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輔亂
1. 개요
흥평 연간에 있던 이각, 곽사가 싸우고 헌제가 탈출하느라 그 일대가 막장이 된 헬게이트. 이 사건을 정사 삼국지에서는 삼보란(三輔亂, 삼보의 난)이라 지칭한다.[1]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이각 곽사의 난' 또는 '이곽의 난'이라고 칭하지 '삼보의 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무래도 정사 삼국지에서 '삼보란(三輔亂)'이라 지칭하는 삼보에서의 난리가 여러 종류이기 때문인 것 같다.삼보(三輔)는 전한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장안 주변, 즉 관중을 일컫는 말이다. 이 지역을 삼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무제 때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이 일대를 경조윤·우부풍·좌빙익의 세 장관이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난으로 인해 후한 최대의 도시였던 장안이 허허벌판이 될 정도였다.
2. 종합적인 사건의 흐름
2.1. 이각, 곽사의 집권
사실 이각과 곽사는 동탁이 사망하자마자 바로 왕윤에게 항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윤은 일말의 용서가 없었고 동탁과 연루된 모든 이들을 참하려 했다. 처음에 이각과 곽사는 야반도주를 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 꼴을 본 가후가 나서서 "우리에게도 병력이 있는데 쫄을 필요 없다. 항복을 하지 못할 지경이면 걍 맞붙어버리자"고 이각과 곽사를 꼬드겼고 결국 이각과 곽사는 가후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싸던 짐을 도로 풀고 난 후 병력의 진영을 짜서 여포와 맞붙어 이기고 여포는 장안에서 쫓겨나 원소에게 도망치고 그 과정에서 왕윤측 장수인 서영까지 전사시켜 버린 뒤 이각과 곽사는 왕윤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이각과 곽사는 동탁은 죄가 없는데 왕윤이 무함해서 죽였다며 박박 우기고 되려 왕윤에게 무고죄를 뒤집어씌워 죽여버렸다. 당시 이각과 곽사에게는 동탁이 하진에게서 빼돌린 금군(禁軍)과 동탁이 처음부터 갖고 있던 서량군이 있었기 때문에 헌제는 이각과 곽사의 힘에 짓눌려서 왕윤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여포가 곽사를 일기토로 이겨놓고도 도망쳐야만 했던 것도 이 금군의 위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2.1.1. 첫 번째 학살
잔혹한 대형 참사의 서막을 활짝 열어재낀 첫 번째 학살은 192년 이각과 곽사가 여포, 왕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을 때 일어난다. 공격을 버티지 못한 여포가 달아나고 이각과 곽사가 장안을 점령할 때 그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않고 약탈하며 모두 죽이니 태상 충불은나라의 대신이 되어 폭력을 금지시키고 모욕을 막지 못하여 번뜩이는 칼날이 궁궐로 향하도록 하였으니 달아난들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라고 외치다가 죽었고, 태복 노욱, 대홍려 주환, 성문교위 최열, 월기교위 왕기가 죽고, 관리와 백성 1만 명이 죽어 거리에 시체가 널려있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얼마 안 있어 7일에는 왕윤과 송익, 왕굉도 함께 잡아 죽인다. 사손서는 이때 동탁을 죽이고도 모든 공을 왕윤한테 돌려 일단은 죽지 않는다. 아무리 후한 말기에 관직을 남발했다고는 하지만 학살 한 번에 저 정도로 고위 관직에 있는 인물들이 싹 쓸려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것의 전조에 불과했다.
