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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fff><colbgcolor=#002664> 미합중국 제10대 해군참모총장 체스터 니미츠 Chester Nimitz | |||
| | |||
| 본명 |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Chester William Nimitz | ||
| 출생 | 1885년 2월 24일 | ||
| 텍사스주 프레더릭스버그 | |||
| 사망 | 1966년 2월 20일 (향년 80세) | ||
| 캘리포니아주 예르바부에나 섬[1] | |||
| 묘소 | 골든 게이트 국립묘지 | ||
| 재임기간 | 제29대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 ||
| 1941년 12월 31일 ~ 1945년 11월 24일 | |||
| 제10대 해군참모총장 | |||
| 1945년 12월 15일 ~ 1947년 12월 15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2664><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체스터 베른하르트 니미츠 어머니 안나 조세핀 니미츠 | |
| 배우자 | 캐서린 밴스 프리먼 (1913년 4월 9일 결혼) | ||
| 자녀 | 장녀 캐서린 밴스 레이[2] 장남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3] 차녀 안나 엘리자베스 니미츠[4] 삼녀 메리 맨슨 니미츠[5] | ||
| 학력 |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 ||
| 군사경력 | |||
| 복무 | 미국 해군 | ||
| 1905년 ~ 1966년 | |||
| 최종 계급 | 원수 (미국 해군) | ||
| 주요 참전 |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 | ||
| 주요 서훈 | 해군 공로 훈장 4회 육군 공로 훈장 인명 구조장 은장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장 국가 방위 공로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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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 원수의 동정복을 착용한 모습을 그린 초상화 |
1. 개요
God grant me the courage not to give up what I think is right even though I think it is hopeless.
신은 비록 내가 희망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내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준다.
신은 비록 내가 희망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내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준다.
A ship is always referred to as "she" because it costs so much to keep her in paint and powder.
배를 왜 "그녀"[6]라고 부르냐면 도색하고 분칠하는 데 돈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이다.[7]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미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태평양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끄는 데 엄청난 공헌을 한 명장이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 가운데 하나로서 미국인에게는 거의 이견없이 영웅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전쟁 후에도 거품 논란[8] 등 뒷말이 많은 홀시 제독과는 다르게 온화하고 부하들을 신뢰하는 리더십을 펼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철저한 능력주의를 지향해 인맥이나 친분은 통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스스로 돌아가는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고자 적극 힘을 쏟으며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 사람이었다.[9] 대단히 불리한 전황에서도 일본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윌리엄 리히, 어니스트 킹, 윌리엄 홀시와 더불어 미 해군에서 단 4명만 배출된 해군 원수[10]의 일원이다.배를 왜 "그녀"[6]라고 부르냐면 도색하고 분칠하는 데 돈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이다.[7]
2. 생애
1885년 2월 24일, 미국 텍사스 주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라는 도시[11]에서 태어났다. "니미츠(Nimitz)"라는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계 미국인이다.[12]병약했던 부친 체스터 버나드 니미츠(Chester Bernard Nimitz)는 니미츠가 태어난 지 5달 만에 류머티스성 심장병으로 사망하여 니미츠는 모친 안나 니미츠(Anna Nimitz)가 재혼하기 전까지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양육되었다. 특히 유년기의 니미츠에게 사실상의 아버지 역할을 해 준 것은 니미츠의 조부이자 프레더릭스버그에서 호텔을 운영하던 찰스 헨리 니미츠(Charles Henry Nimitz)였다. 니미츠를 무척 귀여워했던 그는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 잠시 독일 상선의 선원으로 일한 적도 있으나, 의외로 할아버지의 상선 선원 경력은 니미츠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한편 안나는 1890년 남편의 막내 동생이자 매사추세츠의 워체스터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귀향한 윌리엄 니미츠(William Nimitz)와 재혼했다. 지역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지만 생활력이 부족했던 그는 공학 전공을 살릴 직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텍사스 깡촌에서 실업자로 지내다 누나의 도움을 받아 프레더릭스버그 근처 커빌(Kerville)의 세인트 찰스 호텔 경영을 맡게 됐다. 하지만 결코 수입이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어린 체스터 니미츠 역시 8세 때부터 방과 후에 외삼촌의 정육점 일을 거들겠다고 나서는 등 경제적으로 쉽지만은 않은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형편이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라 니미츠는 건강하고 활동적인 소년으로 자라났다. 여기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병약 체질을 물려받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어머니가 신체 단련을 자주 권유한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폐렴에 취약한 가족력은 운동으로도 고쳐지지 않아 니미츠는 생애에 걸쳐 여러 차례 폐렴을 앓았다.
청소년 니미츠는 처음엔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미 육군 장교가 되고 싶어했는데, 티비 고등학교 재학 시절 세인트 찰스 호텔에 묵은 육군 장교들의 늠름하고 품위 있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추천권이 있던 텍사스 주 미국 하원 의원 J. 슬레이던(J. Slaydon)은 자신에게 할당된 육사 추천 인원이 다 찼다며 대신 인원이 남은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추천했다. 니미츠는 그땐 육군 장교가 될 길이 막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어서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수락했으나, 곧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집안 호텔 일이 시작되는 5시 30분까지 공부하는 등 수험에 열중했다. 커빌 지역사회 역시 니미츠의 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지역 교사 S. 무어(S. Moore) 선생님이 따로 시간을 내어 수험 과목인 대수, 지리, 기하, 역사, 문법을 가르쳤고, 티비 고등학교 교장 J. G. 톨랜드(J. G. Toland) 선생님도 직접 나서 수학을 강의했다.
니미츠 스스로의 노력과 지역 사회의 성원에 힘입어 애너폴리스 입학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니미츠는 열정적으로 해군 사관생도 생활을 시작했다.[13] 특히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입학 시험을 준비했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생도 시절에도 일과 시작 전 기상해 미리 공부를 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성실하게 생활한 보람이 있어 니미츠는 1905년 졸업할 당시에는 114명 중 7등으로 졸업하는 등 생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2.1. 장교 시절
니미츠 본인은 독서, 산책과 운동 등을 즐겨해 언뜻 보면 조용히 혼자 지낼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상당히 사교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집에 해군 관련 인물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도 손님들을 항상 환영했다. 기억력이 좋고 배려심이 많아 조직 관리에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유머가 뛰어났다고 한다.[14] 오만하고 극단적인 성격 탓에 적들이 많았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달리 인성 문제가 아무것도 없다보니 전 국민에게 사랑받은 제독이었다. 비록 정치에 관심이 없는 참군인이라 해군참모총장의 지위에서 멈췄지만 말이다.[15]2차 대전 당시의 미 해군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제독이며, 그 당시 주력함 전함보단 잠수함에 더 관심이 많은 제독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2차 대전까지(그리고 그 이후로도) 전함과 인연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그는 고작 21세의 나이에 구축함 함장[16]을 맡은 적이 있고 뛰어난 기술자이자 행정가이기도 했어서 민간 기업들의 스카우트 제의도 자주 받았던 엄청난 사람이었다.
소위 때 구축함 함장을 하다가 한번 좌초한 경험이 있었으나 평소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고 과실이 거의 없었다 보니 상당히 관대히 넘어갔다.[17]
근무 중 수병 한 명이 바다에 빠지자 직접 뛰어들어 구조한 적이 있는데, 이 덕에 미국 해안경비대로부터 인명구조장 은장(Silver Lifesaving Medal)을 받기도 했다. 이 훈장은 약장을 잔뜩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했던 니미츠 제독이 잠수함 장교 휘장 및 해군 공로장과 함께 항상 달고 다니는 몇 안 되는 훈장이었다.
