흙을 구워서 만드는 전실계의 무덤들이 비단 1~4세기에만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는 묘제(墓制)이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쉽게 구할수 있는 자재이므로 돌로써 무덤 내부를 만드는 것이 흙을 구워만든 전(塼)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6]이 었기 때문에 특이한 사례를 제외하면 나타나지 않는다. 6세기에 형성되는 공주 무령왕릉이나 송산리 6호분의 사례가 있지만 모두 명백한 중국 남조 영향의 외래계 묘제로써 의도적인 수입일 뿐 재지적 집단에 의한 선택이나 자체적인 발전으로써 연속적 조영된 사례는 없다.[7]

즉 위와 같은 사실에 염두에 두고 본다면, 313년 낙랑이 철폐되면서 분명히 낙랑의 행정이나 일반 생활측면에서의 구심점은 사라졌지만 완전히 낙랑의 사회가 해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전실묘 계통의 무덤은 만들지만서도 313년의 사건으로 모종의 시스템이 와해된 점, 재지계 주민이 혼합된 사회구조였다는 점으로 인해서 평양 일대에 지속적으로 전석혼축분이라는 혼융된 형태로 계속 유지되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잔존 세력의 지속적 고분 축조 현상은 일견 313년 낙랑의 멸망이 사실인가에 대한 의문점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잔존한 낙랑계 전실묘 속에는 고구려가 313년 낙랑을 멸망시키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증대시켜간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다. 잘 알려진 것이 동리묘장무이묘, 그리고 낙랑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안악 3호분덕흥리 벽화분으로써 고구려 영향력의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다들 묵서명이나 명문전의 존재로 하여금 이름이나 관직명이 전해져 있는 묘주들과 서술된 직책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중원에서 고구려로 귀부하였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동리묘의 경우 대방태수한태수, 현도태수의 직을 가진 것으로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 한 태수(韓 太守)라는 군현과 직위는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것이다. 안악 3호분(357년)의 경우 다소 논란이 있지만 묘주는 후연(後燕)에서 투항한 동수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빼박 귀부한 이 동수의 길고긴 직책 명칭 가운데서 낙랑상(樂浪相)이라는 직책은 역시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직책이다. 대방태수 장무이의 경우에도 같은 맥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무이(撫夷)라는 이름 자체의 논란도 있다. 안악 3호분에서 동수의 직책 중에는 호무이교위(護撫東校尉)라는 직책 역시 중국에서 사용되지 않는 직책명이며, 무이가 나오기 때문에 장무이의 무이 또한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덕흥리 벽화분(409년)에서 보이는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서도 유주 예하의 무수한 태수들이 배알 또는 조회하는 벽화가 그려져있다. 여기서 나오는 태수들의 담당 군현 중에서 등장하는 요동군, 창려군,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서진(265~316) 이후로 쭉 평주로 이관되어 있었다. 즉 후한(25~219), 위(魏)(220~265) 대에나 유주였던 것을 5세기나 되었음에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주요 묵서명과 명문전의 내용을 통해 추론해보면 상기의 무덤들은 중원 본토에서의 책봉이 아닌 일종의 허봉(虛封)을 받을 셈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허봉의 주체는 자칭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주요 고분들에서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정황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증대된다는 점에서 그 주체는 고구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리묘(영화 9년)는 35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고구려의 귀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별것 아니지만 낙랑계 전축분에서 가장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빼박으로 고구려의 유물로 볼 수 있는 귀걸이가 확인된 사례이기 때문에 중요한 현상으로 주목하고 있다. 안악 3호분이야 거의 옮겨다 놓은 수준으로 중국계 가옥형 석실과 그것의 벽화구성이 동일한 형태이지만 덕흥리 벽화분의 경우 벽화의 표현이 점차 고구려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파일:황룡산성.jpg
안악군 옥도리에 소재한 고구려의 황룡산성 남쪽 전경과 성문

