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08:19:00

옥음방송

1. 개요2. 상세3. 종전? 항복?4. 방송 과정
4.1. 예고4.2. 영상4.3. 구성4.4. 조서
4.4.1. 원문4.4.2. 현대 일본어4.4.3. 한국어 번역
5. 반응
5.1. 일본인5.2. 피점령국 사람들
6. 평가
6.1. 역사학자
7. 여담8.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실제 옥음방송
옥음방송(, ぎょくおんほうそう)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일본 제국의 종전 선언이다.

천황조서(詔書) 낭독 녹음본을 재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쇼와 덴노가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한다는 것으로 이 방송을 기점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을 맞이하였고 한반도8.15 광복을 맞았다. 또 이후 일본은 미국이 점령하여 연합국 최고 사령부(SCAP, 또는 GHQ)의 통치를 받게 됐다.

'옥음방송'의 '옥음'이라는 단어는 '임금의 목소리'라는 뜻이다. 한국 사극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옥체(임금의 몸)처럼 똑같이 임금을 높이는 표현인 것이다. 해석하자면 '임금이 친히 목소리를 내어 하시는 방송'이라는 뜻이다.

2. 상세

'옥음방송'이라는 단어 자체는 임금이 국민에게 하는 방송이라는 보통명사지만 이 방송 이전까지 일본에서 천황이 국민을 대상으로 방송을 한 전례가 없었다. 방송을 듣는 백성이 무릎 꿇고 듣는지, 불경하게 누워 듣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항복 선언을 한 이 방송을 하면서 최초로 천황의 '옥음'이 방송을 타게 됐다.

종전 후에는 천황의 신격화가 부정되었고 일본의 문화도 여러모로 달라지면서 천황의 취급도 단순 상징 정도로 많이 낮아졌다. 따라서 TV, 라디오 등 대중 매체에 많은 '옥음방송'이 있었지만[1] 이 선언의 임팩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일본에서 '옥음방송'이라면 대개 이것을 일컫는다.

다만 전에도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 사례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우연히 어느 스포츠 행사의 NHK 실황 중계 중에 히로히토의 육성이 마이크에 잡혀서 송출된 적이 있다. 히로히토가 이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만 당시 NHK의 기술진부터 총재까지 모두 궁내청에서 불경죄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정식으로 방송한 것은 이때가 최초다.

전제군주국 또는 군주의 권위를 크게 내세우는 국가에서는 다양한 관례 때문에 서민이 제왕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평민-신하-신하-신하-시종-군주로 이루어지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천황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직접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으로 취급된 것인데[2] 보통 천황의 말이나 의사, 뜻은 시종장이 대신 전달하며 대외적인 입장 표명이나 의사 표현도 궁내청이 대신한다. 현재야 인식의 변화 및 미디어의 발달로 직접 의사 표시나 발언 등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 시대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평상시에 국민에게도 말씀을 아끼던 높으신 분입을 처음으로 연 것이 하필 항복 선언이었다는 셈이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드러나듯 영국조지 6세연설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여러 번 한 것과 대조된다. 이는 동양에 비해 서양의 교육과 문화가 발표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양 국가들의 대학에서는 발표와 토론이 상당히 발전돼 있다. 한국 유학생들이 서양의 대학교에서 상당히 애를 먹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지 6세도 말더듬이라 연설을 잘하지 못해 방송하기 전에 강도 높은 특훈을 받았다. 서구권도 라디오로 연설을 잘하는 리더가 나오는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부터이고 보수적인 기존 왕족들 중에는 대중 앞에서의 연설에 능숙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찌 보면 최고의 쇼맨인 아돌프 히틀러 + 최고의 작가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조합이 막강한 지지를 얻게 된 건 우연이 아닌 셈이다.

후에도 일본 황실의 공식 발언은 직접 송신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각료[3]나 아나운서의 말을 거쳐 전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위 옥음방송에 해당하는 사례는 현대에도 많지 않다. 당시로부터 66년이 지난 2011년에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일어난 뒤인 3월 16일 오후 4시 35분에 아키히토가 위로 메시지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옥음방송'이라는 용어 자체가 지극히 일본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기에 타국에서는 '임금의 목소리'라는 '옥음'이라는 용어 자체에 불쾌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체로 '항복 선언'으로 일컫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옥음방송'이라면 십중팔구는 반어법이다.

영어권에서는 '옥음방송'을 직역한 ‘Jewel Voice Broadcast’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하나지만 위키백과 문서를 비롯해 더 널리 쓰이는 명칭은 ‘Hirohito surrender broadcast’, 즉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이다.

당시의 공문서는 헌법과 법령을 비롯한 대부분이 문어체였고 옥음방송의 원고(原稿)인 '종전의 조서(終戰ノ詔書)' 역시 문어체 공문서다.[4] 그러므로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낡은 표현이 떡칠되어 있는 건 예사였기에 얼핏 들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거기에 다음 문단에서 나오겠지만 천황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이리저리 꼬는 바람에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왔다. 무엇보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지만 '항복'이란 표현은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은 항복 선언이기도 하다.[5]

이에 심지어 당대의 일본인들조차도 이 연설이 무슨 내용인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으나 이는 당시 증언들이 엇갈린다. 나중에 방송국에서 해설 방송이 나갔다고 한다. 자세한 건 후술.

3. 종전? 항복?

이 방송 이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무장 해제 되었는데도 항복이라는 용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4개국의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는 문구에서 이 조서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쇼와 덴노는 이 조서에서 자신의 신민들과 제국 정부를 분리하면서 제국 정부가 아닌 일반 신민들에게 포츠담 선언 수락 사실을 알린 것이다. 항복 사실 자체는 제국 정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고 애초에 쇼와 덴노의 결정 자체가 정부 회의에서 나온 것이라서 이 방송이 제국 정부에 알리는 목적은 아니다.

여기에는 당시 내각과 천황, 그리고 메이지 헌법과 일본 국내 상황이 얽혀 있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에서 본토 결전을 운운하는 육군 중심의 강경파와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화평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립 속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는 사이 연합군폭격핵폭탄 공격을 퍼부었고 소련도 참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사실상 일본의 컨트롤 타워였던 최고 전쟁 지도 회의(긴급 비상 어전 회의)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지만 포츠담 선언 수락에 일본도 조건을 붙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럼 그 조건을 뭘로 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금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핵심은 '국체 보전', 즉 '천황제 유지'를 절대적 선결 조건으로 함을 뜻하였다.