그 후 독일로 유학 가서 배워 온 디젤 엔진 기술을 이용해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로부터 니미츠는 디젤 엔진에 관한 한 해군 제일의 권위자라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 때문에 민간 기업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으나[18] 해군에 남기 위해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잠수함에 디젤 엔진을 적용시키기도 하고 잠수함 승조원으로 근무하기도 하면서 니미츠는 다른 연합군 장성들과는 달리 2차 대전 발발 직전에도 잠수함에 대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생각을 가졌으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취임식 역시 잠수함인 USS 그레일링함 갑판에서 이루어졌다. 니미츠 본인이 잠수함 부대 출신이라 원하기도 했지만, 니미츠의 잠수함대 애호와는 별개로 취임식을 거행할 만한 대형 수상함정이 전무했다는 사정도 있고, 무엇보다도 취임식을 치른 진주만의 잠수함 도크는 연료 저장 시설과 함께 진주만에서 타격을 입지 않은, 한 손에 꼽히는 해군 시설 중 하나였다. 참고로 취임식을 치렀던 진주만 잠수함 도크는 니미츠가 초급 장교 시절에 건설 감독을 맡았던 시설이다.[19]
항공모함의 경우는 오늘날 주류가 된 항공모함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는 원형진을 고안한 연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참고로 이 진형은 유틀란트 해전의 사후 연구 과정에서 영국 해군이 자랑했던 복잡하고 예술적인 기동이 '그저 복잡하다'는 미 해군 지휘관들의 문제 의식 하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직사각형의 함대 배치를 했기 때문에, 함대가 방향을 선회하는 경우 개별 함정의 기동이 매우 복잡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리하여 니미츠가 참가한 연구에서는 유틀란트 해전 역시 혼란을 우려해 두 함대가 선회를 하지 못한 채 조우하고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니미츠는 해군 대학에서 이 연구를 가지고 학위를 땄는데, 딸이 유틀란트 해전의 의의를 '요약'하는 것에 대해서 대학 리포트를 쓰기 위해 질문을 하자 이쑤시개와 후추통을 가지고 2시간 동안 식탁 위에서 개별 함정의 기동을 일일이 설명했던 일화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점까지 니미츠가 해군에서 했던 일들 중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외에는 퇴역 함정의 항공기 공습의 위력을 시험하는 실험에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비주류였기 때문에 떠맡은 일이었던 것 같다. 이 실험에서 항공기의 뇌격은 퇴역한 순양함을 일격에 두 동강 내는 위력을 과시했고,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니미츠는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니미츠가 항공기나 항공모함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을 맡았다.[20] 사실 니미츠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이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자기 앞의 선배 제독 50여 명을 제치고 그토록 파격적으로 진급하면 질투와 견제에 제 할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며 고사한 적이 있었다. 결국 차순위 후보였던 허즈번드 킴멜 소장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낙점됐고, 킴멜 제독은 부임 10개월 만에 진주만 공습의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쓰고 경력이 끝장나 버렸다.당초 1순위 후보였으므로 킴멜의 뒤를 이어 태평양함대를 맡게 된 니미츠도 최초 부임 때는 앞이 캄캄한 전황에 상당한 정신적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부인에게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에 부임하게 되었소."고 말하자, 부인이 "축하해요. 당신은 항상 그런 직책에 부임하길 원했잖아요."라고 축하의 말을 하니 "그런데, 그 함대는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게다가 해군 본부는 비밀리에 니미츠를 부임시키길 원했기 때문에, 니미츠는 항해국장 전속부관 라마 대위와 함께 사복 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서해안까지 이동해서 비행기를 타고 현지에 도착해서 잠수함 위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니미츠는 자신의 정체를 기자들이 알아챌까 조마조마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21]
그리고 니미츠는 직전까지 소장 보직인 항해국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으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대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당연히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한 승진이었기에 니미츠는 현지에 부임해서도 휘하 참모와 지휘관들을 즉각적으로 장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2] 특히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대로 최대한 이른 시일 내 항공모함을 동원해 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을 추진하다 무모한 역공으로 태평양 최후의 보루인 항모마저 잃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제14관구 사령관 클로드 C. 블로크(Claude C. Bloch) 제독과 태평양함대 항공 병과 장교들 대다수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을 때가 가장 큰 고비였다. 항모 운용 전문가들인 항공병과 장교들의 집단 반발로 위기에 몰린 니미츠는 다음날 진주만으로 귀항하여 회의에 참석한 윌리엄 홀시 제독의 불같은 호통으로 간신히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홀시는 당시 태평양함대 항공병과를 대표하는 위치의 제독이었는데, 장교들 사이에서 인망이 깊고 물불 가리지 않는 공격적 성향의 그가 반격 계획에 적극 찬성하자 다른 항공병과 장교들도 잠자코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니미츠가 느낀 위기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본인마저 '잘리지 않고 6개월만 버텨도 성공'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니미츠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나마 유효한 전력인 항공모함 및 잠수함대로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맞아 전선을 유지했고,[23] 해군 장관에게서 위임받은 태평양함대 사령부 인선을 위한 무제한의 인사권을 휘둘러서 미 해군 본부의 인사부처에서 일할 때 눈여겨 본 '인정받지 못했던 인재들(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대표 주자)'을 하나씩 긁어모아 자신만의 사령부를 건설하게 되며, 이 시기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윌리엄 홀시, 마크 미처 등의 태평양 전쟁의 주요 지휘관들이 사령부에 합류하고,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큰 실적을 남긴 태평양함대의 정보부 역시 질적 및 양적으로 크게 확대된다. 니미츠 제독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윌리엄 홀시 제독의 은혜를 잊지 않고 중부 태평양 진격 작전 이후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루손 섬 상륙 작전 중 태풍이 제3 함대를 직격해 많은 손실을 입어 사문회에 불려나갔던 윌리엄 홀시 제독을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과 두 명이 함께 적극 비호해 준 일은 그 한 가지 사례.[24]
니미츠는 자신이 뽑은 인물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지휘관들이 전투에 돌입하면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위임한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혼자서 함대를 통제하려 들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나 작전 입안 전에 참모진들의 난상 토론으로 계획을 만들면 실전에서는 본인의 허락 없이는 작전 변경을 할 수 없었다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스타일과도 종종 비교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고 홀시 제독에게 전문을 보낸 일화는 이런 불간섭 원칙을 깼던 예외 중의 예외로서 당사자였던 홀시 제독마저 격노하며 당혹한 해프닝이다.[25]
사실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 사건은 의도치 않게 일이 확대돼 버린 경우다. 원래 "34기동부대는 어디 있는가?"가 전문의 본 내용이고 그 뒤의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전문의 끝을 알리는 삽입구였다. 이 경우 뒤의 삽입구는 해당 전문을 다른 전문과 문장길이를 동일하게 맞춰서 도청을 당하더라도 전문의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당일이 크림 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가 벌어진 날과 같은 날이라 전문 담당하는 소위가 더미 문자로 발라클라바 전투를 기리는 테니슨의 '경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의 한 소절[26]을 삽입구로 쓴 것. 그런데 당시 홀시가 이끌던 3함대는 일본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의 미끼 전술에 낚이는 바람에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완전히 비워 버려서 니미츠는 물론이고 7함대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으로부터도 후딱 돌아오란 전문을 수시로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홀시가 해당 전문을 전 세계가 궁금해하는데 너 어디서 뭐하고 있냐? 빨리 안 와?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고 당연히 격분했으며 니미츠는 당황했고 담당 소위는 전출당했다.
여하튼 제독들을 포함해 도크, 보급, 정보, 해병대 등의 병과 역시 니미츠의 기대에 충족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니미츠가 뽑지 않은 동시에 실적도 좋지 않았던 이들은 니미츠가 말없이 지켜보다가 인내심이 바닥나는 순간 태평양해역군에서 전출시켰다. 하지만 이때도 징계형식보다 그저 근무지 변경이나 진급을 위한 순환 근무 등으로 처리하여 원성을 들을 일이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27]
니미츠의 인선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함대 운영의 중심을 항공모함으로 변경하는 기본 지침이 결정된 이후 미 해군 태평양 함대는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 줬고,[28]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을 모조리 인공어초로 만든 뒤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반격을 펼쳐서 일본군을 압박했다. 특히 미드웨이 해전은 관리자가 아니라 지휘관으로서의 니미츠가 지닌 굴하지 않는 공격성과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니미츠는 함대 암호해독반의 보고를 통해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 공격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표면적인 전력 열세에 위축되는 대신 일본 해군 항모 4~5척은 수중의 가용 전력과 암호해독 정보라는 기습 요소를 총동원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대담하지만 정확한 계산 아래 치명적인 매복공격을 계획했고, 이 작전은 니미츠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한 플레처와 스프루언스 등 예하 지휘관들의 효과적인 임무 수행으로 일본 해군이 투입한 정규항모 4척을 모두 격침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미드웨이 해전의 대승으로 한숨 돌린 니미츠는 이후부터는 완성된 '알아서 완벽하게 돌아가는 자신만의 사령부' 덕에 자잘한 업무 부담에서 벗어나 중요한 전략적 판단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 외의 일거리는 위에서의 압박에 실드를 쳐 주거나 부하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는 것 정도였다고 한다. 남는 시간은 권총 사격(군인다운 취미라고 생각해서 취미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수전증 치료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과 산책으로 때웠다고. 이는 사령관이 권총 사격을 즐길 정도로 여유가 있음을 부하들에게 보여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 시기에도 니미츠의 대담성과 예리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1944년 초 마셜 제도 상륙작전(부싯돌 작전Operation Flintlock)이다. 마셜 제도 공략에서 니미츠는 웟제, 말로에라프, 잴루잇, 밀리 환초 등의 주요 외곽 일본군 기지들을 하나하나 점령하는 대신 북서쪽 끝, 일본군 방어선 안쪽의 콰잘린 환초를 기습 점령한 뒤 콰잘린의 비행장을 기점으로 나머지 환초의 보급선을 끊고 말려 죽인다는 매우 과감한 전략을 입안했다. 그러나 스프루언스 제독(5함대 사령관), 리치먼드 K. 터너 제독(상륙함대 지휘관), 해병대 홀랜드 스미스 장군(상륙부대 지휘관)을 비롯한 휘하 지휘관 전원이 이 작전계획은 너무 위험하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특히 스프루언스와 터너는 작전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그를 설득해 보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니미츠가 옳았다. 태평양해역군은 일본군 방어전력이 집중된 외곽 환초를 우회하여 무사히 콰잘린을 점령하고 항공력으로 마셜 제도 전체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콰잘레인 전투)
소소한 에피소드로 제임스 포레스탈 앞에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방문한 포레스탈과 니미츠가 보트를 타고 진주만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침 상륙함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니미츠는 상륙 작전 때 상륙함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그리고 상륙함의 가치가 어떠한지에 대해 포레스탈에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니미츠의 말이 끝난 직후 상륙함 위에 나타난 것은 수영복 차림의 해군 간호사들.
