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09:20:25

정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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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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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미2. 일본군 위안부와 혼동
2.1.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당황2.2. 언론과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혼동2.3. 고 심미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분노"공산당빨갱이 놈들의 악랄한 수법"
3.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4. 독일의 배상 사례5. 피해자들의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애도 성명6. 관련 문서

1. 의미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증언#

근로정신보국단, 줄여서 근로정신대, 일명 정신대()라고 한다. 정신대라는 단어 자체는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는 특공대, 유격대의 일본식 표현이며 한국에서도 현재의 특공대와 같은 의미로 60년대까지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1][2]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이며 일본 제국에 의해 노동인력으로 강제징용당한 사람들을 말한다.

일제는 1940년부터 패전할 때까지 전쟁[3]의 보급을 위해서 조선을 마구 수탈했는데 관솔기름을 뽑는다면서 소학교 어린이들을 수업 시간에 뒷산에 올려보내 솔방울을 줍게 한다든지, 일반 가정의 솥을 공출해 버려 질그릇에 밥을 짓게 만드는 등 약탈에 가까운 짓을 일삼았다.

특히 심했던 것이 노동력 수탈이었는데 여성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소수는 조선의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되어 심한 꼴을 면할 수 있었지만[4] 대부분의 10대 소녀들은 "일본에 가면 공부를 시켜주겠다"거나 "월급을 후하게 줄 테니 일본에 가서 취직을 해보자"는 갖은 사탕발림에 꾀여 일본의 공장, 제철소 등 험한 곳에서 노역을 하게 되었으며 밭일을 하고 있는 소녀들을 "잠시 갈 곳이 있으니 가 보자"는 식으로 납치하듯이 끌고 온 사례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일본의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강제로 일하게 된 조선 소녀들은 일반 성인 남성들도 견디기 힘든 고된 노동환경에 내몰렸고 그 과정에서 의식주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 일본군 위안부와 혼동

일본군 위안부와 혼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위에 언급했다시피 정신대는 노동력을 수탈당한 강제노동이고 위안부는 성적 착취라는 전쟁범죄의 피해자다. 따라서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로령이 발표된 것은 인력 착취에 관련된 것이지 위안부 문제와는 관련된 것이 아니다. 정신대에서 위안부로 갔다기보다는 강제적인 성노예 연행을 정신대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김학순 할머니 증언을 보면 일본군에게 '위안부'로 강제로 연행돼서 강제로 성노예가 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현장을 증언하는 부분에선 정신대란 표현이 없다. 다만 이 행위를 현재 증언하는 부분에서는 정신대로 표현하고 있다. 강제적인 성노예 연행을 정신대로 해석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1962년 발간된 역사 교과서에서도 정신대와 위안부는 별개로 기술했지만 1969년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에서 정신대를 '소문에 따르면'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서술함에 따라 이후 인식적 혼동이 발생했다.

2.1.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당황

한국사회에서 여자근로정신대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위안부’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것과 맞물린다. ‘정신대(挺身隊)’란 용어는 ‘데이신타이’(挺身隊)로 잡아갔다’는 일종의 ‘처녀공출’로서 사회적 기억이 환기되면서, ‘위안부’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다. 즉 당시에는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이해가 부족하고, 양자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조사책임자: 김미현, 조사3과), 2008년 11월 4일, 2면
이케다의 증언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의 방한(1992년 1월 16일~19일)을 앞두고 국내 언론에 활발히 보도되었다. 문제는 ‘위안부’와 ‘정신대’가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보도되었다는 점이다. 이케다는 “근로정신대로 갔던 제자들이 종군위안부였던 것처럼 비쳐져 걱정하고 있다”며 여자근로정신대는 군수공장으로 동원하는 것이라고 증언하다. 그러나 한국의 미디어들은 ‘정신대=위안부’ 동원으로 보도하고, 학적부에 기재된 여자근로정신대 동원사실도 위안부 동원으로 인용한다.
상동, 2-3면