따라서 사태를 현실적으로 보고자 했던 외무성 측에서는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니 빨리 수락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육군의 수장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는 그것을 위한 추가 조건으로 일본 내 연합군 주둔지 및 그 기간의 최소화와 더불어 일본 주도의 무장 해제와 전범 처벌을 더 내세우며 뻗대고 있었다. 외무성은 이후에도 아나미 육군대신이 다시 어깃장을 놓을까 봐 상당히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뻗대고 있던 중에 8월 9일 나가사키에마저 핵이 투하되었고 보다 못한 내각 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는 당일 심야에 곧바로 임시 각의까지 열며 결론을 내고자 했으나 도무지 대립은 끝날 줄을 몰랐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와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 기도 고이치 내대신이[6] 포츠담 선언(무조건적인 항복 조건) 수락에 찬성했고 아나미 육군대신을 중심으로 우메즈(육군) 참모총장, 토요다 (해군)군령부 총장이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내각 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는 히로히토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그 자리에서 히로히토는 자신의 생각도 외무대신의 생각과 같다고 말했다. 즉,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큰 틀 자체는 8월 9일 23시경에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다.

8월 10일, 스즈키 간타로는 연합군 측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연합군은 8월 12일에 답서를 보냈는데, 그 답서의 내용을 가지고 다시금 일본 육군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천황과 일본 정부는 연합군 사령관에게 'subject to' 한다는 구절이었다. 제임스 번즈 미 국무장관이 작성해 보낸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통보에 대한 답장에는 아래와 같이 표현되어 있었다.
From the moment of surrender the authority of the Emperor and the Japanese government to rule the state shall be subject to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who will take such steps as he deems proper to effectuate the surrender terms.

항복 이후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천황일본 정부의 권위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종속되며,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항복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하다 여겨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subject to는 본래 '~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 '~의 명령을 따른다', '~의 통치를 받는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사안에서 이 단어의 온건한 의미부터 강한 의미까지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제한 / 권한 혹은 관리 하에 두다
2. ~의 영향력 아래 놓이다
3. (권한 따위가) ~에게 있다, 주어지다
4. ~의 지시 / 명령을 따르다
5. ~를 지배하다, ~의 통치를 받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는 부분인데, 외무성 측은 제한 하에 둔다고 한 반면 육군성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천황제가 "예속되고", 최고사령관이 일본을 "지배한다"고 판단하여 번역하였다. 이에 육군성은 '그렇게 되면 국체 유지(천황제 보존) 불가능함'을 외치며 최종 결재를 하지 않고 반발했다. 히로히토 평전을 쓴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외무성 측이 원문을 축소해서 의역을 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전후 진주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의 권력을 장악하고 일본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버렸으므로, 일본을 '통치하고', 일본의 국가 통치권이 연합군에 '예속되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8월 14일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오전 8시 40분 총리대신 스즈키 칸타로와 내대신 기도 고이치가 급히 만나 오전 11시에 긴급 어전 회의를 여는 데 합의했다. 어전 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오전 10시 히로히토는 비황족 출신 육해군 원수 3인인 육군의 스기야마 하지메와 하타 슌로쿠,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7]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스기야마 하지메, 나가노 오사미는 항복에 반대했으나 하타 슌로쿠는 "항복에 찬성한다"고 진언한 것으로 전해진다.[8] 오전 11시, 합동 긴급 어전 회의가 열렸다. 역시나 위의 3명은 옥쇄를 주장했지만 쇼와 덴노는 다시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조 히데키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고관이 천황의 뜻에 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 발언이 나온 후 6일 뒤 도조는 이 발언을 철회했다. 이 발언은 도조가 자신은 전쟁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발언이 아니라 기도 고이치가 평화를 바라는 천황의 생각에 반하여 이런 저런 행동을 한 것을 알고 있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나온 대답이었다. 결국 포츠담 선언에 반대했던 군부 인사들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8월 14일 오후 선언의 초안이 작성되고 녹음 준비를 위해 NHK의 기술진들과 총재가 국민복 차림을 한 채 궁내청으로 들어갔다. 일본 황실은 전쟁 중에도 드레스 코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평상복 차림으로라도 들어오라는 특별 지시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초안이 정서되지 않았다.

인쇄본을 신문사에 돌리기 위해 붓글씨로 쓰지 않고 등사용 철필로 긁었다. 그리고 궁내청 특유의 끝단 맞추는 정서법[9]으로 인해 끝부분 7자를 남기고 다시 정서했다. 굳이 그래야 했던 이유는 조서 마지막에 어새를 찍어야 하는데 이 어새가 보통 큰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10] 도장 찍을 자리가 모자라서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래 놓고도 맞추는 데 실패해서 결국 12자는 4행에 작성했고 마지막 5자는 인영에 겹쳤다.[11]

밤 9시경까지 초안이 완성되지 않았다. 기껏 정서를 끝냈더니 '전세가 불리하여'란 구절을 '유리하지 않아'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이 '불리하여'라는 구절에 반대하였고 이 때문에 몇 시간이 지나갔다.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대신이 통 크게 양보하여[12] '유리하지 않아'로 겨우 바꿀 수 있었다. 결국 이 부분은 붓글씨로 가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잘못으로 인해 녹음 기술진들과 쇼와 덴노는 7시간 가까이 대기하였다. 이윽고 3번에 걸친 녹음 끝에 오후 11시 30분 조서 낭독 녹음을 종료했고 이를 우여곡절 끝에 다음 날 15일 정오에 방송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평양 전쟁의 종결에 이른바 천황의 결정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대공황으로 허우적대던 일본 내에서 군부가 대두하여 을 일으키더니 그 전비의 지출로 다시 허우적대다가 일으키게 된 것이 태평양 전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쟁은 군부와 그들이 점거한 정부 내각에 책임이 있고 쇼와 덴노는 죄가 없다는 식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전후에 만들어진 오늘날의 상징 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제 시절의 천황은 상징 천황도 아니었으며 무가 정권기의 허수아비도 아니었다. 특히 전후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미 당시의 각료들은 '전범'으로 처형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메이지 헌법에 따르면 선전 포고는 국무대신의 보필 사항에 속했다. 당시 헌법에서는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하고 그 책임을 진다."라고 규정했다. 즉, 천황의 '군주 무책임론'이 성립 가능한 것은 천황의 결정에 국무대신들이 보필하고 그 책임도 대신들이 지기 때문인 것이다.