그 활약상으로 종종 남서태평양지역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비교되는데, 전체적인 평가는 니미츠 제독과 태평양해역군이 가치 있는 승리를 더 많이 일궈냈다는 평이다. 그러나 일본 항복 조인식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명예가 맥아더 원수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장면에서 묻히는 감이 없지 않다. 니미츠도 맥아더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공식 항복문서 조인식에 서명을 하게 된 것을 알고 짜증을 냈지만[29] 포레스탈 해군장관의 제안[30]으로 니미츠는 미국 대표로써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본국으로 귀국한 뒤 어니스트 킹의 뒤를 이어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의 고유 권한[31]을 상당히 포기하면서까지[32] 그 자리에 올랐던 걸 보면 일생일대의 꿈이었나 보다. 포레스탈은 직설적으로 그 자리를 원한다는 니미츠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결국 니미츠는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러자 포레스털은 관례보다 촉박한 인수인계 시간을 주면서 뒤끝을 부렸다. 해군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라 그런 건지도.[33]
해군참모총장의 임기가 끝난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다가 그 당시 분쟁이 벌어졌던(그리고 현재에도 진행 중인) 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조정 위원회의 유엔 판문관을 지내기도 했다. 허나 이 위원회는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이 조정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해산되고 그 뒤론 해군장관의 고문역을 하다가 그만둔 후엔 인기가 많다 보니 각지를 돌면서 연설 혹은 행사에 참여하거나 했고 1960년대에 출판된《해양력:해군의 역사》편찬에 참가했다.[34]
2.3. 종전, 해군참모총장 퇴임 이후
2차 대전 이후 미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바뀐 미 공군과 미 해군의 싸움[35]이 슬슬 시작할 때 니미츠의 해군참모총장 퇴임 연설은 해군에 힘을 실어 줬고[36] 후에 있었던 제독들의 반란 사건에 도움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말년에는 폐렴으로 인한 뇌졸중을 앓았고, 1966년 2월 20일 샌프란시스코 예바 부아나 섬에 있는 자택[37] 에서 병사했다. 장례식은 인접한 트래저 아일랜드(Treasure Island)의 예배당에서 치렀고, 산 브루노의 골든 게이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곁에는 생전 약속한 대로 태평양 전쟁의 전우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리치먼드 K. 터너, 찰스 록우드 제독이 나란히 묻혔다.
니미츠 자신은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38] 때문에 구술사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부하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편지도 전부 부인이 소각해 버렸다. 니미츠 사후 미 해군사관학교 교수인 E. B. 포터 박사가 쓴 전기가 니미츠에 대한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도 2권으로 번역이 되었고 나중에 양장 합본이 나왔다.[39]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은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붙여졌으니 그 노고는 충분히 보상받은 셈이다. 항공모함 함대를 앞세워서 승리를 일궈낸 사람을 기리는데 이보다 더 알맞은 명명법은 없을 것이다.
3. 기타
- 1912년, 고위 관료들에게 정박하지 않고도 연료를 주유할 수 있는 카나와급 급유함 AO-2 모미에서 디젤 엔진을 소개하다 왼손 약지가 끼어 일부가 절단됐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독일에서 디젤기관 시연을 참관하다가 그랬다고 한다.
-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독일 해군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 제독의 익수자 구조 금지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연합군 검사단의 의견 요청에 되니츠의 행위는 이해 가능하다라며 손을 들어주었다.
- 미드웨이 영화에서는 1976년 작에서는 배우 헨리 폰다가, 2019년 작에서는 배우 우디 해럴슨이 연기했다. 특히 2019년 작의 우디 해럴슨은 딱 보기만 해도 '아 이 사람이 니미츠 역할이구나'라고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선 평범한 백인 남성으로 나오긴 하는데 미드웨이 해전을 앞둔 미 해군 전력의 상황에 낙담해 "이런 니미! 움직일 수 있는 항모는 2척밖에 없는데."라고 한마디 해줘서 굽시니스트 특유의 언어유희를 보여줬다. 물론 그 후로 다들 알다시피 파손된 항모 요크타운을 3일 동안 미친 듯이 수리해 합류시킨다.
- 1980년 영화 최후의 카운트다운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니미츠급 항공모함 1번함 니미츠가 F-14를 가득 실은 채로 아직 니미츠가 소장이었던 진주만 공습 전날로 타임슬립한다. 니미츠 함에 탑승한 한 상원의원은 소리의 속도를 넘나드는 제트 전투기와 헬리콥터의 위용에 넋이 나간 채로 루스벨트랑 니미츠가 나도 모르게 뭔 수작을 부린 거냐며 비명을 질렀다.
- 아들인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주니어(1915~2002)도 대를 이어 해군에서 복무하였는데, 진주만 공습 때 잠수함 USS 스터전(Sturgeon)의 함장으로 근무했으며, 소장까지 진급했다. 니미츠 2세도 2차 대전에서 해군 십자장 1개와 은성 훈장 4개를 받았을 만큼 많은 공훈을 세웠고 부친의 후광에 힘입어 4성 제독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지만 전쟁 후 변화된 해군 장교로서의 가치관[40]에 의문을 품었고 결국 전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종신 원수였으므로 아버지보다 빨리 퇴역했다. 하지만 아들은 2002년에 아내와 함께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했다. 아내가 말년에 시력을 잃었고, 자신도 위장염과 울혈성 심부전으로 고생하였다. 그래도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86세까지 장수한 편이다. 그 나이대에 건강 악화와 우울증 등으로 자살하는 고령자들이 꽤 있으며, 체스터 주니어의 유서에도 '심사숙고 후 내린 결정이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심한 고생으로 삶을 지속하지 않기로 했다고 담담히 기술하고 있었다. 부인과의 사이에 딸만 셋 두었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국 대통령이던 당시 소위후보생이었던 니미츠는 미국 해군력과 열강의 강대함을 전세계의 자랑하기 위해 조직된 대백색함대 중 캔자스함에 속해 일본을 방문한 적 있는데 이때 당시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의 주역이자 일본제국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를 축하연에서 만나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때의 정 때문이지 도고의 기함이었던 미카사가 클럽으로 전용되는 걸 막고, 복원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 모르는 사람들은 니미츠라는 이름을 일본군을 격퇴한 격전지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일본인 이름으로까지 여겨서 니미쓰라는 왜색 짙은 번역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미츠'로 끝나는 이름은 일본의 성 씨로도 곧잘 쓰이는지라 은근 많은 사람들이 이 이름을 처음 접하면 일본 쪽 장성이라고 착각하는 일이 많다.[41]
-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당시의 사고 장소로 알려진 괌의 니미츠 힐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 약장을 많이 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해, 많이 달아도 6개, 보통은 해군 공로 훈장과 해안경비대 인명 구조장 은장[42] 2개만 잠수함 장교 휘장과 함께 패용하는 편이었다. 위의 초상화 사진을 보면 약장이 간소하게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미군 규정상 받은 약장은 모두 달고 다녀야 하나 해군의 경우 평소에는 개인 선택으로 1줄로 줄여 달 수 있는 예외가 있고 육군에는 이 예외 규정이 없다.
- 함장[43] 시절 부하 장교들에게 "너희도 미래의 함장이다"며 차상급자의 역할수행 기회를 부여해[44] 조직발전에 전념하게 했고, 승조원들이 정박한 중국 지역에 대한 문화적 이해를 높이도록 지원하는 등 노력했다. 그 결과 고만고만하던 오거스타함은 니미츠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대 내 전비태세나 포술 등에서 1등을 휩쓸었다. 그는 어느 날 예고 없이 부하 승조원을 호출해 상급자나 함장 역할을 맡기거나, 니미츠 본인의 조함 실수를 놓고 그가 어떤 점에서 잘못했는지 짚어보게 했다. 이런 식으로 부하들의 자질을 평가하고 자신의 역할을 떠나서 조직을 위해 고민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래서 니미츠 휘하 장교들은 평균 제독 진급률을 훨씬 웃도는 무려 40퍼센트의 장교가 제독 이상 계급까지 진급했다.#
- 온화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무른 사람(무골호인)은 아니었다. 니미츠는 능력이나 열의가 자기 기준에 못 미친다 싶으면 조직에서 가차없이 쳐냈다. 몇 번의 기회를 주고, 그 기회도 못 잡으면 "무난하게 자기 역할을 다 하는 장교다"라는 근무평정을 써 주면서 그의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이 속뜻을 캐치하게 하는 부드러운 방법만 쓴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일례로 그는 과달카날 전역에서 어니스트 킹 제독이 택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로버트 곰리 제독의 성과가 실망스럽다고 판단하자 킹과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곰리를 쳐내고 홀시를 후임으로 앉히기로 결정한 다음 킹에게 승인만을 요청했고, 승인 전문이 도착하자마자 즉시 홀시를 보내어 교체했다.[45] 심지어 후일 죽은 뒤에는 함께 묻히자고 약속할 스프루언스와 터너조차도 마셜 제도 상륙작전 당시 콰잘린 우회공격에 끝까지 반대하다 잘릴 뻔했으며,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사이판 전투에서 해병대와 육군의 전술 차이를 간과하여 통합군 지휘관 사이의 불화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실상 전투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해군 잠수함 USS 탬버의 함장 존 W. 머피 소령은 그가 잠수함장으로서 공격성이 결여된 것도 모자라 정찰 결과 보고에서조차 태만하여 스프루언스의 지휘 부담을 가중시켰다 판단하고 격노한 니미츠에게 즉각 함장직에서 해임당했다.[46] 그는 인사 문제에 있어서 필요하다면 매우 차가워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원수 진급과 관련해 맥아더와 비교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육해공군의 최고 지휘관들을 원수로 진급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계급장이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니미츠와 맥아더에게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때 맥아더는 본국에서 계급장이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기다렸지만, 니미츠는 금속공예를 할 줄 알던 부하가 선물해 준 원수 계급장을 착용했다고 한다.
