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손영각(孫永珏) |
자 / 호 | 내숙(迺叔) / 낙산(樂山) |
본관 | 경주 손씨 |
생몰 | 1855년 4월 9일 ~ 1907년 9월 1일 |
출생지 | 경상도 안강현 양동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1]# |
사망지 |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영각은 1855년 4월 9일 경상도 안강현 양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아버지 손종건(孫鍾健)과 어머니 여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76년 개항된 후 경주부 죽장면 답곡(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지동리 논골)로 이주하였다.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정용기,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등과 의기투합하여 거사 계획을 정했다. 그들은 먼저 민중들에게 알기 쉬운 권세가(勸世歌) 등의 노래를 지어 돌려서 애국정신을 일깨웠으며, 한편으로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각계 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할 것을 권고했다. 그는 정용기, 이한구, 정순기와 더불어 영천의 의진 본부에서 모든 일을 계획 및 지도했고,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夏)·이창송(李蒼松) 등은 각 지방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계획 진행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영천을 중심으로 영남 지방 전체에 걸쳐 의병들이 몰려들었고, 의진의 이름은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으로 정했다. 1906년 3월, 손영각은 동지들과 함께 대장에 정용기를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3월 5일 행군을 시작한 의병대는 동해 쪽의 여러 고을을 치고 영해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던 신돌석 의병대와 연합해 관동 지방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4월 218일 정용기가 부친 정환직이 경주에서 체포되었다는 거짓 소식을 듣고 경주로 갔다가 경주진위대에게 체포되자, 산남창의진은 와해되었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발표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정용기는 재차 의병을 일으켰고 손영각 역시 여기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의병대에 종군하며 참모장으로서 의진의 작전을 수립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8월 29일, 정용기는 관동으로의 북상 및 각지의 의병대와의 연락을 위해 의병들을 경상북도 각지에 파견한 뒤, 자신은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에서 이동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입암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손영각과 의논한 뒤 9월 1일 새벽에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매복했다. 그러나 도중에 정보가 누설되고 말았고, 일본군은 매복한 산남의진을 역으로 급습했다. 손영각은 끝까지 맞서 싸웠으나 끝내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좌영장 권규섭 등과 함께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손영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