문제는 개전(전쟁 개시), 특히 태평양 전쟁의 시작인 진주만 공습이 내각이 아니라 보필 책임이 없는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육해군 차장 등이 참석하는 대본영-정부 연락 회의(연락 간담회)에서 사실상 결정된 것이라는 데 있다. 결국 국무대신의 보필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쇼와 덴노는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 맞다. 천황의 결정이 있음으로써 종전이 가능했다면 반대로 '천황에게는 개전 책임도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개전 조서에서는 다른 신민들과 분리되어 서술되지 않았던 '제국 정부'가 분리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상징 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여 히로히토도 재가만 하는 기계라는 인식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내려져서는 안 될 결정이 내려졌으니 그럼 왜 이제 와서 천황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온갖 구실을 붙여야만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조서였던 것이다.

때문에 조서는 '덴노 자신이 바라왔던 것은 만방 공영과 같은 좋은 것이지, 전쟁을 벌여 타국을 침략하는 등의 나쁜 행위는 바라지 않았다'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고 세계의 대세 역시 유리하지 않으며 결코 '불리해져 갔다'가 아니다!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해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했기 때문에, 결국 인류 문명의 보호자인 천황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에 응하도록 지시한다'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또 중일전쟁에 대한 서술을 생략하여 태평양 전쟁 4년만을 전쟁으로 상정했다.

즉, 이러한 조서 내용은 '국체 보전'을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짜맞춰진 조서는 히로히토와 일본 정부의 태평양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종전의 명분 그리고 그 이유 또한 규정했다. 옥음방송은 이 전쟁은 아시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전쟁의 종결은 죽어가는 신민들을 위해 잔학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일본 신민과 인류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을 일본인들에게 박아 넣었고 이는 일본인들이 전후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결정해 버리고 만다. 거기에 덴노는 침략 전쟁을 주도한 이가 아니라 위험에 처한 일본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이로 포장되었다. 전후 일본의 전쟁 책임 회피와, 우익들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버린 셈이다.

4. 방송 과정

4.1. 예고

8월 14일 오후 9시 뉴스, 그리고 15일 7시 21분 뉴스로 2번에 걸쳐 방송을 예고하였다. "15일 오전 중 천황이 직접 조서를 발하여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빠짐없이 잘 들으라"는 안내가 그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 전력 부족으로 인하여 주간 송전을 중단하던 지방의 임시 방송소 14곳 모두에도 15일 오전에는 특별 송전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4.2. 영상


위의 동영상은 1945년 8월 15일 당일 정오, [age(1945-08-15)]년 전 실제로 라디오로 방송된 자료다. 조서 낭독 부분을 잘 들어 보면 한자어 음독 부분은 최대한 또렷하게 읽고 훈독과 조사 및 어미 부분(가타카나)은 빠르게 흘리는 방식으로 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탁음을 넣어 읽는 습관도 확인할 수 있다. 히로히토 본인이 연설에 그리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各ゝ(오노오노)' 부분을 읽을 때 삐끗하는 것도 들을 수 있다.[13]

2015년 8월 1일, 일본 궁내청에서는 종전 70주년을 맞아 위 방송 녹음 원판 사진과 이 원본에서 디지털로 녹음한 고음질 음성을 일반에 공개했다. (일본어), 디지털 녹음본(mp3)




미국 데일리 뉴스에서 2015년 8월 1일 공개된 음성에 영어 자막을 달아 방영한 내용. 태평양 전쟁 당시 촬영된 영상들을 자료 화면으로 사용하였다.

4.3. 구성

멘트 출처는 이곳(자막 없음)
조서 재낭독 부분과 내각고유 부분까지 포함된 영상

방송 당시 버전이 아니라 현대 기술로 음질을 깨끗하게 한 버전이다.
  1. 정오 시보.
  2. 와다 노부카타[14] 아나운서의 멘트.
    只今より、重大なる放送があります。

    "지금부터 중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全國の聽取者の皆樣、御起立願ひます。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기립해 주시기 바랍니다."
  3. 정보국(내각 정보국이라고도 하나 정보국이 공식 명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天皇陛下に於かせられましては、全國民に對し、畏くも御自ら大詔を宣らせ給ふ事に成りました。

    "천황 폐하께서 황공하옵게도 친히 전 국민에 대하여 조서를 발표하시게 되었습니다."


    是より謹みて玉音をお送り申します。

    "지금부터 삼가 옥음(玉音)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4. 국가 기미가요 반주 연주. - 국가적 차원의 방송이라서 기미가요를 조서 낭독 전후(前後)에 틀어준다. 보통의 라디오 방송을 들을 때는 딴짓을 하며 듣거나 누워서 듣는 경우가 많은데 군국주의로 미쳐 돌아가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덴노의 옥음방송을 이와 같은 자세로 듣는 것은 심히 불경하다고 생각하였기에 기미가요 연주를 방송하여 전원 기립시키기 위함이었다.
  5. 조서 낭독. (녹음본)
  6. 기미가요 반주 연주.
  7. 정보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謹みて天皇陛下の玉音放送を終ります。

    "삼가 천황 폐하의 옥음방송을 마칩니다."
  8.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畏くも天皇陛下に於かせられましては、萬世の爲に太平を開かんと思し召され、昨日、政府をして、米英支蘇四國に對して、ポツダム宣言を受諾する旨、通告せしめられました。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만대를 위하여 태평시대를 열고자 하시어, 어제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네 국가에 대하여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시었습니다."


    畏くも天皇陛下に於かせられましては、同時に詔書を渙發あらせられ、帝國が四ケ國の共同宣言を受諾するの已む無きに至つた所以を御敎示あらせられ、今日正午、畏き大御心より詔書を御放送あらせられました。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동시에 조서를 발포하시어, 제국이 네 국가의 공동 선언을 부득이 수락하게 된 경위를 교시하시어, 금일 정오 어진 마음으로 조서를 방송하시었습니다."


    此の未曾有の御事は、拜察するだに畏き極みであり、一億等そく感泣いたしました。

    "이 미증유의 일은 삼가 살피건대 지극히 어진 결정이시오며, 일억 국민이 모두 감읍(感泣)하였습니다."


