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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910년 3월 12일 | ||
| 카가와현 미토요군 와다촌 (現 카가와현 칸온지시) | |||
| 사망 | 1980년 6월 12일 (향년 70세) | ||
| 도쿄도 미나토구 도라노몬병원 | |||
| 재임기간 | 제68대 내각총리대신 | ||
| 1978년 12월 7일 ~ 1979년 11월 9일 | |||
| 제69대 내각총리대신 | |||
| 1979년 11월 9일 ~ 1980년 6월 12일[1]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 오히라 시게코 | |
| 자녀 | 3남 1녀[2] | ||
| 친인척 | 모리타 하지메 (사위) | ||
| 학력 | 와다촌립 다이쇼 고등소학교 (졸업) 미토요 중학교 (졸업) 다카마쓰 고등상업학교[3] (졸업) 도쿄상과대학 (상학과 / 학사) | ||
| 종교 | 개신교 (성공회) | ||
| 정당 | |||
| 지역구 | 카가와 2구 | ||
| 의원 선수 | 11 (중) | ||
| 의원 대수 |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 ||
| 약력 | 고등문관시험 합격 대장성 관료 중의원 의원 제92-93·100-101대 외무대신 제21-22대 내각관방장관 제16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31대 통상산업대신 제79-80대 대장대신 제1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9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68·69대 내각총리대신 | }}}}}}}}} | |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 68, 69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카가와현 태생. 농부의 자식으로 생활은 비교적 넉넉했다고 한다. 다만 아이가 6명이나 되는지라 중류 수준의 집안이었다고 해도 생활에는 부담이 있었다고. 어렸을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년이어서 그가 정치인이 되고 총리까지 되자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상당히 놀라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집안 살림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1926년 일본해군병학교에 응시했으나 하필이면 중요한 체력 검사를 앞두고 중이염에 걸리는 바람에 탈락하고 만다. 이후 해군병학교를 단념하고 친척의 도움을 받아 타카마츠고등상업학교(현 카가와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상업학교 시절에 사토 사다키치(佐藤定吉)의 영향을 받고 아버지의 죽음이나 자신의 병의 경험에서 기독교(성공회) 신앙에 귀의하여 1929년 칸온지시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톨릭 신자인 요시다 시게루와 아소 다로(이 둘은 각각 외조부 - 외손 관계), 개신교 침례교파 출신인 하토야마 이치로와 하토야마 유키오(이 둘은 각각 조부 - 손자 관계), 그리고 이전 역사의 총리들까지 합하면 기독교인이었던 일본 역대 총리는 총 8명 정도 된다. 졸업 후 방황을 거쳐 고향 장학회의 도움을 받아 1933년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4]에 입학한다.
도쿄상과대학 졸업 후 193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을 시작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주로 세무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1937년 요코하마 세무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케다 하야토의 직속 부하로서 일했던 그는 1940년대 만주 지역에서 세무와 경제정책에 관련된 일을 보았고 1943년 도쿄 세무국 관세부장으로 취임해 다시 본국에서 일하다 1951년 이케다가 대장대신직을 맡게 되어 그의 비서관을 거쳐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고 1952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2.2. 정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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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7월 2일에 찍힌 사진. |
1960년 이케다 내각에서 관방장관과 외무대신을 거치면서 '몸을 낮추는 겸손한 대신'이란 평을 얻었고, 1962년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한일국교회복에 관한 협상을 진행했다. 이때 작성된 게 일명 '김종필 - 오히라 메모'로 이는 1965년 한일국교 협상에서도 기본틀이 되었다. 당시 오히라는 적은 금액만을 제시하며 좀처럼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는데, 김종필이 두견새 울리기 일화를 꺼내며 '우리 둘이서 두견새를 울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자 마음이 움직여 일본 측이 생각하는 최종 금액 안을 터놓고 얘기했다고 한다.[5]
미국과는 주일미군의 핵무기 반입 문제를 마무리 지으면서 일본의 항구에 미 해군 핵잠수함이 주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에 일본의 원자력과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미국이 묵인하는 빅딜을 성사시킴으로써 일본이 원자력을 포함한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는 사회당으로터 일본 열도를 핵 전쟁의 위협으로 몰고 가려 한다며 거센 비판을 받게 된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는 자민당 정조회장과 간사장을 지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을 맡아 일-중 국교수립을 성사시키는 등 1960~7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72년 외무대신 시절 오히라 마사요시는 중국을 방문해 일제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했다. 덩샤오핑도 이에 화답하며 전쟁 배상금 포기를 선언. 중일 관계를 회복하며 그 당시 사이가 좋지 못했던 소련을 견제하려 했다.
