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2:39:49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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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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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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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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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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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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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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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하야시 센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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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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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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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요시다 시게루 가타야마 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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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호소카와 모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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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차관 (1차) (1886년~1900년)
초대
아오키 슈조
2대
오카베 나가모토
3대
하야시 타다스
4대
하라 다카시
5대
코무라 주타로
6대
하토야마 가즈오
7대
츠즈키 케이로쿠
8대
타카히라 코고로
외무총무장관 (1900년~1903년)
초대
타카히라 코고로
2대
아사다 토쿠노리
3대
우치다 고사이
4대
친다 스테미
외무차관 (2차) (1903년~1949년)
초대 ·3대
친다 스테미
2대
우치다 고사이
초대·3대
친다 스테미
4대
이시이 키쿠지로
5대
쿠라치 테츠키치
6대
마츠이 케이시로
7대
시데하라 기주로
8대
하니하라 마사나오
9대
다나카 토키치
10대
마츠다이라 츠네오
11대
데부치 카츠지
12대
요시다 시게루
13대
나가이 마츠조
14대
아리타 하치로
15대
시게미쓰 마모루
16대
호리노우치 켄스케
17대
사와다 렌조
18대
타니 마사유키
직무대리
마츠미야 하지메
직무대리·19대
오오하시 추이치
직무대리
야마모토 쿠마이치
20대
아마우 에이지
21대
니시 하루히코
직무대리·22대
야마모토 쿠마이치
23대
마츠모토 슌이치
17·24대
사와다 렌조
23·25대
마츠모토 슌이치
26대
카와이 타츠오
27대
타지리 아키요시
28대
마츠시마 시카오
29대
테라사키 타로
30·32대
오카자키 카츠오
31대
요시자와 세이지로
30·32대
오카자키 카츠오
33대
오오타 이치로
외무사무차관 (1949년~)
초대
오오타 이치로
2대
이구치 사다오
3대
시부사와 신이치
4대
오쿠무라 카츠조
5대
카도와키 스에미츠
6대
오노 카츠미
7대
야마다 히사나리
8대
타케우치 료지
9대
시마 시게노부
10대
오우타 타키오
11대
시모다 타케조
12대
우시바 노부히코
13대
모리 하루키
14대
호겐 신사쿠
15대
도고 후미히코
16대
사토 쇼지
17대
아리타 케이스케
18대
타카시마 마스오
19대
스노베 료조
20대
마츠나가 노부오
21대
야나기야 켄스케
22대
무라타 료헤이
23대
쿠리야마 타카카즈
24대
오와다 히사시
25대
사이토 쿠니히코
26대
하야시 사다유키
27대
야나이 슌지
28대
카와시마 유타카
29대
노가미 요시지
30대
타케우치 유키오
31대
야치 쇼타로
32대
야부나카 미토지
33대
사사에 켄이치로
34대
카와이 치카오
35대
사이키 아키타카
36대
스기야마 신스케
37대
아키바 타케오
38대
모리 타케오
39대
오카노 마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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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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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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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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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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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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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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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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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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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60대
타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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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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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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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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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키무라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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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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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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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대
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나카야마 타로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115대
무토 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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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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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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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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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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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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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153·154대
이와야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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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대신(1938년~2001년)
초대
기도 고이치
2·9대
히로세 히사타다
3대
오하라 나오시
4대
아키타 기요시
5대
요시다 시게루
6대
야스이 에이지
7대
카네미츠 츠네오
8대
고이즈미 치카히코
2·9대
히로세 히사타다
10대
아이카와 카츠로쿠
11대
오카다 타다히코
12대
마츠무라 켄조
13대
아시다 히토시
14대
가와이 요시나리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15대
히토츠마츠 사다요시
16대
타케다 기이치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17-18대
하야시 조지
19대
구로카와 다케오
20·31대
하시모토 료고
22대
요시타케 에이치
23대
야마가타 가쓰미
24대
구사바 류엔
25대
쓰루미 유스케
26대
가와사키 히데지
27대
고바야시 에이조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28-29·41-41대
간다 히로시
30대
호리키 겐조
20·31대
하시모토 료고
32대
사카타 미치타
33대
와타나베 요시오
34대
나카야마 마사
35대
후루이 요시미
36대
나다오 히로키치
37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38-39대
고바야시 다케지
28-29·41-41대
간다 히로시
42대
스즈키 젠코
43-44대
보 히데오
45·59대
소노다 스나오
46·48대
사이토 노보루
47대
우치다 쓰네오
46·48대
사이토 노보루
49대
시오미 슌지
50·58대
사이토 구니키치
51대
후쿠나가 겐지
52대
다나카 마사미
53대
하야카와 타카시
54대
와타나베 미치오
55대
오자와 다쓰오
56대
하시모토 류타로
57대
노로 쿄이치
50·58대
사이토 구니키치
45·59대
소노다 스나오
60대
무라야마 다쓰오
61대
모리시타 모토하루
62대
하야시 요시로
63대
와타나베 고조
64대
마스오카 히로유키
65대
이마이 이사무
66대
사이토 주로
67대
후지모토 다카오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70대
도이다 사부로
71·84대
쓰시마 유지
72대
시모조 신이치로
73대
야마시타 도쿠오
74·82-83대
니와 유우야
75-76대
오우치 게이고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75-76대
오우치 게이고
77대
이데 쇼이치
78대
모리이 추료
79대
간 나오토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81대
미야시타 소헤이
74·82-83대
니와 유우야
74·82-83대
니와 유우야
71·84대
쓰시마 유지
85대
사카구치 치카라
노동성설치준비위원회위원장(1947년)
초대
요네쿠보 미츠스케
노동대신(1947년~2001년)
초대
요네쿠보 미츠스케
2대
가토 간쥬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대
마스다 가네시치
4대
스즈키 마사후미
5대
호리 시게루
6대
요시타케 에이치
7대
토츠카 쿠이치로
8대
고사카 젠타로
9대
치바 사부로
10대
니시다 타카오
11·15대
쿠라이시 타다오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12-13·15대
마츠우라 슈타로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11·15대
쿠라이시 타다오
16대
마쓰노 라이조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19대
후쿠나가 겐지
20-21대
오오하시 타케오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24대
고다이라 히사오
25대
야마테 미츠오
26-27대
하야카와 타카시
28대
오가와 헤이지
29·31대
하라 켄자부로
30대
노하라 마사카츠
29·31대
하라 켄자부로
32대
츠카하라 도시오
33대
타무라 하지메
34대
가토 츠네타로
35·37대
하세가와 타카시
36대
오쿠보 타케오
35·37대
하세가와 타카시
38대
우라노 사치오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40대
후지이 카츠시
41대
쿠리하라 유코
42대
후지나미 타카오
43대
후지오 마사유키
44대
하츠무라 다키이치로
45대
오노 아키라
46대
사카모토 미소지
47대
야마구치 도시오
48대
하야시 유우
49대
히라이 다쿠시
50대
나카무라 타로
51대
니와 효스케
52대
호리우치 미쓰오
53대
후쿠시마 조지
54대
츠카하라 슌페이
55대
오자토 사다토시
56대
콘도 테츠오
57대
무라카미 마사쿠니
58·69대
사카구치 치카라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9대
하토야마 구니오
60대
하마모토 만조
61대
아오키 신지
62대
나가이 다카노부
63대
오카노 유타카
64대
이부키 분메이
65대
아마리 아키라
66-67대
마키노 타카모리
68대
요시카와 요시오
58·69대
사카구치 치카라
후생노동대신 (2001년~)
1-3대
사카구치 치카라
4·5대
오쓰지 히데히사
6대
가와사키 지로
7대
야니기사와 하쿠오
8-10대
마스조에 요이치
11·12대
나가츠마 아키라
13대
호소카와 리쓰오
14대
고미야마 요코
15대
미쓰이 와키오
16·23대
다무라 노리히사
17·18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21대
네모토 다쿠미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16·23대
다무라 노리히사
24·25대
고토 시게유키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27대
다케미 게이조
28·29대
후쿠오카 다카마로
}}}}}}}}}}}}

