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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모전(消耗戰)은 전쟁에서 적측의 인원, 무기, 물자 등의 소모를 강요해서 고갈시킴으로써 승리하는 전략을 말한다. 장기간에 걸쳐 국력을 소모시키는 과정에서 국력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그리고 전략으로 의도된 건 아니나 일방이나 쌍방의 소모가 극심한 상태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1]
2. 명칭
| 영어 | Attrition warfare |
| 아랍어 | حرب استنزاف |
| 베트남어 | Chiến tranh tiêu hao |
| 독일어 | Stellungskrieg |
| 스페인어 | Guerra de desgaste |
| 루마니아어 | Război de uzură |
| 포르투갈어 | Guerra de exaustão |
| 핀란드어 | Kulutussota |
| 페르시아어 | جنگ فرسایشی |
| 네덜란드어 | Uitputtingsoorlogsvoering |
| 우크라이나어 | Війна на виснаження |
3. 개념
어떤 형태로 전쟁을 하건 전쟁에서는 반드시 소모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고대에는 약탈로 경제를 꾸릴 정도로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게 가능했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소모전은 현대 전쟁이 가지게될 필수적인 속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전략상으로 소모전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 소모를 아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기 위한 군사전략을 의미한다.기본적으로는 단기간의 모험적 운용보다는 반드시 이기는 상황을 만든다라는 것에 모든 전술과 교리에 핵심을 두는 전략이다. 반대되는 개념의 기동전은 강한 공세전력을 만들 수 있지만 반대급부로 헛점을 만들기도 쉽다. 병력을 불균형하게 배치했다가 의표를 찔리면 100% 이길 수 있는 전투를 질 수도 있는 변수를 만들 수도 있다.
특정한 지역의 획득이나 거점의 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전력의 보존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해군의 현존함대나 공군의 제공권 개념과 비슷한 면이 있다.
소모전은 강대국과 약소국에게 서로 다른 이점이 있다. 강대국일 경우 적대국보다 동원력이 우세하기 때문에 단기간의 결전에서 지지만 않으면 전쟁은 승리할 수밖에 없으며 결전을 회피한다. 반면 상대방은 시간이 지나면 지기 때문에 어떻게든 공세를 통해 변수를 창출하려 할 텐데, 소모전에서 유리한 측은 이 시도를 막기만 하면 된다. 약소국의 경우 효과적인 교환비 이득을 통한 고슴도치전략으로 강대국의 소모를 노려서 침공을 방지하는 형태가 된다.
고전적으로는 한니발 바르카에 대응하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파비우스 전략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1. 스베친의 소모전략
소련군의 작전술 개념을 만들어낸 알렉산더 스베친, 혹은 알렉산드르 스베친은 투하쳅스키의 기동전과 대비되는 소모전략을 주장했다. 그는 전략론에서 기동 섬멸을 통한 파괴전략과, 방어적인 소모전략으로 구분했다.러시아 혁명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적군을 창설하면서 겪게 된 군사분야의 발전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채택된 공세적 군사교리와 전략에 관한 연구는 상당수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 입장에 있던 인물이나 이러한 인물들이 주장했던 군사교리와 전략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Свечин)에 관한 연구도 당시 그의 위상에 비해 상당히 부족하다. 스베친이 소비에트 연방 군사사에서 군사사상, 이론과 전략의 분야에 기여한 점은 군사전략을 소모전략과 파괴전략의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이중 소모전략을 더 큰 개념으로 정의한 후 당시 소비에트 연방이 취해야 할 전략으로 소모전략을 제시한 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주장했던 소모전략은 반대파에 의해서 무시되었고 그의 사후에는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스베친의 예상이 그대로 현실화된 전쟁이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전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서로간의 지루한 전투와 작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전쟁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해 장기소모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소비에트 연방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Свечин)의 소모전략 연구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Свечин)의 소모전략 연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4개월이 지났다. 여론을 이용한 선전전으로 인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상황 파악이 제한되고 있다.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누가 이기고 있는지, 정확한 정세는 무엇인지 알기 위해 러시아의 작전개념과 작전 경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전쟁은 2단계로 구분되어 실시하고 있다. 1단계 작전에서 러시아는 전 세계 전문가의 예상과 달리 조직적이지 못한 전투 행동을 보이면서 대량 피해를 입었다. 그 원인은 러시아는 정규전이 아닌 제한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특수작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단계에서 러시아군은 1단계의 단점을 교훈으로 삼아 전술을 소모전 전술로 바꾸었다. 화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우크라이나군의 유생역량을 말살하고 나서 지역을 점진적으로 점령하고 있다. 양국의 작전지속능력의 요소인 병력 운용, 무기 및 물자 보급, 방위산업 능력 등을 고려했을 때 러시아가 우세하며,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군에 유리하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
전쟁은 매우 특이한 모습과 성격을 띠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여론을 이용한 선전전이다. 전쟁 당사국들과 서방 국가들은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피해 불리기로 사기를 저해시키고, 자체 단합을 강화하기 위해 언론, 외교, 일일 방송 등을 총동원하고 있다.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합병할 때 서방 진영의 의표를 찌르며 기습적으로 특수작전에 성공했다. 이를 목격한 서방은 소위 ‘하이브리드전’에 대한 대응책과 함께 도리어 이를 압도할 수 있도록 대비해왔던 것 같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서방의 선전전과 여론전이 우세해 보인다. 일반 대중매체는 물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도 러시아의 언로는 거의 막혀있지만 서방과 우크라이나의 그것은 압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미국이나 우크라이나의 국방부 홈페이지 접속은 가능하지만, 러시아 국방부는 접속이 불가하며, 일반 신문방송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매체의 논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등 매체에서도 러시아군 관련 기관의 발표는 폐쇄되어 있거나 시간이 지난 내용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전쟁 상황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파악이 많이 제한되고 있다.
최근 들어 주류 언론 보도가 오류였다는 증거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군의 공세 종말점을 3월 말로 예상했으나, 러시아는 6월 현재 더욱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3월에 우크라이나군이 사살했다고 발표한 러시아 제8군 사령관 모르드비체프(Андрей Мордвичев) 중장은 아직도 건재하다. 각종 매체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선전을 연일 강조했으나 러시아의 점령지역은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장환경과 국제질서도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 전격전이 소모전으로 변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선전전보다 전장에서의 승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작전 분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전략연구, 2022, vol.29, no.2, 통권 87호, 김규철#
러시아의 전쟁은 2단계로 구분되어 실시하고 있다. 1단계 작전에서 러시아는 전 세계 전문가의 예상과 달리 조직적이지 못한 전투 행동을 보이면서 대량 피해를 입었다. 그 원인은 러시아는 정규전이 아닌 제한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특수작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단계에서 러시아군은 1단계의 단점을 교훈으로 삼아 전술을 소모전 전술로 바꾸었다. 화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우크라이나군의 유생역량을 말살하고 나서 지역을 점진적으로 점령하고 있다. 양국의 작전지속능력의 요소인 병력 운용, 무기 및 물자 보급, 방위산업 능력 등을 고려했을 때 러시아가 우세하며,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군에 유리하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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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매우 특이한 모습과 성격을 띠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여론을 이용한 선전전이다. 전쟁 당사국들과 서방 국가들은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피해 불리기로 사기를 저해시키고, 자체 단합을 강화하기 위해 언론, 외교, 일일 방송 등을 총동원하고 있다.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합병할 때 서방 진영의 의표를 찌르며 기습적으로 특수작전에 성공했다. 이를 목격한 서방은 소위 ‘하이브리드전’에 대한 대응책과 함께 도리어 이를 압도할 수 있도록 대비해왔던 것 같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서방의 선전전과 여론전이 우세해 보인다. 일반 대중매체는 물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도 러시아의 언로는 거의 막혀있지만 서방과 우크라이나의 그것은 압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미국이나 우크라이나의 국방부 홈페이지 접속은 가능하지만, 러시아 국방부는 접속이 불가하며, 일반 신문방송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매체의 논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등 매체에서도 러시아군 관련 기관의 발표는 폐쇄되어 있거나 시간이 지난 내용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전쟁 상황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파악이 많이 제한되고 있다.
최근 들어 주류 언론 보도가 오류였다는 증거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군의 공세 종말점을 3월 말로 예상했으나, 러시아는 6월 현재 더욱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3월에 우크라이나군이 사살했다고 발표한 러시아 제8군 사령관 모르드비체프(Андрей Мордвичев) 중장은 아직도 건재하다. 각종 매체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선전을 연일 강조했으나 러시아의 점령지역은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장환경과 국제질서도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 전격전이 소모전으로 변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선전전보다 전장에서의 승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작전 분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전략연구, 2022, vol.29, no.2, 통권 87호, 김규철#
스베친의 전략론 그리고 작전술
전략문서로 분석한 현대 러시아 군사전략
러시아 전략사상가 스베친의 ‘전략론’과 푸틴의 군사전략
러시아는 전쟁에 실패하였는가? :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알렉산더 스베친의 전략론
3.2. 전략과 교리로서의 소모전과 전쟁의 결과로서의 소모전
넓게 정의하자면 양자가 끊임없이 자원을 소모하여 사생결단을 내는 것을 모두 소모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평시에 인접한 PC방이나 슈퍼마켓들이 출혈경쟁을 하는 것도 소모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전쟁에서 일정 부분의 소모는 숙명적이다.그러나 전쟁의 결과로서의 소모전이라고 불릴 정도면 정상적인 교전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병력손실을 포함하여 다양하고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경우를 나타낸다. 한마디로 말해서 병력을 믹서기에 갈아넣는 전투를 실행한 후 결과가 나쁘거나 승리를 하더라도 피로스의 승리 수준으로만 한 경우에 소모전이라는 말을 붙인다. 일반적인 소모전의 의미는 여기서 나왔으며 그래서 매우 부정적인 단어가 된다.
한편 군사적으로 쓰이는 좁은 의미의 소모전 교리는 소모를 군사전략상으로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아이디어들을 가리킨다. 군사교리 차원에서의 소모전은 순수한 교환비 이득을 목적으로 하거나(아군 1명이 죽을때 적을 2명이상 죽인다.) 평소 상비군을 많이 두지 않아서 징집군으로 적의 정예군을 상대해야할 때나 장비가 후진적이라는 이유로 군전투력이 낮다면 1:1 교환만이라도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총합 국력이 우수한 국가가 보다 약한 국가에 진 사례가 절대 적지 않으므로 막대한 피해를 내더라도 전쟁에서 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전략적으로 불리한 국가의 군대, 예를 들어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기동전의 사도와 같은 군대로, 러시아/프랑스/영국, 그리고 잠재적으로 미국마저 적으로 돌려놓고 양면전쟁을 시작했으므로 정직하게 소모전으로 말려들어가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교리 장비 전술 작전까지 모두 기동전을 목표로 했지만 상대방이 순순히 당하지 않아 막대한 희생을 내고 패전했다.
그래서 소모전 교리는 다른 교리처럼 탐색과 연구의 대상이며 구체적인 소모전 전술과 전략도 나온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소모전을 연구하겠다는 소리가 병력을 믹서기에 갈아버리는 방법을 연구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로 들리는 현실 때문에 전쟁역사적인 조사를 제외하면 중대전술기지같은 방어전 교리나 제파 전술같은 공세 교리 및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같은 기동전 교리에 부속되는 교리처럼 명칭을 바꾸거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쓴다.