    我我臣民は、唯唯、詔書の御旨を必謹誓つて、國體の護持と民族の名譽保持のため、滅私の奉公を誓ひ奉る次第で御座います。

    "우리 신민은 다만 조서의 뜻을 반드시 삼가 받들어 국체의 유지와 민족의 명예 보전을 위하여, 멸사봉공을 맹세하고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謹んで詔書を奉讀いたします。

    "삼가 조서를 봉독하겠습니다."
  9. 조서 재낭독.
  10.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謹んで詔書の奉讀を終ります。

    "삼가 조서의 봉독을 마치겠습니다."
  11.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내각고유 봉독
  12. 이후 종전 관련 뉴스, 총리 담화, 포츠담·카이로 선언 요지, 해당 선언 수락문 요지 등의 방송.

4.4. 조서


정식 명칭은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亞戰爭終結ノ詔書)다. 줄여서 종전 조서(終戰詔書)라고도 부른다.

이하의 원문은 일본어를 아는 사람도 읽기 쉽지 않은데 이는 이 글이 일본어 문어체로 쓰여 있는 데다 히라가나 대신 가타카나가 사용되고 한자도 현대의 신자체가 아닌 구자체로 되어 있는 등 역사적 가나 표기법의 영향하에 작성되었다. 현대 가나 표기법은 패전 이후인 1946년에 제정되었다. 또 탁음을 표현할 때 쓰이는 탁점(゛)도 사용되지 않는 등 표기법이 현대 일본어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문장 자체가 논점을 돌려 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문어체를 알아도 곧바로 해석하기 어려운 건 덤이다.

4.4.1. 원문

朕深ク世界ノ大勢ト帝國ノ現狀トニ鑑ミ非常ノ措置ヲ以テ時局ヲ收拾セムト欲シ玆ニ忠良ナル爾臣民ニ告ク

朕ハ帝國政府ヲシテ米英支蘇四國ニ對シ其ノ共同宣言ヲ受諾スル旨通告セシメタリ

抑〻帝國臣民ノ康寧ヲ圖リ萬邦共榮ノ樂ヲ偕ニスルハ皇祖皇宗ノ遺範ニシテ朕ノ拳々措カサル所曩ニ米英二國ニ宣戰セル所以モ亦實ニ帝國ノ自存ト東亞ノ安定トヲ庻幾スルニ出テ他國ノ主權ヲ排シ領土ヲ侵スカ如キハ固ヨリ朕カ志ニアラス

然ルニ交戰已ニ四歲ヲ閱シ朕カ陸海將兵ノ勇戰朕カ百僚有司ノ勵精朕カ一億衆庻ノ奉公各〻最善ヲ盡セルニ拘ラス戰局必スシモ好轉セス世界ノ大勢亦我ニ利アラス加之敵ハ新ニ殘虐ナル爆彈ヲ使用シテ頻ニ無辜ヲ殺傷シ慘害ノ及フ所眞ニ測ルヘカラサルニ至ル

而モ尙交戰ヲ繼續セムカ終ニ我カ民族ノ滅亡ヲ招來スルノミナラス延テ人類ノ文明ヲモ破却スヘシ斯ノ如クムハ朕何ヲ以テカ億兆ノ赤子ヲ保シ皇祖皇宗ノ神靈ニ謝セムヤ是レ朕カ帝國政府ヲシテ共同宣言ニ應セシムルニ至レル所以ナリ

朕ハ帝國ト共ニ終始東亞ノ解放ニ協力セル諸盟邦ニ對シ遺憾ノ意ヲ表セサルヲ得ス帝國臣民ニシテ戰陣ニ死シ職域ニ殉シ非命ニ斃レタル者及其ノ遺族ニ想ヲ致セハ五內爲ニ裂ク且戰傷ヲ負ヒ災禍ヲ蒙リ家業ヲ失ヒタル者ノ厚生ニ至リテハ朕ノ深ク軫念スル所ナリ

惟フニ今後帝國ノ受クヘキ苦難ハ固ヨリ尋常ニアラス爾臣民ノ衷情モ朕善ク之ヲ知ル然レトモ朕ハ時運ノ趨ク所堪ヘ難キヲ堪ヘ忍ヒ難キヲ忍ヒ以テ萬世ノ爲ニ太平ヲ開カムト欲ス[A]

朕ハ玆ニ國體ヲ護持シ得テ忠良ナル爾臣民ノ赤誠ニ信倚シ常ニ爾臣民ト共ニ在リ若シ夫レ情ノ激スル所濫ニ事端ヲ滋クシ或ハ同胞排擠互ニ時局ヲ亂リ爲ニ大道ヲ誤リ信義ヲ世界ニ失フカ如キハ朕最モ之ヲ戒ム

宜シク擧國一家子孫相傳ヘ確ク神州ノ不滅ヲ信シ任重クシテ道遠キヲ念ヒ總力ヲ將來ノ建設ニ傾ケ道義ヲ篤クシ志操ヲ鞏クシ誓テ國體ノ精華ヲ發揚シ世界ノ進運ニ後レサラムコトヲ期スヘシ

爾臣民其レ克ク朕カ意ヲ體セヨ

(御名御璽)[16]

昭和二十年八月十四日

4.4.2. 현대 일본어

아래는 위의 원문에서 한자를 신자체로 바꾸고, 표기법을 현대 일본어 표기에 맞게 히라가나로 수정한 후 문장 부호와 후리가나를 덧붙이고, 명시되지 않았던 탁점을 명시하는등 가독성만 개선한 것이다. 해당 연설의 고전적인 문어체 어투는 이제 일본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ruby(朕, ruby=ちん)]深く、世界の大勢と、帝国の現状とに[ruby(鑑, ruby=かんが)]み、非常の措置をもって時局を収拾せんと[ruby(欲, ruby=ほっ)]し、ここに[ruby(忠良, ruby=ちゅうりょう)]なる[ruby(爾, ruby=なんじ)]臣民に告ぐ。


朕は帝国政府をして、[ruby(米, ruby=べい)][ruby(英, ruby=えい)][ruby(支, ruby=し)][ruby(蘇, ruby=そ)]4国に対し、その共同宣言を[ruby(受諾, ruby=じゅだく)]する[ruby(旨, ruby=むね)]、通告せしめたり。