1974년 다나카 내각이 임기를 마친 뒤 다나카파의 새 주자로서 자민당 총재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시이나 에쓰사부로 당시 자민당 부총재가 다나카 총리가 돈 밝혀서 사퇴한 마당에 총재 선거에서 또 현질 터지면 국민들이 뿔난다는 취지로 미키 다케오를 밀어버리면서(시이나 재정) 총재 선거에 낙선했다.[6]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미키 총리가 이를 문제 삼으며 다나카 구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자 다나카파 VS 미키파로 자민당은 대분열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미키 총리가 당내 소수 파벌이였던 것을 이용해 다나카파 의원들은 미키를 총리직에서 끌어 내리기 위한 정치공작을 벌였고, 당시 미키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맡던 오히라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자민당 간사장, 후쿠다 다케오 등과 미키를 끌어내리기 위한 작전의 선봉에 섰다(미키 내림).
결국 1976년 자민당이 사상 처음으로 중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후쿠다 다케오가 미키 총리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는데, 사실 이 과정에서 오히라와 후쿠다 사이에는 밀약이 있었다. 후쿠다는 "나 밀어주면 2년 뒤에 너 총리 시켜줄게."라는 밀약을 맺었고, 그것으로 다나카파와 후쿠다파가 연합하여 후쿠다가 총리가 된 것(오오후쿠 밀약 사건). 그 대신 오히라는 간사장(한국 정당의 사무총장과 원내대표를 합한 것과 유사한 요직)이 되어 2년 간 다나카파-후쿠다파의 연합정권이 유지되었다.
2.3. 총리 재임
그러나 1978년, 후쿠다는 오오후쿠 밀약을 지키지 않고 다시 총재 선거에 출마해버렸다. 오히라는 이에 맞서 총리 선거에 출마했는데 초반 여론조사에서는 후쿠다가 우세했으나 막판에 다나카파가 대량의 현질을 시전했고, 총재 예비 선거에서 오히라가 우세한 결과가 나오자 결국 후쿠다는 후보직에서 사임하고 무투표로 오히라가 총리에 당선되었다. 이때 기자회견에서 오히라는 일순간이 의미가 있는가 하면, 10년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라면서 오오후쿠 밀약의 허망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후 1979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68, 69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미일방위조약을 더욱 강화하여 미-일 연합의 환태평양 안보블록 구축 구상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과밀한 일본의 도시문제의 해결에 대한 대안으로 전원도시 구상을 내놓기도 했다.
| |
| 1978년 12월 8일에 찍힌 사진. |
하지만 당 내에서는 주류인 다나카파와 비주류인 후쿠다파와 미키파 연합이 늘 갈등을 일으켰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입김이 강해서 다나카의 그림자 내각(角影内閣)[7]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1979년 총선에서 오히라가 증세와 소비세 문제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비주류가 과반 못되었으니 책임지고 물러나라!라고 외치자 오히라는 나보고 죽으라는 거냐라면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40일 항쟁(四十日抗争)이 터지면서 자민당은 극도의 내홍에 시달렸다. 각복전쟁의 절정기.
