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22:39:47

무기대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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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지원한 국가
2.1. 영국2.2. 소련2.3. 중화민국2.4. 자유 프랑스2.5. 미국이 받은 지원
3. 전후4. 의의5. 추축국의 상황

1. 개요

영국으로 수송되는 무기대여법으로 증원된 병기들 무기대여법을 요약하는 애니메이션

武器貸與法 / Lend-Lease (렌드·리스[1])
We must be the great arsenal of democracy.
우리는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어야 합니다.[2]거대한 무기고(A great arsenal of democracy)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The great arsenal of democracy)라고 해석하면 문제없다. 즉, 민주주의 국가가 곧 미국이니 미국제가 민주주의제라고 할 수 있는 셈.]
- 프랭클린 루즈벨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주장한 미국의 대연합국 물자지원 계획.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을 위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자는 취지였으며 1941년 3월 11일에 시작해 1945년 9월 2일에 종료했다. 그 이후에도 이미 보내기 시작한 건 운송을 계속해서 그 해 9월 20일에 원조를 완전히 끝냈다. 항복한 적성국에 주둔하는 부대를 위한 장비 소요, 중간에 중단할 경우 소요되는 행정 비용이 더 많은 경우 등을 고려한 것이다.

이 사건을 거치며 세계인의 인식에서 미국이 기존의 최강대국이라던 대영제국을 압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초강대국의 권위를 얻기 시작했다. 국제 군사 및 정치의 주도권 역시 기존 영국의 바통을 미국이 이어받았다. 이 법안과 협정은 대서양 헌장과 함께 미국x영국의 "특별한 관계"의 초석으로도 평가받는다.

각종 무기나 군수품 외에도 식량이나 연료도 지원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0년에 주창했던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 정책의 일환이다.

연합군의 주력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소련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자금이 부족했고 거기다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탈탈 털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기 힘들었다. 영국도 1차 대전에 엄청난 전비를 퍼부었고 경제도 엉망이었기에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휘말렸다. 일본군에 대항하던 중화민국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상황에 있었다.

이것을 지난 대전에서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던 데다 당시 과학기술 및 지형적 이점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염려가 전혀 없이 맘 놓고 생산이 가능한 미국의 산업능력으로 커버하는 것이다. 사실 이건 21세기 현재에도 가능한 시나리오고, 우크라이나 주변 NATO 가맹국에 대해서 비슷한 지원을 제공했다. 예외적으로 핵 미사일로 타격할 경우 미 본토도 더 이상 안전지대는 아니게 되었으나, MD 시스템이 있고, 무엇보다 이렇게 되면 그냥 인류멸망이다.

2. 지원한 국가

2.1. 영국

무기대여법에 따른 지원을 최대로 받은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다. 무기대여법 전체 추산 액수인 약 500억 달러 중 영국(영연방 전체)은 313억 달러(전체 액수의 60%) 가량을 받았다. 영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지상 병기뿐만 아니라 군함을 많이 얻어갔는데, 세계 곳곳에 있는 식민지로부터 자원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군함의 가격은 다른 무기 체계와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비싸서 돈은 더 나간 건 덤.

당시 영국의 육군의 상태는 전황과 개발 모두 말이 아니어서 영국 육군은 무기대여법의 영향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전차M4 셔먼으로 통일되다시피 했다.

전황에선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여파로 가뜩이나 경제가 빌빌거렸는데 프랑스에 장비, 병력 대부분을 지원하며 전선을 프랑스까지로만 한정시키려 했지만, 프랑스가 일찍 망하는 바람에 물자와 병기들을 죄다 프랑스에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겨우 몸만 성히 빠져나왔다. 이 결과로 영국 본토 내에서 제대로 무장시킬 수 있는 사단 수가 꼴랑 2개 사단이었다. 조잡한 스텐 기관단총이 나온 이유가 이렇게 무기가 더욱 더 급하게 필요해진 영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개발 면에선 보병전차순항전차로 이원화된 전차 개발 구조의 문제에다가 및 그 결과물도 상황에 쫓겨서 급조하는 등 영 신통치 않아서 자원을 허투루 낭비한 일이 많았다. 단단한 보병전차는 장갑 면에선 그나마 쓸 만했으나, 전쟁 초기 주력 대전차포인 2파운더는 초기에 고폭탄을 만들지 않아서 대보병 능력이 개판이었고 있던 철갑탄에는 작약이 없어서 살상력이 크게 떨어졌다. 6파운더는 그나마 상황이 양호했으나 전황의 악화와 처칠의 명령으로 배치가 지연되었고[3] 결국엔 미국의 75mm M3 전차포를 가지고 새로 주포를 만들었다. 기동전으로 승부해야 할 순항전차는 개발에 삽질에 삽질을 연속으로 해서[4] 노르망디 상륙작전 즈음에 투입된 8번째 순항전차인 센토어 전차, 크롬웰 전차부터 그나마 전차 구실을 할 정도로 쓸만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셔먼과 울버린보다는 이 센토어 전차와 크롬웰 전차도 어디까지나 쓸 만하다는 수준이라 미국과 달리 수송 용량을 확대해 더 무겁고 두껍다는 건 아니었다.[5] 물론 영국의 기술력도 출중하였으므로 셔먼 전차나 M10 GMC 대전차 자주포를 자국에 맞게 개조한 셔먼 파이어플라이M10 아킬레스도 많이 개조해서 전쟁에 보탰다. 이렇게 자국 전차 개발 중 결함과 독일군 폭격으로 줄어든 자국 생산량 때문에 방해없이 꾸역꾸역 생산하는 미국제[6] 전차를 쓰기가 더 나아서 무지막지하게 구입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그 증거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전차의 이름은 스튜어트 전차부터 시작으로 영국군이 많이 지어 줬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하랴.

이 외에 전차 개발에선 미국과 콜라보를 많이 하여 T14엑셀시어 같이 궤도를 공유하는 것을 개발하지만 중전차라는 체계가 이 두 나라에선 운송에 불합리해 결국엔 나가리가 되었고 추가로 순항전차 외 개발에 주력한거라곤 T28을 모티브한 A39 토터스지만 범용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초중전차라서 결국 전황에 하등 쓸모가 없었다.

대전차 주포라면 몰라도 자주포 면에선 부진한 전차 개발보다 더더욱 삽질의 연속이라 25파운더 곡사포를 역시나 결함 있던 보병전차 밸런타인 전차 차대에 얹은 비숍 자주포 같은 망작만 만들다가 영연방의 캐나다가 만든 미국의 M3 리 전차를 기반으로 만든 M4A5 램 전차를 개조해서 만든 섹스턴 자주포만이 영연방의 성공작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그 느린 보병전차 발렌타인 전차를 개조한 비숍 자주포를 쓰다가 미국으로부터 명품 M7 프리스트를 받자마자 전부 다 갈아치우고 전쟁 내내 M7을 썼다. 물론 105mm를 쓰는 M7의 탄환이 영연방과 호환되지 않으므로 더욱 더 돈이 나갔다. 여기에 영국은 미국이 155mm 이상을 쓰는 자주포들을 실전배치한 것에 비해 자국 곡사포 중에서 25파운더를 넘는 구경의 대구경 자주포를 개발, 배치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

화포에선 전차에 쓰이는 포의 고폭탄이 타국보다 위력이 심각할 정도로 낮았는데, 이는 영국제 화포들이 타국보다 고관통에만 올인하다보니 작약량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대전기 주력인 17파운더는 같은 구경인 3인치 주포에 비해서 관통력은 월등하나 포탄이 포압을 견디기 위해 작약량이 그 절반이라서 대보병 능력이 떨어졌으며 이게 문제가 된 사례로는 한국 전쟁 때 캐나다 제25보병여단이 대보병을 위해 M10 아킬레스를 버리고 M4A3(76)W HVSS를 재수령한 것도 그 이유가 작용했다. 이것 때문에 미국의 3인치 포를 수령 및 개조하여 처칠, 크롬웰에 장착하여서 대보병 화력을 키울 수 밖에 없었다.[7]

영국 해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 달라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척의 호위 항공모함 및 호위 구축함을 지원받았다.[8] 게다가 주력함인 전함항공모함도 영국 본국의 수리 및 건조시설이 부족해 대규모 개장이나 수리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면 미국까지 가서 수리 및 개조를 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또 식량 자원을 엄청나게 많이 공급받았는데 바닷바람이 불고 날 좀 풀렸다 싶으면 비가 오는 영국 본토 사정 상 자국 내 생산량으로는 , 보리, 감자 등 주곡 농업 외에는 식량 자급이 거의 쉽지 않았고, 영국도 전쟁 피해를 봤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 지원이 소련보다 더 절실했다. 덕분에 영국 요리는 말 그대로 스팸처럼 쏟아지는 스팸이 지배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영국에서 생산하는 각종 통조림이나 전투식량도 상당수가 미제 완제품,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들여온 원재료를 영국에서 가공처리한 것일 정도였다. 오늘날 불필요한 메일을 일컫는 '스팸메일'이 이런 스팸만 먹던 영국의 사정에서 유래한 말이고 그 유명한 피시 앤 칩스를 생선 대신 스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러한 무기, 식량 지원의 대가로 영국은 마그네트론 기술, VT 신관, 전투기 엔진 설계도 등의 최신 기술들과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 카리브 해 제해권을 미국에 넘겨줬다. 미국의 국력으로 첨단 장비들을 대량생산하여 수상기, 폭격기 등에 붙여서 대잠초계기를 만들었고 U보트로부터 제해권을 되찾아오는데 성공하긴 했다. 전후 영국의 자존심 때문에 2000년대까지 프리깃 한두 척을 상시 마약 등의 밀수 단속 임무차 카리브 해에 초계함으로 배치해 두고 있었지만 현재는 철수시키고 미국 해안경비대에 넘겨 버렸다.