고급 군인이나 국가 지도자, 병참의 입장에서도 총력전을 연구하는 경우는 많으나 소모전은 예비로만 연구하며, 소모전을 본격적으로 첫번째 전략으로 연구하거나 전선에 선제적으로 적용하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 2차대전 당시 추축국의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국력을 증진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며 희생을 감수하긴 하지만 본격적인 소모를 생각하고 전략을 짜지는 않는다. 애초에 1차대전의 참호전을 경험해본 사람들인지라 절대로 소모전 따위를 염두에 둘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독소전쟁이 수많은 기동전을 내포하며, 위에 언급한 스베친의 소모전략이 소련의 수뇌부와 군인들에 의해서 조용하게 뭍혔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시행후의 1달간 서방연합군 희생자가 10만명 수준으로 발생하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나치 독일군을 비슷한 수준인 9만명을 갈아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수뇌부에게 막대한 손실에 대해 추궁당했으며, 3개국의 지도자 모두 병력을 갈아넣은 군대 지휘관을 해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탈린의 경우에는 총살하거나 굴라그에 보내버렸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소모전은 총력전과 동의어가 아니며 애초에 소모전이 예상되면 전쟁을 안하는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독소전쟁 직전에 게오르기 주코프가 집결하는 나치 독일군에게 대응하기 위해서 소모전에 입각한 종심방어 대신 선제공격을 통한 전략적인 기동전 방식의 공세를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나 윈스턴 처칠도 최대한 자국 국민들을 살리고 군인들의 희생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막나가는 것으로 유명한 아돌프 히틀러조차 분석결과 기동전이 불가능하고 소모전이 예상되는 국가인 스위스나 스페인은 직접 침공은 포기하고 친추축국 성향의 중립국으로 남겨두었다.
그래서 소모전에 대한 것은 연구를 하고 전략전술을 마련해놓지만 예비계획으로 잡아놓으며 기동전이 막혔을 경우에 시행한다. 현대전에서 성공적인 소모전으로 취급받는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도 아제르바이잔군의 기동전이 막힌 후에 차선책으로 소모전이 채택되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경우에도 초반의 러시아군 기습이 막혀버리자 소모전으로 이행했으며 3년이 넘도록 교전이 발생하면서 소모전 수행은 제대로 하고 있으나 체급이 엄청나게 작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항상 나오는 오해가 현대전은 물량전이라던지 국력을 소모하는 싸움이라는 것인데 이게 소모전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하기에 적국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도록 국제법을 무시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강조하거나, 빠른 승리를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모전 방식도 연구하고 채택하는 것이다. 아아전쟁의 아제르바이잔군도 초기 기동전이 실패하자 빠른 승리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고 병력을 집중투입해서 상대방인 아르메니아군이 국지적으로 중과부적에 빠지게 함으로서 소모전을 단시간내에 성공적으로 이끈 사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급 군인과 정치 지도자는 총력전은 항상 염두에 두지만 소모전은 연구를 하지만 예비전략이나 예비전술로 놓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적용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으며, 성공적인 소모전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초반의 기동전이 실패하자 빠르게 소모전으로 전환한 것과 함께 보통 전력을 집중해서 희생을 감수하고 단기전으로 전쟁을 마무리한 것이 대부분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3.3. 소모전 교리와 전선 배치
기동전을 목표로하는 군대와 소모전을 목표로하는 군대는 애초에 전쟁의 목적이 다르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을 해서라도 이기려는 것과 지지만 않고 서로 정직하게 병력 갈아넣기를 목표로 하는 군대는 일단 전선 배치부터가 다르다.기동전을 목표로 하는 군대는 공세전선에 불균형하게 막대한 병력을 집중시키고 2선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병력을 배치한다. 또한 전선 정면의 압박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계화된 병력의 기동력을 중요시하며 CAS를 통해 전선돌파를 중점에 두어 대병력을 전선 일점에 밀집시킨다.
한편 소모전을 목표로하는 군대는 지지 않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약점을 만들지 않으며 대개 국력이 더 강한 국가가 수행하기 때문에 무리한 공세를 할 이유가 없다. 전선의 병력은 극소화하고 종심방어를 목표로 방어병력을 산개하며 주력병력을 2선 이하에 두며[2] 적의 공세에 대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적의 밀집된 공세를 수적열세로 막아야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화력적 우세가 필수 불가결하게 되며 효과적으로 밀집된 적의 병력을 갉아먹으며 교환비 이득을 보게 된다. [3] 방어를 굳힌 상태에서 승리를 위해 적의 후방을 타격하는 전략폭격 능력이 있어야한다. 전차와 적포병을 제거함으로서 공세를 돈좌시키는 대화력전을 수행할 부대로서는 1차대전 전훈으로는 포병이 유일했지만 2차대전 이후에는 공군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 공지전이 대두되는등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소모전을 공세적으로 시도할 경우 이를 침투 전술이라고 부른다. 수백만명을 갈면서 검증된 덕분에 1차대전 당시에 이미 거의 완성된 교리로[4] 현재도 드론이 추가된 것 이외에는 크게 달라진게 없다. 사실 기갑으로 인한 돌파가 아닌 보병으로 하는 침투전술은 전선을 깨부술만한 파괴적인 위력은 없고, 아군의 피로 전선을 미는 형태를 할 수 밖에 없다. 현재도 보병대로 전투를 하려면 이러한 침투전술을 쓸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전차보유고와 막강한 공군을 가진 러시아군도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이러한 보병침투전을 펼치고 있는데 개전이래 내내 제공권을 쥐고 있고 막대한 전차보유고를 가졌음에도 우크라이나의 참호선을 기갑으로 돌파하지 못하고 재블린에 전차들이 소모되자 어쩔 수 없이 드론을 활용한 정찰 - 포격 - 소분대 참투 전술로 전환하여 러시아인의 피를 갈아넣고 있는데, 러시아인 사상자도 매우 많고 장비도 많이 상실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동원여력이 더 낮으므로 전황이 악화하고 있다.
소모전은 막대한 아군의 피해를 낳는걸 전제하기 때문에 예비전략이나 대응책으로 생각하고 구상하며 연구하고 계획까지 마련해놓는 경우는 많지만 소모전 자체만 있는 군대는 거의 없다. 어느나라건 가능한 아군을 죽이지 않고 전쟁을 이기고 싶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소모전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다. 위에 언급한 스베친의 소모전략이 반대파에게 무시당했고 스베친의 사후에 논의도차 안되는 이유가 다 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도 머리가 있다보니 전장의 안개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야심차게 세워놓은 작전계획대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예비전략 발동이 필수 불가결하니 소모전 교리연구 및 장비, 작전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게 안되어있으면 소모전이 벌어졌을 시 훨씬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5]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러시아군이 담대한 기동전 구상으로 밀어붙히다가 실패한 이후 발동된 소모전 교리는 참고할 만하다. 러시아군은 호스토멜 공항 함락이 실패한 후 소모전이 확정되자 바그너 그룹같은 PMC, 교도소 범죄자를 동원하여 2선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털어내었고, 이후 북한군을 동원하는등 인력소모를 최소화하기위한 노력을 일찌감치 하고 있었다, [6] 소모전을 실시하는 군대도 작전계획 5027처럼 방어 후 역습으로 기동전이나 포위전을 하는 식으로 전쟁의 종결에 대한 추가계획은 늘 있지만 이런 작전을 발동하려면 소모전으로 적 전력과 예비대를 한계까지 소모시킨 후에야 발동가능하다. 그렇지않으면 적의 예비대에 가로 막혀 돈좌당하면서 비효율적인 소모를 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소모전 수행시 강력한 화력의 우위로 아군의 병력소모를 극소화시킬 수 있지만 이걸 위해서는 막대한 국력이 소모된다. 6.25 전쟁 중반부터 벌어진 고지전에서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사용했고 여기에 대응하여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탄약 보급률을 5배로 늘려서 대규모 포격전과 폭격을 수행하는 화해(火海)전술을 사용하여 중공군의 피해를 극대화시켰으나 전쟁비용 문제가 미국 의회에서 나올 정도로 비용이 급상승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3.3.1. 독소전쟁
독소전쟁은 결과적으로는 독일군이나 소련군이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양군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므로 소모전이라 칭할 수는 있으나 전쟁의 양상이나 양군의 교리상은 그렇지 않았다.초반의 소련군은 소모전을 위해 대부분의 병력을 독일군과의 전선에 산개해 두고 있다가 기습적인 공격으로 수백만의 포로를 내고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다. 전선을 좁혀 예비대를 확보하자는 일선 장군들의 상신에도 스탈린은 그저 후퇴금지 명령을 내려서 독일군의 포위기동을 도와주기만 했었다.
하지만 중기 이후에는 소련군도 독일군처럼 전략적 예비의 중요성과 유동적인 전선운용이 필요함을 깨달았으며, 양자 모두 참호를 파고 밀고 당기기보다는 대단위 기동부대를 통한 전략적 포위를 노렸고 성공하면 수십만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 기동전의 형태를 띄었다. 1차대전 역시 서부전선이나 동부전선이나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건 똑같으나 서부전선에는 참호를 둘러쌓고 전형적인 참호전이 벌어져 소모전의 양상을 띄었으나 동부전선에서는 거대한 평야를 둘러싸고 여러차례 회전을 반복하는 기동전의 양상을 띄었다. 러시아 대평원 전체를 전장으로 삼으면 아무래도 그 넓은 전투 정면에 병력을 다 배치하는건 힘들고, 그랬다가는 2차대전 초반 소련군처럼 병력밀도가 지나치게 떨어져 짤려먹기 딱 좋기 때문이다.
교리상으로 기동전이라도 전쟁의 장기목표를 소모전이라 칭할 수 있다면, 그 경우에도 독소전쟁을 소모전으로 몰고가고자한 것은 소련군이었고, 독일군은 기동전으로 끝내는데 실패하여 소련군의 의도대로 병력이 소모되어 패전했다. 라고 서술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쟁은 실패한 기동전이지 소모전이라고 할 순 없다. 애초에 러시아 대평원은 너무 넓어 소모전을 목표로 병력 산개했다간 큰일나는 지역이다. 단지 너무 넓어 기동전 양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데 단기간에 전쟁이 끝나기 어려운 것일 뿐이다. 독일은 마지막까지 기동전의 사도로 행동했다.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서부에 밀집시켜서 벌지 전투를 시도했다가 돈좌하면서 전투역량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3.3.2. 프랑스 침공
반대로 2차대전 초반 프랑스 침공으로 대표되는 프랑스군의 전쟁은 실패한 소모전일 뿐 기동전이 아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로 진공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독일군이 헛점을 노출해도 가짜전쟁으로 무력시위만 하면서 마지노선으로 들이받아주기를 원했고 전략적 상황 자체가 시간만 끌면 프랑스가 언젠가는 이기므로 철저한 소모전 전략으로 대응했다.그래서 전쟁 빨리 끝났다고 프랑스군이 기동전을 수행했다는 말이 아니라 소모전을 수행하는데 실패한 것이고, 독일군의 주공을 오인하여 예비대를 지나치게 빨리 벨기에로 투입했고 스당 방면의 적 주공에 대응하는데 실패, 병력이 포위되어 예비대가 고갈되어버렸고 모든 전선이 돌파당하게 된다.
3.3.3. 노르망디 상륙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부터 시작되는 서방 연합군의 진격 작전도 실패한 기동전이지 소모전이 아니다.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 및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실전경험으로 인해 영국군은 물론이거니와 미국 육군도 소모전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신속한 기동전을 통해서 제2전선을 형성할 예정이었다. 이미 참호전으로 인해 소모전이라는 소리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으며 미군의 경우에는 레슬리 맥네어라는 후방의 조직 전문가가 정보를 취합하고 기갑사단에 3개 전투단을 편성해놓는 등 기동전에 걸맞는 조직으로 미국 육군을 조직화해놓았다.