{{{#!wiki style="margin: 0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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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기 체신대신 (1885년~1943년)
초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2대
고토 쇼지로
3대
구로다 기요타카
4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5대
시라네 센이치
6대
노무라 야스시
7대
스에마츠 겐초
8대
하야시 유조
9·12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대
호시 토오루
11·16대
하라 다카시
9·12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3대
소네 아라스케
14대
오우라 카네타케
15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11·16대
하라 다카시
17대
홋타 마사야스
18·20대
고토 신페이
19대
하야시 타다스
18·20대
고토 신페이
21대
모토다 하지메
22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23대
미노우라 카츤도
24대
덴 겐지로
25대
노다 우타로
26대
마에다 토시사다
27·29대
이누카이 쓰요시
28대
후지무라 요시로
27·29대
이누카이 쓰요시
30대
아다치 켄조
30대
아다치 켄조
31·38대
모치즈키 케이스케
32대
쿠하라 후사노스케
33대
고이즈미 마타지로
34대
미츠치 추조
35대
미나미 히로시
36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37대
오카다 게이스케
31·38대
모치즈키 케이스케
39대
타노모기 켄키치
4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41대
코다마 히데오
42·45대
나가이 류타로
43대
시오노 스에히코
44대
타나베 하루미치
42·45대
나가이 류타로
46대
카츠 마사미치
47대
무라타 쇼조
48대
데라시마 겐
49대
핫타 요시아키
운수통신대신 (1943년~1945년)
초대
핫타 요시아키
2대
고토 케이타
3대
마에다 요네조
4대
토요다 테이지로
5대
고비야마 나오토
체신원총재 (내각) (1945년~1946년)
초대
시오바라 도키사부로
2대
마츠마에 시게요시
제2기 체신대신 (1946년~1949년)
50대
히토츠마츠 사다요시
-
가타야마 데쓰
51대
미키 다케오
52대
도미요시 에이지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우정대신, 운수대신으로 승계
53대
후루하타 도쿠야
54대
오자와 사에키
}}}}}}}}}

