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6 16:31:27

동림당

1. 소개2. 역사3. 평가

1. 소개

東林黨

명나라 후반 17세기의 당파로, 궁중에서 환관의 힘이 강해져서 관료들 가운데 나타난 반(反)환관 세력.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거점으로 삼아 동림당 혹은 동림파라고 불렸다. 이에 반하여 위충현과 친환관 세력은 이들이 고자라고 비하하며 엄당이라 불렸다.

동림서원은 본래 송나라 때, 양시(楊時)가 개창한 서원인데, 명나라 때는 고헌성(顧憲成)이 귀향한 뒤 고향 마을의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재건하였다. 고헌성은 명나라 후기에 인기를 끌었던 왕양명양명학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양명학에서는 인간의 양심인 ‘양지’를 강조하였으나 명나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실천적이고 수양적인 부분은 사라진 채 인간의 욕망이나 본능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면서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는 풍조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헌성은 주자학을 새롭게 연구하게 되었다.

2. 역사

고헌성이 정부 쇄신을 강조하며 수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정무 거부로 유명한 만력제였다. 결국 누차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헌성은 귀향을 선택하고 송대에 매우 유명했던 동림서원을 복구하고 유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되자 많은 유학자들이 동림서원을 찾아와 학문을 공부를 하면서 말기 증상을 보이던 명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림서원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되어 당대에 이들을 ‘동림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력22년(1594년) 고헌성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인사 추천에 분개한 만력제가 고헌성을 파직하고 귀향시킨 이후, 절강성 영파(寧波) 출신 심일관(沈一貫)을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 입각(內閣)시키고, 만력29년(1601년) 심일관을 수보내각대학사(首輔內閣大學士)로 임명하였다. 심일관은 요종문(姚宗文), 유정원(劉廷元), 방종철(方從哲) 등 절강 출신 사인들을 기용하면서 절당(浙黨)을 조직하였다. 이후, 관응진(官應震)과 오량사(吳亮嗣)를 주축으로 하는 초당(楚黨), 산동 출신 기시교(亓詩教)를 주축으로 하는 제당(齊黨)이 절당에 가세하여 제초절당(齊楚浙黨)이 만들어졌다. 제초절당은 ‘비동림당(非東林黨) 또는 반동림당(反東林黨)’이라 지칭되었고, 동림당을 공격하였으니, 이를 이르러 동림전쟁(東林戰爭)이라 한다.

만력제가 1620년 붕어하고 천계제가 즉위하자 동림당이 정치 일선에 잠시 복귀했으나[1], 천계제 역시 정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권력을 환관 위충현에게 몰아줬다. 위충현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동림당을 눈에 가시로 여기고 반동림당 세력을 결집해 동림당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고 아예 1625년에는 학문적 근거지였던 동림서원도 파괴해 권력 일선에서 다시 몰아냈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헌이 몰락하자 동림당은 다시 재건되었는데, 문제는 현실 물정을 모르는 그들이 실책을 거듭하여 명의 국가 재정을 더 말아먹었다.

3. 평가

동림당은 자신들 스스로를 부패하고 사악한 환관 세력인 엄당에 맞서 싸우는 정인군자라고 자처하였다. 하지만 사정을 자세히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동림당 출신 중에서도 엄당과 결탁하여 자기 잇속을 채우는 부패한 무리들도 있었으며 1644년 명나라에 맞선 반란군 대장인 이자성이 북경에 쳐들어와 숭정제가 자살하자 아예 이자성한테 빌붙어서 “대왕께서는 무공과 덕이 고대의 성군인 탕임금과 요순보다 더 낫습니다.”라고 낮부끄럽게 아부를 떨던 자들도 나타났다.