2.1.2. 마등, 한수와의 대결
동탁이 아직 살아 있을 적, 관동 군벌들을 토벌하기 위해 동탁은 마등과 한수를 불렀다. 그런데 이들이 준비를 마치고 도착했을때는 동탁이 왕윤과 여포에게 살해당하고, 왕윤과 여포가 이각과 곽사에게 축출당한 뒤였다. 이각과 곽사는 일단 한수를 진서 장군으로 삼아 양주로 돌아가게 하고, 마등을 정서 장군으로 삼아 미에 주둔시켰다.194년, 마등이 이각과 곽사에게 군량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데 때마침 시중 마우, 간의대부 충소, 좌중랑장 유범[2] 등이 그를 부추기니 마등은 장안을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한수, 유언과 연합을 해 장평관으로 향하였으나 계획이 들통나 조정 내의 협력자들은 모두 목이 날아가고[3] 중재하려고 온 한수도 힘을 합쳐 이각, 곽사에게 대항하나 곽사와 번조의 군대에 패배하여 1만명이 참수된다. 그리고 이때 번조는 다 붙잡은 한수를 놓아주는데 번조를 따르던 이각의 조카 이리가 이 일을 이각에게 말했다. 이각은 이 사실에 격분했으나 번조의 세력이 강하기에 일단은 놔뒀고, 8월에 좌빙익으로 쳐들어온 강족을 곽사는 번조와 함께 격파한다. 그리고나서 195년 2월 이각과 곽사는 번조를 회의장으로 유인해서 살해했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장제가 알아서 장안을 나가 홍농에 주둔하게 돼 이각과 곽사가 사이좋게 정권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2.1.3. 생지옥이 펼쳐지다
문제는 위 사건들이 차례로 일어날 동안 이각과 곽사는 꾸준히 약탈을 행해왔고, 설상가상으로 삼보 지역에는 194년 4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는 큰 가뭄이 들어 곡식 1곡의 가격이 50만 전, 콩과 보리 1곡의 가격이 20만 전 까지 폭등하니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어 백골이 길거리에 쌓이게 되었다.이에 황제는 후문을 시켜 태창의 곡식을 풀어 구휼하려고 하나 후문은 이 와중에도 삥땅을 쳐서 백성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황제가 직접 확인해보고 그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였고,[4] 거기에 황제가 내리는 물건들이나 대신들이 푸는 물건들은 이각이 인 마이 포켓.[5] 심지어 황제가 자기 명마들을 전부 처분해서 그걸로 곡식을 사다가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나눠줄 죽을 쑤고 있었는데 이마저 이각이 몰수했다. 이때 이각은 제가 굶주리고 있는 백성이옵니다.라 말하면서 황제가 몸소 쑨 죽을 빼앗아갔다. 이러한 이각의 행패에 황제와 대신들은 분노하였고 이를 저지하고 싶었지만 이각의 손에는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조정에 누군가가 구휼을 실시 → 다른 누군가는 그걸 빼돌림, 무한 반복. 백성들의 삶은 더더욱 악화되어 그야말로 죽지 않아서 살아간다고 할 정도로 약 2년 만에 삼보의 인구는 궤멸되었고 이 시기를 좁은 의미로 삼보의 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이 와중에 일식이 일어나고 지진이 발생하며 아무 이유도 없이 멀쩡한 건물이 무너지고 혜성이 나타나는 등 망국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2.2. 이각, 곽사의 내분
2.2.1. 계기
195년 2월, 번조를 죽인 후 아주 잠시 동안 이각과 곽사는 서로 술자리를 열어 즐기며 서로를 자기 집에 재우기도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으나 곽사의 처가 이각이 곽사에게 비첩을 줄 것을 두려워해 이 둘을 멀어지게 할 계획을 세운다.한 번은 곽사가 이각이 준 음식을 가져오니 곽사의 처는 그것을 받은 뒤 자신이 미리 준비한 약을 빼내어
2.2.2. 이각의 황제 선점
한번 싸우기로 결심하자 곽사는 먼저 황제를 선점하고자 하였으나 이 일이 이각에게 발각되어 3월 25일에 이각은 먼저 조카 이섬을 시켜 수레 3대를 끌고와 양표의 반대를 무시하고 천자에게 한 대, 복씨에게 한 대, 좌령과 가후에게 한 대를 주어 북오로 끌고 온다. 그 뒤 황제 일가를 자신의 영에 살게 한 다음 궁전을 불태우며 관사를 약탈하고 천자의 물품까지 자신이 가져가 버린다.그러자 황제는 공경들을 곽사에게 보내 이각과 화해하기를 시도했으나 곽사는 오히려 거부하고 공경들을 사로잡았다. 이때 붙잡한 사람들은 양표, 장희, 왕융, 유연, 사손서, 한융, 선번, 영합, 주준, 양소, 강선 등. 그리고 곽사가 붙잡은 공경들에게 향연을 베풀며 이각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자 양표는 "아니, 한 놈은 천자를 볼모로 잡고 다른 한 놈은 공경들을 볼모로 잡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여"라고 외쳤다가 그 말에 화가 치민 곽사에게 살해당할 뻔 한 것을 양밀 등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고 주준은 이런 현실에 빡쳐서 화병으로 죽고 만다.