이로 인해 국가수반을 지명하는 국회 투표에서는 전례없는 자민당 내 복수 후보 출마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보통 일본 정치의 관례상 다수당 대표가 총리를 맡기 때문에 다수당의 대표 선거가 사실상 총리 선거나 다름없고, 그 이후에 치러지는 국회의 국가수반 지명투표는 형식상의 절차에 불과한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자민당이 대분열 사태를 맞아서 계파별로 다른 후보에 투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차투표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아 이후 열린 결선투표에서 오히라파, 다나카파, 나카소네파중 와타니베의 신자유클럽이 오히라를 밀고 후쿠다파, 미키파, 나카소네파 중 나카가와 그룹이 후쿠다를 밀어 격전 끝에 138:121로 오히라가 간신히 승리해 69대 총리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오히라와 후쿠다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아 79년의 2차 오히라 내각은 사실상 오히라 파만의 소수여당 내각이 돼버렸다. 여기에 사회당이 불을 붙여 내각불신임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러자 후쿠다는 '얼쑤 좋다!' 식으로 비주류파를 모두 동원해 동의안을 처리하는 본회의에 나가지 않아서 동의안을 통과시키게 만들었다. 사실 사회당이 불신임 동의안을 낸 것은 일종의 시위 차원이었다. 자민당이 단독과반은 아니라 해도 원내 1당이라서 "설마 가결이 되겠냐?"라는 생각이었지만 후쿠다가 이 떡밥을 낼름 받아먹어서 불신임안이 가결, 중의원이 해산돼버린 탓에 선거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사회당만 벙벙했다.[8]
사실 1980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내분으로 참패하고 야당이 우세해서 여야백중을 넘어 아예 여소야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기정사실화된 상태였고, 특히 사회당의 경우 공명당과 민사당 등 타 야당과 후보단일화 협정을 맺고 1977년 참의원 선거와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의 부진을 딛고 간만에 의석을 늘리면서 입지를 굳히는 상황이었기에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자민당이 내분 상태라 해도 참의원 의석뿐만 아니라 중의원 의석까지 줄이는 자폭까지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고, 사회당의 시위 차원 불신임도 이런 계산 하의 전략이었는데, 얼떨결에 중의원 선거도 같이 치러지는 상황이 되어 제 발등을 찍는 격이 됐다.
물론 계획이 어긋나긴 했어도 선거 운동 초반에는 자민당이 분열 선거를 치르는 통에 야당 연합정권이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오히라의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서 정국이 뒤바뀌어 야당의 기대는 결국 꿈이 되어버렸다.
2.4. 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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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9일, 사망 24일 전. | 사망 이후 제36회 중원선에서 승리하고 오히라의 영정 앞에서 환호하는 자민당 의원들. |
이에 동조한 많은 의원들이 G7 정상회의 참가 문제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며 총리를 압박했고, 심지어 오히라파 의원들까지 이런 흐름에 가세하자 격분한 오히라는[10] 또다시 건강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격노한 오히라 총리는 결국 부정맥이 다시 도져 쓰러졌고 6월 12일 심근경색에 의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라의 죽음은 분당 직전까지 가 있던 자민당을 하나로 엮게 되었다. 생전에는 치고 박았더라도 "사람이 죽었는데 언제까지 추태 부리고 있을래?"라는 여론이 생겨서인지 주류와 비주류가 다시 연합해 선거에 임한 것. 그리고 오히라의 죽음에 동정하는 여론 덕분인지 초반엔 정권교체도 가능할 것처럼 보던 분위기가 역전되어 막상 선거 결과는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후 이토 마사요시 부총리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로 내각의 남은 임기를 수습하였고, 니시무라 에이이치 부총재가 총재 대행으로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이끌어 나갔다.
