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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조선총독 | |||
'''일본 제국 제36대 내각총리대신 아베 노부유키'''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75년 11월 24일 |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 |||
사망 | 1953년 9월 7일 (향년 77세) | ||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36대 내각총리대신 |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제9대 조선총독 | |||
1944년 7월 22일 ~ 1945년 9월 1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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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아베 노부히로 | ||
학력 |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19기) | ||
정당 | |||
약력 | 제16대 육군성 국무국장 제13대 육군차관[1] 무임소대신 (하마구치 내각) 제20대 제4사단장 제10대 대만군 사령관 제59대 외무대신 제36대 내각총리대신 귀족원 의원 초대 익찬정치회 총재[2] 제9대 조선총독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9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898년 ~ 1936년 | |||
최종 계급 | 대장 | ||
참전 | 러일전쟁 러시아 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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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이자 군인. 내각총리대신이자 마지막 조선 총독. 일본 제국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까지 보게 된 총독이다.[3]1930년대 말 총리를 지냈다가 물러난 육군대장 출신으로, 1944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사임한 고이소 구니아키의 후임으로 9대이자 마지막 조선총독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이 광복하면서 그 해 9월 미군의 서울 진주 때 미 육군 중장 존 하지 장군에게 항복을 공식 인정하여 미군정청 앞으로 조선의 행정권을 위임하고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귀국해서 1953년 9월 7일에 사망했다.
2. 생애
아베 노부유키는 1875년 11월 24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계엄사령부 참모장으로 부임했으며 이후 육군차관과 육군대신 사무대리를 거쳐[4] 사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33년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가 1936년 군부에서 전역신고를 하였다.36대 총리 취임 후 |
총리 사임 직후, 중국으로 파견되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체결에 참여했고, 1940년까지 왕징웨이 정권 대사를 지내다가 귀국, 1942년 귀족원 의원으로 칙임되었고 명예직인 익찬정치회(翼賛政治会) 회장에 선출된다. 그러다가 1944년 전임 조선총독인 고이소 구니아키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후임으로 9대이자 마지막 최후의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재임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았던 데다가 마지막 조선 총독이긴 하였지만, 전임자 못지않은 온갖 강경책와 폭정책으로 조선에서 온갖 물자와 인력의 수탈 및 징집을 무자비하게 강행했으며 국민의용대를 제창하여 조선의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색출에 총력을 벌이기도 하여 마지막까지 식민통치의 철권을 휘두르고 다녔다.
1945년 8월 소련의 침공으로 한반도 북부 일부(함경도 청진 등)를 실질적으로 상실하였고 이후 여운형 등과 협의하여 건국준비 위원회를 완전히 설립하도록 하였지만, 군권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8월 15일 덴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한반도는 해방되었다. 그러나 총독부가 곧바로 해산되지는 않았다. 한반도의 북반부는 소련군에 의해서 점령과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었지만 남반부에서는 조선 치안 유지를 위해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조선총독부 및 산하 행정기관을 유지했다. 패망 이후에도 총독 직위를 유지하고 있던 아베는 9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게 되자 최후의 수단으로 할복을 시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9월 9일 결국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주도하였던 항복 조인식장에 나와서 항복 문서에 조인하게 되었다.
여기서 아베 노부유키는 점령군 사령관이던 존 리드 하지 중장에게 온갖 감언이설과 모략으로 조선 인민의 봉건적인 노예근성과 무지함을 역설하였고, 지배 통치의 간편함을 위한 부정적 조사 자료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런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하지 중장은 조선에 "미군에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독립은 늦어질 것이며, 이를 어기고 경거망동 할 시에는 엄히 처벌을 하겠다"는 무서운 경고성 포고문까지 발표하기도 한다.
1945년 9월 9일, 미군에 항복하는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
이후 총독직을 사임하고 초대 미군정청장인 미 육군소장 아널드 장군에게 조선의 행정권 등을 모두 이양하고는 일본으로 철수한다. 패전국 총독으로서 100만 명의 일본인을 무사히 귀국시킬 책임이 있었던 아베는,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기 혼자 가족만 데리고 도망치다가 마침 폭풍을 맞아 부산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걸려 버린다. 이 해프닝으로 조선 거류 일본인들의 반감까지 샀다.
그는 철수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조선을 쥐어짰다. 철수하던 총독부 관리들과 한국에 체류하던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비용을 마련하려고 엄청난 수의 조선은행권을 찍어낸 것이다. 이들이 인쇄한 구권 화폐는 해방후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당시 돈을 가진 조선인들은 막대한 손해를 봤다.
이 자를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마침내 공식 해산되었다.[5]
일본으로 귀국한 이후 1953년 9월 7일에 사망하였다.
3. 여담
- 한때 일본 전 총리 아베 신조가 아베 노부유키의 손자라는 설이 인터넷에 나돌았지만 아베 노부유키와 아베 신조는 완전 남남이다. 성이 발음은 똑같이 아베여도 한자가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도 정(鄭)씨와 정(丁)씨는 완전히 남남인 것과 같다. 아베 노부유키는 阿部信行이고 아베 신조는 安倍晋三로 성을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전자는 아부, 후자는 안배. 아베 신조의 친할아버지는 야마구치현 소속 중의원을 지낸 아베 간(安倍 寛, 1895-1946)이다.[6] 아베의 연이은 혐한 행보로 국민적 감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그저 성의 발음이 똑같다고 확인도 하지 않고 잘못된 소문이 퍼졌던 듯하다. 한편 아베 신조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의 56~57대 총리를 역임하면서 '55년 체제'라 불리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 구도를 만들어냈다. 기시 노부스케는 전범 용의로 구속 수사를 받다가 재판이 끝난 뒤에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이자 아베 신조의 작은외할아버지인 사토 에이사쿠는 61~63대 총리를 역임하고 197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외무대신을 지냈다.