- 중령 시절인 잠수함 전대장 때에는 출입항 중 추돌 사고를 일으킨 모 함장에게[47] 이런 말도 했다. "함수 한두 번, 함미 한두 번은 괜찮아. 그러나 그 이후로도 사고가 발생하면 그때는 책임을 물을 걸세. 자네는 이미 함수 한 번의 기회를 사용했으니 한 번 남은 기회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게."
- 철저하게 능력주의 인사 원칙을 고집한 탓에 윌리엄 홀시나 마크 미처처럼 인맥·친분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도 없었다.[48] 니미츠가 홀시, 스프루언스, 터너, 스미스 같은 개성 강한 장성들을 하나의 사령부 밑에서 원활하게 다룰 수 있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 그는 온화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의 실수 몇 번은 책임지고 보호하는 등 관용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니미츠도 평정심을 잃은 사례가 있다. 일본에 입항하며 일장기 대신 중국 국기를 게양한 하급 장교와 수병에게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너희들을 죽여버렸을 거다"고 분노한 뒤 다시는 함교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본인은 물론 동승한 대사까지 일본 측에 사죄해야 했던 대형 참사라 함장인 본인이 보호해 줄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섰고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기에 저렇게 분노할 만하다.
- 문서에 있는 대부분 내용의 출처는 한국에도 플래닛미디어에 의해 정식 출간된 니미츠 전기이다. 미 해군 장교 출신 브레이턴 해리스가 집필했으며 니미츠나 맥아더 외에도 킹 제독,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탈, 핼시 제독 등 여러 인물들을 둘러싼 복잡미묘한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기 때문에 니미츠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3.1. 이순신 관련 일화
- 한국인들에게는 재미있게도 니미츠 제독이 1944년 한 브리핑에서 이순신을 언급한 적이 있다.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는 일본 측의 선전을 위트있게 반박하면서 나온 내용이다. 전투의 날짜, 교전의 내용과 전과 수치 등을 볼 때 부산포 해전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독서에 관심이 많던 니미츠 제독인 데다 일본과 바다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적국과 관련된 역사를 많이 공부했을 것이고, 그중 임진왜란의 사례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강력한 연합군 함대[49]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 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 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중에서[50]
4. 진급 내역
- 1907.01.07: 소위(Ensign)[51]
- 1910.01.31: 중위(Lieutenant Junior Grade)
- 1910.01.31: 대위(Lieutenant)
- 1916.08.29: 소령(Lieutenant Commander)[52]
- 1918.03.08: 중령(Commander)
- 1927.06.02: 대령(Captain)
- 1938.06.23: 소장(Rear Admiral)
- 1941.12.31: 대장(Admiral)[53]
- 1944.12.19: 원수(Fleet Admiral)
5. 주요 서훈 내역
- 해군 공로 훈장 4회
- 육군 공로 훈장
- 인명 구조장 은장
- 미 국가 방위 훈장
- 아시아-태평양 전역 복무 공로장
-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장
- 국가 방위 공로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2급)
6. 둘러보기
| 미합중국군 원수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대원수 General of the Armies / Admiral of the Navy | |
| 육군 Army | 조지 워싱턴 | 율리시스 S. 그랜트 | 존 조지프 퍼싱 | |
| 해군 Navy | 조지 듀이 | |
| 원수 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General of the Air For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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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 Navy | 윌리엄 리히 | 어니스트 킹 | 체스터 니미츠 | 윌리엄 홀시 | |
| 공군 Air Force | 헨리 아놀드 | |
| *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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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찰스 에드워드 러셀 | 1950 폴 프레드릭 더글라스 | 1950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 1950 프레드 A. 돌프 | 1950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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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 (취소) | 1961 아이작 D. 화이트 | 1961 카터 매그루더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2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26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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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강명규 만주방면 | 1963 강순필 국내항일 | 1963 강창제 임시정부 | 1963 강철구 만주방면 | 1963 계화 만주방면 | ||||||
| 1963 고운기 광복군 | 1963 고인덕 의열투쟁 | 1963 고제량 의병 | 1963 곽재기 의열투쟁 | 1963 곽종석 3·1 운동 | ||||||
| 1963 구연영 국내항일 | 1963 권영만 국내항일 | 1963 권용일 의병 | 1963 권쾌복 학생운동 | 1963 기산도 의열투쟁 | ||||||
| 1963 김경태 국내항일 | 1963 김관오 광복군 | 1963 김광진 만주방면 | 1963 김규식 만주방면 | 1963 김기한 만주방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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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김상태 의병 | 1963 김석창 만주방면 | 1963 김성근 임시정부 | 1963 김성엽 만주방면 | 1963 김성호 만주방면 | ||||||
| 1963 김세환 3·1운동 | 1963 김승만 만주방면 | 1963 김영숙 만주방면 | 1963 김영철 만주방면 | 1963 김우근 만주방면 | ||||||
| 1963 김원국 의병 | 1963 김원조 국내항일 | 1963 김재근 국내항일 | 1963 김준승 만주방면 | 1963 김지환 3·1 운동 | ||||||
| 1963 김창곤 만주방면 | 1963 김창근 중국방면 | 1963 김창환 만주방면 | 1963 김천익 만주방면 | 1963 김최명 만주방면 | ||||||
| 1963 김태오 3·1 운동 | 1963 김태원 만주방면 | 1963 김평식 만주방면 | 1963 김한종 국내항일 | 1963 나월환 광복군 | ||||||
| 1963 나중소 만주방면 | 1963 나창헌 임시정부 | 1963 남정각 중국방면 | 1963 노기용 국내항일 | 1963 노복선 광복군 | ||||||
| 1963 민강 국내항일 | 1963 민영구 광복군 | 1963 민필호 임시정부 | 1963 박기성 광복군 | 1963 박기제 만주방면 | ||||||
| 1963 박기한 만주방면 | 1963 박민항 만주방면 | 1963 박상진 국내항일 | 1963 박세건 만주방면 | 1963 박시창 광복군 | ||||||
| 1963 박연백 의병 | 1963 박응백 만주방면 | 1963 박중서 만주방면 | 1963 박찬익 임시정부 | 1963 방순희 임시정부 | ||||||
| 1963 백기준 임시정부 | 1963 백기환 의열투쟁 | 1963 백낙주 만주방면 | 1963 백남규 의병 | 1963 백시찬 만주방면 | ||||||
| 1963 백운한 만주방면 | 1963 백정기 중국방면 | 1963 변춘식 만주방면 | 1963 서상교 학생운동 | 1963 서상렬 의병 | ||||||
| 1963 서상한 일본방면 | 1963 손기업 만주방면 | 1963 손창준 만주방면 | 1963 송병조 임시정부 | 1963 송진우 문화운동 | ||||||
| 1963 신공제 임시정부 | 1963 신덕영 만주방면 | 1963 신송식 광복군 | 1963 신숙 만주방면 | 1963 신영삼 임시정부 | ||||||
| 1963 신우현 만주방면 | 1963 신팔균 만주방면 | 1963 안규홍 의병 | 1963 안병찬 계몽운동 | 1963 안상익 3·1 운동 | ||||||