3. 선거 이력
|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카가와 2구 | | 43,093 (18.7%) | 당선 (2위) | 초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39,464 (17.8%) | 당선 (3위) | 재선 |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8,851 (22.3%) | 3선 |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6,817 (24.2%) | 당선 (1위) | 4선 |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4,077 (27.3%) | 5선 |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4,066 (27.9%) | 당선 (2위) | 6선 |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076 (33.3%) | 당선 (1위) | 7선 |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2,343 (31.1%) | 8선 |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9,942 (36.6%) | 9선 |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8,412 (43.3%) | 10선 |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6,890 (52.1%) | 11선[11] |
4. 기타
- 총리로 재임하기 전까지는 대장성에서 근무한 경력 등으로 국가 재정 전문가로 통했다. 하지만 그외에도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여 한일 국교 정상화와 중일 국교 정상화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한국에서는 정치 성향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중국에서는 관제언론들이 그를 라오펑요(老朋友)[12]로 칭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 다나카 가쿠에이와는 정치적으로 맹우의 관계였으며 사적으로도 매우 친하였다. 젊은 시절의 둘이서 한번은 스키야키를 먹으러 갔는데 단맛을 좋아하는 오히라는 냄비에 설탕을 자꾸 붓고 짠맛을 좋아하는 다나카는 간장을 자꾸 부어 결국 이상한 맛의 스키야키가 탄생했기 때문에 이후로 둘이 스키야키를 먹으러 가면 두 개의 냄비를 주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거물로 성장한 뒤에도 둘의 교우는 계속되어 주말이면 다나카가 종종 오히라의 사저를 방문하여 다나카와 오히라 일가가 한데 모여 식사를 했는데 그때도 메뉴는 스키야키였다. 오히라는 사망하기 직전에도 다나카를 찾았고 다나카는 오히라의 시신에 메달려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 상당한 독서가로 그가 죽은 후 고향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그가 생전 읽은 무려 1만 5천여권의 책들이 보관되었을 정도. 그리고 각복전쟁 와중에 자민당이 분당 직전까지 몰렸을때 "내가 사임하면 그 뒤는 누가 될것인가. 나는 맘대로 그만둘 자유가 없다. 그러나 혹 내가 죽게 된다면 그 뒤는 후쿠다가 이어야 한다."라고 말해 비록 격하게 치고 박기는 했어도 애증 관계인 후쿠다를 인정했다고 한다.
- 묘하게 도쿄를 안좋아했던 총리였다. "도쿄 사람들은 우편번호도 못쓰는 바보", "도쿄에 3대만 살아도 바보가 된다"라는 발언 때문에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다. 전원도시 구상 등을 미루어보면 천성적으로 대도시 체질이 아니었을지도.
- 정치란 무엇이냐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내일 시드는 꽃에도 물을 주는 것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 특유의 말버릇이 있었는데 연설이나 질문에 답변할 때 마다 항상 "아~"나 "우~"가 먼저 길게 나온 다음에 대답을 이어나갔었다. 그래서 내각총리대신 재임 당시 국민들에게 붙은 별명이 아~우~(あーうー)였다고(...) 다만 오히라 본인은 "총리라는 입장에서라면 말은 신중하게 해야하며 함부로 내뱉을 수 없기 때문에 답변을 하기 전에 한번씩 심사숙고 후 말을 하다보니 그런 말버릇이 붙게 된것같다"면서 본인의 별명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고.