そもそも、帝国臣民の[ruby(康寧, ruby=こうねい)]を[ruby(図, ruby=はか)]り、[ruby(万邦共栄, ruby=ばんぽうきょうえい)]の楽しみを共にするは、[ruby(皇祖, ruby=こうそ)][ruby(皇宗, ruby=こうそう)]の[ruby(遺範, ruby=いはん)]にして、朕の[ruby(拳々, ruby=けんけん)][ruby(措, ruby=お)]かざる所、先に米英2国に宣戦せる[ruby(所以, ruby=ゆえん)]もまた、実に帝国の自存と、東亜の安定とを[ruby(庶幾, ruby=しょき)]するに[ruby(出, ruby=い)]で、他国の主権を[ruby(排, ruby=はい)]し、領土を[ruby(侵, ruby=おか)]すが[ruby(如, ruby=ごと)]きは、もとより朕が[ruby(志, ruby=こころざし)]にあらず。


しかるに、[ruby(交戦, ruby=こうせん)]すでに[ruby(4歳, ruby=しさい)]を[ruby(閲, ruby=けみ)]し、朕が[ruby(陸, ruby=りく)][ruby(海, ruby=かい)][ruby(将兵, ruby=しょうへい)]の[ruby(勇戦, ruby=ゆうせん)]、朕が[ruby(百僚有司, ruby=ひゃくりょうゆうし)]の[ruby(励精, ruby=れいせい)]、朕が[ruby(一億衆庶, ruby=いちおくしゅうしょ)]の[ruby(奉公, ruby=ほうこう)]、[ruby(各々, ruby=おのおの)]最善をつくせるに[ruby(拘, ruby=かかわ)]らず、戦局必ずしも[ruby(好転, ruby=こうてん)]せず、世界の大勢また我に[ruby(利, ruby=り)]あらず。


しかのみならず、敵は新たに[ruby(残虐, ruby=ざんぎゃく)]なる爆弾を使用して[ruby(頻, ruby=しきり)]に[ruby(無辜, ruby=むこ)]を殺傷し、[ruby(惨害, ruby=さんがい)]の及ぶ所、[ruby(真, ruby=しん)]に[ruby(測, ruby=はか)]るべからざるに[ruby(至, ruby=いた)]る。


しかもなお、交戦を継続せんか、ついに我が民族の滅亡を招来するのみならず、ひいて人類の文明をも[ruby(破却, ruby=はきゃく)]すべし。


かくの如くんば、朕、何を[ruby(以, ruby=も)]ってか、[ruby(億兆, ruby=おくちょう)]の[ruby(赤子, ruby=せきし)]を[ruby(保, ruby=ほ)]し、皇祖皇宗の神霊に[ruby(謝, ruby=しゃ)]せんや。


これ、朕が帝国政府をして、共同宣言に応ぜしむるに至れる所以なり。


朕は帝国と共に、終始東亜の解放に協力せる[ruby(諸盟邦, ruby=しょめいほう)]に対し、[ruby(遺憾, ruby=いかん)]の[ruby(意, ruby=い)]を[ruby(表, ruby=ひょう)]せざるを[ruby(得, ruby=え)]ず。


帝国臣民にして、[ruby(戦陣, ruby=せんじん)]に[ruby(死, ruby=し)]し、[ruby(職域, ruby=しょくいき)]に[ruby(殉, ruby=じゅん)]じ、非命にたおれたる者、及びその遺族に想いを[ruby(致, ruby=いた)]せば、[ruby(五内, ruby=ごだい)][17]為に[ruby(裂, ruby=さ)]く。


かつ、[ruby(戦傷, ruby=せんしょう)]を[ruby(負, ruby=お)]い、[ruby(災禍, ruby=さいか)]を[ruby(蒙, ruby=こうむ)]り、家業を失いたる者の[ruby(厚生,ruby=こうせい)]に至りては、朕の深く[ruby(軫念, ruby=しんねん)]する所なり。


おもうに、今後帝国の[ruby(受,ruby=う)]くべき苦難は、もとより[ruby(尋常, ruby=じんじょう)]にあらず。


爾臣民の[ruby(衷情, ruby=ちゅうじょう)]も、朕、よくこれを知る。


しかれども朕は、時運の[ruby(赴, ruby=おもむ)]く所、[ruby(堪, ruby=た)]え[ruby(難, ruby=がた)]きを堪え、[ruby(忍, ruby=しの)]び難きを忍び、もって万世の為に太平を開かんと欲す。[A]


朕はここに、国体を[ruby(護持, ruby=ごじ)]し得て、忠良なる爾臣民の[ruby(赤誠, ruby=せきせい)]に[ruby(信倚, ruby=しんい)]し、常に爾臣民と共にあり。


もしそれ、情の[ruby(激, ruby=げき)]する所、みだりに[ruby(事端, ruby=じたん)]を[ruby(滋, ruby=しげ)]くし、あるいは同胞[ruby(排擠, ruby=はいせい)]、互に時局を[ruby(乱, ruby=みだ)]り、為に[ruby(大道, ruby=だいどう)]を[ruby(誤, ruby=あやま)]り、信義を世界に[ruby(失, ruby=うしの)]う[19]が如きは、朕、最もこれを[ruby(戒, ruby=いまし)]む。


[ruby(宜, ruby=よろ)]しく、[ruby(挙国一家, ruby=きょこくいっか)]、子孫[ruby(相, ruby=あい)][ruby(伝, ruby=つた)]え、かたく[ruby(神州, ruby=しんしゅう)]の不滅を信じ、[ruby(任, ruby=にん)]重くして道遠きをおもい、総力を将来の建設に[ruby(傾, ruby=かたむ)]け、道義を[ruby(篤, ruby=あつ)]くし、[ruby(志操, ruby=しそう)]を[ruby(鞏, ruby=かた)]くし、[ruby(誓, ruby=ちか)]って国体の[ruby(精華, ruby=せいか)]を[ruby(発揚, ruby=はつよう)]し、世界の[ruby(進運, ruby=しんうん)]に[ruby(後, ruby=おく)]れざらんことを[ruby(期, ruby=き)]すべし。


爾臣民、それ[ruby(克, ruby=よ)]く朕が意を[ruby(体, ruby=たい)]せよ。


(御名御璽)


昭和20年8月14日

4.4.3. 한국어 번역

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그대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20] 4개국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21],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 포고를 한 까닭은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함과 같음은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22]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23],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24]의 여정(勵精)[25], 짐의 일억 중서(衆庶)[26]의 봉공(奉公)[27]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28]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29]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破却)[30]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億兆)[31]의 어린 백성[32]을 보전하고 황조황종(皇祖皇宗)[33]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제맹방[34]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진(戰陣)[35]에서 죽고 직역(職域)[36]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37]에 이르러서는 짐이 깊이 진념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무론[38] 심상치 않고, 그대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39],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A]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호지(護持)[41]하고[42], 그대 신민의 적성(赤誠)[43]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그대 신민과 함께할 것이다. 만일 감정이 격해지는 바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동포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44]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45]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46]에 뒤처지지 않도록 하라.

