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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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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1945년 - 1948년2.2. 1948년 - 1965년2.3. 1965년 - 현재
3. 상세
3.1. 협정 영주 자격3.2. 조선적 유지 이유3.3. 일본 내 조선적 보유자의 감소3.4. 재일 대만적(台湾籍)
4. 북한의 대응5. 대한민국의 대응6. 여행의 자유7. 조선적 보유자들에 대한 논란8. 대중 매체9. 조선적 혹은 조선적 출신 인사들10. 참고 문헌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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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적(일본어: [ruby(朝鮮籍, ruby=ちょうせんせき)])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계 거주민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외국인 국적(출신) 분류 중 하나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조선적(朝鮮籍)이란 특정 국가의 국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한반도에는 대한제국만이 있었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으로 나라 자체가 없어졌다가 독립을 하면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갈라지게 되어버린다.[1] 갈라진 두 나라는 자신만이 한반도의 진정한 정부라고 주장하고, 자연스레 대한민국 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서로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에서 살던 주민'들 또한 자신의 국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해당하는 주민들은 각각 하나의 정부를 택해 국적을 취득하는 등 해당 정부를 통해 행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2][3] 문제는 이들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지,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었기에 두 정부 모두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 것. 이에 일본 정부가 다른 국가의 주권인 국적을 강제로 배정할 수도 없고[4] 어쩔 수 없이 이들의 국적을 "조선"으로 행정적으로 분류하고 택하길 기다리게 된다. 따라서 무국적자는 아니지만 행정적으로 행사하는 국적이 없으며[5] 이로 인해 실무적으로는 무국적자나 마찬가지다.[6][7]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본 제국외지인 '조선'이라는 출신 성분이 광복 이후에도 유지된 것이다.[8] 일본의 특별영주자 증명서에 '조선'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닌 '출신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9]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관리하는 호적에 기록하여 황국신민으로 강요[10], 종전 이후에는 조선인들의 호적을 말소해서 '조선'이라는 출신 지역만 남게 된 것이다.

2. 역사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은 일본 국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고 식민지에는 일본 제국의회의 법률이 영향을 크게 주지 않았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 후에도 일본에 잔류해 있던 조선인은 일본인 아닌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대일본제국 헌법일본국 헌법으로 전면 개정되어 시행되는 1947년 5월 3일의 전날인 1947년 5월 2일, 즉 대일본제국 헌법이 시행되는 마지막 날 최후의 칙령인 '외국인 등록령([ruby(外国人登録令, ruby=がいこくじんとうろくれい)])'이 공포되었다.[11]

외국인등록령은, 기본적으로는 패전국인 일본에 허가된 외국인 이외의 외국인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법령이었다. 일본은 연합국이 점령한 점령지였고, 아무 외국인이나 막 입국했다 출국했다 하면 패전국민의 인력 관리나 사회 혼란, 밀항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이를 막고자 한 것이다. 때문에 외국인등록령 제3조는 "외국인은 당분간 본국(내무대신이 정한 지역은 제외한다. 이하 같다.)에 들어올 수 없다."[12]라고 규정하고, 패전국 내 사무처리를 해야 하는 연합국의 군인 및 공무원은 일본에 입국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인등록령 제2조에서 "이 칙령에서 말하는 외국인이란, 일본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자 중 왼쪽 각 호에 해당하는 자[13] 이외의 자를 말한다."[14]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외국인을 통제하기 위하여, 제4조에 "외국인은 일본에 들어온 때에는 60일 이내에, 외국인이 아닌 자가 외국인이 된 때에는 14일 이내에 거주지를 정하여 내무대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거주지의 시정촌(도쿄도의 구부와 교토시, 오사카시, 나고야시, 요코하마시 및 고베시에서는 구 이하 이와 같다)의 장에 대하여 필요한 사항의 등록을 신청하여야 한다."라고 정하여 일본에 들어와 있는 모든 외국인에게 등록의무를 부과하였고, 거주지를 옮기거나 등록사항의 변경이 있을 때마다 이를 갱신토록 하고, 등록증을 항시 휴대하게 하고 이를 불시점검하였으며, 출국할 때 의무적으로 등록증을 반환하게 하였다. 이 조치로 인해 일본 내 외국인들은 일본 내도 자유롭게 오가기 어려웠고, 입국이나 출국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제11조에서 "대만인 가운데 내무대신이 정하는 사람과 조선인은 이 칙령의 적용에 대해서는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15]고 정했다.

외국인등록령에서 이 칙령에 적용에 있어서 조선인 및 대만인을 외국인으로 간주한 까닭은, 패전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과 대만인(중국 국적을 미취득한)을 일본인과 구별하기 위한 의도였다.
(다른해석) 외지(식민지 조선 및 대만)의 조선인들과 대만인들이 내지(일본)에 입국하는 것과, 식민지 출신인 이들이 일본 내에서 어떠한 소요사태 등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외지, 즉 일본의 식민지 출신도 일본인과 구별하기 어렵고 보통의 방법으로는 외지 출신을 통제할 수 없어서, 이 법의 적용에 관한 한 외지 출신은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때문에 초기의 조선적/대만적의 표기는 그들이 '이 칙령의 시행 이전부터 내지에 들어와 살던 외지인'임을 표시하기 위함과, '일본 국적자가 아닌 외지 출신'임을 표기하고 이를 내지인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해당 규정을 잘 보면 대만인은 지정한 사람만 칙령상 외국인으로 간주하게 되어 있다. 이는 일본 내에서 그 당시 이미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한 대만인과 그렇지 않은 대만인이 나눠져 있었기 때문이다.[16] 외국인등록령은 일본에 잔류한 식민지 조선인 및 대만인들에게 외지 출신이더라도 차후 일본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터놓는 한편 당분간 주거지 이동 및 출입국에 관한 한 이들을 외국인으로 보겠다라는 의도였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목적은 유학에서부터 막노동까지 매우 다양했다. 일제강점기 초기 토지 조사 사업으로 조선의 수많은 소작농들은 몰락하여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당시 일제의 공업화 계획은 주로 한반도의 북부 지방에 치중되었기 때문에 남부 지방에는 일자리가 부족했다. 반면 오사카를 비롯한 일본 본토의 공업도시들은 한창 성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도시빈민들이 값싼 노동자로 일하고자 도일하였다. 초기에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건너온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징병으로 부족해진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실시한 강제징용에 노무자로 건너온 사람들도 대단히 많았는데 이들의 숫자는 대략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의 패전 후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약 60만 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그대로 일본 땅에 남게 되었고, 외국인등록령이 발효되면서 조선과 일본을 왕래하기 대단히 어려워지자, 이들은 법령에서 정한 "당분간"이 지날 때까지 일본에 기약 없이 남아 있어야 했다.

