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1:31:50

영제(후한)



한 황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10E0E 0%, #A11 20%, #A11 80%, #810E0E);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전한 前漢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고제 혜제 소제 소제 문제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경제 무제 소제 폐제 선제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원제 성제 애제 평제 정안공
후한 後漢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광무제 명제 장제 화제 상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안제 소제 순제 충제 질제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환제 영제 소제 헌제
계한 季漢
제30대 제31대
소열제 회제
비정통
동제
}}}}}}}}}

<colbgcolor=#A11><colcolor=#ece5b6>
후한 제12대 황제
효령황제 | 孝靈皇帝
출생 156년[1]
후한 병주 하간국
(現 허베이성 창저우시 인근)
즉위 168년 2월 17일
후한 하남군 낙양 외하문 만수정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189년 5월 13일 (향년 33세)
후한 하남군 낙양 남궁 가덕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문릉(文陵)
재위기간 후한의 황제
168년 2월 17일 ~ 189년 5월 13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유(劉)
굉(宏)
부모 부황 효인황
모후 효인황후
형제자매 외아들
배우자 효령황후, 영사황후, 영회황후
자녀 2남 1녀
작호 해독정후(解瀆亭侯)
시호 효령황제(孝靈皇帝)
연호 건녕(建寧, 168년 ~ 172년)
희평(熹平, 172년 ~ 178년)
광화(光和, 178년 ~ 184년)
중평(中平, 184년 ~ 189년)
}}}}}}}}} ||

1. 개요2. 생애
2.1. 2차 당고의 금(169)2.2. 매관매직의 선두주자2.3. 환관과 척신이 설치고 난세가 시작되다
3. 가족 관계4. 평가 - 환령(桓靈)의 말세
4.1. 의외의 면모, 그러나 암군
5. 미디어 믹스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한나라의 제27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12대 황제. 는 굉(宏).

시법에 의하면 자 자체가 혼군에게 주는 시호다.[2][3] 환제와 함께 환령(桓靈)이라고 묶여 불리며, 후한 말의 대표적 암군으로 손꼽힌다.

명 4대 암군 가운데 정덕제만력제를 섞어 놓은 것 같은 한심한 황제. 그야말로 완전히 돈에만 미쳐버린 무능한 상인 황제라고 불릴 만한 사람으로, 황제라는 사람이 앞장서서 매관매직을 장려한 정신나간 짓거리를 벌였다. 후한은 그야말로 영제 때문에 망했고, 십상시태평도는 영제의 혼치로 벌어진 증상에 가까웠다.

또한, 영제의 아들들인 소제헌제동탁, 이각&곽사, 조조에게 실권을 빼앗겨서 자신들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퇴위당했기 때문에 실권이 있었던 마지막 후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영제는 장제의 현손, 하간효왕 유개(劉開)의 증손, 해독정후(解瀆亭侯)인 유숙(劉淑)[4]의 손자, 해독정후인 유장(劉萇)[5]의 아들이다. 친모는 효인황후 동씨[6]이며, 외삼촌은 동총, 외사촌은 동중, 동승이 된다.[7]

환제의 5촌 조카로 환제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그에게는 배후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환관들과 권력 다툼을 하던 대장군 두무두태후의 옹립으로 13세에 즉위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두무는 당고의 금 때문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버린다.

2. 생애

2.1. 2차 당고의 금(169)

즉위 직후 2차 당고의 금이 벌어졌다. 두무는 정권이 영제로 바뀐 직후,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외척 두씨 세력은 진번 · 이응 등 청류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을 등용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오히려 환관들에게 계획이 들통나 거센 역습을 받고 패배했다.

두무는 일찌감치 자살해버렸고, 이응을 포함해서 잡혀 죽은 자만 100여 명이 넘었고,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은 자는 600 ~ 700명이 되었다. 태학생 1,000명이 체포되어 사인 집단은 강한 타격을 받는다. 사건에 연루된 외척들도 마찬가지였고. 결론적으로 환관을 제어할 집단들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브레이크가 사라진 것.

단순히 금고형에 처했던 1차 사건과는 달리 아예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호족 및 사대부 세력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면서, 후한 정권에 대한 지지는 폭락했다. 즉, 환제의 '당고의 금'은 말그대로 금령 정도였지만, 영제의 당고의 금은 다른 말로 '당고의 옥'이었다. 대규모 옥사와 국문으로 시작부터 외척과 사족에 대한 환관의 우위를 확정시켰다.

이후로도 영제는 사족들을 대대적인 언론 탄압으로 축출했고, 직언을 매우 싫어하여 직언이 들어오는 족족 목을 날려버렸다. 이러다보니 영제의 독재와 무능, 불통에 실망하고 질린 사대부들은 출사를 포기하고 기반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했으며, 영제의 뜻에 영합하는 친황제 세력, 즉 환관 세력과 약삭빠른 사대부들만 권세를 누렸으니 여기서 청류파와 탁류파라는 기준이 생겨났다. 황제에 영합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칭해지고 황제에 영합하는 사람은 더럽다고 칭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2.2. 매관매직의 선두주자

사실 영제가 원래는 황실과 거리가 있었고 집안이 가난하였기에 장사꾼으로 큰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려고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두씨 일족이 영제의 배후에 세력이 없어 영제를 다루기 쉬울 것이라는 이유로 황제로 옹립했지만, 결과적으로 영제는 당고의 금과 두씨 일족 숙청을 통해 불과 13세의 나이에 견제 세력이 전무한 절대 왕권을 구축했다. 물론 영제가 13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환관들에게 이용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일반 사회와 격리되어있던 중국 황실의 특성상 환관 세력은 황제권에 기생하는 방법이 아니고는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고, 따라서 그들이 황제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기에 환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환관들을 통해 강력한 외척 세력을 박살낸 것 자체만으로는 논리상의 문제가 없고, 영제 본인 역시 정치를 못한 것과는 상관없이 치세 전반에 걸쳐 반대 세력에 대한 폭압적인 숙청을 통해 강력한 황권을 유지하는 일만큼은 무척 열심이었다.

