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cb27b><colcolor=#fff> 재일학도의용군 在日學徒義勇軍 | |
규모 | 641명 |
활동 기관 | 1950년 ~ 1953년 |
참전 | 6.25 전쟁 인천 상륙 작전 갑산 혜산진 탈환 작전 백마고지 전투 원산상륙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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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0년대 중후반에 많은 수가 귀국하긴 했지만 1950년에 일본에는 60만의 재일 한국-조선인이 살았다. 일본 정부가 일본인과 외국인을 분리하고 비일본인의 일본 재입국을 막음에 따라 이들은 귀국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재일 한국인들이 참전을 원했지만 처음에는 참전을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본토에서 급파된 대부분의 미군 전투 병력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들이 한반도에 도착하자마자 생소한 지리와 언어, 풍습이 낯선 환경에서 전투를 시작하는 것보다는 한국의 지리와 풍습, 그리고 언어에 능숙한 한국인 병사들이 보조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인천 상륙 작전 직전 방침을 바꾸어 재일 한국인들의 참전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재일학도의용군 1진이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였는데 이런 사실 때문에 재일학도의용군을 카투사(KATUSA)의 모태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략 3주 정도 먼저 대한민국 육군과 미군에서 카투사 제도를 이미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 이야기
재일학도의용군은 6.25 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 대한민국을 구하자는 의지 하나로만 모였다고 한다. 전쟁 발발 직후 라디오에서 한 재일교포 소녀가 자신도 참전하고 싶다며 열변을 토했는데 이를 들은 반 조총련 재일교포 청년들 사이에서 모국을 도와주러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학생들이 많았지만 학생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다시 말해 이미 조직된 어떤 단체가 자원한 게 아니라 일본 각지의 교포들이 자발적으로 참전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래서 이름은 학도의용군이지만 학생이 아닌 경우도 많았고 이렇게 출신 및 경제적 사정 등도 각양각색이었으며 따라서 개인적인 인간 관계도 드문 편이었다. 한국으로 파병(?)된 다음에도 바로 여러 다른 부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학도의용군 전체를 묶어주고 대표하는 조직은 전쟁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발족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대별 혹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기반한 소규모의 전우들은 존재했지만 모임 전체를 묶는 공동체의식은 초창기에는 크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학도의용군 모임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서로가 잘 알지 못해서 "김 선생님은 어느 부대에 계셨나요?" 라고 서로 물어볼 정도의 분위기였다고... 도쿄에서 파병 직전 찍은 사진 같은 걸 돌려보면서 "김 선생님은 여기 계셨던 거군요!" 같이 서로 공감하곤 했다고 한다.
파병당시 부대배치는 복불복이었는데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던 인원들은 많은 수가 며칠 만에 전사하였다고 한다. 일부는 후방에서 1년 가량 문선대 역할만 하다가 전쟁이 한 풀 꺾이자 일본으로 귀국하기도 하였다.[1]
흔히 이스라엘에 전쟁이 나면 해외 유학생들이 귀국한다느니 어쨌느니 하는데 사실 웬만한 나라는 다 그 정도는 한다.[2] 애초에 그 정도의 애국자들조차도 없던 나라들은 진작에 다 망해서 없어졌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해외 유학생들은 예비군 신분으로 의무복무 대상자지만 재일 학도의용군들은 한국에 대한 병역의무가 없고[3] 일본에서 자라 일본 문화에 익숙한 터라 사실상 일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부모가 조선 출신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대한민국과 접점이 없는 사실상의 외국인이 부모의 나라를 위해 참전 한 것.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라고 예비군에 편성된 상태로 학교만 외국에서 다니던 유학생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당시의 참전자 중에서 2016년 9월 기준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은 전쟁영웅들도 존재한다.
3. 공식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4. 관련 다큐멘터리
- 그들만의 비망록 - 재일학도의용군
- KBS 파노라마 - 재일동포 청년들의 선택”아버지의 나라
- KBS 파노라마 -“63년의 그리움, 내 딸 미요코”
- KBS 시사기획 창 -“재일학도의용군 포화 속으로”
[1] 일본 귀국자는 거의 다 전쟁 1년 후에 귀국하였다.[2] 이스라엘의 교전국인 중동 국가 유학생들도 조국을 돕기 위해 귀국하였다.[3] 당시는 한일협정은 커녕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재일교포들의 대부분이 국적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인지가 모호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