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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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무종 정덕제 | 제11대 세종 가정제 | 제13대 신종 만력제 | 제15대 희종 천계제 |
1. 개요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최악의 황제 4명. 꽃보다 남자가 유행할 때 디시인사이드의 역사 갤러리[1]에서 이들을 명나라 F4라는 별명을 만들어 부르던 것에서 시작했다.명나라 F4 | ||
묘호 | 행각 | 재위 기간 |
무종 정덕제(武宗 正德帝) 주후조(朱厚照) | 아바타 놀이의 진수 | 16년 |
세종 가정제(世宗 嘉靖帝) 주후총(朱厚總) | 사이비 종교 광신도 | 46년 |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주익균(朱翊鈞) | 파업 전문가, 고려 성애자 | 48년[2] |
희종 천계제(熹宗 天啓帝) 주유교(朱由校) | 마에스트로 | 7년 |
이들의 재위기간은 명나라 존속 기간의 절반에 가까운[3] 117년이기 때문에 그냥 '명나라 후반기'라면 거의 이들의 시대다. 다른 12명의 황제는 총합 160년. 무종 즉위년부터 멸망까지로 따지면 139년으로, 절반을 넘는다. 당연히 나라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다만 가정제나 만력제는 그렇다 쳐도, 정덕제나 천계제는 그 둘에 비하면 할 말이 있는 편이기에 명 4대 암군 자체를 억지 밈 취급하며 가정제와 만력제만 까거나,[4] 정 꼽는다면 정덕제를 빼고 외정에서만큼은 만력제를 능가하는 무능함을 보였던 숭정제를 집어넣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 정덕제는 너무 놀아서 탈이었지[5], 그만큼 일도 열심히 했다.[6] 몽골 토벌 등 국방 측면에서는 꽤나 봐줄 만한 치적을 남겼고, 유근을 욕받이로 내세우다가 범죄 등 꼬투리가 잡히면 숙청하는 등 정치적 감각도 꽤나 좋은 편이었다. 사신단을 접견하면서 포르투갈과 교역을 시작하는 등 정화의 대원정같은 보여주기 식이 아닌 진짜배기 국제 교류도 정덕제 시기에 가장 활발했으며, 살인사건을 덮으려는 것을 '내가 진혜제로 보이냐'고 하면서 재조사를 통해 진상을 밝히기도 하는 등 통찰력 있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 천계제는 할아버지인 만력제가 아버지인 태창제를 장남이긴 하지만 천한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다고 싫어해 태자 책봉을 계속 늦추었기 때문에 문맹일 정도로 배움이 부족했던 것은 물론, 사실상 위충현의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2. 망국의 장본인들
중기 이후 명은 부족한 황제의 역량을 우수한 재상들이 땜질하던 대표격 왕조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정덕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 문서를 참고하자. 그 사이사이에 위치한 융경제, 태창제와 숭정제 문서도 읽어보면 명은 어떻게 망국이 되었나를 잘 알 수 있다.지금에 와서야 평가가 좀 많이 후해진 폭군이나 암군이라기엔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놀았던 플레이보이 정덕제,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나라를 망친 가정제, 무위의 도를 실천하느라 나라를 망친 만력제, 희대의 마에스트로 천계제 등 캐릭터도 참 가지각색이다. 그 사이에 낀 만명3대의안 같은 일 또한 쏠쏠하다. 다만 만력제는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원조 때문에 종종 "중국 입장에서나 암군이지 조선 입장에서는 도움이 된 황제이지 않느냐?"라는 옹호론이 나오거나 '암군이었지만 조선을 사랑했던 중국 황제' 정도로 미화하기도 하는데 사실 조선시대 이후 현대에 들어서까지 만력제를 칭송할 필요는 없는 것이, 당장 재조지은 운운하던 조선 양반들도 만력제에게 도움받은 것에 고마워한 것과는 별개로 만력제가 막장 황제인 점은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7]
다만 이런 황제들이 연임하는 가운데에도 주변에 대대적으로 영향력을 떨치기도 했고 획기적인 기술적 혁신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점으로 명나라의 관료체계가 얼마나 고도화했나를 증명하는 예시 혹은 홍무제가 얼마나 나라를 잘 만들어놨는지에 대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애초에 가정제와 만력제라는 희대의 종자들이 연임하는 와중에도 90년은 버틴 것도 앞선 80년간 홍무제를 시작으로 한 명군 라인들이 나라의 초석을 엄청나게 잘 닦아놨기 때문이다. 만력제 초기 명재상 장거정이 주도한 일조편법이라는 세제개혁으로 일시적인 중흥을 이루지만 그 이후 만력제가 파업하는 한편 만력 3대정으로 말끔하게 다 말아먹었다. 돈으로 비유하면 선덕제까지 쌓은 적금을 정덕제 때까진 어느 정도 유지하다가 가정제 때부터 본격적으로 까먹기 시작하더니 만력제 초기에 어찌어찌 다시 조금씩이나마 쌓게 되었다가 순식간에 다 까먹었고 결국 천계제 때 남은 것까지 다 날린 셈. 그 결과 명나라는 밖으로는 청나라의 침공, 안으로는 농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다.