2.2.3. 곽사의 공격
그리고 곽사는 이각 휘하의 장포와 모의하여 이각을 공격하기를 꾀하고 4월 25일, 이각을 공격해 곽사군의 화살이 황제의 해가리개에까지 날아오고 이각 자신의 왼쪽 귀에까지 맞을 정도였다. 장포는 방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양봉이 곽사를 막아서자 도망쳐 곽사에게 귀부하였다.2.2.4. 그동안 천자의 취급
이각은 황제 일가와 몇몇 중신들을 붙들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황제와 중신들의 취급은 시궁창급이라 황제가 신하에게 무언가를 하사하면 이각이 이를 횡령하거나 빼앗고 대신 질나쁜 품목을 대신 내놓았다. 헌제가 백성들이 굶고 있어서 백성들에게 하사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몸소 움직여가며 닭죽을 대량으로 끓여놓았더니 그걸 이각이 칼을 디말며 강탈해가기도 했다. 헌제와 대신들도 이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였고 양기나 조온 등이 나서 처우의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상대가 막장인성을 가진 이각인데 될 리가 없었다. 특히 조온은 편지를 올렸다가 오히려 이각에게 죽을 뻔 했으나 이각의 아우 이응이 말린 덕분에 살아난다. 게다가 이 와중에 백성 수만 명이 죽기까지 하니 말 다했다.5월이 되자 보다못한 천자가 황보력을 보내 화해를 추진하니 곽사가 이를 허락했지만 이각은 '여포를 토벌하고 4년 동안 국정을 보좌하여 삼보를 편안하게 하였는데 어찌 공경들을 볼모로 잡고 있는 곽사 같은 말 도둑놈하고 같은 취급을 하냐'고 화를 내면서 거부하고는 황보력을 죽이려 하나 왕창이 말린 덕분에 황보력은 죽지 않고 도망가게 된다. 이각은 곧 대사마로 임명된다. 한편 곽사의 경우 대장군을 칭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자칭인 탓에 게임 등의 매체에서는 이각의 부하로 나오는 경우가 잦다.
2.3. 천자의 탈출
2.3.1. 장안 탈출
195년 6월, 이각의 수하 양봉과 송과가 이각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자 군사를 거느리고 이각에게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하고 도주하니 이각의 무리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한다.그러던 도중 경오일[6]이 되자 섬현의 장제가 와서 둘을 화해시키고, 일단 천자를 홍농으로 옮기는 것을 제안한다.
황제도 옛 수도가 그리워지던 참이라 이각과 곽사에게 선유해서 화해를 시켜 이각과 곽사는 서로의 아들을 인질로 삼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각의 마누라가 아들을 사랑하여 떠나보내려 하지 않기에 아직 화해가 되지 않고 있었으며 강족과 호족은 이각이 궁녀를 주기로 했다며 궁녀를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천자는 이때 유애를 시켜 공신들을 물밑에서 지키기만 하던 가후에게 부탁해 이들을 처리해줄 것을 부탁하니 가후는 이각의 주력군인 강족과 호족에게 관직과 금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종요와 한빈이 헌제를 도와 계략을 세워 천자의 탈출을 돕는다.[7] 이렇게 이각군의 세력이 강족과 호족의 이탈로 엄청나게 약해지자 이각은 곽사와 다시 화해를 하기로 해 각각 딸을 인질로 삼기로 하고, 화친을 한다.
2.3.2. 언제 출발하나?
7월 갑자일[8], 다리를 건널 때 곽사의 군대가 이각의 군사를 막으며, 전투가 벌어질 뻔하나 유애와 양기의 힘으로 패릉에 무사히 도착한다. 따르던 자들은 모두 굶주렸으나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더 나아서 장제가 지위에 따라 차등 있게 음식을 주었다. 한편 이각은 지양에 주둔한다.그리고 곽사는 또 황제를 고릉으로 모셔야한다고 주장했다. 공경들과 장제가 홍농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크게 회의를 열어서 그것에 관하여 의논했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황제가 단식투쟁을 한 다음에야 곽사도 고집을 꺾고, 가까운 현으로 가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말한다.