또 안악 3호분이 위치한 곳 안악군 일대에는 고고학 전공자들에게나 유명한 옥도리 벽화분과 용강대총, 쌍영총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옥도리 벽화분 또한 전실분으로써 낙랑계 전실묘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근데 이 옥도리 벽화분이 위치한 고분군의 배후 산지에는 황룡산성이라는 고구려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특히 고분군은 황룡산성의 동문 입구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따라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보면 황룡산성과 옥도리 고분군의 관계는 양자가 서로 인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황룡산성은 고구려에 의해서 축조된[8] 대규모 포곡식 산성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분명히 구 낙랑 지역이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9][10] 황룡산성은 특히나 광개토대왕 3년(394년)의 남쪽에 7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11]라는 기록과 부합하는 성곽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낙랑을 313년 축출한 뒤 고구려는 낙랑 잔여 세력을 활용, 통제하여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간접지배의 방식을 채택하였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러다가 직접통치가 관철되는 시점은 광개토대왕 대의 남부 7성의 건립을 기점으로 직접통치로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장수왕이 천도할 즈음에 들어서 직접통치가 관철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직접통치가 시작될 5세기 후반에 즈음하여서부터는 복잡한 계보를 갖는 중원계열의 무덤들의 축조가 중단되고 고구려 요소 일색의 단실계열 석실봉토분으로 변화한다.

또한 낙랑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은 지속적으로 외래계 고분이 축조되는 점은 고구려가 잔존한 일부 한인(漢人) 집단을 활용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항복한 한인들이 구 낙랑지역에 계속해서 배치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와중에 특기되는 현상이라면 평양지역 특히 지금의 락랑구역 자체에서의 313년 이전의 고분 축조활동에 이어지는 연속적 고분 축조는 사실상 없다시피 단절된다는 것이며, 대부분 황해남도 안악군 일대에서 축조된다는 점이 있다. 양자의 상관성이 다소 떨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어쨋거나 중원계 요소를 갖는 무덤들이 고구려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고구려가 황해도에 일대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의 통치체제를 일정 유지하다가 직접지배로 넘어간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4. 유적과 유물

4.1. 낙랑군 관련 유물

일반적으로 알려진 낙랑의 대표적인 유물은 이러하다.
  •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 신사비의 점제는 당시 낙랑군에 소속된 25개 현(縣) 가운데 하나이다.
  • 영광 3년명 동종(銅鍾) -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永光 3年銘 銅鍾'으로 검색하면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악기 종(鐘, 오른 쪽이 아이 동 童)이 아니라 술잔 종(鍾, 오른쪽이 무거울 중 重)을 쓴다. 기원전 41년의 유물로 효문제의 군국묘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효문제묘동종', '효문묘동종'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기원전 40년 군국묘 제사는 중단되었다. 한편 SBS에서는 해상도 차이가 나는 사진이나 다른 방향에서 찍은 사진 같은 것을 모아놓고 '사진마다 모양이 다르니 날조다!' 운운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관련 석, 박사의 의견은 듣지 않고 골동품 상인에게 검증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기타 부정론은 여기 참고.
  • 낙랑군 봉니 - 죽간 혹은 목간을 묶고 봉할 때 썼던 흙에 도장이 찍혀 굳은 것으로, 현재 약 200여 개 가량이 발굴되었다. 일부 조작된 유물이 있으나 많은 수는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환빠들은 일부 조작품을 근거로 전부 날조품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면 전례 없이 최초에 등장한 봉니는 왜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외에 봉니가 '편지'에 쓰이는 것이라며 낙랑군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낙랑군에 보내지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봉니는 단순한 문서 보관용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4.2. 낙랑군 관련 고분 자료

위의 유물들의 경우 정식 발굴조사말고도 지표채집된 경우도 많다. 특히 봉니같은 경우 지표상에 노출된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냥 빼애애앢! 조작이네!!!라고 말하며 안믿으려 하는 일부 세력에게는 봉니=조작의 1차원적 알고리즘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무덤, 특히 낙랑의 무덤은 지하식(반지하식)의 구조이기 때문에 이 무덤 자체를 조작하려했다면 AD 4세기 무덤을 만들던 당시 사람들처럼 엄청난 시스템을 갖추고 장기간 작업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걸리지 않을래야 안걸릴 수가 없다.

특히나 낙랑 고분군에는 저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무덤들이 많다. 평양 일대에 소재하는 이 고분자료와 그 출토품, 그리고 토성유적 등으로 인해서 평양이 낙랑군과 관련이 있음은 영원히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 알못인 요동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조작설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 그 몇가지 태클들은 평양 소재의 BC1세기~AD4세기의 문화적 요소들이 중원계(漢式) 유물과 묘제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죽은 자식 불알만지듯 식민사관, 미심쩍은 일제의 발굴 등으로 호도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북한 학계에서는 1990년대 이후부터 체고조넘의 교시에 의한 연구로 변질되었고, 그 이전에 낙랑군 평양설을 펼쳤던 도유호의 연구는 당연히 축출되었고 북한학계는 사실상 공식적으로 재요령설로 입장을 정하게 되었다. 근데 그래도 평양에는 낙랑의 유적과 유물이 밀집된 곳의 지명을 락랑구역[12]이라고 명명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한 바 있다. 여기서의 락랑은 바로 낙랑국으로써 최근의 북한에서의 락랑구역 및 인근의 낙랑 유적을 발굴하면 "낙랑국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라고 서술한다. 그러면 같은 팀 북한학계는 조작은 아니라고 보는가본데... 남한 재야학계의 조작설은 누굴 저격하는건지?