3. 타국과의 비교
이 F4는 명나라의 이름을 떨친 홍무제~선덕제로 이어지는 명 초반 명군라인이 쌓은 위엄을 딱 90년 만에 까먹었단 점에서 다른 의미로 대단한 수준이다. 중국사 통일왕조를 통틀어 이 정도로 눈에 띄는 암군의 시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이러니한 건 다음 통일왕조 청나라도 누르하치~건륭제로 이어지는 초중기의 명군라인으로 기반을 닦았다가 마찬가지로 도광제[8]를 시작으로 한 암군의 연임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물론 청나라는 내외적인 상황상 답이 없는 명 4대 암군보단 실드쳐줄 사유가 많다. 정확히 청 몰락의 시작은 건륭제 때였는데, 이것도 건륭제 말기에 너무 오랜 재임기간이란 점이 터지면서 여러 문제가 연달아 터진 것에 가깝고 니오후루 허션이 엄청나게 해먹은 것도 한몫 한다. 거기에 이 시기 청나라는 서양의 접근으로 외부적으로 풍랑을 맞던 데다 도광제는 무능할지언정 황제치곤 상당히 검소하게 살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동치제, 광서제는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9]했지만 천계제처럼 서태후의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고 함풍제도 여러 악재가 겹쳐 결과가 최악으로만 나와서 그렇지 노력하려는 면은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여기는 만주족, 몽골족,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등이 묶여있는 사실상의 동군연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명나라의 황제들과 통치 난이도[10]부터 엄청난 차이가 난다.
4. 재평가
그러나 21세기 학계 연구가 진행되면서 정덕제와 만력제는 실제로는 나름 할 일은 다 한 사람이었고, 시대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능력은 없었지만 무너져가던 명나라를 현상유지로 연명시킬 정도의 능력은 되는 범군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오히려 숭정제와 동림당의 삽질이 조명되면서 숭정제가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암군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애초에 지적 장애로 추정되는 천계제는 논외고 가장 평이 나쁜 가정제도 암군으로 유명한 가정제때 굳이 나아진 것 하나를 꼽자면 십단법(十段法)과 같은 보다 더 합리적인 세금징수 제도를 시행하여 이갑제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장거정의 일조편법으로 이어지는 그 전단계 정도의 세제개혁을 해냈다는 평가는 있다. 자세한 방식은 이를 참고하라 (약간 설명) 이갑제 때려 뿌순 가정제 재평가 드가자명 후기의 환관 정치는 이전 시대인 당나라 때와 달리 황제들이 환관을 제대로 컨트롤하고 있었으며, 명 후기 사대부와 신사층으로 이루어진 신하들의 무능과 부패, 무책임함, 황제권의 무력화 등등에 맞서기 위한 비상수단이었다.[11] 물론 군주의 개인기로 현상유지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환관들이 매우 부패한 집단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위충현을 중심으로 한 환관 집단들은 어쨌든 세수 관리와 토목 사업으로 명나라 재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등 필요악에 가까웠다. 청나라라는 외부의 압력과 소빙기의 도래라는 내부의 압력으로 한계에 달한 상태에서 숭정제와 동림당의 삽질까지 겹쳐 북송 이후 유일하게 내부 반란으로 멸망한 왕조라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5. 관련 문서
[1] 일뽕 성향으로 변질되기 이전의 역갤이다.[2] 명 황제 중 최장 기간 재위.[3] 비율로는 42.4%. 반대로 청나라 최대 전성기였던 강건성세는 135년으로, 총 45.6%에 달한다.[4] 가정제와 만력제의 재위 기간만 합쳐도 명나라 전체 존속 기간의 1/3 전후가 되며, 청나라 때 집필한 명사에서 아예 '명나라는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 이미 망해 있었다.'라고 대놓고 깠다.[5] 심지어 사인도 놀다가 물에 빠진 뒤로 병을 얻어서다.[6] 어느 정도냐면 정덕제에게 중종반정을 속이기 위해 조선에서 엄청난 거짓말을 했는데 하필 정덕제가 재위 1년차라서 정덕제를 속이려고 별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자세한 건 중종반정 항목 참조.[7]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8] 그래도 범군 축에 들어가는 가경제 때까지는 나라가 대놓고 기울진 않았으나, 도광과 함풍에 들어 아편전쟁 때 삽질이 이어지며 백년국치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이 둘은 시대상이 너무 안 좋은 것(그레이트 게임)에 더해 하필 군주의 평균 역량이 높은 청의 군주라 상대평가로 더 까이는 면이 있다.[9] 즉위 당시 본인의 나이가 너무 어렸을뿐더러 자신의 섭정을 맡은 아버지 순친왕과 양어머니 융유태후에게 서태후만큼의 힘도 없고, 멸망 직전의 청을 맡은 선통제는 말할 것도 없다.[10] 청의 진짜 문제는 서세동점의 좋지 않은 시대를 맞은 19세기에 잔존한 15세기 명의 제도들과 지배층 집단에 널리 퍼진 안일한 현실인식이다. 황제의 개인기 차원에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11] 고대 로마 황제가 원로원을 패싱하고 정국 굴린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