문제는 영제가 가난한 시절에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일에 완전히 미쳐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되어서도 오직 돈벌이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는 영제가 즉위 때까지는 돈을 실컷 쓸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아무리 군주라고 해도 국가 예산을 쓰는 데는 엄연히 정해진 절차가 있었던 데다,[8] 이미 영제 이전부터 심해진 부정부패로 엉망이 되어가던 한(漢)나라의 국고는 황제가 마음대로 예산을 빼서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영제는 마음 먹은 대로 돈을 쓸 수 없게 되자 각종 기묘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아예 모든 벼슬에 정가를 매기며 황제인 자신이 직접 매관매직에 나서는 기행을 벌인다. 당시 후한에서 이미 매관매직이 환관과 외척을 통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황제 본인이 매관매직에 나선 경우는 전무후무하다.[9] 심지어는 벼슬을 외상으로 팔고 부임 후 정가의 2배를 내는 제도까지 도입했다. 안 내면 당연히 관직을 박탈했다. 더 골때리는 건 신용카드마냥 진짜 관직 매매가를 월단위 할부로 치를 수 있게까지 했다는 것.

소설 《삼국지 연의》에서는 매관매직이 십상시들의 소행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니며, 전부 다 돈에 미친 영제가 벌인 악행이었다.[10] 나중에 가면 신임 관리는 물론 자리를 옮기는 기존 관리들도 반드시 궁궐 수리 명목으로 돈을 바쳐야 부임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정직한 사람들은 황명이 떨어진 이상 가지 않는 것은 황제를 거역하는 대죄가 되며, 그렇다고 당장 돈을 낼 재력도 없고, 돈을 내려면 황제에게 외상으로 빚을 진 뒤 백성들을 수탈하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부임하기를 싫어하여 사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더 큰 문제는 영제가 사직하는 관리들한테 화가 나서 부임(= 황제에게 돈을 헌납)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협박하여 견디지 못한 관리들이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좋은 예로 거록태수로 임명된 사마직(司馬直)이란 관리는 평소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는데, 영제는 사마직이 청렴하다는 이유로 '특별히' 정가에서 300만 전을 깎아주면서 사마직에게 부임(= 돈 헌납)을 강요했다. 영제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던 사마직은 고민 끝에 임지인 거록으로 향하던 중 자살했다.

관리들은 황제에게 진 빚을 질질 끌 수 없으니 백성들에게 온갖 탈법, 불법 행위를 자행하여 돈을 긁어모아 바치게 되었고, 이는 황제가 시킨 것이나 다름 없어 이러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영제 그 자신도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를 하여 이러한 현상을 더욱 조장하였기 때문에 황실의 부정부패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매관매직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통치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야심가와 협잡꾼들이 한몫 잡아볼 심산으로 관직 경매에 끼어들게 된다. 게다가 영제는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관직의 재임 기간을 대폭 줄여 임기는 대체로 1년을 넘지 못했고, 거액을 바치고 관직에 출사한 협잡꾼과 야바위꾼들이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영제에게 거액의 상납금을 바치고, 고위 관료들에게도 뇌물을 바쳤고 자신들도 본전을 뽑고 한몫 잡기 위해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일례를 들어보면 최고 실세였던 환관 왕보의 양자 왕길은 패국상으로 재임하던 기간 중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10,000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는 왕길이 제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요역을 부과했고 이를 제때에 이행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매질해 죽인 것이다. 이러다보니 굶어 죽거나 맞아 죽지 않은 백성들은 착취를 견디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랑민이 되거나 나중에는 아예 도적떼가 되었다.

이런 지경이니 당대에 매관매직이 아닌 방법으로 관리가 된 사람이라는 게 도적 퇴치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한 손견장거장순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현위가 된 유비 정도에 불과했다. 후에 유비가 독우를 패고 도망간 것도 벼슬을 얻는 과정에서 매관매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짤릴 걸 알고 선수를 쳤다는 설도 있다.

매관매직으로 생긴 수익의 일부는 부족한 국고에 충당되었지만 대부분은 영제 개인의 비자금이 되었고, 서원의 창고에 돈이 꽉꽉 들어차다 못해 넘쳐나자, 영제는 아예 황궁 밖의 십상시들의 창고에 나눠 보관하게 하는 꼼꼼함을 보이기도 했다. 십상시는 환관 세력 내에서도 대체로 신흥 세력에 속하는데, 이들은 영제의 비자금 마련이라는 목표에 따라 영제와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충실하게 보필하면서 떠오른 비선 조직이며, 그 중간에서 단단히 한몫 챙겼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영제는 '한나라'라는 회사의 회장이 되어서 매관 매직 사업으로 돈을 번 뒤, 이윤을 회사 자금으로도 썼지만 비자금으로 많이 빼돌렸단 소리가 된다.

