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21:06:32

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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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령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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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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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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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시마 무네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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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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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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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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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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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라 주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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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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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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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 : 사후 추서
※ 둘러보기 | 파일:일본 황실.svg 일본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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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즈키 칸타로.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68년 1월 18일
이즈미국 오토리군 후시오신덴
(現 오사카부 사카이시 나카구)
사망 1948년 4월 17일 (향년 80세)
치바현 히가시가즈시카군
재임기간 제42대 내각총리대신
1945년 4월 7일 ~ 1945년 8월 17일
서명
파일:SuzukiK_ka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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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스즈키 유테츠 (아버지)[1]
스즈키 키요 (어머니)
배우자 스즈키 도요 (전처)
스즈키 타카 (후처)
자녀 스즈키 이치 (장남)
후지에 사카에 (장녀)
아다치 미쓰코 (차녀)
학력 해군대학교 (갑종1기)
작위 남작
정당
약력 제17대 해군성 군무국장
제14대 제2함대 사령장관
제6대 제3함대 사령장관
제15대 쿠레 진수부 사령장관
제4대 해군차관
제15대 제1함대 사령장관
제15대 연합함대 사령장관
제12대 해군군령부총장
궁내성 시종장
제14대 추밀원 부의장
제20·22대 추밀원 의장
제3대 대동아대신
제70대 외무대신
제42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해군병학교 (14기)
복무 일본 제국 해군
1888년 ~ 1929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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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군인 시절2.2. 궁내성 시종장 및 정치인 시절2.3. 총리 시절
3. 매체에서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군인, 정치인. 제42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태평양 전쟁을 이끈 마지막 내각총리대신이다. 그의 내각에 붙은 별칭이 '종전내각(終戰內閣)'이었다. 그가 총리대신으로 지명된 목적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패전처리 투수이자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지내온 사람.

한편 일본에서 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가 물러나고 스즈키 간타로가 패전과 종전 교섭을 맡았다면, 다른 추축국인 나치 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카를 되니츠가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해군 출신인 것이 특징이고 현실 정치와 전쟁 지도에선 한 발 물러나 있던 입장이란 것도 동일하다. 또 히틀러와 도조는 죽음을 맞았지만, 둘은 직접적인 전쟁 주도에 대한 책임은 면해 전후에도 살아남았단 공통점도 있다. 다만 전후에도 수십 년 간 살아있었던 되니츠와 달리 스즈키 간타로는 이미 고령이었기에 2년 남짓 후에 사망한다.

2. 생애

2.1. 군인 시절

메이지 원년인 1868년 기나이 지방 이즈미노쿠니(和泉国, 현재 오사카부 남서쪽)에서 출생했으나 곧 마에바시로 이사했다. 아버지 스즈키 유테츠는 세키야도 번(関宿藩)의 번사로, 보신 전쟁 당시 막부파 일원이던 출신성분 때문에 해군 진급에 차별을 많이 받았다. 해군병학교 14기로 해군대학을 나와 정식 장교가 되었음에도 차별대우 때문에 한때는 불만을 품고 장교를 그만 두려고 했을 정도였으나, 그때마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버텼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uzuki_Kantaro.jpg
연합함대사령장관 시절
이후 해군 장교로 정식 임관한 후 러일전쟁이 터지자 전쟁에 참전했다. 1898년 해군대학을 1기로 졸업한 그는 러일전쟁 당시 구축대를 이끌고 전함 3척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에 독일 주재 무관으로 부임한다.

1914년, 일본 해군은 전함 콩고(金剛)를 발주할 때 지멘스 사가 해군 장성들과 정부 고위층에 뿌린 고액의 뇌물로 인해 발생한 스캔들인 '지멘스 사건'으로 시끄러웠는데, 해군차관으로 취임한 스즈키가 이 사건을 잘 처리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23년에 해군대장이 되어 1924년에는 연합함대사령장관, 1925년 해군 군령부총장이 되었다. 이때 이미 57세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는다.

2.2. 궁내성 시종장 및 정치인 시절

5년 후인 1929년히로히토의 부탁을 받고 궁내성의 시종장이 된다. 사실 시종장은 천황을 섬긴다는 것 외에는 별 일이 없는 한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천황을 섬기는 명예직을 거절했다'는 세간의 눈총을 받기 싫어서 결국 승낙하고 현역에서 은퇴한다. 그의 나이 61세였으니, 이것이 사실상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후로 15년 가까이 시종장을 맡으면서 히로히토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 때문에 청년 장교단의 질투와 시기를 받게 되었고, 이후 천황의 옆에서 농단을 일삼는 간신으로 지목되어[2] 2.26 사건 때 피습당하는 원인이 된다.