물론 영국이 받아먹기만 하지는 않아서 영국이 소련에 제공한 물자도 무시할 수준은 못 된다. 영국은 소련에게 전차 5천 대 이상과 대전차포 5천 문 이상, 호커 허리케인 3천 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1100대를 포함하여 항공기 7천 대 이상을 지원해 주었다. 여기에는 대전기 그 어떤 독일기와도 대등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Mk.IX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군화 1500만 켤레와 전함 1척을 포함한 해군 함정, 소나와 레이더 2천 세트 등을 총 3억 8백만 파운드에 식량과 재료로 1억 2천만 파운드로 약 4억 3천만 파운드를 제공하였다. 당시 환율을 이용하여 달러로 환산하면 17억 2천만 달러로 적지만, 본인들도 얻어먹는 처지에 미국이 준 양의 16%를 준 것이다. 게다가 항공기의 경우는 질적으로도 우수했다. 물론 독소전의 환경은 저공에서 싸우는 일이 많기도 했고 소련의 지형에서 굴리기는 불편했던지라 미국의 P-39 에어라코브라가 활약하는데 그쳤다.[9]

2.2. 소련

파일:미국과 소련.jpg
미국이 소련에 제공한 주요 군사장비 목록
영국이 소련에 제공한 주요 군사장비 목록
소련은 109억 달러(21%) 가량을 무기대여법으로 지원받았으며 이는 영국의 1/3이다. 그러나 이 계획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지원물자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전인 대전 초반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광대한 국토와 진흙장군동장군 등 자연환경과 지형지물로 인해 독일군이 보급과 기동을 방해받고 더 극심하게 누적되는 피로로 전투력이 감소된 상황에서 진격하며 총체적인 피해를 보고 있던 겨울에 유리하게 반전된 위치에서 수적인 우세와 인력빨로 반격을 가해 1942년 1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일시적으로 독일의 공세를 꺾고 패퇴시킨 바 있지만, 독일군은 여전히 건재했고 1942년 봄이 되자 청색 작전을 개시하며 다시 소련 남서부를 향해 거대한 공세를 벌였으며 소련은 1941년 이미 식량 생산의 70% 이상을 담당하던 우크라이나를 상실했기 때문에 식량 자급이 불가능해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무기대여법으로 받은 식량으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서 독일군과 소모전을 치르며 최대한의 지연전을 벌이면서도 소련 회심의 대규모 반격 작전인 천왕성 작전이 준비될 때까지 버틸 수 있었고 결국 천왕성 작전을 성공시키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는데, 특히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군이 응집할 수 있는 수송능력과 통신능력에 도움을 주었다. 만약 이러한 도움이 없었으면 소련군의 기동력 부족 및 전력집중의 한계로 반격의 규모와 진격속도가 현실보다 느려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33만여명의 추축군을 포위하는 수준의 전과는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 소련군의 반격마다 독일의 남부집단군의 유의미한 생존이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렌드리스로 소련 공군의 건설을 책임졌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다양하고 총체적인 지원을 받아 제병협동까지 가능해졌으며 이를 특유의 인력 동원력에 결합시키고 미국 공군의 독일 본토에 대한 맹폭과 독일 공군의 소모에 더해 서부전선의 개전에까지 힘입어 결국 독일을 밀어내고 베를린을 함락시키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스크바 공방전 이전에도 이미 영국발로 1941년 9월부터 연말까지 트럭 1400대와 전차 600대 가량, 항공기 800대 남짓, 기타 물자 수만 톤의 물자 등이 소련으로 성공적으로 보급됐다. 물론 나중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이 들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품목들을 모두 하나하나 거대한 단위로 지원받은 것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후 스탈린의 반격이 주춤하면서 다시 나치와 소련은 공방을 이어갔지만 어쨌거나 나치 독일의 기존 작전 계획에 따른 계획은 1942년 1월에 종말점에 다다랐고 이후는 사실상 소모전으로 돌입한 상황이었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1차 진격 목표로 삼았던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 일명 A-A 선으로 불리며 이후 나아가 우랄 산맥 서쪽의 유럽 러시아 지역을 점령하고자 했는데 그 면적은 인도 아대륙(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맞먹는 광대한 영토로, 이론적으로 수백만 병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1 ㎢당 고작 병력 두세 명을 배치할 수밖에 없어 중일전쟁 때 일본 제국군과 마찬가지로 철도와 도시에만 수비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즉,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 정도까지가 독일의 공세역량 한계였으므로 미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도 소련이 독일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멸망해 버리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은 이를 자체 생산으로 충당했어야 했을 것이며, 이는 이후 이어질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들의 요소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에 랜드리스가 없었더라도 독일군의 청색작전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낮지만 이후 소련군의 반격공세에도 많은 지장이 존재했을 것이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지원은 무기대여법이 미국 상원을 통과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Pre Protocol이라고도 하는 1941년 6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고옥탄 항공유 14만 톤을 포함해 물자 약 9200만 달러어치를 지원한 것이 시작이었다. 전체에 비하면 큰 지원은 아니었지만 모스크바 코앞까지 밀렸던 절망적인 상황인 만큼 가뭄의 단비 같은 도움이었다. 다만 이는 원자재와 연료 등에 한정이었고 때문에 무기대여법으로 소련이 전쟁 초반을 버텨낸 것은 아니다. 1941년 9월부터 시작된 렌드리스 항로는 1942년에는 독일군의 방해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이후인 1943년 2월 이후부터 안정적으로 보급되었다. 기나긴 보급선인 이란-태평양 루트를 통해 보급되었다.

소련이 연합국에게 도움받은 가치를 단순히 액수로만 계산한다면 1942년 13억 7600만 달러, 1943년 24억 3600만 달러, 1944년 40억 7400만 달러였다. 무기대여법 총액 중 11% 가량만이 1942년에 지원되었으나 이 11%의 품목들을 살펴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을 승리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은 소련 전체 식량 생산량 중 70% 이상을 책임지던 우크라이나 지역의 일명 곡창 지대를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1942년 말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렌드리스로 고가치 식량 지원이 없었다면 심각하게 진행되어 아사자가 속출하였을 수준의 식량 위기로 인해 지연전이 가능할지도 의심스러웠던 소련을 미국이 렌드리스로 핵심적인 고칼로리 가공식품들과 전투식량을 책임지는 수준으로 지원하며 구해냈다.

또한 렌드리스는 소련군의 전술에도 크게 기여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전술적인 기동에 필요한 트럭부터 무전기를 비롯해 뭐 하나 기본적인 것을 제대로 가진 게 없는 소련 육군의 전술을 뒷받침하고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은 소련 공군을 독일군과 전술적으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무에서 유로 창조해준 것을 넘어서 반격까지 가능하게 만들어 줄 정도로 지원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지원액이 89%를 차지하는 것만 고려하는 짧은 생각으로 소련이 무기대여법 없이도 독일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꽤 많다.[10] 그러나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소련이 처한 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또한 렌드리스 없이 소련이 독일을 스탈린그라드에서 막아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부터 늦게나마 총력전 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에 소련이 렌드리스의 부재로 독일군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설 수가 없어 제대로 타격을 입힐 수가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계속 시간을 끌었다면 소련이 계속 버틸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은 아무리 소련군을 과대평가해줘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소련에게 내려줄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인 것이다.

물론 소련은 최선을 다했다. 독소전 초기 렌드리스가 비교적 미비한 시기에 급격한 전선 붕괴에 대비하여 강력한 최신 중형전차인 T-34 공장을 후방으로 이전했다. 전차가 부족한 최악의 상황을 맞아 값싼 고기방패인 T-60 경전차를 전간기 + 전쟁 초기 독일 전차의 총생산량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하면서 필사적으로 버텨내며 소련의 기상을 보여줬다.[11] 하지만 독일에게 점령당하거나 독일 공군의 폭격 사거리 내에 노출된 지역의 기반 시설들은 대부분 수 년 내로 다시 복구가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고 렌드리스가 본격화되고 서방 진영의 반격이 본격화된 대전 중반 이후에는 반격 여력뿐만 아니라 서민의 생존마저 렌드리스에 거의 대부분 의존해야 할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 영향은 대전 말엽까지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이 부재하는 상황에선 소련은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만 장기적으로는 최대 독일에게 점령당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독소전쟁 개전 이전의 소련 영토 권역 진입에 머무르는 데 그쳤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디까지나 문자 그대로 나치 독일과 소련만이 전쟁을 순수하게 벌이고 있었을 때의 경우이고, 년도별 렌드리스 물자 내역과 영향을 상세하게 연구한 데니스 하블랫(Denis Havlat)은 렌드리스가 없었을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까지는 실제와 큰 차이 없이 흘러간 후 서부전선에 상륙한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는 동안 버티다가 독일군이 서부전선으로 대규모로 재배치되는 틈을 타 조금씩 전진하는 식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즉, 랜드리스가 있건 없건 결국 나치 독일이 미국과 영국에게 물량전에서 밀려 힘이 빠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베를린까지 다 먹어버리고 폴란드까지 진격하는 연합군을 상대하려고 무리하게 많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빼다가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소련의 물량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란 소리다.

