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20:19:22

양표


후한의 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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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사공
64대 동탁 65대 양표 66대 순상
후한의 사공
68대 순우가 69대 양표 70대 조온
楊彪
(142년 ~ 225년)
1. 개요2. 생애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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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의 관료이자 양수의 아버지, 양사의 아들, 아내는 양태위부인 원씨[1] 자는 문선(文先). 사례 홍농군 화음현 출신.

2. 생애

홍농 양씨는 전한의 공신 양희[2]로부터 4세손 양창은 전한의 승상, 8세손 양진은 사도, 태위를 역임했고 양진의 아들 양사는 사공, 태위를 지낼 정도로 명문가였다.[3] 양표는 양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에서 공부해 처음에는 효렴에 추천되었다가 무재로 천거되어 삼공부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가지 않았으며, 희평 연간[4]에 양표가 아는 것이 많다는 소문이 퍼져 빈 수레를 보내 의랑으로 삼았다가 시중, 경조윤이 되었다. 광화 연간[5]에는 황문령 왕보가 자기 문중의 사람을 시켜 군의 경계 지역에서 남의 장사를 방해해 혼자서 이익을 독점하는 것으로 공적인 재물을 횡령해 7천만 전의 이익을 봤는데, 이를 간사하다고 밝혀 사례교위 양구에게 알렸다.

결국 양구가 왕보의 집에서 쉬는 것을 틈타 궁궐에 가서 왕보 일당의 죄악을 알려 이들을 붙잡아 하옥시켜 모진 고문을 해서 죽였으며, 왕보가 죽자 이 세상 사람 중에 좋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시중, 오관중랑장이 된 후에는 영천태수, 남양태수가 되었다가 다시 수도에 들어와서 시중, 영락소부, 태복, 위위가 되었으며, 189년에 동탁이 사공에서 태위가 되자 사공이 되었다가 겨울에 동탁이 상국, 사도 황완이 태위가 되면서 사도가 되었다.

190년에 관동 지방에서 반동탁 연합이 일어나면서 동탁이 분노하면서도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를 바꾸려고 하자 도읍을 옮기고 바꾸는 것은 천하의 대사이면서 옛날의 은나라의 반경이 다섯 번을 천도했다가 백성들의 원망을 사거나 왕망이 관중을 일으켰다가 그때마다 궁실을 불태우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한 명도 없게 된 것을 얘기했으며, 또한 광무제가 천명을 받아 낙양에 도읍해 천하를 평안하게 했는데, 아무 까닭없이 옮기면 백성들이 경악해 의심을 풀 것이라면서 개미떼처럼 모여 요란해질 것이라고 얘기했다.[6]

동탁이 그래도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집하자 백성들이 동요하기는 쉽지만 안정시키기는 어렵다고 했으며, 황완도 이를 거들었다가 순상이 동탁이 천도를 결심한 것을 느끼고 양표가 해를 입을까봐 누그러뜨리도록 말하면서 양표에게 사적으로 얘기해 반대한다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했다.

회의가 해산되자 동탁이 사례교위 선파(宣播)에게 상주하도록 시켜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을 이유로 황완과 함께 면직되었으며, 궁궐에 나아가 사죄하자 광록대부가 되었다가 십여 일 후에는 대홍려가 되었다. 대홍려에 이어서 소부, 태상이 되었다가 병이 들자 물러났는데, 경조윤, 광록훈이 되었다가 다시 광록대부가 되었다.

192년 가을에는 순우가(淳于嘉)를 대신해 사공이 되었다가 지진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가 태상으로 복직했으며, 194년에는 주준을 대신해 태위, 녹상서사가 되었다. 이때 이각, 곽사 등이 일으킨 삼보의 난이 일어나자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면서 위기의 순간에서도 죽음을 피하지 않았으며, 어가가 낙양으로 돌아가면서 상서령이 되었다.