실제로 미국 육군은 주력전차라고 볼 수 있는 M4 셔먼이 기동성을 상당히 중시했으며 M7 프리스트같은 다수의 자주포를 편성하여 기동하는 부대를 뒤따르게 만들었다. 미국 육군은 가장 많은 트럭과 전차를 가지고 있어서 병력의 구성만 보면 독일보다 기동전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예를 들어 보병사단마다 전차대대가 깔려있었으며 독일은 차량화사단이라는 별도 편제를 만들고서도 그 차량화사단에도 트럭을 다 보급해줄 수 없었는데 미군은 그냥 보병사단이 모두 차량화가 완편되어 있어서 별도의 차량화소총병 사단이라는 편제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전차의 숫자가 충분했으므로 독일처럼 구축전차나 대전차전용 돌격포같은 임시변통적인 무기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전간기때 대공황등의 영향으로 인해 10만명 수준이 될 정도로 급격한 군축을 하며 장비도 없다시피 해서 포르투갈군보다도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미국 육군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급격하게 800만명으로 급격하게 증강을 하면서 병사들의 훈련도가 매우 낮고 부사관과 장교가 매우 모자라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답없는 전통인 급하면 민병대를 소집하면 된다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도 막대한 사상자를 불러오는 이론을 신봉하는 국민들과 정부의 분위기도 큰 문제였다. 미국은 건국시기부터 설계된 반연방주의덕에 미국 본토에선 연방군이 주정부를 압박할까봐 지정된 병영 외의 주둔도 아예 금지되는 등 군사전통과는 거리가 먼 국가였다. 오랜 고립주의 덕에 제국주의 유럽국가들에 비하면 분쟁에 참여한 적도 없고 1차 세계대전 참전 기간도 짧아서 군 운용과 교리 측면에선 영국의 교리를 답습하는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간기 때 사실상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에 따라 숙련도 부족과 실전 경험 부족으로 인해 기동전에 실패하고 소모전으로 억지로 돌입하면서 엄청난 희생이 발생하게 된다.
일례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일에 전사, 부상, 포로를 포함해서 9천여명의 손실만 본 서방연합군은 생울타리(hedgerow)라고 불리는 1~4미터 정도의, 노르망디 농민들이 소유한 밭 사이의 경계로 삼기 위해 심어둔 키 작은 과일나무가 빽빽히 밀집한 벽들과, 밭, 좁은 이동통로 구성된 노르망디의 보카쥬(bocage) 지형에 매복한 독일군과 소모전에 돌입한 결과 1달 후인 7월 24일 기준으로 전체 사상자가 113,059명이 발생해버린다. 해당 손실 중에서 대다수가 미군이었다.
이렇게 고생을 하다가 코브라 작전에서 융단폭격까지 동원한 끝에 간신히 노르망디에서 탈출한 미군은 용기병 작전의 성공으로 팔레즈 포위전에서 독일군을 포위해서 대타격을 줌으로서 간신히 기동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서방연합군의 진격이 거센 것보다는 독일군의 선제적인 후퇴가 더 많이 작용했고 독일군이 지크프리트 선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자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미군에게 사상자가 5만 5천명이 발생하는 등 소모전이 걸릴 때마다 심각한 손실이 발생했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켓 가든 작전에서 기습적인 기동전이 실시되었으나 실패해서 정예 병력인 공수부대를 주축으로 한 사상자 및 포로가 17,200명이나 발생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독일군 방식의 결정적 전투를 노리는 기동전이 아닌 영미방식의 전략적 마비를 노린 기동전 준비였기 때문이다. 물론 편제는 독일군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기동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걸 모두 집중시키지 않았다. 만일 독일군 방식의 기동전을 채택했다면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형성했던 것처럼 보병사단마다 배치된 셔먼 전차대대를 모두 빼고 그걸 모두 패튼에게 몰아주어 패튼이 이끄는 군은 사단 서너개가 모인 제3군이 아닌 군 여러개가 모인 기갑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독일은 돌파강화를 위해 이런식으로 편성을 했다. 하지만 패튼에게는 1개군만 주어졌고 패튼은 그것만 가지고 제한적인 돌파전을 감행해야 했다.
그래서 기갑사단에 전투단 3개를 편성하고 자주포를 대량으로 배치해서 진격하는 전차를 뒤따르며 근접사격지원이 가능하도록 하고 M10 GMC처럼 대전차포도 대전차 자주포로 만들어서 전차부대를 뒤따를 수준으로 기동성을 확실하게 주면서 전차 전력을 보조하게 하는 등 화력도 충실하게 갖춘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서 P-47 썬더볼트처럼 근접항공지원을 하는 다수의 전투기와 B-26같은 전술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즉시 동원 가능한 항공전력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공세 작전에 체계적으로 써먹지 못한 채 전선의 불을 끄는 대응에 급급했다.[7]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최후의 정예 기동 전력을 말아먹고 봄의 새싹 작전에서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 공세가 실패하면서 병력이 부족해진 독일군의 서부 전선이 붕괴되고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으로 다시 한번 기동전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나 미군은 유럽전선에서 총계 28만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타격을 입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사망자가 20만여명이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16만여명이 전사했고 개전 초반에 필리핀 침공전등에서 잡힌 포로들이 일본군의 학대와 말라리아 등으로 4만여명이 죽은 것이 합쳐진 것을 감안하면 차이점을 바로 알 수 있다.
종합하자면 서방연합군도 기동전을 수행하고자 했으나 미군은 급속도로 병력을 증강한 후유증으로 인해 병력의 훈련도가 모자라고 실전경험이 있는 유능한 부사관과 장교가 크게 모자라서 숫자만 채워놓았는지라 한계점이 높았고 영국군은 상대적으로 증상이 덜했으나 두 국가 모두 전선에 돌파구를 열어줄 열쇠인 중전차를 전선에 제대로 투입하지 못해서 중형전차만으로만 기동전을 수행하려고 한 덕분에 소수의 독일군 중전차나 소량의 8,8cm FlaK 에게 쉽게 가로막히는 등의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서 3인치 M5 대전차포에서 보이는 미군의 한심한 대전차전 인식도 큰 문제라서 90mm 대공포라는 훌륭한 대전차포로도 사용가능한 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76mm M1 전차포같은 성능이 낮은 화포를 비실전적인 실험에서 합격했다고 실전에 투입했다가 전차전에서 독일군에게 밀리는 큰 문제점까지 만들었다.
따라서 서방연합군의 서유럽 전선은 독일군이 선제적으로 물러나거나 전력을 다른 작전에서 까먹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에 가까운 실패한 기동전이었으며 실제 전황도 조지 S. 패튼의 고속전진을 제외하면 굼뜨고 느리며 종종 독일군의 후퇴를 위한 임시적인 반격을 맞고 타격을 입는 등 매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독일군을 만나면 포병대를 대규모로 전개한 후 포탄만 독일군에 날려 스스로 물러날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러나면 점령을 하는 등의 소모전에 가까운 모습까지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동부전선에 비해서 서부전선이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보이며 서방연합군이 수세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실력이 안되서 그것밖에 못한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형편없는 서방연합군의 진격속도에 항의하는 것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독일군이 방어선을 제대로 형성할 때마다 진격이 막히는 것이 서방연합군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이 포위당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투만 수행하는 것을 보고는 근거 없는 자신감 및 이제 전쟁은 끝나간다는 방심까지 있어서 벌지 전투에서 헛점을 찔리면서 위기에 빠지기까지 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소모전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해보고 준비도 더 안된 관계로 일단 교착전이 벌어지면 노르망디에서 1달 만에 10만명이 죽거나 하는 식으로 대규모 피해만 발생하고 전황이 해결이 안되며 대규모의 포격과 공습등의 막대한 화력을 동원하더라도 독일군보다 손해가 오히려 더 심해지는 현상을 보여주게 된다. 미군은 보병사단에도 105mm 견인곡사포를 36문씩 편제하고 서부전선에서만 238개의 포병대대를 배치했으며 M8 스콧이나 M4 (105)같은 보병지원용 돌격포까지 동원했지만 소모전에서의 타격을 제대로 막지 못했으며 결국 노르망디에서 독일군에게 타격을 준 것은 기동전으로 전선을 돌파 후 포위한 팔레즈 포위전에서의 일이었으며 그 후에도 아헨 전투에서 대규모 화력을 동원하고도 국민돌격대가 병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빈약한 독일군과 피해가 동등하거나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5만 5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소모전이 걸릴 때마다 심각한 피해를 입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쯤 가면 어느 정도는 실전 경험을 쌓은 서방연합군의 고위급 지휘관들이 기존에 생각해왔던 아이디어가 현실에 맞는지 어느 정도까지는 검증에 성공했으며 중전차도 M26 퍼싱을 동원할 수 있게 되는 등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병력들도 어느 정도 숙련도가 올라가서 간신히 기동전이라는 것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해당 시기쯤 되면 이미 전쟁의 결말이 정해진 상태에서 더 이상은 미국 국민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가 높았고 영국과는 달리 나치 독일에 대한 복수심도 거의 없는 미군은 딱 필요한 만큼만 기동전을 펼치면서 굳이 막판에 큰 피해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8]
하지만 전쟁이 시작된 시기보다 나아졌다는 것이지 서방연합군의 기동전 능력은 독소전쟁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독일군이나 소련군의 상대가 되기에는 아직 모자랐다. 독소전쟁에서 서로 수백만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주력부대가 전투를 하는 동안 서부전선에는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떨어지거나 대타격을 입고 회복중인 부대들이 주력이 되어 서방연합군을 상대했으며 나중에는 국민돌격대같은 늙어서 현역복무가 부적합하거나 복무 부적격자들을 모은 답없는 수준의 병력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전쟁 말기에 독일군의 주력이 서부전선에 제대로 투입되었다면 서방연합군의 막강한 공군력과 포병 화력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에는 성공하겠지만 서방연합군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9]
3.3.4. 태평양 전쟁
2차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점감요격작전을 통해 적을 소모시킨 후 함대결전을 한다는 혼합전략을 채택했는데 미국은 산업력에서 앞서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전을 집요하게 피하며 절대로 이길 수 있는 전투만을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본의 이러한 전략은 러일전쟁에서의 전훈 덕분인데 쓰시마 해전에서처럼 상대의 본거지로부터 일본까지 방대한 거리를 만들고 상대가 이를 파고들어오면 구축함 전단을 통한 수뢰전으로 피해를 강요하고 구축함 전단을 해치우기 위해 적이 대규모 병력을 밀어넣으면 함대결전을 하는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일본군의 이러한 판단이 어긋난 것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와 미국이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당시 러시아는 재정상태가 매우 엉망이었으며 뤼순요새와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상실을 두려워해 발트함대를 무리하게 밀어넣다가 참패한 후 러시아 내부 사정에 의해 빠르게 전쟁을 포기했다.
하지만 미국 해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함대의 주력함인 전함들이 침몰하거나 대파당해서 기동불능상태에 빠지자 일본이 원하는 것처럼 조기에 함대결전을 하는 안건을 즉시 폐기하고 필리핀 자치령도 사실상 포기한다. 다만 국민들의 여론과 동맹국과의 외교관계로 인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수비하는 데 소수의 미군을 보냈으며 그 과정에서 자바 해전에 패배하였으나 워낙 소수의 병력만 보냈기에 실질적인 손실은 중순양함 1척과 수상기 모함 1척이 가장 높은 손실일 정도였으며 이미 껍데기만 남은 미국 아시아함대가 해산되는 정도로만 국한되었다.
러시아와 달리 미국은 재정상황이나 산업력이 훨씬 우월했으며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이기에 대서양 함대를 무리하게 남태평양에 투입하지 않았으며 전쟁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함대전력을 재건할 때까지 보급선에서 벗어난 무리한 공세를 하지 않는 소모전 전략으로 차근차근 전쟁을 대응하기 시작하자 일본 해군은 겪어보지 못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방어전 성공으로 일본 해군의 예봉을 꺽은 미군은 이후에도 무리하게 해군을 운용하지 않고 잠수함을 투입해 일본군 상선과 보급선을 집요하게 노렸고 약화된 일본 해군을 차근차근 도발하며 과달카날 전역에서 소모전을 수행하였으며 산호해 해전, 동부 솔로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를 갈아내면서 일본 제국 해군의 진정한 주력을 박살냈다.
일본 해군도 뒤늦게서야 점감요격작전을 폐기하고 함대결전을 노리고 나왔으나 미국 해군은 일본군이 모든 거점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해서 일본 제국이 점유한 남양 군도에 항공기지와 항구가 될 거점을 점령한 후 충분한 수비군을 남겨두고 주력은 이동하는 방식을 썼는데 이걸 잘못 해석한 일본 해군은 수차례 헛된 출동을 하다가 석유를 모두 소모했다.