당시 무기대여법이 체결되고 소련과 미국은 가장 가까운 북극항로를 이용할 계획을 짰다. 대서양을 따라서 북극해로 진입한 후 소련의 북쪽 극지방을 따라 핀란드 동쪽 소련 영토였던 무르만스크 지역이 미국산 전시물자의 최종 목적지였다. 소련과 미국은 양측의 배를 동원하여 함께 전체 무기대여법 물자의 23%를 이 루트로 옮겼으나 계절적인 제한과 독일 해군의 공격으로 운송 중 전체 물자의 7%를 잃어버렸고, 이 수치는 대전 총합이므로 당연히 독일 해군의 유보트와 폭격기 세력이 그나마 건재하던 초기에는 소모율이 훨씬 높았다. 이 루트는 노르웨이크릭스마리네루프트바페를 거의 다 때려잡은 대전 후반부에 들어서야 큰 루트가 되었지 당장 급한 1941~1943년에는 주 루트로 삼기 힘들었다. 즉 그동안 전시물자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소리다. 결국 2번째로 짧은 태평양 루트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이쪽도 태평양 전쟁이 터졌고 미국 배의 운송이 불가능해졌다.

지중해-수에즈 운하 라인은 지중해에 도사리고 있는 추축군 세력, 특히 독일 공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방해 때문에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직접적인 보급도 부담이 심했으므로 택하기 어려웠고, 태평양을 지나 북극해로 가는 루트는 개척하다시피 해야해서 쓰기 어려웠고, 태평양 직항로의 경우 소련의 대일전 참전 이전까지 소련 국적 선박 한정으로나마 쓸 수 있었으나 명목상 중립을 유지하는 사이였던 일본이 비전투물자의 수송만 허락했기에 전체 물자의 절반에 달하는 막대한 양을 수송하긴 했지만 군수품은 하나도 수송하지 못했다. 결국 영국과 소련이 함께 이란을 점령한 뒤에는 인도양의 이란에 보급품을 내려 육로로 소련에 수송하는 루트를 사용했다.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안전했지만 너무 심각하게 멀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될 즈음인 1943년 중반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과 시칠리아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탈리아 전선이 생기며 지중해에서 추축국 세력을 정리하고 나서야 지중해-수에즈 루트가 제대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이 루트는 주로 미국이 직접 사용하여 전체 무기대여법 물자 중 27% 가량을 옮겼다.

소련에 지원된 물자 목록.[12] 끝이 없는 글씨에 정신이 멍해진다. 해당 통계에서 집계된 총액은 군수물자 46억 달러, 민간 물자 48억 달러이고 나머지 10억 달러는 인건비이다. 이마저도 공식 목록이 아니라 담당 장교가 훗날 본인이나 소련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이므로[13] 실제 양은 더 많았을 것이다.

농경과 식량 분야도 지원을 받았다. 일단 소련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긴 했지만 개전 초의 대패배로 주요 곡창 지역인 우크라이나를 상실하여 식량 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공장이야 어찌저찌 우랄 산맥 근처로 옮겨 어떻게든 굴릴 수 있다지만 식량은 특성상 기후 및 토질이 맞아야 생산이 가능한데 시베리아는 농업에 부적합하다. 제대로 된 농기계도 없이 인력부족인 상황에서 남은 농경지만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찌어찌 무기를 생산한다 한들 사용할 사람이 굶어 죽으면 생산한 의미가 없다. 게다가 평시가 아닌 전쟁 때는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무거운 군장을 휴대해야 해서 일일 칼로리 소모량이 4천 kcal는 기본이고 심하면 6천 kcal를 넘어가니 식량 배급량을 줄이는 편법도 쓸 수 없다. 결국 미국에서 트랙터콤바인 등 농기구를 지원해 주고 곡물과 채소의 종자는 물론 조경과 가축의 방목에 필요한 잔디 종자와 비료까지 싸그리 보내준 덕분에 간신히 기초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식량 분야를 따져보자면 통조림 같은 저장물자나 전투식량은 미국제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식량 지원은 428만 1,910톤으로 소련이 필요한 전체 식량의 무려 25%에 달했다. 군인은 우선순위도 높거니와 전쟁 중에는 평시보다 훨씬 많은 열량을 소모하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줄 식량을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미국이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저 부족분은 모조리 민간인에게 덮어씌워졌을 것이고 그랬다면 민간인 아사자가 수도 없이 쏟아졌을 것이다. 단순히 톤수로만 계산해도 식량 400만 톤은 민간인 약 1200만명이 1년 이상 버틸 수 있는 양이다.

단순히 양만 따져도 어마어마한데, 여기에 더해 미국이 보낸 식량은 당시 소련의 능력으로는 생산하거나 조달할 수 없던, 전략적으로 고가치의 식량들만 골라서 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본이 되는 곡식은 물론이고 혹한지에서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지방을 공급해 주는 유지류, 무게 대비 칼로리가 높고 저장이 용이하며 유통기한까지 긴 고기 통조림이나 초콜릿, 전투식량 등 알짜배기들만 보냈다. 즉 식량 위주로 이루어지던 초기 무기대여법 물자 또한 초기를 견디기 위한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가치가 있는 지원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때 소련이 받은 물품으로는 모든 소련군이 4개월치 이상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14], 소련군 장병들의 보급에는 미국이 준 스팸 통조림도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반에 소련군이 막장 상황에 빠져서 식량 배급이 극도로 부실할 때 장병들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나눠준 게 허쉬 초콜릿이었다고 할 정도. 게다가 기호품도 공급했기 때문에 미국이 준 콜라를 마실 수 있어서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같이 콜라를 입에 달고 다닌 사람도 많았다. 위의 무기대여법 물자 목록 링크에 따르면 고기류[15], 밀가루, , , 버터식용유[16], 치즈, 동결건조 계란[17], 설탕, 건조 채소와 같은 주식류 외에도 주스, 건조 우유/분유, 바나나, 사과, , 파인애플, 양파, , 견과류, 향신료, 샐러드 드레싱, 당밀, 커피, 사탕[18] 전쟁 당시 소련의 능력으로는 생산하거나 조달할 수 없었으나 소련인들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모든 종류의 식량을 지원하였다.

피복 분야를 살펴보면, 미국이 준 전투화 약 1,400만 켤레는 모든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고, 함께 온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의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질이 좋았다. 그 외에도 군복 2,100만 벌, 혹한지용 동계 군복 500만 벌, 항공조종사 조종복 100만 벌, 양모 4만 톤, 각종 가죽 270만 제곱미터, 구두용 가죽 2천만 톤 등을 제공했다. 식량의 예에서처럼 여성복[19] 및 부츠, 아동복 및 아동용 장화, 방수복, 간호복, 바람막이 자켓, 작업용 장갑, 가죽 벨트 등 오만잡다한 종류를 볼 수 있다. 소량이긴 하지만 재봉틀도 보내는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의약품 분야에서는 수술 도구 7백만 달러어치, 처방 의약품 7백만 달러어치, X-레이 기기 등을 보내주었다.

사진 및 영화 촬영 분야에서는 촬영용 카메라와 필름, 감광제와 편집용 기구를 보내주었다.

경공업 뿐 아니라 중공업 분야에서도 선반, 밀링 머신, 드릴, 제련 설비, 압연 설비 등을 제공했다.[20]

야전용 전화기 42만 2천 개, 최신형 휴대용 무전기 24만 5천 개가 지원되었다. 이전까지 소련군은 분대 단위의 소규모 전술 구성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군대였으나 미국으로부터 받은 무전기를 통해 가능해졌다. 이는 이후 T-34-85 같은 소련 기갑 전력의 중핵이 된 소련 전차들에게도 쓰이게 되며 독일 기갑부대의 협응능력에 비해 뒤떨어지는 점이 없어지고 독일군과 대등한 위치에서 전투할 수 있게 해 준 핵심적인 지원 중 하나이다.