당연히 이에 대해 직언하는 신하들도 증오하여 그들을 내쫓거나 죽이며 영제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그러나 막강한 황권을 구축하는 것과 그 권력을 통한 개인 비자금 조성에는 무척 열정적이었던 영제는 정작 국가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재위 내내 십상시의 간신질에 놀아나고 향락에만 빠져살았다. 여색은 기본이고,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대토목공사를 벌여 스프링클러로 도로를 청소하는 첨단 설비를 만들어놓고 즐거워하거나, 스스로 장군 복장을 하고 무상 장군이라 칭하며 군대를 사열하면서 놀거나, 아예 자기는 상인으로 차려 입고 작은 모의 시장을 만들어 궁녀들을 저잣거리 여성들로 삼아서 장사 놀이를 했는데, 궁녀들이 곧 사치품들을 사고 팔기는커녕 서로 자기가 갖겠다며 아귀다툼을 벌였고 광기 들린 영제는 그 꼴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즐겼다고 한다. 거기다 본인이 키우는 에게 관료들이 쓰는 관인 진현관을 씌워놓고 희롱하고 놀았다.[11] 또한 나귀를 수레에 여러마리 묶어놓고 낙양 도심을 질주하기도 했는데, 낙양 사람들은 이걸 한심하게 여기기는커녕 너도 나도 즐거워하며 이 꼬라지를 따라했다. 이 때문에 당나귀를 타는 것이 유행이 되어 당나귀 값이 말보다 비싸졌다는 해프닝도 있다. 후한서에 나오는 영제가 타고 다닌 흰 당나귀는 바로 은거하는 자의 상징이 되었다. 또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영제가 돈벌이와 향락에만 빠져사는 동안 후한은 도적떼의 약탈이 빈발하는 가운데 관리들의 수탈이 더욱 가혹해지자 백성들은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기 시작하는 막장이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기근이 일어나고 질병이 돌아서 아사자와 유랑자가 속출했다. 국방이라고 안전하지도 않아 그동안 변방에 숨어살던 선비족, 강족 등의 이민족들이 기회를 엿보아 침입하여 변방을 약탈하는 사태들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이를 보면 후한 조정은 질서와 안보 유지라는 국가의 기본적 기능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무한 수탈이 반복됐으니 한나라는 스스로 망한 것이지 다른 누가 멸망시킨 것이 결코 아니며, 말 그대로 황제와 대신들이 모두 벼슬하는 도둑놈들이 된 것이다. 황건적의 난이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영제가 황제로서의 정무를 얼마나 보지 않았던지[12] 옥새가 어디 있는지 까먹는 지경까지 갔고 결국 옥새를 진짜로 분실하고 만다. 물론 옥새는 황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라 엄연히 부보랑(符寶郞)이라고 하는 옥새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직책이 있었다. 따라서 영제가 정무에 관심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나라의 혼란상이 옥새를 담당하는 관료들까지 제 소임을 하지 않거나 부재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보는 게 맞다.

2.3. 환관과 척신이 설치고 난세가 시작되다

이런 폐정의 결과 184년에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같은 해에 서량에서는 변장,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186년에는 흑산적이 하북을 휩쓸었으며, 187년에는 장거, 장순의 난이 일어나는 등 하나같이 10만 이상의 초대형 반란들이 각지에서 잇다른다. 마침 185년에는 초신성이 나타났는데,[13] 《후한서》 <천문지>에는 "점을 쳐 보자, 병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했다.#

이에 앞선 178년에 영제는 황후였던 송씨를 내치고 송씨 일족을 숙청, 배후 세력이 없던 천민 출신의 하씨(영사황후)를 새 황후로 세웠다. 하씨의 오빠인 하진은 하남윤으로 승진했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에는 대장군으로 승진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맡았는데, 성공적으로 진압을 마치고 영제와 십상시의 탄압 대상이었던 지방 유림 세력인 청류파에게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 위상이 크게 상승하게 된다.

지방 유림 세력이 반란에 합류할 것이 우려되었기에 당고는 해제되었고, 황건적의 난 진압에 합세했던 청류파들은 당고의 해제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으며, 황건난 발발 이전부터 청류파를 규합하며 재야의 거두로 떠올라 있던 원소가 하진을 지지하면서 하진과 십상시와의 대립은 깊어져 갔다. 동시에 하 황후와 영제의 친어머니인 효인황후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188년, 황건적의 난을 필두로 한 반란들이 대충 마무리되자 영제는 스스로 무상장군(無上將軍)[14]을 자칭하며 아껴두던 비자금을 풀어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설치하고, 십상시 중 하나인 건석을 상군 교위로 삼아 서원팔교위의 통수권을 맡겼고, 이하 중군 교위 원소, 하군 교위 포홍, 전군 교위 조조, 조군좌 교위 조융, 조군우 교위 풍방, 좌교위 하모, 우교위 순우경(淳于瓊)이 통솔했다.[15] 영제의 서원군 창설은 각지에서 반란이 잇다르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중앙군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이며, 특히 상군 교위 건석은 무상 장군인 영제를 대리해 서원군을 지휘하는 형식으로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군 하진조차 일개 교위인 건석의 명령에 따랐는데, 이는 하진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 해석된다.

또 영제는 그해 유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 제도를 부활시켰다. 원래 전한 시절 성제 시절에 주목을 설치했다가 폐지한 것을 25년 후한이 건국된 이래로 주의 장관을 자사로 부르다가 야심을 품은 유언의 제의로 188년부터 일부 자사를 목으로 바꿔 불렀다. 이 정책은 후한의 호족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 후한 말기에 중앙 관리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게 되어 환제 대에는 호족들이 '우리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그 횡포가 극에 달해, 후한 정권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설상가상으로 영제의 실정으로 발생한 당고의 금,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각지의 난으로 인해 지방의 통제력이 더욱 약화된 후한 체제를 보완하기 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중앙군의 강화를 노린 서원팔교위와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목은 주의 관원들을 감독하는 감찰관일 뿐 아니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으로, 목이 되면 한 주의 군사력과 인력, 재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어 후한의 지방 자치화, 다르게 말하면 후한의 사분오열을 가속화시켰다.[16]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난을 진압한 관리들은 후한의 분열을 이끌고 있었고, 이미 이때 후한은 국가 멸망 테크의 궤도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제는 이러한 혼란 속에 중병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주색에 빠져서 몸에 많이 해를 끼쳤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에 뒤이어 일어난 십상시의 난동탁의 집권은 한나라를 끝장내버렸다. 한마디로 국민들에게 피해만 주고 죽어버린 더러운 황제다. 그래서 그의 시호도 어지럽히고 그 어지러움을 덜어내지 못한 어리석은 군주라는 뜻의 영(靈)이다. 그의 학정은 위진남북조시대라는 중국사 최대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400년이 지난 수나라문제나 되어야 안정된다.