당대 중원을 비롯한 요서지역에서 유행하였던 목곽묘로써 한글로는 귀틀묘[13]라고 한다. 아래의 분포도를 보면 평양 일대에 얼마나 많은 중원계 목곽묘들이 조사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도면을 그대로 보여주면 또 왜놈의 말을 믿느냐는 이야기를 할 어디로 튀는 헛소리를 할 지 모를 그분들을 위해서 현대의 위성지도와 대조하였는데, 도면에서 "석암리"라고 쓰여진 곳 아래가 바로 일제강점기 당시에 주로 발굴된 지점이다. 그곳의 사진이 평양의 낙랑 무덤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사진들을 찍은 지점으로 북한에서도 낙랑과 관련된 것으로 일단 복원은 다 해두었다. 여하간 아래의 도면에서 목곽묘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한 전실묘 또한 목곽묘 못지 않게 매우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일:평양 낙랑고분 분포도.jpg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내 낙랑 고분 분포도

* 평양 정백동 1호(부조예군묘)
파일:부조예군묘.jpg
▲ 부조예군묘 출토 유물

부조예군의 인장이 발견된 낙랑의 추정 귀틀묘[14]로써 새로운 중원계 문화의 유입 이전, 즉 세형동검을 표지로하는 재지계 유물이 다량 부장된 무덤이다. 무덤의 양식은 전형적인 중원계 귀틀무덤이지만, 부장된 유물은 세형동검문화를 대표하는 세형동검과 투겁이 출토된 것이며 이와 함께 전형적인 중원계 청동유물 일괄이 공반된 무덤이다. 특히 위의 도면에서 쇠뇌의 손잡이부분이 출토된 점을 통해서 한반도의 문화 요소와 다른 중원계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권총모양의 청동기와 버섯모양의 청동기는 마차 부속품으로써 역시나 중원계의 유물이다.[15]

인장의 내용인 부조예군(夫租薉君)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조’는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의 현의 하나로 나오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옥저로 나온다. 또한 종족명으로 쓰인 ""의 용법을 살펴보면 사기에서는 ‘’로 한서에서는 ‘’와 ‘’로 쓰이고 후한서삼국지에는 ‘’로 쓰이고 있어 한서가 다루는 전한대의 표기법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조예군이 기원전 1세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강해준다.[16]

염사치 설화를 비롯해 출토된 인장의 내용 : 부조예군이라는 것을 아울러 고려해 봤을 때 이 묘주의 성격은 기존 예(濊) 또는 한(韓)계의 재지세력이 낙랑에 포섭되어진 경우라고 추정되고 있다. 낙랑군 설치 초기의 양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북한학계의 발굴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는 점은 재요동설을 주장하는 재야의 무리에게 시사할 점이 많은데, 첫번째는 해방 이후 북한의 주도로 발굴한 결과임에도 중원계 유물이 나오긴 한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학계는 이에 대해서 낙랑국의 중원문물 수입품 또는 자체적 발전의 소산 두가지로 나누어 해석한다는 것이다. 북한 학계의 학술적 모순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북한학계는 현시점에서 평양 및 일대의 낙랑국의 중국계 수입품(물론 일반 학계에서는 이것을 낙랑군의 유물로 본다.)을 발굴해내고 있다. 즉, 일제의 발굴 결과 해석은 타율성론에 연결되었을 지언정 발굴조사 자체는 조작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재야학계가 그 전의 일제가 파낸 중원계 유물은 구라라는 것은 그냥 팀킬임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너님들이 북한이 파낸 게 일제가 뭍어놓은 것을 마저 파고 있다라는 창조개논리를 이미 하고있다는 것도 알지만

* 평양 정백동 2호(고상현묘)
파일:고상현묘, 정백동 2호.jpg
▲ 정백동 2호(고상현묘)의 유구 도면과 출토유물[17]
부조예군묘와 거의 성격이 동일한 무덤으로써 귀틀무덤을 채용하였고 재지계 유물과 중원계 유물이 함께 출토된 케이스다. 합장묘의 귀틀무덤으로써 단장귀틀묘보다는 후행하는 형식의 형태로써 나중에는 부장칸이 점차 커지고 아에 전실(前室)이 생겨나는 구조로 변화한다. 부조예군묘와 마찬가지로 재지계의 표상인 세형동검에 외래계 유물류인 마면, 은제타출동물문대금구, 일산대와 고리형 장식 등이 공반되었다. 시기적으로도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점으로 낙랑군의 첫 설치 시점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 평양 석암리 9호
중박가면 볼 수 있는 석암리 9호