전력 분야에서는 발전소용 발전기 6214대, 변압기 2만 6천 개, 소형 디젤 발전기 6,285대를 제공했다. 이들 발전기와 변압기는 군수품 공장을 가동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핵심 부품이다. 공작 기기의 모터에 인가되는 교류 전기의 주파수나 전압이 튀면 오작동이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생산품의 품질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이는 21세기의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해군 쪽으로는 오마하급 경순양함, 타코마급 호위함, PT 보트와 각종 상륙정과 상륙함을 지원받았다. 이를 통해 만주 작전 과정에서 북한 지역의 나진과 청진은 물론이고 쿠릴 열도에 상륙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군과 민간인의 생활을 동시에 지탱해 준 수송 분야는 완전히 미국제 트럭들이 꽉 잡았다. 당장 소련군은 미국이 준 트럭지프 40만 9526대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한다. 이미지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트럭 숫자는 병력 수에 비해 정말 적었으며 보급 운반을 트럭이 아닌 로 했다. 스튜드베이커 트럭은 디트로이트 공업단지에서 생산된 물건으로 툭하면 험지에서 퍼졌던 소련의 GAZ 트럭보다 좋았고 소련군 내에서의 인기도 대단했다. 또 야포 수송이 가능해져 빠른 공세 전환, 기동방어, 긴급 화력 지원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미국이 준 철로와 기관차 1860량, 화차객차 1만 1181량으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다.이 때문에 전쟁 기간 내내 소련제 기관차, 화차, 철도 관련 시설 생산은 거의 없었고, 기존에 있던 차량과 시설을 보수할 목적으로 가뭄에 콩 나듯 조금 생산한 것이 전부였다. 거기다가 미군의 구형 M1 포병용 중트랙터 8276대도 제공되어 소련군의 야전 포병 수송을 담당했다. 덤으로 석유도 259만 9천 톤을 지급해서 모처럼 받은 수송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막았다.

공군에서는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만 8303대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소련 공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기의 15%를 차지했다. 그 외에도 항공기를 생산, 수리할 수 있게 많은 부품을 지원했다. 항공기 엔진 1만 4902개도 지원했다.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 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영미가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했던 P-39 에어라코브라가 정예부대인 방공군 소속이었으며, 실제 알려진 전과도 엄청난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미제 전투기로 올린 최다 격추수 보유자들도 소련 파일럿들이다.[21]

무기대여법은 식량과 기초적인 원자재, 통신과 철도, 지프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장비를 소련에 대량 공급하여 독소전 초반에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빠르게 회복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펼치게 하는 데 핵심이 되었다. 미국 금속으로 생산한 항공기에 미국 엔진을 달고 미국이 지원해 준 항공유로 띄워, 미국이 준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 준 폭약으로 만든 항공폭탄으로 독일군을 격퇴했다.

그리고 무기대여법으로 지원된 물자 중 본국에서는 성능이 떨어졌다며 크게 저평가받는 병기도 의외로 호평인 경우가 많았다. 일단 전차를 비롯한 기갑차량은 1만 2161대로 소련의 보유량 중 15%를 차지했다. 야포 및 박격포 또한 9만 6천 문으로 소련의 보유량 중 2%를 차지할 정도로 수량이 만만치 않았다. 물론 기관총 13만 1600정과 포탄 32만 5784톤도 함께 왔다. 기존 소련 포탄은 규격이 다르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기대여법으로 받은 전차 역시 전반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밸런타인 전차의 경우 소련 요청으로 추가 생산을 했을 정도이고, 일부 영국산 전차를 제외하면 자국산 전차에 비해 거주성이 좋고 화력 역시 소련제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애지중지했다. 그리고 처칠도 장갑이 튼튼하다는 점, KV-1과 대등한 위력의 주포를 갖추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나쁘지 않은 평을 했다. M4 셔먼 전차도 소련군은 '장갑 괜찮고 속도도 나름대로 빨라 추격전에 좋고 고장도 잘 안 나고 화력도 좋다'고 후한 평가를 했다. 덤으로 의자에 쓰인 인조가죽의 재질이 훌륭하여 셔먼 전차병들은 전차가 격파되면 의자 가죽부터 뜯어냈다고 한다. 반면 차체 높이가 너무 높아 넓은 평지에서 적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 궤도 폭이 협소해 험지돌파 능력이 모자랐단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소련 병사들이 서방 전차를 매우 좋아했던 이유는 기계적 신뢰성이 높았고, 소련 전차와 달리 편의성을 신경쓰느라 주포 구경이 작았기 때문에 덜 중요한, 덜 위험한 임무를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셔먼 전차를 대전 말기까지 베를린 포위전, 빈 포위전 등 독일 본토 공략에 요긴하게 써 먹었다. 그냥 셔먼 쓰던 부대에 계속 보급해준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소련 지휘부도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쓸만한 장비니까 계속 보급했을 것이다. 서부전선의 미군은 셔먼 전차로 독일군의 6호 전차 티거5호 전차 판터에도 맞서야 했으니 퍼싱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티거와 판터 등에 맞설 전차로 자국산의 IS-2 같은 중전차나 ISU-152 등의 고화력 자주포들이 있었기에 셔먼의 장갑과 화력에 만족했다.

소련 보병의 제식화기들이 미국에서 생산되기도 했는데, 이는 총기 제작 및 소유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미국 특성상, 미국의 다양한 총기 공장들이 1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전세계 각국의 제식화기를 계약을 맺고 생산, 납품하거나 그냥 복제해서 민간에 판매해오던 덕분이다.

대표적으로 모신나강 소총이 미국에서 생산되어 배를 타고 건너가 러시아제 모신나강들과 섞여 배치되었다. 우랄 산맥으로 급히 이주시킨 상황에서 품질이 나쁜 모신나강들에 비해서 상당히 쓰기 편했단 이야기가 있다.[22][23]

소련이 전차나 항공기를 생산하지 못하던 국가는 아니었다. 스탈린의 급격한 중공업 정책 덕분에 전쟁 직전 중공업 부분에선 나치 독일과 2~3위를 앞다투던 국가였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료 이전까지 싸우던 소련군의 전차들은 모두 소련 내 생산품이었다. 주력 전투기 엔진은 소련 엔진을 가져다 썼고 렌드리스로 받은 항공기에 소련 엔진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전차는 소음이 상대적으로 크고, 기계적 신뢰성이 부족해서 렌드리스 받은 전차들을 무고장이라면서 좋아했다. 미국제 전차에는 소련제 전차에 없는 사용자를 배려하는 세심함이 있었으므로, 무기대여법으로 받은 전차의 일부 구성품이나 콘셉트를 참고하거나 그대로 베껴서 자기네들 전차에 적용하기도 했다. 항공기의 경우도 엔진의 환상적인 성능과 빈약한 기체 강도로 질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사용자에 대한 배려도 심하게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영국과 미국이 전투기로는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한 P-39를 제공전투기로 열심히 굴려먹었을 정도.

소련은 대전 내내 물자 더 보내라고 미국에 요청했고 심지어는 미국도 소련이 원하는 물량을 보내지 못한 것도 많았는데, 소련이 요구한 것 중에는 핵무기 개발용 우라늄수소폭탄 개발용 중수까지 있었다. 그 외에도 무기 대여법으로 온 원조품들, 미국의 과학기술 원조를 통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군사, 산업 부분에 써먹었다. 소련 관리와 기술자들 1만 5천 명이 미국의 공장과 군사시설을 방문했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련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것은 가능했어도 독일 영토 내로 진입해 1945년 5월에 베를린을 함락하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세우며 전쟁에서 완벽히 이기는 것은 실현 불가능했다. 미국의 렌드리스가 소련 육군의 기동과 보급을 해결해 줬고 사실상 소련 공군을 건설해냈으며 소련군 육해공 전체의 고질적인 문제인 야전 통신의 미비까지 해결해 제병협동과 대규모 기동이 가능한 군대로 환골탈태가 가능케 한 물자를 책임지고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소련의 식량 위기를 해결해냈으며 수많은 특수 자원들을 지원해주었으며 소련에게 지원한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상당히 높았다.

또한 미국의 지원은 무기보다는 소련이 중공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21만 5천 톤, 구리 27만 톤[24], 황동청동 31만 8천 톤, 니켈, 몰리브데넘, 크로뮴 등 각종 금속[25]과 같은 자원 및 객차 및 화물을 실는 화차를 끄는 기관차 같은 부수기재들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 항공유 하나만 예를 들어도 전쟁 전 소련은 석유는 많이 뽑았어도 기술 부족으로 78옥탄가밖에 안 되는 저등급밖에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것도 전쟁이 발발하자 생산을 못해 미국이 100옥탄가의 고등급 항공유를 100만 배럴 넘게 지원하다가 나중엔 아예 플랜트 시설을 4개, 그것도 철로나 연료탱크 같은 부수기재까지 통째로 같이 넘겨주었다.