이 칙령의 적용에 관한 한 조선인과 대만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본다는 외국인등록령 이후, 1952년 연합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였고, 이 조약으로 일본은 GHQ의 통치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였다. 국권을 회복한 일본은 본인들의 국적사무를 다시 조정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법무성 민사국은 국적 및 호적사무를 관장하는 각 행정부처에 통지문을 보낸다. "평화조약의 발효에 따른 조선인 및 대만인 등에 관한 국적 및 호적사무의 처리에 관하여(平和条約の発効に伴う朝鮮人台湾人等に関する国籍及び戸籍事務の処理について)"라는 통지문에서, 법무성 민사국은 "조선 및 대만은 조약의 발효일로부터 일본국의 영토로부터 분리되므로, 이에 따라 조선인 및 대만인은 내지에 거주하고 있는 자를 포함하여 모두 일본의 국적을 상실한다."[17]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제국시기 마지막 칙령에 따라 일본 국적을 갖고는 있으되 칙령의 적용에 있어서만 GHQ로부터 당분간 외국인 취급을 받았던 조선인 및 대만인들은, 주권이 회복된 일본국 정부 하에서는 정식으로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18]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들을 공식적으로 '평화조약국적이탈자'로 칭한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넘어온 조선인의 처우 문제만으로도 문제가 심각했지만, 1947년 외국인등록령 발포~1952년 평화조약에 따른 조선인 및 대만인 등에 관한 국적 및 호적사무의 처리에 관하여 통지 사이의 기간 동안 제주 4.3 사건6·25 전쟁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수의 한반도 출신 피난민이 일본으로 다시 몰리는 일이 빚어졌고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도 대단히 복잡해졌다. 일제 패망 후에도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한반도로 가지 않았다. 한반도는 미군의 개입 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처음부터 개척해야 하는 상태였고 나라도 미국에 원조를 받는 상태로 어려웠다. 재일 조선인은 대한민국에서 일자리를 얻기는커녕 농사 지을 땅이나 집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얼마 있다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나라가 잿더미가 되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라서 한국어를 못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일본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런저런 이유와 상관없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 근거하여 조선 및 대만은 조약의 발효일로부터 일본국의 영토로부터 분리되었다며 기계적으로 일본 국적을 말소한 것이다. 일본의 입장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 따라 한국 및 대만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되어 있으니, 조선 및 대만 식민지 출신은 처음부터 일본국적을 가진 적이 없었던 자로 처리하며[19], 그들에게는 원래 출신지 나라의 국적이 부여되면 될 일이다"로 요약되며, 대만적의 경우 대부분 1952년 당시 일본과 외교관계도 있었고 국제적으로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았던 중화민국의 국적을 갖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조선적은 그 방식을 적용할 수 없었다. 국적을 부여할 국가가 두 개로 나뉘어 있었고, 그 두 국가 모두 일본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두 국가 모두 이제 막 독립하고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상황이라 이들에게 선뜻 국적을 부여하고 자국민의 권리를 부여하기 어려웠다. 결국 조선적은 새로 생긴 두 조국 중 하나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어느 한 쪽에게 국적을 부여받을 수도 없었으며, 원래 있던 일본 국적은 아예 처음부터 무효로 취급되고 새로 귀화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적은 어느 하나도 선뜻 선택할 상황이 못 되었고, 이러한 상태는 1965년 한일수교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 나라 국적을 갖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에 귀화할 생각도 없는' 이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조선적 소지자들은 확실한 국적을 갖고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공공연한 차별 대우를 받아야 했다. 상술한 내용을 보면 이는 의도된 것이었다. 설사 일본으로의 귀화를 택한다고 하더라도 상술한 "평화조약에 따른 조선인 및 대만인 등에 관한 국적 및 호적사무의 처리에 관하여"라는 통지문에 따라서 조선적은 그냥 외국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일본으로의 귀화를 위해서는 귀화 조건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일본 국적을 얻기 위한 장벽이 있었다. 문제는 전후 일본에서 그게 쉬웠을 리가 없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이건 북한이건 정식 외교 관계도 수립하지 않고 있었고 때문에 이 두 국가 중 하나의 국적을 취득하기도 어려웠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불거진 이념 대립과 전쟁 때문에 교포 사회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해방 직후, 좌우 합작 및 민족 화합을 위해 '재일본조선인총연맹', 일명 '조련'이 결성 되었다.[20] 이후 조련에 반하여 '재일본조선거류민단' , 일명 '거류민단'이 결성되었다. 대립구도는 이때부터 어느정도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55년을 기점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와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완전히 분화되었다. 민단과 조련이 친남, 친북을 넘어 급속하게 남과 북의 대리인 양상을 띠었던 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6.25 전쟁은 남과 북의 이념대립으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은 재일에 남이냐 북이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민단은 참전운동을 벌였고, 600여 명의 재일 청년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재일학도의용군으로 활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일조선인의 국적은 편의상 지역명으로 '조선' 이었다. 이들은 정식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법적인 테두리 밖에 벗어나 교육, 의료,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법적,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이렇던 재일 조선인의 국적에 1965년 한일 협정[21] 이후로 변화가 생겼다. 냉전체제 하에 일본이 한국과 수교를 맺게 된 것이다. 이 협정에서 한국은 해방 이후 일본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법적인 보호를 위해 영주권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청을 하게된다.[22] 이에 따라 일본은 협정영주 자격 신청을 받게 된다. 이 영주 자격은 교육, 생활보호, 국민건강보험, 그리고 퇴거강제 조건[23] 등에서 우대를 받도록 했다. [24] 그러나 이 협정 영주 자격은 한국적자, 즉 한국의 재외국민등록증이나 여권을 가진 자로 한정되었다. 일부 재일조선인에게만 영주자격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일본이 냉전 체제 하에 한국만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수교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북한과 연계된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25]

여기서 더욱이 큰 문제는 이러한 분열을 '서류상'으로 남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일한국영사관은 한국 여권 발급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일본 법무성이 관리하는 외국인등록카드의 국적란을 '한국'으로 표시하도록 했다. 이는 한일 협정 이후 일본이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대해서만 '한국'은 국적명, '조선'은 지역명이라는 이중기준을 명시하게 만들었다.[26] 일본의 행정에 속하는 외국인 등록 제도가 냉전체제 하에서 한일간의 외교적 특수관게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중기준은 후에 '한국' 과 '조선'이라는 표시가 한반도 남/북 그리고 민단/총련 지지자를 구분하는 지표로 여겨져왔다는 점에서 재일조선인 사회를 명시적으로 갈라놓게 되었다. 이때의 조선 표시를 유지한 자를 조선적 재일조선인, 한국적을 취득한 자를 한국적 재일 조선인으로 구분해 부른다. 당연히 대한민국과 민단, 북한과 총련은 이들의 '한국'적 취득을 장려하거나 방해하는 활동들을 통해서 이들의 선택에 정치적으로 개입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협정 영주 자격 카테고리에 기술되어 있다.

한편 친대한민국 성향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것과 달리 북한은 일본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국적을 갖길 원하는 조선적 주민들은 그냥 조선적 상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현재까지 남은 조선적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조총련계이거나 친북 성향을 띄며 남한과 북한 어느 쪽도 아닌 중립적 신념 때문에 무국적으로 남은 조선적은 극소수다.

현 일본 정부는 이들을 '재일 코리안'(在日コリアン)이라고 칭하고[27] 이를 줄여 '재일(在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1년에 제정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근거해 일본의 국적을 이탈한 자 등의 출입국 관리에 대한 특례법(日本国との平和条約に基づき日本の国籍を離脱した者等の出入国管理に関する特例法)'에 의거해 '특별영주자'라는 재류 자격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는데 일본 사회에서 갖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다.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조선적인 사람들에게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남한이나 북한[28]으로 귀환하기를 권장한다.

현 시점에서 조선적을 유지하는 이들은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 버티며 일본 사회에도 잘 녹아들지 않고 있다. 얼핏 보면 일본 당국으로서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노릇이지만 이들이 사실상의 무국적자가 된 것은 일본 정부가 위의 칙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국적을 박탈해 놓고 재류자격[29]만 줘 버린 것이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우익적 서술이 강하다고 평가되곤 하는 일본어 위키백과의 '평화조약국적이탈자' 문서에서도 조선적의 사례를 들며 옛 지배국에 거주하는 식민지 출신 주민은 대개 복수국적으로 하는데 일본의 조치는 이례적이라고 서술했을 정도다.

특히 일본인들과 마찰이 가장 심했던 분야가 교육이었는데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교육 방침을 따르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적의 대부분인 조총련 계열 조선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학교를 세워 조선어를 교육 언어로 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물론 일본은 자국에서의 독립 사회 구축을 막으려고 하고 그 자금은 북한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대부분이다. 자연히 공산주의 교육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당연히 이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강제로 조선학교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8년 4월 24일 효고현에서 있었던 '한신 교육투쟁'이 있다.

2.1. 1945년 - 1948년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 1948년에 수립되었기 때문에 1945년에 일본 정부가 외국인 등록증의 국적으로써 '조선적(朝鮮籍)'이라는 분류를 생성할 때 한반도에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1945년에 일본 정부가 편의상 지역명으로써 조선적이라는 외국인 국적(출신) 분류를 생성한 것은 어느 측면에서도 잘못되거나 부적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선을 일본의 본토로 인식하지 않음을 일본 정부가[30] 표명한 것이었다.