* 평양 남정리 116호(채협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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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협총의 발굴당시 모습과 도면
파일:채협총 출토유물.jpg
▲ 채협총 출토 유물

낙랑군이 쇠퇴하던 무렵인 기원후 3세기 경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귀틀묘로써 식물의 줄기를 엮은 만든뒤 채색하여 장식한 바구니[채협(彩箧)]가 출토되어서 채협총이라고 불린다. 위의 고상현묘(정백동 2호분)에서 부장칸이 넓어졌다가 아예 전실이 생겨난 형태의 귀틀무덤이다. 채협총이 만들어진 3세기 당시에는 중원, 특히 화북, 요서지역에서는 귀틀무덤의 유행이 거의 끝나고 전실묘가 널리 대형으로 축조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채협총은 위계상 낙랑군의 3세기경의 무덤들 가운데서도 매우 높은 위계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전실묘가 아닌 귀틀묘로 축조하면서 비교적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으로 중원과 낙랑의 고분문화 전개상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스멀스멀 중국과의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커넥션이 줄어가던 시점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채협총에서는 세형동검문화와 관련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고 채협을 비롯하여 신수문경, 이배(離杯), 각종 칠기와 목기들이 출토된 중원계 유물 일색의 무덤이다. 신수문경은 육뉴의 사이에 신수가 묘사된 동경(銅鏡)으로 후한 중기와 후기에 유행하는 형태기 때문에 2세기 후엽에서 3세기 초 정도로 추정된다. 칠기나 채협 등의 유기질 유물이 많이 출토될 수 있었던 것은 채협총이 있던 곳 주변이 습지의 환경이었기 때문이며, 실제로 개토 당시 채협총은 물에 잠겨 있었다.

* 신천 새날리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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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 새날리 전실분의 출토유물과 명문전(銘文塼)

북한에서 조사된 무덤으로써 2002년에 조사되었다. 황해남도 신천군에 소재하는 전실묘로써 평양에서부터의 거리는 먼 편이다. 전실분의 벽돌 중에서는 가평 4년, 즉 252년의 확정적 기년이 새겨진 벽돌이 확인되어 주목된 바 있다. 다실분 계열의 전실분이 유행의 흐름 속에서 점차 단실화 되어가는 양상의 과정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이다.

* 평양역 구내 고분(동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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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리묘(영화 9년명전 출토 고분)의 일제강점기 당시 조사내용

낙랑군이 313년 이후에 폐지되고 나서 축조되는 전실묘이다. 원 명칭은 평양역 구내 고분이며, 조사 당시에는 영화9년명전출토 고분이라고 불렀다. 다만 명문의 내용 때문에 동리의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동리묘라고도 부른다.
이 무덤이 낙랑의 무덤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은 틀렸을 수 있으나 낙랑 철폐 이후 평양의 상황과 고구려의 평양 일대 지배방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중요하다. 고분 자체는 낙랑에서 이어져오는 전실묘이기 때문에 계승성이 당연히 인정되는 무덤이며, 구성하고 있는 벽돌 중의 하나에 영화 9년라는 명문이 있어서 영화 9년인 353년의 기년을 갖는 무덤이다. 또한 요동한현태수령 동리조(遼東韓玄菟太守領 冬利造)라는 내용에서 요동··현도태수인 동리라는 인물의 무덤임을 확인한 케이스이다.
353년이면 낙랑이 퇴출된 이후인데, 전실묘의 축조양상도 낙랑의 전성기 시절과는 다소 다르다. 바로 석개천장이라는 형태로 궁륭형 천정을 채용하지 않는 전실묘인데, 위에서도 살짝 설명된 재지계 요소의 혼합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나 전석혼축분이라고하는 돌과 벽돌이 함꼐 사용되는 중원에서는 유래없는 무덤이 축조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데 이를 통해서 재지적 요소의 존재, 낙랑 퇴거 이후의 잔존세력의 향방을 알려준다.
이미 훼손된 고분이었음에도 출토유물이 다소 있었고 그 중에서 고구려의 귀걸이가 확인되었다. 위의 도면에서 아래쪽에 있는 세환이식과 태환이식이 형태는 물론이고 제작기법 또한 고구려의 귀걸이로써 중원계와는 다른 양상이다. 이처럼 낙랑의 철퇴는 분명하지만 고구려의 평양지역 일대에 펼친 느슨한 지배방식 등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덤이다. 안악 3호분의 묘주로 추정되는 동수와 관련되어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 봉산 장무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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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무이묘의 도면과 복원안[18] 출토된 명문전