그리고 전력을 확실하게 확보한 미국 해군은 필리핀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이라는 결전을 통해서 일본 제국 해군을 붕괴시킨다. 따라서 일본 제국 해군의 졸전을 함대결전사상에 그 원인을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패전이야 당연하다치더라도 졸전은 점감요격작전의 몫이 더 크다.
인구와 기술력, 산업력이 뒤쳐지는 국가가 소모전을 걸면, 상대하는 미군이 공세를 걸어오지 않는다면 어쩔 도리가 없어지게 된다는걸 일본 해군은 깨닫지 못했다. 차라리 개전 초기부터 모든 해군을 공세적으로 전개해 하와이와 캘리포니아까지 쭉 공세로 나섰다면 승전의 가능성이 아주 약간이라도 존재할 수 있으며 보통은 패전하겠지만 미군 전사자를 훨씬 더 많이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적군 소모를 위해 산개시킨 구축함대는 오히려 적 항공기와 잠수함대에 소모당했으며 함재기와 항공모함이 소모되며 함대 머리 위의 제공권도 확보하기 못하게 되자 막상 결전급 해전인 필리핀해 해전과 레이테만 해전에서도 제공권 확보 실패로 대참패를 한 후에 군함 대부분을 잃은 후 거함거포주의의 상징 야마토마저 특공으로 희생시키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점감요격작전의 존재 자체가 개전도 하기 전에 일본군의 패전을 확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제대로 발동하지도 않고 일본군도 비교적 일찍 깨닫고 수정했으나, 문제는 점감요격작전의 전제들 때문에 군함들에게 심각한 장애가 생겨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구축함으로 수뢰전을 이기려고 후부키급 구축함은 구축함 답지않게 대함 공격에 특화된 장포신 5인치 함포인 3식 12.7cm 50 구경장 함포를 갖추면서 적 보조함을 일단 걷어내려고 했고, 주력함은 수뢰전으로 이기려했으니 어뢰도 다량 탑재했다. 그런데 속도는 구축함으로 활동을 하려면 빨라야만 하니 한정된 배수량을 해당 분야에 집중투자한 결과 대공전과 대잠전이라는 구축함의 본업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주력함의 경우에도 소형 군함에 대한 화력이 저하한다는 이유로 양용포를 채택하지 않고 포곽방식의 부포를 채택한 후 소량의 대공포와 대공기관포를 약방의 감초를 넣듯이 조금만 배치하는 바람에 대공화력과 대공방어력이 심각하게 딸렸다. [10]
전쟁을 일으킨 국가이면서도 점감요격작전에 따라서 일본 근해에서 전투할 것만 감안했던 군함들의 연료저장고는 매우 작았다. 점감요격작전은 방어전으로서 상주되었기에 군함의 장거리 운항능력은 아예 고려되지도 않았고, 그래서 진주만 공습이나 남방작전을 갈때도 항속거리 보충을 위해서 갑판에 석유드럼통을 그대로 적재하고 갔다. 이러니 데미지 컨트롤이 될리가 없다. 적군의 소구경 함포나 소형 항공폭탄이라도 1발 명중하면 유폭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며 재수없으면 급수도 안되는 소형 군함에게 격침당할 수 있다. 이런 군함을 가지고서는 미국에게 공세를 하기 위해 장거리 원정을 할 수가 없는데, 태평양 전쟁을 이기려면 어덯게든 미국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에 기습공격 초기에 승세를 몰아 공격을 해야만 했다는 부분에서 일본 해군은 초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패전으로, 결전다운 결전을 해보지도 못한채 졸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3.5. 시리아 내전
시리아 내전 역시도 엄청난 장기전으로 알라위파 청년층 전체가 고갈되어 바샤르 알아사드가 패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소모전이라고 칭할 수 있다.하지만 정작 전쟁은 기동전의 양상을 띄었다. 시리아가 그다지 넓은 땅은 아니지만 ISIS나 시리아군 그외 기타 반군들의 병력수가 너무 적어서 대부분의 병력은 트럭으로 기동화되어있었으며 뚜렷한 전선이 나타나지 않았다. ISIS의 확장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이루어진것 처럼 시리아군의 반격 역시 대규모 포위와 거점 함락으로 나타났으며, 최종적으로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의 대남진으로 누구도 예상못할 정도로 빠르게 다마스쿠스를 장악함으로서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4. 문제점
소모전의 장점인 확실한 전쟁승리는 매우 확고하고 소모전의 교리 자체는 연구하고 발전시킬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그러나 과정이나 결과로서의 소모전 자체는 절대로 권장되지 않는 전쟁의 방식이다. 워낙 소모전이라는 단어의 인상이 나쁘기 때문에 소모전이라는 말을 잘 꺼내지 않고 지연전이나 점감작전, 제파 전술 같은 용어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며 소모전을 한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격렬한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인 반발이 발생하게 된다. 당장 위에 언급한 스베친의 소모전략은 반대파에 의해서 무시되었고 그의 사후에는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따라서 소모전을 실리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결전이나 대공세 전에 적의 전력을 깎는 점감작전이나 적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동맹군이 도착하고 방어진이 완성될 때까지 시간을 끄는 지연전같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명확한 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서 단기간만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애초에 소모전은 다른 방법이 없거나 공격이 실패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의도하지 않게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소모전을 하다가도 전황이 유리해질 것 같거나 하면 결전을 하거나 기동전등의 다른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 다 이유가 있다. 참호전이나 독소전쟁도 결과적으로는 소모전 취급을 받지만, 내부적으로는 니벨 공세나 류반 공세등 내부적으로는 많은 공세와 기동전과 공방전 및 포위전이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성공한 소모전의 경우에는 소모전으로 부르지 않고 지연전, 타격전등으로 다르게 부르며, 성동격서처럼 한쪽에서 붙잡고 다른 쪽으로 공격을 성공했다는 식으로 부가설명을 붙인다. 심지어 게릴라전으로 소모전을 해서 승리하더라도 탈레반같은 이슬람 광신도조차 현지 이슬람의 위대한 희생으로 얻은 값진 승리라고 하지 소모전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 그만큼 소모전이라는 단어가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11]
4.1. 장기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전쟁이 예측 불가능한 수준으로 길어진다. 전쟁이 길어져서 좋을 것은 없으며 상대보다 세력이 강한 강국이라면 더더욱 그렇다.전쟁이 길어질 때 소모전에서 언급해야 할 가장 큰 사항은 파죽지세로 진격해서 적국을 압도적으로 발라버린다는 식의 전투 승리의 연속이 반복된다는 매우 좋은 상황에서도 전쟁이 길어지면 파국이 다가온다는 점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국내 상황이 안좋아진다던지 국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므로 초반에 잘나가다가 막판에 망해버리는 용두사미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게 그나마 나을 정도로 패전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게릴라가 소모전을 수행하는 논리가 바로 장기전이라는 것에서 나온다.
극초강대국에 가장 가까운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강대한 국력을 사용해서 보급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조차 의도치 않은 장기전으로 들어갈 경우에는 결국에는 불필요한 인명 손실과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본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당시의 미군은 압도적인 물량과 물자를 바탕으로 가볍게 소모전을 걸었지만, 방어자인 탈레반이 패배했다 볼 수 있는 상황 후에도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저항을 한 덕에 종전 아닌 종전이 계속 이어졌고 그 결과 미군은 장기적으로 큰 손해를 입고 결국 패배하였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거의 20년의 기간과 2조 달러라는 엄청난 전쟁비용을 사용하는 바람에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고 중국이 급부상하는 등 미국에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그러므로 병력과 물자가 압도적일지라도 함부로 걸기 힘든 것이 소모전이다.
그리고 소모전만으로는 언제 종전이 될 지 아무도 모른다. 적국의 전력을 갈아내면 승리에 가까워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승리를 확정짓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도 베를린 전투로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전체 국토가 점령당한 후에나 패전했고 일본 제국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발생한 후에나 항복했는데 모두 소모전이 아니라 결전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건 현대만의 일도 아니라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파비우스 전략이 유용했으나 전쟁 자체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공세를 시작한 끝에 고대 카르타고 근방까지 진군한 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승리하면서 결전으로 마무리된다.
4.2. 적군의 대응
소모전에 따라 전쟁이 길어지면 당연하게도 적군의 대응이 달라지면서 애초에 목적했던 적군 병력 분쇄가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고 오히려 역습을 당하게 된다. 소모전 수행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어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효용성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며 단기전이나 속공이 중요시되고 위험성을 알면서도 기동전을 수행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차포와 대전차포의 발전만 살펴봐도 발전속도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전 당시 현역인 37mm - 40mm급 화포는 순식간에 퇴물로 전락했고 예비 대응형으로 개발중이던 50mm - 57mm급 화포도 개발을 완료해놓고 보니 이미 위력에 한계를 느끼는 상황이었기에 다급하게 장기과제급으로 개발중이던 75mm - 76mm급 화포를 1선급 화포로 등장시켰다. 그리고 전쟁 후반쯤 가면 이걸로도 모자라서 88mm - 90mm급 화포가 주역이 되고 일부 기종은 122mm, 152mm 구경의 야포를 전차포로 채용하거나 128mm 대공포를 전차포로 채택한다. 여기에 더해서 전쟁 말기에는 100mm - 120mm 구경의 전차포를 신규개발하는 것이 완성단계에 돌입했다. 전쟁기간이 고작 5년인데 전차포와 대전차포의 발전이 눈부시게 빨라진 것이며 그나마 이건 양반이고 항공기는 개전 초기에 복엽기가 현역이었으나 전쟁 말기에는 초기형 제트기가 실전에 투입될 정도로 상전벽해급 발전이 이루어졌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025년 시점에서 3년을 넘어갔는데 국지전임에도 무기들의 발전이 매우 뛰어나다. UAV는 대형기에서 소형기가 주력이 되고 소형기의 조종을 방해할 전자전이 가능한 재머가 보급되자 광섬유를 이용해서 방해를 차단하는 유선식 소형 드론이 대세가 되는 등 양측간의 대응에 따라서 빠른 발전을 하고 있다. 포탄의 경우도 M982 엑스칼리버가 뛰어난 유도성능을 보여주었으나 전선에 등장 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러시아군이 전자전과 GPS 재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명중률이 6%로 줄어들면서 비싸기만 하고 일반 성능만을 보유한 포탄이 되었으므로 전선에서 사실상 퇴출당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어진지를 깔아놓고 적군 병력을 소모시키면서 교환비를 유리하게 가져가겠다는 소모전 방식 발상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적군도 머리가 있으므로 대응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이렇게 되면 교환비가 낮아지다가 역전당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응해서 다시 교환비를 아군에 유리하게 늘리려는 방법들은 제한적이며 신무기 같은 경우에는 개발에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지간하면 그냥 기동전 교리를 사용하며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소모전 교리를 채택하더라도 집중적으로 전력을 투입해서 단기전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군은 아르메니아군이 드론에 대한 대응능력을 확보하기 전에 소모전식 전면공세를 걸고 북부에서는 견제하면서 남부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해서 피해를 무시하고 돌파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2020년 9월 27일에서 11월 10일이라는 단기간에 목적을 달성한다.
4.3. 의도하지 않은 소모전
소모전이 실제 벌어지는 것을 보면 애초부터 소모전을 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강제적인 소모전으로 돌입하는 사태가 매우 자주 발생한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소모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소모전을 애초에 노리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아테네는 해군이 강하고 스파르타는 육군이 강했고 서로 공성전을 수행할 공성전술이 모자랐기에 결전을 할 수 없어서 소모전으로 들어갔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도 슐리펜 계획과 국경 전투의 실패로 인해 나타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 독일군도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소련군과의 소모전에 돌입했다.