{{{#!wiki style="margin: 0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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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운수대신 (1949~2001)
1-2대
고비야마 나오토
3대
다나카 다케오
4대
미츠치 추조
5·14대
무라카미 기이치
6대
히라쓰카 쓰네지로
7대
마스다 가네시치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8대
도마베치 기조
9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10대
오카다 세이이치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11대
오자와 사에키
12대
오야 신조
13대
야마자키 다케시
5·14대
무라카미 기이치
15-16대
이시이 미쓰지로
17-18대
미키 다케오
19대
요시노 신지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20-21대
미야자와 다네오
22대
나카무라 산노조
23대
나가노 마모루
24대
시게무네 유조
25대
나리하시 와타루
26대
미나미 요시오
27대
고구레 부타유
28대
사이토 노보루
29-30대
아야베 겐타로
31-32대
마츠우라 슈타로
33대
나카무라 토라타
34대
아라후네 세이주로
35대
후지에다 센스케
36-37대
오오하시 타케오
38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39대
하라다 겐
40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41대
니와 교시로
42대
사사키 히데요
43대
신타니 도라사부로
44대
도쿠나가 마사토시
45대
에토 아키라
46대
기무라 무쓰오
47대
이시다 히로히데
48대
타무라 하지메
49대
후쿠나가 겐지
50대
모리야마 긴지
51대
지사키 우사부로
5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53대
고사카 도쿠사부로
54대
하세가와 다카시
55대
호소다 기치조
56대
야마시타 도쿠오
57대
미쓰즈카 히로시
58대
하시모토 류타로
59대
이시하라 신타로
60대
사토 신지
61대
야마무라 신지로
62대
에토 다카미
63대
오노 아키라
64대
무라오카 가네조
65대
오쿠다 게이와
66대
오치 이헤이
67대
이토 시게루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68대
후타미 노부아키
69대
가메이 시즈카
70대
히라누마 다케오
71대
가메이 요시유키
72대
고가 마코토
73대
후지이 다카오
74대
가와사키 지로
75-76대
니카이 도시히로
국토교통대신으로 계승
75-76대
니카이 도시히로
77대
모리타 하지메
78대
오기 치카게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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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민부·대장경 (1869~1885)
초대
마츠다이라 슌가쿠
2대
다테 무네나리
-
오키 다카토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오쿠마 시게노부
5대
사노 쓰네타미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전전 대장대신 (1885~1947)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3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4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이노우에 가오루
7대
마츠다 마사히사
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사이온지 긴모치
10대
소네 아라스케
11대
사카타니 요시로
12대
마츠다 마사히사
13대
가쓰라 다로
14대
야마모토 타츠오
15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6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8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19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0대
쇼다 카즈에
2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2대
이치키 오토히코
23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24대
쇼다 카즈에
25대
하마구치 오사치
26대
하야미 세이지
27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28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미츠치 추조
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2대
후지이 사다노부
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4대
마치다 추지
35대
바바 에이이치
36대
유우키 토요타로
37대
가야 오키노리
38대
이케다 시케아키
39대
이시와타 소타로
40대
아오키 카즈오
41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42대
가와다 이사오
43대
오구라 마사츠네
44대
가야 오키노리
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6대
쓰시마 준이치
47대
히로세 토요사쿠
48대
쓰시마 준이치
49대
시부사와 케이조
50대
이시바시 단잔
전후 대장대신 (1947~2001)
-
가타야마 데쓰
51대
야노 쇼타로
52대
구루스 다케오
53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
요시다 시게루
54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오야 신조
55대
이케다 하야토
56대
무카이 다다하루
5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58-60대
이치마다 히사토
61·62대
이케다 하야토
63대
이치마다 히사토
64대
사토 에이사쿠
65·66대
미즈타 미키오
67-69대
다나카 가쿠에이
70대
후쿠다 다케오
71·72대
미즈타 미키오
73·74대
후쿠다 다케오
75대
미즈타 미키오
76대
우에키 코시로
77대
아이치 기이치
-
다나카 가쿠에이
78대
후쿠다 다케오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81대
보 히데오
82대
무라야마 다쓰오
83대
가네코 잇페이
84대
다케시타 노보루
85대
와타나베 미치오
86·87대
다케시타 노보루
88·89대
미야자와 기이치
90대
다케시타 노보루
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93·94대
하시모토 류타로
95대
가이후 도시키
96대
하타 쓰토무
97대
하야시 요시로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100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101대
구보 와타루
102대
미쓰즈카 히로시
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104대
마쓰나가 히카루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대신 (2001~)
초대
미야자와 기이치
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3-5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6대
오미 고지
7·8대
누카가 후쿠시로
9대
이부키 분메이
10대
나카가와 쇼이치
11대
요사노 가오루
12대
후지이 히로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노다 요시히코
15대
아즈미 준
16대
조지마 고리키
17-20대
아소 다로
21·22대
스즈키 슌이치
23·24대
가토 가쓰노부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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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전전 농림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오카자키 쿠니스케
3대
하야미 세이지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8대
고토 후미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0·16대
시마다 토시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2대
아리마 요리야스
13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14·16대
고도 타쿠오
15대
사카이 타다마사
10·16대
시마다 토시오
17대
고노에 후미마로
18대
이시구로 타다아츠
19대
이노 히로야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전후 농림대신 (1945~1978)
초대
센고쿠 고타로
2대
마츠무라 켄조
3대
소에지마 센파치
4대
와다 히로오
5대
요시다 시게루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대
히라노 리키조
7대
하타노 카나에
8대
나가에 가즈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9대
스토 히데오
10대
모리 고타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3대
네모토 류타로
15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7대
타코 이치민
18대
우치다 나오야
19대
호리 시게루
20-21·22대
고노 이치로
23·24대
이데 이치타로
25대
아카기 무네노리
26대
미우라 쿠니오
27대
후쿠다 다케오
28대
난조 도쿠오
29대
스토 히데오
30대
고노 이치로
31대
시게마사 세이지
32·33·34대
아카기 무네노리
35대
사카타 에이치
36대
마쓰노 라이조
37·38대
쿠라이시 타다오
39대
니시무라 나오미
40대
하세가와 시로
41대
쿠라이시 타다오
42대
아카기 무네노리
43대
아다치 도쿠조
4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45대
쿠라이시 타다오
46대
아베 신타로
47대
오이시 부이치
48대
스즈키 젠코
49대
나카가와 이치로
농림수산대신(1978년~현재)
{{{#!wiki style="margin: -16px -11px" }}}
초대
나카가와 이치로
2대
와타나베 미치오
3대
무토 가분
4대
가메오카 다카오
5대
다자와 기치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대
가네코 이와조
7대
야마무라 신지로
8대
사토 모리요시
9·12대
하타 쓰토무
10대
가토 무쓰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대
사토 다카시
9·12대
하타 쓰토무
13대
호리노우치 히사오
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15대
야마모토 도미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6대
곤도 모토지
17대
다나부 마사미
18대
미야자와 기이치
19대
하타 에이지로
20대
가토 무쓰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1대
오가와라 다이치로
22대
노로타 호세이
23대
오하라 이치조
24대
후지모토 다카오
25대
오치 이헤이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28·29대
다마자와 도쿠이치로
30대
다니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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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야쓰 요시오
32대
다케베 쓰토무
33대
오시마 다다모리
34·35대
가메이 요시유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3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3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38·39대
이와나가 미네이치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1대
마쓰오카 도시카쓰
42대
아카기 노리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4대
엔도 다케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7대
오타 세이이치
48대
이시바 시게루
49대
아카마츠 히로타카
50대
야마다 마사히코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53대
군지 아키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5·56대
니시카와 고야
{{{#!wiki style="margin: -16px -11px" }}}
55·56대
니시카와 고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8대
모리야마 히로시
59대
야마모토 유지
60·61대
사이토 겐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0·61대
사이토 겐
62대
요시카와 다카모리
63·71대
에토 다쿠
64대
노가미 고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7대
노무라 데쓰로
68대
미야시타 이치로
69대
사카모토 데쓰시
70대
오자토 야스히로
63·71대
에토 다쿠
}}}}}}}}}}}}