장무이묘 또한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벽화분의 묘주처럼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 또는 낙랑에 포섭되었던 재지계 인물의 무덤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장무이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역시 명문전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는 使郡帶方太守張撫夷(사군대방태수장무이), 大歲戊在漁陽張撫夷塼(대세무재어양장무이전), 大歲申漁陽張撫夷塼(대세신어양장무이전)이 이목을 끌었었다. 여기서 대세무, 대세신은 태세연간의 무신년인 288년이라는 견해와 태세법을 따르는 방식이 3세기에서 4세기까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무덤이 대체로 3세기~4세기임은 틀림없지만 크게 3세기 중후엽(288년)이라는 견해와 353년을 기점으로한 4세기 중엽이라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묘실 자체의 고고학적인 경향으로 볼 때, 장무이묘의 천정 형태는 궁륭형(아치형)이 아닌 석개천정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357년의 기년명을 갖는 고구려의 전실적석총인 우산하 3319호분의 구조와 유사함을 들어 4세기 중엽이라는 견해가 우세해지기 시작하였다. 뿐만아니라 전(벽돌, 塼) 자체의 소성 방식에 대한 분석도 덧붙여 소성을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제작한 것으로써, 낙랑 치하의 전(塼)에 비해서는 허접함을 꼬집으면서 낙랑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난 이후에 축조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무이(撫夷)라는 이름 또한 안악 3호분의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라는 표현에서 이름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 이는 장무이묘만 국한하여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고 그 밖의 동리묘(평양 역전 구내 고분)덕흥리 벽화분에서 보이는 지나친 직책들의 존재 등에서 비롯되어 일종의 허봉(虛封)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허봉의 주체는 자칭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대부분의 낙랑 잔존 세력의 무덤이 고구려와 섞여지는 양상 속에서 보면 허봉의 주체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덕일도 이를 지적하며 조작설을 제기하였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정치수단으로써의 허봉은 이미 중국이나 한반도 제 국가에서도 어느 정도 유행하였던 것임을 감안하면 이 지적에서 조작으로 넘어가기에는 수박의 겉만 핥는 비판일 그 이하도 아니다.... 조금 더 참신하고 깊은 근거를 들고 조작설을 제기했으면하는 바램

결론적으로 장무이묘의 존재는 3세기 후엽에서 4세기 중반의 간략화되어가던 낙랑 전실묘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무덤이며, 석개천정이라는 중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의 전실묘의 등장, 존재로 하여금 낙랑의 퇴락과 고구려의 점령과정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안악 로암리 고분
건무 8년의 기년명이 나온 전실분.... 전실분에 원래 벽돌 구우면서 언제 만들었음 하고 글 써놓는게 많음... 무령왕릉도 양관와의사의라는 명문전이 폐쇄전으로 쓰였음. 이 로암리 고분도 전석혼축 또는 석개천장 전축분으로 추정됨

그 밖에도 정백동, 정백리[19]. 로암리, 남정리, 남사리, 토성동, 석암리, 정오동 등 평양 일대에서는 매우 넓고 많이 조사되어 보고된 낙랑 유적이 많다. 각 고분군의 고분 번호 수는 많게는 200번때까지 편호된 고분군이 있으며 보통 20~100기 정도가 확인되고 조사되었다.

만약 위의 유적 유물을 낙랑국이라고 한다면 왜 낙랑국이여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한 연구는 없다. 나아가 문헌사적으로도 낙랑국과 낙랑군이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 조차도 모호한 실정에서 위 유적들의 주체를 논단하는 것은 단순히 낙랑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저의를 깔고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 애초에 진짜 연구라고 보는 것도 무리겠지만.

5. 낙랑과 관련된 연구와 주장

단재 신채호는 낙랑군이 한반도에는 없었고 사실은 요동군을 갈라서 낙랑군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으며, 정인보는 이러한 한사군 요령설을 기반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낙랑 공략을 요동 / 요서 공격으로 변화시키면서 요서경략설의 확대화를 심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 이후의 주장에서는 대릉하나 난하 부근이라 하니 요동이 아니라 요서로 미는 듯. 아니 난하 요수설을 또 따라가면 거기가 요동이 되기는 한다. 왜 이 모양이 되냐면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요동'은 원래부터 고구려꺼 아니었냐는 것. 이렇듯 내적으로도 자체 모순이 심각하다.