상기 언급한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로서만 아니라 소련 석탄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던 돈바스 지역 같은 핵심 광업 및 공업의 중추이기도 했다. 이런 알짜배기 지역을 나치 독일에게 넘겨 버린 소련이 말 그대로 무주공산인 우랄 산맥에서 자력으로 독일의 공세를 막을 수는 있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차트를 보면 대전 중 물자 생산량은 연료를 제외하면 석탄, 철광석, 알루미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소련이 독일보다 열세했다. 그런데도 병기 생산량이 밀리는 것은 무기대여법과 나치 독일의 형편없는 생산관리 역량이 공업 효율을 크게 저해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이 시기를 거친 러시아인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읽을 줄 알았다. 원래 영어와 러시아어는 읽고 쓰는 법도 다르며[26] 그나마 프랑스어와 알파벳을 쓰던 귀족=장교들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대숙청으로 쓸려나갔기 때문에 영어를 아는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으나, 미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주면서 포장 박스와 매뉴얼까지 러시아어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폭탄 설명서를 못 읽는다고 해서 잘못 작동된 폭발물이 피아를 가리진 않을 테니.[27]

생존에 당장 필요한 물자뿐 아니라 인형, 영사기(무성, 유성), 축음기[28]와 레코드판, 놀이동산과 놀이터용 기구, 아동용 책, 피아노와 각종 악기, 손목시계, 화장품과 보석, 장신구 등의 사치품까지도 많지 않은 수량이나마 보내주기도 했다.[29] 해당 품목들은 현재의 국방에 관련된 물품만 보낸다는 무기대여법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었으므로 미국은 이런 물품도 보냈다는 사실을 함구했으며 공식 기록으로 남길 수도 없었기에 이를 누가 보냈는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정부의 공식 발주 과정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품목들이므로 민간인들이 물자를 옮길 때 적당히 끼워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에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사치품들, 특히 어린이를 위한 놀거리가 많은 것을 볼 때, 알려지지 않은 배송자들이 전후 소련이 제대로 복구되고 민간인과 아이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기를 바라며 기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3. 중화민국

중화민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국부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내부에 만연한 심각한 부정부패, 이에 대한 연합군 수뇌부의 불만과 불신 등으로 지원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일단 중일전쟁 개전 초의 국부군 정예병력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아직 일본과 동맹을 맺지 않은 나치 독일이 대량의 무기를 수출하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같은 고문관들까지 파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문관들이 철수하고, 30개 사단 중 8개만 무장이 완료되었고 나머지는 편제에 맞게 구식 무기들로 채웠는데, 그나마 이 8개도 포병, 공병, 화학 장비와 군마, 차량이 부족했다고 한다.[30] 이들조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량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국민당군은 그 이후로 미국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반면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아직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이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영국령 버마가 일본에 함락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기껏 가능한 게 당시의 영국령 인도에서 티베트 상공을 통한 수송이었다. B-29의 초기 작전의 상당수 소티가 폭격임무가 아닌 중국을 향한 무기 수송에 할당되었다. 폭탄 적재창에 폭탄 대신 구호품/군수품을 적재한 것. 또한 중국에 배치된 미군부대(주로 공군)에 대한 군수품 수송에도 할당했다.

이러한 항공 수송으로 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기술적으로 수십 톤짜리의 주력 전차를 공군의 전략 수송기로 실어나를 수 있게 된 것도 베트남 전쟁 이후이고, 그것도 1회에 고작 1-2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총기나 야포류나 조금 줄 수 있었고 그나마도 사고가 많아서 다 주지도 못했다. 대표적으로 에베레스트 산으로 인식되는 티베트 고원의 첩첩산중의 험악했던 수천 m의 산들과 악명 높은 계절환경에서 많은 추락이나 불시착이 발생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지역은 전후에 버뮤다 삼각지대에 버금가는 미스테리 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이집트 방위를 위해 낼름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기껏 지원 온 무기들도 조지프 스틸웰이나 클레어 셰놀트를 비롯한 미국인들이 독점했지 정작 장제스는 총 한 자루 받아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 중 셰놀트는 장제스와 매우 원만한 관계였고 중국군에 협조적이었지만, 스틸웰이 문제였다. 그는 중국군 전체에 대한 통수권을 넘기라는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고 심지어 중국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며 시종일관 장제스에게 잔소리나 해대며 떽떽거리던 무능한 양반이었다. 스틸웰과 그의 군사고문단은 중일전쟁의 양상이나 중국군의 전술[31] 및 적인 일본군의 능력은 무조건 폄하하면서 보급받은 것을 자기 휘하 부대에 꿍쳐놓고 버마 탈환 준비에나 힘썼다. 이 때문에 열받은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이 적은 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스틸웰 때문이라고 잡아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좋지 않던 둘의 사이는 더 나빠진다.

그나마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은 꽤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약간의 M4 셔먼과 스튜어트 전차 100대로 무장할 수 있었지만 수백만의 일본군이 주둔한 중국 본토의 사정은 가히 절망적으로,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틸웰의 버마 공략 지원을 위해서 없는 물자와 병력을 차출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의 정치계에선 감리교도인 장제스 부부와 쑹메이링의 로비 때문에 친중파가 꽤 생겨난 반면에 미군 안에서는 국부군을 싸우지도 않는 군대로 얕보고 경멸하는 시각이 퍼져 있어서 국민당을 왜 지원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스틸웰 등의 미국 장교들은 "국민당은 왜 방어전, 소모전에만 일관하고 왜 대규모 야전을 하지 않는가, 국민당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벌였다는 분투는 국민당의 거짓말이다"라고 중국을 깔보았는데 이들의 편견 때문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우선순위는 자꾸 밀리게 된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장제스와 미국/영국은 자꾸 충돌을 거듭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나마 중국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미국 정치계에서조차 반중 감정이 퍼지면서 상태는 심각해졌다. 게다가 스틸웰의 대표적 실책인 대륙타통작전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니미츠대만 공격론이 힘을 잃어 중국을 지원해야 할 전략적인 이유마저 없어지게 된다.

그나마 버마가 탈환되고 무능하고 오만방자한 스틸웰을 대신하여 성격이 부드럽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부임한 이후로 상태가 꽤 나아져서 중국군은 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전열을 회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셔먼 전차를 비롯해서 미국식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정예부대들은 중국 남부를 겨냥한 일본군 10만 대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군 3만 명을 물리쳤다. 이후 미국은 나치를 패망시키고 나서 조지 패튼을 비롯한 미국의 장군들과 지상군 파견을 비롯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32] 그 전에 일본이 만주 작전과 핵폭격을 겪고 항복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한편 공산당에 대한 지원 떡밥도 나온 바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장제스 대신에 자신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싶어했고 미국 특사들을 옌안에 초청하여 그들을 구워삶아 미국이 중국에서의 대화 파트너를 장제스에서 자신으로 교체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마오쩌둥은 항일에 거의 힘을 쏟지 않으면서 정작 장제스는 항일을 도외시한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렸고, 국민당은 부패하고 무기력하지만 공산당이 지배하는 옌안은 민주적이고 활기차다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미국인들을 꾀려 했다. 스틸웰도 자기 말 안 듣는 장제스를 압박하기 위해 공산당에게도 무기를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를 약올렸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와 스틸웰의 사이는 더욱 틀어졌고 결국 해임당할 처지가 된 스틸웰은 공산당 지원을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장제스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임인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공산당이 중국의 유일한 정권인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흔드는 일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취함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완전히 물건너갔다.

정작 국민당이 엄청난 양의 지원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이 끝난 후로, 해리 S. 트루먼 행정부는 40~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국민당에게 해주지만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실패한 국민당이 민심을 잃은데다 장제스가 파멸적인 만주 진공 작전을 수립하면서 국공내전의 패배의 단초를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에게 쥐어졌던 상당량의 미제 무기들은 국공내전에 좀 사용되다가 국민당의 전열이 붕괴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갔다. 이들 물자의 일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미군을 향해 불을 뿜기도 했다.

심지어 베트민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베트민의 바주카포, 박격포, 무반동총을 상대해야 했다.

2.4. 자유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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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프랑스군 제 2 기갑사단에 지원된 M4 셔먼 중형전차들

2.5. 미국이 받은 지원

반대로 미국이 다른 연합국으로부터 -미국이 지원한 양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긴 했지만- 물품이나 자원을 원조받기도 했다.

영국으로부터 받은 오스턴 K2/Y 구급차량과 B-17에서 사용되는 항공 점화 플러그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영국제 정찰기 버전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경폭격기, 캐나다제 페어마일 B 대잠박격포, 인도제 석유화학제품이 미국에 공여되었으며 호주와 뉴질랜드는 미군을 위한 식량 지원을 했다.

자원이 풍부한 소련은 미국에 30만 톤의 크롬 광석, 3만 2000톤의 망간 광석, 대량의 백금, , 목재 등의 자원을 지원했다. 또 고무 공장을 세워준 대가로 고무를 공여하기도 했다.

3. 전후

사실 이 계획은 완전한 공짜는 아니다. 전쟁이 끝나면 그 기간 동안 손실되지 않은 지원품은 미국에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지원품을 직접 돌려주던지 아니면 돈으로 환산해서. 또 랜드리스 기간이 끝난 후 도착한 물품 또한 의회의 인가를 받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공짜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후 물자가 부족한 국가들은 상당량의 지원품을 계속 쓰길 원했고 또 미국은 전쟁 중에 만들어졌지만 보내주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미국에 남은 상당량의 보급품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10분의 1 정도 가격에 대량의 지원품을 넘겨주었다. 영국의 경우 전체 지원품의 대략 3분의 1이 이 대상이었다 (3분의 2는 공짜였다는 얘기). 물론 엄연히 대가가 달린 만큼 영국과 소련은 갚아야 했고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부족하게라도 다 받아냈다. 영국에게는 이자율 2%에 5개월 유예기간 후 50년 상환 기한을 주었다. 심지어 적대국 소련조차도 결국 갚긴 갚았다. 랜드리스 대상 나머지 30여 개국은 돈 대신 기지 부지 제공이나 “전후 민주적 세계 질서를 위한 협력”을 조건으로 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 때와는 달리 미국이 떼돈은커녕, 제값으로 받은 게 거의 없어서 손해보는 장사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이 전쟁 피해 복구도 벅찼기에 제값을 받을 거란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무기 같은 경우 엄연히 빌려주는 거였던지라 전쟁 끝나고 무기를 돌려받아야 하는데, 전쟁이 끝나서 새로 생산한 무기도 창고에 넘치는 판에 연합군이 쓰던 중고무기는 돌려받을 필요가 없어서 거의 헐값만 받게 된다. 당장 영국부터 군수물자들을 10% 가격으로 받았다. 이 정도면 미국 입장에선 원가는커녕 사람들 인건비도 안 나온다.