| 1963 안세환 3·1 운동 | 1963 안재환 중국방면 | 1963 안지호 3·1 운동 | 1963 안춘생 광복군 | 1963 양기하 만주방면 | ||||||
| 1963 양우조 임시정부 | 1963 엄순봉 중국방면 | 1963 여행렬 의열투쟁 | 1963 연병호 임시정부 | 1963 오면직 중국방면 | ||||||
| 1963 오복원 의열투쟁 | 1963 오상서 만주방면 | 1963 오운흥 국내항일 | 1963 우승창 만주방면 | 1963 우재룡 국내항일 | ||||||
| 1963 유기동 만주방면 | 1963 유상렬 임시정부 | 1963 유창순 국내항일 | 1963 유흥수 학생운동 | 1963 윤준희 만주방면 | ||||||
| 1963 윤창하 학생운동 | 1963 이건석 의열투쟁 | 1963 이광 임시정부 | 1963 이광세 국내항일 | 1963 이교재 임시정부 | ||||||
| 1963 이규채 임시정부 | 1963 이기송 3·1 운동 | 1963 이동수 의열투쟁 | 1963 이명상 의병 | 1963 이명하 만주방면 | ||||||
| 1963 이민화 만주방면 | 1963 이상만 임시정부 | 1963 이상호 학생운동 | 1963 이서현 만주방면 | 1963 이설 계몽운동 | ||||||
| 1963 이세영 임시정부 | 1963 이순모 3·1 운동 | 1963 이신애 국내항일 | 1963 이용담 만주방면 | 1963 이우영 만주방면 | ||||||
| 1963 이원직 임시정부 | 1963 이유필 임시정부 | 1963 이인 문화운동 | 1963 이장녕 만주방면 | 1963 이재현 광복군 | ||||||
| 1963 이정 만주방면 | 1963 이정렬 국내항일 | 1963 이준용 만주방면 | 1963 이창용 만주방면 | 1963 이춘영 의병 | ||||||
| 1963 이치모 국내항일 | 1963 이탁 임시정부 | 1963 이한구 의병 | 1963 이홍래 만주방면 | 1963 이화익 중국방면 | ||||||
| 1963 이화주 만주방면 | 1963 임국정 만주방면 | 1963 임봉주 국내항일 | 1963 임의탁 임시정부 | 1963 임창모 의병 | ||||||
| 1963 장관주 국내항일 | 1963 장기천 만주방면 | 1963 장덕준 문화운동 | 1963 장덕진 만주방면 | 1963 장두환 국내항일 | ||||||
| 1963 장해평 중국방면 | 1963 장형 국내항일 | 1963 전좌한 중국방면 | 1963 전태선 의열투쟁 | 1963 전홍섭 만주방면 | ||||||
| 1963 정남용 국내항일 | 1963 정봉화 만주방면 | 1963 정순경 만주방면 | 1963 정신 만주방면 | 1963 정의도 임시정부 | ||||||
| 1963 정이형 만주방면 | 1963 정인복 만주방면 | 1963 정찬조 만주방면 | 1963 정태희 임시정부 | 1963 조경환 의병 | ||||||
| 1963 조길룡 학생운동 | 1963 조명하 중국방면 | 1963 조병준 만주방면 | 1963 조시원 광복군 | 1963 조원세 국내항일 | ||||||
| 1963 조인제 광복군 | 1963 조종대 국내항일 | 1963 조지 새넌 맥큔 | 1963 조지 쇼 | 1963 조진탁 3·1 운동 | ||||||
| 1963 조창호 의열투쟁 | 1963 주기철 문화운동 | 1963 주명우 3·1 운동 | 1963 주병웅 만주방면 | 1963 지달수 광복군 | ||||||
| 1963 차병제 만주방면 | 1963 채기중 국내항일 | 1963 최관용 만주방면 | 1963 최낙철 학생운동 | 1963 최능찬 3·1 운동 | ||||||
| 1963 최병선 중국방면 | 1963 최병수 3·1 운동 | 1963 최병호 만주방면 | 1963 최석준 만주방면 | 1963 최수봉 의열투쟁 | ||||||
| 1963 최은식 3·1 운동 | 1963 최지관 만주방면 | 1963 최진동 만주방면 | 1963 최천호 의열투쟁 | 1963 한봉수 의병 | ||||||
| 1963 한상렬 의병 | 1963 한상호 만주방면 | 1963 한흥근 의열투쟁 | 1963 함석은 만주방면 | 1963 허형 의열투쟁 | ||||||
| 1963 현순 임시정부 | 1963 현천묵 만주방면 | 1963 홍사구 의병 | 1963 홍성익 임시정부 | 1963 홍주 만주방면 | ||||||
| 1963 홍찬섭 3·1 운동 | 1963 황덕환 만주방면 | 1963 황병길 만주방면 | 1963 황상규 중국방면 | 1963 황학봉 만주방면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5~1969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94명 | ||||
| 1965 체스터 니미츠 | 1966 천궈푸 | 1968 고이허 만주방면 | 1968 궈타이치 | 1968 권준 중국방면 | ||||||
| 1968 (취소) | 1968 김기형 임시정부 | 1968 김명권 만주방면 | 1968 김봉식 만주방면 | 1968 김상옥 만주방면 | ||||||
| 1968 김석 중국방면 | 1968 김성택 만주방면 | 1968 김시중 의병 | 1968 김용구 의병 | 1968 김원범 의병 | ||||||
| 1968 김원식 만주방면 | 1968 (취소) | 1968 김진성 만주방면 | 1968 김진준 만주방면 | 1968 김천성 광복군 | ||||||
| 1968 김태연 만주방면 | 1968 김학섭 만주방면 | 1968 김홍서 임시정부 | 1968 노병대 의병 | 1968 노태준 광복군 | ||||||
| 1968 다이리 | 1968 로버트 그리어슨 | 1968 류용야오 | 1968 마수례 | 1968 모더후이 | ||||||
| 1968 문창학 만주방면 | 1968 박도경 만주방면 | 1968 박인화 의병 | 1968 박태열 만주방면 | 1968 박희광 만주방면 | ||||||
| 1968 백삼규 만주방면 | 1968 서원준 만주방면 | 1968 서의배 국내항일 | 1968 손승억 만주방면 | 1968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 ||||||
| 1968 신정백 의병 | 1968 신태식 의병 | 1968 신현구 국내항일 | 1968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 1968 양승우 만주방면 | ||||||
| 1968 양한규 의병 | 1968 여준 만주방면 | 1968 유득신 국내항일 | 1968 유상근 의열투쟁 | 1968 유택수 만주방면 | ||||||
| 1968 윤이병 계몽운동 | 1968 이규선 3·1 운동 | 1968 이규창 중국방면 | 1968 이기 의열투쟁 | 1968 이명균 국내항일 | ||||||
| 1968 이병묵 만주방면 | 1968 이병욱 만주방면 | 1968 이붕해 만주방면 | 1968 이성구 중국방면 | 1968 이성우 의열투쟁 | ||||||
| 1968 이양섭 3·1 운동 | 1968 이응서 만주방면 | 1968 이의준 만주방면 | 1968 이진택 만주방면 | 1968 이창덕 만주방면 | ||||||
| 1968 이현규 의병 | 1968 이희경 임시정부 | 1968 임치정 계몽운동 | 1968 장소진 3·1운동 | 1968 장윤덕 의병 | ||||||
| 1968 장쥐 | 1968 장진원 중국방면 | 1968 장췬 | 1968 전덕명 만주방면 | 1968 정서송 3·1 운동 | ||||||
| 1968 조지 애쉬모어 피치 | 1968 조창선 국내항일 | 1968 주석환 만주방면 | 1968 주칭란 | 1968 차병수 임시정부 | ||||||
| 1968 차희식 3·1 운동 | 1968 채세윤 만주방면 | 1968 채원개 광복군 | 1968 천리푸 | 1968 최규동 문화운동 | ||||||
| 1968 최도환 의병 | 1968 최세윤 의병 | 1968 최영걸 만주방면 | 1968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1968 한훈 의열투쟁 | ||||||
| 1968 한흥 만주방면 | 1968 홍원식 의병 | 1968 황병학 의병 | 1968 황줴 | 1968 황창오 국내항일 | ||||||
| 1969 세바스티안 우가르테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77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84명 | ||||||||
| 1977 쉐웨 | 1977 강상모 만주방면 | 1977 강진원 의병 | 1977 권기옥 중국방면 | 1977 김교헌 만주방면 | ||||||
| 1977 김대규 의병 | 1977 김동신 의병 | 1977 김성수 중국방면 | 1977 김순애 임시정부 | 1977 김승곤 광복군 | ||||||
| 1977 김약연 만주방면 | 1977 김용재 광복군 | 1977 김이직 만주방면 | 1977 김중건 만주방면 | 1977 김진만 국내항일 | ||||||
| 1977 (취소) | 1977 나태섭 광복군 | 1977 남궁억 문화운동 | 1977 남석인 의병 | 1977 노원섭 의병 | ||||||
| 1977 노응규 의병 | 1977 노임수 의병 | 1977 문상익 3·1 운동 | 1977 문창숙 만주방면 | 1977 민용호 의병 | ||||||
| 1977 박승길 만주방면 | 1977 박영준 광복군 | 1977 박영희 만주방면 | 1977 박인항 국내항일 | 1977 박춘실 의병 | ||||||
| 1977 서상용 만주방면 | 1977 서영석 3·1운동 | 1977 손양윤 만주방면 | 1977 송병순 계몽운동 | 1977 송주면 계몽운동 | ||||||
| 1977 신건식 임시정부 | 1977 신언성 만주방면 | 1977 안경근 임시정부 | 1977 안병무 임시정부 | 1977 양진여 의병 | ||||||
| 1977 염온동 임시정부 | 1977 오광심 광복군 | 1977 오성술 의병 | 1977 왕광연 3·1 운동 | 1977 원심창 중국방면 | ||||||
| 1977 유민식 만주방면 | 1977 유병기 의병 | 1977 유석현 중국방면 | 1977 유장렬 국내항일 | 1977 유지명 의병 | ||||||
| 1977 유해준 광복군 | 1977 윤병구 미주방면 | 1977 이강산 의병 | 1977 이강훈 중국방면 | 1977 이관석 만주방면 | ||||||
| 1977 이기손 의병 | 1977 이병채 의병 | 1977 이상정 임시정부 | 1977 이승길 계몽운동 | 1977 이우식 문화운동 | ||||||
| 1977 이원대 중국방면 | 1977 이재윤 의병 | 1977 이종건 광복군 | 1977 이종희 광복군 | 1977 이진영 광복군 | ||||||