8월에는 신풍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때 가후는 천자에게 인수를 반납하고, 단외라는 자에게 의지하러 떠나 버리고, 곽사가 변심하여 오습을 시켜 학사를 불태우고 천자를 미로 끌고가려하니 충집이 이를 알고 양봉, 동승, 양정에게 밀고하여 이를 막으니, 곽사는 남산으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10월 1일, 곽사의 수하인 하육, 고승은 승여를 협박해 곽사의 말대로 서쪽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유애는 어서 황제에게 한 군영으로 가라고 했고[9] 황제는 양정과 동승의 호위를 받아 양봉의 진영으로 간뒤 그들의 힘을 빌어 곽사군을 격퇴하고, 10월 5일 화음에 도착한다.
2.3.3. 재차 싸우는 이각, 곽사
여기서 영집장군 단외가 계속해서 공신들과 천자에게 물품을 공급하나 양정과 불화가 생겼고, 같은 편인 충집, 좌령은 단외가 반역하려 한다고 모함한다. 양표, 조온, 유애, 양소가 단외는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나 동승과 양정이 단외가 곽사를 끌여들였다고 말하자 헌제는 길 남쪽에서 노숙한다.10일에는 양봉, 동승, 양정이 단외를 공격하기 위해 천자에게 조서를 내리도록 하지만 천자는 단외에게 모반죄가 확실하지 않다며 거절한다.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독단으로 공격했지만 10일이 넘기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단외는 계속해서 식량을 공급하는 등 두 마음을 품지 않으니 결국 황제는 두 세력을 화해하게 한다.
2.3.4. 이각, 곽사의 연합
천자는 일단 무사하게 도망친 듯 싶었으나 이각과 곽사는 천자를 보낸 것을 후회하며 다시 연합한다. 이 소식을 듣고 양정은 남전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곽사한테 차단당해 남전으로 가며 리타이어. 거기다가 양봉, 동승과 사이가 나쁜 장제까지 배신해서 이각, 곽사와 연합해 다시 천자를 쫓으니 천자는 홍농의 조양에서 따라잡히게 된다. 12월, 천자를 호위하던 양봉과 동승군은 홍농의 동간에서 이각, 곽사, 장제군과 싸우나 대패한다. 그 후에 양봉과 동승은 천자를 데리고 겨우 탈출하였으며, 이각, 곽사, 장제군은 홍농으로 들어가면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만다. 칼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사로잡힌 사성 교위 저준은 주위 사람들에게 살 수 있겠냐고 묻는 이각에게,너희들 흉악한 역도들이 천자를 압박하여 겁주고, 공경들에게 피해를 입게 하고 궁녀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게 하니, 국가를 어지럽히는 신하들과 도적들 중에 아직 이와 같은 적은 없었다!
고 외치니 격분한 이각이 그를 죽인다. 이 와중에 대장추 묘사, 보병 교위 위걸, 시중 주전이 도륙당한다. 천자는 조양으로 도주해 논밭 사이에서 노숙을 할 정도로 비참하게 보냈으며, 다시 이각의 군대가 쫓아오자 이번에는 흑산적의 일파인 백파적 수령 이락, 한섬, 호재와 심지어 흉노족의 우현왕 거비[10]를 불러 힘을 합친다. 천자군은 이곳에서 이각군을 격파하여 계속 나아가지만 다시 이각의 군대와 싸웠을때 천자의 군대가 대패하니 궁인들이 도륙당하고, 광록훈 등현, 정위 선번, 소부 전분, 대사농 장의 등이 사망한다. 사도 조온, 태상 왕강, 위위 주충, 사예 교위 관합도 이각한테 붙잡혀서 죽을 뻔 했으나 가후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2.3.5. 안읍으로 고난의 행군
그 와중에 치중을 잃은 천자는 보행으로 섬현으로 달아난 뒤 북쪽으로 가 하수에 도착하게 된다.[11] 이때 이락이 구해온 배를 타기 위해 비단으로 연을 만든 다음 상홍이 직접 천자를 업어 옮겼으며, 배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을 이락과 동승이 칼로 찍어 손가락을 끊으니 배 안에 잘린 손가락들이 손으로 움켜쥘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배를 타지 못한 자들은 이각의 군대에게 습격을 받아 궤멸되는데 여기서 앞서 겨우 목숨을 건졌던 위위 사손서도 목숨을 잃는다.이렇게 천자는 힘든 길을 거쳐 소달구지를 타고, 안읍에 도착하나 근신 중 따르는 자는 양표, 한융 등 10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천자는 울타리의 문도 닫기지 않는 가시 울타리 안에 거주하며, 천자가 조회를 열면 병사들이 보고 웃을 정도로 장수들이 먹는 음식은 천자보다 좋았으며 다투어 표를 올려 벼슬을 달라 하니 송곳으로 문자를 그리거나 상황이 나쁘면 이것도 못 하고 이런 무뢰배들에게 관직을 주니 심부름꾼이나 의사 같은 자들이 모두 도위에 임명되게 된다. 한융이 이각, 곽사, 장제군으로 가 드디어 강화를 맺는데 성공하여 사로잡혀 있던 궁인과 관리, 부녀자들을 돌려받게 되나 황충(곤충)이 안읍을 습격해 관원들은 먹을 곡식이 없어 대추와 채소를 먹었다고 한다.
