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서원(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 대한민국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max(10%, 5em); min-height: 2em" {{{#!folding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0 -5px" | <colbgcolor=#cd313a><colcolor=#fff>일반 | 한국의 역사(단군 이래) · 역대 국호 · 역대 지도자 · 역대 국가 깃발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의 역사 |
기타 | 통일 한국 · 간도 · 녹둔도 · 대마주 · 역사왜곡 |
- [ 지리 ]
-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c1d1f><colbgcolor=#cd313a><colcolor=#fff><width=20%>일반
한국의 지명 · 수도 지리적 구분 한반도 · 수도권 · 충청 (대전·세종·충남 · 충북) · 호남 (광주·전남 · 전북) · 영남 (부울경 · 대구·경북) · 강원 (영서 · 영동) · 해서 · 관북 · 관서 · 제주 · 남한 · 북한 자연지리 산/고개 · 섬 · 강/하천 · 내륙 지역 · 동해 · 서해(황해) · 남해 · 동중국해 · 100대 명산 도시권 · 생활권 수도권 · 부산·울산권 · 대구권 · 광주권 · 대전권 · 생활권 행정구역 지방자치단체 · 광역자치단체 (특별시 · 광역시 · 도 · 특별자치시 · 특별자치도) · 기초자치단체 (인구 순위 · 인구 밀도 순위 · 면적 순위) · 행정구역 개편 · 도로명주소 · 팔도 · 이북 5도 교통 교통 · 공항 · 철도 · 고속도로 생물 생물자원 · 포유류(견종) · 파충류 · 어류(담수어류) · 양서류 · 조류 · 피낭동물 · 두족류 · 선류 · 태류 · 각류 · 양치식물 · 나자식물 · 현화식물 과학기지 세종 과학기지 · 장보고 과학기지 · 다산 과학기지 · 옹진소청초 해양과학기지 영토분쟁 독도 · NLL · 백두산 · 7광구 · 녹둔도 · 이어도 · 가거초 · 격렬비열도
- [ 군사 ]
- [ 정치 ]
-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c1d1f><colbgcolor=#cd313a><colcolor=#fff><width=20%>일반
한국의 정치 · 대한민국 훈장 · 법정 공휴일 국가 상징 국명 · 국기 · 국가 · 국화 · 국장 · 홍익인간 · 국새 정당 정당 · 보수정당 · 민주당계 정당 · 진보정당 · 극우정당 · 기독교정당 · 종교정당 · 제3지대 정당 · 단일쟁점정당 · 극좌정당 정부조직 국회 (국회의장 · 국회부의장 · 국회의원 · 국회의사당) · 정부 (대통령 · 국무총리 · 국무회의 · 행정각부 · 감사원) · 법원 (대법원 · 대법원장 · 대법관 · 각급법원) ·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장 · 헌법재판소 재판관) 제도 헌법 · 10차 개헌 · 국민의 4대 의무 선거 대통령 선거 · 국회의원 선거 · 전국동시지방선거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념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 대한민국의 진보주의 ·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 대한민국의 자유지상주의 ·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 한국 내셔널리즘 · 틀:대한민국의 이념 기타 정부24 · 대한민국 정부상징 · 공공누리 · 대한민국 대통령실(대한민국 대통령 관저) · 청와대
- [ 경제 ]
-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c1d1f><colbgcolor=#0047a0><colcolor=#fff><width=20%>일반
한국의 경제 · 한강의 기적 · 3저 호황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소득 · 자원 · 예산 · 긍정적 전망 · 부정적 전망 산업 한국의 산업 · 농축산업 · 수산업 · 공업 · IT · 과학기술력 · 우주개발 · 메이드 인 코리아 기업 한국의 기업 · 재벌 · 대기업 · 준대기업 · 중견기업 · 중소기업 · 자영업 무역 무역 지표 GDP · 경제성장률 · 환율 · 물가 · 물가지수 · 소비자 물가상승률 · 부채 · 가계부채 경제난 부정적 전망 · 실업 · 청년실업 · N포 세대 · 88만원 세대 · 수저계급론 · 86세대 책임론 기타 넥스트 일레븐 · 아시아의 네 마리 용 · 기초과학