- 대장성 엘리트 관료 출신답게 라이벌이나 상대 파벌이 조각한 내각에 각료(국무대신)로 입각하여도 일단 내각 내에서 견제보다는 맡게 된 직위에 대해 굉장히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수행한다는 평가가 많다. 이건 다른 대장성 엘리트 관료 출신인 이케다 하야토, 후쿠다 다케오, 미야자와 기이치도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 외모에서 보듯 매우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역대 수상들이 방문하였던 어느 유명한 온천 여관의 여주인에 따르면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등 여러 명의 총리들을 모셨지만 하나같이 감히 말을 걸기도 어려웠던 반면 오히라와는 편히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그의 손녀는 현재 국민민주당 당대표인 다마키 유이치로의 비서 중에 하나다. 일본의 정치인 가문 구성원 대부분이 대대손손 하나의 정당에 몸 담는 것을 생각하면 독특한 케이스.[13]
- 고르고 13 24권 "트리폴리의 매장"에서는 오히라로 추정되는 일본 총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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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대 다나카 가쿠에이 | 12대 후쿠다 다케오 | 13대 다나카 가쿠에이 | 14대 호리 시게루 | 15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 |
| 16대 니카이도 스스무 | 1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 18대 우치다 쓰네오 | 19대 오히라 마사요시 | 20대 사이토 쿠니키치 | |
| 21-22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23-24대 니카이도 스스무 | 25대 다나카 로쿠스케 | |||
| 26대 가네마루 신 | 27대 타케시타 노보루 | 28대 아베 신타로 | 29대 하시모토 류타로 | 30대 오자와 이치로 | |
| 31대 오부치 게이조 | 32대 와타누키 다미스케 | 33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 34대 모리 요시로 |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 |
| 36대 가토 고이치 | 37대 모리 요시로 | 38대 노나카 히로무 | 39대 고가 마코토 | 40대 야마사키 타쿠 | |
| 41대 아베 신조 | 42대 타케베 쓰토무 | 43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 44대 아소 다로 | 45대 이부키 분메이 | |
| 46대 아소 다로 |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 50대 이시바 시게루 | |
|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 54대 아마리 아키라 | 55대 모테기 도시미쓰 | ||
| 56대 모리야마 히로시 | 57대 스즈키 슌이치 | }}}}}}}}}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 초대 미즈타 미키오 | 2대 츠카다 주이치로 | 3대 미키 다케오 | 4대 후쿠다 다케오 | ||
| 5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 6대 후나다 나카 | 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8대 후쿠다 다케오 | 9대 다나카 가쿠에이 | |
| 10대 가야 오키노리 | 11대 미키 다케오 | 12대 스토 히데오 | 13대 아카기 무네노리 | ||
| 14대 미즈타 미키오 | 15대 니시무라 나오미 | 16대 오히라 마사요시 | 17대 네모토 류타로 | 18대 미즈타 미키오 | |
| 19대 코사카 젠타로 | 20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21대 쿠라이시 타다오 | 22대 미즈타 미키오 | 23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 |
| 24대 마쓰노 라이조 | 25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26대 고모토 토시오 | 27대 에사키 마스미 | 28대 고모토 토시오 | |
| 29대 아베 신타로 | 30대 다나카 로쿠스케 | 31대 후지오 마사유키 | |||
| 32대 이토 마사요시 | 33대 와타나베 미치오 | 34대 무라타 케이지로 |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 36대 가토 무쓰키 | |
| 37대 모리 요시로 | 38대 미쓰즈카 히로시 | 39대 하시모토 류타로 | 40대 가토 고이치 | 41대 야마사키 타쿠 | |
| 42대 이케다 유키히코 | 43대 가메이 시즈카 | 44대 아소 다로 | 45대 누카가 후쿠시로 | ||
| 46대 요사노 가오루 | 47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 48대 나카가와 쇼이치 |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 50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 |
| 51대 호리 고스케 | 52대 이시바 시게루 | 53대 모테기 도시미쓰 | 54대 아마리 아키라 | ||
| 55대 다카이치 사나에 | 56대 이나다 도모미 | 57대 모테기 도시미쓰 | 58대 기시다 후미오 | 59대 시모무라 하쿠분 | |
| 60대 다카이치 사나에 | 61대 하기우다 고이치 | 62대 도카이 기사부로 | 63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 64대 고바야시 다카유키 | }}}}}}}}}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 |||||||||||