- 일본 극우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1990년대에 한국에 출판한 <좋은 일본인 나쁜 일본인>에서 아베 총독이 한국에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느니 유감이라는 사과 방송을 하려다가 여러 사정으로 못 하고 나갔다느니 같은 후빨을 하기도 했다. 위에 나오듯이 그런 말을 했을 인간이 아니다.
- 무사히 귀국한 아베 노부유키와 달리 마지막 대만총독인 안도 리키치는 아베 총독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베 노부유키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은 반면, 안도 리키치는 국민혁명군에 항복한 다음 곧바로 체포되어 전범 혐의로 중국으로 압송되 상하이에서 수감된 채로 재판을 기다리던 중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애니메이션 <케모노 프렌즈(애니메이션 1기)>와 <케모노 프렌즈 2>의 음향 감독인 아베 노부유키와 동명이인인데 한자까지 똑같다.
3.1.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
日本は敗れたが、朝鮮が勝利したわけではない。大言壮語ハゴンデ朝鮮が第我に返ってきらびやかで偉大な昔の朝鮮の栄光を取り戻すには、100年という歳月がはるかにかかるだろう。私たち日本は、朝鮮国民に銃と大砲よりも恐ろしいの植民地教育を植えて置いた。結局、朝鮮人たちはお互いに仲違いし、奴隷的な生活を送るのだ。見よ!実に朝鮮は偉大した絢爛だったが、現在の朝鮮は結局日本の植民地教育の奴隷に転落した。そして、私の阿部は再度もどって来る
일본은 무너졌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이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여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아라!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찬영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들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일본은 무너졌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이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여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아라!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찬영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들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인터넷에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 또는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 '일본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소름끼치는 언행' 등의 이름으로 아베 노부유키가 위와 같은 말을 했다는 루머가 퍼져 있으나 아베 노부유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일단 위의 말을 인용한 논문이나 전문 서적도 없고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일본어 원문도 사실상 한국어를 바탕으로 한 기계 번역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장담하건대’가 ‘大言壮語ハゴンデ’로 되어 있는데 ‘ハゴンデ’는 한국어 ‘하건대’를 발음 그대로 가타카나로 표기한 것이기 때문. 조금만 생각해봐도 조선총독이라는 사람이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이라거나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찬영했다'는 식으로 조선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이유가 전혀 없다. 위의 내용은 <1910년, 그들이 왔다>라는 책의 내용에서 일부 내용을 첨가해 인터넷에 퍼진 말로 알려졌으나 # 그마저도 2년 전 2008년 5월 11일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에 일부 내용만 빠져있을 뿐 글 내용이 완전히 똑같이 먼저 올라와 있어서 맞는 정보가 아니다.# 혹은 한일회담 당시 일본 대표로 보내졌던 구보타 간이치로의 "일본은 한국에 은혜를 베풀었다", "만일 일본이 당시에(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 한국을 정복 안했더라면 한국은 타국에 의하여 정복[7]당했을 것이며 그 때 한국은 더욱 비참한 입장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등의 이른바 구보타(久保田) 망언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결론은 아베 노부유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누군가가 올린 괴담이 사실인 것마냥 인터넷에 유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 1961년 개봉영화 <8.15 전야>에서는 배우 최삼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1 8.15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에서는 배우 박병호가 연기했다.
-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심우창이 분했다.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일제강점기 후반부 조선총독으로 등장하는데, 배우 임병기가 연기했다.[8] 21회에서 일제가 패망하고 총독부에서 철수 등의 대책을 논의한다.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는 정말 무서운 것은 군경의 총칼이 가진 힘이 아니라 성난 군중의 분노라는 말을 하고 마사키 남작에게는 "친일한 조선인들은 우리에게 충성했다지만 제 민족을 배신한 배신자들이고 지조 없으니 동정할 가치가 없다"는 말을 한다.
[1] 차관은 2001년 중앙성청 개편 때 부대신으로 개칭된다. 흔히 차관으로 해석되는 대신정무관이나 사무차관은 한국식으로는 차관보에 해당한다.[2] 전시 일본의 중의원-귀족원 합동 정치교섭단체. 일명 익정회라고 부른다.[3] 조선총독부는 천황의 직할 기관으로, 의전서열상 총리 바로 다음이었다. 반면 대만총독은 대략 내무대신에 상응하는 지위였다.[4] 이 시절 잠깐 무임소대신 직을 맡았다.[5] 1945년 9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였을 때까지 만 35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설치되었던 전신기관인 한국통감부 기간까지 포함하면 40년 동안 존속했다.[6] 아베 간의 장남이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이고 아베 신타로의 차남이 아베 신조다. 집안의 먼 조상은 아베노 무네토. 정작 아베 간-신타로 부자는 아베 신조와는 정반대로 반전 평화주의자로 유명했다. 아베 신조가 친가 쪽과 반대 성향이었던 건 외가였던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7] 구보타는 정복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대신 '일본이 한국에 갔다'라고 말하였다고 했다.[8] 비슷한 시기를 다룬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박헌영을 연기했던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