파일:1945년일본자유당.png 자유당 (1950년) 총재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초대
요시다 시게루
제2대
오가타 다케토라
분당파 자유당 총재(1953-1954)
초대
하토야마 이치로
}}}}}}}}}}}}}}} ||

일본 제국 제45대 내각총리대신
일본국 제48-51대 내각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
[ruby(吉, ruby=よし)][ruby(田, ruby=だ)] [ruby(茂, ruby=しげる)] | Yoshida Shigeru
파일:Shigeru_Yoshida_suit.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78년 9월 22일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사망 1967년 10월 20일 (향년 89세)
가나가와현 나카군 오이소마치
재임기간 제45대 내각총리대신
1946년 5월 22일 ~ 1947년 5월 24일
제48대 내각총리대신
1948년 10월 15일 ~ 1949년 2월 16일
제49대 내각총리대신
1949년 2월 16일 ~ 1952년 10월 30일
제50대 내각총리대신
1952년 10월 30일 ~ 1953년 5월 21일
제51대 내각총리대신
1953년 5월 21일 ~ 1954년 12월 10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전처 요시다 유키코 사별
후처 요시다 키요코
자녀 장남 요시다 켄이치
장녀 요시다 사쿠라코
차남 요시다 마사오
차녀 요시다 에코
삼녀 아소 가즈코
친인척 처조부 오쿠보 도시미치
처외조부 미시마 미치쓰네
친부 다케우치 츠나
양부 요시다 겐조
장인 마키노 노부아키
친형 다케우치 메이타로[1]
사위 요시다 히로시[2]
사위 아소 다카키치
외손자 아소 다로
외손녀 노부코 비
외손녀부 토모히토 친왕
외증손녀 아키코 공주
외증손녀 요코 공주
신체 155cm
종교 가톨릭 (세례명: 요셉 토마스 모어)[3]
학력 고등상과학교 (중퇴)
게이오기주쿠 (중퇴)
도쿄물리학교 (중퇴)
가쿠슈인 고등과[4] (졸업)
가쿠슈인 대학과[5] (수료)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사)
정당

지역구 고치 전현구
의원 선수 7 (중)
의원 대수 23, 24, 25, 26, 27, 28, 29
약력 외무성 관료
제12대 외무차관
제35대 내각서기관장
제65·69,70,71대 외무대신
귀족원 의원
제2대 종전연락중앙사무국 총재
제2대 제1복원대신[6]
제2대 제2복원대신
제5대 농림대신
제2대 일본자유당 총무회장
제2대 일본자유당 총재
제45·48-51대 내각총리대신
중의원 의원
초대 민주자유당 총재
초대 자유당 총재
초대 황학관대학 학장
}}}}}}}}}

1. 개요2. 생애
2.1. 정치 인생2.2. 총리 시절
2.2.1. "이제 일본은 살았다" 발언 관련
2.3. 말년2.4. 요시다 학교(吉田学校)
3. 선거 이력4. 대중매체에서5. 기타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45, 48~51대 내각총리대신. 일본 보수본류의 시조격이자[7]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재건, 국가전략 노선을 세운 인물로서,[8] 일생의 라이벌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전후 현대 일본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다.

재임 시절 넘버 원 맨(No.1 Man) 혹은 원맨재상(ワンマン宰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사실 넘버 원 맨보다는 '자기 혼자만 안다.'는 의미인 원 맨으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고집불통 성향의 원 맨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그조차 미국의 압력에는 어쩔 수 없었다.

현역 총리대신일 때는 소속 정당이 1955년에 창당한 자유민주당이 아니라 자유당이었다.[9] 자유민주당에는 1957년에 입당했다.

2. 생애

2.1. 정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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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의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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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시절

1878년 요코스카 출생. 그의 생부 다케우치 츠나는 토사 번 출신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심복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상인 요시다[10]에게 입양되었다. 1906년 7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해 외무성에 입성했다.

전범으로 사형당한 히로타 고키 전 총리와는 같은 해에 입성한 동기 사이라고 한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조선총독을 지낼 당시 비서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으며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도 참여했다.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대사로 근무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길렀다. 당시 일본에서 적성국가로 꼽혔던 영국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쪽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 그리고 시게루 본인의 유달리 튀는 성품 때문에, 직업 외교관의 정년이 다 되도록 정권 핵심에 진입하지 못하고 직업외교관의 정점인 외무차관을 마지막으로 1939년에 퇴직하였다.[11]

이즈음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야쿠자 오야붕이나 마피아 보스 같은 모습이다. 세력을 키운 이후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까지 6년 동안 은밀히 반전 운동을 했는데, 이게 덜미가 잡혀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장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오쿠보 도시미치 초대 내무경의 차남인 마키노 노부아키 백작의 사위라는 빵빵한 처가 배경 덕에 일찍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런 빵빵한 가계는 아소 다로(요시다의 외손자)까지 이어진다. 어쨌든 이 반전 경력으로 전후 미군정으로부터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

전후 첫 내각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GHQ의 눈 밖에 나서[12] 사임에 몰리자,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후원을 등에 업은 요시다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히가시쿠니 내각의 사퇴 이후에도 계속 유임했다.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들어 일본 총리직을 수행할 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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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대신 시절

정치적 라이벌인 하토야마 이치로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호한 부분이 많다. 자유당 총재로 있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과거 전력으로 인해 연합군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당하자 후임을 맡겼던 사람이 요시다인데, 이때 요시다는 하토야마와 '3가지 약속'[13]을 했다고 하고, 하토야마는 3가지 약속에서 하나가 늘어난 '4가지 약속'[14]을 했다고 주장한다.