| 초대 사와 노부요시 | 2대 이와쿠라 도모미 |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 5대 이노우에 가오루 | ||||||||
|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5대 이노우에 가오루 | 6대 이토 히로부미 | 7대 오쿠마 시게노부 | 8대 아오키 슈조 |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0대 무쓰 무네미쓰 |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 13대 니시 토쿠지로 |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 ||||||||
| 15대 아오키 슈조 | 16대 가토 다카아키 | 17대 소네 아라스케 | 18대 코무라 주타로 | 19대 가토 다카아키 | ||||||||
|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 21대 하야시 타다스 |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 23대 코무라 주타로 | 24대 우치다 고사이 | ||||||||
| 25대 가쓰라 다로 | 26대 가토 다카아키 |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 28대 가토 다카아키 |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 ||||||||
|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 32대 모토노 이치로 | 33대 고토 신페이 | 34대 우치다 고사이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34대 우치다 고사이 |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39대 다나카 기이치 |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 43대 사이토 마코토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44대 우치다 고사이 | 45대 히로타 고키 | 46대 아리타 하치로 | 47대 하야시 센주로 | 48대 사토 나오타케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49대 히로타 고키 |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 52대 아리타 하치로 | 53대 아베 노부유키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 55대 아리타 하치로 |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 58대 도고 시게노리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59대 도조 히데키 | 60대 타니 마사유키 |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 62대 스즈키 간타로 | 63대 도고 시게노리 | ||||||||
|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64대 시게미쓰 마모루 | 65대 요시다 시게루 | 66대 가타야마 데쓰 | 67·68대 아시다 히토시 |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 78대 이시바시 단잔 | 79·80대 기시 노부스케 |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83·84대 고사카 젠타로 |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89·90대 미키 다케오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91대 사토 에이사쿠 | 92·93대 아이치 기이치 | 94대 후쿠다 다케오 |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 97대 키무라 토시오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98대 미야자와 기이치 | 99대 고사카 젠타로 |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 103대 오키타 사부로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04대 이토 마사요시 | 105대 소노다 스나오 |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107·108대 아베 신타로 |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10대 우노 소스케 |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 112대 나카야마 타로 |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 115대 무토 카분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16대 하타 쓰토무 | 117대 가키자와 고지 | 118대 고노 요헤이 |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 121대 오부치 게이조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 126대 다나카 마키코 |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 132·133대 아소 다로 |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 140대 에다노 유키오 |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 142대 겐바 고이치로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 145·146대 고노 다로 | 147-149·155대 모테기 도시미쓰 | 150대 기시다 후미오 |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52대 가미카와 요코 | 153·154대 이와야 다케시 | 147-149·155대 모테기 도시미쓰 | }}}}}}}}}}}} |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1기 상공대신 (1925~1943) | |||||||||