이럴 경우에는 애초부터 소모전을 의도하지 않아서 장기전에 대비한 물자가 없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며 전쟁 당사국 모두가 상대방을 압도할 수준이 아니므로 전쟁이 계속 길어지면서 결국 두 국가 간의 곳간 비우기 싸움으로 흘러가게 된다. 결국 이득을 보는 건 이들 뒤에서 열심히 군수품을 납품하는 이웃국가들뿐이고, 전쟁 당사자들에겐 승자와 패자라는 타이틀 빼곤 남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 국가 단위의 치킨게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27년이나 이어졌으며 아테네는 패배했고 스파르타가 승리했지만 말 그대로 상처뿐인 피로스의 승리였으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테베와의 레욱트라 전투로 스파르타의 패권이 상실되고 다시 아테네가 부활하는 등 전쟁 이후에도 전투가 이어지면서 고대 그리스 전체가 쇠퇴하였으며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고대 그리스 연합군을 무너뜨리면서 고대 그리스가 마케도니아 왕국 아래로 들어가는 식으로 모두 패배하는 결과로 마무리된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채택한 파비우스 전략도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대규모 패배하지 않았다면 제안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며 결국 로마인들이 파비우스 전략의 유용성을 부정한 다음에 칸나이 전투에서 결전급 패배를 추가로 당하고 나서야 파비우스 전략을 채택할 정도로 매우 인기가 없었던 이유도 그러했고, 한반도 전쟁 당시 유목민족이나 중국 왕조가 쳐들어오면 늘 시행했던 청야 전술은 백성을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위에서 언급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러시아가 빠르게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꾼 것은 좋았으나 2025년 9월의 시점에서 3년 반이나 전쟁이 이어지면서 아무리 최소로 잡더라도 전사 12만명과 부상자 17만명 및 탈영 2만5백명과 포로 7천명을 기록하면서 국력이나 영토, 인구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러시아에게 밀리는 우크라이나를 제압하지 못하고 러시아의 국력을 갉아먹고 있다. 이래서는 전쟁에서 완전승리하고 우크라이나를 모두 점령해도 피해를 회복하기가 곤란한 수준이며 관점에 따라서는 서방세력이 우크라이나를 효율적으로 돕는 방법을 사용해서 러시아의 국력을 무너뜨리면서 자신들의 재무장을 완료할 시간을 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4.4. 막대한 피해
전쟁이 길어지면 소모증상이 심해지는데 소모전은 소모증상을 추가로 증가시키므로 결국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게 된다. 전쟁이 지금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전쟁 후도 생각해야 하는데 전쟁 1개에 소모전을 걸게 되면 승리하더라도 뒷감당이 안된다.제1차 세계 대전의 베르됭 전투에서 초반에 협상국 전선의 돌파에 실패한 독일 제국군은 발상을 바꿔서 방어하는 프랑스군의 전력을 갈아내는 소모전 방식을 채택했다. 그래서 효과가 좋았는가 하면 전혀 아니었고 해당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작 10개월동안 프랑스군이 379,000명의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독일 제국군도 434,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해서 프랑스군보다 더 많이 갈렸으며 오히려 프랑스군의 사기만 올라가는 실패로 마무리된다. 작정하고 소모전에 돌입해도 오히려 적군보다 더 많이 갈리면서 피해가 커진다는 소리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소전쟁에서도 나치 독일군이 소련의 국토 크기와 물량을 만만하게 보고서는 기동전을 펼쳤지만 자기 군의 몇 배쯤 될 거라고 예상했던 소련군의 몇 배를 섬멸하고도 그 몇 배에 달하는 소련군과 마주하는 사태에 직면한 이후, 결국 보급이 길어지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예전부터 주변에 적이 많고 많은 곳이 삐걱거리고 보급이 딸린 나치 독일군은 결국 공세가 더뎌지면서 원치 않는 소련과의 소모전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끝의 절정은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대체 어디서 오는지조차 알 수 없는 소련군의 물량과 점차 나아지는 전략 전술에 결국 독일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벌이고 만다.
하지만 소련군도 전쟁에 이겼을 뿐 최악의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497만 3,820명이라는 기록적인 손실을 당한 소련군은 개전 이전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장비면에서도 전차 20,500대와 항공기 21,200기를 상실하는 대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극동 지방에 배치했던 병력까지 끌어모아서 사용한 끝에 소련군은 평소에는 예비군의 수준도 들어갈 수 없는 인원들을 마구잡이로 징집해서 형식적이고 짧은 훈련을 이수시킨 후 바로 전선에 투입하는 막장행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긴급복구한 소련군 병력도 숙련도가 모자라고 장비가 부족하니 르제프 전투처럼 공세를 감행하다가 말아먹는 방식으로 사실상 소모전이 발생하며 소련의 장정들이 갈려나간 끝에 나치 독일이 패배하며 밀리기 시작하는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부터는 소련에서 남자라는 존재가 거의 동나기 직전까지 몰린다.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인적 자원 자체가 독일의 조직적인 학살과 기아, 열세의 교환비 등 여러 요인이 합쳐져 고갈 직전이었다. 당시 인구 2억여 명 중 군인 1천만 명과 민간인 2천만 명이 "사망"하였고(총 인구 15% 사망) 중상자 및 기아자를 더하면(전투 중 부상자는 통상적으로 사망자의 2배. 군인 중상자만 해도 2000만 명 추정 가능으로 사망자까지 더해 3천만 명의 젊은 남성 인구 및 극소수 여성 인구의 노동력 상실. 군인 사상자 3천만 명과 민간인 사망자 2천만 명만 해도 벌써 인구의 25% 노동력 상실) 사실상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가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소련군의 보병사단 편제는 9.000명이지만 이건 말 그대로 서류에나 있는 것이고 실제로는 2,000명만 채우면 사단이라고 이름붙이고 무작정 출격시키며 소총병이 없어서 행정병이고 보급병이고 모조리 소총병으로 투입하는 수준이었으며 탈환지에서 바로 강제징병을 실시해서 병력을 채우는 실정이었다. 이후로도 전후복구에 역량을 집중하느라 여기저기서 뜯을 걸 최대한 뜯어와야만 했다.
그리고 소련이 이런 상황에서도 승리한 것은 연합국의 참전과 함께 소련군이 무기 생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식량이나 연료, 자원, 수송차량, 무전기등을 대량으로 지급해준 무기대여법이 큰 도움을 준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소련이 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개전 초기의 대타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치 독일군을 소련 영토에서 몰아내면서 협상으로 종전하는 것이 가장 나은 결과로 나올 지경으로 상황이 안좋았을 것이다. 소모전이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는 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하다.
게릴라도 마찬가지라서 유고슬라비아 전역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주력으로 진행했으며 성과도 많았으나 장기간의 게릴라전 끝에 가혹한 추축군, 특히 우스타샤등의 세력이 저지른 대학살로 인해 체트니크와 또 다른 내전이 발생하는 등 희생자가 많았으며 마무리도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탈환하는 베오그라드 공세로 마무리된다. 게릴라 자체의 능력만으로는 소모전을 진행할 수는 있으나 막대한 희생이 발생하며 전쟁도 마무리짓지 못하는 것이다.
4.5. 정예 병력과 장비의 손실
여기서 말하는 정예 병력과 장비는 특수부대같은 최정예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전 이전에 제대로 된 기초군사훈련과 주특기훈련을 이수한 후 군복, 군화, 군장을 포함한 기초군사장비를 모두 지급받았으며 연령대도 군복무를 수행하기에 충실한 병력이 정예 병력이다.이런 병력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병력이 아닌가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된 후에 조금만 지나면 병력 손실로 인해 예비군을 투입하기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복무 부적격자 수준의 전투수행 불가능급 인원으로 부대를 편성해야 할 지경까지 몰린다. 따라서 개전 이전에 정규군이 된 병력은 모든 국가에서 점점 소중하게 평가하고 전장에서도 조심스럽게 운영하며 보통은 병력 소모가 심한 전투보다는 기동타격이나 급속전진같은 임무에 사용하게 된다. 더 이상은 전쟁 중에 정예 병력을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전쟁도 병력을 갈아먹는데 소모전이 걸리게 되면 말 그대로 병력을 마구잡이로 갈아버린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후에 상륙한 서방 연합군은 상륙 당시에는 전체 사상자가 10,424명이라는 경미한 손실을 달성했으나 그 이후에 빠르게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하는 것이 나치 독일군에게 막히고 보카쥬라는 관목이 무성한 지형에서 소모전이 발생한 결과 상륙 1달 후인 7월 24일 기준으로 전체 사상자가 12만명이 발생한다. 공군력과 해군력이 막강하고 포병 화력도 강력한 서방연합군이 화력으로 희생자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소모전이 걸리자마자 엄청난 사상자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당 문제는 팔레즈 포위전으로 나치 독일군이 만들어놓은 방어선을 붕괴시킨 후 역포위해서 승리해서야 간신히 해결했으며 그 후에도 독일 본토로 진격할 때마다 휘르트겐 숲 전투처럼 제대로 된 방어선에 걸려버리면 사상자가 5만 5천명이 발생할 수준으로 심각한 타격이 왔고 결국 마켓 가든 작전처럼 무모한 기습적인 진격작전이 수립된 끝에 공수부대같은 특급 병력이 갈려나가면서 사상자 및 포로 17,200여명이 발생하는 타격을 입고 작전이 실패한다.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도 마찬가지라서 이미 중일전쟁으로 병력을 소모하던 상태였고 개전 초기의 정예 병력들이 라바울 본영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같은 곳에 가두어지거나 연합국의 반격으로 소모되자 관동군같은 곳에서 병력과 장비를 차출해서 전선에 파견하는 바람에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시기에는 관동군은 숫자만 많고 장비는 부족하며 훈련도도 바닥인 오합지졸로 전락했고 결호작전으로 일본 본토에서 최후의 항전을 할 병력도 편제만 51개 사단이지 실제로는 제대로 훈련도 못받은 복무 부적격자와 여자들까지 합친 병력에 장비도 제식 소총조차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서 죽창이 등장하는 한심한 지경까지 가게 된다.
이런 문제로 인해 소모전이 조금만 길어지더라도 병력 손실을 감당할 수 없고 적군 전력을 갈아냈다고 해도 아군 전력도 갈려나가는 바람에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소모전을 의도하더라도 단기간에 걸쳐서 수행하며 정예 병력은 제외하는 것이 당연하고 소모되는 병력량도 최소화하도록 각종 노력을 기울인다.
실제로 이런 점을 감안해서 미국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화력을 증강시키는 노력을 지속했으며 걸프 전쟁에서 사상자가 매우 적게 난 이후에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20년간의 전쟁 기간에 비해 미국의 사망자는 2,448명으로 엄청나게 줄었다. 그러나 확실한 타격과 손해 감소를 위해서 특수부대를 일반적인 전투에도 자주 투입한 결과 특수부대의 손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질적인 면에서의 손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몇 배의 희생자를 냈다고 판단되고 있다.
4.6. 훌륭한 동맹의 필요성
소모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동맹의 필요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소모전을 하다가 자신의 국력만 갈아먹고 패배하기 딱 좋다.소모전 수행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미국 독립 전쟁도 프랑스 왕국이 미국의 동맹이 되면서 체사피크 만 해전을 진행해서 승리하는 등의 상당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요크타운 전투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끝없는 게릴라전 끝에 미국이 패배하는 수순으로 돌입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미국 독립 이후인 1812년에 벌어진 미영전쟁은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과의 대결로만 이어지면서 결국 종전협상으로 무승부로 결정이 났으며 1861년에 벌어진 남북전쟁에서는 남군인 미연합국이 해상통로가 봉쇄당하고 동맹국이 전혀 없게 되자 북군과 1대 1로 붙은 결과 초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도가 함락당하고 국토가 3조각으로 나누어지고 군대가 모두 무너지면서 괴멸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영국과 프랑스를 대표로 하는 협상국은 이미 국력의 고갈로 인해 독일 제국과의 굴욕적인 협상으로 종전해야 했을 것이다. 니벨 공세의 실패로 프랑스군에 대규모 항명과 하극상 사태가 발생해서 필리프 페탱이 긴급하게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흑해와 발트해의 해상출구가 막혀서 제대로 된 지원을 못받은 러시아 제국은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진다.
