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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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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 |||
<colbgcolor=#062861><colcolor=#fff> 출생 | 1874년 8월 11일 | ||
오이타현 분고타카다시 | |||
사망 | 1955년 12월 5일 (향년 81세) | ||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7대 조선총독 | ||
1936년 8월 5일 ~ 1942년 5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62861><colcolor=#fff> 학력 | 육군대학교 (17기)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6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895년 ~ 1936년 | |||
최종 계급 | 대장 | ||
참전 | 러일전쟁 만주사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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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군인 장성이자 제7대 조선총독. 일본 오이타현 출신으로 후임인 제8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와 같이 역대 조선총독들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음으로 포악한 자로 평가된다. 조선인들에게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게 했으며 지원병 제도로 무고한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기도 했고 창씨개명과 한국어 사용 금지 등의 조선 민족말살정책을 폈다.요약하면, 조선의 히틀러 되시겠다.
2. 생애
일본 오이타현 타카다시[1]에서 태어난 미나미 지로는 1884년 7월에 숙부였던 미야자키 요이치를 따라 상경하여 도쿄에서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했기에 바로 고등과로 올라갔다. 1889년에 중학 재학시 품행 불량을 이유로 교장에게 1개월 정학을 받자 여기에 반발하여 학교를 그만 둔 후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가 1892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학했다. 1903년 일본육군대학 17기로 졸업했고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러일전쟁 후 소좌로 승진해 제13사단 참모로 일한 미나미 지로는 기병 13연대장을 거쳐 대좌로 승진 후 유럽 순방을 마치고 1919년에 소장이 되어 지나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1930년 육군대장이 되었고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발탁되었을 때 만주사변이 일어났지만 그는 관동군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육군대신으로 재임 중일 때 부하였던 군사과장인 나가다 테츠잔(永田鐵山)이 국가 총동원령을 제안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관동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미나미 지로는 1936년에 제6대 조선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의 후임으로 제7대 조선총독에 취임했는데 이후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가장 강경하고 무시무시한 통치를 일삼았으며 조선에 황국 신민화 정책을 실시하고 지원병 제도를 제창하여 무고한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2] 이것도 모자라 조선어 사용과 조선사 교육을 금지하며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시켰고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을 구실삼아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를 정간시키기도 했다. 1940년에는 모든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창씨개명을 시행하여 이를 거부하는 조선인에게는 온갖 제재를 내리는 방침도 세웠다. 그렇게 미나미 지로가 조선총독으로 재직한 약 6년간 내선일체를 강조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했다.
1942년 조선총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본국인 일본으로 건너가 추밀원 고문이 되었고 귀족원 의원, 대일본정치회 총재를 역임했다.
3. 전범 재판 및 최후
미나미 지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1945년 종전 후 연합군에 의해서 A급 전범으로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만주사변의 책임자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때 미나미 지로는 나이가 고령이였기 때문에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결국 건강 악화로 1954년에 가석방되었으며 가출소한 뒤 1년이 지난 1955년에 향년 81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4. 기타
미나미 총독 시기에 창씨개명을 강요당한 한국인 가운데 미나미 지로를 조롱하기 위해 "내가 총독양반보다 형님이다"라는 의미로 미나미 타로나 미나미 이치로[3]라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이 시기 창씨개명을 강요당한 한국인들 중에 일본어 등의 학문을 배운 사람들 또는 지식인들 가운데는 총독이나 일본을 조롱하는 이름 또는 세태를 풍자하는 이름으로 바꿔 소극적으로 항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4] 한편 종씨께서 보위에 오르셨다며 그에게 인사를 드리겠다며 남원에서 상경한 한 남(南)씨도 있었다 한다.친일파로 변절한 김활란이 미나미 지로를 접견하고는 남차랑(미나미 지로)총독 각하는 솔직하고 검소한 인품으로 집안의 아저씨같다고 평했다. 김활란은 미나미 지로를 겉모습으로만 봐서 평가했지 속으로 보면 미나미 지로는 데라우치 못지않게 냉혹하고 포악한 자였다. 오히려 그전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와 사이토 마코토가 그나마 더 양반이었다. 평가할 정도로 조선에서의 통치가 최악이었단 말이다.[5]
부산동부경찰서 입구에 이 사람의 휘호를 새긴 부산진매축기념비가 남아있다.[6]
5. 대중매체에서
- 2002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30화에서는 짱구아빠 목소리를 맡은 성우 오세홍이 후시녹음으로 목소리를 연기했다. 역사상으로 가장 무자비한 제도를 강행한 총독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아나운서처럼 또렷하고 근엄해 보이는 목소리다. 그런데 실사 배우의 얼굴이 오세홍과 확실히 다르고, 입모양에서도 더빙 티가 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오세홍의 '몇 안 되는 실사 정극 연기'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배우 문회원이 연기했다.
- 다음 웹툰 경성야상곡 후반부에 등장한다. 후반부에 주인공들 새로 부임하는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거사를 계획하는데, 배경이 1936년이라는 것과 계획하면서 나온 사진을 보면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사실상 확정.
6. 둘러보기
[1] 現 분고타카다시.[2] 미나미 지로가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는 제8대 조선총독인 고이소 구니아키를 거쳐 학병 제도로 강화되었다.[3] 타로, 이치로는 장남에게, 지로는 차남에게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4] 일례로 신불출의 경우도 창씨개명을 강요당했을 때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그냥 보면 평범한 일본 이름 같지만, 사실은 ‘개자식’, ‘씨발’ 등을 뜻하는 칙쇼(畜生)를 파자한 것이다. 당연히 퇴짜맞자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라고 이름을 다시 지었는데 이 역시 "에헤라 놓아라" 를 살짝 바꾼 언어유희이다. 또한 전병하라는 농부도 자신의 이름에 농사 농을 붙여서 전농병하(田農炳夏)로 신고하였다. 이걸 일본어로 읽으면 덴노헤이카('천황 폐하'와 같은 발음)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천황의 덴노는 '텐'이라 표기하고 전농의 덴노는 '덴'이라 표기하는 차이점이 있긴 하다.)[5] 옛날 역사책에서 보면 김활란이 총독부의 압력과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변명하지만 실제로 보면 김활란은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압적으로 원하지 않는 친일을 하였다면 소극적으로 해야하거나 아니면 변명거리를 내세워 반민족행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활란은 김구가 해방 직후 작성 지시한 친일파 살생부에 들어가는 전설적인 친일파다. 이런 자잘한 찬양은 부수적인 것이었고 진짜 무서운 짓은 평범한 조선인들에게 태평양 전쟁에 자원해서 나가라고 선동을 해 온 것이다.[6] 좀 더 정확하게는 앞면의 '釜山鎭埋築記念碑'만 그의 글씨이다. 참고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