다만 북한에서는 한사군 요서설이 예나 지금이나 정설이다. '감히 평양에 중국의 식민 정권이 들어섰다는 역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이유 때문인 것 같지만,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벽돌 무덤 등은 '한의 상인들이 교역하다가 세운 것 같다'는 가설로 땜질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고고학계에서 가장 늦게서야 바뀌는 풍토가 묘제라는 사실로 반박 가능. 이해가 안 된다면 한국에서 '뼈를 묻겠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더 정확하게 알려면 통일되서 평양을 조사해야 할듯하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고조선의 수도를 다시 평양으로 비정하게 된 이후부터는 평양의 고조선은 멸망했으나 한사군은 평양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즉 한사군 시기의 평양은 공백 상태... 대충 '고조선인들이 저항해서 못 들어오고 이름만 있었다가 고구려가 빨리 커서 다 먹었다'고 때우는 듯하다.

다만 낙랑군 외에 고구려에 병합 된 최씨낙랑국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얼른 통일되어서 파 봐야 답이 나올듯.

6. 낙랑군 한반도설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그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아래에 그 반론 중 하나를 싣는다.

"중국의 정사 문구, 저명한 중국 사가들의 주석, 평양 방면의 왕광 묘에서 출토된 낙랑태수 인장, 낙랑군 인구 조사 목간, 2000여 기가 넘는 낙랑고분 등으로 보아, 전한이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설치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심히 문제가 있다. 고분에서 나온 이배(耳杯), 칠기(漆器) 등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 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전한이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또 낙랑군 목간은 이동이 가능한 것이므로, 평양 방면에서 낙랑군 목간이 발굴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낙랑군이 전한 때부터 서북한에 설치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쉽게 요약하자면 '낙랑군 유물 그런거 다 무역이나 교류를 통해 평양에 온 것이다. 다른 곳의 낙랑군 유물을 교류로 얻었을 수도 있는 건데 어떻게 그런 유물들이 평양에 있다고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확신하냐!'이다. 헛소리

물론 교류를 통해 얻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유물의 수가 너무 많다. 평양에서 오직 낙랑군 물건만 수입했을리는 없다. 그리고 중국식 무덤이 수천 기가 나온 건 은근슬쩍 얘기에서 빼놓았지만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평양 말고 낙랑군 유물이 발견된 곳이 있냐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요동이나 요서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하는데 요동이나 요서에서 낙랑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이 없다. 역사학에서는 기록보다도 유물⋅유적을 더 중요시한다. 마치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했다고 나오지만 마한 관련 유물⋅유적 때문에 마한이 5세기까지도 존재했다는 게 인정 받는 것처럼 말이다.

즉, 요서나 요동에서 낙랑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인정될리가 없다. 일부 사람들 특히 환빠 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학계에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헛소리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 중에선 평양을 방문하여 낙랑군 조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 역사학계를 평가절하하는데, 물론 평양이 북쪽 동네의 수도가 되어버린 지금 방문 조사 및 현지 발굴이라는 귀중한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전하는 문헌 자료 및 발굴 자료의 기초적인 정합성을 확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므로 지나치게 불가지론적인 태도이다. 이런 논리라면 일제강점기 평양을 발굴 조사했던 식민 사학자들의 주장의 신빙성이 남한에서 나오는 낙랑군 연구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현대의 고구려나 발해 연구는 만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고구려, 발해에 대한 발굴 자료도 통제하고 있는 중국의 것이 남한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무엇보다 유물 조사 현장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는 채 키보드 두들기는 자칭 재야 사학자들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건 대체?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어찌됐든 북한의 발굴 조사 자료가 남한 학계에 보고되는 것 자체는 사실이며 전근대에 보고된 문헌 자료는 대부분 한국에서도 확보하고 있으므로 연구에 결정적인 지장까지는 없는 상태이다.