2.2. 총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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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대 총리 취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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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2부 - 쇼와(昭和) 격동의 총리들中[15][16]

1946년에 발족된 그의 첫 내각인 제1차 요시다 내각노조의 잇따른 파업으로 상당히 무능력한 내각으로 존재했다. 연합군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가 맞은 1947년 총선에서 그가 속한 자유당이 제2당으로 내려앉으면서 결국 사퇴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에 대해서 그가 '헌정의 상도', 그러니까 총리는 다수당에서 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추켜세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시다 히토시와 별로 매끄럽지 못한 관계가 보수연립을 무산시킨데다 자유당의 애매한 의석 수로 얼마 가지 못할 정권을 유지시키느니 요시다는 차라리 사퇴하고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봄 직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확실하게 들어 맞았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 때는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민주당의 아시다 내각이 집권하자 지속적인 태클과 클레임을 걸어서 아시다 히토시의 민주당에서 나온 탈당파들과 다시 합당을 하면서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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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현역 시절
1948년 다시 집권하자마자 의원 수 불리기의 목적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른 결과, 이전 다수당이었던 일본사회당과 민주당[17]을 완전히 격파, 절대적인 과반수를 차지하며 권력을 무난히 획득했다. 당시 요시다는 GHQ민정국과 사사건건 충돌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는 GHQ에게도 당당한 '애국자 요시다'로 받아들여졌고 선거 압승의 원동력이 되었다.[18] 특히 이때 요시다가 발탁한 관료, 경제인, 정치신인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요시다파가 일거에 몸집을 불렸고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이후 일본의 재건 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고, 그가 발탁한 관료들은 훗날 총리가 되었다.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등이 이때 활약한 그의 수족들.

전후 일본에서는 패전 후 군대를 가질 수 없게 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두고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요시다는 일본의 패전국 위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헌법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반대로 하토야마는 평화헌법 개정과 이를 통한 재무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토야마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시다는 최소한의 방위력만 보유한 채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정책을 썼다. 그렇게 일본과 미국은 1951년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미일동맹의 근간이되었다. 또한 그는 경제성장에 주력하지 않을 경우 빈곤과 가난이 심각해져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요시다의 국가전략 노선을 기반으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은채 경제성장을 이루며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다의 총리 시절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1953년, 당시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이 유명한 망언을 했으니 바로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보리를 먹어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발언은 알려진 바와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 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문들이 거두 절미하고 큰 제목으로 썼다. 어쨌거나 이케다에 대한 불신임결의가 중의원에서 통과되면서 위기에 휩싸였다. 거기다기 의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야당 의원인 니시무라 에이이치와 언쟁 중 바카야로라고 혼잣말로 욕을 했는데[19], 이게 하필 마이크에 잡혔고, 당연히 화가 난 니시무라가 항의하며 소동이 커졌다.[20] 이 발언 때문에 요시다는 징벌위원회에 회부되었고, 하토야마 이치로 계파 의원 30여명이 이탈해 11표 차로 내각불신임결의가 가결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어쩔 수 없이 1953년 3월 14일 의회 해산을 하였다.[21] 이 외에도 여러 악재가 겹쳐 지지도가 곤두박질쳤으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으로 반등했다.

쇼와 천황본인의 전쟁책임을 인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나, 태평양 전쟁 자체에 대해 반성하기는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 행사의 발언에서 쇼와 천황이 "나는 아무래도 반성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도,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하극상이나 군부의 전횡을 놓친 것을 반성해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가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며 반대했다.
(천황이) 전쟁을 시작하신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을 위험이 있다. 이제 전쟁이나 패전 같은 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戦争を御始めになつた責任があるといはれる危険がある. 今日は最早戦争とか敗戦とかいふ事はいつて頂きたくない気がする. # #

2.2.1. "이제 일본은 살았다" 발언 관련

한국에서는 "일본은 한국에서 전쟁이 나는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할 때 소위 "요시다 시게루가 했다"는 망언을 자주 인용하며, 대표적인 사례로는 2000년에 간행된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1탄이 있다. 이 때문에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에서 왠지 모르게 얄미운 기회주의자 인상이 박히게 되었다.[22]
これぞ天佑!これを足掛かりにして日本経済を立て直せる!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6.25 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

다만 요시다 시게루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일본 국회 속기기록에 의하면 다른 의원이 요시다를 비판하면서 '요시다가 조선의 동난을 천우라고 언급했다'라고 지적한 1953년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로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발언일 가능성이 있다.#

이 외에도 궁내청이 기록한 쇼와 천황의 공식 기록집 중 하나인 "쇼와 천황 실록"에서는 "조선에서의 문제가 일본에는 오히려 좋다" 라고 쇼와 천황에게 이야기한 기록이 존재한다. #[23]

천우신조(天佑神助)'는 '하늘이 보우하고 신령이 돕는다'는 뜻으로, 불교나 신토, 또는 민간신앙의 색채가 강한 사자성어이므로, 일본에서 몇 안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요시다 시게루가 '천우신조'라는 표현을 썼을 가능성은 더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24]

인터넷에서는 2000년대 초 네이버 인조이재팬에서 환빠 계열 네티즌들이 널리 도배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 네티즌들이 이 말을 듣고 다시 일본 내에 퍼뜨려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외에도 중국어BBC 기사에서도 이를 인용한 적이 있다. #

다만 일본이 당시의 심각한 경제 위기를 한국전쟁으로 극복한 것은 사실이나 일부 한국인들이 주장하듯 일본의 5,60년대 고도 성장이 오로지 6.25 전쟁 덕분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전쟁 하나로 가망 없던 경제가 살아난 것은 아니다. 이미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기술력으로 미국, 독일에는 못 미쳐도 어지간한 유럽 국가들과 맞먹을 수준은 되었다. 그리고 사실 6.25 전쟁은 비단 일본 뿐 아니라 2차 대전 직후 약간의 침체기를 겪던 미국 경제도 엄청난 반등의 계기가 되었다. 오로지 월남전 하나 덕분에 한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얘기다.