2.4. 조조의 등장
2.4.1. 낙양으로
해를 넘어가 196년, 제일 윗자리에 있어야할 천자가 그 모양이니 천자군의 통솔이 될 리가 없었고, 위아래가 어지러워 결국 양식이 다했다. 2월에는 내분이 일어나 한섬이 동승을 공격했는데 이 동승이라는 놈은 도망쳐서 원술군의 장노와 함께 천자를 구원하려는 조조의 세력 조홍을 막고 있었다.양봉, 한섬, 호재는 구도 낙양을 목표로 길을 나서 7월에 낙양에 도착하는데 이때 장양이 식량을 가지고 도로에서 영접하며 낙양까지 인도를 한 다음 그 자신은 아무런 욕심도 없다며 모든 일을 공경대신들에게 맡기고 떠나니 천자는 그를 대사마로 봉한다.
헌제는 옛 중상시 조충의 집에 기거하고, 후에 8월이 되어 장양이 궁궐의 수리를 완료하자 양안전이라 이름짓고, 그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낙양도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어서 백관들은 가시나무를 헤치며 담벽 사이에 의지하였고, 장양을 제외하고는 물품을 보내는 자가 없으니 관리들은 굶주리고, 궁핍하여 상서랑 이하 관리들은 스스로 밖으로 나가 야생벼를 채취해야 했으며 이것조차 먹지못하여 굶어죽거나 병사들에게 죽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2.4.2. 천자 옹립
이때, 조조는 조홍의 군세가 동승에게 막히자 먼저 여남, 영천의 황건적 세력을 토벌한 다음 장양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장양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일단은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때 동소가 장양을 설득하니 장양은 조조에게 길을 빌려준다.거기다가 천자군 내부에 불화가 있는 것을 이용해서, 동소는 양봉에게 편지를 보내 조조를 끌어들일 것을 권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양봉의 부하 서황도 이를 옳다 여기니 양봉은 좋다며 조조를 끌어들였고, 결국 조조는 낙양에 도착한다. 진동장군 비정후, 녹상성사, 사례교위로 봉해지나 조조 또한 이때 시중 대숭과 상서 풍석을 죽여버린다. 한섬은 자신의 출신 때문인지 조조가 도착하여 천자를 호위하니 달아난다.
2.4.3. 허창으로 천도
천자를 만난 조조는 동소에게 조언을 구하니 동소는 허창으로 천도할 것을 권한다. 그 말을 듣고 양봉에게는 예물을 주며 우리는 천자의 식량을 구하러 노양 땅에 잠시 머문다고 하니 양봉은 예물에 눈이 멀어 그걸 그냥 보내버린다. 뒤늦게 천자가 허창을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양봉은 한섬과 힘을 합쳐 조조를 습격하지만 오히려 양원의 골짜기에서 조조의 복병에 당해 대패하여 달아나고 서황은 조조에게 항복한다. 9월 천자는 허도에 도착하게 되니 이제서야 종묘사직이 안정되었다고 한다.2.5. 역사적 의의
삼보의 난으로 인하여 헌제는 꼬라지가 말이 아닌 상황이 되고 이각, 곽사의 행패로 인하여 말그대로 빈털털이 알거지가 되는 지경까지 추락해버렸다. 그러다보니 조조가 어쩔 수 없이 문무백관의 봉록을 자기 사재를 털어 지급해야 할 정도로 후한 황실은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 당시 조조는 자기 의붓 할아버지가 환관의 레전드인 조등이었던 만큼 태어날 때부터 엄청 유복했고 삼국지 전체에서 보면 미축, 주유, 노숙, 정태 등과 같이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갑부였다. 그러나 아무리 갑부라 한들 결국 조조도 한나라의 관리였기에 관리들의 임금을 역시 관리인 사람의 재산을 털어 지급했다는 건 한 황실의 재정이 그야말로 바닥 오브 바닥을 찍었다는 것이다.[12]이후 헌제는 사실상 조조의 식객이 되어 한왕조는 완전히 조조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반면 조조는 헌제를 영입하여 한왕조의 보호자이자 실권자가 되어 '협천자이령제후'로 천하 제패를 위하여 웅비하는 일보를 내딛게 된다. 즉, 삼보의 난은 작게 봐도 제국의 최고권력이 변동되는 순간이었고, 크게 보면 조조로부터 시작된 위왕조의 프롤로그가 시작되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묵직한 사건이었다.