- [ 사회 ]
-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c1d1f><colbgcolor=#0047a0><colcolor=#fff><width=20%>일반
사회 · 인구 · 세대 · 북한이탈주민(한국 외부의 탈북자, 탈북자 소재 매체 및 탈북민 인물) · 실향민 · 이산가족 · 이민 · 재외동포 · 검은 머리 외국인 · 재한 외국인 · 다문화가정 · TCK · 출산율 · 생애미혼율 · 혼인율 · 사망률 · 자살률 민족 한국인 · 한민족 · 중국계 한국인 · 일본계 한국인 · 한국계 중국인 · 한국계 일본인 · 한국계 미국인 · 고려인 · 화교 · 조선적 교육 한국의 교육 · 틀:교육 관련 문서 · 교육열 · 입시 위주 교육 · 문제점 종교 한국의 종교 · 개신교 · 불교 · 천주교 · 원불교 · 유교 · 천도교 · 증산도 · 대순진리회 · 대종교 · 무속 사건 · 사고 한국의 사건 및 사고 · 범죄 통계 사회 문제 · 갈등 한국 사회의 문제점 · 헬조선 · 국뽕 · 자국 혐오 ·니트족 · 열정페이 · 저출산 · 고령화 · 인종차별 · 난민 수용 논란 · 외국인 노동자 문제 · 지역 갈등 · 젠더 분쟁 · 성소수자 · 세대 갈등 ·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90년대 · 인터넷 검열 · 권위주의· 황금 티켓 증후군
- [ 외교 ]
-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c1d1f><colbgcolor=#0047a0><colcolor=#fff><width=20%>일반
- [ 문화 ]
-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c1d1f><colbgcolor=#0047a0><colcolor=#fff><width=20%>일반
한국의 문화 · 한류 · 콘텐츠 · 전통문화 · 민속놀이 · 신화 · 요괴 · 명절 (설날 · 추석 · 민족 최대의 명절 논쟁) · 성씨 · 대한민국 표준시 · 세는나이 · 예절 · 문화 검열 · 성문화 관광 한국의 관광 · 축제 · 국립공원 국가유산 국가유산 · 국보 · 보물 · 무형문화재 · 사적 · 명승 · 천연기념물 · 민속문화재 · 등록문화재 · 세계유산 · 세계기록유산 · 인류무형문화유산 · 세계유산 잠정목록 언어 · 문자 한국어 (표준어 · 방언) · 한국어의 높임법 · 한글 · 한글만능론 · 한자 (정체자 · 약자 · 한국의 한자 사용) 건축 건축 · 한옥 · 궁궐 · 성 · 무덤 · 사당 · 서원 · 향교 · 사찰 · 마천루 · 서낭당 · 신사 · 온돌 · 홍살문 의복 · 무기 한복 · 백의민족 · 갑옷 · 무기 · 한선 음식 음식 · 한정식 · 한과 · 전통음료 · 전통주 · 지리적 표시제 · 한민족의 식사량 스포츠 스포츠 · 태권도 · 씨름 · 택견 · 수박 · 활쏘기 · 족구 · e스포츠 문예 · 출판 문학 · 베스트셀러 · 웹소설 · 판타지 소설 미술 · 만화 현대미술 · 한국화 · 고화 · 만화 · 웹툰 · 애니메이션 · 만화 검열 게임 비디오 게임 · 온라인 게임 (MMORPG) · 게임 업계 현황 · 게임규제 음악 음악 · K-POP · 힙합 · 트로트 · 국악 · 판소리 · 사물놀이 · 아리랑 ·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98, '07, '18) 영화 · 연극 영화 · 천만 관객 돌파 영화 · 뮤지컬 방송 방송 · 드라마 · 예능 프로그램 · 웹드라마 · 웹예능 · 인터넷 방송 기타 한국형 · 한국적 · K- · 고요한 아침의 나라 · 변질된 유교적 전통 · 명절증후군 · 한국 기원설
1. 개요
서원(書院)은 조선 시대에 유교의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크게 나뉘어 있다.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다.서원의 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 원임(院任)들을 통해 이뤄졌다. 원장은 서원의 대표자로 보통 퇴직 관료나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 맡았다. 원장은 서원 기강 확립과 원생들의 행실 규찰을 담당했지만 서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강장은 서원에 입학한 원생들에게 경학과 예절을 가르치는 원임이었으며 훈장은 면학과 교관의 일종인 훈도를 책임지는 원임이었다.