루스벨트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를 설득할 때 '무기를 빌려준 다음 다시 그 무기를 돌려받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 때 나온 비유가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불이 번지기 전에 호스를 빌려줘야 한다는 것. 한편 반대편은 이 법안을 '호스가 아니라 껌을 빌려주는 것'에 비유해 '씹던 껌을 돌려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33]며 비난했다. 사실 유럽 국가들이 전후 피폐해질 거라는 걸 감안하면 원금이나 겨우 돌려받아도 다행이기도 했다.

1945년 9월 2일, 전후 피폐한 영국은 갑자기 원조가 끊기자 미국에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쓰고 남은 물건을 미국이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떨이로 팔고 나서 50년 단위로 상환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는데, 그 '10분의 1'로 떨이 판매를 했다. 이것과 1941년 이전의 지원대금, 그리고 1946년 종전 이후 추가로 빌린 돈을 합쳐 당시 파운드화로 대략 11억 가까이 됐다. 영국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전쟁 이후 긴축에 힘써야 했고, 상당히 오랜 기간 프랑스처럼 전쟁터가 되지 않았음에도 피폐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후 50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비로소 다 갚을 수 있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비밀창고에 있던 금괴로 땡처리하고 입을 씻었다고 알려졌다. 루머 같지만 사실이다. 1942년 영국의 HMS 에딘버러 함이 미국에 보내는 금괴 4.5톤을 나르는 중 독일 잠수함에 침몰당했고, 이 금괴는 1981년, 1986년에야 인양되었다. 1948년에 소련이 1.7억 달러로 전부 변제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으나 미국은 전쟁 중 소련에 보낸 물자 값어치 중 전쟁 손실 예상 50%를 공제한 가격의 10분의 1인 13억 달러를 요구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1951년에 8억 달러를 변제하라고 요청하자 소련은 3억 달러만을 변제하겠다고 해서 또 파토가 난다. 결국 1972년에 소련이 7.2억 달러를 갚기로 미국과 최종 합의했다. 그런데 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하는 바람에 변제 주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 러시아가 잔액의 61.34%를 담당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구성 공화국들이 나누어 책임지기로 했으나 발트 3국,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서명하지 않았다.[34] 그러나 1993년 4월 2일 러시아가 관련 채무를 전부 책임지는 것으로 서명하여 무기대여법 관련 채무는 전부 러시아가 책임지게 되었다. 2000년에 6억 달러를 변제하고 경제가 나아진 2006년 8월 21일에 전액을 변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파리 클럽을 통해서 소련 시절 서방에 졌던 빚을 전부 갚은 것이다.

소련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1. 1945년 기준 113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소련에 유상 대여
  2. 1947년 미국은 소련에 영국의 가격 조건 (원래 가격의 10%)을 적용, 13억 달러 상환 요구.
  3. 소련은 1.7억 달러만 상환할 수 있다고 대응.
  4. 이후 소련이 30년간 생떼부린 결과 닉슨 대통령 시기 "7.2억 달러를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합의.
  5. 7.2억 달러를 3차례에 걸쳐 상환하기로 합의 후 1973년까지 2회에 걸쳐 4.8억 달러 상환.
  6. 다시 땡깡질. 2006년에 파리클럽 채무협상을 통해 완납 처리.

계산
  1. 1945년까지 113억 달러 규모의 물자 지원
  2. 1973년 기준 269.8억 달러에서 총 4.8억 달러를 상환한 후 잔금 265억 달러.
  3. 2006년 기준 $1222.4억 달러의 잔금 중 2.4억 달러를 상환하여 1220억 달러가 남음.
    (물가상승률 환산 기준. 순수 원금만 적용한 것이니 단순히 참고만 할 것)

그래서 2006년 기준 1249억 달러 중 29억만 상환한 후 완납 처리. 이렇게만 보면 소련이 공짜로 받아먹은 것 같지만 소련은 2차대전 당시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을 모두 잃고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까지 밀려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고 군인 약 870만, 민간인 약 1-2천만 명의 엄청난 피를 대가로 치르는 지옥도를 걸어[35] 한 명이 쓰러지면 열 명이, 백 명이 그 자리를 채우는 방식으로 다시 밀어붙여 끝끝내 독일 국회의사당에 깃발을 꽂은 나라이다. 미국도 이런 피 쏟아지는 희생을 감안해 빚을 갚은 것으로 치고 소련을 외교적으로 파렴치한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여라는 의미답게 소련도 양심없게 땡깡만 부려댄 건 아니고 대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돌려준 물품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타코마급 호위함 약 30척중에 27척을 돌려받았다.[36] 물론 애초에 전액을 환불받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정도만 돌려줘도 미국은 만족했다. 그외에도 전후 행방을 알 수 없는 대여된 무기들도 돌려받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소련도 신형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전쟁중에 사용된 무기들은 예비역으로 돌리거나 신생국에 팔면서 굳이 대여비를 내가면서 미국산 무기를 유지시킬 이유가 없었고, 미국도 잠재적 적성 국가로 경쟁 관계가 되다보니 부품 구하기도 쉽지 않아 유지보수 문제도 겹친다. 미국 또한 소련의 군사력에 도움을 주는것보다 회수하는 것이 낫다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중화민국은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서 갚을 여력은 커녕 추가적인 도움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에 미국이 빚 독촉을 사실상 포기했다. 중화민국도 소련처럼 군인 400만여명에 민간인 1800만여명의 희생자를 내며 일본 제국을 몰아냈기에 미국 입장에서도 빚을 갚은 것으로 치고 중화민국을 파렴치한 취급하지는 않았다. 한편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 하수인인 국민당이 진 빚 따위 알바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했다.

그 외에도 무기 대여를 받은 국가들은 전쟁 이후 물자 지원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대금 지불 대신으로 미국에게 병기나 식량 등의 물자를 지급하거나, 기지 부지 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만 보면 사실상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이 미국의 채무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허나 독일이 더 오래 저항하거나 미국에 선전포고 안 했으면 그만큼 빚이 더 늘어났을 것을 생각해 보면 그나마 독일이 선택을 엄청 잘못하는 바람에 최악은 피한 것.

4. 의의

당시 강대국이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무기대여법으로 들여온 미국의 무기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산 무기에 익숙해진 유럽의 조병창들과 군인들의 경험은 훗날 북대서양 조약 기구 창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산 무기를 오래 쓰다 보니 길들여져서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미국식 규격이 새로 도입되었지만 별 문제없이 미국식 규격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런저런 마찰이 있어서 7.62×51mm NATO 탄과 관련된 삽질등이 있기는 했다.

전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피폐해진 유럽에 부흥자금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까지 실시했으며, 무기대여법과 마셜 플랜은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미국 거시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연합국의 윈윈게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기술 교류도 이루어졌다.[37]

가장 큰 의의에 대해서는,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는 가정 하의 대체역사 시나리오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나치가 워낙 꽉 막힌 집단이기는 하지만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공업력으로도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선전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추축국의 실제 기본 공업력은 소련에게 전혀 밀릴 일이 없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추축국은 영국과 러시아의 유럽 영토 일부를 제외하면 정복과 동맹, 우호적인 중립 등을 통해 전 유럽의 자원과 공업력을 거의 다 흡수한 상황이었다.[38]