2.2. 1948년 - 1965년

1948년에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었으나 일본은 이 2개 국가 중 어느 쪽과도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물론 공식 외교관계는 없었지만 1949년 1월 대한민국 정부가 도쿄에 주일본한국대표부를 설치하여 일본과의 외교 교류를 시작하였고 미군이나 국제기구 등을 통해서도 일본이 한국 및 북한과 교류를 수행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한국 간' 그리고 '일본-북한 간' 상호적으로 정부를 인정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1945년에 조선적이라는 국적(출신) 분류가 생성된 이후 현재까지도 조선적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재일 외국인으로 인정되지만 외국 국적으로 인정되는 수준도 아닌 사실상 무국적자에 해당한다.

2.3. 1965년 - 현재

대한민국과 일본이 1965년에 국교를 수립함에 따라 재일 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협정 영주 자격 신청이 진행됨에 따라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불법으로 규정하며 일본 지역의 모든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대한민국 국적으로 승계(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법적인 안정성을 위해 조선적 재일동포들 중 자의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변경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31] 현재 기준으로 일본 정부의 외국인 출신(국적) 분류 중 한반도에 관련된 것으로는 '조선'과 '한국'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없다.

3. 상세

3.1. 협정 영주 자격

위에서 기술했듯 협정 영주 자격은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재일조선인에 대한 법적 지위 안정화를 위해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자만이 신청 가능했으며, 교육, 생활보호, 국민건강보험, 그리고 퇴거강제 조건 등에서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남북 정부와 민단/총련은 재일조선인의 영주자격 신청에 정치적으로 개입했다. 분단 정치 상황에서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재일 조선인들을 포섭하고자 한 것이다. 이 협정 영주 자격 신청은 1966년부터 5년동안 접수를 받기 시작했는데, 초기 신청률은 재일조선인의 약 10% 가량으로 미비했다. 당사자들의 인식부족, 서류와 절차의 번잡함과 함께 심사과정의 엄격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일본은 동사무소에서 수리된 영주허가 신청서류를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돌려 입국심사관이 법무성이 보관하는 외국인등록부와 신청자의 '재일' 경력에 대해 심사를 진행했다.[32] 즉 협정영주 허가는 일본 법무성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대해 한국과 민단은 영주권 신청의 간소화를 주장했고, 1969년 8월 도쿄에서 진행된 법무장관회담에서 신청조건 완화가 결정되었다. [33] 이후 한국 정부와 민단은 미신청자를 포섭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게 된다. 결국, 협정영주 신청 마감일인 1971년 1월 16일까지 351,955명이 신청하여 협정영주 자격을 획득한다.[34] 그러나 여전히 약 25만 명의 조선적자가 신청하지 않았는데, 이는 밀입국자 등 신상문제로 인해 주저하는 자, 총련 소속 북한 지지자, 북송 가족에게의 정치적 보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중립계 및 방관자, 무지몽매하거나 중병자 로 밝혀졌다. [35]

북한 또한 체제경쟁의 일환으로 영주허가 신청 저지를 위한 선전과 운동을 벌이고, 이후 국적 서환(書換)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국적 서환 운동은 외국인 등록 국적란의 국적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기재변경해달라는 요청을 담은 운동이다.[36] 국적 서환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한일회담에서 한일 정부가 전체 조선인들을 사실상 한국국적자로 취급하는 것에 있었다. 1958년 2월에 대한민국 민법이 공포되자(1960년 1월 시행) 일본 법무성 민사국에서는 “동법 시행 후 (…) 모든 조선인에 대해 동법 중 친족 편에 따라 실무 처리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하여 모든 실무처리와 관련해서 ‘본국법’, 즉 “우리나라가 사실상 승인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법률”을 따르도록 한 것이다.[37] 이로 인해 총련계 재일조선인 중에서도 가족과의 재회나 부모님의 장례를 위해 일시적으로 남쪽 고향에 가거나, 혼인, 상속, 입양, 농지소유권 취득, 부동산 등기 등의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외국인등록 표시를 '한국'으로 전환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또한 글을 읽을 수 없는 자가 지인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한 이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국'으로 기재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38] 또한 위에서 서술했듯이 협정영주 자격을 취득하면 사회적 약자의 경우 퇴거강제조건에서 우대를 받았기에 강제송환을 피하기 위해 '한국'으로 전환하는 사례도 있었다.

외국인등록 국적란의 기재를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꾸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일본 법무성은 '정부통일견해'를 통해 '한국' 표시는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조선'은 행정상 편의를 위한 지역명이기 때문에 "외국인등록증의 국적 란을 국적표시에서 편의 기재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39] 이는 조선적을 유지하고자 하는 재일조선인들에게 강한 반발을 일으켰고, "정부통일견해"가 발표된 직후 1965년 10월 25일 총련은 도쿄에서 '조선국적요청자대회'를 열어 수천 명의 '조선'국적 서환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조선국적요청자연락회의'를 결정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외공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라는 요청서를 일본 법무대신에 보냈다. 11월 5일에는 북한 외무성도 성명을 내고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재일조선공민의 기본적 인권을 무조건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40] 지역 내 집단신청 사례가 증가하자, 법무성은 특정 조건에서만 서환을 허가하는 완화책을 내놓게 된다. 완화된 조건은 각주 참고[41] 그러나 이 조건에 해당되는 자는 극소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재일조선인들에게 한국이라는 국적표시, 여권발금은 그들에게 고향방문 및 외국으로의 이동을 보장하는 강력한 시스템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협정 영주 자격은 재일조선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민단 중심의 집단과 조선적을 유지한 총련 중심의 집단으로 나뉘어 분열을 심화시켰고, 동시에 협정영주 자격을 통해 한국적 취득자는 더 많은 권리와 안정성을 확보한 반면, 조선적자는 법적 불안정성을 지속적으로 겪었다.

그러나 이후 1991년 일본은 특별 영주자격을 만들어 조선적 재일 조선인도 일본 내에서 영주 자격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조석적을 유지하며 일본 사회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 [42]


3.2. 조선적 유지 이유

일본의 조선적 보유 재일동포들은 일본 국적자가 아니며, 대한민국 국적임과 동시에 북한 국적이지만 일본에서 둘 다 행사하지 않는 사람이다.[43][44] 그냥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에서 살던 주민과 그의 후손"들이며 대한민국 또는 북한의 국적을 행사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일 뿐이다. 행정상 무국적이므로 이익보다는 불편함(불이익)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적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거나 한때 오랜 기간 유지했던 재일동포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고 있다.
  • 첫번째는 북한 체제를 추종하여 북한 국적을 선택하고 싶지만 아직 일본-북한 간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국적(조선적)을 유지하는 경우로, 대부분의 조선적 보유자가 이 경우이다. 물론 이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조총련 또는 제3국 북한 대사관을 통해 북한 국적을 취득(신고)하고 북한 여권도 발급받을 수 있다. 단지 일본에서 분류상 조선적으로 분류될 뿐이다. 그래서 조선적이라 하면 북한 여권 소지자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다수이기는 해도 이 첫번째 경우에 한정된다.
  • 두번째는 대한민국과 북한 둘 다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하여, 남북한 중 어느 한쪽 편만 드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서 무국적을 유지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나중에 남북한이 통일이되면 그때 통일된 국가의 국적을 취득하겠다는 입장이다.
  • 세번째는 자신의 정체성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어느 쪽에도 속하지도 않는다고 보아 무국적(조선적)을 유지하는 경우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일제강점기에 부당한 피해를 받은 동포들이자 한국(조선)을 멸시하는 일본 사회에 맞서 싸운 피해자들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에 대해 계속 관심을 두고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한편, 대한민국에 반대하여 북한 국적이나 무국적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한국 사회의 관심과 보호는 몰라도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3.3. 일본 내 조선적 보유자의 감소

사실상 무국적자라는 지위로 인해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조선적 보유자 중 상당수는 대한민국 또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있다. 단순한 예를 들자면 여행이나 사업이나 학업을 목적으로 일본 바깥으로 출국할 경우 일본 또는 대한민국의 여권을 취득해야 하며 이는 곧 조선적을 이탈하는 것이다.