2.26 사건 당시 새벽 5시경에 안도 데루조 육군대위가 지휘하는 반란군 일대가 습격했다. 다수가 동시에 시종장을 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던 안도 대위는 부하들을 내려보낸 뒤 "각하, 쇼와 유신을 위해 목숨을 거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이때 스즈키 간타로는 안도 대위와, 뒤이어 나가타 상사가 쏜 총에 왼쪽 다리[3], 왼쪽 가슴, 왼쪽 머리 부분을 맞고 쓰러졌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시종장을 향해 도고메 상사가 최후의 일격을 종용하자, 피가 흥건한 다다미 위에 쓰러진 스즈키에게 안도 대위는 군도를 빼려 하였다. 이때 스즈키의 아내였던 다카가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만류하였고, 익히 스즈키의 인품을 알고 있던 안도 대위는 망설임 끝에 반란군들을 이끌고 그대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스즈키 간타로는 총탄을 3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스즈키를 총애하던 히로히토는 "짐의 수족인 노신"을 쓰러뜨렸다며 격노, 2.26 사건의 적극진압을 명령하였다.

당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는데, 3발 다 중요한 신체기관과 아주 약간씩 빗겨서 맞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하늘이 돌봤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했다. 게다가 스즈키 본인도 대담하게 반란군 장교들을 맞이했고, 가족들도 반란군의 총격에 강하게 저항한 덕분에 부상에서 빨리 회복해 시종장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스즈키 간타로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충격이 컸던 것인지 이후 시종장직을 사임했다.

1944년에는 추밀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4년의 일본은 사실상 막장 상태로 흘러갔고, 도조 히데키 이후 취임한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가 도조 뒤를 이어 삽질을 계속하자 원로 중신들이 탄핵해 고이소를 물러나게 했고, 후임 총리를 정하기 위해 모였다. 당시 와카쓰키 레이지로오카다 게이스케,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스즈키 간타로를 추천했고, 도조와 고이소, 히로타 고키는 전 육군대신 하타 슌로쿠 육군 대장(1879-1962)[4]을 추천했다. 도조는 "육군이 국토 방위의 주력군이기 때문에, 육군 이외의 사람이 총리가 되면 육군이 외면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사실상 중신들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스즈키 간타로를 임명했다.[5]

2.3. 총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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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총리 취임 후
우여곡절 끝에 스즈키 간타로가 총리가 되었지만 스즈키 본인도 자신의 총리 취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스즈키는 일본 육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넉 달 동안 꾸준하게 종전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었는데, 가장 큰 외교적 삽질고노에 후미마로의 의견을 좇아 소련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었다. 고노에는 소련과 협상해서 소련이 미-일 사이를 중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펴고 있었고 집권 후 예상 외로 전황이 너무 악화된 것을 알게 되자[6] 당황한 스즈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련에 희망을 걸어보게 된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8월 초 일-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남하하면서 스즈키의 막연한 기대를 잘라버렸다.

취임 당시 스즈키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7]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였고, 종전한다면 원자폭탄을 맞기 전에 얼마든지 끝낼 방법도 있었지만 군부와 내각의 국무대신들 간 언쟁으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8]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이 서로 격하게 대립했다. 도고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하자는 입장이었고 아나미는 1억 옥쇄론을 주장하며 다 같이 죽자는 입장이었는데, 이 둘을 중재해야 할 총리 스즈키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면서[9] 두 사람 간에 격론이 오고 갔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저네들이 신으로 모신다는 천황 앞에서조차 욕을 하며 서로 죽여버린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히로히토 천황이 빡쳤을 정도였다. 결국 화가 치밀어오른 도고 외무대신이 7월 말에[10] 선수를 쳤는데, '소수의 민감한 항목을 제외하고'[11]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고 멋대로 발표해버렸다.