여담으로, 일본의 무역 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격화되던 2019년 7월 8일 JTBC 뉴스룸에서도 해당 일화가 나왔는데, 실존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는 발언임에도 당시 분위기상 인용할만하다고 여겼는지 나름의 탈출구는 만들어내면서 이를 인용해 요시다 시게루의 사진과 함께 내보내기도 하였다.
… '요시다 시게루' 역시 "6.25 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하지요. 6.25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이었습니다 …(중략)… 일본 극우의 논리는 바뀐 적이 없으며 바뀌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른바 경제보복. 보복이란 피해를 입은 사람이 행하는 마지막 수단일 터인데 그들이 입은 피해란 대체 무엇인가 …(중략)… "6.25 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했던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을 한 마디 더 전해드립니다. "이제 일본은 살았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2.3.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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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0월 27일 영국에서.[25]
어쨌거나 과연 한국전쟁이 끝나자 요시다의 운도 다해가기 시작했다. 대(對)일본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 미군정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일본국이 성립된 이후 요시다는 계속 총리 자리를 요구하는 하토야마의 세력을 견제, 혹은 제거하기 위해 계속 의회를 해산했다.[26]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유당의 의석이 쪽박 모드로 향해 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업계에 유리하도록 업계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고 중의원에서 법안을 처리해준 이른바 조선의옥 스캔들로 붙잡힌 사토 에이사쿠 간사장을 위해 법무상을 통한 지휘권 발동이라는 무리수를 저지르자 요시다를 향한 정계의 반응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제5차 요시다 내각1954년 11월 21일 대한민국독도를 군사적으로 침공했다가 독도의용수비대한테 대참패를 당하는 독도 대첩을 맞아버렸다. 만약에 독도를 점령하기라도 했으면 요시다는 정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겠지만 일본 해상보안청은 우월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독도의용수비대한테 함정 1척 중파, 16명 사상이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패배해버렸다.

결국 독도 대첩 패배 책임론은 요시다 시게루 내각을 더욱 궁지로 몰았고, 중의원에서는 내각불신임결의안이 12월 9일 제출됐다. 버티지 못한 요시다는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기 직전에 내각총사퇴 형식으로 12월 10일 사임했다. 이에 따라 내각불신임결의는 자진 철회.

그래도 집권기간 7년 2개월(86개월)로 장수했다. 전후 일본에서 재임 기간이 아베 신조, 사토 에이사쿠 다음으로 가장 긴 장수 총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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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월의 모습

89살까지 장수하여 자신과 대립하던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과 기시 노부스케 정권의 탄생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치적 제자들인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가 집권하는 것까지 모두 보았다.

1967년 10월 20일 사망하였는데, 임종 직전에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사실 요시다는 인생의 대부분 동안 가톨릭을 믿었지만 이를 평생 동안 숨겨오다 임종 직전에서야 세례를 받은 것.

그의 장례식은 도쿄에 있는 일본무도관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다.당시 영상 일본에서 '전직' 수상의 장례가 국장으로 거행된 첫 사례다.[27] 사후 대훈위국화장경식과 대훈위국화대수장이 동시에 추증됐다.

2.4. 요시다 학교(吉田学校)

원래 당내에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데다 기존의 당인(党人)파 정치가들을 경멸했던 요시다는 관료, 젊은 국회의원, 경제계 등에서 유망한 자를 뽑아 자신의 측근 세력을 구축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요시다학교(吉田学校)이다.

이들은 요시다가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도 요시다를 따랐으며 이는 요시다가 정계 은퇴 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들 중 대표적 인물들이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며 그 외에도 다수의 중의원 의장 및 정계의 중진들을 배출하며 전후 일본 정치를 주도하였기에 요시다 학교는 곧 보수본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7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고치 전현구

98,176 (29.4%) 당선 (1위) 초선
1949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1,289 (22.9%) 재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7,160 (22.7%) 3선
1953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8,620 (24%) 4선
1955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962 (14.1%) 5선
1958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52,286 (12.2%) 당선 (4위) 6선
1960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8,506 (16.6%) 당선 (2위) 7선

4. 대중매체에서

  • 1981년 드라마 <제1공화국>의 26화에서 이계인이 요시다 시게루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이계인은 이 작품에서 젊은 시절의 이기붕 역을 맡기도 하여, 1인 2역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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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의 요시다 시게루(이계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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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스페셜 드라마 <지고, 이긴다 ~전후를 만든 남자 요시다 시게루~>에서의 요시다 시게루(와타나베 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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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비 도쿄 스페셜 드라마 <미국에 지지 않은 남자 ~바보 총리 요시다 시게루~>에서의 요시다 시게루(쇼후쿠테 츠루베 분)