조선적 소지자의 숫자는 급격하게 줄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적이라는 출신(국적) 분류는 1945년과 1960년대 사이에 한국계 무국적자들에게 편의상 적용한 것이며 멀쩡히 국적이 있는 자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100만 명을 넘던 조선적 소지자들은 이제 소수집단이자 모두 고령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과 국적을 동일시하는 인식이 과거에 비해 점점 약해지는 현상도 많은 재일동포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 법무성은 일본의 '대한민국 국적자'의 숫자가 '조선적 소지자'의 숫자를 추월할 무렵인 1970년쯤부터 '한국-조선인'이라고 뭉뚱그려 발표해 왔으나 42년 만인 2012년부터 조선적 보유자 수를 따로 공개했는데 그 수는 40,617명이었다. 한편 대한민국 국적자는 489,431명이었다. 그나마도 2023년에는 24,305명으로 2012년보다 무려 40% 감소하여 16% 감소한 대한민국 국적자(410,156명)보다 감소세가 훨씬 가파르다.(일본 출입국재류관리청 자료) 여기에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390,218명을 더하면( 대한민국 외교부 재외동포현황(2023)) 2023년 기준 조선적 소지자들은 전체 재일동포(재일 코리안) 824,679명 중 약 2.95% 수준이다. 숫자 및 연령 등을 감안하면 일본의 조선적의 존재는 0%를 향하고 있으며 향후 30년 이내인 2040-50년대 무렵에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 확실시된다.

3.4. 재일 대만적(台湾籍)

참고로 조선적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대만적(台湾籍)'[45]이라는 것도 있다. 다만 조선적에 비해서는 미미할 정도로 훨씬 적은 숫자다.

4. 북한의 대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법 제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다음과 같다.
1. 공화국 창건 이전에 조선의 국적을 소유하였던 조선인과 그의 자녀로서 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자[46]
1. 다른 나라 공민 또는 무국적자로 있다가 합법적 절차로 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자
북한과 일본 정부에서는 적십자사 등 비교적 외교 마찰이 적은 경로를 통해 조선적 소지자들의 송환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1959년에 북한 귀국 희망자에 한한다는 조건으로 '귀국선' 을 보내기 시작했다. 귀국선은 1961년까지 북한과 일본을 오가며 약 7만 명 가량을 송환했는데 이들은 북한의 체제 선전의 목적으로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재일교포 북송 문서 참조.

하지만 많은 수의 귀국자들은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에 있었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47] 당시 증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납치되다시피 갔다고 하고 조금이라도 체제에 반대하는 발언을 할 경우 수용소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물론 자의에 의한 귀국이라고 해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전설적인 소문에 따르면 먼저 북한에 입국한 이들이 떠나기 전 남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가로로 써서 보내면 뒤따라 건너오고 세로로 써서 보내면 절대로 오지 마라"고 언질을 줬는데 북송 이후 오는 편지마다 온통 세로로 쓰인 것뿐이라 남은 이들이 떠나길 기피했다고 한다.[48] 북한 당국에서 일본 귀환민을 무조건 복잡한 군중으로 못박아 놓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조선적들은 무조건 복잡한 군중이다.[49]

1970년대까지는 귀국선 운용 외에 총련에 대한 지원도 계속 유지되었고 이런 까닭에 지금도 남한과 일본 등 '자본주의 진영' 에서는 총련을 친북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적 소지자를 위한 조선학교도 북한의 지원금으로 설립되고 운영된다는 이유로 한동안 민단계 교포들은 조선학교로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념 갈등 외에도 조선학교 출신자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일본 공립학교의 입학/편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북한에서는 사회적으로 큰 공을 세운 조선적 인사들도 자국인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해 주고 있는데 가령 권투선수 홍창수의 경우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내자 '공훈체육인' 호칭을 수여했다. 조선적 음악가나 무용수, 작가 등이 북한에서 열리는 경연대회 등에 참가해 입상하거나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배우/공훈예술가 혹은 인민배우/인민예술가 등의 호칭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안영학 같은 조선적 축구 선수가 북한 대표팀에서 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1990년대 이전이면 몰라도 21세기에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보니 저런 립서비스 외에 '실질적'인 혜택은 거의 주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에 있다가 북한으로 건너간 조선적 중 적잖은 수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으며 특히 일본에서 유년기를 경험한 어린 세대들의 실망감이 컸다고 한다. 복지천국, 지상락원이라고 알았던 곳이 설마 지상 최악의 헬게이트였을 줄은 몰랐을 테니…

5. 대한민국의 대응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을 계기로 양국 간의 관계가 공식 회복되며 재일교포들에게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강력히 권장하였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계 교포들은 이 과정에서 대부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당시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재일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에 대한 강한 반감과 제주 4.3 사건 등으로[50] 공산주의 지지 성향이 강해 민단보다 조총련의 규모가 훨씬 더 컸으며 이들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조선적으로 남았다. 한국 정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조선적 소지자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으로 간주하여 한국 방문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적성국민으로 취급하였다. 재일교포의 90% 이상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제주도 등 남한 지역 출신으로 고향 방문을 하고 싶으면 조선적을 포기하고 민단으로 전향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하라는 의도도 있었다.

전쟁 후 1960년대의 극심한 가난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고 새마을 운동 전개로 경제 성장기에 접어들어 공산주의자들의 방문을 받아들여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긴 1975년부터는 민단으로의 전향을 유도하려는 유화 정책으로 '재일동포 모국 방문' 사업을 펼쳐 조선적 교포들도 한국 정부로부터 방문 허가를 받고 여행 증명서를 발급하여 한국 방문이 가능하도록 허용했다. 실제로 이 모국 방문 사업을 통해 민단으로 전향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교포들이 꽤 있다.

그러나 이들 중 국가폭력의 대상이 된 재일 조선인들도 있다. 1975년 11월 22일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신임받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 국장이었던 김기춘은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 오던 북괴 간첩 일당 21명을 검거하였다.'고 직접 언론에 밝혔다. 이들은 유학생 신분이었고, 한국에 기반이 없다는 점, 한국말이 어눌한 점 등을 악용당해 거짓 간첩 혐의가 씌워졌다. 재일동포로부터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이를 통해 사형과 같은 중형을 선고했다. 1975년 이후에도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은 일어났다. 1983년에 잡혀온 재일조선인 유학생 김병진은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보안사에서 통역사로 일했다. 그의 책 '보안사'는 재일동포 간첩 조사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김병진은 "보안사는 각 대학의 유학생 명단 중 적당한 사람을 골라 뚜렷한 혐의 없이 잡아왔고, 교포로서 잡혀온 사람들은 많았지만 2년동안 지켜본 교포 간첩 중 진짜 간첩은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다큐 인사이트 재일동포 간첩 조작사건 박정희 정권 간첩단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참고

북한 측에서 재일교포 북송 사업과 김일성 충성 자금 루트 개척을 위해 조선적 소지자를 친북 성향으로 포섭하려 조선학교등에 적잖은 투자를 한 반면 남한에서는 딱히 일본에서 별도의 사회망을 구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51] 민족 교육 분야에는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는데 이건 재미교포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52]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 정부는 국가주의적인 입장이 강해서 굳이 남의 나라로 간 이민자들에게 자국 정부가 앞장서서 보금자리를 터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마인드다. 타국에 간 자국민에게 본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동화주의를 추구하는 타국에서는 어그로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다.

사실 오늘날에도 정책적인 지원이 있는 조선적과 북한이탈주민 등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자의에 의한 이주자들[53]에 대한 한국의 정책적인 기조는 방관주의다. 그들이 한국 국적을 버리고 외국 국적을 취득한 이상 외국인이 되었으니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단지 유일한 특혜로서 존재하는 것은 언제든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는 것 뿐이고 이마저도 이주 국가에 자리잡은 모든 자산의 철수와 국적포기를 해야 하며 만 35세 미만 남성은 병역의무까지 이행해야 국적 회복 기회를 준다.

