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09:49:48

태위


한나라의 공경
삼공(三公)
사마 사도 사공
구경(九卿)
태상 광록훈 위위 태복 정위 대홍려 종정 대사농 소부

고려의 삼사삼공
삼사(三師)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
삼공(三公)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
태자부(太子府)
태자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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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태부
(太子太傅)
태자태보
(太子太保)
태자소사
(太子少師)
태자소부
(太子少傅)
태자소보
(太子少保)


1. 고대 중국
1.1. 사례
2. 고려3. 관련 항목

1. 고대 중국

태위는 3공(三公)의 하나로 고대 및 중세 중국에서 군사 부문을 담당한 재상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문신(文臣)이 임명되었으며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1]

삼공(三公)의 하나로 전한 시기에는 태위(太尉)[2], 후한 시기에는 사마(司馬)라 칭해졌다.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했다. 녹봉은 4,200석이었다가 후한 말기에 대사마(大司馬)로 명칭이 바뀌고 나서 10,000석으로 올랐고, 실질적인 승상(丞相) 예우를 받았다.

태위로 유명한 인물로는 양수의 아버지 양표가 있으며, 이각이 황제를 겁박해 대사마의 자리를 얻었다. 가후, 만총사마의, 등애도 태위였다.

1.1. 사례


후한의 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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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조희
2대

우연
3대

조희
4대

모융
5대

포욱
6대

등표
7대

정홍
8대

송유
9대

윤목
10대

장포
11대

장우
12대

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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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
14대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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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포
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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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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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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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
20대

유희
21대

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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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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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광
35대

황경
36대

호광
37대

황경
38대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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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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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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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
42대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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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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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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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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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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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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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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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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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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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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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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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완
70대

조겸
71대

마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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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숭
73대

주충
74대

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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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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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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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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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종요화흠장패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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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총장제왕릉사마부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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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왕상위진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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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당시 한나라 황제인 영제로부터 무려 1억 전[3]이나 주고 산 벼슬이다.[4] 물론 임관기간은 짧았지만.

가후·종요 등은 조위의 태위였다.

동탁이 황자 유협황제로 앉히고, 스스로 태위의 자리에 올랐었다.
  • 양(梁)
    • 소굉(蕭宏) - 무황제(武皇帝) 소연(蕭衍)의 이복동생으로 2차에 걸쳐 7년을 역임했다. 그는 황족들의 으뜸이었기에 무제 소연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양나라에서 유일하게 삼공(三公)을 모두 역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굉은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그가 재임하는 동안 백성들을 수탈하여 집에는 재물이 가득 쌓였으며, 심지어는 황녀 영흥공주(永興公主)과 사통까지 했으나 종실로서 죄를 참작하여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실상 후경(侯景)이 대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建康)을 초토화시키기 이전에 이미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이다. 소굉 본인은 후경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사망하여 그가 쌓은 실책은 그의 후손들이 처리하게 되었다.
    • 원법승(元法僧) - 북위(北魏)의 종실 탁발종규(拓跋鐘葵)의 아들로 본래 북위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연호를 선포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남쪽으로 망명했다. 양 무제 소연은 원법승을 후대하며 송왕(宋王)으로 책봉했고 4년에 걸쳐 태위를 역임했으나 후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양려'(襄厲)라 했다. 양나라의 태위 중 유일한 북위황족 출신으로 아들로는 원경륭(元景隆)과 원경중(元景仲)이 있었다.
    • 곽원건(郭元建) - 태보(太保) 송자선(宋子仙)과 함께 후경의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임명된 인물로 태사(太師) 왕극(王克)이나 태부(太傅) 원라(元羅)가 인망을 위해 임명된 것과는 다르게 후경이 반역하는데 일조한 인물로 추정된다. 정통 황제로 인정되지 않는 후경이 임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양서(梁書)》에 따로 이름을 남기지 못했으며,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폐위를 주장할 때 왕위(王偉)와 대립하며 폐위를 반대했다. 본래 후경은 곽원건의 의견에 따르려 했으나 왕위가 결사반대하며 폐립을 주장하자 결국 본인의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태위 곽원건의 사상과 동시에 신하들에게 이끌려다니는 후경의 우유부단함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 북송
    • 홍신(洪信)

2. 고려

고려에서 임금의 고문 역할을 하던 국가 최고 명예직의 하나.

3. 관련 항목


[1] 실제로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은 대장군이 담당했다.[2] 이후 신나라에서 위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썼다.[3] 오늘날로 치자면 중견기업 1개를 설립할 정도의 어마무지한 돈이다.[4] 조숭으로부터 1억 전을 받고 태위 벼슬을 내린 영제의 말도 가관이다. "짐이 좀 더 비싼 값에 불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