196년에 도읍을 허도로 옮기면서 조회를 열 때 연주목 조조가 참석했는데, 양표의 얼굴색이 나쁜 것을 보고 조조는 양표가 자기를 어떻게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워 해 술자리가 시작하기 전에 아파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떠나자 양표도 병을 핑계로 떠났다. 이 당시에 원술이 분수없이 질서를 어지럽히자 조조는 양표가 원술이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것을 핑계로 양표가 황제를 폐위하려고 한다고 무고했다가 감옥에 넣어 대역죄로 몰고 갔는데, 이때 만총이 그를 문초하게 되었다. 순욱공융 등이
단지 죄상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에 그치고 형벌을 가하지는 마시오.
라고 부탁했지만 만총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법대로 심문했는데, 며칠이 지나 조조를 만나기를 청해 말하기를
양표를 심문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자는 먼저 그의 죄를 명백히 밝혀야만 하는데, 이 사람은 사해 안에서 명성이 있으므로 만일 죄가 명확하지 않으면 명공은 반드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사로이 명공 때문에 애석해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조조는 그날 중에 양표를 사면하여 석방시켰다. 처음에 순욱과 공융은 만총이 양표를 엄하게 심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매우 화를 냈었지만, 이러한 결과를 얻게 되자 오히려 만총에게 감사했다.

199년에 태상으로 복직되었다가 200년에 물러났으며, 양표의 아버지 양석이 왕자의 교육을 맡는 사람이라 진후로 봉해진 적이 있었지만, 206년에 은혜와 덕배로 봉해졌던 모든 제후들이 지위를 빼앗기면서 제후의 지위를 빼앗겼다. 양표는 한나라가 장차 끝날 것이라 생각해 다리에 쥐가 난다는 것을 핑계로 다시는 조정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219년에 아들 양수가 조조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죽으면서 부친 양표가 몹시 비통해하자 조조가 양표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이렇게 야위셨소?
양표가 대답하길
저는 부끄럽게도 한 무제의 신하였던 김일제(金日磾)와 같은 선견지명을 가지지 못해 자식을 죽게 하였습니다만 이제는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양표의 말에 조조의 안색이 바뀌었는데, 이것이 고사 노우지독(老牛舐犢)과 선견지명(先見之明)의 유래다.

221년에 조비가 즉위하면서 처음으로 태위 직을 제수한 인물은 자신의 측근이 아닌 양표였다. 조조 시절 워낙 잡음이 많았던 양표인데다가 그 아들인 양수가 조비의 라이벌인 조식의 측근이었음을 생각하면 미묘한 인사인데, 양표는 한나라 원로 고관 중 최후의 생존자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선양을 완수한 조비로서는 나름 의미가 있는 제스쳐. 그러나 양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실이 망해가는 가운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며 고사했다. 아마 조비 스스로도 넙죽 받아먹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취한 퍼포먼스일 듯. 양표의 거절로 태위직은 가후에게 돌아간다.

10월에 광록대부로 임명되었으며, 222년 사다새가 영지지로 모여든 것을 계기로 사도 왕랑이 양표에게 자리를 양도하고 사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비는 양표를 위해 이졸을 설치해 관위를 삼공 다음으로 정하고 왕랑을 계속 사도로 일하게 한다.

여담으로 홍농 양씨는 이후로도 문벌귀족으로서 수많은 관리를 배출하면서 입지를 유지했고 수나라를 세운 수문제도 홍농 양씨로 양진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당나라양귀비북송의 양가장도 홍농 양씨다.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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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술의 누이다.[2] 해하전투 이후 항우가 추격해 온 옛 부하 여마동을 보고 자결하자 여마동, 왕예, 양무, 여승과 함께 항우의 시신을 얻어 공신이 되었다. 고조공신열후 서열 103위이며 생몰은 ? ~ 기원전 168년이다.[3] 먼 훗날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황성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양제 양광의 본관이다.[4] 172년 ~ 178년이다.[5] 178년 ~ 184년이다.[6] 동탁전에 주로 딸린 한서에서는 그곳의 궁전이 무너져서 안 된다고 하자 동탁은 서쪽으로가 원씨 일가와 합류하라며 그를 면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