거시적으론 고중세 중국의 삼보, 즉 관중 지역은 전통 중국의 중추지로써 멀게는 상나라를 멸망시킨 서주부터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초한전쟁기의 서한, 이후 5호 16국 시대의 전진, 남북조 시대의 북주, 수말 당초의 당나라처럼 관중 및 장안을 본거지로 한 정권이 크게는 천하 통일을, 작게는 중국 북부의 패권을 쥘 수 있던 중요한 요충지였다.[13] 특히 후한 말의 관중은 얻는 자가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땅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후한말 삼국 때 역시 관중이 최요충지였으나 삼보의 난으로 인해 경조윤(京兆尹), 우부풍(右扶風), 좌빙익(左馮翊) 일대가 초토화되면서 여기서 살던 30만 가구에 이르는 당시 후한의 수도권 지역 인구가 단 2년 사이에 전멸해 버렸다. 40여 일 동안 비어 있던 수도 장안조차도 강자들은 흩어지고 약자들은 서로 잡아 먹으니 '2~3년 간 다시는 사람의 흔적이 없어졌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동탁, 이각과 곽사는 천하를 아우를 수 있을 중국 최고의 노른자위땅을 차지하고서도, 통치라고 할 수도 없는 살인과 약탈만을 일삼아 단 2년 만에 이 일대를 이렇게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관중, 그리고 장안 자체는 한말 위진의 제 2의 도시로써 여전히 중추지[14]였지만 이 삼보의 대란으로 관중은 중국의 다른 시대와는 달리 한말 삼국의 정세에서 내내 힘을 영 제대로 쓰지 못한다.
관중이 후한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했지만 이 삼보의 난은 그 여부를 떠나서 관중을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망가뜨려 놓았다. 너무 심하게 망가져버린 관중으로 인해 후한은 사실상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조조 없이는 조정이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전락하여 이게 조조의 전횡이 시작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적어도 동탁이 갓 죽었을 당시에는 후한을 재건할 수 있는 여지가 눈꼽만큼이라도 있었으나 이각과 곽사는 삼보의 난을 일으킴으로 인해 후한 재건의 마지막 희망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결국 식물인간 상태였던 후한을 삼보의 난이 뇌사 상태로 만든 것이다.
3. 주요 인물
3.1. 직접적 관련 인물
- 이각-곽사 정권
- 이각: 198년, 조조가 보낸 단외와 배무에게 사망. 가족들도 전부 참살된다.
- 곽사: 197년, 위에서도 한 번 등장한 자신의 부하 오습에게 배반당해 사망. 가족들 역시 전부 처형된다.
- 장제: 196년, 강화를 맺은 후 군량이 부족하여 형주를 약탈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 그 세력은 조카인 장수가 이어받는다.
- 헌제를 호위한 자들
- 가후: 동탁의 휘하 출신. 동탁이 사망한 이후 야반도주를 하려던 이각-곽사를 꼬득여서 삼보의 난을 일으킬 빌미를 제공했으며 이각-곽사 정권의 책사로 활동하다가, 헌제가 장안에서 탈출할 때 이각-곽사를 배신하고 잠시 헌제를 도움. 이후 차례로 단외, 장수, 조조를 섬기며 천수를 누림.
- 동승: 동탁의 휘하 출신. 허도 천도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봉직하다가, 조조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됨.
- 양정: 동탁의 휘하 출신. 단외가 헌제를 옹립하려 할 때 이에 반대하여 단외와 전투를 벌이는데, 이각과 곽사가 단외 지원을 핑계로 군대를 보내려 하자 형주로 도주, 이후 기록 없음.