반면 북한은 국가주의 이상으로 민족주의 마인드가 강하고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영향력과 교두보를 마련해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적잖은 지원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적에 상관없이 조선, 한국 모두 나의 조국이라고 여기는 재일교포들이 꽤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한과 북한의 여권을 모두 가진 조총련계 축구 선수 정대세다.[54]

북한은 아직도 귀환 시 복지 혜택들을 준다고 홍보하고 일본, 러시아, 미국 각지에 돈을 들여서까지 사회망을 구축하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는 머리에 총 맞지 않는 이상에야 북송을 선택하진 않기 때문에 그냥 형식적으로만 그치는 수준이다. 사실상 유효한 지원은 1970년대 즈음에 끝났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조총련과 미국의 몇몇 북한 출신 교포 관련 단체 등 사회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의 잔재에 해당하는 조직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일본에서 '민단계'로 분류되는 한국 학교는 동경한국학교, 오사카 금강학교, 건국학교, 교토국제학교 4곳 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민단계/귀화 교포들은 일본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민단이 설립한 한국 학교들은 일본에서도 정식 인가 학교로 운영되어 조선학교와 달리 일본 정부의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고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고 2002년 김정일의 납북 일본인 사건 인정으로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낀 조직원들의 이탈로 조총련이 쇠퇴하면서 조선적 소지자들 중에서도 대한민국 국적을 정식으로 취득하는 이들이 상당히 늘어났다. 이들은 일본 특별 영주자로 일본 귀화도 쉽게 가능하지만 한반도 출신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강한 경우 일본 귀화보다는 한국 국적을 선택한다. 다만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들에게도 강제적인 지문 날인이나 거주권/참정권 제한을 비롯한 뿌리깊은 차별 대우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이는 한일 양국 간의 감정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으며 지금도 이들에게 참정권은 없다.[55] 어쨌든 현재는 조선적 소지자보다 한국 국적을 가진 교포의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6. 여행의 자유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은 외국 국적 특별영주자는 '특별영주자 증명서'라는 신분증이 발급된다. 일본에서 일반 영주자는 다른 중장기체재자와 마찬가지로 재류카드를 발급받고 재류자격이 영주자라고 쓰여 있으며 상시 휴대 의무가 있는데 특별영주자의 증명서는 일반적인 재류카드와는 달리 상시 휴대 의무가 없다. 단, 휴대하고 있는데 경찰 등의 제시 요청을 거부하면 얄짤없다. 일본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관계로 조선적 소지자가 일본에서 북한 국적을 획득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56]

특별영주자가 일본에서 출국 시 한국 여권 소지자는 일본의 재입국 허가[57]와 여행 국가의 비자[58]만 있으면 북한 등 적성국가나 여행금지국가를 제외하고는 문제없이 출국이 가능하지만 조선적은 해외 출국이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데 이들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나라가 없으므로 '무국적 난민'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관광비자도 신청하기 힘들다. 게다가 비자를 받고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다른 여행객들보다 훨씬 강도 높은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한다.

남북한은 그나마 조선적 소지자들의 방문을 원활히 하고자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일단 한국은 조선적 여행객들에게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 기재된 여행증명서를 발급하고 있다.[59] 일단 조선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는 제도이기는 한데 한국의 단수여권과 마찬가지로 1회용이라 매번 재외공관에 방문하여 재발급받아야 해서 불편하며 한국 여권은 아니기 때문에 무비자 국가도 여권만큼 많지는 않다.

2008년 남한의 정권교체 후 급속히 경색되는 남북관계 때문에 조선적 교포의 남한 입국은 예전보다 더 어려워지고 있다. 때문에 주일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는 조선적 동포들에게 여행 편의나 한국 소재 대학 입학 등을 위해 한국 국적을 인지하여 귀화하기를 권하고 있다. 하지만 힘들게 친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교포들로서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권고라서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2009년에 조선적 재일동포 메이지가쿠인대 교수 정영환씨가 서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석하기 위해 오사카 총영사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했다.관련 뉴스 한국 정부 상대로 소송을 벌였으나 2013년 패소했고, 이후 2016년에 또다시 입국 불허 판정을 받았다. 정 교수는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5·06년엔 ‘아무 문제 없이’ 입국할 수 있었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2009년 돌연 입국이 거부됐다.관련 뉴스

북한은 총련에서 북한 여권 발급을 대행하고 만경봉호 등의 직항 선박을 제공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식 수교국이 아닌 이유로 일본 정부가 북한 선박의 입출항을 거부하는 사례도 꽤 자주 있다. 설령 입출항이 된다고 해도 선박이나 선원, 탑승자 모두에게 굉장히 까다로운 검문검색이 행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전에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상대측 방문 기록이 있으면 입국허가 무지하게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적들은 둘 중 하나에 대해 통일 전까지는 밟지 않겠다는 각오로 입국을 선택해야 했다. 2003년 이후 남북관계 개선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남이든 북이든 비교적 자유롭게 입국이 가능해졌다. 2007년 이후에는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남측에서 여권 발급을 안 해준다던가 입국 심사하는데 시간을 지체하는 식으로 남한 입국을 제한하더니 2011년부터는 북한이 입국심사를 까다롭게 해서 북한 입국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7. 조선적 보유자들에 대한 논란

조선적은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는데 일본에서는 북한 국적을 정식으로 취득할 수 없는 탓에 차선책으로 조선적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60] 조선적의 조선이 '북조선'으로 오인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일본에서 조선적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다. 그래서 조선적에 대한 이런저런 논란도 많다.[61]

재일 음악인 양방언도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여러 매체에서 북한 사람으로 오보된 바 있었고[62] 일본에서도 성우 박로미를 조선적 운운하며 비난하는 혐한들이 있는 등 사정은 마찬가지다. 심지어 북한에서 미사일을 쏜다거나 납북 일본인 문제가 대두된다 싶으면 조선적 교포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사실 조선적의 다수를 차지하는 조총련계가 북한에 커넥션이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북한의 행태를 신랄하게 까는 사람이라도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매도당하는 억울한 케이스가 있을 수 있다.

법적으로 특별영주자는 부모가 조선적이면 자식도 자연히 조선적이 되지만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한국이나 일본 국적을 정할 권리는 주어진다. 특별영주자의 일본 국적 취득은 일반적인 외국인에 비하면 쉬운 편이고[63]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도항했다는 것만 증빙할 수 있다면 한국 국적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때문에 조선적이더라도 정당한 한국/일본 국적을 취득해서 조선적을 벗어나는 경우는 많다. 재일 대중음악인 양방언이나 지휘자 김홍재는 이런 경위로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갈아탔고 정대세도 할아버지가 경북 의성 출신으로 한국 국적이지만 조선적으로 잘못 알려졌다.[64]

조선적을 지닌 무국적자라고 꼭 친북 성향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65] '두 개의 조국' 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 한다면서 무국적 상태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아울러 조선적으로 인한 불편이 엄청나지만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는 어렵거나 감정적으로 꺼려지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경우도 꽤 많고 남한 국적을 가지면서 북한에 우호적인 재일교포들도 있다. 이 점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비례대표에 한정한 재외국민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조선적 교포들이 북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조선학교 출신자라고 해서 북한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정작 혁명역사 같은 세뇌교육을 받는 본인들도 이 과목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고 이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이런 과목을 교육시키는 것이 싫어서 조선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남북 어디에도 국적이 없는 이들을 싸잡아 종북 따위로만 분류하는 것도 분명히 공정하지 못한 처사다.[66] 남북분단 전에 일본으로 간 사람에게는 대한민국에 대한 정체성만을 요구할 수도 없고 종북주의자로서의 조선적 '상당수'와 '전부'는 구분해야 한다.