4.7. 적국에 걸리는 핸디캡이 필요함
소모전에 들어가기 전에 적국에 유형적, 무형적인 핸디캡이 제대로 걸려야 소모전으로 승산을 볼 수 있다. 적국이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는 불리한 상황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게릴라전으로 장기전을 수행해서 소모전을 한다면 필수적인 요소다.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승리한 것도 상대방인 베트남 공화국이 반쯤 붕괴된 상태 수준으로 취약했던 데다가 미국이 냉전을 의식해서 확전하지 않으려고 제한전을 건데다가 소련과 중공이 북베트남을 도와줬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탈레반이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에서 승리한 이유도 애초에 아프가니스탄 자체가 제국의 무덤으로 불릴 수준으로 지형이 험악하고 넓기 때문이며 상대방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남베트남을 능가할 수준으로 엉망이었으며 미국의 전쟁 의지가 더 약해졌고 인권문제까지 대두되었으며 원래의 개전 목표인 오사마 빈 라덴을 넵튠 스피어 작전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더 이상은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승리할 경우에는 적국에게 출구전략을 쓸 여유를 줘야 한다. 적국을 완패시키고 쫒아내는 것이 아니라 적국이 굳이 여기서 희생을 감수하고 전쟁할 이유가 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은 1973년 1월에 파리 강화 협정을 통해서 출구전략을 달성했고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때는 이미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에게 사살당한 것과 함께 2020년 2월에 도하 협정으로 미군을 비롯한 외국군을 2021년 5월 1일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기로 합의하는 것을 통해서 출구전략을 달성했으므로 미국이 협상으로 철수한다는 방식으로 전쟁이 끝날 수 있었다.
4.8. 사기 유지의 어려움
소모 전략은 필연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낳는다. 애초에 소모전 자체가 막대한 인명피해를 의도한 전략이니만큼 전선의 병력, 심지어 장교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1차대전 당시 참호전 양상이 유독 참혹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독일과 영국 모두 공세작전의 실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소모전략을 채택함으로서 최전선의 병사들이 양자 공히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다. 소모전은 양자의 병력교환을 의도하므로 최전선의 병력은 거의 확실히 죽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지휘관들이 소모전을 계획한 참모와 지휘관들에 의해 타라와 전투, 오키나와 전투, 이오지마 전투에서 방어전을 잘 수행하다가도 일선 지휘관들의 독단, 혹은 강력한 건의로 반자이 공격으로 병력을 결정적으로 잃는 순간이 있는데, 이는 대국적 측면에서는 어리석다 평가하지만 일선 병력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소모전으로 동굴안에서 막기만 하면, 분명 전력상 열세라도 미군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방어하는 일본군도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하면 최전선 동굴에서 결국 100% 확실하게 죽는다. 방어를 몇 번 성공적으로 수행하더라도 공격이 계속 밀려오므로 애초에 방어자가 언젠가는 죽게끔 전략이 짜여있다. 그리고 동굴이나 참호같은 곳은 평소에도 거주하기 힘든 곳인데 전투가 벌어지면 화약이 폭발하며 화약연기로 만들어진 유독가스가 차오르고 총을 사격할 때마다 강력한 소음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거주자를 괴롭히는 등 버티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한다. 덤으로 전투가 지속될수록 보급은 단절되고 저장해놓은 식량과 식수와 의약품은 고갈되므로 점점 방어전도 힘겨워지게 된다.
이러다보니 최전선으로부터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천천히 도살장의 소처럼 죽게되느니 차라리 기습을 통해 적을 섬멸한다면 살 가능성이 1%라도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전략적 소모를 통해 미군을 최대한 죽여서 일본 본국으로 상륙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바라던 정전을 이끌어내는데는 비효율적이라는걸 모두가 알아도, 살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려는 전선의 의지는 강하고, 지휘관이나 참모도 이를 막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일본군이니까 반자이 돌격을 했지 다른 나라의 군대였으면 그냥 항복해버렸을 것이다.
공세 역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건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 교환비나 사망률은 둘째치고 공세는 승리한다면 죽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라도 있는데 소모전략을 채택한 군대의 최전선 병력은 살아남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100% 죽을 최전선의 병력이 최후까지 저항을 하게끔 사기를 유지해야하는데. 그게 매우 어렵다. 1차대전의 영웅 필리프 페탱이 전선의 사기를 유지한 방법은 2주 간격으로 병력을 교환하는 시스템을 고안하고 이를 철저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지나친 소모로 인해 장교로부터 사병까지 절망에 빠져있었고 대규모 항명사건까지 퍼졌지만 페탱은 2주만 버티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약속을 하고 지킴으로서 겨우 병사들의 항명과 소요를 진압할 수 있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병력의 80%가 베르됭 전투를 경험할 정도로 잦은 로테이션이 있었다. 이는 병사들이 전선과 지형에 익숙해지는 것을 빼았는다는 단점이 있었고 프랑스인 대부분에게 PTSD를 심어주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런 문제를 감수할 만큼 소모전략을 수행하는 군대는 사기유지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4.9. 국가 경제의 출혈
전쟁은 국가에게 막대한 재정 출혈을 강요한다. 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몰라도, 경제학의 관점에서 매우 좋지 않은 행위다. 그래서 전쟁 당사국 서로가 비슷한 조건에서 소모전을 치렀다면, 승전국이라 한들 재정이 파탄나는 건 거의 확정이다. 일례로 1년 동안만 진행되었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쏟아부은 돈은 자그마치 7년치 예산이었으며 만주에서 벌어진 육상전투인 뤼순 공방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봉천 전투에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살짝 후퇴하면서 결판이 나지 않아서 소모전이 발생하면서 언제 전쟁이 끝날 지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여기에 더해 지속적인 소모전의 결과로 발생하는 전비(戰費)가 전쟁 당사국의 국민들의 어깨에 떨어진다. 패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승전국도 전쟁배상금을 받아서 해결해보려고 하지만 그걸 지불해야 할 패전국이 능력이 없거나 배를 째버리면 역시 답이 없어진다.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이겼지만 러시아가 포츠머스 조약에서 해전에서 패배했을 뿐 육전에서는 러시아군이 계속 싸울 수 있으나 국내의 사정으로 인해 종전협상을 하는 것이므로 일본이 요구하는 배상금 지불을 거부했고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어서 종전조약이 채결된다. 따라서 이미 쓴 전쟁비용은 일본에게 거대한 빚으로 남았고 히비야 방화 사건을 비롯한 폭동이 일본 전역에서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장기간의 소모전으로 인해 국가 경제 자체가 전쟁 수행능력에 특화한 군수공장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면서 전후에 다시 평상시 경제체제로 돌리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군수공장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대부분 전쟁에만 필요한 장비가 많으므로 필사적으로 민간 분야로 돌리기 위해서 개조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경제체제를 원상복구하는 기간 동안 국민들은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기도 한다. 무기대여법으로 지원을 받던 영국이 2차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원조가 끝나자 갑자기 물자부족에 시달려서 1945년 9월 2일에 미국에게 추가 원조를 요청했으며 미국은 무기대여법으로 제조하던 물자를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떨이로 팔고 나서 50년 단위로 상환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잠시동안 불황을 겪었다. 군축과 방위산업의 급격한 축소로 인해 취업할 곳은 줄어들었는데 기존에 군에서 복무하던 인원들의 대다수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전쟁시기에 공장에서 근무하던 기존의 노동자들과 여성들도 자신의 일자리가 존속하기를 바래서 난리가 난 것이다. 이런 문제는 서유럽이 복구되기 시작해서 미국의 수출물량이 다시 늘어나고 6.25 전쟁으로 방위산업이 재가동하고 군대의 규모도 약간 복구되면서 간신히 경제가 회복하며 마무리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식으로 전쟁 당사국이 자신의 국가 경제를 말아먹고 전쟁비용으로 빚까지 생긴 상황에서 타국과 경제적으로 경쟁을 벌이거나 대등한 위치에 올라가는 것은 매우 힘들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영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더해지자 대영제국이 해체의 길로 들어간게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세계 열강의 수장급 위치였던 영국도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자 연속으로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타격이 만만치 않아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당장 위의 무기대여법에 따른 비용을 영국은 2006년에나 완전히 상환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영국도 깨닫고 있었고 전간기 때의 여러 가지 군축 조약들을 살펴보면 어떻게든 추가적인 전쟁을 피해보려는 영국의 노력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열강들도 소모전에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는 상황에서 게릴라전으로 승리한 국가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국가가 파탄국가 상태에 돌입한다. 탈레반이 승리한 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베트남도 1980년대동안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국가 순위에 항상 목록이 올라갈 지경이었으며 보트피플까지 발생할 지경이 된다.
4.10. 인재와 인력의 급격한 감소
국가 경제가 붕괴되는 것도 큰 문제인데 소모전을 장기적으로 하다보면 평시에나 전시에나 절대로 소모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재를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계속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전황도 점점 불리해주고 전후의 복구 및 경제 회복도 답이 없어지게 된다.군사적인 요소만 따져봐도 앞서 설명한 정예 병력 이외에도 평시에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든 전투기 파일럿이나 특수부대급 특급 병력들이 점점 갈려나가서 나중에 가면 기초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복무 부적격자 수준의 초짜들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해야 하므로 가면 갈수록 희생은 많아지고 전과는 줄어들며 전투 패배가 늘어나게 된다.
전투를 벌이면서 실전경험이 쌓여서 병력이 숙련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희생되는 병력 숫자가 더 많은 게 보통인데다가 그런 식으로 육성된 에이스급 파일럿도 전투에 계속 참여하다보면 심심치 않게 죽어나가니 결국에는 답없는 초짜만 남게 된다. 잘 훈련되고 장비도 충실한 양질의 병력은 전쟁 중에는 더 이상 구하기가 어려워서 있는 것을 가지고 전쟁 끝까지 가게 되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나마 군사적인 면은 전략과 전술로 약간이나마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민간분야 측면을 살펴보면 진짜로 답이 안나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능력있고 유망한 과학자나 훌륭한 예술가, 뛰어난 석학이나 재능있는 기업가나 숙달되기 어려운 기술을 익힌 전문 기술자 같은 특급 인재들이 말 그대로 총알받이로 사라지게 되므로 전쟁에 이겨도 뒷일을 전혀 장담하지 못할 수준의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걸 해결해 보려고 인재를 최전선에 투입하지 않는다던지 하는 조치가 존재하지만 소모전의 결과로 전세가 불리해지면 오늘만 사는 사람식으로 결국에는 이런 인재도 전선의 소모품처럼 최전선에 투입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만다.
평시에도 인정받은 인재도 이렇게 파리목숨이 되어버리니 일반적인 국민은 말 그대로 소모품처럼 갈려나간다. 그러니 전쟁 후 나라를 살려보려 해도 일할 사람이 대부분 전쟁에서 죽어버렸으니 경제기반을 재건하기 어렵다. '전쟁에서 몇만 명이 죽는다 한들 전체 인구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 몇만 명의 군인들이 젊고 육체적으로 전성기인, 원래는 근로를 통해 국가 경제에 이바지했어야 할 이들이라는 것이 문제다. 일반적인 중소기업 하나의 직원 수가 수십 명 가량이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손실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10배에 해당하는 부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며, 이들중 못해도 20% - 30%는 영구적인 부상을 당해 전투능력은 물론 근로능력까지 전부 혹은 일부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들 중 전쟁이 끝나도 일상생활로 돌아와 다시 예전의 생산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상자중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출산율이 떨어지던 와중에 참호전의 후유증까지 겹쳐서 전간기 시절에 마지노선등의 방어시설물에 집착했고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가짜 전쟁을 한동안 수행하는 등 방어적인 전투 위주로 전쟁을 진행하려고 노력했다. 소련의 경우에도 독소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남성과 여성 비율이 박살났으며 다산을 장려했으나 최종적으로 인구가 정상화된 시점이 1980년대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적 자원의 대규모 손실을 빠르게 극복한 경우도 있으나 보통 이런 경우는 식민지 등에서 거주하던 해당 국가의 민족들이 대규모로 쫒겨나서 본토로 이주하고 냉전이 개시됨에 따라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국가의 회복을 도와준 경우라서 이야기가 다르다.