- 충집: 중앙 관료. 양정과 친해서 양정의 대립관계였던 단외를 모함했다. 이후 조조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됨.
- 양표: 중앙 관료. 조정이 조조에게 장악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조정의 관료로서 봉직하여, 한나라 멸망 이후까지 생존.[15]
- 상홍: 계속 헌제를 따라다니다가 헌제가 배를 타게 되자 헌제를 업고 배에 올라탐.
- 양봉, 한섬: 백파적. 조조에게 속아 헌제를 빼앗긴 뒤 원술을 섬기다가 배반하여 여포 휘하로 감.
- 이락, 호재: 백파적. 일단 하동에 남기는 했지만 얼마 안되어 이락은 병으로, 호재는 원수에게 죽음.
- 인접 지역 군벌
- 조조: 천자를 옹립하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음. 적벽대전에서 손권에게 털리기 전까지 싸우는 전쟁 대부분을 승승장구함.
- 장양: 조조와 친분 관계를 맺고 천자에게 잘보여 대사마의 직위도 얻었으나 198년에 양추에게 살해당한다.
- 동소: 원소 휘하 출신이나 삼보의 난 당시에는 장양 휘하에 있었다. 결국 조조 밑으로 들어가 열심히 승진한다.
- 단외: 동탁의 부하 출신. 동탁이 화음에 배치하여 삼보의 난 당시에도 화음 일대를 통제하고 있었다. 헌제를 옹립하려 하나 양정 등과 대립하여 무산된다. 허도 천도 이후 이각 토벌에 공을 세우고 입조하여 벼슬을 지냄.
3.2. 다른 군웅들은?
- 유비, 여포: 조조와 대치 중이었다.
- 원술: 조조의 천자 옹립 방해에 실패하자, 자신이 천자가 되겠다고 선포한다.
- 원소: 원소는 국의의 활약에 힘입어 드디어 공손찬을 누르고 있는 시점이었다.
- 공손찬: 193년에 공손찬은 황족인 유우를 처형한 일로 인해 공공의 적으로 찍힌 이후 안 그래도 힘든 와중에 국의에게 처참히 패주하고 있었다.
- 유언: 194년에 장남 유범이 마등의 편을 드니 유언 또한 유범을 지원하였는데, 이게 발각되자 장남 유범, 차남 유탄이 사형되고 셋째 유모는 정신병을 앓다가 죽어 4남 유장에게 정치를 맡기고 은퇴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 마등, 한수: 세력 유지, 1만급 참수의 피해를 입음.
- 장로, 유표: 난을 피해 온 유랑민을 흡수하여 세력 확대하기 바쁨.
- 손책: 원술의 부하로 있다가 원술이 천자가 되겠다고 선포하자 이를 말렸다. 하지만 원술이 거절하자 독립했고 그 이후 강동을 정벌했다. 손책 본인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해 놓고 일찍 죽지만 그 동생 손권이 거대한 세력을 이끌어 갔다.
3.3. 그 외의 인물들
물론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헌제 탈출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란을 피해 달아난 경우가 많아서 개인적으로도 꽤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정은, 후선, 이감은 이 난으로 세력을 키웠다.
- 왕충은 배고픔에 시달려 식인을 했다.
- 누규 또한 형주에서 세력을 키우다 위에서 말한 굶주림에 시달린 왕충에게 패배하여 몰락했다.
- 소칙의 가족은 난을 피해 북쪽으로 탈출했다.
- 조전, 영용 등이 난을 피해 형주로 피신.
- 진기, 진군 부자가 서주로 피신했다. 진군은 잠시지만 유비에게 임관하게 되었다.
- 사견, 사원 형제가 촉으로 피신했다.
- 외희가 형주로 피신했다.
4. 창작물에서
대부분의 경우 연의에서처럼 조조가 이각, 곽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천자를 옹립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벤트 자체는 천자가 이각, 곽사의 횡포에 이기지 못해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헬게이트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 대다수.대표적인 예가 삼국지 조조전이며, 진삼국무쌍이나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구현되어 있다.