| 1977 이형우 만주방면 | 1977 이화일 만주방면 | 1977 임용상 의병 | 1977 장한성 만주방면 | 1977 정용대 의병 | ||||||
| 1977 정운경 의병 | 1977 정춘서 의병 | 1977 조용하 미주방면 | 1977 조정인 의병 | 1977 차천모 만주방면 | ||||||
| 1977 채광묵 의병 | 1977 최욱영 의병 | 1977 최익형 계몽운동 | 1977 최중호 중국방면 | 1977 최해 만주방면 | ||||||
| 1977 한성수 광복군 | 1977 허빈 만주방면 | 1977 홍준옥 3·1 운동 | 1977 홍충희 만주방면 | 1977 황재운 3·1운동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80~1990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01명 | ||||
| 1980 강원형 계몽운동 | 1980 강인수 중국방면 | 1980 권인규 의병 | 1980 금달연 의병 | 1980 기우만 의병 | ||||||
| 1980 김대지 임시정부 | 1980 김봉원 만주방면 | 1980 김인전 임시정부 | 1980 김일두 임시정부 | 1980 마진 만주방면 | ||||||
| 1980 박문용 임시정부 | 1980 사도덕 | 1980 서종채 의병 | 1980 손영각 의병 | 1980 안무 만주방면 | ||||||
| 1980 양근환 일본방면 | 1980 양윤숙 의병 | 1980 오의선 임시정부 | 1980 왕주이 | 1980 이구연 임시정부 | ||||||
| 1980 이능권 의병 | 1980 이봉우 만주방면 | 1980 이종혁 만주방면 | 1980 임이걸 3·1 운동 | 1980 장석영 3·1 운동 | ||||||
| 1980 조훈 만주방면 | 1980 진치언 의병 | 1980 진희창 임시정부 | 1980 한봉근 중국방면 | 1980 한정만 의병 | ||||||
| 1982 김석황 임시정부 | 1982 김성숙 임시정부 | 1982 김영백 의병 | 1982 류인식 문화운동 | 1982 윤세주 중국방면 | ||||||
| 1982 윤인순 의병 | 1983 정현섭 중국방면 | 1983 조윤하 만주방면 | 1982 최창식 임시정부 | 1986 권석도 의병 | ||||||
| 1986 김갑 임시정부 | 1986 김영현 만주방면 | 1986 이명순 만주방면 | 1986 정순만 만주방면 | 1986 황준성 의병 | ||||||
| 1987 신언준 중국방면 | 1987 안정근 임시정부 | 1988 유동하 의열투쟁 | 1989 고창일 노령방면 | 1989 엄항섭 임시정부 | ||||||
| 1989 원세훈 중국방면 | 1990 강기덕 국내항일 | 1990 박봉석 의병 | 1990 서병희 의병 | 1990 손덕오 의병 | ||||||
| 1990 염인서 의병 | 1990 이은영 의병 | 1990 이충응 의병 | 1990 이필봉 의병 | 1990 이현 3·1 운동 | ||||||
| 1990 이황룡 의병 | 1990 이희룡 3·1 운동 | 1990 임하중 의병 | 1990 장인초 의병 | 1990 정기찬 의병 | ||||||
| 1990 정철화 의병 | 1990 조병두 의병 | 1990 지석용 3·1 운동 | 1990 최산흥 의병 | 1990 추삼만 의병 | ||||||
| 1990 김상덕 임시정부 | 1990 김의한 임시정부 | 1990 김일곤 중국방면 | 1990 김형빈 만주방면 | 1990 명제세 임시정부 | ||||||
| 1990 박건웅 임시정부 | 1990 오영선 임시정부 | 1990 윤해 만주방면 | 1990 이관직 만주방면 | 1990 이광민 만주방면 | ||||||
| 1990 이병화 만주방면 | 1990 이종건 만주방면 | 1990 장도빈 국내항일 | 1990 장철호 만주방면 | 1990 정인보 문화운동 | ||||||
| 1990 조지영 임시정부 | 1990 최이붕 중국방면 | 1990 김춘배 만주방면 | 1990 김치홍 의병 | 1990 박여성 의병 | ||||||
| 1990 박인호 3·1운동 | 1990 양경학 의병 | 1990 윤동주 학생운동 | 1990 이대극 의병 | 1990 이명서 만주방면 | ||||||
| 1990 이봉희 만주방면 | 1990 장일환 국내항일 | 1990 정기선 의병 | 1990 최동오 임시정부 | 1990 태양욱 의병 | ||||||
| 1990 한이경 국내항일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2~1995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14명 | ||||||||
| 1992 곽중규 임시정부 | 1992 김철남 임시정부 | 1992 이달 중국방면 | 1992 고평 만주방면 | 1992 손기혁 의병 | ||||||
| 1992 현정건 중국방면 | 1992 현정경 만주방면 | 1993 이철형 의병 | 1993 강기운 만주방면 | 1993 김태원 의병 | ||||||
| 1993 문석봉 의병 | 1993 박건병 중국방면 | 1993 박치화 만주방면 | 1993 이필희 의병 | 1993 이흥관 임시정부 | ||||||
| 1993 장두량 만주방면 | 1994 장봉한 만주방면 | 1994 천병림 중국방면 | 1994 민효식 의병 | 1995 강경선 중국방면 | ||||||
| 1995 강이봉 의병 | 1995 강제하 만주방면 | 1995 강진해 만주방면 | 1995 계봉우 임시정부 | 1995 권순명 의병 | ||||||
| 1995 권준 의병 | 1995 금기철 의병 | 1995 김강 만주방면 | 1995 김경운 의병 | 1995 김난섭 만주방면 | ||||||
| 1995 김덕순 의병 | 1995 김덕흥 의병 | 1995 김동수 의병 | 1995 김문희 임시정부 | 1995 김범이 의병 | ||||||
| 1995 김법린 국내항일 | 1995 김병조 중국방면 | 1995 김병태 의열투쟁 | 1995 김봉규 의병 | 1995 김선여 의병 | ||||||
| 1995 김성범 만주방면 | 1995 김수곡 의병 | 1995 김영란 국내항일 | 1995 김영렬 만주방면 | 1995 김용대 만주방면 | ||||||
| 1995 김원국 만주방면 | 1995 김원식 의병 | 1995 김율 의병 | 1995 김응백 의병 | 1995 김이섭 만주방면 | ||||||
| 1995 김일봉 만주방면 | 1995 김일원 의병 | 1995 김정원 의병 | 1995 김종철 의병 | 1995 김준택 만주방면 | ||||||
| 1995 김창균 만주방면 | 1995 김태연 중국방면 | 1995 김훈 만주방면 | 1995 나병삼 만주방면 | 1995 나시운 의병 | ||||||
| 1995 나정구 만주방면 | 1995 노을룡 중국방면 | 1995 노종균 중국방면 | 1995 문양목 미주방면 | 1995 문일평 중국방면 | ||||||
| 1995 박경순 임시정부 | 1995 박차정 중국방면 | 1995 성익현 중국방면 | 1995 송종익 미주방면 | 1995 송헌주 미주방면 | ||||||
| 1995 신석우 임시정부 | 1995 신창룡 의병 | 1995 신창현 의병 | 1995 안공근 임시정부 | 1995 안국형 만주방면 | ||||||
| 1995 안원규 미주방면 | 1995 안현경 미주방면 | 1995 엄주필 노령방면 | 1995 오상원 의병 | 1995 유광흘 만주방면 | ||||||
| 1995 유성삼 만주방면 | 1995 유일한 미주방면 | 1995 윤덕보 만주방면 | 1995 윤흥곤 의병 | 1995 이광복 중국방면 | ||||||
| 1995 이교영 의병 | 1995 이대위 미주방면 | 1995 이덕삼 중국방면 | 1995 이범직 의병 | 1995 이병진 만주방면 | ||||||
| 1995 이석이 의병 | 1995 이영준 중국방면 | 1995 이인금 의병 | 1995 이중봉 의병 | 1995 이희삼 만주방면 | ||||||
| 1995 임병극 만주방면 | 1995 전학수 만주방면 | 1995 정봉준 의병 | 1995 정원집 의병 | 1995 조창룡 만주방면 | ||||||
| 1995 조화선 만주방면 | 1995 천세헌 미주방면 | 1995 최성천 의병 | 1995 최익룡 만주방면 | 1995 최일엽 만주방면 | ||||||
| 1995 최진하 미주방면 | 1995 최천유 의병 | 1995 한시대 미주방면 | 1995 허근 만주방면 | 1995 홍석호 만주방면 | ||||||
| 1995 홍언 미주방면 | 1995 홍학순 만주방면 | 1995 황봉신 의병 | 1995 황봉운 의병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6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73명 | |||||
| 1996 강윤희 의병 | 1996 김치보 노령방면 | 1996 이중집 만주방면 | 1996 장명도 만주방면 | 1996 추푸청 | ||||||
| 1996 남공선 만주방면 | 1996 안광조 의병 | 1996 엄해윤 의병 | 1996 윤상열 3·1 운동 | 1996 정인국 의병 | ||||||
| 1996 최봉준 노령방면 | 1996 최영호 만주방면 | 1997 김호 미주방면 | 1997 백일규 미주방면 | 1997 임성우 미주방면 | ||||||
| 1997 조병요 미주방면 | 1998 김용성 미주방면 | 1998 김찬수 만주방면 | 1998 박사화 의병 | 1998 심용준 만주방면 | ||||||
| 1998 차천리 만주방면 | 1999 신우여 노령방면 | 1999 후쭝난 | 2000 이호원 만주방면 | 2000 이성화 의병 | ||||||
| 2001 김학무 중국방면 | 2002 김규면 노령방면 | 2002 신현규 국내항일 | 2002 채영 노령방면 | 2003 이필상 의병 | ||||||
| 2004 윤자영 중국방면 | 2005 권오설 국내항일 | 2005 조동호 국내항일 | 2005 김철수 국내항일 | 2005 김태연 국내항일 | ||||||
| 2005 김한 중국방면 | 2005 정헌태 국내항일 | 2005 최윤구 만주방면 | 2005 한위건 중국방면 | 2006 고지형 3·1운동 | ||||||
| 2006 박영 만주방면 | 2006 이재유 국내항일 | 2006 이민환 노령방면 | 2006 한봉철 만주방면 | 2007 이자해 중국방면 | ||||||
| 2007 전일 노령방면 | 2008 유기석 중국방면 | 2008 이춘숙 임시정부 | 2009 장기초 만주방면 | 2009 길선주 3·1 운동 | ||||||
| 2009 이운혁 국내항일 | 2010 이경호 국내항일 | 2010 김창헌 만주방면 | 2010 김호 만주방면 | 2010 신광삼 만주방면 | ||||||