서원운영은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재장(齋長)이라고도 불린 도유사(都有司) 또는 장의(掌議)[1]가 맡았다. 이밖에도 도유사 다음가는 직책인 부유사(副有司), 여러 사무를 분담해서 맡은 유사(有司), 간사 역할을 하는 직월(直月), 서기 역할을 하는 직일(直日)등이 있었다.
2. 역할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먼저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서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그러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익히도록 했다.
정치적 혼란으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 목표는 초기의 서원 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었던 것이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안회, 증자, 자사, 맹자의 사성과 그 밖의 십철,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및 송대의 6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국정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한편 국립 교육 기관과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서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다.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하였다.
3. 역사
서원의 기원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723년 당현종이 세운 여정수 (집현전)가 그 기원이라 한다. 다만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2년이었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은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학문을 하던 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했지만, 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건의하였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의 물자와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대에 건립된 수가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개소에 이르렀다.
서원은 지금으로 치자면 사립대학 정도의 위치다. 유명한 서원들은 명문 사립대 정도라고 보면 된다. 서원의 부작용도 잘 보면 현재의 사학재단 비리와 비슷한 것들도 많았다. 각 지방에서 사족들이 현재로 치면 학연 지연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처음엔 향교의 과거 입시 교육에 대한 대안학교 성격으로 출발하였지만 후기에 들어와서는 좀 문제점이 많았다. 재밌는 것은 각 서원에 가보면 자식의 입학 기념으로 건물 세워줬다는 것도 가끔 눈에 띈다. 유명한 서원들은 들어가기가 까다로웠는지 가문의 영광이라는 문구도 보이고 부정입학의 증후가 보이는 글귀도 있다.
16세기 후반 사림파가 향리에 은거하면서 향촌 사회에 대한 사림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서원이 설립되던 초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순기능이 컸다. 본래 국가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원이 난립하자 관리가 제대로 안 돼서 황폐화가 심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 폐단
17세기 이후 서원이 남설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 산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자신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말이 아니었다.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그래도 지방에선 터줏대감으로 큰소리를 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이들은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 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이런 서원의 폐단은 선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도 나올 정도다. 서원이 등장한 게 중종 시기, 사림이 본격적으로 주도권을 잡는 게 선조 시대인데 그때부터 말썽이었으니...
결국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조선이 뿌리 뽑으려 했던 고려 말 사찰의 폐단을 답습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힘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2]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또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원군 역시 집권 전에 만동묘에서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3.2. 서원 정리
서원의 폐단에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렇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서원 정리가 이뤄진다. 1727년(영조 3년) 12월에는 한 사람 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하면서 비교적 나중에 세워졌던 서원들을 정리했으며 1747년 4월(영조 23년)에도 허가없이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을 정리했다.고종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서원 정리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당장 1864년 7월(고종 1년)에는 사사로이 세워진 서원과 중첩되는 서원들을 일부 정리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에는 만동묘에 있던 신위와 현판을 황단(皇壇)[3]으로 옮기고 제사를 중단시키는데 이에 경악한 좨주 송래희(宋來熙)와 전국의 유생들이 반대소를 올리자 흥선대원군은 편액을 합쳐 일원화했으면 됐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씹었다. 사실 유학자들도 서원이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긴 읽었는지 이미 고종 1년에 대원군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나, 이 역시 철폐당했다. 그 후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 하에 둔 다음에 곧 이어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대거 철폐했다. 숙종, 영조 대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없이 모두 철거되었다.
야사에는 유생들의 반대가 극렬했다고 하는데 실록을 보면 매우 조용했다.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성현의 이름을 팔아서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도적들의 소굴이 된지 오래됐으니 어찌 놔둘 수 있겠는가?" 하면서 서원 철폐를 단행했고, 고종은 당시의 영의정인 김병학에게 이렇게 말했다.
1. 서원이 온통 백성을 괴롭히니 이것이 무슨 행각인가?
2.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 곳에서 모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3. 제현을 존중한다면서 자기 가문 조상을 모시는 게 서원이더냐? 산 사람을 모시는 사당은 또 무엇이냐?