다만, 상술한 이유처럼 북한 체제에 대한 추종은 아니더라도 남북분단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여 대한민국과 북한 둘다 자신의 조국으로 보는 입장 역시 설득력이 없다. 사이비 종교 테러 집단인 비정상 국가 북한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 두 체제를 같은 선상에 두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본인이 거주국인 일본에 가까운 정체성이라면 당연히 일본 국적을 취득할 것이고 자신의 조상에 가까운 정체성이라면 비윤리적 인권 침해 국가인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하는 것이 정상인데, 대한민국과 북한을 둘다 자신의 조국으로 여기는 입장도 정상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조선적 소지자들의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이 일본 사회에서 이방인 포지션을 자초한다는 비판 여론도 있다. 특히 일본의 학제를 따르지 않고 북한 정책에 따른 교육을 하는 조선학교가 일본에서는 우익의 공격 대상이 되는데, 조선학교 여학생들이 치마저고리를 교복으로 입고 다니다가 일본 불량학생들에 의해 옷이 찢기거나 더럽혀지는 등의 사건은 한국에도 종종 보도되고 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교복이 일본의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블레이저 계열로 바뀌는 추세다. 역으로 일본으로부터 차별받는 입장이 자신들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통계자료는 정확히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세대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민족 정체성을 잃고 일본인으로 동화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67] 한반도에 직접적인 연고가 있는 사람은 노년층이 대부분이고 신분상속으로 신규 취득하는 사람들은 남북한 모두에 접점이 없고 일본에서 나서 일본에서 자랐으며 민족 정체성도 옛날옛적에 할아버지가 거기서 왔다더라 수준이다. 또한 일본에서 태어난 젊은 재일 조선인들은 한국어도 어눌한 경우가 많다.

조총련, 민단 등의 단체들도 남북을 막론하고 전성기에 비하면 많이 쇠퇴하였다. 50년 이상 시간이 더 지나고 한반도에 직접 연고가 있는 세대가 전부 사망하면 일부 극성분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일본에 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남한에서도 이들에 대한 관심이 지원정책이 최절정이었던 1980~90년대만 못하고 북한은 형식적인 복지제도는 있으나 다들 알다시피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다.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데 더 근래(1970년대 이후)에 이주를 시작한 미국 이주자들도 3~4세대쯤 내려가면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이 없고 한국어도 모르며 본인은 미국인임을 어필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엔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아래의 가네시로 가즈키의 사례에서와 같이 1960년대에도 "어쨌든 일본으로 터전을 옮기게 되었으니 에라 모르겠고 그냥 눌러 앉자"식의 생각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 대중 매체

1990년대 후반 들어 재일교포 신진 작가나 영화감독들을 중심으로 조선적의 현실을 재조명하는 소설이나 영화가 발표되고 있다. 카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 나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의 영화 '박치기', 김명준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 등인데 작가나 감독에 따라 부정적인 쪽에서부터 긍정적인 쪽까지 시각이 확실히 갈리는 편이다.

다만 조선적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상대적으로 극히 최근에 생겨난 풍조로, 이전까지 재일문단의 다수를 차지하던 문학풍토는 염세적이고 현시창스러운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일본의 문단에서도 재일교포문학(조선적을 포함한)은 너무 염세적이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했을 정도다. 90년대 후반 3세대 재일교포들이 문단에 진출하면서 이러한 풍토는 많이 가라앉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인의 조선적에 대한 차별 의식이나 조선적 소지자가 일본 사회에서 받는 냉대는 대체로 공통된 주제로 쓰이고 있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68년에는 일본의 유명 포크 그룹인 '포크 크루세이더즈' 가 북한 노래 '림진강(임진강)' 을 조선학교 학생에게 듣고 감동하였는지 앨범에 포함한 일도 있다.[68]

일본 영화 박치기에선 조선학생과 일본 학생들의 갈등 이야기가 나온다.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는 일본에 체류 중인 조선적(& 조총련) 사회의 모습을 상당히 밀도 있게 파헤친다. 여기서 기타노 타케시의 배역인 김준평은 흔히 부정적으로 취급되는 과격파 조선적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고 반면 주인공인 그의 장남은 상당히 사고가 깨인 긍정적 조선적상이라고 할 수 있다.

9. 조선적 혹은 조선적 출신 인사들

  • 생전에 조선적을 유지했거나 지금도 유지 중인 인물
  • 조선적에서 남한 국적으로 전환한 인물
    • 소설가 이회성: 조선적 신분으로 외국인 최초 아쿠타가와상 수상하였다.
    • 축구 선수 및 감독 김명휘
    • 지휘자 김홍재: 현 울산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 2005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 축구 선수 박강조: 2000년 조선적을 가지고 성남 일화 천마에 입단했고 그해 한국 최초의 재일교포 출신 국가대표가 되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2012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2022년 기준으로 일본 여자 프로축구 팀 INAC 고베 레오네사의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 지휘자 박태영: 현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 단장 겸 상임 지휘자. 199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유학 중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거주 중이다.
    • 대중음악인 양방언: 1999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 이왕비 이방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부인
    • 야구 선수 겸 해설가 장훈: 대한민국 국적 보유 중. 취득 연도는 불명.
    • 권투선수 홍창수: 전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69] 2007년 2월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고 현재는 오사카 코리아타운에서 야키니쿠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 소프라노 가수 전월선
  • 조선적에서 북한 국적으로 전환한 인물
    • 작곡가 강수기: 조선국립교향악단 작곡실장. 1965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강청: 전 함경북도예술단 단장. 1964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고수영: 영화 및 방송음악단 작곡가. 1959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무용가 고용희: 전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김정일의 넷째 아내이자 김정은의 어머니. 1962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무용가 김목룡: 피바다가극단 안무실장. 1961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지휘자 김병화: 전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지휘자.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화가 김승희: 만수대창작사 소속. 1959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테너 가수 김영길: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리춘상: 피바다가극단 작곡가. 1963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리한우: 윤이상음악연구소 작곡실장.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건축가 서상호: 평양도시설계사업소 문화보존설계실장.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서정건: 영화 및 방송음악단 작곡가.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장조일: 은하수관현악단 단장. 1961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정치인 장철: 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1965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메조소프라노 가수 조청미: 피바다가극단 소속. 1973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첼로 연주자 황종관: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조선적에서 일본 국적으로 전환한 인물
    • 소설가 겸 각본가 가네시로 가즈키: 일본 국적 보유 중. 취득 연도는 불명. 다만 본인은 한국과 조선적, 일본 어느 쪽에도 무게를 두지 않고 '코리안 재패니즈' 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하고 있다.
    • 정치인 아라이 쇼케이: 1966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 프로레슬러 역도산

10. 참고 문헌

조경희, “한일협정 이후 재일 조선인의 국적과 분단정치,” 역사문제연구 19 (2015)
김지형, “분단의 전이: 재일 분열과 남북관계 함수,” 역사와 현실 83 (2012)
日本社会党朝鮮問題対策特別委員会 編, 祖国を選ぶ自由-在日朝鮮人国籍問題資料集, 社会新報刊, 1970 [70]