6.1. 이덕일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역사 왜곡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전파하기로 유명한 이덕일 한가람 역사 연구소 소장은 이런 주장을 했다.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의 고대 무덤군에서 또 하나의 한사군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국 신문망 등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후한(後漢), 북조(北朝), 당(唐), 요(遼)나라의 묘 등 129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중 북조(北朝) 무덤에서 동위(東魏) 원상(元象) 2년(539년) 사망한 ‘한현도(韓顯度)’가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 출신이라는 벽돌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그간 조선 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와 그 한국인 후예 식민 사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대동강 남단의 대동면 토성리(土城里) 일대라고 비정해왔는데, 천안문(天安門) 남서쪽 20여km 지점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식민 사학계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대동면 토성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병도 박사가 “일제 초기로부터 일인(日人) 조사단에 의해서 대동강 남안인 (대동면)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樂浪郡治)인 동시에 조선현치(朝鮮縣治)임이 그 유적ㆍ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낙랑군고’ ‘한국 고대사 연구’)라고 쓴 것을 지금까지 추종한 결과이다. 이병도 씨가 말한 일본인 조사단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뜻하는데, 그가 대동강 남쪽에서 일부 중국계 유적ㆍ유물을 찾았다고 주장하자 조선사 편수회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이곳을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고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년) 낙랑군을 공격해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으면서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위서(魏書) ‘세조 태무제(世祖太武帝) 본기’에는 그 119년 후인 “연화(延和) 원년(432년) 9월 을묘에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주(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 6군 사람 3만 가(家)를 유주(幽州)로 이주시키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19년 전에 멸망했다는 낙랑군이 119년 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태무제가 고구려 강역 수천 리를 뚫고 평양까지 가서 낙랑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은 이상 낙랑군은 중국 땅에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때 고대 역사서 및 지리지를 토대로 작성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 북쪽 40리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조선성이 낙랑군 조선현을 뜻함은 물론이다.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 있던 낙랑군 조선현이 고구려의 잇단 공격으로 약화되었다가 북위(北魏) 태무제가 북경 부근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다.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위서(魏書)’ ‘북사(北史)’ 같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계속 이름이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북경시 북쪽 순의구(順義區)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적했듯이 지금도 고려진(高麗鎭)과 고려영(高麗營)촌이 있다. 조선 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매국의 역사관, 즉 식민 사관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한사군이 처음부터 중국 내에 있었다는 문헌 사료와 유적, 유물은 무수히 많다.

언뜻보면 그럴 듯 해보인다. 마치 식민 사학계가 한반도에 한사군이 없었다는 증거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웃음만 나오는 주장이다. 여기서 이덕일이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은 313년 이후의 자료들이다. 그런데 위에 써놨듯이 313년 이후 낙랑군은 요서로 옮겨졌다. 그러니 313년 이후의 낙랑군에 대한 사료들은 당연히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이덕일은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각종 사료에 등장하는데 식민 사학계는 313년에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한다고 비웃고 있다. 하지만 사학계가 313년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의 낙랑군만을 가리킬 뿐이다. 313년이후 낙랑군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이덕일의 주장은 313년에 한반도의 낙랑군이 축출된 후 요서 지방에 새로운 낙랑군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알고도 우길수도 무식한 주장일 뿐이다.

7. 역사 왜곡 : 낙랑군 평양설 식민사관설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하면 그게 조선 총독부 관점이라는 해괴한 원천 봉쇄 궤변이 퍼져있는데 헛소리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참고. 낙랑군 평양설은 시기적으로 식민 사관일 수가 없다. 굳이 식민 사관이라면 민족주의적 사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식민사학이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한 한백겸, 정약용은 당연히 한사군 해석에서 민족주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았다. 그 시대는 민족주의가 없으니 당연하다. 오히려 민족주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조선총독부 사관이란 주장이 식민사학 영향권이다.

8. 미디어에서의 등장

김진명은 이 낙랑군과 관련해 소설 고구려를 썼는데, 소설에서 묘사되는 낙랑군은 거의 조선 총독부 수준이다. 나중에는 고구려가 낙랑군 + 중국인을 조선 총독부 + 일본인 몰아내듯 죄다 몰아낸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 실제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연구서 '낙랑군의 역사'에서는 아예 낙랑인이라는 혼합 공동체가 고유의 문화를 영위했다고 주장한다. 고대, 중세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오랜 기간 지내다보니 섞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 비슷한 사례로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을 들 수 있는데, 서양에서 온 십자군들은 고작 백여년 만에 이슬람 문화가 혼합된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는 삼국지 7에서부터 한반도 평양 부분에 도시로 등장했었다. 이 게임의 배경이 중국이므로, 낙랑은 중국의 도시 중 하나로 나온 셈이다. 삼국지 시리즈에서 개근하는 남만이나, 지금의 베트남사섭 교주 세력과 마찬가지로 중국 삼국시대에 이 지역을 점령했던 사실이 있으므로 개연성에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논란이 많았던 2005년[20] 무렵 출시된 삼국지 10에서 게등위가 태클을 먹였고, 위치를 상당히 왼쪽으로 옮긴 후 동답이라는 지역으로 개조했다. 이 덕분에 일본판의 데이터와 한국판 데이터가 어긋나는 일이 발생했다. 별 문제는 아니지만… 사실 태클 걸거면 7탄부터 다 먹여야 했는데 7편이 나왔던 2000년경에는 아직 동북공정이 별로 이슈화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이미 출시된지 한참 된 걸 어쩔 도리는 없고 포기한 듯.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한사군 위치 떡밥이지, 근래에 중국이 시작한 역사왜곡 동북공정과는 다르다.