물론 소련의 경우 공장설비를 포함해서 뜯어갈 수 있는 건 모조리 뜯어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모든 설비를 뜯어갈 수 있던 것도 아니고 공장은 뜯어간다고 하더라도 지하에 매장된 자원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는 소련의 공업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뭐, 석탄은 탄전에 불을 붙여버리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 탄전이 수백 년간 지속해서 타기 때문에 인근 지역은 수백 년간 못 쓰는 땅이 된다. 물론 독소전쟁에서의 독일은 그런 걸 신경쓸 리가 없었다. 다만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이 얻은 이익은 다른 점령지보다는 적은 건 사실인데 설비를 뜯어간 것 뿐 아니라 인종청소를 한다고 주민들을 마구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비숙련공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닥치는대로 찍어내다 보니, 규모의 경제에 의한 숙련에 의해 갈수록 더 나은 것이 찍혀 나오는 소련에 비해 독일의 생산효율성은 심하게 떨어졌다. 일본도 비숙련공을 동원했는데, 문제는 소련과는 달리 규모의 경제가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숙련공의 노하우에 기대해야 하는 정도가 소련보다 더 큰 데다가 결정적으로 숙련공은 전쟁에 밀어넣고 비숙련공은 공장에 밀어넣는 맛이 간 방법을 써서 갈수록 질이 좋아지기는커녕 오각형 너트가 나올 정도로 질이 더 형편없어졌다.[39]
거대한 화포들과 8,8cm FlaK을 생산하는 나치 독일 군수공장의 모습
독일의 전차 및 항공기 생산 공정 모습
독일은 독소전쟁 이전에 이미 총력전에 준하는 태세로 들어갔고, 소련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여 많은 자원과 공업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관료제의 부패 및 기업들의 알력 다툼 등으로 지극히 비효율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히틀러의 명령으로 프리츠 토트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이 개입해서 생산체제를 혁신하면서 무기생산량이 대폭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미 연합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뺏긴 1944년에 접어든 시점이라서 큰 효과가 없었다. 1944년이면 이미 점령지는 다 뺏겨서 지하자원 공급이 제대로 안 되고,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물자의 운송과 생산이 방해받던 시점인데도 오히려 무기생산량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슈페어 군수장관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 독일의 군수경제가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보면 쉰들러 공장에서 생산한 군수품들이 모조리 불합격 판정을 받는데도 계속 생산해서 독일군에 납품하는 것처럼 나오는데,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실제 당시 독일은 품질에 상관없이 모든 군수기업에 일괄적으로 10%의 이윤을 보장하는 병맛같은 시스템이라서 그런 해괴한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건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 당시 독일 경제를 주무르던 재벌들의 환심을 사고 현실적으로 빠른 재무장을 위해선 품질 이전에 일단 대량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입한 시스템인데 이걸 총력전 상황에서도 계속 끌고 가다가 엉망이 된 것이다.[40]

이미 연합군은 추축국 점령지를 탈환했고, 추축국 내부에서도 동맹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소련의 자원줄을 끊어대던 유보트 전력도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오히려 연합군 해공군에 의해 독일의 자원줄은 계속 끊기고 있었다. 공장에는 폭탄이 줄줄이 떨어지고, 장인들 역시 자원이 부족해서 예전 같은 고품질 병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력전에 동원된 비숙련공들이 만든 병기들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고스란히 가져가면서도 비숙련공의 숙련화를 통한 공업효율 증가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없었다. 결국 전쟁 후반에는 개선된 품질의 소련제 병기와 전장에서 끝없이 숙련된 소련 병사들의 힘으로 비효율적인 독일을 앞지를 수 있었다.

결국 소련의 물량에 밀린 독일이 패하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루스벨트의 말마따나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 호스를 제때 빌려주어서 우리집까지 불이 옮겨붙지 않게 된 셈이다.

5. 추축국의 상황

추축국의 핵심인 독일 역시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원유 30%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받았으며, 자잘한 전차부품의 최소 30% 이상을 헝가리로부터 공급받았고, 강철과 같은 물품들의 1/3을 노르웨이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동계장비는 전쟁 내내 핀란드에서 몽땅 공급했다. 왜 독일이 북유럽으로 올라갔겠는가.

보급선의 경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죽어라 노력해 준 덕분에 수월한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독소전쟁 초기 독일의 보급선은 동맹국들이 피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으며 보호해주고 있었다. 독일이 동맹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에게도 패전했을 거라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제해권도 연합군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보급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라프 체펠린을 양도받으려고 했을 때는 독일이 주긴 하겠는데 알아서 가져가라는 식으로 나와서 어떻게 가져올까 머리를 굴리다 결국 포기했고, 티거, 5호 전차 판터, 3호 전차 J1형, 그리고 3호 전차 N형을 구입하려 했을 때도 가져올 방법이 없어서 이미 계산까지 끝내 놓고 (독일에게 다시 대여해 준다라는 명목으로 돈을 일부만 도로 받아낸 뒤) 포기했다. 그래도 아주 실패했던 것은 아니어서, Bf 109 E-7, Fw 190 A-5, Ju 87 완성품과 Ju 88, He 162, Me 262, Me 163의 엔진과 설계도 등 전투기 몇 대와 총기류 한줌, 판처파우스트, 판처슈렉, 흡착지뢰,[41] 산화우라늄을 잠수함편으로 전해주었고 몇몇 시도는 성공했다. 또한 남방으로 내려간 이유 중 하나가 석유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족한 보급을 점령지 및 식민지를 쥐어짜서 충당했는데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커서 문제가 되었다.