3. 가족 관계

4. 평가 - 환령(桓靈)의 말세

상인 마인드로 황제 짓을 하면 망한다는 걸 보여준 반면교사이자 위진남북조라는 중국사 최악의 혼란기를 개막하신 위대한 황제 되시겠다. 전대의 주유왕, 이세황제와 후대의 진세조, 수양제, 당의종, 송휘종, 만력제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군주로, 제갈량의 출사표에 따르면 유비와 제갈량은 후한이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하면서 환제와 영제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후한을 결정적으로 박살낸 것은 동탁이지만, 환제가 환관전횡의 배경을 조성했다면 영제는 망조든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며 후한의 사회 체계 전체를 통째로 헤집어 놨고, 정통성 없는 동탁의 집권이라는 계기 하나만으로 겉껍데기만 남은 국가 시스템이 한 방에 공중분해되고 수십 년간의 내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놨기 때문. 이 시기 먹고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은 옛 진(秦)나라에 의해 6국이 멸망하자 고조선으로 대거 이동한 것처럼 대규모로 이민갔다고 한다.

암군의 측면이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개인의 권력과 권위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직언 하는 신화들을 내치거나 죽이는 행보는 폭군의 그것으로 매관매직과 환관 중용, 신권의 약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위치를 극도로 강화하고자 하는 면모가 보인다. 하황후와 하진을 중용하면서 환관 세력을 통제하고 내부의 충성경쟁을 시킨 것이나,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황보숭, 주준, 노식 같은 인물들이 활동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은 것을 보면 정치감각이 제로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본인의 정치감각이 심각한 수준의 근시안이라는 점과, 본인의 안위와 욕구에 철두철미하게 충실하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의도가 대단히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딱 영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은 누릴거 다 누리고 하고 싶은거 다하면서 자기 자리와 권위는 안전하게 보존한 안좋은 의미로 왕답게 살다간 인물이다. 물론 그 결과 세기에 걸쳐 번성했던 대제국이 흔적도 없이 공중분해되버렸지만. 일단 영제의 치세가 후대에 끼친 큰 악영향을 두 가지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거대 민란과 매관매직 등으로 인한 실정으로 인해 지방호족들의 군벌화가 극속도로 진행됨.

영제 이전에는 그나마 지방호족은 수도로 천거한 관리를 내보냄으로서 중앙 정계와의 관계를 느슨하게 유지하되, 지역 내의 영향력 발휘 및 실권은 장악하는 형식에 만족했다. 호족들 입장에서는 굳이 군사력을 키워 중앙 정계와 적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중앙정부는 중앙정부대로 그들과 적대하지 않고 관직 등용등을 통해 그들의 실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줄거 주고 받는거 받는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중앙정계로 진출한 청류파가 지방호족 + 유학자들의 조합이었던 것도 이에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중앙권력의 존재는 지역에 근거를 든 그들에고도 실질적인 메리트였을 뿐만 아니라, 힘이 아니라 명분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유가적 가치추구와도 충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부에 대응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한정권의 실책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할 수 있었던 청류파를 완전히 멸족시키다 시피 몰아낸 영제의 환류파 편들기 매관매직에 의한 극단적인 친위세력 양성 구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가렴주구 행태는 호족들과 유학자들은 물론이고 그 아래에 있던 바닥 민심마저 한나라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특히 민심이 흔들리면서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민란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도적들이 들끓게 되자, 한나라에 의존하는 형식의 권력구도가 흔들리고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각자도생에 입각하게 된다. 이 와중에 세력과 군사력을 갖춘 지방관들이 호족의 협력 하에 군벌이 되어 각종 위협으로부터 각 지역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부상하게 되었는데, 비록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난이라는 대규모 사건이 있었다고나 하나 영제의 폭정이 아니었더라면 중앙정부의 정치적 난맥만으로 군벌들에 의해 나라가 쪼개지는 군웅할거와 삼국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 한 황실을 보존할 유능한 정치집단과 친위세력을 자기가 알아서 파괴함.

청류파든 환류파든 외척이든 간에 각자 나름의 욕심과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한 황실에 접근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중에서는 능력과 충심을 가지고 한나라와 한 황실을 보위할 지사들이 분명히 있었고, 오랜 기간 존속해온 한왕조의 권위와 정통성, 그리고 유구한 통치는 그런 지사들에게는 충분히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분명히 가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제는 본인의 권위와 권력에만 집착하면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아니면 존속할 수 없는 환관세력과 관직을 내려준 자기자신에게만 철저히 복종하는 예스맨들인 탐관오리들만으로 중앙정권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머지에 속하는 이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거나 내쫓음으로서 한황실에 대한 권위와 정통성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렸다. 결국 너무 그림에 그린듯한 암군이 되다보니, 군주에 대해 충성할 명분이 사라졌고, 한황실을 걱정하는 지사들은 탄식하며 낙향하거나 은거해버렸다. 올라가봤자 관직도 못가지고 돈 없고 왕의 눈에 거슬리면 죽거나 쫓겨나는 판에 무슨 수로 상소를 하고 간언을 한단 말인가? 이걸 보자면 황건적의 난 당시에 하진황보숭, 주준, 노식 같은 멀쩡하고 제정신 박한 이들을 등용할 수 있었던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 호족 세력들을 상대로 대놓고 빅엿을 먹임으로서 지역 호족들 중에서 중앙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이를 지지할 근왕세력을 실질적으로 말소시킨 것은 한황실을 완벽하게 고립되게 만드는데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황실을 지키고, 새로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야심가들과 환관 사이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하진이 허무하게 암살당하고 나서부터는 사실상 정치세력으로서의 근왕세력은 끝나버리고 만다. 당장 영제 시절 전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관 + 호족 + 중앙 정계의 실력자들과 극소수의 지사들의 활약으로 이를 실패한 민란수준에서 정리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후소제 시절에 이르러서는 군공도 없이 제멋대로 중앙에 이민족 군대를 끌고온 군벌이 수도로 진군하여 제대로된 명분도 없이 황제를 갈아끼워도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할 지경이었고, 각 군벌들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세력을 넓히려고 시도하면서 전국이 전란기로 완전히 접어드는 등 한황실의 권위가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선황제였던 환제와 함께 세트로 엮여 아예 환령(桓靈)이라는 합성어가 만들어졌으며, 환령지말(桓靈之末)은 이 혼란했던 시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훗날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사례 교위 유의에게 환령과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어이없어한 사마염이 "아니,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오? 짐이 그들과 동급이란 말인가?!"라고 불쾌해 하자 유의는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을 해서 (일부지만) 국고라도 충당했지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옵니다!"라며 폭풍같이 디스했고 이에 사마염은 화를 내지 않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며 웃어넘겼다. 영제는 이런 신하가 나오는 족족 목을 날렸으니 확실히 그런 점에서는 사마염이 영제보다 낫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영제가 몰아붙인 황제 독재가 얼마가 기형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제가 절대 황권을 위해 귀족과 관료, 지방 세력을 탄압하며 직언을 듣는 족족 목을 날린것은 역으로 따지면 그런 피비린내나는 숙청 없이는 영제의 황제독재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위태로운 체제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마염은 난세를 직접 통일한 제국의 첫 황제라는 정치, 군사적 권위가 있어 영제만큼 신료들에 대한 과격한 숙청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면 그래도 환령 가운데서는 환제가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시법에서는 국토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킨 것을 환()이라고 하며,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이라고 했다. 그래서 '환(桓)'이라는 시호는 제(齊)나라제환공, 오(吳)나라 장사환왕 손책의 경우처럼 정말로 영토를 넓혀 국력을 향상시킨 군주가 받았던 반면, '영(靈)'이라는 시호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영공처럼 무도한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였다. 그러나 환제 이후로 환(桓)과 영(靈)이라는 시호 모두 어리석은 임금에게 주는 시호가 되었고, 환령(桓靈)동아시아 몇 천 년 역사 내내 암군의 대명사가 되어 자자손손 대차게 까이게 된다.