2.2. 언론과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혼동

일련의 선행연구를 통해, 혼동되었던 여자근로정신대와 ‘위안부’가 성격이 다른 것임이 파악되기 시작하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일제가 전쟁수행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여성들을 대(隊)단위로 구성하여 일본 군수공장에 동원한 것으로서 성동원을 위한 ‘위안부’ 동원과는 내용이 다른 것이다.(기존 위안부 피해자에는 여자근로정신로 동원되었다가 위안부로 동원되었다고 보고된 사례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위원회 신고건에서 새로이 밝진 피해사례는 없었다. 조선 여자근로정신로 동원되었다가 안부로 동원된 사례에 대해서는 앞으로 구체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재판을 통해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가시화되고 있고, 학술연구에서도 여자근로 정신대 단위의 동원방식이 구별되고 있으나, 아직도 미디어에서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위안부’ 동원을 혼동하여 보도하기도 하는 등 양자의 개념 혼동이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상태이다. >
상동, 7면
위원회 남성 신고건 중 후쿠오카현(福岡縣) 일본제철(日本製鐵) 야하타(八幡) 제련소로 동원되었다고 파악된 신고건 은 2008년 4월 현재 206건이다. 조선인 남성의 경우 연돌 제작, 특수강 등에 배치되었다. 야하타제련소로 동원된 남성 생존자에게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해 질문해보았으나, 의미있는 증언은 없었다.(…) 질문에 대해 일본인 여성들을 봤다고 대답하는 경우, 여자근로정신대를 ‘위안부’와 혼동하여 외출할 자유도 없었고 자신이 있던 곳엔 그런 것은 없었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동, 27면

2.3. 고 심미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분노"공산당빨갱이 놈들의 악랄한 수법"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에 의하여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女子勤勞‘挺身隊’로서 일본 남성들이 전쟁터로 동원되므로 인해 부족해진 일손과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서 군수품을 생산 하는 군수공장의 여공/女工, 간호보조원/看護補助員, 기타 군부대 잡역/雜役,

여자 특수군속/女子 特殊軍屬, 전시 잡역에 종사 등에 전쟁 노동력/戰爭 勞動力으로 동원된 여자들로서, 다시 말하면‘정신대/挺身隊’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의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一般名辭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 11월 16일 사단법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란 단체를 만들어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속으로는 이리의 행각으로, 거짓과 위선으로 위장한 국제사기 협잡하는 간판을 걸어 놓고 아시아태평양전쟁 피해 당사자인 일본군‘위안부’들도 아닌 미친 정신병자 또 라이 년 놈의 새끼들이나 공산당빨갱이 새끼들의 악랄한 수법으로 정부 등록 234명은 죽이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부각시켜 “정신대/挺身隊”가 마치 돈을 받고 몸 판, 창녀로 취급당하게 하는 것은 여자근로‘정신대’ 女子勤勞‘挺身隊’할머니들에게는 평생을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고 있는 것인 동시에 치욕적인 수치심(羞恥心)과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나 “정신대/挺身隊”할머니들을 역사의식 없이 종군‘위안부’라고 등치(等値)시켜, 혼용(混用)하여 부르면, 야만적인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악랄하고, 잔혹한, 일본군인 놈의 새끼들인 황군<皇帝의 軍隊>놈, 새끼들에게 강압에 의한, 강제성이 아닌 자발적으로 돈 받고 몸 판 창녀(娼女)나 매춘부(賣春婦)로 취급당하는 것이기에 우리들에게는 치욕적인 수치심과 모욕이 되는 것이며,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고, 죽기보다 더 듣기 싫은 소리다
(중략)이 법령은 전문 23조로 구성, 각 조항마다 '명령에 따라', '명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로 규정, ‘정신대’ ‘挺身隊’ 동원이 강제적인 성격으로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을 공포(公布)를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 특히 역사학자나 법조인 등이 역사의식 없이 일본군‘위안부’日本軍“慰安婦”/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여자근로‘정신대’의 ‘정신대’ ‘挺身隊’ 를 혼용하는 것은 매국노 빨갱이놈들인 망할 놈들의 짓거리이다.