그대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어명어새)

쇼와 20년(1945) 8월 14일

5. 반응

5.1. 일본인

자국민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니 "우리가 전쟁에서 졌다. 그들에게 항복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굉장히 어려운 표현을 사용한 데다 우회적으로 말해서 일본인들이 당시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확실치 않다. 당장 NHK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발언이나 종전 조서에서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후 일본 정부는 다음 날인 7월 27일 프로파간다용으로 써먹기 위해 이 내용을 일본 국민들에게 공표했기 때문에 선언 자체의 내용은 상당수 일본인들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수락한다는 것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조서를 봉독한 와다 아나운서는 당시를 회고하며 "조서 녹음본이 방송되는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증언하는가 하면 "당시 방송을 들으며 우는 이들의 모습은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는 증언도 있다. 혹자는 알아들었어도 울기는커녕 웃을 일이었다며 전쟁 말 일본의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는 이들의 연출은 실제 당시에 대동되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도 증명되었다.

애당초 직접 천황이 방송을 한다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 벌어진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을 것이고 더욱이 정보국 시모무라 총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아마도 빼박이라는 것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챘을 것이다.

근래에도 2011년 12월 한동안 보이지 않던 리춘히가 갑자기 북한 방송에 나왔을 때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뭔가 큰일이 났음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짐작했을 것과 같은 이치다. 심지어 리춘히의 성명 발표에 앞서 프로그램 편성을 안내하던 보도원 역시 검은색 옷을 입고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눈치챈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옥음방송과 관련하여 NG가 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미리 방송국에는 언질을 주었고 신문사에서도 관련 보도를 이미 인쇄하였다는 증언들도 있다. 가령 조서 본문이 어렵고, 음질마저 안 좋아 못 알아들었어도 뒤이은 뉴스의 내용 때문에 뭘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천황이 친히 발표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고 하지만 2차례에 걸쳐 옥음이 방송될 예정이니 임시로라도 장비를 마련하여 방송 취약 지대도 모두 잘 들을 수 있도록 대비하라는 말이 내려왔다고 한다.

한편 이게 무슨 소린고 고민하던 일반인들과 달리 일본 육군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이미 내각에서 수락 반대의 의견을 밀고 가지 못한 채 종전 조서에 서명한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는 육군 내 강경파들의 지탄 속에 할복자살하였고 이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강경파는 이 음반을 방송 전에 탈취하려고 했다. 물론 혹시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 것도 대비해 미리 백업판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5.2. 피점령국 사람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도 당연히 일본 땅이었고 조선인들도 차별을 받았다.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인들은 8.15 광복 때까지 2등, 열등 국민 취급 당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온갖 수탈의 대상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등의 만행이나 군함도를 비롯한 강제 징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조선인도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NHK 월드 라디오의 전신인 동아방송[47]에서 단파방송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반도 외에도 당시 일본령이었던 대만과 만주국, 중국 점령지 등에도 방송은 진행되었다.

그러나 단파 방송의 특성상 수신이 잘 안되는 지역에서는 음질이 너무 구렸고 거기에 녹음본 자체의 음질도 문제가 있는 데다 잘 들렸어도 일본어를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1943년을 기준으로 일본어를 아는 식민지 조선인의 비율은 20%에 불과했다는 자료가 있다. 게다가 문장이 일본인도 알아듣기 힘들 만큼 난해했던 탓에 조선에서는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몇몇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촌구석이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방송을 듣기도 힘들었고 들었더라도 상술한 이유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후 다음날 대대적으로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사실이 보도되자 한반도에서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보통 매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항복 방송이 나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뛰쳐나와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당시 사람들이 증언했다. 실제로는 그다음 날(16일)에 가서 일본의 지배가 완화됐다는 사실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사람들이 뛰어나와 축하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1945년 8월 15일 자료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기뻐하던 사진은 대부분 16일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 특히 당시 이미 민족 말살 정책으로 황국 신민화 교육을 받았던 어린이들은 자신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국, 즉 일본 제국이 패전했는데 왜 즐거워하냐고 어리둥절하거나 슬퍼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8.15 광복을 참조.

6. 평가

6.1. 역사학자

역사학자 앤드루 고든은 『현대일본의 역사』에서 당시 히로히토가 국민뿐 아니라 일본 국가를 전쟁의 희생자로 묘사하며 막 끝난 전쟁을 해방 전쟁으로 정당화하며 천황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려 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비판했다.
이 발표는 막 끝난 전쟁을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정당화하고, 곧 뒤바뀔 세상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계속 지키려는 천황과 측근들에 의한 최초의 주목할 만한 노력이었다. 그것은 일본 국민을, 나아가 일본 국가조차도 전쟁과 잔학한 무기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라디오 방송을 마무리 지으면서 히로히토는 서구 세계의 진보를 보고 배우려 했던 메이지 시대의 레토릭을 끄집어내 사용했지만, 방송 전체를 통해 국민에게 변혁이 아니라 인내를 호소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48]

7. 여담

쇼와 덴노는 이 방송을 3번에 걸쳐 녹음하였다. NHK의 엔지니어는 처음에 OK를 냈으나 히로히토 본인이 '너무 톤이 낮은 것 같다.'며 다시 녹음하고자 했고 2번째는 발음이 씹혀서 NG를 냈다. 3번째 녹음이 방송에 사용되었다. 총 6분 남짓한 분량을 녹음기 2대로 녹음했다. 1면당 3분에서 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던 당시 SP 음반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6분 남짓한 분량을 2장에 걸쳐 녹음했다. 듣고도 구별 가능하다. 중간에 갑자기 음질이 맑아지는 파트가 있다.