환령지말은 한국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정사 삼국지》 <한조>에서는 이 시기 살기 힘들어진 중국의 백성들이 한반도로 많이 유입됐다고 쓰고 있고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 한반도 남부까지 기존과 다른 외부문물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4.1. 의외의 면모, 그러나 암군

의외로 문학에 관심이 많아 육조시대의 문학 평론서인 문심조룡에 따르면 영제가 때때로 저술에 몰두하며 글자에 관한 저서인 황희편(皇羲篇)을 썼으며, 홍도문을 열어서 문인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영제가 들여온 문인들은 학식이 떨어지고 취향도 천박해서 채옹은 이들을 어릿광대에 비유했다고 하며, 문심조룡의 저자는 영제와 그 막하의 문인들이 남긴 글과 풍속들은 워낙 천박하여 기록으로 남을 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고 극딜했다.

자치통감》에선 토로 교위 갑훈에게 연습한 무예를 자랑했는데, 갑훈이 '무사를 더럽혔을 뿐!'이라고 꾸짖었다. 평소 같으면 목이 날아갔을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는지 영제는 "그대를 늦게 본 것이 한스럽구나! 많은 신하들이 애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갑훈을 칭찬했고, 갑훈은 원소에게 "황상을 직접 뵈니 매우 총명하신데 다만 좌우 사람들에게 가려졌을 뿐입니다."고 평가한 일화가 있으며. 말로만 칭찬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갑훈에게 여러 차례 자문을 구하며 나름대로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갑훈의 일화는 영제가 죽기 전 해의 시점인데 30대에 들어선 시점에서는 나이도 찬 데다, 그동안 싸지른 똥으로 이리저리 반란이 터지면서 어느 정도 현실을 인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영제가 후계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상황에서 즉위한 탓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대의 사마염에 비하면 단순히 자신의 사치향략에만 돈을 쓴 게 아니라 국고도 나름대로 신경썼다. 그러나 돈을 밝힌다는 하나의 특성만으로 그야말로 암군의 전형이 되어버렸다. 요컨대 황제가 아니라 출신 그대로 장사치를 했어야 할 인물.

영제가 비판받는 것은 무엇보다 영제의 시대가 한나라를 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이었다는 것이다. 영제는 저술 활동을 통해 나름대로 영민함을 뽐내는 등 적어도 지능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기괴한 방향으로 추진력을 발휘해서 문제였지만 나름대로 강단도 있는 군주였기에 마음만 먹었다면 환제 때의 적폐를 청산할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영제는 자기 대에 한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고, 단지 30대에 죽었기에 끝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십상시나 태평도 등으로 묻어가서 망정이지 중국사에 손꼽히는 암군으로 부족함이 없다.

5. 미디어 믹스

삼국지연의에서는 전형적인 암군으로 묘사된다. 이는 연의 뿐 아니라 연의를 기반으로 하거나 현대의 창작물이면 대부분 마찬가지. 그러나 암군으로 나오는 이유가 장양을 포함한 십상시들의 농간에 놀아난 것일 뿐, 본인은 그냥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하니 어찌보면 수혜라면 수혜. 위에 서술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영제는 나랏일에 무능했던 걸 떠나서 자신의 능력으로 적극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반기에 잠깐 등장하다 퇴장하는 역할이고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악당은 장양인지라 그 장양의 존재감을 띄워주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는 영제가 무능하기만 한 사람으로 표현된 게 되려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주름, 노망, 노환 등의 표현을 써서 이 사람을 노약자로 표현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 노인으로 나와서 그런지 노약자로 표현한 모양이다. 그래서 늙어 죽은 영감처럼 표현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사리판단이 어둡고 어리석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다.[19] 하지만 상술했던 것처럼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이다.