|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2대 노다 우타로 | 3대 카타오카 나오하루 | 4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 |||||||
| 5대 나카하시 도쿠타로 | 6대 타와라 마고이치 | 7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 8대 마에다 요네조 | 9대 나카지마 쿠마키치 | ||||||
| 10대 마츠모토 조지 | 11대 마치다 추지 | 12대 카와사키 타쿠키치 | 13대 오가와 고타로 | 14대 고도 타쿠오 | ||||||
| 15대 요시노 신지 | 16대 이케다 시게아키 | 17대 핫타 요시아키 | 18대 고도 타쿠오 | 19대 후지와라 긴지로 | ||||||
| 20대 고바야시 이치조 | 임시대리 가와다 이사오 | 21대 토요다 테이지로 | 22대 사콘지 세이조 | 23대 기시 노부스케 | ||||||
| 24대 도조 히데키 | ||||||||||
| 군수대신 (1943~1945) | ||||||||||
| 초대 도조 히데키 | 2대 후지와라 긴지로 | 3대 요시다 시게루 | 4대 토요다 테이지로 | 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 ||||||
| 2기 상공대신 (1945~1949) | ||||||||||
| 2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 26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 27대 호시시마 지로 | 28대 이시이 미쓰지로 |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 ||||||
| 29·30대 미즈타니 조사부로 |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 31대 오야 신조 | 32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 |||||||
| 통상산업대신(1949년~2001년) | ||||||||||
| 초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 2·6대 이케다 하야토 | 3대 다카세 소타로 | 4대 요코오 시게루 | 5대 다카하시 류타로 | ||||||
| 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 8대 오카노 키요히데 | 9대 아이치 기이치 | 10·11·12대 이시바시 단잔 | |||||||
| 13·14대 미즈타 미키오 | 15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 1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 17대 이케다 하야토 | |||||||
| 18대 이시이 미쓰지로 | 19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20대 사토 에이사쿠 | 21·22대 후쿠다 하지메 | 23·2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
| 25대 미키 다케오 | 26·27대 칸노 와타로 | 2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29대 오히라 마사요시 | 30대 미야자와 기이치 | ||||||
| 31대 다나카 가쿠에이 | 32·3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 34대 고모토 토시오 | 35대 다나카 다쓰오 | |||||||
| 36대 고모토 토시오 | 37대 에사키 마스미 | 38대 사사키 요시타케 | 39대 다나카 로쿠스케 | 40대 아베 신타로 | ||||||
| 4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 42대 우노 소스케 | 43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 44대 무라타 케이지로 | 45대 와타나베 미치오 | ||||||
| 46·47대 타무라 하지메 | 48대 미쓰즈카 히로시 | 49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 50대 마츠나가 히카루 | |||||||
| 51대 무토 가분 | 52대 나카오 에이치 | 53대 와타나베 고조 | 54대 모리 요시로 | 55대 구마가이 히로시 | ||||||
|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 56대 하타 에이지로 | 57대 하시모토 류타로 | 58대 츠카하라 슌페이 | 59대 사토 신지 | ||||||
| 60대 호리우치 미쓰오 | 61대 요사노 가오루 | 62·63대 후카야 다카시 | 64대 히라누마 다케오 | |||||||
| 경제산업대신 (2001년~현재)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2대 히라누마 다케오 | 3-5대 나카가와 쇼이치 | 6대 니카이 도시히로 | 7·8대 아마리 아키라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7·8대 아마리 아키라 | 9·10대 니카이 도시히로 | 11·12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3대 오하타 아키히로 | 14대 가이에다 반리 | 15대 하치로 요시오 | 16대 에다노 유키오 | 17대 모테기 도시미쓰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8대 오부치 유코 | 19·20대 미야자와 요이치 | 21대 하야시 모토오 | 22·23대 세코 히로시게 | 24대 스가와라 잇슈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25·26대 가지야마 히로시 |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 29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 30대 사이토 겐 | |||||||