11. 관련 문서



[1] "그러나 조선적 동포라는 존재는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이며 남북 분단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정인섭. (2014).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여행증명서 발급의 법적 문제. 서울국제법연구, 21(1), 1-24.[2]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이 북한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상황이 아니라 현재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은 한국이나 일본 국적만 취득할 수 있다.[3] 이러한 국적 취득은 비단 조선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있는 대한민국북한 주민들에게도 해당되는데, 월북탈북이 바로 이러한 정부 선택 행위의 일종이다.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에 오면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귀화절차를 밟지 않고 바로 한국 국적을 받는 이유가 이들은 북한을 나와서 대한민국 정부를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특이케이스가 아닌 이상 두 개의 국적을 동시에 행사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만 봐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며, 한국은 재일교포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택하지 않는 이상 일반 한국인들이 받는 복수여권을 발급하고 있지 않다. 정대세처럼 두 개를 동시에 행사하고 싶으면 해외영주권이 있어야 한다.[4] 후술하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의 일본 국적을 직권으로 없애버린다.[5] "법리적으로 조선적 동포는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국적이라고 볼 수 없으며, 이들은 한국 국적에 대한 권리를 여전히 갖고 있다." 정인섭. (2014).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여행증명서 발급의 법적 문제. 서울국제법연구, 21(1), 1-24.[6] 판결문 발췌: 원고의 국적 : 일본 체류 ‘조선적’ 동포로서 일본 국적 실무상 무국적자로 분류됨[7] 왜 무국적자가 아니냐면 무국적자들은 일본에서 태어났을 경우 일본 국적법에 의거하여 일본 국적을 받게 된다. 조선적들은 법적으로는 무국적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국적이 주어지지 않는다. 조선적이 무국적자라면 조선적 2세, 3세가 나올 수 없고 2세와 3세들은 일본인이 된다.[8] 대만적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존재한다.[9] 일본의 재류카드나 특별영주자 증명서를 살펴보면 국적·지역: XXX 이라고 적혀있다. 예를 들어 国籍·地域 朝鮮(국적·지역: 조선)[10] 겉으로는 황국신민이지만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3등 국민이다. 관동대학살만 봐도 소위 '내지인'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중국인들 상대로는 국적 부여는 물론 조선인과 같은 대우조차 해주지 않았다. 사실상 1등이 일본인, 2등이 오키나와인, 3등이 조선인, 4등이 중국인인 것.[11] 참고로 외국인 등록령은 영어Edict of Foreigner Registration이다. 당시의 법령에 따라 공포한 것은 쇼와 천황이고 당시의 내각은 제1차 요시다 내각이다. 다만 당시 일본의 정치 상황상 이 칙령에 쇼와 천황이 관여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12] 外國人は、当分の間、本邦(內務大臣の指定する地域を除く。以下これに同じ。)に入ることができない。[13] 1. 연합국군장병 및 연합국군에 부속 또는 수반되는 자 및 이들의 가족 2.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임명 또는 승인이 있는 사절단의 구성원 또는 사용인 및 그들의 가족 3. 외국정부의 공무를 대행하여 일본에 주재중인 자 및 이를 수행하는 자 및 그들의 가족[14] この勅令において外國人とは、日本の國籍を有しない者のうち、左の各号の一に該当する者以外の者をいう。[15] 「[ruby(台湾人, ruby=たいわんじん)]のうち[ruby(内務大臣, ruby=ないむだいじん)]の[ruby(定, ruby=さだ)]める[ruby(者, ruby=もの)][ruby(及, ruby=およ)]び[ruby(朝鮮人, ruby=ちょうせんじん)]は、この[ruby(勅令, ruby=ちょくれい)]の[ruby(適用, ruby=てきよう)]については、[ruby(当分, ruby=とうぶん)]の[ruby(間, ruby=あいだ)]、これを[ruby(外国人, ruby=がいこくじん)]とみなす。」[16] 1946년 6월 중화민국 정부는 재일 대만인을 모두 중화민국 국민으로 규정한다는 법령을 공포하고, 7월에 이 방침을 GHQ에게 통보했다. 그런데 일본의 대만인을 모두 중화민국 국민으로 간주하면 이들은 모두 연합국민=승전국 국민이 되어 GHQ가 이들을 무작정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전후 일본의 질서 유지(인력통제)에 문제가 생기는데, 중화민국의 이 방침을 미 국무부가 지지했다. 때문에 GHQ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절충점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 재일 대만인 중 중화민국 대표부가 발급하는 등록증을 소유한 사람은 아예 중화민국국민=연합국민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렇지 아니한 재일 대만인은 "대만인 중 내무대신이 정한 사람"이 되어 외지인으로 일단 분류한 채 조선인과 동일한 적용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은 당시 본인들에게 일본 외의 국적을 줄 수 있는 국가 자체가 없었고, 때문에 GHQ 입장에서 이들은 그저 통제의 대상이 될 뿐이었기에 법령이 이렇게 되었다.[17] (一) 朝鮮及び台湾は、条約の発効の日から日本国の領土から分離することゝなるので、これに伴い、朝鮮人及び台湾人は、内地に在住している者を含めてすべて日本の国籍を喪失する。[18] 문제는, 저 통지문은 법규성이 하나도 없는, 일종의 행정규칙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국적을 상실시키는 직접적인 법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는 이 통지문을 법률과 똑같은 효력을 갖는 조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를 실행하기 위한 행정규칙으로 보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는 영토의 포기 규정만 있을 뿐, 그 포기된 영토 출신자의 국적을 상실시키는 직접적인 규정은 없다.[19] 해당 통지에서 "조약 발효 후에 조선인 및 대만인이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일반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국적법의 규정에 따른 귀화절차에 의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또한 "해당 귀화의 경우 조선인 및 대만인((3)에서 말한 원래 내지인[72]이었던 자를 제외한다)은 「국적법」 제5조제2호의 "일본국민이었던 자" 및 제6조제4호의 "일본의 국적을 상실한 자"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다.[20] 국사편찬위원회 편, 2010 '일본 한인의 역사(자료집)', 217쪽[21] 한일기본조약[22] 사실상 한일 협정 체제는 재일 조선인을 이분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후술하겠지만 한국정부는 '협정 영주 자격'을 미끼 삼아 재일조선인들을 본인의 정치 체제로 포섭하고자 했다.[23] 강제 송환을 의미한다. 이때 퇴거강제에 해당되는 항목으로는 상륙허가를 받지 않는 자, 재류기간을 초과하는 자, 외국인등록령 위반자, 마약취체법 위반자뿐만 아니라 나병환자, 정신장애자, 빈곤자, 방랑자, 장애자가 포함된다., 1950년 제정, 출입국 관리령 제24조 및 5조 참고[24] 협정영주 자격은 사회적 약자들을 퇴거강제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형벌과 관련해서도 7년을 넘는 죄를 범하지 않는 한 퇴거강제 대상에서 제외했다.[25]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재일 조선인 내에 분단 체제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6]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국적의 기재에 관한 건, 중국인의 외국인등록에 대해 그 본적이 중국본토와 타이완에 관계없이 원표 국적란 기재는 중국으로 할 것"이라는 기준을 취했다.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타이완)은 '중국', 또한 통일 전의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독일연방공화국(서독)도 '독일'이라는 지역명을 기재해왔다. 한반도에 대해서만 다른 분단국가와 다르게 이중기재를 실시하고 재일 조선인에게 한쪽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法務省入国管理局通達二〇八号, 一九五二年一〇月一四日. 金東鶴, 「在日朝鮮人の法的地位․社会的諸問題」,朴鐘鳴編, 在日朝鮮人の歴史と文化, 明石書店, 2006.[27] '한'이 들어간 낱말을 택하면 대한민국, '조선'을 택하면 북한에 기울어진 명칭이 되니 나름대로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취지로 '코리안'이라고 부른다.[28] 북한은 상호 협의를 거쳐 3년에 걸쳐 원하는 사람들을 북한으로 송환한 적이 있었다. 재일교포 북송 참조.[29] 최초에는 '재류 자격과 재류 기간이 정해질 때까지'라는 조건을 달았다. 이는 1965년에서야 한일협정으로 '협력재류'로서 정식 자격이 주어졌고 1991년에 개정한 제도가 '특별영주자' 자격이다.[30] 정확히는 GHQ[31] 남편을 따라 변경하는 경우 등[32] 김상현, 재일한국인, 어문각, 1969, 334쪽.[33] ①신청자가 2회의 외국인 등록을 필한 경우에는 새로운 사실조사 없이 협정영주를 허락하고, ②1945년 이후 입국자의 경우 영주허가 심사기준 완화하고, ③협정영주자 재입국허가를 배려하고, ④협정영주자 가족의 입국 및 체류에 대해 인도적으로 고려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향상을 위한 한․일간 법무장관 회담」(1969. 8. 19∼20), 등록번호3355, 외교문서(P-0007)[34] 재일조선인 중 '조선'과 '한국'의 수가 역전하여 한국 수가 더 많아지게 된다. 