9. 관련 문서



[1]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노비로 만듦.[2] 드라마 자명고는 이 설을 따른다.[3] 원문엔 "한을 멸하였다"라고 되어있으나 삼한이 전부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백제국으로 추정하는 설, 북방 마한계 국가인 신분활국이라는 설, 마한 중심국인 목지국과 여러 소국으로 보는 설 등도 있다. 사실 대방태수가 전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만만치 않은 수준의 저항이었을 것이다.[4] 사실 백제와 낙랑은 온조왕 때부터 불편한 관계였는데 온조왕 초반기엔 그럴듯한 관계였지만 백제가 힘이 세지자 낙랑군이 말갈을 꼬셔 백제를 공격하게 하는 등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5] 이상의 내용은 이글루스 블로거 '야스페르츠'의 글을 참조하였다.[6] 그냥 아무 돌로 만들면 장식적 요소가 감소되는 면이 있지만 굳이 벽돌을 쓰지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보완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벽화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회를 두껍게 발라서 내부의 면을 매끄럽게 하여 장식하였고, 백제의 경우에는 아에 절석(切石) 수준으로 석재를 가공하여 장식 요소를 가미하였다. 고구려도 절석 수준의 가공을 한 사례가 있다. 신라는 석실단계에서는 장식적 성격이 떨어졌다.(...)[7] 무령왕릉 조차도 송산리 6호와 최근 발굴된 공주 교촌리 전축분 정도의 3기 정도가 전부이며 모두 일시적인 현상이었다.[8] 고구려가 쌓은 석성들은 고구려적 특징이 현격하다. 바로 쐐기꼴 형태의 석재로 끼워쌓는 방식으로 축조한다는 점인데 원래 고구려 영토 내에서는 물론이고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도 성을 쌓을 때 항상 쐐기꼴의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였다. 화강암이 아닌 그 밖에도 육합쌓기라는 바른 층쌓기의 방식이나 특유의 모서리 가공 방식, 옹성의 구조 등이 고구려 산성의 대표적인 특징이다.[9] 고분 몇 기 정도는 몇일, 몇주 정도면 금방 다 쌓을 수 있다. 하지만 축성과 관련하여서는 신라의 남산신성비나 명활산성 축성비의 인력동원과 과정, 시간이 참고될 수 있으며, 당장 근세인 조선시대의 기록만 보더라도 몇개의 군현에서 징발된 백성들이 수년 수개월씩 투입되어야만 쌓을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10] 즉 그러한 인력을 해당 지역에서 징발, 또는 징발한 인력을 인솔해 올 수 있다는 점, 축성에 고려되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대규모 포곡식 산성은 축조집단이 해당 지역을 점령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11]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12] 한국의 구(區)에 해당[13]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남한지역에서 확인되는 목곽묘와는 한자는 같아도 한글로 쓰면 다르다. 남한지역에서의 목곽묘라 함은 널무덤, 덧널무덤의 의미를 갖는다.[14] 토광 속에서 각재만이 밑 바닥에 깔린 채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귀틀묘(목곽묘)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발굴한 터라 보고서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다.[15] 쇠뇌나 마차 모두 한반도 통사를 들어 잘 사용된 바가 없다.[16] 네이버 지식백과 부조예군 참고[17] 부조장인과 고상현인의 도면은 공개된 것이 없다.[18] 영남대학교의 정인성의 복원안, 궁륭형이 아닌 석개천정임이라고 추론하였다.[19]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을 때는 정백리였으며 북한에 의해서 조사되었을 떄는 정백동으로 지명이 바꿔서 정백동과 정백리를 구분하여서 부른다. 한국에서는 보통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지명일지라도 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재의 지명으로 바꿔부르는데, 조사의 주체가 한국이 아니다보니 이렇게 잠정적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20] 한창 대륙과 서토정벌을 부르짖는 고구려 배경의 사극들이 시청률을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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