| 31·32대 무토 요지 | 33대 아카자와 료세이 | }}}}}}}}}}}} |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3CA324; border-right: 10px solid #3CA324;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 직위 | 명단 |
| <colcolor=#fff> 부총리 | <colbgcolor=#ffffff,#1f2024> 후쿠다 다케오 | |
| 경제기획청장관 | ||
| 외무대신 | 미야자와 기이치 | |
| 법무대신 | 이나바 오사무 | |
| 대장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
| 문부대신 | 나가이 미치오 | |
| 후생대신 | 다나카 마사미 | |
| 농림대신 | 아베 신타로 | |
| 통상산업대신 | 고모토 토시오 | |
| 운수대신 | 기무라 무쓰오 | |
| 우정대신 | 무라카미 이사무 | |
| 노동대신 | 하세가와 타카시 | |
| 건설대신 | 카리야 타다오 → 미키 다케오 → 다케시타 노보루 | |
| 자치대신 | 후쿠다 하지메 | |
| 국가공안위원장 | ||
| 홋카이도개발청장관 | ||
| 내각관방장관 | 이데 이치타로 | |
| 총무청장관 | 우에키 미츠노리 | |
| 오키나와개발청장관 | ||
| 행정관리청장관 | 마쓰자와 유조 | |
| 방위청장관 | 사카타 미치타 | |
| 과학기술청장관 | 사사키 요시타케 | |
| 환경청장관 | 오자와 타츠오 | |
| 국토청장관 | 가네마루 신 | }}} }}}}}}}}}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3CA324; border-right: 10px solid #3CA324;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 직위 | 명단 |
| <colcolor=#fff> 부총리 | <colbgcolor=#ffffff,#1f2024> 후쿠다 다케오 | |
| 외무대신 | 코사카 젠타로 | |
| 법무대신 | 이나바 오사무 | |
| 대장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
| 문부대신 | 나가이 미치오 | |
| 후생대신 | 하야카와 타카시 | |
| 농림대신 | 오오이시 부이치 | |
| 통상산업대신 | 고모토 토시오 | |
| 운수대신 | 이시다 히로히데 | |
| 우정대신 | 후쿠다 도쿠야스 | |
| 노동대신 | 우라노 사치오 | |
| 건설대신 | 추마 타츠이 | |
| 자치대신 | 아마노 키미요시 | |
| 국가공안위원장 | ||
| 홋카이도개발청장관 | ||
| 내각관방장관 | 이데 이치타로 | |
| 총무청장관 | 우에키 미츠노리 | |
| 오키나와개발청장관 | ||
| 행정관리청장관 | 아라후네 세이주로 | |
| 방위청장관 | 사카타 미치타 | |
| 경제기획청장관 | 후쿠다 다케오 → 노다 우이치 | |
| 과학기술청장관 | 마에다 마사오 | |
| 환경청장관 | 마루모 시게사다 | |
| 국토청장관 | 아마노 고세이 | }}} }}}}}}}}} |
[1] 6월 12일에 급사하여 사망일부터 7월 17일까지는 이토 마사요시 당시 내각관방장관이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다. 수상관저 홈페이지에서도 공식적인 임기 종료일을 6월 12일로 보고 있다.[2] 그중 장남은 1936년생으로, 1962년 아버지보다 먼저 떠났다.[3] 현 카가와대학 경제학부.[4] 現 히토쓰바시대학.[5] 김종필 증언록[6] 다나카는 이를 두고 49:51로 패했다고 위로했다고 한다.[7] 다나카 가쿠에이의 가쿠에이를 한자로 쓰면 角栄이 되는데 栄을 影으로 바꾼 일본식 말장난. 한국어로 의역하면 '다(나카) 해먹는 내각'이랄까.[8] 해서 이 1980년의 중의원 해산을 ‘해프닝 해산’이라 한다.[9] 2009년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후 기자회견 도중 취중연설을 해 사퇴했던 나카가와 쇼이치 전 재무대신의 부친. 초대 농림수산대신을 지냈고, 퇴임 5년 후 자살했다. 아들도 후에 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다.[10] 자신의 계파였던 스즈키 젠코의 발언을 신문에서 본 오히라는 이 천박한 하라구로 새X!라고 외쳤다고 한다. 원문: 浅薄な腹黒者。不謹慎極まりない[11] 1980.06.12. 임기 중 사망[12] 오랜 친구[13] 이와 비슷한 사례로 하토야마 이치로와 하토야마 유키오가 있다. 이건 지금의 일본의 민주당계 정당이 자유민주당에서 갈라져나온, 사실상 자민당과 한 뿌리[14]이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역시 자민당에서 정치를 시작해 민주당으로 분당한 케이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 일본 내각관방장관
- 일본 외무대신
- 일본 경제산업대신
- 일본 재무대신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1910년 출생
- 1980년 사망
- 칸온지시 출신 인물
- 심부전으로 죽은 인물
- 자유민주당(일본) 간사장
- 자유민주당(일본) 총재
- 공무원 출신 정치인
- 심근경색으로 죽은 인물
- 히토쓰바시대학 출신
- 고등문관시험 출신
-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정치인
- 정2위
- 대훈위국화대수장
- 서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