정확한 인구구성 변화는 민단 페이지 참고. 민단 페이지[35] 「1971년1월16일 이후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 개선문제」(1970. 12. 14), 등록번호3959, 외교문서(P-0008).[36]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변경하거나 불가피하게 변경된 경우[37] 日本社会党朝鮮問題対策特別委員会編, 祖国を選ぶ自由-在日朝鮮人国籍問題資料集, 社会新報刊, 1970, 4쪽.[38] 在日朝鮮人総連合会中央常任委員会社会経済部, 在日朝鮮人の国籍問題に関する資料, 在日朝鮮人総連合会, 1966, 16쪽; 「外国人登録に関する件」, 第51回国会法務委員会8, 1966. 2. 24.[39] 「외국인등록상의 국적란의 ‘한국’ 또는 ‘조선’의 기재에 관하여(1965. 10. 26)」․「외국인등록증명서의 국적란의 기재에 관하여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꾸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일본법무성 1965년10월26일)」, 한영구외 편, 현대 한일관계 자료집1(1965년∼1979년) , 오름, 2003, 82∼83쪽.[40] 日本社会党朝鮮問題対策特別委員会 編, 祖国を選ぶ自由-在日朝鮮人国籍問題資料集, 社会新報刊, 1970, 161~174쪽[41] 1)신청자가 대한민국 국민등록을 하지 않았을 경우.2)대한민국의 정식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을 경우.3)신청자 본인이나 부친이 협정영주 자격을 신청하지 않았을 경우. 현재도 이 세가지 조건을 만족한 경우 국적란을 '조선'으로 변경 가능하다.[42] 1981년 일본이 유엔 난민조약에 가입을 하면서 조선적자들에게도 '특례영주' 자격이 인정되었고 1991년 '출입국관리특례법'을 통해 서로 다른 영주자격이 '특별영주' 자격으로 일원화되었다.[43] 흔히 말하는 한국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행사하는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에서 살던 주민과 그의 후손"들이며, 북한사람은 북한 국적을 행사하는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에서 살던 주민과 그의 후손"들이다.[44] 일본은 한일기본조약 제3조에 의거해 대한민국 정부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며 따라서 북한과 외교관계 수립 어렵고 북한을 국가로도 승인하지 않는다. 이에 일본 내에서 북한 국적을 행사할 수 없다. 이에 북한을 택하면 둘 다 행사하지 않게 된다.[45] 대만은 조선보다 더 일찍 일본령이 되었고 그에 따라 일제의 통치 기간이 길었던 데다 일제 패망 이후 대만 본성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한 것이 아니라 국부천대로 대만에 들어온 외성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랫동안 계엄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대만일치시기에 대만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고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 패망 이후 중화민국 정권으로부터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살도록 요구받았고 여태까지 (높은 확률로) 배워 본 적도, 사용해 본 적도 없었던 표준 중국어를 쓰도록 요구받았으며 한순간에 사회적으로 엘리트 계층에서 사회적 약자 계층으로 몰락했기 때문에 심리적 상실감이 컸고 고령층이 된 21세기에도 그런 사람들끼리의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재일동포와는 정반대이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갖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일본인의 정체성을 갖고 대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46] 이 규정에 의하여 북한은 대한민국 국적자나 조선적 재일교포 등을 모두 북한 공민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후술할 조선적 재일교포의 북한 여권 발급이 조선적임을 증명하기만 하면 별도의 귀화 절차 없이도 가능하다.[47] 대표적으로 '수용소의 노래'의 저자 강철환의 가족이 여기에 해당한다.[48] 반대로 세로쓰기가 건너오라는 뜻이고 가로쓰기가 오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북송 이후 오는 편지가 죄다 가로쓰기라 남은 이들이 떠나길 기피했다는 버전도 있다.[49] 명목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상 적대계급잔여분자로 취급하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50] 한국 전체 인구 중에 제주도민은 55만 정도로 1% 밖에 안되지만 재일교포 67만명 중 제주도 출신자의 비율은 11만명으로 전체의 17%를 차지하여 제주도 출신의 비율이 유독 높은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일본으로 많이 이주하기도 했지만 4.3 사건을 피하여 이주한 경우도 꽤 많다. 고향에서 가족, 친지들이 4.3 사건에 희생당하는 것을 보며 한국과 미국 정부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반대 진영인 공산주의로 빠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51] 전쟁 후 1960년대 한국은 북한보다도 가난하여 내국인들도 먹여 살리기 힘든 마당에 재외동포들한테 신경 쓸 여력 또한 전혀 없었다.[52]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과 같이 외국에 존재하는 한인 사회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스스로 형성한 것이다.[53] 독재정권 시기 프랑스/독일 등지로 망명한 사람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넌 미국 이주자 등[54] 어머니가 조선적의 조총련계라 아들을 조선학교에 다니게 했는데 아버지는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 2세였다. 속인주의 원리에 따라 부친의 국적을 물려받았다.[55] 반대로 한국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외국인 참정권을 인정하여 영주권을 취득한지 3년 이상 지난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지방 선거 참정권을 부여한다. 이것도 재일교포의 일본 내 참정권과 맞바꾸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현실적 문제로 백지화되었다.[56] 실제로는 총련 본부를 통해서 취득하는 것은 가능하며 심지어 조선총련 소속의 대한민국 국적자도 북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다만 일본 정부는 북한 여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출국이나 재입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57] 간이 재입국허가(みなし再入国許可)는 2년, 재입국허가(再入国許可)는 6년.[58] 실제로는 한국 국적빨로 일본만큼 비자 없어도 된다.[59] 대법원 남북교류협력법 제10조 https://casenote.kr/%EB%8C%80%EB%B2%95%EC%9B%90/2010%EB%91%9022610[60] 남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이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는 데 어떤 장애물도 없다.[61] 반면 한국에서는 조선적의 '조선'을 북조선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당초 북조선이라는 말은 일본과 북한에서만 쓰이기 때문이다.[62] 다만 아버지가 조총련 쪽이었고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조선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북한에 가까운 정체성으로 여겨질 소지는 있었다.[63] 참고로 일본 국적 취득은 세계적으로 까다롭기로 소문났기 때문에 제3세계 국민 중에서는 이걸 부러워하는 경우도 많지만 무국적자의 감소를 위한 협약에 따라 대부분 국가에서 부모가 모두 무국적으로 자국에서 출생한 자의 국적을 주기 때문에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단지 조선적을 무국적으로도 볼 수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64] 정대세의 어머니는 실제로 조선적 재일교포이고 정대세 본인은 조선적이 아닌 한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 국적보다는 조선적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정대세 항목 참조.[65] 물론 친북 성향인 경우가 훨씬 많지만 예외는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일 조선인 경제학자 이영화(李英和, 1954~2020)는 북한 국적을 버린 적이 없지만 1990년대 평양 유학을 다녀온 이후 북한 민주화 운동을 벌인 인사로, 한국의 햇볕정책까지 비판하는 등 매우 강경한 반체제 성향 운동가였다.[66] 다만 북한 여권을 신청한 사람이면 엄연한 북한의 해외공민이긴 하다. 일본 당국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67] 경제 성장 및 글로벌화로 옛날처럼 교포 사이에선 매국노 취급, 현지인 사이에선 비국민 취급의 이중고를 겪는 경우도 적어졌다고 한다.[68] 총련 측에서 원작자들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라는 요구를 하자 음반사가 취소했다고 한다. 그룹 멤버들은 누가 작사/작곡했는지도 몰랐던 상황이었다. '림진강'은 위에 언급된 영화 '박치기'에서 줄거리를 풀어가는 주요한 매개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정작 박치기에서는 원곡을 그대로 못넣고 리메이크로 넣었다.) 여하튼 어찌저찌 해서 앨범에 실렸고 1960년대에 청춘기를 보낸 일부 일본인들에게 이 노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러나 민단 회원들의 항의가 빗발친 탓에 머지 않아 방송금지 처분을 받고 말았다.[69] 당시 조인주를 판정승으로 꺾고 타이틀을 획득했다.[70] 일본사회당 조선문제대책특별위원회 편, 조국을 선택하는 자유-재일조선인 국적문제 자료집, 사회신보간, 1970[71] 조선적 소지자가 대한민국 국적으로 변경하는 절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