창천항로에서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지능 수준 또한 영락없는 아둔한 돼지로 나온다. 그나마 한 순간이지만 맨정신이 들 했던 때가, 당고의 금에 대해 조조가 올렸던 상소를 받고 고심하는 장면. 그러나 그 직후 장양의 새치혀에 바로 넘어가며 장양에게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이 네가 하는 모든 일은 짐을 위한 것이겠지? 였다. 머리가 돌이 아니고서야 왕의 저런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놈은 없다. 그전에 애초부터 황제가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답이 없다. 조조는 이런 영제의 모습을 보고 한나라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는다. 와병 중 하태후가 슴가를 이용해 고의적으로 질식사시키는데, 미디어믹스에서는 성관계 중 하태후의 슴가에 눌려 질식사한다. 이후에는 동탁에게 무덤을 파해쳐 고인능욕을 당한다. 애니 성우는 뜻밖에도 사사키 노조무.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하며 애니메이션 성우모리카와 토시유키다. 여기서는 34살로 요절하기 때문에 고증에 맞게 젊은 황제로 그려졌지만 여전히 방탕하고 무능한 암군으로 등장한다. 목소리 못지 않게 외모 역시 멋지기는 한데 기존의 이미지와 비슷한 방탕한 생활이 나오며 얼마 가지 않아서 사망한다. 죽기 직전 병상에서괴로워 죽겠소(とてもつらい)라고 하는 장면은 일종의 네타화되기도.

웹툰 삼국지톡에서도 놀다가 건강 망친 암군으로 묘사되는데 특히 황건적의 난 파트에선 황건적들이 나라 전토를 휘젓고 다니며 개판을 내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십상시랑 클럽에 가서 술판을 벌이는 걸 인수다구래무(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추태를 보였다. 이후 십상시의 난 파트에서 병사하는 것으로 퇴장.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13.jpg
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 중 몇 개의 게임 시리즈에서는 영제를 옹립하면 혜택을 볼 수 있기는 하다. 삼국지 6에서는 장각이 이끄는 황건 세력조차 장군직을 임명해 지휘 병력 수를 늘리려면 영제를 옹립해야만 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나왔으나, 이후에는 황건 세력으로 플레이해서 영제가 있는 도시를 점령하면 자동으로 폐위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하진 이외의 세력으로 옹립하여 플레이하기에는 하진의 장수진이 빵빵하다. 조조, 원소, 유표 등이 하진의 수하 장수다. 물론 삼국지 10 이후 시리즈부터는 손견, 유비, 유언, 동탁이 종속되어 있지만 독립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떨어져 나간다. 그래도 나머지 부하들은 건재해서 장수진이 좋은 편이다. 영제를 옹립하기도 쉽지 않은 편인 데다가 삼국지 시리즈는 3탄이 189년에 시작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무조건 184년부터 시작하여 영제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5년밖에 안 되므로 소제에 비하면 그나마 덜하지만 외면받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하진의 죽음과 동탁의 낙양 입성으로 시작하는 고로 이 인물은 언급만 된다.

삼국지 가후전에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영제(삼국지 가후전) 문서 참조.

김경한 삼국지에서는 십상시에게 대놓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연희 시리즈에서도 등장한 자세한 것은 영제(연희 시리즈) 참조. 여기서는 헌제의 언니로 나오며 능력이 어느 정도 되지만 천연인 성격이 발목을 잡는다.

SD건담 삼국전에서는 동탁 자쿠에게 이미 시해당했다는 설정으로, 등장은 본디 없었으나 애니메이션에서 시해되는 장면이 나와 디자인이 공개되었다. 사실상 기존 미리샤(후한)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여기서는 딱히 암군이란 말이 없다. 초기 설정에서는 윙 건담 제로(EW)이 모티브였다는 루머가 있다.

삼촌과 같이 삼국연의(1994)에 단역으로나마 잠시 비춰졌다.(?)

토탈 워: 삼국의 DLC 천명에서 노식, 유총과 함께 한나라 진영의 플레이어블 군주로 등장했다. 토탈 워: 삼국/세력/유굉 참조.

190년 캠페인에서는 사망한 상태이기에 182년 시점에서만 플레이가 가능하며[20] 부인 하태후와 함께 전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군주로 등장 한다. 영제로 플레이하지 않는 경우엔 189년에 영제가 붕어하면서 본격적인 군웅할거가 시작되나, 영제로 플레이하는 경우엔 자신의 사망을 선택할 수 있는 이벤트가 있어 역사 진행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군웅들은 한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기에 빠른 황건적 진압이 필요하다. 장각 3형제를 죽여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면 엔딩이지만, 이 후에도 군웅들을 진압하고 영토를 수복해 한나라의 재건하란 미션이 주어져서 끝까지 진행하도록 이벤트가 주어진다. Make Them Unique 모드를 사용할 경우 지휘관 장군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장군화 된 영제를 까보면 나름대로 사기캐릭터.