5. 기타

  • 역대 일본 총리들 중 재임 횟수가 5회로 가장 많다. 45대 총리로 1차 집권했고, 이후 48대부터 51대까지 4대수를 연임하여 연임 횟수도 역대 총리들 중 가장 많다. 아니, 애초에 요시다 총리를 제외하면 3회 초과[28] 연임 총리는 1명도 없다. 최장 집권 총리인 아베 신조도 총 재임 횟수는 90, 96-98대로 4회, 연임도 3회라 요시다 총리에 못 미친다.
  • 노회한 정치가답게 유머 감각도 뛰어났는데, 한 번은 선거 유세 중에 외투를 입고 유세에 나섰다. 한 시민이 요시다에게 "그 외투(外套, がいとう 가이토-)를 당장 벗으시오!"라고 외치자 요시다는 "여러분! 이게 바로 가두(街頭, がいとう 가이토-)연설입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전형적인 일본식 말장난(다자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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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웃는 것으로 유명했다.
  • 일본 총리가 되기 전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I'm sorry'를 심할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한 외국 외교관이 요시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Sorry(쏘리)'를 연발하고 다니냐"고 묻자 요시다는 "나는 장래에 총리대신(総理大臣, そうりだいじん 소-리다이진)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드립은 곤베에의 아임 쏘리라는 게임 제목으로 패러디된다.
  • 영국 대사로 있을 때의 이야기 또 하나. 어느 일본 대신이 영국을 방문해서 요시다를 만나려고 하는데, 요시다가 그를 만나기 싫어해서 대신이 대사관에 전화를 걸 때마다 "대사는 외출했다고 말하라"고 직원들에게 명했다. 보다못한 대신이 주영일본대사관을 직접 찾아갔고 거기서 한 사람을 마주치는데, 그 사람도 "대사가 외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요시다였다. 결국 대신에게 들켰다.[31]
  • 패전 후 일본에 주둔하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식량 지원량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식량 지원량을 더 늘려서 더 많은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맥아더가 통계를 보니 일본의 식량 사정은 지원량을 늘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요시다에게 "일본의 통계는 참 엉터리요. 믿을 수가 없어."이라고 힐난하자 요시다 왈,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으면,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거나 이렇게까지 지지는 않았겠지요."[32]
  • 수상관저 항목에도 나오지만 총리로 영전한 후에도 외무대신 관저를 썼었다. 이에 요시다 본인은 "내가 외상을 겸직하는 건 외상관저에서 살기 위해서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물론 요시다 본인이 초대 내각때부터 3차 개조 내각 중반까지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겸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썼던 외무대신 관저는 현재 도쿄도 정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33] 자기 측근 정치인의 이름도 잘못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쇼와 천황에게 각료 명단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자기 측근이었던 오자와 사에키(오자와 이치로의 부친)의 이름도 틀려서 천황이 직접 주의를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시가 애호가였다고 한다. 평상시 시가를 빼놓지 않았다.# 헨리 클레이와 코히바를 즐겨 피웠다고 한다.
  • 1953년 1월 미국 방문 도중 일본을 들린 이승만 대통령과 비공식 회담을 한 적이 있었다.[34] 한미일 삼자 회담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미국에 오래 살았던 이승만이나 외교관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나 둘 다 영어 실력이 출중해서 통역없이 영어로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당시 회담에 배석하였던 김용식 당시 주일대표부 대사[35]는 이승만이 "Mr. 요시다. 나나 당신이나 앞으로 10년 이상 오랫동안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나 일본국 국민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한일협정은 정확히 10년 뒤 1963년에 협상이 이루어져 1965년에 체결됐다. 참고로 이승만은 1965년, 요시다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둘 모두 정계에서 물러난 뒤였다.[36]
  • 이들 두 지도자 사이에 '호랑이 일화'라는 야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요시다 시게루가 이승만에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이 "임진왜란가토 기요마사가 다 잡아가서 이젠 한 마리도 없다!"라고 날카롭게 응수했다는 내용이다. 혹은 "아직 한마리는 남아있다.(=그게 나다)"라고 응수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하지만 이는 와전된 내용으로, 당시 이승만을 수행했던 백선엽의 증언에 따르면 요시다 시게루가 "내가 중국에 근무할 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은 "1명은 관리로 만들고 1명은 으로 만들기 위해 아들을 기본적으로 둘을 낳는데, 아들 하나가 호랑이에 물려갈 때를 대비해서 하나쯤은 예비로 낳는다." 하며 똑 떨어지지 않는 답변을 했다. 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선문답(?)처럼 상호 청구권 문제 등으로 협상은 타결되지 못했다. 요시다와 이승만은 서로 영어가 능통했으나 궁합이 잘 맞는 상대는 아니었다.
  • 1954년, 서독을 방문하였을때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회담하며 벤츠를 한대 구입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수입 규제 때문에 당장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뒤, 10여년이 흘러1963년 벤츠를 선물받고[37] 매우 기뻐하며 아데나워 수상측에게 그때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며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해당 벤츠는 요시다의 또 다른 애차였던 롤스로이스[38] 함께 지금도 보존된다.
  •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와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둘다 강한 반공성향에 패전국 독일과 일본의 전후 복구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각각 나치, 군부에 탄압당했으며 전후의 점령군과의 마찰이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또한 위에서 보듯이 요시다와 아데나워는 서로 친분이 있었다.1960년, 요시다의 사저를 방문한 아데나워
  • 김성한의 희곡 대본 <오분간>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신이 담판을 벌이는 사이 중간중간에 곁다리 장면으로 등장하는 인간계 인물들 중 하나로도 등장하는데, 하토야마를 저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인의 이름은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전무라고 나온다.
  • 애견인이었다. 많을 때는 개 10마리 이상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하며 가나가와현 오이소마치에 위치한 그의 저택 정원 한켠에는 요시다가 길렀던 개들의 무덤과 묘비들이 서있다.
  • 그의 재임시절인 1954년 11월 21일 독도 대첩이라는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우리나라의 독도의용수비대해상보안청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는 일개 장관이 저질렸다기엔 장관에 대한 문책이나 비판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다 시게루의 직접 지시로 벌어진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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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아소·오쿠보·요시다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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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D7003A> 1대 <rowcolor=#D7003A> 고조부 외고조부
미시마 미치츠네 오쿠보 도시미치
2대 <rowcolor=#D7003A> 증조부 외증조부
아소 다키치 마키노 노부아키
3대 <rowcolor=#D7003A> 외조부
아소 다카키치 요시다 시게루
4대 <rowcolor=#D7003A> 장인
스즈키 젠코
5대 <rowcolor=#D7003A> 본인 처남
아소 다로 스즈키 슌이치
아소 치카코 (처)
6대 <rowcolor=#D7003A> 아들
아소 마사히로
※둘러보기 : 일본의 정치 가문