(중략)
일본군‘위안부’/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전연 관계가 없는 명칭들 입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라는 단체는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단체와 개인들이 만들어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마치“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하여 전쟁터로 동원되므로 인해, 부족해진 일손과,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군수품을 생산 하는 군수공장의 여공, 간호보조원, 기타 군부대 잡역, 여자 특수군속, 전시 잡역에 종사 등에 전쟁 노동력으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성범죄인 일본군“위안부”와는 전연 관계도 없는“정신대”女子勤勞“挺身隊”문제를 대책하고 협의하고 연구하는 단체로 15년간 거짓과 위선으로 위장한 국제사기 협잡 간판을 걸어 놓고,

속으로는 이리의 행각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와 전연 관계가 없는“정신대”란 상표만 도용하고 진정 주인이고 주체이고 중심이 되어야 할 민족의 자존심인 일본군‘위안부’들은 발길로 내쳐 시궁창에 처박아 놓고, 창녀취급 하며 목조여 태평양전쟁사의 진정한 역사의 실체작인 진실들과 사실들을 폭로 증언 고발 유언 못하게 죽이면서, 15년간이나 예수님의 피를 빨아 먹고, 이름 팔아먹고, 일본군‘위안부’들의 피를 빨아먹고, 이름 팔아 먹으며 공산당 빨갱이 수법으로 권력과 출세와 부귀영화와 돈벌이와 밥벌이 수단으로 앵벌이로 이용하고 있는 공산당 빨갱이 단체들입니다.

일본군‘위안부’들은 발길로 내처 목조여 죽이고 “정신대”할머니들마저 마치 일본군인 놈들에게 돈이나 군표를 받고 몸 판 창녀? 매춘부? 취급을 당하게 만들고 있기에 “정신대”할머니들에게는 참을 수없는 치욕적인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사회에서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라는 단체는 17년간이나 미친 개 년 놈의 새끼들만도 못한 국제정치사기, 협잡, 매국하며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고 사는 매국노 빨갱이새끼들의 단체입니다.
고 심미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남긴 유언장…15

3.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

일본박정희 정권 때의 한일협정으로 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09년 12월 일본 정부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 끌려가 11개월간 강제노역에 시달린 한국인 근로정신대 할머니 7명에게 1인당 99엔(약 1,300원)을 후생연금 탈퇴수당으로 지급하였는데 후생연금 보험법에 시가 환산 규정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물가로는 소 2마리 값이었다고 하지만 현재 물가를 반영하지 않은 말 그대로 푼돈을 지급한 셈이다.

2005년에도 일본 정부는 유사한 사례로 탈퇴수당을 신청한 여운택 할아버지에게 316엔을 지급했다.

미츠비시, 미쓰이 등 일본 굴지의 대기업들도 이렇게 조선인 노동력을 거의 날로 먹는 식으로 착취했다. 미츠비시가 특히 악랄했는데 이들은 노동력을 착취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다가 한국에서 미츠비시 자동차 판매장 앞에서 시위를 하고 100만 명의 사과와 배상요구 서명운동까지 벌어지자 전향적으로 보상을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츠비시는 나로호의 핵심 부품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0년 9월 26일에는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 7명이 99엔 소송결과에 대해 후생노동성이 심사청구를 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심사를 청구하였다. 99엔은 상식 이하의 조치이며 적어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한 다음 손해금을 부가해 지급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신대 배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겠다고 했다. 역시 위안부 배상은 원치 않아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4. 독일의 배상 사례

독일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은 국가 간 조약으로 이미 끝났다며 배상하길 거부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즘에 의한 피해나 유대인 학살에 관해선 배상하였으나, 유독 강제징용 문제는 끝까지 법적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5]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은 법적인 책임이나 배상을 의미하는 게 아닌 인도적 차원의 보상을 뜻하는 것이며 애초에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식민지에 대한 보상은 단 하나도 안 하고 있다. 저 배상 논란조차도 점령지였던 유럽 국가들에 한정된 것이다.

5. 피해자들의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애도 성명

2011년 정신대 피해자들은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에 대하여 안타까움과 애도를 표하는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링크 일본에 엄청난 원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인배 이상으로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다.

본문에는 '위안대'라고 나와 있지만 내용은 정신대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므로 여기로 옮긴다.

6. 관련 문서



[1] 1961년 7월 25일의 동아일보에서 레인저 1호 우주선을 정신대 1호로 번역한 기사가 있다.[2] 위안부도 단순히 매춘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1990년대 이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국한하는 것으로 고유명사화되었다.[3] 특히 태평양전쟁.[4] 정말 운이 좋은 경우는 인물상이 개념인 참군인들을 만나서 편하게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다.[5] 학살도 유대인을 제외한 2번째로 가장 많이 사망한 집시족, 제2차 세계 대전 참전국 군인 포로 및 인민들은 물론 나치 독일 반대했던 같은 나라 인민들에게도 배상은 물론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