6. 둘러보기

후한서(後漢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10권 「황후기(皇后紀)」
곽성통 · 음여화 · 명덕황후 · 장덕황후 · 효화황후 · 등수 · 염희 · 양납 · 양여영 · 등맹녀 · 두묘 · 효인황후 · 효령황후 · 영사황후 · 복수 · 조절 · 무양장공주 · 열양공주 · 관도공주 · 육양공주 · 역읍공주 · 획가장공주 · 평양공주 · 융려공주 · 평지공주 · 심수공주 · 평고공주 · 준의공주 · 무안공주 · 노양공주 · 낙평공주 · 성안공주 · 무덕장공주 · 평읍공주 · 음안공주 · 수무장공주 · 공읍공주 · 임영공주 · 문희공주 · 무양장공주 · 관군장공주 · 여양장공주 · 양안장공주 · 영음장공주 · 양적장공주 · 만년공주
※ 사마표의 속한서는 志에 해당. 후한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3><tablewidth=100%><tablebgcolor=#a11><width=50%> 11권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3><width=50%> 12권 「왕유장이팽노열전(王劉張李彭盧列傳)」 ||
유현 · 유분자 왕창 · 유영 · 방맹 · 장보 · 왕굉 · 이헌 · 팽총 · 노방
13권 「외효공손술열전(隗囂公孫述列傳)」 14권 「종실사왕삼후열전(宗室四王三侯列傳)」
외효 · 공손술 유인 · 유량 · 유지 · 유흡 · 유사 · 유순 · 유가
15권 「이왕등내열전(李王鄧來列傳)」 16권 「등구열전(鄧寇列傳)」 17권 「풍잠가열전(馮岑賈列傳)」
이통 · 왕상 · 등신 · 내흡 등우 · 구순 풍이 · 잠팽 · 가복
18권 「오갑진장전(吳蓋陳臧列傳)」 19권 「경엄열전(耿弇列傳)」 20권 「요기왕패채준열전(銚期王霸祭遵列傳)」
오한 · 갑연 · 진준 · 장궁 경엄 요기 · 왕패 · 채준
21권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 22권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
임광 · 이충 · 만수 · 비동 · 유식 · 경순 주우 · 경단 · 왕량 · 두무 · 마성 · 유륭 · 부준 · 견담 · 마무
23권 「두융열전(竇融列傳)」 24권 「마원열전(馬援列傳)」 25권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傳)」
두융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26권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27권 「선장이왕두곽오승정조열전(宣張二王杜郭吳承鄭趙列傳)」
복담 · 후패 · 송홍,송유, · 채무 · 풍근 · 조희 · 모융 · 위표 선병 · 장담 · 왕담 · 왕량 · 두림 · 곽단 · 오량 · 승궁 · 정균 · 조전,조계,
28권 「환담풍연열전(桓譚馮衍列傳)」 29권 「신도강포영질운열전(申屠剛鮑永郅惲列傳)」 30권 「소경양후낭의양해열전(蘇竟楊厚郞顗襄楷列傳)」
환담 · 풍연 신도강 · 포영,포욱, · 질운 소경 · 양후 · 낭의 · 양해
31권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32권 「번굉음식열전(樊宏陰識列傳)」
곽급 · 두시 · 공분 · 장감 · 염범 · 왕당 · 소장 · 양속 · 가종 · 육강 범굉 · 음식
33권 「주풍우정주열전(朱馮虞鄭周列傳)」 34권 「양통열전(梁統列傳)」 35권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주부 · 풍방,풍석, ,유희, · 우연 · 정홍 · 주장 양통 장순 · 조포 · 정현
36권 「정범진가장열전(鄭范陳賈張列傳)」 37권 「환영정홍열전(桓榮丁鴻列傳)」 38권 「장법등풍탁양열전(張法滕馮度楊列傳)」
정흥 · 범승 · 진원 · 가규 · 장패 환영,환언, ,주총, · 정홍 장종 · 법웅 · 등무 · 풍곤 · 도상 · 양선
39권 「유조순우강유주조열전(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40권 「반표열전(班彪列傳)」
유평 · 조효 · 순우공 · 강혁 · 유반,유개, · 주반 · 조자 반표
41권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42권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
제오륜 · 종리의 · 송균 · 한랑 유강 · 유보 · 유강 · 유연 · 유언 · 유영 · 유창 · 유형 · 유형 · 유경
43권 「주악하열전(朱樂何列傳)」 44권 「등장서장호열전(鄧張徐張胡列傳)」 45권 「원장한주열전(袁張韓周列傳)」
주휘 · 악회 · 하창 등표 · 장우 · 서방 · 장민 · 호광 원안 · 장포 · 한릉 · 주영
46권 「곽진열전(郭陳列傳)」 47권 「반양열전(班梁列傳)」
곽궁 · 진총 반초 · 양근
48권 「양이적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 49권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
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50권 「명제팔왕열전(明帝八王列傳)」 51권 「이진방진교열전(李陳龐陳橋列傳)」
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사마포, ,마영,
55권 「장제팔왕열전(章帝八王列傳)」
유항 · 유전 · 유경 · 유수 · 유개(劉開) · 유숙 · 유만세 · 유승
56권 「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 57권 「두난유이유사열전(杜欒劉李劉謝列傳)」 58권 「우부갑장열전(虞傅蓋臧列傳)」
장호 · 왕공 · 충고 · 진구 두근 · 난파 · 유도 · 이운 · 유유 · 사필 우후 · 부섭 · 갑훈 · 장홍
59권 「장형열전(張衡列傳)」 60권 「마융채옹열전(馬融蔡邕列傳)」 61권 「좌주황열전(左周黃傳)」
장형 마융 · 채옹 좌웅 · 주거 · 황경
62권 「순한종진열전(荀韓鍾陳列傳)」 63권 「이두열전(李杜列傳)」 64권 「오연사노조열전(吳延史盧趙列傳)」
순숙 · 한소 · 종호 · 진식 이고,이섭, ,조준, · 두교 오우 · 연독 · 사필 · 노식 · 조기
65권 「황보장단열전(皇甫張段列)」 66권 「진왕열전(陳王列傳)」
황보규 · 장환 · 단경 진번 · 왕윤
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숙 · 이응,이수, · 두밀 · 유우 · 위영 · 하복 · 종자 · 파숙 · 범방 · 윤훈,윤목, · 채연 · 양척 · 장검 · 진상 · 공욱 · 원강 · 유유 · 가표 · 하옹
68권 「곽부허열전(郭符許列傳)」 69권 「두하열전(竇何列傳)」 70권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
곽태 · 부융 · 허소 두무 · 하진 정태 · 공융 · 순욱
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임문공 · 곽헌 · 허양 · 고획 · 왕교 · 사이오 · 양유 · 이남 · 이합 · 단예 · 요부 · 절상 · 번영 · 당단 · 공사목 · 허만 · 조언 · 번지장 · 선양 · 한열 · 동부 · 곽옥 · 화타 · 서등 · 비장방 · 소자훈 · 유근 · 좌자 · 허자훈 · 해노고 · 장초 · 왕진 · 학맹절 · 유화평
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

후한기(後漢紀)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2·3·4·5·6·7·8권 「광무제기(光武帝紀)」 9·10권 「명제기(明帝紀)」 11·12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13·14권 「화제기(和帝紀)」 15권 「상제기(殤帝紀)」 16·17권 「안제기(安帝紀)」
유조 유륭 유호
18·19권 「순제기(順帝紀)」 20권 「질제기(質帝紀)」 21·22권 「환제기(桓帝紀)」
유보 유찬 유지
23·24·25권 「영제기(霊帝紀)」 26·27·28·29·30권 「헌제기(獻帝紀)」
유굉 유협
}}}}}}}}}