※ 가계도는 아소 다로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기준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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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2위의 건설기계메이커인 고마츠제작소와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설립자[2]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형제의 사촌[3] 사후 세례명을 받았다.[4] 지금의 신제 고등학교가 아니라 구제고등학교에 상응하기 때문에 대학 예비문에 해당한다.[5] 지금의 가쿠슈인대학은 신제 대학이고 이때의 대학과는 구제대학에 상응했다. 가쿠슈인 대학과가 1905년에 폐지되는 바람에 요시다는 도쿄제국대학에 특별편입해서 졸업했다. 가쿠슈인 대학과는 1949년 신 학제 개편 때 가쿠슈인 고등과(구제)를 통합하고 신제 가쿠슈인대학으로 부활하여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지금 존재하는 가쿠슈인 고등과는 신제 고등학교이므로 요시다가 졸업한 고등과와는 전혀 무관한 학제이다.[6] 여기서 복원(復員)이란 전시체제에서 평시체제로 전환됨에 따라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 목적에서 해제시키는 제반 활동을 뜻한다. 기존의 육군성해군성이 각각 제1복원성과 제2복원성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1복원대신은 일본 제국 육군, 제2복원대신은 일본 제국 해군과 관련된 일을 맡는다. 이 두 직책은 내각총리대신이 되면서 그대로 승계해 겸직했다.[7] 보수본류 양대 파벌(굉지회헤이세이 연구회)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 모두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적 제자였다.[8] 미일동맹주일미군을 안보의 기초로 하여, 일본은 최소한의 경무장 방위력만 보유한 채 경제발전에 주력한다는 노선. 흔히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리며,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후임 일본 총리들도 이를 계승하며 일종의 국가전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그리고 아베 신조 등으로 대표되는 '보통국가' 노선이 일본 외교안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현재는 많이 퇴색되었다.[9] 요시다가 총리를 1954년까지 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당은 요시다의 자유당과 하토야마의 일본민주당이 합당해 1955년 창당된다.[10] 요코하마 최대의 무역상이었다. 그 덕에 요시다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사치와 정치활동에 탕진하였다.[11] 1936년에 총리에 임명된 외교관 동기인 히로타 고키가 요시다를 외무대신으로 입각시키려하자 데라우치 히사이치 육군대신이 반대하였다. 이때 육군성 군무국장이던 무토 아키라가 각료 명단에서 요시다와 시모무라 히로시, 오하라 나오시 3명의 이름을 붉은색 펜으로 죽죽 그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12] 후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7년형을 받는다.[13] 돈을 모으지 않고, 하토야마는 인사에 일절 상관하지 말고, 총리직이 부담되면 언제든지 관둔다.[14] 하토야마가 돌아오면 언제든지 총리 자리를 하토야마에게 물려준다는 것. 결과론적이지만 약속은 지킨 셈이다.[15] 2019년 3월 9일 방송[16] 쇼와(昭和) 격동의 시대, 목숨을 걸고 일본의 방향타를 잡은 총리들의 고난과 갈등의 이야기를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4명의 총리를 통해서 바라본 다큐멘터리[17] 일본사회당은 이미 가타야마 퇴진 직전 열린 총선거에서 완전히 쪽박크리를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당내에서 좌우파로 분열되어 결국 1950년에 사회당 우파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듣보잡 신세로 전락했다. 아시다의 민주당은 아시다 퇴진 이후 별일없이 비틀거리다가 하토야마 이치로에 의해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18] 비슷하게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또한 점령군 측과 마찰을 빚다 쾰른 시장에서 잘렸는데, 오히려 독일 국민들에게 당당한 정치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사례가 있다.[19] 본인보다 19살이나 어린 니시무라가 본인을 강하게 밀어붙이니 칠순이 넘은 노인인 요시다가 격분한 것.[20] 결국 요시다는 바카야로 사건이 터진 그 날 바로 사과해야 했고, 사과를 받은 니시무라는 이에 대해 더 추궁하지 않았다.[21] 이것이 바로 바카야로 해산이다.[22] 다만 요시다 시게루 재임 시절 독도 대첩으로 한일이 실제로 무력 충돌한 적이 있으므로 이러한 부정적 인상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23] 1990년 한 일간지에서 보도한 것이 퍼진 것이 기원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설은 사실이 아니다. 1987년 출간한 일본경제론(강영수 저, 大旺社)에도 엄연히 이 이야기가 실려있고 최소 1970년대에는 이 이야기가 이미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애초에 6.25 전쟁특수로 일본 경제가 큰 혜택을 보았다는 것 자체가 일본에서도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는 인식이다.[24] 하지만 천우신조라는 표현 자체는 이미 종교색이 퇴색된 채 일상적인 관용어구로 쓰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요시다 본인이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이러한 표현을 썼다는 것이 딱히 이상하지 않다. 한국에서도 '무진장', '야단법석' 등 불교에서 유래된 관용어구가 많이 쓰이지만, 어지간히 극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아닌 이상 이를 문제 삼는 기독교인은 찾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요시다는 일반적인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일평생 자신의 신앙을 숨겨오다가 죽기 직전에야 이를 고백한 인물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25] 그의 신장은 155cm였다.[26] 가장 유명한 게 '바카야로 해산'이다. 중의원 질의응답 중에 야당의원의 추궁자세에 질린 나머지 "바카야로"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야당의원도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술수 꾸미기로 유명한 미키 부키치가 트집을 걸고 넘어지면서 중의원이 해산됐다. 만화 맨발의 겐 10권에서도 잠깐 얘기가 나온다.[27] 그로부터 55년 만인 2022년 9월, 2개월 앞서 피살당한 아베 신조 전 수상의 장례가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전직 수상으로는 요시다에 이어 사상 2번째의 사례지만, 통일교 게이트 관련으로 반대 여론이 높은 상태로 치러져 빛이 바랬다.[28] 3연속 집권도 하토야마 이치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가 전부다.[29] 2.26 사건 때 20대였던 그녀는 외할아버지인 마키노 노부아키를 황도파 장교들로부터 지키고 언덕으로 피신시켰다. 후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아소 다로다.[30]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 남자는 친왕/왕.[31] C. Fadiman, ed., The Little, Brown Book of Anecdotes, 1985.[32] 농담이 아니고,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 제국은 통계고 보고고 뭐고 간에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패전은 승전이라 했고, 보급받은 건 떼먹기도 했다.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다면 진짜로 일본이 그만큼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통계와 보고가 제대로 들어올 정도면 최소한의 정신머리는 잡혀 있다는거니까.[33] 요시다는 사망 직전까지 정치인이었고, 사람의 이목을 많이 받는 자리에 있었는데 치매가 보고된 적은 없었다, 그냥 순수하게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했다.[34] 재미있게도 당시 요시다 시게루와 이승만 둘 다 자유당이라는 당명의 정당에 속해 있었다.[35] 훗날 외무장관, 국토통일원 장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주유엔대사 등을 지냈다.[36]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 치하의 세대가 어느 정도 지나간 후에야 한일관계가 복구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부수립 초기부터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내려놓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막상 일본은 조선에 남기고 간 재산에 대한 청구권 문제를 들고 나옴으로서 협상은 계속 공전했다.[37] S클래스의 전신인 W112 300SE 롱 휠베이스 모델로 일본에 첫번째로 수입된 모델이었다[38] 영국대사 시절 구입하여 귀국할때 선편으로 들여와 계속해서 타고 다녔다. 나중에 50년대에 다시 영국으로 보내 오버홀을 받았다고 하니 차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던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