| 2010 유찬희 만주방면 | 2010 임기홍 만주방면 | 2010 이웅해 만주방면 | 2011 강영소 미주방면 | 2011 유상돈 노령방면 | ||||||
| 2012 임성섭 국내항일 | 2013 박창철 만주방면 | 2014 프레더릭 매켄지 | 2014 백남준 만주방면 | 2014 송중직 국내항일 | ||||||
| 2014 이진산 중국방면 | 2015 강익록 국내항일 | 2015 전병현 임시정부 | 2017 조응순 만주방면 | 2019 이봉구 3·1 운동 | ||||||
| 2020 이영쇠 3·1운동 | 2025 김창준 만주방면 | 2025 제랄딘 T. 피치 | }}}}}}}}}}}} | |||||||
| [A] 허위 공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B] 친일 행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 }}}■ : 독립유공자 ■ : 기타 공훈}}}}}}}}} | |||||||||
[1]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의 정확하게 중간에 있다.[2] 1914년 2월 22일 출생 2015년 1월 14일 사망. UC 버클리를 졸업한 워싱턴 D.C. 공립 도서관의 음악 사서로, 미 해군 사령관인 제임스 토마스 레이와 결혼했다.[3] 1915년 2월 17일 출생 2002년 1월 2일 사망.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 당시의 미 해군의 잠수함 사령관이었다. 이후 해군십자장와 세 개의 은성훈장을 받았다.[4] 1919년 출생 2003년 사망. 소련 경제 전문가였다.[5] 1931년 출생 2006년 2월 27일 사망. 캘리포니아 도미니카 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였다.[6] 영어권 국가에서는 전통적으로 배나 전차 등의 무기류나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교통수단을 여성 명사로 취급한다.[7] Powder는 여성들이 치장할 때 쓰는 파우더와, 화기들이 쓰는 화약을 동시에 칭하기도 한다. 또 화장실을 'Powder Room'이라고도 부르는데 역시 같은 의미이다. 약간 긴 버전으로, 미 해군에서 자주 쓰이던 옛 관용구는 다음과 같다. "배가 여성형인 이유는, 주변이 늘 붐벼서 남자들 무리가 들끓고, waist(허리, 선체 중앙)와 stay(코르셋, 선박의 고정용 줄)가 있으며, 이쁘게 보이려면 페인트칠을 꽤나 해야 하고, 첫 비용보다 유지비가 더 비싸게 먹히며, 잘 빠졌고(decked out, 출항하다/쫙 빼입다), 제대로 다루러면 경험 많은 남자가 필요하고, 키를 잡는 남자가 없으면 완전 통제불능이기 때문이다. 위쪽은 노출하고 아래쪽은 가리며, 항구로 들어올 때는 부표 쪽을 향한다(부표는 남근 모양이므로 성관계를 의미한다)."[8] 사실 홀시 제독의 능력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는 스스로 해군 조종사 자격을 딸 정도로 일본군 제독들이나 기타 미군 함대 사령관들에 비해서 항공모함 작전에 대한 이해와 열정이 높았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태평양 전쟁의 핵심 함대 사령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그는 자신과 관련된 변호를 하느라 과거 동료였던 사람 다수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당시 행동을 해명하면서 애먼 동료들을 함부로 언급해 자신을 변호하는 등 무례한 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홀시의 행동들은 정상참작이 되지만 당시 스스로를 변호하며 홀시가 소인배적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홀시는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괜찮은 전투력을 보여줬으나 후반부에 태풍 사건, 즈이카쿠 추격 사건, 전보를 받고 하급자 앞에서 엉엉 울부짖고 쌍욕한 사건 등 명성에 걸맞지 않은 미흡한 모습들을 보였다. 특히 태풍 사건은 킹과 니미츠가 쉴드쳐주지 않았으면 퇴역할 수도 있었다. 5성 제독 임명도 국회의원 인맥이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홀시의 이미지는 언론 및 할리우드 등에서 부풀려진 점이 크다면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9] 홀시가 전쟁 말기 여러 차례 초대형 실책을 저질렀지만, 니미츠는 그를 옹호했다. 다만 니미츠는 홀시가 "천황의 백마를 타고 도쿄 거리를 지나가겠다."라고 말하자 보직해임까지 언급하며 경고하는 등 항상 옹호하지는 않았다. 니미츠와 홀시의 관계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하술할 전보 사건도 그랬다. 홀시는 전보를 받자마자 쌍욕하며 울부짖었는데 뭔가 낌새를 챘을 수 있다. 만약 알려진 사실대로 명백한 실수였다면 홀시가 그렇게 분개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들이 같이 찍은 사진도 다소 석연챦다. 대체로 홀시는 거침없고 니미츠는 어색한 느낌이다. 물론 이걸로 이들 사이가 좋았을지 추정하긴 어렵다. 니미츠의 부인이 향후 논란이 될 문서를 모두 소각했기에 진실은 니미츠 본인만 알 것이다. ###[10] 이외에 미국-스페인 전쟁의 영웅 조지 듀이 대원수도 있긴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듀이 역시 5성 계급을 단 적은 없다.[11] 참고로 이 곳은 한때 텍사스의 독일인 밀집 지역이었던 도시로, 개척민들의 대다수가 독일 혈통이었다. 게다가 이때까지는 독일어도 널리 쓰였는데, '텍사스 독일어'라는 방언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체스터 니미츠 역시 텍사스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지금은 대다수가 노년층인 몇 천명의 사용자 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Fredericksburg라는 철자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해당 도시 자체도 독일인이 정착해서 세운 곳이다.[12] 이제는 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에서 가장 많은 혈통을 차지하는 계통은 의외로 영국계가 아니라 독일계다. # 공교롭게도 2차 대전에서 미국 육군을 대표하는 장군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미국 해군을 대표하는 제독인 체스터 니미츠가 모두 독일 혈통이었던 셈.[13] 반대로 같은 시기에 육군 원수가 된 아이젠하워는 원래 해군으로 입대하려고 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떨어져서 대신 웨스트포인트에서 군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14] 니미츠는 화장실에 유머책을 상비해 놓고 보았고 니미츠의 유품 중에 여러 모로 공부한 흔적이 있는 너덜너덜한 유머책이 있었다고 한다.[15] 스스로 정치에 소질이 없다 느꼈거나 정치인들의 이전투구가 싫은 탓에 그 정도로 만족했을 수 있다.[16] 미 해군 최연소 구축함 함장이었으며, 심지어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마찬가지로 2차 대전 당시의 쟁쟁한 제독들인 윌리엄 홀시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30대 전후에 처음으로 구축함 함장을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거다.[17] 이 일은 본인에게 추억이 된 듯 훗날 원수가 되었을 때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도 장성으로 진급한 전례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웃음 짓기도 했다.[18] 부슈-슐처 브라더스 디젤 엔진 컴퍼니(Busch - Sulzer Brothers Diesel Engine Compnay) 사에서 5년 계약 연봉 2만 5000달러짜리 일자리를 제의하였는데도 "고맙지만 해군을 떠날 생각은 없다" 며 거부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3,456달러였고 그 무렵 2만 5천 달러가 현재 가치로 따지만 50만 달러를 휠씬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19] 원래 잠수함 도크는 건설 자재 배정 자체가 안 되어 있던 것을 니미츠가 부여받은 권한으로 본토에서 징발하여 끌고 온 거다. 즉 거의 니미츠가 다 한 것이다.[20] 그 직전에는 워싱턴 해군 본부의 항해국장을 맡아 해군 인사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21] 단, 그와 면식이 있던 교수 하나는 그를 알아보고 니미츠 제독이 여기 탔다고 떠들고 다녔다.[22] 이건 전임자인 허즈번드 킴멜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킴멜 역시 소장이었다가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이 되면서 대장으로 진급했고, 이후 경질되면서 소장으로 돌아갔다. 킴멜과 니미츠의 차이점이라면, 킴멜은 말 그대로 임시 대장이었기에 혹시라도 자리에서 물러나면 다시 소장이 되지만, 니미츠는 정식 대장으로 진급했다는 점이다.[23] 이때 니미츠의 태평양 함대는 항모 기동함대를 앞세워 일본군의 태평양 점령지를 치고 빠지는 형식으로 괴롭혔고 이 전략은 일본군의 신경을 충분히 자극했다. 1942년 3월 초에 이르러서는 대본영에 니미츠의 기동함대를 처리해달라고 현장 지휘관들의 분노에 찬 보고가 올라왔다고 한다.