[1] 삼국지의 시작이 이 사람의 말년이어서 부각이 안 되는 감이 있는데 삼국시대 세 나라의 시조격 군웅들하고 같은 세대였다. 조조보다 1살 연하이며 손견과 동갑이다. 유비보다는 5살 연상. 후한이 얼마나 소년 황제 부자 국가였는지 알게 해주는 점.[2] 우연히도 영락하다 할 때에 쓰는 한자인 零이랑 음과 부수가 같다.[3] 혼군에게 주는 다른 시호로는 , 등이 있다. 특히 의 경우는, 전쟁 하나로 나라를 완전히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린 이 인간의 시호에 들어간다.[4] 손자가 황제가 된 후 효원황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하씨도 효원황후로 추존되었다.[5] 익주목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과 동명이인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자 그는 효인황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동씨도 효인황후로 추존되었다.[6] 효인황후는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살, 정사에서는 갑자기 죽었다고 하거나 병사했다고 한다.[7] 선주전 주석. 이른바 '동태후'는 사실 황후였던 적이 없고, 친자인 영제에 의해 효인황후로 높여지고, 궁호를 영락(永樂)으로 하며 태후로 예우되었던 것이다. 동태후는 아들이 매관매직을 하는데 앞장서고, 자신이 직접 기른 진류왕을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는 등 영제의 혼치를 보태는 입장이었지만, 하태후하진에게 쫓겨나 귀양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유로 삼국지 소설 등에서는 상대적 보정을 받은 바 있다.[8] 중국에서 황제의 개인 자산인 내탕금과 국가 예산은 별개의 존재였다. 물론 군주도 먹고살며 품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지속적으로 상당한 돈이 떨어져 나가기에 전근대에서 오늘날까지 군주국들은 군주 일가의 재산과는 별개로 국가 예산에서 일부를 떼어 왕실/황실 자금으로 편성한다. 예컨대 프랑스 왕국의 경우 왕실과 관련된 예산이 국가 예산의 2-3% 정도였다. 따라서 군주가 국가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해서는 안 되고, 국가 역시 군주의 사적 재산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9] 다만 유럽에서도 절대주의 시절 프랑스의 경우 일부 중요 직책을 제외하면 매관매직이 합법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영제처럼 돈 펑펑 쓰기 위해서라는 정신나간 이유는 아니고, 돈이 많지만 신분은 낮은 부르주아 계층이 귀족으로 편입되어 기존의 군인 출신 귀족 계층을 견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10] 잘 생각해보면 당연한 게, 영제는 어쨌든 황제다. 후대의 헌제 때마냥 황제를 허수아비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동탁, 조조 같은 신하도 없었고, 아직 한 황실이 그 정도까지 망하진 않은 수준이었기에 당연히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아닌 일개 신하에 불과한 환관이 황제도 안 하는 매관매직을 한다? 역모나 마찬가지인 수준의 월권행위라 당장 구족이 멸해질 사안이다. 장양이고 뭐고 얄짤없다.[11] 중국사에 장군 놀이를 하는 황제는 간혹 있었으니 장군 행세는 그렇다고 쳐도 당시 천한 신분으로 여겨진 상인을 따라하면서 놀던 황제는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제는 어린 시절의 가난했던 기억이 정말 사무치게 박혀서 재물에 극도로 집착하게 된 듯하다.[12] 일반적 상황에서, 대신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정책현안을 황제에게 올리는데 황제는 검토한 다음 이걸 가부결정을 해야 한다. 가부결정에서 승인을 하면 옥새를 찍는 것이고 기각을 하면 옥새를 찍지 않는다. 물론 황제가 직접 생각해낸 정책현안은 자기가 직접 옥새를 찍으면 되기 때문에 굳이 가부결정을 할 필요는 없지만 명군 반열에 올라간 황제들은 이걸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상의한 다음 결정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무를 열심히 보는 황제는 손에서 옥새가 떨어질 날이 없다. 현대 국가들도 최고지도자(대통령이나 수상(의원내각제), 국왕 등)들이 의회에서 통과된 안건이나 행정명령을 발령해야 하는 상황에서 열심히 서명을 한다. 미국 대통령들을 보면 온갖 안건들에 대해 최종 가부를 결정할 때 서명(사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서명이 옛날 옥새 날인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13]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초신성이다.[14]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즉 최고의 장군이라는 의미로 144년 11월에 도적인 서봉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칭했던 적이 있다.[15] 이 중 원소, 조조는 후한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끌 주역이 되어 적수가 되었으며 순우경은 원소의 부하가 되었다.[16] 영제 시절만 해도 마등, 한수, 공손찬, 동탁이 어느 정도 군벌화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변경에서 강족, 선비 혹은 자기네들끼리 난투를 벌이느라 중앙정계 입장에서는 관심도 없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군벌화가 되는 건 유언의 건의로 군정권을 가진 주목이 설치되면서부터였고 그전까지 한나라 내륙으로는 군벌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십상시의 난과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한 왕조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그때부터 군웅할거라는 군벌들의 난투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조정이 "인정해줄 테니까 우리한테 세금 꼬박꼬박 잘 바치고 개기지 마라"라면서 줬던 게 주목이라는 관직이었으니까.[17] 생전에는 후궁이었는데 헌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18]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사료에 某(아무개)라 되어 있다.[19] 초반에 언급하였을 때는 실제 나이로 나왔지만 황건적의 난 당시 좌풍을 노식에게 보냈을 때부터는 노인으로 나온다.[20] 이는 184년에 사망한 장각 3형제와도 마찬가지. 노식의 경우 190년 캠페인에서 기용은 가능하지만 독자 세력으로 출현하지는 않으며, 유총 세력은 군웅할거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하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8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80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