토탈 워: 삼국에서는 배신당한 천하 DLC에서 이벤트로 구현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동탁이 암살된 후 왕윤이 서량군의 머릿수를 줄이기 위해 이숙에게 이각, 곽사, 번조 등이 있는 서량군을 지휘해 우보가 이끄는 서량군을 공격하도록 했으며, 이숙은 자신이 지휘하는 서량군과 우보의 서량군을 서로 공멸시키려 했지만 가후의 계략으로 실패하면서 군량 문제로 인한 책임으로 이숙이 참수되었다. 가후가 왕윤이 서량군의 항복을 담당한 이숙을 죽이고 서량군을 몰살시킬 것이라는 여론을 퍼뜨려 왕윤을 몰락시키고 이각, 곽사가 헌제를 확보해 권력을 잡았다.
이각, 곽사는 권력을 휘두르다가 번조를 죽이고 서로 다투게 되면서 헌제를 수중에 쥐고 흔드는 것이 무리라 여겨 원소에게 떠넘기려 했지만, 원소는 원술을 통해 백파적, 흉노와 손을 잡고 헌제를 난리통에 죽은 것으로 꾸미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헌제의 도움 요청을 받은 가후가 종요를 천거하고 동승을 구슬려 황제를 탈출시키고 조조의 보호를 받는다.
[1] 정사 삼국지 원문을 보면 총 7곳(무제기 주석 위략, 왕랑전 주석 세어, 소칙전 주석 위략, 염온전 주석 위략용협전, 배잠전 주석 위략, 선주전 주석 전략, 마초전 주석 전략)에서 이 사건을 삼보란(三輔亂)이라는 글자를 사용해 지칭한다.[2] 촉에 있는 유언의 장남이다.[3] 이 일로 유언의 장남, 차남이 죽고 셋째는 미쳐서 죽는다.[4] 이 기록을 보고 호삼성은 헌제가 아둔하고 무지한 사람은 아니지만 천하를 잃은 것은 권위가 떠나가고 작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는 백성들을 얻을 수 없었다고 평했다.[5] 이때문에 가후도 보다못해 이각을 말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각은 전혀 듣지 않았다.[6] 그런데 이해 6월 초하루가 경자일이기 때문에 경오일은 없다. 자(子)가 오(午)자로 잘못 쓰인 것이라면 6월 1일이 된다.[7] 다만 이 둘에 관해서는 가후와는 달리 정확하게 어떤 일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8] 역시나 경오일이 초하루라 갑자일은 없다.午가 子로 잘못 쓰인 것이라면 25일이다.[9] 곽사, 양정, 동승, 양봉은 각자 군영을 운영하고 있으니 황제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것이었다.[10] 여기서 좌현왕 거비라고 되어있는데 어부라가 195년에 죽은 뒤로 좌현왕은 유표였고, 거비는 우현왕이었다. 자치통감의 경우도 우현왕이라 기록했기에 여기서는 우현왕으로 기록한다.[11] 이락이 말을 타라고 했으나 백관을 버릴 수 없다고 발언했다는 기록도 있다.[12] 현대로 치자면 한국의 공무원들의 임금을 국무총리나 기타 장관의 사재를 털어 지급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13] 이후 당말 5대를 기점으로 강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새로운 중심지가 되고 관중 지역이 지력이 쇠퇴하여 다시는 예전과 같은 중추지가 되지 못하자 중국 역사에서의 중심이 북경, 남경 및 중국 동부 연해 지방으로 천도하는 대격변을 겪는다.[14] 제갈량의 북벌 때 옹양, 한의 고도 장안을 아우르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15] 사실 이때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입장이었다. 양표의 아들 양수가 조식 라인에 타서 조식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었고 이중 몇 가지 조언은 위나라 후계 레이스에 정답이나 조식의 배후가 양수라는걸 알자 출제자인 조조의 심기를 거슬렀다. 결국 이후 후계문제로 몰락한 원소, 유표의 사례를 봐서 장자인 조비를 후계로 삼는것이 낫다는 가후의 조언과 조식이 술에 취하고 왕만 드나드는 사마문을 넘었다는 사건 등 구설수에 올라 후계는 조비로 확정되었으며 이후 양수는 한중공방전 이후 계륵사건에 항명으로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또 양수 이외 조식의 주변인물들도 정리했는데 그중 양표와 같은 한나라 중앙 관료 최염과 최염의 조카딸 최씨도 있었다. 참고로 최씨는 조식의 아내로 조조의 며느리인데 싸그리 정리한 것. 나중에 [[노우지독이라는 고사가 나오는데 정말로 양표의 아들 양수를 죽인것을 후회했는지는 미지수. 다만 조조와 친분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