다만 당시 NHK 엔지니어들은 처음 고쿄에 들어갈 때 1대의 녹음기만을 소지했다. 나머지 1대는 추후 예비용으로 보관 중이던 녹음기를 1대 더 급히 들고 온 것. 당시 사용된 녹음기는 일본 전기 음향[49]의 DP-17-K가 사용되었고 일본 NHK 방송국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이 녹음본은 SP 녹음임을 감안해도 음질이 좋지 않다. 우선 당시 일본의 방송 기술이 딸려서 노이즈가 심한 것도 있다. 1930~40년대에 일본과 방송 교류를 했던 독일 측 기술진들은 "일본 방송의 음질이 너무 나빠서 중계하기 민망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반대로 일본 측 기술진들은 독일 방송의 음질이 너무 좋아서 열폭했다.

오픈릴 테이프가 없었기 때문에 잡음이 심한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녹음해야 했던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더불어 천황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하려고 임의로 출력을 증폭시킨 것이 되레 심한 잡음을 유발했다는 설도 있다. JOAK의 경우 평시 10kW 내외였던 출력을 60kW까지 증강시켰다. 근거 중 하나로 당시 입궐했던 NHK의 음향 기술자들은 DP-17-K를 갖고 간 이유를 일본에서 가장 최신식 기계라서라고 증언했다.

녹음된 SP반은 궁성사건에 휘말려 제작 당시부터 2개 세트로 제작되었다. 군 수뇌부와 정부 각료들은 쿠데타의 정확한 정보는 몰랐지만 '저 또라이 청년 장교단이 분명히 2.26 때처럼 일을 낼 것'이란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이에 처음 녹음한 것을 부(副), 나중에 녹음한 것을 정(正)으로 정하고 각자 따로 보관하였다. 이때 부본은 화려한 오동나무 상자에 일본 황실 문장이 자수 놓인 보랏빛 천에 감싸는 등 아주 화려하게 치장하고 정본은 네모진 가방(생긴 것이 딱 방독면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 궁내청 시종 숙소에 처박아 놓았다. 중간에 쿠데타군에게 탈취당할 것을 우려한 도쿠가와 시종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들어맞은 셈.

15일 새벽, 마침내 다나카 동부군 사령관에 의해 쿠데타가 제압된 후에야 정본과 부본 모두 NHK로 이송되었으며 정오가 막 지난 후 NHK 제8스튜디오에서 정본이 송출되어 일본 전국과 점령지에 방송되었다.

또 전후로 SP의 소재가 불분명해졌는데 방송을 치욕스럽게 생각한 황실에서 디스크를 은닉해서라는 설이 있다. 한동안 공식 녹음반이 분실 혹은 파기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방송 1년 뒤 미군이 당시 옥음방송 녹음을 담당한 엔지니어를 불러와 복제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복제반 제작시 재생 속도와 원판 녹음 속도의 미세한 오차로 인해 현재 일반적으로 유포되고 있는 음원은 피치가 조금 낮다고 한다.

한편 뒤늦게 발견된 원본 음반 또한 NHK 방송 박물관에서 질소 가스를 충전해 보관 중인데 이 아세테이트제 디스크가 품질이 조악해 열화되어 버리는 바람에 복구는 되었지만 실제 재생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물론 복각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와서는 잡음을 상당 부분 제거해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11년 5월에 일본의 복각 전문 레이블인 알투스에서 발매된 황기 2600년 봉축곡의 CD에 보너스 트랙으로 실리기도 했다. 물론 상술했듯이 해당 조서 방송은 천황의 결단으로 미화되었기 때문에 자기들로서는 기념할 만하다.

방송에 대한 비화가 궁금하다면 2014년 8월 15일 <KBS 파노라마> '전쟁과 일본 제3부 히로히토와 종전조서'라는 다큐를 볼 것을 추천한다. KBS 홈페이지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인해 다시보기가 되지 않았으나 개편 후 공개되었고, 2019년 8월 12일 재구성판 다큐를 방영했다.

이 외에는 문예춘추에서 발간한 <일본의 가장 긴 하루>가 1996년 한국에서 가람기획을 통해 정발되었고, 이정현이 번역을 맡았다. 다만 세월이 흘러 절판되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2015년부터 전자책 형식으로 공개 중이나 열람하려면 협약 공공/대학도서관 원문 검색용 컴퓨터로 조회해야 한다. 일본 작품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시점에서 쓰여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다만 레퍼런스 자체는 상당히 자세한 편. 영화로는 일본 패망 하루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개봉되었다.

종전 조서는 총 815자다. 전후 요나이 미츠마사 전 해군대신은 매일 정좌해서 이 815자 정서하기를 죽을 때까지 일과로 삼았다고 한다. 이것을 부하나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가보로 간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 해 본 사람들은 한 자, 한 자 정서하기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 것이다. 자세도 힘들거니와 서예를 하려면 붓과 종이가 직각을 이뤄야 한다. 이런 자세로 한 획마다 정확하게 써야 하는데 815자를 써야 한다.

8. 대중 매체에서

  • 이 옥음방송을 다룬 미디어 매체로는 소설로 쓰여진 일본의 가장 긴 하루와 이를 영화화한 일본 패망 하루전이 있다. 특히 일본 패망 하루전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항복을 결정하는 치열한 논쟁과 회의 과정, 당시 총리였던 스즈키 간타로히로히토, 당시 육군대신인 아나미 고레치카, 도조 히데키 등 관련 인물들이 등장하여 종전 직전의 일본 정계의 모습과 종전 조서의 작성, 이 옥음방송의 제작 과정과 그 와중에 이 옥음방송의 테이프를 탈취하고 항복파 요인들을 암살, 쿠데타를 획책하던 궁성사건도 다루고 있다. 일본의 연기파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여 선 굵은 연기를 펼치는 게 특징인 수작.
  • 대만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 비정성시의 오프닝이 옥음방송으로 시작된다.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도 일본 패망 후 옥음방송이 나오고 이 방송을 들은 아마카스가 권총 자살 한다.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로딩 스크린에서 2차 대전과 관련된 어록들이 표시되는데, 그중에는 종전 조서 중 일부인 "The war situation has developed not necessarily to Japan's advantage(전국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다)"도 포함되어 있다. 영어권 인터넷에서는 '패전했다'를 이보다 더 완곡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거라며 역사 밈으로 쓰이고는 한다.