2.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 곳에서 모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3. 제현을 존중한다면서 자기 가문 조상을 모시는 게 서원이더냐? 산 사람을 모시는 사당은 또 무엇이냐?
이 말에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서원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것도 아니라서 성현을 모욕한다는 말도 궁색했고 서원의 폐단은 안동 김씨들조차도 동의할 수준으로 심각했다.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가시적인 서원 반대소들이 없었다. 특히 불도저 같은 성격이었던 흥선대원군의 성격상 소를 올린다고 방침을 바꿀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대원군의 심기를 건드려 경을 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서원 철폐를 막아달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올라오기는 힘들었다.
결국, 상소는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에야 쏟아졌다. 그러나 고종은 이 중에서 만동묘 복구만 받아들였고 그나마도 관아의 통제 하에 두었다. 끝없는 상소를 받아든 고종은 "너희들은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모실 수 없단 말이더냐?" 라며 비꼬았다. 사실 서원의 폐단은 유림들이 봐도 분명했고, 산 사람을 모시거나 한 사람을 5~6곳에서 같이 모시는 등 여러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모든 서원의 복원을 주장하는 자는 없었고 송시열을 모시던 화양서원을 비롯해서 상징적인 곳에 대한 복구 요구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고종8년에 고종은 "정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왜 있느냐?" 면서 복원해줄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1870년 9월에는 사액서원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있다면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3.3. 서원 철폐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1871년 3월 9일에는 한 사람 당 하나의 서원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남겨놓을 만한 서원들만 조사해 보고하게 하였고 마침내 3월 20일에는 사액서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4] 안동 한 곳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서원은 이르면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 혹은 일제강점기 때 지역 유림들이 복원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일제가 강제로 철폐한 것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한국전쟁 때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남은 서원은 남한에 36곳, 북한에 11곳이 전부이다. 한국전쟁 이후 지역 유림들이 일부 복원한 서원들이 있긴 하나 소수에 불과하다.
서원 철폐가 붕당의 온상이라서 없앴단 말이 있는데 이건 고종이 서원을 철폐하면서 형식적으로 서원에서 붕당질을 한다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순조대 세도가문 독재가 시작되고 마지막으로 정치적 의리를 지니고 있던 당파인 노론 벽파와 남인이 완전히 실각하면서 붕당은 형해화된 상태였다.
재미있게도, 이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숭유억불 정책과 딱 상반된 일이다. 고려 말기 불교의 폐단이 조선 말기 서원의 폐단으로 그대로 답습했고, 이를 척결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반복된 것.
4.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서원 문서 참고하십시오.5. 서원 목록
자세한 내용은 서원/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6. 유사기구
6.1. 한국
6.1.1. 국립
6.1.2. 사립
6.2. 외국
7. 대중 매체에서
문명 4와 문명 6에서 한국 문명의 고유 건물/지구로 등장했다. 문명 4에서는 대학을 대체하는 건물로, 대학보다 더 많은 과학 보너스를 제공한다. 지도자인 왕건의 재정적 보너스와 조합되면 최상급 과학력을 보장한다. 문명 6에서는 캠퍼스를 대체하는 특수지구로, 언덕에만 건설할 수 있으며 다른 지구와 인접하면 인접 보너스를 더 받는 게 아니라 깎이는 대신 기본적으로 높은 타일산출 보너스를 받는다. 더군다나 한국의 문명 특성이 서원과 연계되어 있어, 한국을 플레이할 때 핵심으로 자리한다.[1] 성균관에도 장의가 있었지만 서원과 달리 유생 대표였다. 오늘날로 치면 학생회장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성균관이 국가 기관이었던만큼, 성균관의 장의가 주도해서 동맹 휴학이라도 일으키면 조정에서도 난리가 날 정도로 국가중대사가 벌어진 것으로 여겼다. 사실상, 오늘날의 명문대 학생회장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큰 것과 같은 셈이었다.[2] 이것을 화양묵패(華陽墨牌)라고 한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제사 지낼 돈을 내라는 청구서. 심지어 워낙 위세가 강력해서 수령들도 어쩌지 못했다.[3] '대보단(大報壇)'이라고도 한다. 만력제를 모신다는 점은 만동묘와 같으나, 관에서 세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4] 향교가 부·목·군·현마다 하나씩 있었으니까(300여 개) 그 3배나 되었다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