[24] 당시 홀시 제독의 실책은 하술할 레이테 만 해전의 Bull's Run보다 더 심할 정도로 미 해군에 실제 큰 함정 손실, 천단위의 해군 사상자를 발생시켰기에 당장 옷을 벗거나 사령관직에서 짤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위기였다. 그러나 홀시가 과거 베푼 은혜를 갚는 차원도 있거니와 스프루언스를 제외하면 홀시보다 유능한 제독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했기에 그를 잔류시켰을 수 있다. 니미츠 제독의 성격상 무능자는 조용히 타 부처로 전출되는 게 일상이었다.[25] 미국에서는 이 일이 단순 실수가 아닌 니미츠 제독의 따끔한 질책성 경고가 아니냐는 소수 의견도 있다. 허나 홀시의 참모장이 어이없어하며 홀시에게 '시발 진정좀 하세요' 라는 투로 말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신빙성은 적다.[26] TURKEY TROTS WATER(칠면조가 물가로 뛰어든다)와 THE WORLD WONDERS(세계가 궁금해한다). 이중 뒷 문구가 일을 냈다.[27] 중령 때 맡은 잠수함 전대장 시절이나 대령 때 맡은 순양함 오거스타함의 함장시절 모두 니미츠는 부하 장교~수병까지 열심히 자기 업무에 몰두하게 유도했고 이는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 때도 이어졌다. 당시 니미츠 제독보다 이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시다.[28] 당시 미 태평양 함대는 항모 렉싱턴 호를 잃고 요크타운 호가 중파되는 대신 소형 항모 쇼호를 격침하고 즈이카쿠와 쇼카쿠를 중파시키는 전과를 거뒀다. 손실은 미군이 좀 더 컸지만 일본군이 포트모르즈비 상륙을 포기하고 철수함으로써 전략적인 승리는 미군이 거둔 셈이 되었다.[29] 해군과 해병대가 가장 힘든 전투를 수행하며 승리를 거두고 나면, 스포트라이트는 육군이 다 가져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이가 챙겨간 격으로 생각될 수 있으니 그 짜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니미츠가 맥아더를 썩 좋아하진 않은 듯하다. 사실 맥아더는 워낙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좋기는 힘들었다.[30] 맥아더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모든 전투부대를 대표하게 된다면, 니미츠가 미국을 대표해야 하고 항복문서 조인식은 해군 전투함 함상에서 치러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이에 따라 윌리엄 홀시가 기함으로 사용하던 USS 미주리 함상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31] 일단 임기부터 기존의 4년이 아닌 2년이었고, 대통령을 만나려면 해군 장관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32]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포레스탈과 전쟁 중에 군정업무로 갈등이 좀 있어서(포레스탈이 친구를 임관해 달라고 인사청탁을 넣었는데 그는 전과가 있는 등 여러모로 부적합한 인물이었기에 니미츠가 거절했다. 이로 인해 서로 사이가 껄끄러웠다.) 포레스탈이 니미츠의 참모총장 임명 추천을 주저했으나 전임총장이었던 킹 제독과 니미츠를 후원했던 여러 정치인들의 지지, 총장 권한 일부의 포기(이것은 전임자였던 킹 제독이 워낙 강력한 전시권한으로 해군장관을 유명무실하게 해서 그런 것 같다.) 등으로 추천을 받는다.[33] 해군 장관은 민간인 출신이 될 때도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니미츠가 정치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34] 이 책은 7개 국가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어째 국가마다 제목이 다르다.[35] 다음 전쟁 때 각자의 전략적 역할을 정하기 위한 싸움+그를 위한 예산 다툼.[36] 하지만 공군의 홍보가 워낙 뛰어나서 뒤에 이 힘을 상당수 까먹는다.[37] 지금도 Nimitz House라고 보존되어 있다.[38] 전후 작전 상의 문제 및 지휘권 다툼으로 많은 장군들과 제독들이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각자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함으로서 논쟁을 야기시켰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사이판에서 지지부진한 진격으로 해병대사령관에게 해임당한 육군 장성 스미스 소장 등이 있다. 물론 그 육군 장군 스미스를 해임한 해병 장군 스미스 중장도 회고록을 내서 자신이 육군의 모든 분노를 떠안도록 니미츠 제독의 해군에게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홀시 역시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레이테에서의 지휘로 전후 새뮤얼 모리슨이 주도해 작성한 미 해군 공간사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는 곤욕을 치른다.[39] 역자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소설가 허만 우크의 Winds of War가 이 전기를 대단히 많이 참조했다.[40] 제독들이 정치가에게 과도하게 종속되었다고 생각했다.[41] 과거에는 독일어에서의 z를 '쯔'라고도 썼기 때문에 '니미쯔'는 독일어 Nimitz의 번역으로 가능한 표기이다. 슈바르쯔→슈바르츠(Schwarz), 쯔바이→츠바이(Zwei) 등. '니미쓰' 또는 '니밋쓰'라고 쓴 경우는 일어 표기인 ニミッツ의 중역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김홍래가 번역한 국내 니미츠 평전을 보면 니미츠가 해군 자원자를 불합격시킨 가정의 어머니가 "니미츠란 이름을 가진 외국놈이 우리 건강한 아들을 퇴짜보냈어요!"라고 항의편지를 쓴 일화가 나온다.[42] 문서 상단 초상화에서 청백색의 무늬 없는 약장이 바로 해안경비대 인명 구조장 은장(Silver Lifesaving Medal)이다. 니미츠는 1912년 물에 빠진 수병 1명을 자진하여 뛰어들어 구함으로써 해당 훈장을 수훈하였다. 인명 구조장의 경우 수훈 기준이 명예훈장에 준할 정도로 까다로워서 1874년 훈장이 제정된 이래 금장의 경우 겨우 600여 명, 은장의 경우 겨우 1,900여 명이 수훈하였다. 니미츠가 평생의 자랑거리로 패용하고 다닐만한 훈장이다. 현재는 리본 디자인이 바뀌었다.[43] 오거스타 함, 대령.[44] 항상 군대는 하급자가 상급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금기시 된다.[45] E. B. 포터 저, 김주식 역, 『태평양 전쟁, 맥아더, 그러나 니미츠』 (서울: 신서원, 1998), pp.324-325., #[46] 머피는 스프루언스가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지휘계통상으로 보건, 잠수함 지휘 경력으로 보건 USS 탬버의 보고 내용 및 시점이 내포한 의미를 파악하고 분통을 터뜨리며 귀항 즉시 책임을 물은 것은 니미츠라는 게 역사가들의 중론이다(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이승훈 역,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 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서울: 일조각, 2019), p.517). 머피는 다시는 잠수함장을 맡지도, 태평양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그는 지중해로 전출돼 전차상륙함(LST) 함장과 LST 전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머피는 이곳에서 능력을 발휘해 전후 제독까지 진급, 1955년 소장으로 전역했다.# 사실 2010년대에 이 사건을 면밀히 분석한 파셜과 이승훈, 털리는 머피의 행동이 소극적이긴 했지만 전투 결과를 크게 바꿀 정도는 아니었고,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순간에 있던 니미츠가 과민반응한 것에 가깝다고 결론내렸다.[47] 그 당시 잠수함은 조함이 까다로워 사고가 꽤 발생했다.[48] 미국에서는 홀시가 능력보다 인맥, 언플, 자기관리, 이미지 메이킹 등에 능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불패의 제독 스프루언스도 못 얻은 5성 제독을 어떻게 달았는지 모르겠다는 평이다. 다만 전쟁은 팀으로 일하는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친화력도 좋고 레이테 만 해전 등에서 증명됐듯 전투력도 단단한 홀시가 5성 제독을 단 것은 당연하다. 유인책에 속아 즈이카쿠를 맹추격했던 점이나, 약 800명의 수병을 태풍에 돌격시켜 죽게 만든 점, 니미츠의 전보를 받고 울면서 악을 쓰는 등 다소 미숙한 모습도 그는 인맥관리와 친목으로 극복했다.[49] 당시 조선과 명나라가 합세해 일본과 맞섰기에 "연합군 함대"라고 칭한 것이다. 정작 부산포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투했지만.[50] 1944년 10월 10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인용.#[51] 1900년대 전후에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실제 해군사관학교 졸업일은 1905년 1월 30일.[52] 美해군의 소령은 사실상 정모 챙에 월계수를 부착하지 않는다. 즉, 사실상 위관급인 셈.[53]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중장을 건너뛰고 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