[1] 예를 들어 2016년 8월 8일 아키히토 당시 덴노가 생전 퇴위를 목적으로 발표한 담화문도 '옥음방송'이라고 볼 수 있다.[2] 어느 정도냐면 당시 일본의 공무원 계급의 구분 기준 자체도 이 천황의 알현 가능 여부, 공무원직의 직접 임명 여부로 나뉘었을 정도다. 이는 지금도 일부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일본 경찰의 경부 임용자들은 연수 중 천황을 단체로 알현할 기회를 가진다. 특히 천황이 아끼는 신하의 경우 직접 개인적으로 식사 자리를 함께하거나 하기도 했는데 이는 해당 당사자에게 있어 크나큰 영광으로 여겨졌다.[3] 보통 궁내청을 통한다.[4] 한국에서는 왕실어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류다. 문어체는 당시 공문서에서 매우 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다만 내지에서나 그랬고 조선과 대만을 포함한 식민지에서는 입말을 반영한 일본어 표기가 널리 교육되어 왔으므로 중등 교육 이상을 받은 식자층이 아니라면 일본어 문어체의 존재조차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음은 감안해야 한다.[5] 이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그 어떤 나라도 자국민들 앞에서 "우리는 전쟁에서 졌다. 그들에게 항복하겠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6] 이전 버전은 추밀원 의장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당시 추밀원 의장은 히라누마 기이치로였다.[7] 이 시점에서 비황족 출신 원수는 총 4인이었으나 나머지 1명인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남방군 총사령관으로 인도차이나 지역에 있었다.[8] 하타 슌로쿠는 제2총군의 사령관으로서 히로시마에 있었고 히로시마 원폭을 직접 겪었다.[9] 조서의 마지막 장은 3행 이내로 종결하고 7행 이상을 비운다.[10] 한 변이 3촌(= 9.09cm)이다. 참고로 재질도 통짜 순금인 고로 무게도 3.55kg씩이나 나간다.[11] 일본 역사상 조서의 본문이 어새 인영에 겹치는 사례는 이게 유일하다고 한다.[12] 이 시점에서 이미 육군의 소장파 청년 장교단이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고 종전을 주장하는 자신과 스즈키 간타로 총리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실행 직전에 들어갔단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표현 하나로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어 빨리 조서를 마무리 짓고 녹음까지 마치게 하기 위해 양보한 것.[13] 이는 영화 일본 패망 하루 전에서도 재연되어 나온다.[14] 1912년 도쿄 출생. 와세다대학 중퇴 후 22세의 나이로 NHK 아나운서 입사. 1952 헬싱키 올림픽 중계 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평소 폭음으로 인한 건강 악화가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A] 이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연다'는 구절은 주자학의 근간이 된 '북송 오자'중 한 사람인 장재의 저서에 쓰인 표현을 인용하였다. 원문은 '[ruby(爲天地立心, ruby=위천지립심)] [ruby(爲生民立命, ruby=위생민립명)] [ruby(爲王聖繼絶學, ruby=위왕성계절학)] [ruby(爲萬世開太平, ruby=위만세개태평)](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명(命)을 세우고 성인을 위해 끊긴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로, 근사록(近思錄)에 적혀 있다.[16] 어명어새. 조서에 찍는 덴노의 도장과 서명을 의미한다. 일본은 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에 조서 원문에는 본문이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 천황어새를 찍는데 이를 통해 그 효력이 발효된다. 따라서 이 어명어새가 찍힌 문서를 활자화하여 관보나 회의록 등에 게재, 인용할 때도 인용문에는 실제로 도장이 찍혀 있지는 않지만 천황의 결재를 거쳐 발효되었다는 의미로 "어명어새"를 명기, 언급한다. 종전조서의 관보. 활자화하여 게재되어 있지만 어명어새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7] 정서법은 'ごだい'(고다이)인 듯하지만 쇼와 덴노와 와다 아나운서 두 사람 모두 이것을 'ごない'(고나이)라고 읽었다.[A] [19] うしなう가 연용형이 되면서 'ウ음편' 현상이 일어나 うしのう가 된 것이다. 음편 문서 참고.[20] 여기서 중국을 支(지)라고 발음한다. 중국을 '支那'(한자로는 지나, 일본식으로는 시나라고 발음되며 차이나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중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현재는 멸칭으로 사용)로 썼음. 이래놓고서 8월 10일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통보하는 전문 원문에는 미·영·화(華)·소라고 표기하는 비굴함을 보였다. 화(華)는 당연히 중화민국의 약칭.[21] 대체로 보아서[22] 이 단락은 많은 일본 제국주의 추종자들과 일본 넷 우익들이 '우리의 전쟁은 대동아를 위한 결단이었다.'고 착각하며 과거의 일본을 일방적 피해자로 생각하게 하는 치명적인 논리를 제공했다. 여러모로 동아시아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원흉적인 말이라고 하겠다. 거기다 중공의 국공내전 승리와 6.25 전쟁의 위기로 인한 동아시아 반공 블록의 재편까지 겹치면서 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옥음방송의 이 문구가 이론적인 첫 단추라면 트루먼 독트린으로 인한 일본 우익(+ 구 일본 제국 외지의 친일파들)의 부분적 복권이라는 부작용적 배경까지 더해진 것.[23] 용감히 싸움[24] 조정의 많은 벼슬아치[25] 성의껏 노력함[26] 국민[27] 나라를 받듦[28] 전쟁의 판국, 국면[29] 참혹히 해침[30] 깨뜨림. 여기선 멸망과 동의어로 쓰임.[31] 억과 조, 아주 많음[32] 원문에 나온 赤子는 핏덩어리, 즉 갓난아기란 뜻으로 군주가 자기 백성을 어린 아기에 비유한 단어이다. 국어사전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국어에서 적자라는 음은 대개 嫡子(정실에게서 태어난 아들)를 말하기 때문에 어린 백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 의미에 더 가깝다.[33] 열성조, 즉 역대 천황[34] 여러 동맹국[35] 전쟁터[36] 직무[37] 생계[38] 물론[39] 이 구절이 꽤 유명하여 자주 인용되곤 한다.[A] [41] 수호[42] 짐작건대 당시 일본 정부가 가장 원하는 것이자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터이다. 본 문서 서두에서도 언급되었듯 핵심은 천황제의 유지였다.[43] 참된 정성[44] 일본[45] 물건의 깨끗하고 아주 순수한 부분.[46] 진보의 기운.[47]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존속했던 DBS 동아방송(채널A의 전신)과는 관계없다.[48] 앤드루 고든, 『현대일본의 역사 : 도쿠가와 시대에서 현대까지. 2』, 문현숙, 김우영 옮김 (서울 : 이산, 2015), p.499[49] 현재의 데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