[1] 한국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르면 이 표기법이 맞으나 왠진 몰라도 랜드리스라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렌드리스라고 검색하면 한국어로 된 관련 정보가 거의 뜨지 않는다.[2] 연합국 국가들이 다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지 않냐고 태클을 걸 수도 있지만, 여기서 민주주의의[3] 영연방 캐나다에서 램 전차를 만들 당시 6파운더를 주포로 삼으려 했으나 이 명령 때문에 2파운더를 달게 생기자 개발을 미루다가 처칠의 수정으로 6파운더가 통과됐을 때 바로 내놨다. 처칠의 실책 중 하나.[4] 대실패 그 자체였던 순항전차 Mk.V 커버넌터는 조종수가 가만히 있어도 화상을 입었을 정도로 비전투 손실 염려가 컸다.[5] 이를 기반으로 차체를 연장해 17파운더를 장비한 A30 챌린저는 그 평이 좋지 않았다.[6] 미국 크라이슬러사 소유 디트로이트 아스날 공장은 1940~45년 동안 전차 총 2만 2345대를 뽑아냈다. 이 생산량은 2차 대전 중 영국과 독일이 자국 산업을 총 동원해 만든 전차 댓수 2만 4803대, 2만 4360대에 근접했다.# 미국의 전차 공장 중 단 한 곳에서만! 미국이 2차 대전 중 생산한 전차 수는 약 8만 8400대였다. 여기서부터 전세계가 미국과 국력 차가 얼마나 나는지 알 수 있다.[7] 전쟁 후 여기에 연장선으로 영국은 당장 쓸 120mm 전차포가 없었기에 영국의 120mm의 시작은 미국의 120mm M1 대공포를 사옴으로써 시작했을 정도로 주류 연합국 중 포탄 구경 키우는 데 인색했고, 17파운더 대타로 나온 20파운더 또한 미제 90mm 포보다 관통력과 중거리 명중룰은 좋으나 그 놈의 83.4mm라는 점과 포압 + 작약 문제가 또 발생해 고폭탄 화력은 또 밀렸다. 그 후 정신을 차려 만들어진 로열 오드넌스 L7은 고폭탄 화력까지 잡으면서 서방권 표준 전차포로 자리 잡았다.[8] 이 구축함들중 9척을 제외한 대부분은 영국이 선단보호 및 대잠초계 임무에 투입하였다. 9척은 캐나다 해군에 재공여되었다. 캐나다는 이 구축함들을 매우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9] Bf 109가 독소전을 치르면서 소련 지형에 맞게 랜딩기어 등을 손봐서 적응했던 반면 영국 입장에서는 스핏파이어에 굳이 그런 개량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운용하기 편한 기체는 아니었다. 특히 스핏파이어의 경우 제대로 된 활주로에서의 운용을 상정한 물건이었고, 아스팔트까진 아니지만 최소 평평하게 다져진 흙으로 된 활주로 정도의 인프라는 구성이 되어야 원활한 이륙이 가능했는데, 하루에 전선이 수 킬로미터씩 밀고 밀리던 독소전에서는 전선에 제대로 된 고정 시설을 건설한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고, 야전 공병대가 적당한 평야에 적당히 땅을 평평하게 만들거나, 진흙밭 위에 철판을 쭉 깔아 야전 활주로를 건설하는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겨울이 되면 땅이 얼어서 불가능했다.[10] 2차대전 전후 소련-러시아는 냉전신냉전으로 접어들며 미국과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이 때문에 자신들이 미국에 빚졌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무기대여법을 불편해했다. 그 때문에 현대 러시아에서는 무기대여법의 기여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11] 이는 독일의 생산력과 자원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독일이 총력전 태세로의 전환을 너무 늦게 한 것이 문제였다. 독일은 전쟁 중반까지 시민들의 기호품을 생산할 정도였다. 때문에 전쟁 내내 생산한 4호 전차보다도 나중에 생산을 시작했지만 총력전 태세로 전환된 시점에 생산된 5호 전차 판터의 평균 연간 생산량이 더 많다. 게다가 독일 군수공업 특유의 문제였던 부정부패도 매우 심각했으며 생산 과정도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44년에 들어서야 알베르트 슈페어의 주도하에 뜯어고쳐지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미국과 소련이 온 국력을 전쟁을 위해 투입하는 시스템을 완비한 후였으며 독일에 대한 공격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12] 출처: From Major Jordan's Diaries, 1952, p.141~191[13] 민간인에게 전후 복구 용도로 불하되는 물자는 무기대여법 조항에 따르면 보내는 것이 불법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미국 측의 공식 기록에서는 총액만 언급하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민간인이 쓸만하면서도 무기대여법을 위반하는 사소한 품목은 대부분 소련측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소련측도 산탄총 단 한 정, 연필심 한 봉지가 포함된 것을 따로 적을 정도로 근성으로 기록을 남겼다. (Ibid., p.127-131) 군수담당장교 조지 R. 조던 당시 소령(Major George Racey Jordan)은 미국의 각종 공업 및 핵개발 관련 기밀 자료가 소련으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집착에 가까운 노력으로 소련에 전달된 물자의 목록을 정리했고 무기대여법의 골자를 세운 해리 홉킨스 상무부 장관의 친소 행보에 대해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이 계속 물밑으로 협상을 벌이고 협력했던 것이 알려진 현 시점에서 해당 목록은 천조국의 위엄을 알려주는 자료로 더 잘 알려져있다.[14] 이제 작전 지역에서 밥을 먹기 위해 원대복귀해야 된다거나 하는 일이 줄어든 것이다.[15] 그 와중에도 닭고기 통조림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니까 다른 통조림으로부터 분리해서 배송해주는 세심함을 보여주었다.[16] 소련은 전역이 혹한지였으므로 유지류의 원활한 보급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래서 밀가루와 콩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제공했다.[17] 미군 병사들이 스크램블 에그로 만들어 먹던 계란 재료와 동일한 사양이었다.[18] 기호식품 혹은 향신료 계열로, 장기적인 생존 상황에서는 주식만큼이나 사기의 유지에 중요하다. 미국은 베를린 봉쇄 때도 서베를린의 보급에 여유가 생기자 사탕과 커피를 비롯한 기호식품 보급에 소티를 따로 배정했다.[19] 여성복용 직물 가격은 군복 직물의 9배로 오히려 더 많았다. (Ibid., p.135)[20] 목록을 정리한 조던 소령은 해당 공작기구가 소련이 독립적으로 정밀 공작기구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북한에 최신형 CNC 기기를 수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Ibid., p.134)[21] 소련의 전과 과장은 악명이 높고 그게 아니라도 항공전 전과는 과장되기 쉬우니 소련의 항공전 전과는 특히 걸러서 들어야 한다. 소련 지휘관들은 서방군 수송기는 쓸 만하지만 전투기는 성능이 나쁘다고 깠다는 의견도 있다.[22] 1차 세계대전 때 미국 생산품은 업체 선정이 잘못되었는지 2차 대전 렌드리스 물량과는 대조적으로 품질 관리가 엉망이라 신뢰성이 꽝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해당 문제를 파악하고 있던 미 의회에서도 납품을 막아 나중에 적백내전으로 풀기 전까지 국내에 악성재고로 쌓였다.[23] 이 미국산 모신나강과 정품을 구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각인이 영어로 써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관련 영상 기존에는 소련 정품 모신나강 소총의 가치가 수집품으로써 훨씬 높았으나, 2020년 이후에는 해당 미국제 모신나강 또한 수집품으로써의 가치가 올라서 생산국, 회사에 관계없이 실제 전쟁에 참여한 모신나강의 경우에는 1000달러 이상에 거래되는 등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평준화되었다.[24] 미국에서도 탄피의 제작과 맨해튼 계획에 쓸 구리가 모자라던 상황이라 상당한 우려를 일으킨 결정이었다.[25] 장갑재와 같은 고급강을 만드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원소이다. 독일은 1944년 이후 이들 니켈과 몰리브데넘이 고갈되는 사태를 겪었는데, 이후 독일 전차와 항공기 구조 재료의 품질이 급격하게 악화되며 신형 전차가 구형 전차보다 쉽게 격파되는 사태를 겪기 시작한다. 그 이전엔 중화민국에서 수급했다.[26] 같은 이유로 러시아어는 영어 구사자의 입장에서 배우기 어려운 언어라서 21세기에도 CIA와 같은 정보 기관은 원어민급 러시아어 구사자를 따로 모집해야 한다.[27] 비슷한 예로 한국군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거의 모든 물자를 미국에게서 지원받았다. 그 중 대인 지뢰/폭탄인 크레모아를 받았는데, 적 방향으로 설치하라고 쓰인 'FRONT TOWARD ENEMY'라는 영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반대 방향으로 세팅해 놨다가 부대원 30여 명이 전멸당한 사례도 있다. 도저히 웃지 못할 실화이지만 이런 안이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일어나자 견디다 못한 한국군이 미군에게 지원물자에 한국어를 좀 써 달라고 요청했으나 군납품은 본토의 미 국방부가 알아서 결정하는 사안이다 보니 미군도 임시변통으로 매뉴얼만이라도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으나, 코팅되지 않은 그냥 종이였던 탓에 정글인 베트남에선 비에 젖어서 거의 쓸모가 없었다. 결국 한국 장병들은 선임들이 목숨과 맞바꾼 노하우를 후임들에게 구두로 전승하는 식으로 미군 물자에 적힌 영어 단어들만 죽어라 외우고 익히며 적응해 나갔다.[28] 코인 축음기를 포함. 현대의 주크박스나 코인 오락기와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29] Ibid., JORDAN'S SPECIAL[30] 여기에 장교와 하사관들의 평균 숙련도와 같은 무형적 자산까지 감안할 정도 중국 측 자체 평가로도 전시 편제의 일본군 상비사단 1개에 대항하기 위해선 개편사 3개 사단, 압도하기 위해선 4, 5개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31] 후방 유격전 및 일본군의 공세에 맞선 후퇴 후 분산포위 전술을 말한다. 우선 유격전은 거대한 일본 점령지의 후방에서 소모전을 강요하고 일본이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분산후퇴-분산포위 전술은 보급이 빈약한 일본군을 공세종말점으로 이끌어내는 동시에, 분산된 병력을 한시에 일거에 집중시켜 포위망 안에 들어온 일본군을 사방에서 두들겨대는 전술이었다. 일본군의 상대적으로 막강한 화력에 중국군 전체가 녹아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군이 4년간의 전쟁을 통해 수립했던 효과적인 노하우였고, 반신불수가 된 중국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병력의 집중운용과 정면 공격 등의 정석적 교리를 중시했던 스틸웰의 미 군사고문단은 중국군이 이러한 전술을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열등한 쿨리들이 기본도 모르고 내빼기만 한다고 폄하하기 바빴다. 결국 이토록 오만한 모습을 보이던 미국은 한국 전쟁에서 중일전쟁 당시의 국민혁명군의 전술과 똑같은 전술을 구사한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수백 킬로미터를 후퇴하는 대굴욕을 당한다.[32] 이 중에는 OSS의 한반도 침투 작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OSS는 한국 임시 정부를 썩 신뢰하지는 못했다.[33] 전쟁 치르고 나면 당연히 무기들은 구식인데다 꼴이 말이 아닐 텐데 그걸 돌려받아서 뭐하느냐는 뜻. 2차 대전 이후 미군은 수송 비용이 더 나간다는 이유로 주둔한 국가에 자신들이 배치한 병기나 탄약 등을 두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34] 1991년 12월 4일 "외부 공공 부채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합자산 승계조약"[35] 워낙에 사망자 숫자가 많아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해 숫자가 들쭉날쭉한다. 무려 천만 명이나. 이러한 엄청난 손실 때문에 전후 소련 사회는 한동안 후유증이 심했다.[36] 이 함들은 일본에 일단 보관중이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에 5척, 일본 해상자위대에 18척을 무상 제공해줬다.[37] 예를 들어 T-34-76, KV-1을 소련으로부터 받아와 테스트했다.[38] 대표적인 곳이 바로 뮌헨 협정으로 넘어간 주데텐란트.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업지대이자 무기고이기도 했다.[39] 일본의 공업 능력은 당시 식민 제국 중에서는 가장 모자랐다. 당시 일본에서 생산된 무기와 공산품들은 규격화가 잘 안되었다. 예를 들면 치하 전차의 경우 '분명 같은 전차에 들어가는 엔진인데도 미쓰비시에서 만든 엔진과 히타치에서 만든 엔진 호환이 되지 않는' 해괴한 상황이 계속 일어났었다. 정상적이라면 같은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엔진이어야 하는데 이 정도면 그냥 자신들이 만드는 엔진을 적당히 구겨넣은 격이다. 그럼에도 일본이 군수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은 숙련공들이 같은 규격의 무기를 일정하게 뽑아내주어, 타국의 규격화된 공작 기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무턱대고 알보병으로 징집해다 전장에 보내 소모하고 비숙련공을 공작 기계가 없는 공장에 마구 집어넣자 품질이 나락으로 갔다. 반대로 일본의 적국이었던 미국의 M4 셔먼의 경우 체계적인 규격화에 의해 포탑 엔진 차체 등 주요 부품들이 전혀 다른 곳에서 만들어졌어도 일단 호환되어 엄청난 생산성을 자랑했다.[40] 다만 독일은 1944년 이전까지는 말이 총력전이지 실제로는 총력전 체제로 완전히 전환하지 않았다. 국민들이 굶주리다가 내부 반발로 전쟁이 갑자기 끝나버린 1차대전의 교훈으로 히틀러가 독일인들의 생활수준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도록 조치했기 때문이다.[41] 복제에 실패해서 대전차삼지창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