독일의 경우에도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으나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로 인해 독일 본토에 대규모 독일계 이민이 들어왔고 마셜 플랜으로 경제력이 복구되면서 회생한 것이며 기존의 전사자 이외에도 페이퍼클립 작전등으로 추가적인 인재 유출이 일어나면서 미국과의 기술력 격차가 뒤집어졌다. 일본의 경우에도 히키아게샤라고 하는 일본의 식민지에 살던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손실을 메꾸고 미국이 일본을 동맹국으로 되살리면서 회생에 성공했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두가지 현상이 발생하지 않은 국가들은 냉전이 끝날 시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폴란드 인민공화국으로 전쟁 이전의 인구는 약 3,500만명이지만 전쟁이 끝난 후의 인구가 약 2,400만이라서 국력 회복에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으며 그나마 수행한 국력 회복도 저임금과 최저 수준의 복지라는 엄청난 고난 끝에 간신히 달성했다. 폴란드가 국력을 그럭저럭 회복한 것은 냉전 이후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붕괴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된 후이며 2025년의 시점에서도 인구가 38,140,910명으로 2차대전 개전 직전의 인구보다 고작 3백만명 늘어난 정도다.
4.11. 국민들이 겪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소모전을 수행하면 국가의 모든 인력과 물자는 최우선적으로 군대에 투입되고, 자연스레 국민들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우 궁핍해진다. 전쟁이 터져서 가족, 친구, 이웃, 아니면 바로 자신이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최전선에 나가 몇 년을 복무한다 생각해보자. 그중 몇몇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고, 주위에서는 이런 비보가 계속 전해져 올 것이다. 결국 아무리 마초적이고 전쟁에 미친 사람이라도 소모전이 일어나면 극심한 정신적 피로와 두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는 군 수뇌부도 예외가 아니다.전쟁으로 고통받던 국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나라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사례는 역사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은 킬 군항의 반란과 독일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연이은 패전이 러시아 혁명의 불씨가 되어 멸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실각한 이유도 국민들이 도저히 전쟁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나치 독일의 경우에는 세계 대전을 수행하는 추축국의 1인자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총력전 체제로의 본격적인 전환이 1943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지는 등 매우 비효율적인 국가운영을 보였다. 이는 지도자 원리에 따른 답없는 국정운영도 단단히 한몫했지만 이미 1차 대전에서 고생을 겪은 독일 국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생필품을 다수 공급하고 지원을 해주는 등 독일 국민을 달래기 위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4.12. 사회적 혼란과 전쟁 후유증
소모전이 지속된 결과 인명의 손실이 많아지면 희생자가 많이 나온 지역 사회는 붕괴 위기를 겪기 쉽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 지역의 군복무자를 같은 부대에 몰아넣지 않고 각 부대에 분산하는 조치가 취해지지만 이것도 희생자가 늘어나면 답이 없어진다.전후에 국민의 숫자를 다시 회복해야 하는데 성비가 극단적으로 안 맞아서 사회 분위기가 혼란에 빠지면서 인구 증가도 제대로 안되고 태어난 인구들도 제대로 된 인재로 성장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3국 동맹 전쟁에서 패배한 파라과이가 대표적인 사례로 남녀 성비가 1:9 수준이라는 극악의 수준으로 떨어진데다가 그나마 살아남은 남자도 생식능력이 아직 없는 어린아이나 생식능력을 거의 상실한 아주 늙은 노인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패전 후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것도 모자라서 당시 우아한 문화의 거리를 가진 수도인 아순시온에서도 백주대낮에 성폭행과 강간이 일상화되었으며 사생아 문제가 터지는데도 불구하고 파라과이 정부가 인구 회복 문제 때문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일부다처제가 전쟁 패배후 80년이나 이어지다가 1950년대에 폐지될 수준으로 개판이 되어 버렸다.
파라과이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전후에 실업자가 늘어나고 남편을 잃은 과부나 전쟁고아가 증가하여 복지비용이 증가하고 경제가 침체하여 사회 분위기가 안좋아지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일이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처럼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다는 열강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전간기의 정치적 혼란과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 뮌헨 협정, 가짜 전쟁 당시의 소극적인 행보, 프랑스 침공 이후 나라가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로 나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자 결정타는 대전쟁에서 발생한 5백만 사상자라는 막대한 인명피해였다. 소모전은 이렇게 안 좋은 증상을 심각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5. 사례
5.1. 전근대
- 초한전쟁
약세인 한나라가 강국 초나라를 상대로 역으로 소모전을 걸어 꺾어버린 특이한 사례.[12] 무적의 야전 사령관 항우에게 승리하는 게 불가능하자, 유방이 주요 자원줄을 낀 채로 항우를 막으면서 한신이 기타 세력권을 정벌하고, 팽월이 초나라 후방을 집요하게 후벼판 끝에 광무 대치 마지막 즈음에는 이미 초나라의 여력은 바닥을 치는 지경에 이른다. 정작 승리한 한나라 쪽도 몇 대 동안 후유증이 남을 정도였는데, 사실 이쯤 되면 소모전이라기보단 총력전 수준이다. 여기에 항우가 초나라 원숭이급의 외교 능력을 보여주어[13] 또한 한나라 이외에 다른 나라들과도 싸워야 했다.
- 한국사
한국사에서도 소모전이 있었는데 바로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70여년에 걸친 전면전이었다. 고구려는 요동과 한반도의 패권국답게 고구려-수 전쟁과 고구려-당 전쟁에서 수, 당의 대규모 침입을 수차례 물리치고 수나라의 멸망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나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인한 국력 고갈, 정치적 내분에 빠지게 되고 백제의 멸망과 백제부흥운동의 종결 이후 당과 신라의 양면전선을 강요받게 되면서 결국 668년 멸망하였다.
이외에도 10세기 초 발해와 요나라의 혈전 및 13세기 중반 여몽전쟁 역시 소모전의 예시로 볼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체급이 작은 한국 왕조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 송말원초
몽골 제국과 남송 간의 혈전도 소모전의 예시이다. 서하, 금나라가 무너지고 몽골의 전력이 남송 전선에 투사되는 와중에도 남송은 장강을 방어막 삼아 44년간이나 항쟁했지만 결국 체급과 전력 차를 이기지 못하고 양양 공방전에서 패배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1279년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끝도 남송의 영토 중 사실상 최남단 해안가에서 벌어진 애산 전투에서 마무리될 정도로 길었다.
5.2. 근대 이후
5.2.1. 유럽
-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참호전
대표적인 소모전이다. 스위스부터 벨기에 연안까지 수백킬로미터에 걸쳐서 만든 참호에서 그야말로 누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느냐의 싸움.
슐리펜 계획과 국경 전투의 실패로 인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참호전의 시작은 매우 작았다. 그러나 당시 참호를 격파하는 방법은 무식하게 돌격해서 상대 참호를 빼앗느냐, 우회해서 측면을 공략하느냐의 싸움이었는데 두 전술 모두 사용되다보니 전선이 계속 길어지고 참호가 뚫려도 상대측의 진군을 막기 위해 작게는 몇 중, 많게는 수십 수백 중의 참호를, 프랑스 해안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엄청나게 긴 길이에 걸쳐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독일이 지쳐 나가떨어지면서 끝났지만 루덴도르프 공세라는 최후의 결전급 공세를 한 끝에 실패한 후 협상국이 백일 공세를 하며 전선이 붕괴되며 마무리된다.
동부 전선에서는 참호전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소모전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여기서는 러시아가 나가떨어지면서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끝났다. 러시아는 인구 수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술력의 한계와 당시 러시아의 사회 불안정성 때문에 먼저 패배하였고, 독일은 전투력 자체는 좋았고 유럽 본토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지만 미국의 압도적인 군수 물자와 오랜 기간 동안의 해상 봉쇄로 인해 패배하였다.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 측은 초반 대공세를 통해 수도를 함락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측의 대반격도 일부분 성공했으나 완전한 성공에는 이르지 못하면서 그대로 1,500km 길이의 전선이 그대로 고착되어 소모전 형식으로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모전 양상을 극복하기 위해 쿠르스크 전투(2024년)을 일으켰지만 정예병력만 소모하고 실패한다.
2025년의 시점에서 3년 반에 걸친 전쟁 끝에 러시아가 우세를 잡았으나 말 그대로 병력을 갈아넣으면서 조금씩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하는 식으로 전쟁을 진행하기 때문에 국력 소모가 매우 심하다.
5.2.2. 아시아
- 중일전쟁
일본 제국 역시 중화민국을 만만하게 보고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나, 중국 대륙의 방대함과 국민혁명군의 엄청난 물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소모전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갔다. 거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면서 양면전선의 압박과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인한 물량 공세라는 악재가 추가되었고, 결국 일본이 본토에 핵폭탄 두 발을 맞고 패망하면서 중일전쟁은 중화민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 소모전(중동)
아예 전쟁의 이름 자체가 소모전이다. 6일 전쟁 종전 이후인 1967년 7월 1일부터 1970년 휴전협정 체결 이전인 1970년 8월 7일까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함께 이스라엘을 상대로 벌인 적 있다.
- 베트남 전쟁/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것은 아니지만, 각각 11년, 9년간의 지루한 소모전 끝에 반전여론이 거세지고 전쟁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베트남에서는 미국이 패배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이 패배했다.
물론 게릴라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며 베트남은 1980년대까지 최빈국이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거치면서 말 그대로 파탄국가가 되었다.
- 이란-이라크 전쟁
이 전쟁도 극심한 소모전의 예시다. 이라크는 이란의 국력을 만만하게 보고 준비도 안 하고 마구잡이로 몰려갔고 결국은 도시 하나를 두고 뺏고 뺏기고, 나중엔 기갑 장비가 전부 다 소모되어 전세계의 기갑장비를 마구잡이로 사들여 발악하고 스커드를 날려대고, 8년간 싸워 결국 둘 다 지쳐 나가떨어지고 만다.
전후에도 혼란은 이어져서 정신 못차린 후세인은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쿠웨이트를 공격하면서 미국의 분노를 사서 걸프 전쟁으로 박살나고 이라크는 가난한 돌의 왕국이란 조롱까지 듣게 된다. 이란의 경우는 튼튼한 기반 덕분에 패망은 피했지만 막장스런 외교와 후폭풍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감소했다.
-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아제르바이잔이 소모전을 주 전략으로 사용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북쪽에서 공세를 자제하고 남쪽에서 우월한 드론 및 포병 전력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였고, 국력에서 밀리는 아르메니아가 이를 버텨내지 못해 백기를 들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초반에 아제르바이잔이 기동전을 채택하자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의 기동 보급로만 차단하는 식으로 일시적인 휴전 협정을 얻어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어서 소모전으로 이행한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승리했으나 전사 2,906명과 전차 및 장갑차 239대 손실을 겪어야 했다.
애초에 인구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의 3.5배이고, 더욱이 아제르바이잔에는 석유가 있어 송유관을 통해 수출하고 있다. 소련 붕괴 당시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의 혼란상을 틈타 약진했지만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깨닫고 소모전을 건 아제르바이잔에게 밀리는 건 시간 문제였던 셈이다.