또한 동림당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반대파인 엄당을 극도로 증오하였고, 엄당 역시 동림당을 증오하여 서로 간의 당파 싸움이 매우 심하게 벌어졌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러한 당파 싸움이 명나라 말엽 조정의 내분을 극도로 격화시켜 국가 단합을 저해하고 결국 명나라가 청나라에 힘없이 무너지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 정권을 잡자 부패하고 모랄 해저드가 가득하다는 그 엄당 측에서 제대로 하던 경제 관련 일마저 제대로 망쳐버렸다. 먼저 부패를 척결한다고 강 치수 사업을 파토낸다거나, 오로지 사농공상의 기득권 사상을 강조한 끝에 해상 무역과 의류(패션) 사업 같이 세금이 나올 수 있는 형태의 지하 경제조차 없애는 삽질을 거듭했다. 이는 숭정 치세 말기에 전국에 홍수와 가뭄이 창궐하고, 군사비도 가중되어 백성들에 세금 부담이 떠넘겨진 끝에 도적 떼가 난리를 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미 과거 후한당고의 금 때에도 역사를 기록한 주체인 사대부들이 사서에 환관 및 외척 세력을 탁류로, 자기들을 그에 반대되는 청류로 해 놓으며 자기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남탓 서술을 해 놓았었다. 한마디로 동림당 역시 그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2] 다만 동림당이 더 최악인 것은 과거 이런 종류의 사대부들, 예컨데 후한의 청류 사인 같은 자들은 그래도 국가를 경영하고 군사적 위기를 막을 능력은 있었으나[3] 동림당은 그냥 관학인 성리학만 공부하고 유교 경전만 달달 외운 샌님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청류파들은 그래도 동림당보다 나았던 것이 후한 말의 청류파들은 후한의 멸망에 대한 책임은 크게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후한 말 환령시대에 청류파는 권력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콧방귀를 뀌며 농민 토지들을 강탈하는 일이야 있었지만 하필 환령시대 막판의 영제는 국가 전체를 매관매직으로 물들게 만든 양반이었고 또 그런 영제와 짝짝꿍해서 매관매직에 힘쓴 이들이 외척과 환관 세력이었다. 영제의 매관매직은 청류파의 토지점유는 귀여워보일 정도로 해악이 심각했다. 또한 환관, 외척에 비해서도 청류파는 인재풀과 능력이 좋았는데 환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외척에서도 대장군 하진 빼면 그다지 능력있는 인간들이 없었다.[4] 하지만 청류파와 그들과 연이 있는 인사들은 후한 말 군웅들의 인재가 된다. 우리가 삼국지에서 들어봤을 군웅들의 부하들 상당수는 청류파 출신이거나 그들과 연이 닿아있는 인사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의 후손인 문벌귀족들도 부패로 타락했다 하지만 적어도 화북 이민족둘보다는 나아서 선비족 모용부만 해도 세율이 70~80%에 달하는 수준인데 이는 조조의 둔전제가 50~60%임을 감안하면 가혹한 착취였고 또 이들 대부분은 현지 문벌귀족층을 체제 내로 포섭하는데 실패해 잠깐 반짝하다 단명했지만 이들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북위는 화북을 통일하는데 성공했고 100년넘게 존속할 수 있었다. 결국 비판점은 많아도 국가를 이끌 역량은 있던게 청류파와 그 후손인 문벌귀족들이었던 셈이고 반대로 환관은 청류파들의 비판 그대로 국가를 이끌 역량이 없었다. 특히 환관들은 당고의 금을 일으켜 권력을 독식해 기존까지의 후한 권력구조를 파괴해 결과적으로 후한의 통치를 막장으로 만들었다.[5] 청류파도 원소 같은 이를 진정한 효자라고 추앙하거나 유교 근본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문제점은 있었으나 적어도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예전 학설에는 위충현의 엄당이 명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보는 학설이 강했는데 2020년대부터 중국 역사학계조차 기존의 학설을 버리고 엄당보다는 반대파였던 동림당이 명나라 멸망의 원흉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학계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블로그조차도 최근 학설이 반영되었는데 명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엄당이 아니라 동림당이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동림당(東林黨)은 대명왕조를 어떻게 망가뜨렸는가?

[1] 중간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한달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장거정의 복권이 이 시기 동림당 손에서 이뤄졌다.[2] 특히 사서에서 붓을 놀린 옛 명나라 유민 사대부들은 엄당 세력이 원숭환의 처형을 조장했고 동림당은 끝까지 반대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상은 숭정제가 북경 민심과 황권 강화를 위해 이를 주도한 것에 가깝고, 동림당 출신 사대부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소신료들이 그에 찬성했기에 이를 엄당의 몫으로만 100%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3] 후한 영제황건적의 난 당시 당고의 금을 풀고 청류 사인들을 다시 등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고 청류 사인들은 어찌되었거나 후한이 직면한 이 군사적 위기를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4] 사실 환관 중에서도 조등이 있긴 한데 이 사람은 환제 시절에 사망했다.[5] 당고의 금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된 청류파들은 각자의 기반인 지방에서 힘을 키웠다. 결국 이는 후한 조정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게 만들었고 황건적의 난에다 영제의 붕어, 십상시의 난을 거치며 후한 정부의 권위가 빠르게 실추되자 군웅할거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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