포츠담 선언의 기자회견 시 스즈키 간타로는 1945년 7월 28일에 "카이로 선언 직후 생각에 정부는 중대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아 이를 묵살하며 전쟁의 완결을 추진한다"라고 말했는데 다음날 아사히 신문이 "정부가 묵살"이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문제의 묵살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는 '무시'와 '유보' 2가지의 뜻이 있는 지라, 원래는 단순히 시간을 달라는 의미. 즉 '유보'로 이 말을 썼는 데, 이 묵살이 일본의 국가대표 통신사였던 동맹통신사에 의해 ignore it entirely=전면적인 무시라고 오역되었고 로이터 통신와 AP통신도 reject=거부라고 오역되어 보도되었다라는 루머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세간에는 흔히 오역 때문에 연합국이 발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발표를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속설이다. 당장에 저기서 전쟁의 완결을 추진한다는 부분도 왜곡파가 억지로 중의적으로 의역한 거지, 원문은 아예 전쟁을 계속하겠다.였다. 이런 전후 문맥을 놓고 볼 때, 저 묵살을 그저 단순히 유보를 뜻하는 걸로 볼 수 있을리가.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에 대해 스즈키 본인은 자서전[12]에서 "육군 강경파의 압력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왔다, 후에 안타깝게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소련선전 포고를 날리고 남하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듣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보다 못해 히로히토 천황이 나서서 '항복해라'는 수준까지 가게 만들었고, 천황의 재가가 떨어지자 그제서야 스즈키는 항복을 결정했다. 이에 일본 육군 소장파들이 길길이 날뛰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쳐댔는데 스즈키는 묵묵하게 항복은 천황의 결정이라고 밀고 나가서 군부 내부의 항전파 세력을 어느 정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스즈키 총리 시기의 마지막은 항복 선언 시 일어난 육군 강경파의 반란이었다. 8월 14일 총리가 무조건 항복을 결의하자 빡친 육군 강경파가 새벽 사단장을 살해하면서 멋대로 도쿄를 봉쇄하고 스즈키 총리를 매국노랍시고 암살하기 위해 총리 관저 및 스즈키 사저까지도 습격[13]했으나 스즈키 총리는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이에 강경파들은 총리 암살은 포기하는 대신 덴노의 항복 선언을 방송하게 될 라디오 방송사를 접수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당시 NHK 아나운서 등의 활약 때문에 옥음방송 테이프 탈취에 실패하고 쿠데타군은 이후 출동한 동부군관구 사령관 다나카 대장에 의해 진압되었다.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틀 뒤 스즈키는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지만 제35대 총리를 지냈던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1945년 전범으로 연합군에 체포됨에 따라 동년 12월 그의 후임으로 다시 한 번 추밀원 의장을 맡았으나 이후 공직추방령 대상으로 지정되어 이듬해 6월 의장직을 사임한다.

이후 그는 고향인 노다시에 돌아갔고, 1948년에 자택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향년 81세. 죽기 직전에 '영원의 평화' 라는 말을 또렷한 목소리로 두 번 되뇌었다고 하며, 화장한 후의 유해에서 2.26 사건 당시에 맞은 총알 3발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정부 관련자들 가운데에서 보기 드물게 살해나 사형당하지 않고 자연사했다. 그리고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았다고 한다.[14] 정치군인들에게 여러 차례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스즈키의 유품 중 대부분은 고향 노다시의 스즈키 간타로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3. 매체에서

2015년 일본 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 온건파와 강경파를 조율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고령에서 나오는 무력함과 노회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기가 일품. 민감한 사안에서 귀가 안 들려 잘 듣지 못하는 시늉을 자주 한다. 총알도 못 뚫는 고환이란 별명과 그 일화가 언급된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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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키야도 번(関宿藩)의 다이묘 쿠세씨(久世氏)의 가로(下老)로, 보신 전쟁 당시 막부파로서 신정부군에 맞서서 싸웠었다.[2]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배후로 여겨진 것이 결정적이었다.[3] 정확히는 왼쪽 허벅지를 관통한 탄환이 고환에서 멈췄다. 그래서 생긴 말이 총알도 못뚫는 고환(鉛玉、金の玉をば通しかね)[4] 아베 노부유키 내각 - 요나이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맡았다[5]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때 하타가 총리가 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타는 무조건 항복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다만 하타가 1945년 당시에 무조건 항복에 찬성한 이유는 본인이 경험한 후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였기 때문에, 이 때 총리가 되었다면 어떤 의견을 펼쳤을지 알 수 없다. 하타는 1945년 4월 서일본 지역 방위를 총괄하는 제2총군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는데 사령부가 히로시마에 있었다...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떨어질 때 자신은 늦게 출근한 덕에, 히로시마역 부근에서 피폭되긴 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다.[6] 총리가 되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던 이유는 육군이고 해군이고 반대파가 자기들을 공격할 까봐 각자의 불리한 전황을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이다.[7] 취임 당시 77세로, 모든 내각총리 중 가장 최고령이다.[8] 참고로 도고 외무대신은 한국계 일본인이다. 그의 조상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도공.[9] 스즈키는 항복 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항복 의사를 발표했다가는 군부 우익한테 공개처형당할까봐 입 다물고 있었다.[10] 구레에 있던 마지막 잔존 함대까지 몽땅 잃어버린 때이다.[11] 덴노만 유지시켜준다면 식민지 포기고 뭐고 다 받아들이겠다는 애매모호한 의미였다.[12] 鈴木貫太郎傳 1960, p. 368-369.[13] 손녀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스즈키 사저는 스즈키 총리가 없다는 걸 알고 열 받은 장교들이 방화해 전소되었다고 한다.[14] 鈴木貫太郎傳 同編纂委員会編、昭和35年(1960年) 183-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