5.2.3. 아메리카
- 미국 독립전쟁
이것도 잘 알려진 소모전이다. 정면 승부로는 미국이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워싱턴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합지졸 민병대 병력 만으로 군수품의 소모전을 진짜 오로지 근성만으로 이끌어 이겼다. 당시 영국군에게 무슨 소모전을 거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미국 민병대는 자신의 안방인 넓디넓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격전으로 싸운 한편 영국은 대서양을 건너 병력과 물자를 보급해야만 했으며, 미국 대륙군과 민병대의 유격전 전술에 빈번하게 당하며 사기가 마모되어 나가야만 했다. 거리 때문에 영국 입장에서 소모전으로 나오면 보급에서부터 차질이 빚어지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프랑스 왕국이 적극적으로 해군을 파견하고 미국을 지원하며 영국을 방해한 것도 전쟁 승리에 큰 요소를 차지한다. 프랑스의 개입이 없었다면 영국 해군을 막아내지 못해서 최종적으로는 미국이 게릴라전만 하다가 패배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체사피크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승리하면서 영국이 패배의 길로 빠지게 된다.
- 미영전쟁
미국은 침공을 시도했다가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자 영국이 개전 직전까지 나폴레옹 전쟁 탓에 국력이 크게 소모되어 있는 점을 노리고 소모전 전략을 통한 협상으로 대전략을 전환하였다. 특히 당시 미국 해군이 USS 컨스티튜션같은 대형 프리깃을 통상파괴전에 투입함으로써 영국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주어 해당 전략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동맹국 없이 미국과 영국간의 전투로 진행되었기에 결과적으로는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정작 영국의 해상보험료가 크게 치솟고 물가 부담을 야기한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은 아예 해상무역 자체가 망가져버리는 등의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연방군 강화, 특히 해군력 증강에 대한 근거가 되었다.
- 남북전쟁
중앙정부인 미국 휘하의 북군과 분리독립한 미연합국이 지휘하는 남군이 붙은 내전이다. 양측 모두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보유했으나 공업화가 이루어진 북군이 인구, 산업, 경제력에서 더 우월했으며 미연합국은 북군에 의해 해상통로가 봉쇄당하고 동맹국이 전혀 없었다.
전쟁에 유리한 요소를 마련하지 못한 채 소모전이 장기화되면 어떻게 되는 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남군이 북군과 1대 1로 붙은 결과 초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다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승리의 희망이 사라졌으며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당해서 후방 지역이 초토화되고 국토가 3조각으로 나누어진 끝에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당하고 로버트 E. 리가 항복하면서 군대가 모두 무너지며 괴멸당했다.
5.3. 응용: RTS 게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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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통 전략 | 전략 | 빌드 오더(운영 · 날빌) | 정찰 | ||
| #s-4.3(터틀링) | 타워 러시 | 빈집털이 | |||
| 간격 벌리기(카이팅) | 심시티 | 엘리전 | 회전력 | ||
| 견제 | 최적화 | ||||
RTS 게임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된다. 주로 상대방보다 많은 자원을 획득한 게이머가 자원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전력과 나의 전력을 서로 소모시켜 경기를 풀어나가는 걸 의미한다. 자원의 차이가 계속해서 벌어지면 단순히 어택땅만 해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주로 회전력이 좋은 저그가 자주 쓰며 저글링 + 디파일러의 회전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겨우겨우 막았는데 그만큼의 병력이 또다시 몰려오니 공포.
이는 근본적으로 이미 양적으로 우세한 상태에서 상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교환비의 교전을 강요하여 추스를 틈도 없이 상대를 먼저 소모시킨다는 접근법이다. 따라서 상대방과의 양적 격차를 오판하거나 상대방이 마이크로 컨트롤이나 전술적 판단력, 빌드 오더 등으로써 질적 우세를 점하고 교환비를 자신에게 더 유리하게 벌리는 경우, 이를 간과하고서 적절한 통제 없이 너무 소모시키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상대의 준비된 한방 병력에 의해서 역관광당할 수 있다. 아주 잘 보여주는 예가 '50게이트 사건.' 프로토스도 테프전의 경우 테란보다 많은 멀티를 먹고 그 자원력을 바탕으로 테란과 지상군끼리의 소모전을 벌인다.
조금 다른 뜻으로, 인구수 상한치가 존재하는 게임에서는 인구 상한치를 다 채웠을 때 소모될 것을 전제로 저테크 유닛을 적극 공격시키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여유 인구수를 새로 생산한 고테크 유닛으로써 채우는 것도 소모전이라고 표현한다. 대표적으로 스타크래프트에서는 한계 인구수인 200에 차 있던 병력을 상대방의 주력 병력과 싸워 서로 소모시켜 인구수 사용량을 비움으로써 고테크 유닛을 생산할 인구 수를 확보한다. 특히 테프전에서 캐리어를 가는 경우나 저그의 목동저그 체제를 확보하기 위하여, 혹은 테테전에서는 탱크를 제외한 유닛을 없애서[14] 배틀크루저의 용이한 확보를 위함이다.
한편으로는 또 캠페인이나 예능전에서 자원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싸우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자유의 날개에서 암흑 속에서나[15] 최후의 항전처럼 소모전에 가깝게 싸우는 사례도 있으며 래더에서 예능전으로 서로 소모전을 돌리다 자원을 전부 쓰고 최후의 병력들이 서로 대치하는 모습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수한 기술을 쓸 수 있는 유닛들이 변수 창출에 적극 활용된다.
6. 매체
- 스타워즈
시리즈의 큰 사건 중 하나인 3년간 벌어진 클론전쟁 기간동안 상당수의 전투가 소모전의 형태를 띠었다. 분리주의 연합의 주력 보병인 배틀 드로이드는 공장에서 날마다 조 단위로 찍어 나오고, 은하 공화국에선 대규모의 클론 군대를 양성하다보니 대전 세력의 병력 규모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레 지상/공중 전투의 규모가 커졌고 수많은 전사자들이 속출했다. 예를 들어 전략적 요충지 행성 등을 점령하기 위해 두 세력이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 → 치열한 전투 끝에 양쪽 모두 갈려나감 → 재투입 이라는 순환이 범은하 곳곳에서 일어나던 것. 물론 이는 흑막인 다스 시디어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렇게 소모전으로 가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은하영웅전설
아스타테 회전 당시에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완벽한 승리를 양 웬리가 막아낸 방법 역시 소모전이다. 정확히 말해서는 이미 승리가 확정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에게 소모전으로 불필요한 희생이 추가되면 공적이 깎일 것을 노리고 소모전을 시작한 양 웬리의 계략이 먹힌 결과였다.
헌데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양 웬리 본인도 생애 마지막으로 참전한 전투인 회랑 전투에서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숫적 우위를 앞세운 소모전으로 인해 패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막판에 황제가 와병으로 쓰러져서 철수한 덕에 결과적으로는 패배는 면했다.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작중 벌어진 극동 전쟁에서 일본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대한제국을 상대로 국력과 군사력의 한시적·국지적 우세로써 조기에 승전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초전부터 전략적 오판과 전술적 열세로 큰 피해를 입자 힘의 균형이 역전되기 전에 승리하고자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국력과 군사력의 우세로써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상대로 총체적 국력이 앞서는 상황인데도 군사적 열세와 그로부터 비롯하는 병력과 자원의 소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소모되어 버렸고, 종국에는 봉천에서의 회전에서도 패배하고 한국 전선에서도 원산 상륙을 허용하면서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 Warhammer 40,000 - 그림다크를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보니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는 소모전이 흔하다. 17년이나 소모된 브락스 공방전이 대표적이고 심하면 1천년이 넘게 전쟁상태인 행성도 있다. 카오스 스페이스 마린 중 데스 가드와 아이언 워리어가 소모전에 능하다.
6.1. 유희왕에 등장하는 카드
| <nopad> |
| 한글판 명칭 | 소모전 | |||
| 일어판 명칭 | 消耗戦 | |||
| 영어판 명칭 | Attrition | |||
| 지속 마법 | ||||
| 이 카드가 필드 위에 존재하는 한, 공격 대상 몬스터의 공격력은 데미지 스텝 시, 공격 선언을 한 몬스터의 공격력만큼 내린다. | ||||
유희왕 듀얼몬스터즈에서 마리크 이슈타르에게 세뇌된 죠노우치 카츠야가 사용한 카드. 원작의 로켓 전사가 가진 효과를 재현하기 위해 등장한 카드로서, 여기서는 로켓 전사와 병용하여 붉은 눈의 흑룡의 공격력을 크게 갉아먹는다.
공격하는 몬스터의 공격력의 2배 이하의 공격력을 지닌 공격 표시의 몬스터는 전부 파괴할 수 있으므로 OCG화된다면 전투 파괴를 트리거로 하는 카드들의 효과를 보다 쉽게 발동하기 위한 용도로 쓸 수 있을 듯.
5Ds에서는 비슷한효과를 가진 로켓 파일더라는 장착마법이 등장한다.
7. 관련 문서
- 총력전
- 내전은 대체로 소모전이다. 적과 아군의 경계가 확실치 않으며 사회적 인프라를 파괴해 권역 내 생산량을 크게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각 세력들은 국가 이하의 소규모 집단이므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전쟁에 쏟아붓는 총력전으로 흘러가게 된다.
[1] 성공적인 소모전은 제파 전술처럼 다른 단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2] 한국의 기계화사단이 2선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3] 한국군이 포방부가 된 원인도 이것이다.[4] 참호 기관총 철조망 소총 포병등이 이미 다 있었다. 추가된 것은 드론인데 이건 양상을 바꿀 정도가 아니다. 2차대전 당시 전차의 발달로 무력화되었지만 대전차 미사일의 등장으로 전차의 돌파력이 힘을 못쓰게 되자 돌고돌아 다시 참호전이 되었다. 전차가 무력해지자 공중전력도 무력해졌는데 참호를 파고 버티는 보병을 화력으로만 압도하려는 아이디어는 1차대전 당시에 이미 포병으로 해봣고 실패한 아이디어다. 공군도 어쩔 수 없는 것, 전차가 무력화된이상 결국 보병의 피가 필요해졌다.[5] 독소전쟁 초기에 작전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의문을 가질 힘조차도 모든 군사여력을 작전목표달성에 힘을 쏟은 결과 그 해 겨울 모스크바 앞에서 수많은 독일 정예병이 동계전투복조차 받지 못해 얼어죽었다.[6] 이는 유사시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 교화소의 인원을 투입하여 남하하는 방식을 보여줄 것임을 시사한다.[7] Ju 87같은 급강하폭격기는 이미 전쟁 중반부터 육상전투에 부적합해서 독일에서도 서서히 전폭기에게 밀려나는 상황이었다.[8] 덕분에 얄타 회담이나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에게 만만치 않은 수준의 양보를 해야 했다.[9] 미군이 소프트웨어적으로도 세계적 강군으로 거듭난건 6.25 전쟁등 냉전 시기에 독보적으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이후의 일이다.[10] 이 문제로 일본군이 대공 종결자로 큰 기대를 했던 3식 통상탄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 본인들도 대공포가 부족한걸 깨닫고 주포로 대공산탄을 쏴보자고 개발한게 저 물건이라 무사시는 주포의 40%를 저걸로 장전해놓을 정도였지만, 문제는 본인들 대공포가 제대로된 위치를 잡은 포탑형이 아닌 중간 중간 빈자리에 마운트를 놓고 간이설치한 개방형 대공포들이었기 때문에 3식 통상탄을 쏘면 그 폭압과 폭음에 대비해 아군 대공포 사수들이 이탈하게되고, 그 결과 대공포화가 침묵하게되면서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도와주는 효과까지 내게해줬다.[11] 실제로 방어자의 소모전은 사실상 청야 전술과 별 차이가 없다.[12] 본래 관중 땅은 진시황의 천통을 이루어준 풍족한 지방이었지만 팽성대전이 벌어진 직후 관중에 대기근이 돌았기 때문에 그때에 비해서 유방은 이 덕을 많이 보지 못했다.[13] 이미 천하의 민심이 항우를 버리고 유방을 선택한 지 오래였음에도 초한전이라는 전쟁을 대등하게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항우 자신의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전투 능력 하나뿐이었다.[14] 탱크는 아무리 인구수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없애면 문제가 되는 것이 전투순양함의 천적인 골리앗을 견제하고 전투순양함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15] 여기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으므로 끝까지 버티다가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자원이 바닥났을 때 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